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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기념회 소식] 윤보선 前 대통령 아내 공덕귀 여사 평전 《공덕귀 생애와 사상》

“신학적 에너지로 남편 내조하고, 불의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의 대모(代母)”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군사전문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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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매화홀에서 열린 고 공덕귀 여사의 평전 출판기념회에서 김학준 전 서울대 교수가 평전 서평을 하고 있다. 사진=오동룡


고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의 배우자이자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여성·인권운동가 고 공덕귀(孔德貴1911~1997) 여사의 생애와 사상을 기록한 평전이 출간됐다. 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이사장 김성수)는 지난 1124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매화홀에서 고 공덕귀 여사의 평전 공덕귀: 생애와 사상(박영사)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공 여사의 평전을 출간한 김명구(金明九) 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교수는 이날 출간 소감에서 공 여사는 항일의식이 투철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면서 사람에게 가장 존귀한 것은 자유이며, 이 자유는 누구라도 속박할 수 없다는 믿음을 키웠고, 동시에 평등사상과 공의(公義) 사상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이어 공 여사는 신학적 에너지를 가지고 여성운동, 인권운동, 민주화 운동 등에 나섰고 불의한 시대에 저항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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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공덕귀 여사의 평전 공덕귀생애와 사상(김명구 지음사진=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 제공

  

2011해위 윤보선 생애와 사상평전을 펴낸 데 이어 11년 만에 평전을 출간한 김명구 교수는 서울 창천교회 목사로 해위민주주의연구원 운영위원이다. 그는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해위 윤보선 생애와 사상, 서울YMCA운동사 100-110, 한국기독교 통사20여 편의 저술을 남긴 기독교 역사가다.

 

공 여사의 25주기 감사예배를 겸한 이날 행사에는 이종찬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이사장, 김학준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초대원장, 김성재 김대중아카데미원장, 김성수 해위 윤보선 대통령 기념사업회 이사장, 원계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이용원 감리교서울연회 감독, 이현숙 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김소선 전 흥사단 이사장, 윤 전 대통령의 장남인 윤상구 해위 윤보선 대통령 기념사업회 이사를 비롯한 유족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김명구 교수는 공덕귀 여사의 활동은 영부인의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빛이 났다면서 산업현장을 찾아 여성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지원, 빈민 선교 지원운동, 기생관광 반대운동 등에 나섰고, 원폭 피해자 돕기 운동을 비롯해 재일·재미 교포를 위한 민족차별 저항운동 등에도 적극 힘을 썼다고 말했다.

 

 

해위(海葦)1962322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청와대를 떠날 때, 영부인 공덕귀 여사는 꿈에 그리던 민주주의를 꽃피우려 할 즈음 총칼 앞에 중책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하는 아픔이 왜 없었겠는가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녀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남달랐다. 이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사에서 공 여사의 이름은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해위가 민주화 회복 운동의 선구자였다면 그녀는 민주화 운동의 대모(代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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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여사는 1960년 8월부터 1962년 3월까지 1년 7개월 남짓 경무대 생활을 했다윤보선 대통령은 주말마다 사저 앞에 있는 안동교회에 출석하기 위해 안국동 집을 찾았다공 여사가 안국동집 마당에서 남편 윤보선 대통령시어머니장남 상구(왼쪽), 차남 동구(동구)와 함께 했다사진=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 제공

 

공덕귀는 1911421일 경남 충무(지금의 통영)에서 대한제국 군인인 공도빈(孔道彬), 어머니 방말선(方末善)씨의 52남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으나 어머니는 7남매를 강하게 키웠다. 그녀가 어려서부터 인도 선교사를 꿈꾸었던 것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기독교 신앙과 독립심 때문이다.

 

19198세 때 통영공립고등학교에 입학한 공덕귀는 1학년 때 31운동을 목격했고, 1932년 부산 동래의 일신여고 재학 중엔 YWCA 여학생 회장을 지냈다. 1936년 일본 요코하마 공립여자신학교(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로 개명)로 입학해 신학수업과 동시에 재일교포 교회에서 봉사했다.

 

평전에 따르면, 공덕귀는 이때 교회는 사람들이 사는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을 배우기도 했고, 빈민을 위해 일생을 바친 가가와 도시히코(賀川豊彦)의 신학과 실천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송창근(宋昌根) 목사의 성빈사상(聖貧思想)에 감동했으며, 기독교 복음의 국가적사회적 사명을 강조한 김재준(金在俊) 목사의 신학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김명구 교수는 공덕귀 여사는 단순한 신학도가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 밝은 학자였다고 했다.

 

1940년 요코하마 신학교를 졸업 후 송창근이 담임하고 있던 경북 김천의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이곳에서 독립운동에 연루돼 대구 도경의 고춧가루 물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녀에게 신앙과 애국은 구별이 될지언정 차별이 되지 않았다. 해방 이듬해인 19461, 송창근이 주도하고 김재준, 한경직(韓景職), 정대위, 조선출 목사 등이 교수로 있던 조선신학교(한신대학’) 여자신학부 교수가 되었다.

