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NewsRoom Exclusive

許元根 일병 사망 사건- 국방부 발표문 내막 추적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許元根 일병 사망 사건 분노에 찬 국방부 조사 발표문의 내막 추적 「許일병 자살을 타살이라고 날조ㆍ조작한 것은 의문사委와 全상병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린 국방부는 왜 흥분했는가. 기자는 許일병의 옛 중대원들과 함께 全상병을 찾아갔다. 의문사委 핵심진술자 全ㅇㅇ상병: 『보상금 받고 양심을 판 사람으로 몰려 괴로웠다』 全상병에 의해 「살인자」로 지목된 盧讓植 중사: 『이제라도 진실 밝히면 용서하겠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七友會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委)와 국방부가 번갈아 「타살됐다」, 「자살했다」고 반대 결과를 발표한 許元根(허원근ㆍ당시 22세) 일병 사망사건. 그 진상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당시 중대원들일 것이다. 許元根 일병이 근무했던 7사단 3연대 1대대 3중대 본부 중대 출신 예비역들은 최근 「七友會(칠우회)」란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1984년 4월2일 일어난 許일병 사망사건 당시, 중대본부 현장에 있던 일곱 사람으로, 許일병이 자살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七友會는 李眞榮(이진영ㆍ41, 보급계)씨를 총무로, 盧讓植(노양식) 중사, 오용근, 손명조, 신재영, 권오진, 안병덕씨 등으로 조직돼 의문사委 발표를 반박하는 노력을 펼쳐 왔다. 이 七友會가 최근에는 이○○ 하사까지 합세해 八友會가 됐다고 한다. 팔우회의 목표는 九友會(구우회)가 되는 것이다. 이는 중대본부 요원 중 유일하게 의문사委 편에서 진술하고 있는 全상병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동료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회원들은 全○○ 상병이 최초 진술과는 달리 의문사委에서 『盧讓植 중사가 許일병을 쏘았다』고 진술함에 따라, 국방부 특조단에 全○○ 상병과의 대질심문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국방부 조사에서 보았듯 全상병은 대질심문은 고사하고, 국방부 조사 자체도 피했고 그런 가운데 조사가 마무리됐다. 2002년 12월6일 손명조, 이진영 상병 두 사람은 전북 전주市로 향했다. 기자도 동행했다. 全씨에 의해 許일병을 죽인 살인범으로 몰려 곤욕을 치른 盧중사와 그 중대원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예전의 전우 「全○○」를 찾으려 하고 있었다. 40代 중반의 家長(가장)으로 훌쩍 세월을 먹은 이들에게 18년 전의 고통은 이젠 추억이 됐다. 이진영씨가 『許일병이 죽고 나서 그날 저녁 대여섯 명이 헌병대 차로 실려간 것 기억나지요? 가자마자 곤봉을 무릎 안쪽에 끼운 채 꿇어앉혀 놓고 「이×× 네가 죽였잖아」 하면서 군홧발로 내 허벅지를 밟는데 나중에는 일어나질 못하고 벌벌벌 기어갔어요. 孫상병님이 탄창을 許일병 시체에 가져다 놓았다고 뺨 40대를 맞고 얼굴이 퉁퉁 부어 나오는데, 다음이 내 차례더라고요』라고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孫씨는 『헌병대 당직대에 가서 밤만 되면 밥도 안 먹이고 한 사람씩 부르는 거야. 「앞에 누가 다 얘기했어, 임마」 하는데 없는 사실도 불고 싶더라고. 헌병대는 그때 틀림없이 他殺에 중점을 두고 조사했단 말이야』라면서 『「제대할 때 강원도 땅에 두 번 다시 발을 들여 놓으면 성를 갈겠다」고 맹세하던 중대원들이 원근이 덕에 다시 만나니 원근이가 죽어서도 좋은 일 하는 거지, 뭐』라고 했다. 18년 만의 再會 전주고속버스터미널 지하 다방에서 全모씨의 점포를 찾아가기 위해 16소초원 성순규 당시 상병을 기다렸다. 성순규씨는 잠시 金○○(1999년 사망) 중대장의 전령을 지내기도 했고, 사건 당일 주간 근무자로서 중대원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그는 사실상 중대원의 「알리바이」를 손에 쥐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사건당일 오전 9시55분에서 10시 사이에 본부 막사 쪽에서 총성 한 발을 청취(최초 총성)하고, 이를 중대본부 全○○ 상병에게 상황보고한 인물이다. 이는 全상병이 1984년 4월4일 헌병대에서 작성한 진술서(238쪽)에도 나온다. 全상병과 「자연스런」 대질심문이 이뤄진다면 許일병의 미스터리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두 사람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일행은 전주시 완산구에 있는 「만화뱅크」를 찾아갔다. 全상병이 운영하는 만화대여점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자 30여 평되는 꽤 널따란 공간이 만화로 빼곡히 들어 차 있었다. 오후 4시 정도라 아직은 손님이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낯익은 사람들을 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全○○ 상병이었다. 옛 중대원들이 만나는 데도 포옹이나 뜨거운 악수는 없었다. 