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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월간조선> 인터뷰로 본 이한동 : 한때 대권주자였던 이한동은 어떤 인물인가

최초의 국회 인사청문회 출신 총리, 여야 모두로부터 인정받은 정치인

[편집자 주] 지난 8일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빈소에는 '협치의 거목'으로 평가받았던 고인을 추모하는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3김시대' 정치 격변기의 한복판에 서 있던 고인은 율사 출신의 6선 의원에 내무장관, 국회 부의장을 거쳐 국무총리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다. 보수 정당에 몸을 담았지만, DJP 연합으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서 3번째 총리도 맡는 등 초당적 협력과 타협을 존중해 여야 모두로부터 "협치와 타협을 앞장서 실천한 의회주의자"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통합과 화합을 중시하는 정치인이었다. 국무총리 시절 가진 <월간조선> 2000년 12월호 인터뷰에서 "태조 왕건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를 다시 소개한다.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가 9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국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한동 전 국무총리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12 2000 MAGAZINE

 

 

 

 

[인터뷰] 李漢東 국무총리

『王建의 리더십을 생각한다… 국가보안법 개정은 우리만 해선 안 된다』

 

취임 7개월 만의 인터뷰
  그는 매일 아침 6시면 일어난다. 그리고는 걷는다. 러닝머신에 올라서서 빠른 걸음으로 5㎞쯤 걷는다. 기계 위에서의 제자리 걸음이므로 지루하다. 그럼에도 그는 걷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올해 예순 다섯인 李漢東(이한동) 국무총리는 정치적으로 「마지날 맨」(marginal man:境界人)」이라 할 수 있다. 保守(보수) 성향의 政客(정객)으로 잘 알려진 그가 進步(진보) 성향이 강한 金大中(김대중) 정부에서 총리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입지는 保守와 進步를 가르는 담장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듯하다.
 
  그는 자민련과 민주당의 경계선 위에 서 있다. 내각제 改憲(개헌) 약속 불이행과 4·13 총선을 둘러싸고 파열음을 내고 있는 자민련과 민주당의 공조체제를 가늘게나마 잇고 있는 존재로서, DJP 연합정권을 유지하는 고리 역할을 그가 맡고 있다. 동시에 그는 DJ와 JP의 한가운데에 서 있기도 하다. 국무총리로서 金大中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또한 자민련 총재로서 金鍾泌(김종필) 명예총재를 대신해 자민련의 대표역을 하고 있다.
 
  경계선 위를 걷는 사람의 처신과 행보는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만 한쪽으로 기울어도 담장 주변이 금세 시끄러워진다. 그래서인지 요즘 그의 목소리를 듣기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총리에 취임한 지 6개월이 넘었음에도 자신의 목소리나 색깔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한켠에서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汎(범) 여권의 차기 大權(대권)후보로 거론되는 듯하나 그는 총리직에 충실할 뿐이라며 손을 내젓는다.
 
  그러면서 그는 東西(동서)간 지역갈등 해소와 국민통합을 위해서는 고려 태조 王建(왕건) 같은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가 가장 즐겨 보는 드라마도 KBS-TV의 대하 역사극 「태조 왕건」이다.
 
  DJ와 JP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은 그의 行步(행보)를 조심스럽게 하는 境界人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만약 DJ, JP 두 사람이 합심해서 밀어줄 경우 여권의 「숨은」 次期(차기) 카드이기도 하다.
 
  인터뷰는 11월7일 총리 집무실과 공관에서 7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총리의 하루 일정을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십시오.
 
  『매일 일기 쓰듯이 기록하고 있어요. 정기 국회가 열렸던 지난 9월1일 것을 알려 줄게요. 그날 오전 8시 총리공관에서 國情院長(국정원장) 보고를 받았고, 10시에 한의학 국제박람회에 갔어요. 11시엔 국제 기독교 용품 미디어展(전)에 참석하고 바로 이어 국제 자동화 전문기기 전시회에도 참석했어요. 공관으로 돌아와 YTN(연합TV뉴스) 간부들과 오찬을 하고, 오후 2시 정기국회 개회식에 참석했습니다.
 
