송진 시인은 이 시집을 읽고 “시를 읽다 보면 너무 아름다워 쉬이 잠들 수가 없다”고 했는데 빈말이 아니었다. 서사와 서정, 기억과 감성이 잘 어우러져 문장에 녹아 있었다.

그곳에는

도둑맞은 손틀소리

적벽가 울음소리

구들장 무너지게

한숨짓던 외증조모 닮은

작은 목단 사는

그곳에는

문짝 떨어진 시렁 벽

납작한 옷 보따리 숨겨두고

면장 집

말라가는 무 시래기 널려 있던 담장

보리쌀 안치는 새벽까지

끝내 넘지 못한

그곳에는

냇가 널찍한 바위

온종일 하얀 서답 말리던

굽은 허리

외증조모 신문지 말아 피우시던

잎담배 연기 같은 목단 꽃잎이

어린이집 지나다니는

그곳에는

-김섶 시인의 ‘옥수역에는 목단꽃이 산다’ 전문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시인이 외증조모가 살던 서울 옥수동에 대한 추억을 꺼냈는데 마치 안개가 자욱한 회화처럼 시가 그려져 있다. 손틀소리, 적벽가, 한숨, 시렁, 옷 보따리, 무시래기, 담장, 부엌, 서답(빨래의 거제도 지역어), 목단 꽃잎 담배가 연상하는 이미지가 연결돼 한폭의 그림이 되고 회화시가 되었다. 도회적인 회화시가 아니다.

시인은 그림 그리는 화가 같은데 사범대학에서 음악교육과를 졸업해 음악 선생님으로 중고등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어린 시절 기억이 담긴 ‘영도’라는 시도 아름답다.

아부지와 길순이가 찐빵을 팔던

전차 종점

우둑해지면

은성 선술집 골목 외상 탁주 냄새

고등어 비린내

덕지덕지 얹혀있던 지붕

쪽머리 짙은 화장 방울소리

검은 연필심 침 묻혀

보랏빛 먼동 틀 때까지

화학책 읽던 흐린 백열등

웅크린 비둘기 같은 등

몇 년째 소식 없는 화투장

명함 한 박스 남기고

퇴직한

쪽배 선장 닮은 섬

한문 수놓인 사기그릇

한 사발씩

새벽을 마신다

-김섶 시인의 ‘영도’ 전문

‘몇 년째 소식 없는 화투장’이란 행 앞에서 생각에 잠긴다. 다음 연이 ‘명함 한 박스 남기고/ 퇴직한/ 쪽배 선장 닮은 섬’이다. 화투장=명함 한 박스=쪽배 닮은 섬과 다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집어 무얼 말하는지 시인만이 알겠지만 이미지가 전하는 그림의 색채는 독자마다 다를 것 같다.

허향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천년의 시작)

허향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천년의 시작)를 읽었다. 시집을 통틀어 어떤 감정의 흐름과 쓸림, 쏠림을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은 대개 높낮이는 달라도 절제를 거쳐서 흘러나오는데 이 감정이 시로 형상화되면서 의미의 망(罔)을 지니고 있다. 결이 곱고 다듬어 정제(整齊)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폭발할 것만 같은 격정의 ‘무언가’와 끊임없이 대결하며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시집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시간이 세월이 흘렀는데도 시인은 그 아픈 사랑에서, 진한 연민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나 자유롭길 거부하는 듯 보인다.

슬픔이 흘러왔다

흐리게 두었다

분노가 돋아났다

돋게 두었다

기쁨이 엎질러졌다

그냥 두었다

현요함이 날아들었다

번지게 두었다

감정의 숲에

봄날의 오후 같은

천진이 피었다

난만하게 두었다

-허향숙 시인의 ‘무애를 살다’ 전문

무애(無碍)는 막히거나 거치는 것이 없음을 뜻하는 말이긴 한데 이 시에 자주 등장하는 동사(動詞) ‘두었다’를 의미하는 듯하다. 관여하되 관여하지 않고, 내 것이되 내 것이라 집착하지 않으며, 떠나보내야 하나 머무르도록 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런 무애의 마음은 고통스럽지만 고통 너머에 있는 영적인 호소로 느껴진다.

비의 비상은 떨어짐이다

떨어져

꽃을 피우는 일이다

변곡과 변속의 시간들

여인에서 아내로,

엄마로, 망자의 어미로,

시인으로

설렘과 기쁨과 한탄과 설움과

그리움의 시간들

날아오른 기억보다

엎어진 기억이 더 많은

떨어져 깨지고 나서야 피는

순간의 꽃

비는 견자처럼

아래로 아래로 비상한다

-허향숙 시인의 ‘비의 비상’ 전문

충남 당신 출생의 허향숙 시인은 2018년 계간 《시작》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그리움의 총량》이 있고 전자 소시집 《슬픔은 늙지 않는다》가 있다.

