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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 죽산 조봉암, ‘독립유공자’로 서훈 검토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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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친북논란이나 문서조작이 있는 ‘가짜 유공자’의 서훈을 박탈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가운데,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지난 7월 3일 “가짜 독립유공자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박 장관은 이날 페이스북 글에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설이 아니라 북한 김일성 정권 만드는 데 또는 공산주의 혁명에 혈안이었거나 기여한 사람을 독립유공자로 받아들일 대한민국 국민이 누가 있겠냐”면서 “이는 자유 대한민국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보훈부는 손혜원 전 민주당 의원의 부친, 김원웅 전 광복회장의 부친 등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재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보훈부는 “공과(功過)가 함께 있는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도 정책연구와 토론회 등을 거쳐 재평가 방안이 있는지 찾아볼 계획”이라며 그간 저평가된 인사나 단체의 공적은 국민 눈높이에 맞춰 재평가를 추진한다. 보훈부는 재검증 대상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초대 농림부 장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죽산 조봉암(1898~1959), 구한말 문신이자 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1846~1922) 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조봉암의 유족들은 과거 정부에서 고인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는 요청을 세 차례 했었다. 그러나 친일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0년 1월 매일신보에 실린 ‘인천부 본정 내외미곡직수입 성관사 조봉암 방원영’이라는 광고와 이듬해 12월 같은 신문에 실린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는 휼병금(장병 위로금) 150원을 냈다’는 내용의 기사가 친일의 근거였다. 


항일운동가인 조봉암은 3·1운동 등에 참여하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했다. 하지만 초대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 제헌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지냈다. 광복 이후에는 북한의 공산주의 노선을 비판했다. 그러다 1958년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간첩죄 등으로 기소됐다. 그는 2심과 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형이 집행되면서 형장의 이슬이 됐다. 죽산의 죽음은 우리나라 헌정사상 첫 사법 살인으로 기록됐다. 


기자는 2007년 10월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 여사를 만났다. 그해 9월 2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1959년 7월 31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사형당한 조봉암과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구제 및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 직후였다. 당시 조 여사는 “지난 추석 때 망우리에 있는 아버지 묘소에 가서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군요. 아버지께서 근심을 잊고 편안히 눈을 감으실 것 같아요”라고 했다. 


한편,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 여사는 지난해 10월 26일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조 여사는 1928년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던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신의주 감옥으로 압송된 다음 해인 1933년 귀국했다. 인천 박문여학교와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6·25전쟁 중 국회부의장이던 아버지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1959년 사형 선고로 사법 살인의 희생양이 된 아버지의 복권을 위해 평생을 애썼다. 1991년 이모부인 윤길중 의원이 죽산 사면 복권에 관한 청원을 제출한 후, 20년 만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재심을 거쳐 조 선생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고 조호정 여사의 사위 유수현 영화감독은 “정부에서 죽산의 서훈을 뒤늦게나마 검토하는 것은 다행스럽고도 반가운 일”이라고 했다. 월간조선 2007년 11월호에 실린 조호정 여사의 인터뷰 ‘현대사 증언-조봉암 장녀 조호정 여사의 아버지 신원을 위한 48년 투쟁’ 기사 전문을 링크와 함께 소개한다.◎

 


 

[현대사 증언] 曺奉岩 장녀 조호정 女史의 아버지 伸寃을 위한 48년 투쟁

나의 아버지 竹山 曺奉岩

 

  『아버지는「사이고 다카모리」를 좋아하고「춘향전」보면서 눈물 흘린 情많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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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정·80 여사는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竹山 曺奉岩(죽산 조봉암)의 장녀다. 조호정 여사는 지난 48년간 아버지의 伸寃(신원)을 위해 헌신했다. 1950년 이화女大 영문과를 졸업하고, 아버지 曺奉岩의 비서로 일했던 서른두 살의 조호정은 팔순 노파가 됐다. 조호정 여사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서 딸 李聖蘭(이성란)씨 부부와 살고 있다.

 

 

지난 9월2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委)」(위원장 송기인)는 1959년 7월31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사형당한 曺奉岩과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구제 및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진실화해委는 진보당 사건을 이렇게 규정했다.

 

『1956년 大選에서 200만 표 이상을 얻어 李承晩(이승만) 정권에 위협적 정치인으로 부상한 曺奉岩을 제거하려는 정권의 의도가 작용해 처형에 이르게 한 非인도적·反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이었다』

 

진실화해委는 국가의 사과와 적절한 조치 외에 曺奉岩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것을 함께 권고했다.