멋쩍은 웃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어색한 대화…. 이들을 이어 주는 마음의 끈은 뭐니뭐니 해도 18년 전의 군대 이야기였다. 『우리가 중대본부에서 25갤런짜리 기름이 잔뜩 든 드럼통을 잘못 굴려 16소초 지역으로 굴러내려간 것 알아?』 『맞아! 그때 그거 어떻게 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그 덕순이 주방장은 지금 뭐 한데?…』 조금 있다가 全씨가 『은행에 다녀 온다』면서 자리를 떴다. 은행 마감시간인 4시30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일행은 그가 동료들을 피한 것이 아닌가 낭패한 표정들이었다. 오후 5시경이 되자 예상을 뒤엎고 그가 나타났다. 全씨는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냥 술이나 마시고 옛날 이야기나 하자』면서 許일병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근처 음식점으로 이동하는 동안 全씨는 기자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全모씨가 횡단보도에서 기자에게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는데, 오늘은 중대원들하고만 이야기하고 싶으니 서울로 올라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술이 한두 순배 돌아가자 許일병 이야기가 나왔고, 全씨가 국방부 특조단 조사 발표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발언하자, 동료들은 기다렸다는 듯 말들을 쏟아냈다. 기자가 메모하자 全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첩을 치우고서 간신히 진정시켰다. 『헌병대에서 쓴 게 맞다고 생각해요?』 이진영 『全상병이 헌병대에서 쓴 자필 진술서에는 許일병이 오전까지 살아 있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全○○ 『헌병대에서 쓴 게 맞다고 생각해요? 국방부 특조단에서 무조건 찾아와서 「내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는데, 전화도 걸어대고 불쑥불쑥 찾아오고 하니까 아이들마저 노이로제에 걸렸다니까요. 김○○ 수사관도 수십 차례 전화를 하고 있고…. 오늘은 복잡한 얘기 그만두고 술이나 마시다가 돌아가세요』 이진영 『사건 전날 밤, 너는 상황병이었고, 나도 상황을 보다가 許元根이에게 「그만 자라」고 하고 누웠고, 신재영이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잖아. 盧중사가 회식을 끝내고 화가 났던 것은 사실이고. 중대장실을 나와 정성홍 하사를 깨우기 위해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워 있던 병사들을 툭툭 찼는데 손명조 상병이 선임하사가 취한 줄 알고 「왜 그러시냐」고 엉겁결에 부축한 상황이 있었고...』 全○○ (당황한 기색을 보임) 기자 『盧중사는 全상병이 살인범으로 지목하는 바람에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全상병의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압니까』 全○○ 『내가 당한 것은 그 이상이에요』 손명조 『全상병은 본 뜻과는 다르게 (이번 사건에) 휩쓸렸을 거야. 우리는 盧중사가 너(全상병)에게 소송을 건다는 것을 눌러 놓고 이 자리에 온 거야』 이진영씨가 全모씨에게 이번에 의문사委를 상대로 낸 명예훼손 청구소장을 보여 주자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진영 『盧중사가 고발한 것은 네가 아닌 의문사委라는 사실이야. 나중에 네가 고집을 부리면서 의문사委를 代辯(대변)하면 법정에서 만나는 방법 밖에는 없어. 우리는 그것을 미연에 막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을 알아두거라』 全○○ 『회식을 끝내고 나오면서 장중위가 盧중사를 껴안은 적은 없었나요?(全상병은 의문사委 진술에서 장중위가 껴안았다고 했음-필자 注)』 이진영 『장중위는 盧중사보다 먼저 내려갔잖아』 손명조 『이렇게 진술이 엇갈리니까 우리가 국방부 조사 때도, 의문사委 조사 때도 요청했듯이 대질심문을 하자는 것 아니냐』 기자 『양측 간에 진술이 엇갈릴 때는 수사에서 대질심문이라는 방법을 씁니다. 왜 국방부 특조단의 대질심문에 응하지 않았나요?』 全○○ 『9 對 1인 상황에서는 아무리 「진실」이라도 나 혼자 나서기에는 어려웠어요. 난 「새가슴」이니까요』 손명조 『(의문사委에서) 잘못 진술한 부분을 이야기해라』 全○○ 『뭐가 잘못 됐다는 겁니까. 그럼 밤을 새워서라도 내무반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볼까요?』 너무 팽팽한 긴장이 흐르자 화제를 돌렸다. 7사단 지역의 GOP철책부대에 투입되기 전 「가시라골(마을 이름)」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하자 굳은 표정들이 풀렸다. 이들은 당시 중대장을 「508 관측초소(OP)의 무솔리니」라고 불렀다면서 중대장을 화제로 삼았다. 『보상금 2500만원도 거부』 국방부 특조단은 발표문에서 『중대장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중대원들에게 폭행 및 가혹행위와 非인격적인 대우를 일삼았다』면서, 『그 결과로 許일병은 중대장 전령 업무에 대한 심적부담으로 향후 軍생활에 대한 희망이 없어졌다』고 결론지었다. 