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코필드 박사 80세 생신 축하연 스코필드 박사가 별세하기 전 해인 1969년 80세 생일 축하연에서 보육원 아이들에게 케이크를 나눠주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스코필드 박사는 하나님이 한국에 파송한 천국 대사(大使)였다.”
재미 수필가이자 시인인 김수영 씨가 한·영 수필집 《잊을 수 없는 스코필드 박사와 에델바이스의 추억》(한국신춘문예협회 간)을 펴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한국명 石虎弼) 박사는 한국을 조국처럼 사랑한 캐나다인이다.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내한한 후 3·1운동을 지지한 혐의로 1년간 수감됐다가 캐나다로 추방되었다. 1955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1970년까지 세브란스의대 교수를 지내며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정부는 196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68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잊을 수 없는 스코필드 박사와 에델바이스의 추억》과 저자 김수영
김수영 작가는 서울대 사범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8년 스코필드 박사를 서울대 의대 외국인 교수회관에서 만났다. 당시 스코필드 박사는 의료선교사로 내한해 서울대 수의과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계셨는데 몸이 불편해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고 한다. 이후 “자주 찾아뵙고 통역과 번역을 도와 드렸다”고 회고한다. 김수영 작가의 말이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과 가난한 고학생들에게 줄 장학금 모금을 위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지인, 친구들에게 도움 요청의 편지를 수 없이 많이 쓰셨습니다.”
이후 김수영 작가는 가족처럼 스코필드 박사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자신의 영적 멘토이자 롤 모델이 되어 주었다. 또 “삼촌(Uncle)이 되어주겠다”며 “편지를 쓰실 때마다 마무리하실 때 ‘Uncle Frank’로 끝을 맺었다”고 기억한다.
훗날 김수영 작가는 스코필드 박사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고 신학대학을 졸업 후 “안수를 받고 주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한국명 石虎弼). 사진=조선일보DB
《잊을 수 없는 스코필드 박사와 에델바이스의 추억》에는 김수영 작가와 스코필드 박사의 인연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저자가 체험했던 박사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스코필드 박사의 한국에 대한 깊은 사랑을 담았다.
또 책에는 스코필드 전기가 요약되어 있다. 한국어 전기는 고(故) 이장락 교수(서울대 수의대 학장 역임), 영어 전기는 최진영 교수(중앙대)가 썼다고 한다.
《월간조선》은 제77회 광복절을 맞아 스코필드 박사가 경험한 3·1운동과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을 소개한다.
참고로 수원 제암리(堤岩里) 참변은 1919년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행위로 일본 군경이 수원군 향남면(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사는 민간인 20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 30여 호를 불태운 참변이다.
당시 스코필드가 현장으로 달려가, 생생한 참상을 사진에 담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록한 <수원에서의 잔악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으로 보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은 《잊을 수 없는 스코필드 박사와 에델바이스의 추억》에 실린 스코필드 전기 중 일부다.
<...1919년 스코필드 박사가 31세 때였다. 한 방문객이 스코필드 박사를 찾아와 일본 군인 경찰들과 싸우는데 도와달라는 간청이었다. 그가 돕고자 하는 것은 한국 국민들이 용기를 갖고 일본 폭정에 항거하며 싸우는 데 그들을 사랑하는 끈질긴 마음에서였다.
찾아온 방문객은 3·1 독립운동 대표자였던 이갑성(李甲成·1889~1981) 옹이였다. 그는 스코필드 박사께 상세하게 33인의 애국자들이 3·1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과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과 세계 각국에 섭외자로서 한국 국민의 압박당하는 현실과 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일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3·1 독립운동에 가담
그는 기꺼이 도와주기로 했다. 그는 사진기를 들고 탑골 공원으로 가 현장에서 3·1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항거하는 애국자들의 장면을 사진에 찍기로 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도착하였을 때 크게 소리 지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독립 만세!”