  오후 3시 반에는 대통령께서 중앙재해대책본부 순시를 오신다고 해서 거기로 갔죠. 이어서 진주산업대학 총장 정해주씨에게 임명장을 주었고 오후 4시엔 규제개혁위원회의 새 위원들에게 위촉장을 수여했습니다. 오후 4시 반엔 SBS(서울방송) 축구채널 開局式(개국식)에 가서 축사를 했어요. 저녁에는 새로 부임한 駐韓(주한) 미국 부대사와 만찬을 했어요. 10분, 20분을 거의 매일 쪼개서 쓰고 있어요』
 
  ―國情院長 보고는 정례적으로 받습니까.
 
  『國情院長이 대통령께 보고한 다음날, 대개 조찬을 하면서 보고를 받습니다. 과거 총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례적인 일입니다』
 
  ―일정이 너무 빡빡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에 주요 國政 현안을 챙기거나 구상할 겨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다음날 일을 나름대로 챙깁니다. 그래 놓고 매일 오전 9시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전체 간부회의를 소집해요. 총리비서실의 실장 이하 수석비서관 전원과 국무조정실의 실장 이하 조정관 등이 참석 멤버지요. 정무, 민정, 공보, 의전 順(순)으로 비서실 보고가 끝나면 국무조정실의 총괄조정관, 경제, 사회ㆍ문화조정관들의 정례 보고를 받습니다. 모든 분야의 國政 주요 현안은 거의 빠지지 않고 논의됩니다. 보고를 받은 뒤 분야별로 정리해 그 자리에서 지시합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은 확대 간부회의를 엽니다』
 
  ―총리로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대통령께서 평양을 공식 방문할 무렵입니다. 그때 의료보험 통합, 농·축·수협 통합 등을 둘러싸고 어려운 일들이 터졌습니다. 롯데호텔 파업이 있었고 노동계의 전국 파업이 예정돼 있었죠. 대통령께서 편안하게 평양을 다녀오시게 해야겠다는 부담감이 상당히 컸습니다』
 
  ―가장 골치 아픈 현안은 무엇입니까.
 
  『크게 보면 이 정부는 4大 부문에서 12개의 개혁과제를 선정해 마무리짓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國政과 관련한 상황판단은 비관적인 관점에서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책과 방안이 정해지면 모든 것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보면서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옛날엔 판결문을 집사람에게 구술했는데…』
 
 
  ―내각 통할은 어떤 식으로 하고 있습니까.
 
  『저는 취임 후 대통령께 말씀드려 내각을 크게 4大 부문으로 나눴습니다. 외교·안보·남북 분야, 경제 분야, 교육과 人的(인적)자원 개발 분야, 사회·문화·복지 분야 등 4개로 나눠서 관계장관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고 분야별로 한 분씩 주무장관을 지명했죠. 장관들이 충분한 논의를 하고 팀워크를 이뤄 분야별로 움직이도록 했습니다.
 
  관련 업무의 관계 장관회의는 주무장관이 主宰(주재)하고, 주무장관 회의를 제가 主宰합니다. 주무장관 회의 때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고정멤버로 참여시켰죠. 2週(주)에 한 번씩 여는 주무장관 회의에서 國政 전반에 걸친 현안을 파악하고 내각 차원의 충분한 토의를 거쳐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汎정부 차원의 팀워크를 확실히 할 수 있는, 그런 체제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골치아픈 일이 있으면 술 한 잔 마시고 잊고 싶다는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밤 늦은 시각, 컴컴한 공관에 혼자서 늦게까지 앉아 있을 때는 그런 충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음날 할 일을 생각해 보면 술을 마실 수가 없어요』
 
  ―과거 판사로 계실 때는 술을 마신 뒤에도 재판기록을 집으로 갖고 가, 판결문을 작성해 부인에게 받아 적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판사 시절엔 집에서 판결문을 많이 썼죠. 타이프도 없던 시절에 전부 손으로 써야 하는데 그게 참 힘들었어요. 그래서 집사람에게 받아 쓰라고 하면서 판결을 불러준 적이 있었죠. 그걸 다음날 재판장에게 갖다 주었는데, 이게 누구 글씨냐고 묻기에 집사람 글씨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요즘은 저녁에 공관에 들어가면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조간신문 가판도 읽고, 내일 일정표도 봐야 해요. 행사에 가서 연설할 원고들을 다 보다 보면 매일 열 두시가 넘습니다. 잠을 설치면 다음날 일정에 지장이 있어 조심하지요』
 