특조단은 구체적인 예로 몇 가지를 들었다. ─중대장은 수시로 폭행, 구타, 얼차려를 일삼았고, 일부 요원의 정기휴가를 취소한 일도 있다. ─장○○ 중위가 부하 통솔을 잘못한다는 이유로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전투화발로 우측 대퇴부를 폭행했다. ─중대본부 요원 중 손○○가 『소대로 보내 달라』고 건의하는 것을 건방지다는 이유로 주먹과 발로 얼굴, 가슴 등을 수회 폭행하였다. ─사건 당일 중대장 순찰 전 『전투복 상의를 잘못 다림질했다』는 이유로 『당번병이 일을 저따위로 하니 어떻게 중대장을 하겠느냐』며 심한 면박을 줬다. ─중대장은 중대본부 요원들에게 가혹행위와 하루 2~4시간만을 취침하게 하고 자신의 식사준비를 강요하는 등 괴롭혔으며, 許元根이 『전령을 못 하겠다』고 건의하자 오히려 꾸중하며 許元根의 교육을 지시하였다. ─許일병이 중대장에게 소대로 보내 줄 것을 건의했으니 중대장은 『너는 나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같이 생활해야 한다』며 묵살했다. 특조단은 『許일병은 입대 동기인 홍○○에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고, 全○○ 상병이 사건 당일 「왜 휴가복을 빨러 가지 않느냐?」고 묻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자살하기 며칠 전 중대원 신○○ 상병에게 「다른 사람 총으로 자살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고 말한 사실이 있는 등 사전 자살 관련 징후가 있었다』고 밝혔다. 중대장 김○○ 대위와 회식을 같이 했던 장○○ 중위는 사건 발생 당일 취침 전 작성한 일기에서 「너에게 그토록 모진 忍耐(인내)가 있었기에 지금에 와서 누웠느냐… 너는 그것을 大를 위한 희생으로 판단했느냐, 그렇다. 너의 용기 아닌 용기로 모든 것이 벗겨지고 또 드러나겠구나… 많은 미스터리가 어떻게 풀릴지 모르나 너만은 알고 있겠지. 당황해 하는 너의 상관(중대장을 의미)을 보며 조소하고 있겠지」라고 쓰는 등 許일병이 중대장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했을 가능성을 적고 있다.-기자 注> 성순규 『중대장은 부인과 아들에게도 잘 대해 주질 않았습니다. 중대원들에게는 입버릇처럼 「나는 별 달 놈이야」라고 했고요. 군복은 언제나 칼같이 다려져 있어야 하고, 군화는 반짝반짝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라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어요. 전투복이 지저분하면 용납을 안 해 갈아입고 나갔습니다. 중대장은 가끔 「내가 너희들 잘 되게는 못해 줘도 못되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해서 부하들을 겁주곤 했지요』 2차로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기자 全씨는 긴장이 풀리는지 기자에게 고향을 묻는 등 거부하는 자세가 누그러졌다. 全○○ 『내게 어떤 답변을 기대하는 거예요?』 이진영 『너, 그날 밤에 盧중사가 정말 許元根이를 쐈다는 거야?』 全○○ 『(약간 멈칫거리며)당시 내가 본 것은 정확합니다』 기자 『아침에 許元根 일병을 본 사람들이 오용근, 이진영, 신재영씨 등 여럿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全○○ 『…』 이 날 중대원 두 사람은 예전의 순박했던 全모씨가 아니라며 안타까워했다.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눈동자를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시종 자신감 있는 태도로 중대원들의 설득을 거부했다. 全모씨는 호프집에서 『사람들은 내가 의문사委에서 2500만원을 받고 양심을 판 놈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사실 괴롭다. 그 돈은 내게 「껌값」이다. 돈을 수령하라는 의문사委의 전화와 내용 증명이 왔길래 거부하는 뜻을 밝히면서 반송했다』고 말했다. 손명조씨가 『법정으로 가기 전에 마음을 돌리라』고 이야기를 하자 全모씨는 『협박하느냐』면서 『결국 국방부 특조단과 같은 이야기네요!』라고 말했다. 그는 『충분히 잘 알아들었고, 李병장님, 孫병장님과 같은 소리를 낼 수 있게끔 노력하겠다. 내 입장에서는 아직 명확하게 이것이라는 것은 없다』고 이야기했다. 『盧중사가 널 용서한다고 하더라』 이진영 『내가 병마개를 던지면 앞 아니면 뒤다. 즉, 「도」 아니면 「모」다. 「도」를 「모」라고 우긴다고 「모」가 되나?』 全○○ 『끝장을 봐야 하는 옛날 성격 그대로네요』 이진영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마라. 盧중사가 許일병에게 총을 쏘았고 우리가 몰랐다고 하자. 그럼 盧중사가 밤중에 혼자 許일병을 끌고 나갔냐. 그럼 (본 사람은 당신 하나밖에 없으니까) 당신은 盧중사와 共犯(공범)이라는 이야기밖에 더 되냐』 全○○ 『…』 이진영 『내가 매듭을 끊어 줄게. 盧중사가 당신을 용서한다고 했다. 지난번 대구에서 만났을 때도 울더라. 대신 따귀를 한 대만 때리고 용서한단다. 