 

학문적 갈망으로 인해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가려는 도중, 송창근 등의 강권으로 1949138세의 나이에 함태영(咸台永) 목사의 주례로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해위 윤보선과 결혼했다. 195039세에 장남 상구를 낳고 부산 피난 중 42세에 차남 동구를 낳아 남편과 시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이 서울시장이었고, 다음에 상공장관이 되고 민의원이 되어도 별 감흥이 없었고, 한 번도 유세장에 따라가 본 적이 없다며 정치에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19608월 해위가 대한민국 4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영부인이 된 이후에도 조용한 영부인으로 지냈다. 영부인으로 내조는 했지만 정치에 간여하지 않았다. 영부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신념처럼 며느리요, 아내요, 어머니를 고집했다. 저자인 김 교수에 따르면, 공 여사는 기독교계와 정치계를 잇는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 김재준, 한경직, 강신명(姜信明) 등 한국정치에 영향력이 큰 기독교 지도자들과 남편을 연결해, 윤 전 대통령이 독재와 인권탄압에 저항하는 운동을 이끌도록 고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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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3민주구국선언문 사건 재판일 당시 피고인 가족들과 함께 시위하는 공덕귀 여사공 여사(가운데)와 문동환 목사 부인 문혜림 여사(오른쪽). 사진=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 제공

 

그러나 공 여사는 매일 새벽 3~4시면 일어나 나라를 위한 구국의 기도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밤낮없는 데모와 점차 무엇인지 모를 불안한 시국을 보며 주여, 이 백성을 어찌하시렵니까?”라고 기도했고 이 나라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도 공 여사는 , 하나님! 이 백성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공 여사의 활동은 영부인의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빛이 났다. 1962322일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한 후, 안국동 자택으로 돌아온 공 여사는 박순천, 이우정, 이태영 등과 함께 여성운동 지도자로 활약했다.

 

1969년 그녀는 서울 안동교회 여전도회장을 맡은 이후, 1972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서울연합회 회장에 선출됐다. 19742, 한국교회연합회 대표로 동경에서 개최한 국제여성평화회의에 참석했다. 그녀는 여기서 한국 원폭 피해자 문제, 재일동포 차별 문제, 일본 교과서 왜곡의 문제를 토론했고, 귀국 후에는 원폭 피해자 돕기 운동을 전개했다. 1974년 교회여성협의회 초대 인권위원장이 된 후,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 투신했다.

 

1976년에는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남편 해위가 입건되자 ‘3·1 사건 가족대책협의회회장을 맡아 석방운동을 벌였다. 1977년 봄에는 교회여성연합회 회장에 취임했다. 노동자들에 관한 관심에 색안경을 끼고 보던 그 시절, 공덕귀는 사회적 약자를 누가 보호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기독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응답했다. 1977년부터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활동도 전개했다. NCC 인권위원회 후원회 부회장, 1978년 동일방직사건긴급대책위원회 위원에 선임됐다. 1979년엔 YH무역 여공을 위해 투쟁했다.

 

사람들은 전직 대통령 부인이란 직함이 방패막이가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녀도 차이고 연행되고, 감시당하고 구속됐다. ‘명동 구국 선언재판에 참석했다가 김대중(金大中)의 부인 이희호(李姬鎬) 등과 함께 강제로 연행되고 길바닥에 내쳐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공 여사의 단식농성, 철야농성, 시위는 계속됐다. 살벌한 시국에도 여사는 매일 인권 강연회를 열고 양심수들이 갇혀 있는 교도소를 방문했다. 부활절이면 구치소 뒷산 동네에 몰래 모여 새벽송을 크게 불러 가족에게 용기를 전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공 여사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72세에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장을 맡아 교회일치운동을 이끌고, 75세에는 5년 동안 교회일치여성협의회초대회장을 맡았다. 1990년 해위가 세상을 떠난 후, 81세가 되던 해에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결성에 참여했다.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1993년 혼수상태에 빠진 뒤 건강을 잃었고 잠시 치매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듬해 10월에 기적적으로 정신을 회복하고 자서전 공덕귀-, 그들과 함께 있었네를 출간했다. 19971124일 오전 730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86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그리고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2구 비룡산에 있는 가족묘지 맨 위에 해위 곁에 묻혔다.

 

김학준(金學俊)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초대원장은 평전 발문에서 공덕귀의 사상은 윤보선 정치사상의 신학적 이론이 되었고, 교계와 정치계를 연결시키는 사상적 연결점도 되었다공 여사가 단순한 내조자가 아니라 한국정치에 영향력이 큰 기독교 지도자들과 남편을 연결해, 남편이 독재와 인권탄압에 저항하는 운동을 이끌도록 고무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윤보선에게 지지를 보내고 그 활동에 적극 동참하게 했다고 했다.


입력 :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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