남길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한밤의 트램펄린》(창비)

남길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한밤의 트램펄린》(창비)에는 사람과 생명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서사적인 삶을 시적으로 축약한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이 시를 다듬는 시인의 솜씨가 놀랍다. 오래도록 가까이 읽고 싶은 시집이다.

복희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개가 일어선다

개가 걷고

소녀가 따라 걷는다

호수 건너에서 오는 물이랑이 한겹씩 결로 다가와

기슭에 닿고 있다

호숫가를 한바퀴 도는 동안

내 걸음이 빠른 건지 그들과 만나는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는데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먼저 지나가라고 멈춰 서서

개를 가만히 쓸어주고 있다

희미한 달이 떠 있다

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 없다

-남길순 시인의 ‘복희’ 전문

당숙은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린아이에게도 말을 조리 있게 하여 궁금증을 풀어주셨다

당숙이 오시면 구례가 오고

묵직한 어떤 사건이 뒤따라오는 것이다

아이는 알았다

구례에는 지리산이 있다는 걸

그 산은 검은빛을 띤 곰처럼 앉아 있다가

흰 눈 맞은 호랑이의 능선으로

변한다는 것도 알았다

한밤중에 깨어나면 당숙이 묵어가는 사랑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여수에서 구례까지 철로 위를 달린다

한 사람이 가는 일은

기적 소리를 앞세우고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구례구역은 평온하다

아무 일 없이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

죄라고는 큰 산 아래 산 죄밖에 없다며

모질게 참아온 눈꼬리들 축축하다

죽은 당숙의 귀가

아직 열려 있을 것 같은데

어디서 스무발이나 서른발쯤

총소리가 들려온다

흰 벽에 걸려 있던 검은 폴라티가

축 늘어진다

-남길순 시인의 ‘구례’ 전문

시 ‘복희’는 맹인견 이야기 같은데 한 폭의 수채화처럼 정적이고 고요하다. ‘구례’는 여순사건 이야기 같기도 하고 6.25 당시의 이야기 같기도 한 시인의 당숙 이야기는 사사적인 비극을 담고 있다. 한국사의 비극이 형상화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시인은 2012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분홍의 시작》, 합동시집 《시인-Q》 등이 있다.

배동욱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저 무수한 빛 가운데 빛으로》(작가마을)

배동욱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저 무수한 빛 가운데 빛으로》(작가마을)는 견자(見者)의 시다. “‘낯익은’과 ‘낯선’ 풍경의 ‘중간’에 시인이 서 있다. 시인의 독특한 시선이나 행위, 사색에 의해 생겨난 중간지대는 이쪽과 저쪽을 함께 아우르는 폭넓은 세계를 지향한다.” (김정수 시인)

가로수와 전봇대 사이

우두커니 선

우연한 풍경

닮는 줄 모르게 닮아가는

저 고요한 퇴색

내 곁의 우연한 내가 나에게

인사를 건넬 때마다

함꼐 퇴색해가는 거리

우리들 뒤로

밤이가고 낮이 오고

지나온 길

앞에 놓인 길

우연히 세상에 온 것들 모두

마주 보며 닮아간다

밤낮없이 뿌리를 갉아먹히며

간지러워라 간지러워라

엎어지며 닮아간다

-배동욱 시인의 ‘거리에서’ 전문

이쪽 저쪽의 중간지대라 했지만 그 세계는 공간의 개념보다는 시간(기억)과 삶의 가치, 시적 방향에 더 가깝다. 김정수 시인에 따르면, ‘낯익은’ 풍경은 삶의 뒤쪽에, ‘낯선’ 풍경은 앞에 놓여 있는데 시인은 양쪽을 조망하는 자리에서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 삶과 죽음 등 다채롭고 농밀한 시적 세계를 구축한다.

밤낮 같이 숨을 쉬고 같이 일을 해도

이 도시의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니다

눈길이 닿는 것들을

내 것이라 우기고 싶다가도

어림없는 생떼인 줄 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가는데

내가 나를 가질 수도 없어

언젠가는 앗기고야 말 시간들만

별처럼 깜빡일 뿐

내가 내 것이 아니므로 외로운 줄을

이제야 안다

-배동욱 시인의 ‘타인(他人)의 세상’ 전문

시인 배동욱은 1970년대 청암문학회, 복현문우회, 시얼, 80년대 후반부터는 다듬시, 시인촌 동인 등으로 활동했다. 계간 《한국작가》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문학단체에 참여하지 않고 시작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경기신인문학상, 시인촌 문학상을 수상했다. 첫 시집으로 《아르고스, 눈을 감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