서로 만나보면 무슨 갈등이 있겠니』 全○○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질 겁니다』 이진영 『너를 만나러 온 것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우리는 너를 구하고 싶지만 판단은 전적으로 너 스스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야』 全○○ 『12월9일 서울에 올라가거든 볼 게요』 중대원 두 사람은 이튿날 새벽 2시30분까지 10시간이 넘도록 결론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全모씨는 중대원들의 설득을 뿌리치고 『아침 9시경에 만나 아침 식사로 콩나물 국밥 한 그릇이나 먹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9시경 약속 장소에 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그의 소재를 알 만한 사람에게 연락했으나 휴대전화를 꺼놓았는지 연락이 안 된다는 말만 들었다. 다음날 기자는 盧중사와 통화했다. 盧중사는 『나도 全○○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는데… 어제 全○○를 만나려고 연락오기를 기다리면서 집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했다. 기자는 최근 許元根 일병 사망사건 관련 취재를 위해 의문사委 김○○ 조사관과 통화를 시도했었다. 기자의 신분을 밝히고 『몇 가지 許일병 사망사건과 관련한 질문을 하려고 한다』고 하자, 『나중에 통화하자』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또 한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방부 발표, 『의문사委가 날조ㆍ조작』 2002년 11월28일 국방부 특별조사단(단장 鄭壽星 육군중장)은 1984년 4월2일 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 3연대 3중대 소속 許元根 일병 사망사건과 관련, 『許일병은 자살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특조단은 『의문사委가 자살을 타살로 날조ㆍ조작해 許일병 동료 부대원들의 인권을 말살했다』면서 이례적으로 「날조ㆍ조작」이라는 강한 표현을 써가며 의문사委의 수사내용을 정면으로 뒤집는 발표를 했다. 鄭단장은 『의문사委 발표와 달리, 사건 당일 오전 2~4시 사이 중대본부內 총기오발 사건이 없었으며, 당일 盧讓植 중사를 포함한 모든 중대원들의 알리바이도 확인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1984년 軍 복무 중 사망한 許元根 일병의 죽음의 진실은 「자살」로 귀결되는 것인가. 당시 軍 당국의 수사결과와 의문사委의 조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당시 軍 당국의 부검기록에 따르면 許일병은 총기를 몸으로부터 수cm 내로 접근시킨 상태에서 세 발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許일병이 숨진 채 발견된 곳은 1984년 4월2일 오후 1시20분쯤 중대본부에서 30m쯤 떨어진 폐유류고 옆이었다. 당시 許일병은 가슴에 두 발,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에 한 발의 총을 맞았으며, 앞 이마는 총탄이 관통하면서 크게 함몰돼 있었다. 군복의 오른쪽 가슴에는 5.5×3cm, 왼쪽 가슴엔 6.5×4.5cm 크기의 화염에 그을린 흔적인 燒痕(소흔)이 남아 있는 것으로 돼 있다. 부검의는 소견서에서 銃傷(총상) 주변에 남은 그을린 흔적과 화약 성분으로 보아 許일병이 총을 거의 몸에 밀착시킨 상태에 발사(근접사)된 총탄에 의해 숨진 것이라고 추정했다. 부검기록에는 許일병이 총을 맞은 가슴 두 곳과 머리 등 세 곳 모두에서 근육이 위축되는 「생존 반응」이 나왔다고 돼 있다. 許일병은 마지막 총에 머리를 맞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軍 당국은 일반적으로 자살자들이 총기를 몸에 밀착시킨 상태에서 쏜다는 점을 들어 許일병이 자살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에 반해 2002년 8월20일 의문사委의 중간조사결과 발표는 국방부의 조사결과와는 정면으로 배치됐다. 의문사委는 許일병 사망 사건에 대해 『許일병은 타살됐다. 현장에 있던 중대원뿐 아니라 상부의 조직적 개입으로 자살사고로 조작 은폐됐다』고 밝혔다. 유가족들은 사건 당시부터 「자살하는 사람이 M16 총으로 세 발씩이나 쏠 수 있는가」, 「사고당일 휴가를 가기로 한 사람이 자살할 이유가 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해 왔다. 의문사委 발표 의문사委가 당시 발표한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84년 4월2일 許일병이 근무하던 부대 안에서 간부들의 회식이 있었다. 회식 中 중대장 전령이었던 許일병은 안주를 나르는 등 술시중을 들었고, 새벽 2~4시쯤 회식을 하던 간부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술에 취한 한 하사관이 실탄이 장전된 총을 집어 난동을 부리다 실수로 총이 발사됐고 許일병은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져 숨졌다. 그날 새벽 4~6시 사이에 김○○ 중대장(대위)은 곧 이 사실을 대대에 有線(유선) 보고했고 대대는 연대로 이 사실을 보고한다. 대대장이 아침 6~7시 사이에 사건이 벌어진 3중대에 와서 중대장 및 현장에 있었던 간부들과 사건 대책을 논의하고 간다. 중대장은 현장에 있던 10여 명의 사병들을 하나씩 중대장실로 불러 내무반에 흘러 내린 許일병의 피를 닦아내기 위해 물청소를 지시하는 등 할 일을 알려 주고 알리바이를 조작한다. 