하나님께서 스코필드 박사께 직접 말씀하시고 격려하시는 것처럼 들려 왔다. 일본에 대항하여 분노를 터뜨리는 용감한 항거자들의 역사적인 순간들을 포착하여 사진을 찍어 세계 만방에 알리라고 하나님이 직접 말씀해 주셨다고 느꼈다. 일본 군인 경찰들이 나타나기 전 부지런히 이 항거 장면들을 빨리 많이 찍어야 한다는 사실을 스코필드 박사는 알고 계셨다. 항거자들은 칼과 총검으로 공격을 당했고 숨거나 도망가려고 하던 사람들도 무참히 공격당했다. 몸이 불편하여 사진 찍기가 힘들었어도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었다. 이 슬픈 날은 끝났으나 3·1 독립운동은 한국 국민의 가슴에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불타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투옥을 당해 죽게 되었다. 3·1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시골로 도망가게 되었고 도시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숨게 되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오랫동안 한국 사람들을 돕기로 작정했었고 세계만방에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리고 싶어 했다. 세계 여러 나라 영어신문에 3·1독립운동 때 찍은 사진을 보냈고 거기에 대한 기사를 써서 발표했다. 한국 국민이나 스코필드 박사는 세계가 이 사실을 알기를 원했다. 슬프게도 얼마 안 되어 한국 국민에 대한 잔학행위가 시작되었다.

2011년 4월 12일 오전 서울대학교 수의과학대학 스코필드홀에서 열린 '제9회 스코필드 박사 추모기념식'에서 유진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장, 테드 립만 주한 캐나다 대사, 오연천 서울대총장,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왼쪽부터)이 캐나다 대사관이 서울대에 기증한 스코필드 박사의 유품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날 캐나다 대사관은 지난 10년 동안 보존해본 스코필드 박사의 유품 192점을 서울대학교에 기증했다. 사진=조선일보DB
수원 대학살과 현장에서 찍은 많은 사진
3·1 독립운동 항거 자들의 대담무쌍한 행동에 화가 난 일본 경찰과 군인 경찰들의 한 단계 더 심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한 달 후 1919년 4월 15일 일본 군인 경찰들이 수원 제암리 마을에 들어왔다. 29명의 마을 청년들을 집에서 불러내어 마을 교회당에 모두 집어넣었다. 청년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 경찰들이 감시하였다. 도망가다가 잡히면 총으로 쏘든지 대검으로 찔러 죽이기 위해서 무장하였다. 일본 군인 경찰대가 교회 주위에 돌아가면서 휘발유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유가족들이 지켜보고 울부짖으며 울기 시작했다. 이것도 모자라 다른 집들도 불태웠고 순진한 아이들도 죽였다. 이 대량 도살은 수원 대학살로 알려졌다.
이틀 후 수원 제암리에 무서운 살인사건에 대한 소문이 전국에 퍼지기 시작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즉시 기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 수원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일본 군인 경찰들이 신분이 무엇인지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제암리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전거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제암리에 가고 싶었지만, 의심을 받을까 봐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얼마 못 가서 군인 경찰대가 보이지 않자 제암리에 빙 돌아서 왔다.
그는 제암리의 불탄 모습을 보자 말문이 막혀 충격 그대로였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불탄 현장을 본 그대로 사진을 찍어 증거로 보존하는 일이었다. 다친 많은 사람을 병원으로 실어 날랐고 교도소도 방문하여 감방에 있는 그들을 위로했다. 유관순 양도 만나 보았다. 후에 그녀는 순교를 당했다. 감방에 있는 죄수 아닌 죄수들은 모두 3·1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일본의 폭정에 항거하던 시위자들이었다.

2008년 4월 10일 캐나다대사관에서 ‘호랑이 스코필드 동우회’ 발족식이 열렸다. 사진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전택부 YMCA 명예총재, 이병구 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장, 김국주 광복회 회장, 데이비드 피터슨 토론토대 총장, 정운찬 회장, 테드 리프만 주한캐나다 대사, 김한중 연세대 총장, 김항경 전 캐나다 대사, 이장락 전 서울대 수의과대학 학장, 이경옥 한카문화교류협회 회장, 스코필드 박사의 쌍둥이 손녀 베티 스웬슨과 매리 에비슨 맥킨. 사진=조선일보DB
암살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캐나다로 추방
불행하게도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 사람이 아니면서 참사 현장을 사진을 찍는지 일본 군인들이 의심하며 그를 미행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현장에서 총살은 면했지만 언제 또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한 암살자가 스코필드 박사가 저녁에 집에 돌아와 침실에 들어갈 때 암살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암살 당일 날에 스코필드 박사는 실험실에서 실험할 것이 있어서 일찍 집에 오지 못하고 밤늦게 집어 들어와 화를 면하게 되었다. 암살이 실패하자 일본 당국은 그를 한국에서 추방하기로 하였다. 만약 외국 사람을 암살하면 나중에 국제적 물의를 일으켜 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죽이는 대신 한국에서 추방하기로 하였다. 불행하게도 큰 슬픔을 안고 스코필드 박사는 1920년에 캐나다로 돌아가야만 했다.