 

조호정 여사는 「아버지」란 말만 나오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추석 때 망우리에 있는 아버지 묘소에 가서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살다 보니 이런날이 오는군요. 아버지께서 근심을 잊고 편안히 눈을 감으실 것 같아요.

 

제가 32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때 납북돼서 사촌오빠 부부와 제가 옥바라지를 해야 했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경찰들이 집에 상주하면서 남편(李奉來 前 예총회장)을 감시했지요』

 

조호정 여사는 竹山 曺奉岩에 대한 재심을 오는 10월 말쯤 서울중앙지법에 청구할 계획이다.

 

 

기쁨이 곧 절망으로

 

1958년 10월 서울고법 재판장에서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조봉암(맨 왼쪽).
조호정 여사는 1959년 2월27일 『지금으로부터 진보당 사건에 대한 판결을 언도한다』는 주심 金甲洙(김갑수) 대법관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고 했다.

 

『그날 따라 金대법관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었습니다. 1시간이 지났지만 판결문의 절반을 읽지 않은 상태였어요. 약 1시간 30분이 지나자 판결의 방향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은 헌법위반이 아니다. 평화통일에 대한 주장 역시 언론 자유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없다」는 요지가 낭독되고 있을 때 피고인과 변호인들의 얼굴은 활짝 밝아졌어요. 曺圭澤(조규택) 등 젊은 피고인 몇 사람은 손수건을 꺼내 기쁨에 넘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어요』

 

바로 그 순간 『曺奉岩은 괴뢰의 지령을 받고…』라는 간첩사실에 대한 증거 설명이 시작됐다. 오후 1시50분 金대법관은 판결 주문을 읽어 내려갔다.

 

『피고인 김정학·梁明山·李東賢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고인에 대한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 曺奉岩은 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全世龍·李相斗는 각 징역 2년에 처한다』

 

조호정 여사는 『李承晩 정권은 진보당 간부들이 國是(국시)에 위배되는 「평화통일론」을 제창했다고 일제 검거했으나 형사처벌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다. 「평화통일론」 문제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육군첩보부대(HID) 소속 對北첩자이자 北을 왕래하는 對北상인 梁明山(양명산·본명 梁利涉)을 등장시켰던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李承晩 정권은 「양명산이 남북을 왕래하며 金日成과 曺奉岩을 연결했다」는 황당무계한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사형 판결에 졸도

 

1심재판에 나타난 양명산은 曺奉岩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다. 1심재판부의 심문에 대해 모기소리만큼이나 작게 『예, 예』 하며 범법사실을 인정했다. 육군 특무대가 자신을 불법 감금해 「曺奉岩에게 북한의 공작금을 전달했다」는 진술을 받아내자, 그는 음독자살을 기도했다.

 

2심에서 양명산은 간첩행위를 모두 부인하고, 금전출처도 北의 자금이 아니라고 번복진술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의 주장을 묵살했다고 한다.

 

조호정 여사는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양명산 아저씨는 上海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아버지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약수동에서 아버지 심부름으로 만날 때면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네가 상해에서 태어난 호정이구나, 상해에서 네가 세 살 때 본 기억이 있어」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曺奉岩은 피고인석에서 사형선고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고 한다.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저는 가슴을 쥐어짜며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고모님(曺敬岩)이 대성통곡을 했고, 방청석은 한동안 멍해 있었대요』

 

판결을 내리고 재판부는 곧바로 퇴정했다. 방청객은 하나둘 자리를 떴다. 눈물이 뒤범벅된 가족들만이 일어설 줄 몰랐다. 그날 이후 조호정 여사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조호정 여사는 아버지의 救命(구명)을 위해 政界(정계)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녀는 탄원서를 썼다.

 

 

李承晩 대통령에게 쓴 탄원서

 

법정에서 나오는 양명산. 양명산은 조봉암이 유죄 판결을 받는 데 결정적인 진술을 했다.
조호정 여사는 李承晩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썼다.

 

〈저는 間諜罪(간첩죄)로 死刑(사형)이 確定(확정)된 曺奉岩씨의 長女 曺?晶입니다. 박사님, 저희 아버님은 백번 고쳐 죽어도 절대로 간첩이 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던 내 조국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누구를 위해서 간첩노릇을 하셨겠습니까.

 

아버님은 무슨 運命(운명)이 그다지도 기구하시기에 日帝 때는 항일투사로 九死一生을 하고, 6·25 때는 「반역자 조봉암을 없애라」는 공산당 벽보가 제1착으로 서울거리를 휩쓸다시피 했고, 오늘은 자신이 心血(심혈)을 기울이시던 대한민국 이 땅에서 死刑囚(사형수)의 신세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도 한없이 무심하다고 하겠습니다.