 
  납치사건 때 金大中 대통령 만나
 
 
  ―총리가 된 뒤에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공관에서 생활하니까 우선 생활방식이 달라졌어요. 염곡동에 살 때는 아침이면 어떤 날은 20~30명의 동지들이 찾아와 밥을 먹었는데 공관에 온 뒤는 집사람하고 둘이만 밥을 먹어요. 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 달라졌어요. 힘에 겨운 아주 무거운 짐을 지고 고개를 넘어가는 그런 사람의 심정으로 살아 갑니다』
 
  ―책을 읽을 틈은 있습니까.
 
  『얼마 전부터 뉴욕타임스 국제관계 칼럼니스트가 쓴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란 책을 읽고 있어요. 두 권으로 된 책인데 한 권은 집무실에 두고, 한 권은 공관에 두고 읽고 있습니다』
 
  ―직접 고른 겁니까, 누가 추천한 책입니까.
 
  『지난번 러시아 방문 때(10월9일~10월13일까지 공식 방문) 많은 경제인들이 같이 갔는데, 고등학교(경복고등학교) 후배인 全經聯(전경련)의 孫炳斗(손병두) 부회장이 컴컴한 항공기 기내에서 불을 켜놓고 책을 읽고 있었어요. 무슨 책인가 싶어 얻어서 읽어 봤는데 참 재미있었어요』
 
  ―총리에 발탁된 배경을 좀 소개해 주십시오.
 
  『金鍾泌 명예총재가 총리를 추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대통령의 뜻이 韓光玉(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을 통해 金명예총재에게 전달이 되고, 金명예총재가 저를 대통령께 추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총리 임명 발표 전날이 일요일(5월21일)인데 오전 11시 조금 넘어서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특별한 당부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일을 맡아서 해주어야겠다고 당부했어요』
 
  ―金대통령과 특별한 緣(연)이 있습니까.
 
  『金大中 대통령을 처음 뵌 게 1973년입니다. 대통령이 일본에서 납치돼 동교동 집으로 돌아와 있었을 때입니다. 당시 저는 서울지검 檢事(검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편집자 注:李漢東 총리는 고시 10회에 합격한 후 판사에 임용되었다가 나중에 檢事로 신분을 바꾼다). 그때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에 대해 駐韓 일본대사가 金대통령을 면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나카(田中) 정권 시절이었죠.
 
  그때 駐韓 일본대사가 우시로쿠 대사인데, 우리 정부는 면담을 허용하면서 한국 檢事 한 명을 입회시켜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어요. 그때 저는 서울지검 공안부의 上席(상석) 검사였어요.
 
  공안부장 바로 밑인데 제가 어느 정도 일본말을 할 줄 아는 것을 알고 있는 부장이 저보고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시로쿠 대사와 같이 동교동에 갔습니다. 동교동에서 응접실로 사용하던 별채에서 처음 金대통령을 뵈었지요.
 
  조그만 방에 소파가 네 개 놓여 있던 것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金대통령과 駐韓 일본대사의 비서관이 같은 쪽에 앉고, 우시로쿠 대사와 저는 반대편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때 金대통령의 눈썹 위에 난 상처 딱지를 보았죠. 너무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그게 첫 만남이에요』
 
 
  『행정총리로 불러달라』
 
 
  ―인사 청문회를 처음 통과한 총리로서 소감이 어떻습니까.
 
  『청문회가 끝나고 나서 인사청문회 운영과 관련해 언론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었고 국회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반성의 소리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청문회에 임하는 의원들이나 당하는 제 입장에서나 모두 처음 해보는 것 아닙니까. 곤혹스러운 분위기에다 답변하기 어려운 인신 공격성 질문을 당할 때는 마음속으로 무척 언짢은 점도 있었지만 지나놓고 생각하면 우리가 이 제도를 잘 다듬어서 발전시키면 새로운 헌정문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합니다』
 
  ―총리에 대해서 「정치총리」니 「경제총리」니 「민생총리」 등으로 분류했는데 스스로는 어떤 총리라고 생각합니까.
 