오전 10~11시 중대원들이 許일병 시체를 폐유류 창고로 옮긴 뒤 왼쪽 가슴과 머리에 한 발씩 더 쏴 자살로 위장했다. 중대장은 오전 10~11시 총성을 듣고 폐유류 창고에 가보니 許일병이 숨져 있었다고 허위신고한다.> 「중대장이 許일병에게 자살 원인 제공 추정」 국방부 특조단은 최종 조사결과 발표에서 사건의 기록과 부대원 진술을 토대로 사건 당일 오전 6시에서 9시30분 사이에 일조 점호, 내무반 정리, 전입신병 신고 등 부대 일상업무가 평온하게 진행됐으며, 오전 10~11시 사이 세 발의 총성이 보고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특조단은 『현장에서 회수된 세 개의 탄피는 모두 許일병 총에서 나온 것으로 판명됐다』며 『이는 盧중사가 자신의 총으로 許일병을 쐈다는 의문사委 결론이 잘못됐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가장 논란의 초점이 됐던 세 발을 쏴 자살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매우 희귀한 例지만 가능하며 1995년 10월1일 육군 산악부대 위모 소위의 사례가 許일병의 경우와 똑같았다』며, 『법의학 토론회에서도 대부분의 법의학자들이 사망 원인을 자살로 판정했다』고 말했다. 이번 특조단 조사에서는 許일병의 자살을 추정할 만한 새로운 진술도 확보됐다. 중대원 신재영씨는 『자살하기 며칠 전, 함께 식사를 추진하던 許일병이 「다른 사람 총으로 자살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하고 물어 「(총 주인은) 영창간다」고 이야기해 주었다』고 진술했다. 특조단은 자살 동기로 『괴팍한 성격을 가진 중대장 밑에서 전령 업무를 보면서 갖게 된 심적 부담 등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조단은 이례적으로 이번 발표에서 『의문사委가 날조ㆍ조작』했다는 직설적이고도 강한 표현으로 국방부의 所信을 밝혔다. 기자회견에서 「날조ㆍ조작」이라는 강한 표현을 쓴 국방부에 대해 모 방송사 기자가 『국방부가 같은 국가기관인 의문사委의 조사결과를 두고 어떻게 「날조ㆍ조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鄭단장은 『조작을 어떻게 조작이라고 안 할 수 있는가. 조작이라는 표현은 의문사委가 먼저 쓴 표현임을 밝혀 둔다』고 말했다. 특조단은 『全상병을 제외한 나머지 타살 정황 진술자들은 대부분 의문사委의 각본에 따른 유도질문이나 강요에 의해 허위진술을 했다』고 말했다. 일례로 의문사委 조사 당시 「내무반에서 피 제거를 위한 물청소」를 했다고 진술한 당시 14소초원 윤모씨는 특조단에서 『내무반 물청소를 봤다고 진술하자, 의문사委 조사관이 「흘린 피를 닦은 것 아니냐」며 유도신문을 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답변했다』며 『그런데도 내가 직접 바닥에 흘린 피를 물로 닦는 장면을 본 것처럼 진술조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특조단은 『의문사委는 盧중사의 키가 許일병보다 22㎝나 작은 데도 현장 검증 때 총이 수평으로 발사됐다는 부검 사실과 맞추기 위해 盧중사 대역을 許일병 대역보다 키가 큰 사람으로 내세웠다』고 주장했다. 국방부 특조단은 『의문사委는 軍의 사건을 조사하면서 軍의 특성과 당시 주변정황 등을 살피지 않고, 조사관의 짜맞추기式 시나리오에 의해 조사하고 결과를 발표했다』며 45개 항목에 이르는 「의문사委에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보냈다. 『의문사委는 이 사건을 再조사하면 안 된다』 의문사委는 2002년 11월28일 국방부 특조단의 조사 결과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고 『특조단 조사는 과거 헌병대 조사를 의심없이 그대로 인정한 것으로, 진실 규명보다 의문사委 결론을 뒤집기 위한 조사였다』고 반박했다. 의문사委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조서를 날조ㆍ조작했다는 국방부 발표에 대해 『진술자들이 진술 후 직접 조서를 확인하고 날인을 했다』고 반박했다. 현장검증 조작 부분에 대해서는 『현장검증에 핵심 진술자 全모씨가 참여하지 않은 것은 본인이 언론 공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대신 조사관이 全씨가 보여준 대로 사고 당시 모습을 再演(재연)했다』고 해명했다. 총성 실험을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사고현장에 있었던 방호벽이 지금은 없어졌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의문사委는 이날 기자회견을 자청, 국방부의 발표를 반박하면서 再조사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鄭壽星 특조단장은 『의문사委가 이 사건을 날조와 조작으로 일관했고 許일병 사건이 민주화운동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결정난 만큼 의문사委는 이 사건을 再조사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鄭단장은 『의문사委는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따지는 기관일일 뿐이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없는 許일병 사건은 의문사委에서 다루지 말았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국방부가 