 

박사님!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주십시오. 모든 生物(생물)에는 목숨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그것도 他意(타의)에 의해서 억울하게 없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좀 귀찮은 存在(존재)라고 해서, 國家의 앞날을 내다보는 견해가 나와는 다르다고 해서 없앨 수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사님! 저희 아버님의 항일역사를 보나, 해방 후 악질 地主(지주)와 싸우며 農地改革(농지개혁)을 단행한 功(공)을 보나 죽음을 불사한 반공이념을 보아서도 절대로 간첩이 될 수 없고, 간첩죄를 씌워서 죽일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사님! 박사님을 둘러싸고 있는 소인배들이 박사님의 총기를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박사님! 하해 같으신 마음으로 저희 아버님을 구해 주신다면 이 은혜는 白骨(백골)이 되어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박사님의 만수무강하심을 祝願(축원)드립니다〉

 

탄원서는 李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李起鵬(이기붕) 국회의장에게는 탄원서를 직접 전달하려 했다. 그녀는 국회의장 자택을 찾아갔으나 이화女大 스승이던 부인 朴마리아 여사가 만나 주지 않았다. 다음날 조호정 여사는 이화女大를 찾아 가까스로 朴마리아를 만났다.

 

『「선생님, 저희 아버지는 죄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李의장님께 잘 말씀드려서 이 탄원서를 전달해 주시고 목숨만을 살려주십시오」라고 했어요. 朴여사는 제 얼굴도 탄원서도 쳐다보지 않았어요.

 

「남자들이 하는 일을 내가 뭐라고 한담」이라고 하시기에 「선생님, 어쨌든 꼭 전해 주시고… 제 평생에 다시 없을 소원입니다」 간청했어요. 그러자 「두고 가봐, 전해는 줄게」 하세요. 교수실을 나서는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얼마 후 4·19 혁명이 나서 李起鵬 의장 일가가 몰살했습니다. 「아녀자가 恨(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릿발이 내린다」는 말이 생각나 오싹했습니다』

 

曺奉岩이 국회부의장 시절 가깝게 지냈던 張澤相(장택상) 前 총리가 보다 못해 돕고 나섰다.

 

 

정권 바뀔 때마다 탄원서 내


조호정 여사의 결혼식 피로연. 남편 이봉래 前 예총회장(왼쪽 두 번째), 조봉암 선생(가운데), 조호정 여사(안경 낀 사람).
조호정 여사는 朴正熙 정권을 제외하고 全斗煥·盧泰愚·金大中·盧武鉉 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탄원서를 냈다.

 

『창녕 조씨 花樹會에서 全斗煥 대통령의 매제인 조석환씨가 일가 사람이라고 알려 줬어요. 全斗煥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는데 「재심청구를 해보라」는 답변만 들었습니다. 盧泰愚 대통령 시절엔 이모부인 尹吉重(윤길중) 민자당 상임고문의 주도로 여야 의원 86명이 사면복권을 청원했습니다. 金大中 정부 때는 조아라 광주YWCA 명예회장, 조비호 신부, 강원룡 목사, 李壽成 前 총리 등이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959년 2월 대법원에 의해 사형이 확정되자 변호인단은 曺奉岩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1959년 7월30일 재심은 기각됐고, 다음날 오전 11시 竹山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조호정 여사는 힘겹게 사형집행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1959년 7월31일 오전 10시30분, 형무관이 아버지의 감방으로 왔다. 아버지는 단정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감방문이 열리고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형무소 본건물을 빠져나와 「고만통」이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섰다. 길가에 몇송이 꽃이 피어 있었다.

 

『이곳에도 꽃이 피는구먼. 그런데 향기가 없어』

 

아버지는 혼잣말을 했다.

 

아버지는 머리를 산뜻하게 가다듬고 평소에 입고 있던 모시 바지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었다. 가슴에는 「2310」이란 수인번호를 붙이고 있었다. 형장으로 가는 길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집행관과 형무소 간부들 앞에 태연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집행관이 『본적은 경기도 인천시이고… 현주소는 서울시내 충현동이고… 이름은 조봉암… 나이는 61세… 』라고 낭독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 목사에게 예수가 빌라도 법정에 섰을 때의 성경구절을 읽어 달라고 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나는 그의 죽을 죄를 찾지 못했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누가복음 23장 22~23절)

 

죽음을 눈앞에 둔 아버지는 그 옛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환상을 불러 원통한 마음을 조용히 달래며 마지막 숨결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를 청했지만 규정에 따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竹山은 마지막으로 어떤 유언을 남겼나요.