  『총리 취임 첫날 대통령께서는 「경제문제 남북문제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많은 시점에 나는 대통령으로서, 李총리는 총리로서, 같이 일하게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인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어요. 「대통령이 남북문제와 외교안보쪽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행정부는 총리가 확실하게 통할하고 잘 챙겨달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행정총리로서 충실해야겠다는 신념을 간직한 채 일하고 있습니다. 행정총리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국민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민생총리라고도 볼 수가 있지요』
 
  ―요즘 들어 공권력의 권위가 약화돼 가는 조짐들이 많이 보입니다.
 
  『정당하고 합법적인 시위는 용인을 해야겠지만 지나친 불법·위법·집단행동은 법과 원칙에 따라서 처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과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은 듣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일부 학생과 단체가 서울 영등포구 문래공원에 있던 朴正熙 대통령의 흉상을 목에 밧줄을 걸어 끌어내리는 사건까지 발생했는데요.
 
  『朴正熙 대통령의 흉상이 40년 가까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역사입니다. 동상을 물리력으로 철거한 것은 실정법 위반행위입니다.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범법행위를 한 사람들은 엄중 사법처리될 것입니다』
 
 
  보수세력이 개혁의 주체
 
 
  ―총리께서는 보수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對北문제에 대해서는 대통령과 입장 차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동서양의 역사를 훑어보면 특히 근대사에서 어느 나라든 가장 실효적인 개혁을 추진한 것은 보수정권입니다. 영국이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대영제국을 건설했는데 그 정치인이 디즈레일리 수상입니다. 보수당 당수 디즈레일리가 집권한 후 영국은 빛나는 개혁을 이룩했습니다. 수에즈 운하를 프랑스로부터 사도록 추진한 사람이 디즈레일리 수상입니다. 최근에 영국病(병)을 치유하고 영국을 완전히 다시 건져낸 사람이 대처 수상인데 대처는 노동당이 아니라 보수당의 당수입니다.
 
  이것뿐이 아니죠. 명치유신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것은 일본 보수주의자들입니다. 1955년부터 35년 동안 일본을 이끈 자민당이 보수주의 정당입니다. 미국은 1980년대 들어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번영기를 맞이했는데 그런 빛나는 개혁은 레이건에서 부시로 이어진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작품입니다.
 
  改革(개혁)은 革命(혁명)이 아닙니다. 개혁은 전통적인 것, 역사적인 것 중에서 지킬 것은 지키고 잘못된 것은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 改革은 정열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경륜이 뒷받침돼야만 제대로 된 改革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革命은 정열과 의지를 가진, 어떤 의미에서는 로맨티스트들이 일으키는 겁니다. 제가 保守 정객이라고 해서 이 정부가 추진하는 改革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현실을 딛고 서서, 그 토대 위에 제대로 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제가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西海해전 승리가 햇볕정책의 실효성 뒷받침
 
 
  ―지난 4월의 총선 유세에서는 현 정부의 햇볕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햇볕정책을 부정하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햇볕정책이라고 하는 對北 포용정책의 기조는 찬성하나, 햇볕정책을 추진해감에 있어서는 북쪽의 대응과 상황을 감안해서 强穩(강온) 양면정책을 겸용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西海(서해)교전에서 우리 정부가 보여준 강경대응이 강온양면정책의 한 사례가 될 수 있겠지요. 당시 對北 비료 지원을 위한 수송선이 오가는 가운데 벌어진 西海교전에서 정부가 강경대응한 것이 결과적으로 햇볕정책의 실효성을 뒷받침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 정부가 북한 金正日의 눈치를 보고, 對北관계에서 지나치게 低자세가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나라 32개 보수단체 대표들을 총리공관에 모셔놓고 對北정책에 관해 설명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느 분 하나 강하게 이의를 제기한 분이 없었어요. 우리 정부가 북한에 끌려다니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사소한 절차상의 날짜 문제 같은 것은 저쪽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본질적 문제를 위한 회담이 이뤄지게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 아닙니까.
 
  지난날 냉전시대에 북한이 취했던 행태가 머리 속에서 하나도 안 지워지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진행되는 것을 보면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잘못 되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봐요』
 
  ―북한 인권문제를 제대로 거론하지 못한다거나 북한은 6·25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는데 우리는 6·25 행사를 축소한 데 대해 불만들이 있습니다.
 