이번 사건에 대해 「날조·조작」 등 직설적인 표현을 써가며 의문사委를 정면 공격한 것은 의문사委 발표가 軍의 신뢰에 치명타를 날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의문사委, 他殺을 전제로 搜査 의문사委가 許일병에게 총을 쏜 당사자로 지목한 盧중사는 2002년 11월27일 서울지법에 의문사委 韓相範(한상범) 위원장 등 다섯 명을 상대로 1억원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盧중사는 법정 대리인인 林炚圭(임광규)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에서 의문사委의 위원장, 상임위원은 ▲수많은 장교들, 하사관들, 병사들의 성실성을 굳이 믿지 않고 그 성실성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士兵 한 사람 정도의 말만 믿은 것 ▲근대 法治主義의 기본, 즉 주장이 있으면 반대주장도 들어 보는 것, 증거를 제시하면 反證(반증)도 제시케 하는 것, 참고인의 진술이 있으면 그 반대진술에 의해 참고인끼리 對質(대질)시켜 보는 것 등인데 이를 일부러 피하는 기본이 안 된 조사 ▲원고가 許元根 일병을 총격 사망케 했다는 「진리」를 기준으로 그와 다른 진술을 하는 원고나 참고인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모욕을 하거나 나중에 불이익하게 만든다고 협박까지 한 점 ▲『공소시효가 지났다. 제보에 대해 포상금을 준다』는 식의 유혹 등의 違法(위법)수사를 한 점 등등 허위사실 명예훼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盧중사는 소장에서 『韓相範 위원장, 金焌坤 상임위원은 수사관 이○○, 김○○, 박○○의 뚜렷한 엉터리 수사를 인식하고 그 인식에 따라 허위사실을 공표하지 말았어야 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상범 위원장, 김준곤 상임위원은 어떤 表皮的(표피적) 成果(성과)를 좇아야 할 무슨 動機(동기)가 있는 것처럼 허위사실을 대담하게 공표함으로써 멋모르는 대다수 신문 방송으로 하여금 이를 그대로 게재 방송하여 원고(盧讓植)의 명예를 무참히 짓밟고 나아가 원고가 아끼고 사랑하고 보람으로 여기는 우리 군대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盧중사 이외에도 사건 당시 許일병을 조사했던 7사단 헌병대장 양모 중령과 조사계장 이모 준위는 2002년 9월 의문사委 위원장과 2명의 상임위원을 명예훼손으로 서울 지검에 고발했다. 의문사委에 의해 許일병 사건 은폐자로 지목됐던 대대장 전모(현역 대령)씨도 소송을 낸 상태다. 손모 상병, 안모 일병 등 여섯 명의 중대원도 소송을 준비중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민ㆍ형사 재판에서 許일병 사건의 진실에 대해 어떤 결론이 나올지 주목된다. 국방부는 같은 국가기관이어서 소송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고위관계자가 전했다. 許일병 사망사건에 따른 법정공방의 불씨는 언론에까지 옮겨붙고 있는 양상이다. 그동안 의문사委 발표를 진실이라고 단정하여 과장 보도로써 국군을 모독하고 중대원들의 인권을 무시한 일부 언론도 이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다. 2002년 8월20일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許元根 일병이 술 취한 상관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자살로 은폐 조작된 사실이 18년 만에 밝혀졌다고 단정하는 보도를 했다. 8월20일자 MBC TV의 아홉 시 뉴스데스크의 앵커는 『軍 복무중이던 사병이 술 취한 상관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을 軍 부대가 조직적으로 자살인 것처럼 은폐했던 사실이 18년 만에 밝혀졌습니다.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서 시체에다가 추가로 총질까지 해댔습니다』라며 「총질」, 「해댔다」 등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보도했다. 일부 언론의 단정 보도, 국군의 명예에 致命打 2002년 8월20일 「軍서 自殺로 조직적 은폐」라는 대다수 언론의 보도가 나간 일주일 후인 8월28일자 조선일보에는 「許일병 부대원들 『조직적 은폐 조작은 없었다』」라는 기사가 나갔다. 의문사委가 1984년 軍 복무 중 숨진 許元根 일병 사건에 대해 『軍에서 조직적으로 타살을 자살로 은폐 조작했다』고 발표한 것과 관련, 당시 사고 현장에 있었던 부대원 대부분이 이를 정면 부인해 논란이 일고 있다는 기사내용이었다. 朝鮮日報 사회부 취재팀이 2002년 8월23일부터 27일까지 신원이 확인되는 부대원 13명 중 연락 가능한 9명을 인터뷰한 결과, 부대원들은 『우리도 許일병이 총 세 발을 맞았는데 自殺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며 『그러나 의문사委 발표 내용은 당시 상황과 전혀 다르며 우리는 진상조사 과정에서 그처럼 진술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는 보도였다. 