한국 밖에 사는 외국 사람은 스코필드 박사가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 해방과 독립을 위해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 이해하기는 참 어려울 것이다. 그가 한국에 사는 동안 3·1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독립투사를 도운 사실로 그는 우리들의 영웅이 되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보내신 천국 대사였다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캐나다 겔프대학에 위치한 스코필드 흉상 앞에 선 김수영 작가. 흉상 및 동판에 기부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의 이름도 함께 찾을 수 있다. 사진=김수영
김수영 작가에 따르면, 스코필드 박사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두 번이나 큰상을 받았다. 1960년에 받은 상은 문화훈장으로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수여 받았다. 또 다른 훈장은 1968년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상으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스코필드 박사는 기념으로 찍은 사진 한 장과 그 사진을 액자에 넣으신 사진(아래)을 따로 김수영 작가에게 주었고 이를 56년 동안 간직했다고 한다. 지난 2016년 6월 미국 LA에서 ‘스코필드 박사 내한 100주년 기념 특별 전시회’가 열렸을 때 스코필드 박사 기념재단 사무총장(김재현)을 통해 이 액자를 재단에 기증했다.

스코필드 박사. 사진=김수영
김수영 작가는 스코필드 박사가 그와 동생에게 선물로 준에델바이스 꽃을 잊을 수 없다. 비록 액자에 담긴 말린 꽃이었지만 생화처럼 매우 예뻤다고 기억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곳저곳 이사를 다니느라 잊어버렸지만 동생은 잘 간직하고 있다가 스코필드 박사 추모재단에 기증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선물로 준 에델바이스 꽃.
“나는 스코필드 박사님이 주신 귀한 선물은 잃어버렸지만, 그분의 훌륭한 인품과 교훈은 잊을 수 없다. 나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셔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셨다. 아버지처럼 인자하시고 때로는 근엄하셨다. 부정부패와 용감히 싸우시고 정의를 위해서 호랑이처럼 단호하게 싸우셨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 계시지만, 어찌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잊을 수 있겠는가. 언제나 뵙고 싶고 그리운 스코필드 박사님, 나의 삼촌이신 그분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키셨다.”(118~119쪽)
스코필드 박사가 60여년 전 선물해 준 카드. 카드에 ‘두 길’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사진=김수영
김수영 작가는 또 스코필드 박사가 60여년 전 전해준 카드를 오늘날까지 잘 간직하고 있다. 카드에 적힌 ‘두 길’은 지금 읽어도 명문이다. 스코필드 박사가 평생 살아온 좌우명 같은 문장이다. 영어로 된 문장을 김 작가가 번역했다.
두 길
인생에는 두 길이 있다. 염려하는 길과 기도하는 길이다.
염려하는 길은 염려의 힘 때문에 환경의 압력을 받아
상식으로 인도함을 받고 가는 길이 불확실하여
경호하고 수행하는 자에 대해 두려워한다.
기도하는 길은 그 힘의 사랑을 갖고
성령님이 인도해 주시고 가는 길에 진리가 있고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보호자로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
-F. W. 스코필드 박사 씀
스코필드 박사가 말하는 ‘두 길’은 어떤 길을 말하는 것일까. 김수영 작가의 설명이다.
“스코필드 박사님에 따르면, 염려하는 길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 모든 일에 늘 염려를 하기 때문에 인간의 상식으로 앞길을 가고, 늘 앞길이 불확실하여 불안해하며 자기를 인도하는 자를 믿지 못해 두려워한다고 하셨다.
반면에 기도하는 길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사랑의 힘으로 성령님이 인도해 주시고, 앞길에는 늘 진리가 있고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보호자로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도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p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