 

『「李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李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러고 나서 안방문을 열고 나가듯 담담한 발걸음으로 교수대에 오르셨죠』

 

―洪璡基(홍진기) 당시 법무부 장관이 사형집행을 결정한 것이지요.

 

『洪장관이 차일피일 결재를 미루다 어쩔 수 없이 결재를 했지만, 그렇게 빨리 刑이 집행되리라고는 예상 못 했다고 들었습니다. 洪장관은 만리포해수욕장으로 여름 휴가를 떠났답니다. 그곳 호텔식당에서 「曺奉岩死刑執行, 31日 西大門刑務所(조봉암사형집행 31일 서대문형무소)」라고 쓰인 벽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오늘은 몸이 불편해 면회를 못 하신다』 

 

 

1950년 5월, 한국전쟁 직전에 열린 이화여대 졸업식. 가운데가 조호정 여사.
曺여사는 서대문형무소의 「죽산새」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아버지가 음식을 조금 남겨가지고 창가에 날아오는 새에게 날마다 주었답니다. 그것이 몇 번 반복되면서 그 새가 매일 날아왔는데 아버지가 처형당하자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최정희의 단편소설 「봉암새」의 중요한 소재가 됐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는 그 시각, 조호정 여사는 「아버지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감에 수표교 근처의 張澤相씨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한다. 심상치 않은 조호정씨의 모습을 본 張澤相씨가 몇 곳에 전화를 했지만 竹山의 사형이 집행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조호정 여사는 金春鳳(김춘봉) 변호사 사무실로 달려갔다. 오후 3시30분, 金변호사가 힘없이 수화기를 놓았다.

 

조호정 여사는 그날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아버지의 사형집행이 그렇게 빨리 진행될 줄 몰랐어요. 사형집행 당일 저는 양명산의 사형집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김춘봉 변호사의 사무실에 있었어요. 가족들에게 통보가 없었어요. 아버지의 死刑 집행 후 4시간30분 뒤에야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눈물이 뒤범벅인 채 형무소로 달려갔습니다. 「24시간 후에 시체를 인도한다」는 말에 발길을 돌렸습니다』

 

시신은 진보당 조직부장 李明河(이영하)씨가 인수했다. 1959년 7월31일 밤 서울형무소 앞길엔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曺奉岩의 운구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竹山은 이마 부분에 약간 검은 빛을 띠고 있을 뿐 잠자듯 평온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시위를 우려한 경찰의 통제로 조문객은 200여 명에 불과했고, 張澤相씨도 조문하지 못했습니다. 강화 선산에 모실 겨를이 없어서 망우리에 좋은 자리를 마련해 모셨습니다. 비석 하나 세우지 못하다가 1961년 金忠顯(김충현) 선생이 「竹山 曺奉岩 先生之墓」를 써주셨는데, 그 일로 김충현 선생이 곤욕을 치렀답니다』

 

―마지막 면회가 기억나십니까.

 

『사형집행 당일 오전 10시경 사촌오빠 부부와 함께 서대문형무소로 면회를 갔어요. 간수부장이 「오늘은 몸이 불편하셔서 면회를 안 하겠다」고 하신대요. 어지간히 편찮으셔도 형무소까지 면회 온 저희들을 돌려보낸 일이 없으시거든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竹山, 검거 직전 『이젠 감옥살이 두렵다』


조봉암의 사망을 확인하러 서대문형무소에 들른 조호정 여사.
―면회를 가면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아버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시나리오를 꾸며서 가요. 올케는 옷가지나 음식을 마련하고, 저는 책 등 소일거리를 챙겼습니다. 아버지는 형무소 측에서 녹음하는 것을 아니까 좋은 이야기만 하시죠.

 

치아가 좋지 않으셔서 형무소에 있는 병원에 다니시면서 틀니를 하셨답니다. 「틀니한 지 얼마 안 돼 불편하다」면서 입을 벌려 제게 보여 주셨어요. 아버지는 유독 더위를 타시는 편이세요. 아침운동을 하신다고 하기에 「다른 사람보다 더 움직이시라」고 했습니다.

 

꼭 알려드릴 말씀이 있으면, 간수부장이 마이크를 뺄 때 재빨리 말씀을 드리지요. 간수부장이 호의적이라 눈감아 주었습니다』

 

1958년 1월, 진보당 사건으로 자진출두하기 전 竹山은 딸 호정씨에게 『이젠 감옥살이를 한다는 게 두렵다』고 했다고 한다.