朝鮮日報社는 2002년 11월8일 『의문사委의 「許일병 의문사」와 관련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관련 당사자들의 주장을 빠짐없이 취재ㆍ보도했는데도 시사저널이 2002년 9월12일자 「許일병 의문사 진상추적, 조선일보가 틀렸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마치 朝鮮日報社가 고의적으로 사실을 왜곡ㆍ조작한 것처럼 악의적으로 보도했다』며 서울지법에 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었다. 이어 朝鮮日報는 11월28일 『매주 금요일 밤 방송하는 MBC 미디어비평 프로그램이 朝鮮日報 보도에 대해 허위사실을 고의적으로 방송함으로써 명예를 훼손했다』고 MBC와 미디어비평의 제작팀, 기자, 앵커 등 여덟 명에 대해 3억원을 연대 배상하라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냈다. 소음수치 「91.3db」의 의미 2002년 11월27일 국방부 특조단은 최종 발표를 하루 앞두고, 노양식ㆍ오용근ㆍ손명조ㆍ이진영ㆍ권오진ㆍ안병덕씨 등 당시 중대원 6명과 보도진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건이 발생한 강원도 화천군 7사단 3중대 본부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기자는 헬기로 서울 용산기지를 출발, 45분 정도 비행해 殘雪(잔설)이 군데군데 있는 화천에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던 군용 지프에 나눠 탄 일행은 험한 산길을 따라 4km 가량 달려 3중대 본부 앞에 있는 폐유류고에 내렸다. 특조단 鄭壽星 단장은 『당시 의문사委의 조사는 盧중사와 목격자인 權모씨가 입회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조사관의 추리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오늘 검증으로 자살이 가능한지에 초점을 맞춰 검증을 하겠다』고 말했다. 의문사委는 許일병이 사건 당일 새벽 내무반에서 盧중사가 쏜 총탄에 맞았다고 발표했지만, 당시 내무반과 초소에 근무했던 許일병 동료 부대원들은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말해 사건 당시 총기 발사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어 왔다. 의문사委는 『내무반 주위에 방호벽이 있는 상황에서 밀착사격을 했다면 총소리가 작아 내무반 내부는 물론 외부에 안 들릴 수 있다』고 설명했었다. 이를 시험하기 위해 특조단은 13평 남짓한 내무반에서 군복을 입힌 돼지 사체에 M16 소총을 밀착해 발사했다. 「깡~」하는 폭음과 함께 귀가 멍해졌다. 만일 盧중사가 許일병을 내무반에서 총기오발로 쏘았다면 자던 사람들이 이 소리를 못 들었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피가 2m 정도 튀었고 화약냄새가 내무반을 진동했다. 특조단 수사관이 측정한 소음수치는 91.3db이었다. 순간적으로 戰車가 굉음을 울리고 지나가는 소리라고 했다. 중대본부 막사 밖에서 내무반내 총성소리를 들어 보니 50m 정도 떨어진 초소에서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특조단은 이를 근거로 『최전방에서, 그것도 새벽에 총기 사고가 있었다면 당장 총성이 보고돼 사단급 이상 수준에서 비상이 걸렸을 것』이라며 의문사委의 발표를 부정했다. 동료 부대원 손모씨는 『이렇게 큰 소리가 나는데도 어떻게 부대원 전체가 총소리를 못 들을 수가 있느냐』며 『의문사委가 부대원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정황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許일병의 자살 상황을 代役(대역)한 병사는 許일병과 신체조건(키 181cm)이 같았다. 왼손으로 M16 소총의 상단부를 잡고 오른손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가슴에 두 발을 쏘고, 몸이 견디기 어려워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총은 싸리나무 울타리에 끼어 있었다), 왼손으로 총열의 가스관을 잡고 오른손으로 頭部(두부)를 향해 격발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특조단은 의문사委가 타살의혹으로 주장한 양쪽 가슴의 총상 색깔 차이에 대해서도 실험을 했다. 의문사委는 오른쪽 가슴 총상 색깔이 검게 나타났고, 왼쪽 가슴 총상 색깔이 붉게 나타난 것은 총격 시간이 차이라고 주장해 왔다. 특조단 수사관이 군복을 입힌 돼지에 接射(접사), 近接射(근접사)의 두 가지 방법으로 총을 쏘았다. 接射는 군복이 지름 3cm가량의 십자형으로 찢어지며 총상부위가 검게 나타났다. 근접사는 이와는 달리 총상부위가 파열되며 붉은색을 띠었다. 특조단 수사관은 『許일병 가슴의 두 군데 총상의 색깔이 다른 것은 의복과의 밀착 여부에 따라 의복 사이로 매연이나 화약이 빠져나가는 양이 다르기 때문이지, 피격된 시간차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黃迪駿(황적준) 고려大 의대 학장은 2002년 11월25일 국방회관에서 열린 「법의학 공개토론회」에서 『세 가지 총창을 살펴볼 때 타살보다 자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생존시간과 활동을 볼 때 새벽 2~4시에 한 발, 그리고 7~8시간 뒤에 다시 한 발을 맞았다는 것은 모순이다. 당시 날씨는 영하 5도였고, 체감온도는 이보다 더 떨어진 영하 9도였다. 초탄을 한 방 맞고 8시간 정도 밖에 있었다면 아마 凍死(동사)했을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 가슴의 총상 색깔 변화도 시간차가 많이 난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全상병도 아침에 許일병을 보았다』 사건 당일 오후 1시20분경 식사를 가지러 가다가 許일병의 시체를 발견한 권오진, 안병덕씨 두 사람이 증언을 했다. 『중대본부에서 나오면 당시는 오솔길이었습니다. 모퉁이를 도는데 許일병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순간 許일병이 자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철모는 안 보였고요. 가까이 접근해 보니 머리 중간 쪽이 뻥 뚫려 있어 섬뜩했습니다. 무서워서 가까이 못 가고 5m 전방까지 가서 보다가, 놀라서 밥을 타러 가던 밥통도 버리고 중대본부로 뛰어올라갔습니다. 중대본부에는 신재영, 全○○ 상병이 있었습니다. 全상병이 「야, 임마. 오늘이 만우절도 아닌 4월2일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얼굴이 장난스런 표정이 아니니까 「거짓말이면 혼난다」면서 두 사람이 뛰어내려 갔죠. 신재영 상병이 許일병의 명찰을 확인하고 許일병임을 확인했습니다. 許일병은 생각보다 피는 많이 흘리지는 않았습니다』 오용근 병장, 이진영 상병, 신재영 상병, 이○○ 하사, 全○○ 상병(당시 계급) 등은 사건 당일 아침 許일병을 본 목격자들이다. 아침에 許일병을 본 목격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새벽 2시경 盧중사의 오발로 許일병이 죽었다는 의문사委 발표를 부인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특히 全상병이 1984년 4월4일 헌병대에서 작성한 진술조서(237~238쪽)를 보면 許일병이 아침까지 생존했던 사실이 분명하게 적혀 있다. <본인은 소속대 1ㆍ3종 계원으로 근무하는 자로서 당일 1984년 4월2일 오전 6시10분경 기상하여 막사 옆 10m 정도 떨어진 공터에서 병장 오○○의 인솔 아래 81mm 관측하사 이○○, 이병 허원근(일병의 誤記임), 81mm 관측병 상병 안○○, 상병 전○○, 이병 권○○ 등이 모여서 오전 6시30분까지 일조점호 행사를 취했다. 점호 후 병장 오○○, 상병 손○○, 이병 권○○, 이병 허원근(일병의 誤記임)은 조식 및 경유를 운반하러 단독군장으로 오전 6시35분경 16소초로 이동했다… 중략… 오전 9시30분 중대장은 16소초장과 이○○을 대동하고 순찰을 출발했다… 중략… 허원근은 뚜렷한 할 일이 없었던지 평소하던 대로 행정반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몇 시인가는 모르겠지만 허원근이가 교환대 옆 병기대 앞에 엉거주춤 서있길래 『왜 휴가복 빨러 안 가냐』 물었더니 아무 대꾸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게 마지막 본 것 같습니다.> 누가 盧중사를 보상할 것인가? 다음날 휴가 출발을 알고 있었던 이진영 상병은 許일병 대신 중대장과 순찰동행을 한 사람이다. 그는 『중대장이 순찰 나가는데 全중대원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중대장이 철모를 쓰려고 하는데 턱끈이 낡아 지적을 받았다. 「너는 보급병이면서 중대장 턱끈도 제대로 못 갖추느냐」면서 자신의 철모로 내 철모를 때렸다. 그리고 許일병에게 「넌 전령이면서 이런 것도 못 하냐」며 야단을 치고는 순찰을 나갔다. 내가 철모로 맞았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피를 닦기 위해 내무반을 물청소했다는 의문사委의 주장에 대해 오용근 병장은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손으로 뿌려가며 먼지가 안 날 정도로 빗자루로 쓰는 것을 물청소라고 한 것이다. 16소초에서 5갤론 물통을 지게로 지어다가 밥과 음료수로 쓰는데 내무반을 흥건히 적실 정도로 내무반 청소를 할 수는 없다. 許일병이 죽고나서 대대장이 온다니까, 높은 사람이 오면 청소를 하는 것은 기본 예의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국방부는 『인권을 가장 중시하여야 할 의문사委가 사건을 날조 조작함으로써 한 사람을 살인범으로 만들고 인권을 말살하였다』고 단정했다. 그렇다면 의문사委와 일부 언론에 의해 許일병을 사살한 것으로 지목되어 온갖 수모를 당한 盧중사의 인권은 어떻게 되는가. 盧중사와 함께 무너져 내린 국군의 명예는 어떻게 되는가.●

입력 : 2002.12.28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사진

오동룡 ‘밀리터리 인사이드’

gomsi@chosun.com 기자클럽 「Soldier’s Story」는 국내 최초로 軍人들의 이야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軍隊版 「피플」지면입니다. 「Soldier’s Story」에서는 한국戰과 월남戰을 치룬 老兵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후손들에게 전하는 전쟁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또한 전후방에서 묵묵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軍人들의 哀歡과 話題 등도 발굴해 기사로 담아낼 예정입니다. 기자클럽 「Soldier’s Story」에 제보할 내용이 있으시면 이메일(gomsichosun.com)로 연락주십시오.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