 

『선거운동할 때도 테러 위협 때문에 항상 쫓긴다고 생각하셨어요. 젊어서는 日警의 모진 고문도 거뜬히 견뎌내던 强骨(강골)이셨는데, 연세가 드신데다 李承晩 정권이 압박해 들어오는 것을 더 이상 견뎌내기 어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1899년 강화도 남쪽 원면촌에서 태어난 曺奉岩은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청에서 면서기로 일하다 3·1 운동을 맞았다. 3·1 운동이 터지자 그는 향리에서 시위를 주동, 서대문감옥에서 1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의 첫사랑은 이때 찾아왔다. 조호정 여사는 부모의 사랑 이야기를 해주면서 얼굴이 모처럼 밝아졌다.

 

曺奉岩은 3·1 운동 때 제1여자고등보통학교(現 경기女高)에 다니던 강화 부농의 딸 金以玉(김이옥)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김이옥과 함께 시위 檄文(격문)을 찍고 태극기를 그려 내는 일로 밤을 지새웠다. 曺奉岩이 형무소에 수감되자 김이옥은 자주 면회를 갔고, 두 사람은 장래를 약속하게 된다. 그러나 김이옥의 집안에서는 「가당치 않다」면서 극력 반대했다. 曺奉岩은 사랑을 포기하고 1921년 도쿄로 떠나 주오(中央)대학 정경부에 입학한다.

 

그해 朴烈(박열) 등과 함께 재일유학생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한다. 이듬해 7월 귀국해 베르흐노이진스크대회에 국내대표로 참가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한다.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그는 1923년 귀국해 혁명동지 金祚伊(김조이)를 만나 결혼했다. 김조이는 동덕女高를 나온 좌익투사였다. 당시 김조이는 좌경지식여성들의 단체인 경성여자청년회의 핵심멤버로, 박헌영의 처 朱世竹(주세죽)과 함께 맹렬 여성투사로 통했다.

 

 

竹山의 두 女人


진보당 당수 조봉암씨의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져 넋을 잃은 가족들.
1927년 어느 날, 曺奉岩은 上海에서 뜻하지 않게 첫사랑 김이옥을 만나게 됐다. 이루지 못할 사랑을 간직한 채 결혼 하지 않고 오로지 曺奉岩에게만 순정을 바치던 김이옥은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폐병을 앓고 있었다.

 

조호정씨는 『어머니(김이옥)는 그때 梨花女專(이화여전) 음악과에 재학 중이었어요. 폐병에 걸려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과 통원을 번갈아 가며 치료를 받고 있었죠. 어느 날 어머니는 몰래 여비를 꾸려 아버지를 찾아 上海로 갈 것을 결심했답니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上海로 가는 도항수속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묘령의 처녀가 중국으로 간다고 하자 일본 관헌은 장거리 전화로 강화의 가족들에게 전화 조회를 했답니다.

 

당시만 해도 폐병은 불치의 병으로 시한부 인생이라고 여겼잖아요. 그렇게 보고 싶다는 사람을 생전에 보게 하는 것이 도리였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上海에서 두 사람은 신혼살림을 차렸다. 극적인 상봉과 어려운 처지에서 두 사람이 펼친 로맨스는 대단했다. 두 사람은 1927년 딸 조호정씨를 낳았다. 曺奉岩은 상해에서 얻은 딸이라고 해서 상해의 古名인 ?江(호강)의 「?」자를 따서 「?晶」이라 이름 지었다. 김이옥은 曺奉岩의 활동을 열심히 도왔다. 그녀 역시 공산당원이 되어 기관지 「조선지광」, 「혁명」 등의 편집을 도왔다.

 

둘 사이의 행복은 짧았다. 1932년 曺奉岩이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자 김이옥과 딸 호정은 강화로 돌아왔다. 살아갈 기력을 잃은 김이옥은 曺奉岩을 신의주 감옥에 둔 채 1934년 눈을 감고 말았다.

 

신의주 감옥에서 7년형을 살고 1939년 출옥한 曺奉岩은 일제의 엄한 감시 속에 인천에서 米糠組合(미강조합) 조합장으로 일했다. 일제 말엽 조선총독부는 겨조차 마음대로 매매하지 못하게 했다. 쌀겨는 배급되는 식량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조합에서 일을 보며 지내는 동안 빈민들을 돕는 데 힘을 기울이셨답니다. 이때 아버지는 「혁명동지」인 김조이 여사와 재결합했습니다. 저를 길러 준 어머니 김조이 여사는 한국전쟁 때 납북당하셨습니다』

 

광복 직전 「豫備檢束(예비검속)」으로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구속된 曺奉岩은 광복이 되자 석방된다. 그날을 조호정 여사는 또렷이 기억한다.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


1933년 무렵, 중국 상하이에서 생모 김이옥과 조호정 여사(당시 다섯 살).
『헌병사령부의 감방에서 해방을 맞은 아버지는 해방 다음날 오후에 풀려 나왔습니다. 呂運亨(여운형)선생이 몸소 인천까지 달려와 감방에서 나오는 아버지를 얼싸안고 서로 감격에 목이 메어하던 정경을 잊을 수 없지요』

 

曺奉岩은 1945년 8월18일 「인천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다. 1946년 5월7일, 도하 각 신문에는 曺奉岩이 朴憲永(박헌영)에게 보낸 편지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가 공개됐다. 20년 전 조선공산당의 창당멤버로 「코민테른 遠東部」(원동부)의 조선대표로서, 朴憲永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던 曺奉岩은 공산당의 부패를 참을 수 없었다. 당시 朴憲永은 조선공산당과 그 산하 세력을 한 손아귀에 움켜쥐고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시 신문에 실린 편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내가 붓을 들어서 동무에게 편지를 쓴 것은 1926년 상하이에서 동무에게 암호편지를 쓴 것 외에 이것이 처음인 것 같소. 동무에게 최 중요한 문제니까 다른 건 다 불고하고 몇 가지 말하겠소.

 

첫째, 無원칙하오. 어떤 일정한 척도하에서 등용하지 않았으며, 또 인물 능력 본위라면 더군다나 동무의 견식이 천단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소.

 

둘째, 종파적이오. 원칙도 없고 인물본위도 철저치 못했기 때문에 종파적으로 나타났소.

 

셋째, 봉건적이오. 친하다는 것, 개인으로 신세를 졌다는 것, 머리를 숙이고 아첨하며 어느 의자를 얻으려고 애쓰는 무리는 모두 등용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은 봉건적이오.

 

넷째 무기력이오. 항간에서 『박헌영에게는 자주 찾고 곱게 뵈여라, 그렇지 않으면 말썽을 부리라』 하니 얼마나 놀랠 일이오? 과거를 비판하지 않고 잘했다고 버티는 공산주의자가 어디 있었소?

 

내가 양심적으로 진실로 죄로 생각하는 것은 일하지 못한 것이오. 쥐꼬리만치도 일한 것 없이 큰일이나 한 것같이 꾸미며 혁명가로서는 물론이고 인간적 양심으로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한 자들이 동지를 속이고 계급을 속이고 뻔뻔히 군중 면전에 나타나서 꺼떡대는 것은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현상이며, 우리 당을 파괴하는 결과가 될 것이오>

 

曺奉岩은 자아비판도 했다.

 

<당원인 아내를 버리고 非당원 여자와 결혼했다는 건 설명하기 싫은 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여자(김이옥)도 좋은 당원이 되어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가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개최될 태평양노동자대회에 보낼 돈을 맡았다가 생활비로 쓴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는 참 솔직하신 분입니다. 상해에서 어머니와 어렵게 생활할 때 黨費(당비)를 쓴 것을 고백하신 것이죠. 당내에 「反曺派(반조파)」까지 생겼는데, 심지어 아버지가 나비 넥타이를 한 것을 보고 부르주아라고 비판했습니다』

 

 

분명하게 반공노선 밝혀

 

―이 편지를 공산당과의 결별 선언으로 단정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는 이 편지 때문에 공산당에서 제명처분을 받고 추방됐습니다. 1946년 6월 육군 소속 방첩부대에 검속됐다가 풀려난 아버지는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는 反공산당 노선을 선언합니다. 아버지는 1946년 6월 신문에 발표한 성명에서 오랫동안 신봉하던 공산당 자체는 물론, 유물론과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을 모조리 부인했습니다. 2개월 후인 1946년 8월 아버지는 기자회견을 갖고 좀더 분명하게 반공노선을 밝혔습니다』

 

曺奉岩은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소책자를 출판, 모순투성이의 공산주의와 反민족적인 공산당의 罪過(죄과)를 여지없이 폭로 규탄했다. 조호정 여사는 『아버지는 공산당을 박차고 나온 이후 전향이란 말을 극도로 삼가고 사상적인 성숙, 이념적인 발전이란 말을 잘 쓰셨다』고 회고했다.

 

―1985년 말 북한 「혁명열사릉」에 납북 독립운동가 김규식·조소앙 선생과 함께 조봉암 선생의 虛墓(허묘)가 있다고 보도됐습니다. 김규식·조소앙 선생의 묘비는 「사망」으로 돼 있고, 曺奉岩의 묘비는 「희생」으로 돼 있더군요. 북한이 아버지의 묘를 마련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른 척하는 것보다는 낫지요(웃음). 아버지는 해방 직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을 비판하고 결별을 하셨습니다. 북한이 혁명열사릉에 남한 독립운동가의 허묘를 만들어 놓은 것은 자신들의 체제선전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1948년 5월10일 선거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曺奉岩은 1948년 8월2일 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曺奉岩이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된 데에는 설이 많았다. 건국 초 농정의 중요성에 비추어 曺奉岩이 적임자라고 판단한 하지 중장과 李始榮(이시영) 부통령의 추천에 의한 것이라는 설과, 李承晩의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조호정 여사는 『전적으로 李承晩 대통령의 판단』이라고 단언했다.

 

그녀는 曺奉岩이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되기에 앞서 李承晩 대통령과의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제헌국회 때의 일이었어요. 어느 날, 의정단상에서 발언을 하고 내려오는데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李박사가 의장석에서 내려오며 「당신이 曺奉岩씨요? 당신 말은 많이 들었는데, 참 반갑소」 하며 등을 두드리며 좋아하더래요.

 

李박사가 아버지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쓴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책자 때문이랍니다. 이 책자에서 아버지는 朴憲永 등 공산당과 결별하겠다는 것을 밝히셨거든요. 게다가 아버지가 의정단상에서 논리정연하고 조리 있게 말씀을 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으신 거지요』

 

조봉암 선생의 가족사진. 앞줄 왼쪽부터 조호정, 조봉암의 부모, 뒷줄 오른쪽부터 조봉암, 조봉암의 처 김조이. 조봉암의 첫 부인은 사망했다.

 

『농지개혁으로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 체제 지켜』

 

농림부 장관에 취임한 曺奉岩은 의욕적으로 자신의 비전을 펼쳤다. 30여 명의 전문가로 「농정심의위원회」를 만들어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아버지는 한민당系가 장악하고 있는 「감찰위원회」에 의해 공금을 관사수리비에 사용했다는 이른바 「曺奉岩 비행고발사건」으로 6개월 만에 물러나셨습니다. 그때가 1949년 2월입니다. 하지만 농림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농지개혁의 법적근거를 만들었습니다』

 

농림부 장관 재임 기간 曺奉岩은 양곡매입법, 농지개혁법, 협동조합법과 이 사업들의 목적을 뒷받침할 「농림신보」(現 농민신문)를 창간했다.

 

대한민국의 「농지개혁법」은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에 영향을 받았다. 북한은 토지개혁을 통해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실시했고, 남한은 「유상몰수·유상분배」 원칙이었다. 북한에서는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게 됐고, 남한에서는 토지가 개인에게 돌아갔다.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에 따라 농지개혁이 단행됐다. 농지개혁에 의해 영세농에 분배된 농지는 일반 수매농지가 75만5000ha, 적산농지 26만9000ha로 총면적은 102만4000ha였다.

 

조호정 여사는 『남한의 농지개혁은 耕者有田(경자유전)의 원칙下에 진행됐고, 소작농의 농지확보에 도움을 주어 자작농이 크게 늘어났다』면서 『아버지가 기안한 농지개혁법이 한국전쟁 전에 완성됐기 때문에, 내 땅을 가진 농민들이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의 체제선전에 동요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법의 터를 닦아 대한민국을 지킨 셈』이라면서 『竹山의 농지개혁에 대한 연구가 학계에서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竹山, 국회부의장에 선출돼

 

竹山은 딸 조호정씨가 이화女大를 졸업하던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해 6월 張澤相과 함께 국회부의장에 선출된다. 竹山의 비서였던 조호정씨는 당시 아버지의 大選 출마 지원유세에 참여했다.

 

『한밤중에 가두방송을 할 때는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당원들이 정강정책을 요약해 주면 메가폰을 잡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요. 아버지의 평화통일정책과 현장 중심의 행정방식에 많은 표를 던져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국회부의장으로 계실 때 제가 비서로 일했습니다.

 

그때 張澤相 국회부의장의 비서였던 金泳三(김영삼)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참기름을 바른 것같이」 말끔한 인상의 청년이었습니다. 金泳三 대통령 시절 아버지 문제가 해결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했습니다만…』

 

曺奉岩은 1952년 再選돼 1954년 5월까지 국회부의장으로 활동한다. 1952년 8월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해 2위(80만 표)로 낙선한다. 이때의 善戰(선전)으로 曺奉岩은 李承晩 대통령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54년 5월 정부 당국의 방해로 제3대 국회의원 후보 등록에 실패했습니다. 서류가 미비하다고 자꾸 미루는 바람에 등록마감일을 넘겨버린 거죠. 아버지의 운명을 바꾼 것은 1956년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장 이름으로 출마한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득표율 23.8%에 216만 표가 넘는 지지표를 얻어 세상을 놀라게 하셨죠. 李承晩 대통령은 504만 표(득표율 70%)를 얻었습니다. 신익희 후보 「추모표」와 기권표가 238만 표나 발생했습니다.

 

조병옥 박사는 1956년 6월 국회 본회의에서 「만일 자유 분위기의 선거가 이뤄졌더라면 李대통령이 받은 표는 200만 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진보당 실험이 李承晩 정권에 의해 억압되지 않았으면, 아버지의 정치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죠』

 

조호정 여사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광복 후의 혼돈 속에서도 竹山은 風流(풍류)를 아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술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마시는 豪酒家(호주가)셨어요. 그러나 아무리 많이 마셔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가끔 양주를 많이 들면 두드러기가 나셨어요. 부산 피란 시절엔 女性國劇團(여성국극단) 공연을 좋아하셨지요. 노래 중에는 「천안삼거리」를 잘하셨습니다. 판소리를 특히 좋아해서 김소희씨에게 배우기도 했습니다』

 

조호정 여사는 『공산당을 해서 차갑게 보일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정이 많고 자상한 분』이라면서 『부산 피란 시절, 아버지는 국회부의장실을 찾아와 일자리를 달라고 하는 피란민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에 용돈을 주시느라 지갑이 빈털터리일 때가 많았다』고 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노래 애송

 

『영화를 보면 눈물을 제일 많이 흘리는 사람은 아버지였어요. 「춘향전」을 함께 보러 갔는데 눈물을 계속 흘리셨어요. 「연극으로만 보이지 않는구나」 하시며 눈물을 닦으셨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애달픈 사랑과 이별 때문이셨겠지요. 영화를 좋아하셔서 저를 데리고 충무로 대한극장에 가서 「남태평양」 같은 영화를 보았어요. 하루는 남편 저녁을 차려 줘야 하는데 아버지가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는 거예요. 「안 된다」고 했더니 많이 서운해하시더라고요』

 

청년 시절 일본 도쿄 주오(中央)대학에서 유학했던 조봉암은 메이지 시대의 개화정치가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등장하는 일본 노래를 자주 흥얼거렸다고 한다.

 

조호정 여사는 『막부를 타도하고 나중에는 天皇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신의 정치역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면서 竹山이 좋아했다는 일본 노래를 불러주었다. 조호정 여사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사이고 다카모리, 말이 통하는 사나이

 

나라를 위해서는 죽으라고 말했다

 

오른손엔 피 묻은 칼, 왼손엔 말고삐 쥐고

 

안장에 올라탄 당당한 미소년

 

서둘지도 마음 졸이지도 마라, 천하대사란 그런 것

 

미인의 무릎 베개 삼아 잠시 눈을 붙일거나〉●

 

사진 : 이태훈

 


 

▣ 曺奉岩은 누구인가

 

1899년 경기 강화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1년간 복역한 뒤,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수학했다. 1922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했다. 1924년 국내에 잠입해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간부가 되었다.

 

1927년 상해에서 여운형, 홍남표 등과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를 결성했다. 1932년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돼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했다. 1939년 인천 米糠(미강)조합 조합원으로 일했다.

 

1946년 박헌영에 보내는 공개편지를 발표한 뒤 공산당을 탈당, 우익진영으로 전향했다. 하지 軍政 장군과의 면담에서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피력했고, 좌우합작 노선의 당위성을 제기한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소책자를 펴냈다. 1948년 초대 농림부 장관, 再選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 등을 지냈다.

 

曺奉岩은 「진보당」을 창당(1956년 11월10일) 위원장으로 취임했으나, 간첩으로 몰려 1959년 7월31일 처형됐다. 1956년 大選에 출마, 216만 표를 얻었다. 李承晩 후보는 504만 표를 얻었다.

 

 

입력 : 20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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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르메 (2023-07-08)

    조봉암이 노무현 정권 대법원으로 부터 무죄를 받았는데 이영훈 선생은 애초에 그를 간첩으로 판단한 방대한 기록을 대법원이 읽었는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여러번 사상적 변신을 한 조봉암처럼 정권따라 조봉암에 대한 판단을 달리하지 않게하기 위해 사실관계는 철저히 밝혀두어야합니다. 이런 지적은 빠진채 그의 공만 판단하고 있어 읽기 불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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