  『뭐든지 지나치게 보이는 것은 국민정서에 거슬리게 느껴질 거예요. 남북대화의 당국자들도 국민들의 걱정을 유념해서 대화와 협력을 추진해 나가도록 해야겠지요. 지나친 것은 좋지는 않지요』
 
  ―대통령에게 보수층의 걱정을 말씀드렸거나 관계당국에 그런 점을 유의하도록 당부한 적이 있습니까.
 
  『제가 남북관계 장관회의를 직접 주재하지는 않아요. 외교안보 관계회의 주무장관은 통일부 장관이고 그 자리에 국무조정실장이 고정멤버로 참석합니다. 국무조정실장을 통해서 남북대화나 교류협력 사업과 관련된 총리실의 여러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왔습니다.
 
  총리로서 통일부 장관,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의 개별 보고를 받을 때도 보수층의 우려 목소리를 전하고 정책결정에 참고토록 이야기합니다. 이런 것들이 충분히 반영된 토대 위에서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국가보안법 우리만 고치는 건 문제』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남북 頂上회담 이후 남북관계에 큰 변화와 진전이 있었습니다. 이산가족 방문단과 관광단이 왔다 갔고 기업들의 對北투자도 상당 부분 진전되었어요. 경의선 복원 등 앞으로 얼마나 변화가 많습니까.
 
  法이란 것은 여러 가지 변화와 사정 변경 등을 감안해 고쳐지고 개선되고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일반론적 시각과 남북관계의 변화 등을 생각해 볼 때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국가보안법도 어느 정도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충분히 짐작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남북이 상호주의에 입각해 서로 같이, 같은 정도로 개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적화통일을 규정한 북한의 노동당 규약, 우리 국가보안법은 문제가 아닐 정도인 북한 형법은 그대로 놔두고 우리만 고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과의 獨對(독대)는 매주 합니까.
 
  『정례적으로 2週에 한 번씩 주례보고를 합니다. 매주 국무회의가 끝나고 난 뒤 대통령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獨對를 하고 있습니다. 여론의 향방, 보수층의 우려 목소리 등 어떤 이야기도 다 합니다』
 
  ―두 분이 얼굴을 붉히고 다툰 적은 없었습니까.
 
  『한 번도 없었어요. 대통령은 굉장히 합리적인 분인데다 파악하지 않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대통령께서 말씀해 주시면 듣고 나서, 다른 의견이 있으면 제 이야기를 하죠. 본질이 다를 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조용한 가운데 獨對가 마무리되지요』
 
  ―총리에 대해 「예스 맨」(Yes Man)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윗분한테 강한 직언을 하고 그렇게 해서 갈등의 소리가 나야 제대로의 역할과 기능을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를 저도 많이 봤어요. 그러나 저는 어떤 경우건 윗분과의 관계에 있어서 소리 안 나게, 바깥에 부딪치는 소리가 안 나도록 하면서 조용한 가운데 진언하고, 직언을 다함으로써 조용하게 비쳐지는 모습의 보좌 역할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 경제가 위기냐 아니냐는 논란이 있습니다. 우리 경제는 어떤 상태에 있다고 봅니까.
 
  『우리 경제의 오늘 상황을 위기라고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 우리 외환보유고는 930억 달러쯤 됩니다. 그리고 작년에 10% 이상 성장했고 금년에도 8% 정도 성장하는 것으로 전망됩니다. 金利도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고, 물가도 3%대에서 유지되고 있어요. 환율도 상당히 적정하게 유지돼 가고 있습니다. 무역흑자도 금년 말에 130억 달러 정도 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런 巨視지표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실물의 뒷받침이 확실히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위기라고까지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4大 부문 12大 개혁과제를 내년 2월까지 끝내려고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마무리가 안될 때는 금융 또는 證市(증시)에 상당한 불안이 올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 기업들이 경쟁력을 회복하는 데, 은행이 건전성을 회복하는 부분이 걱정입니다. 이것만 잘 마무리하고 現代, 大宇 문제 등을 해결하면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정부 및 산하기관에서 9만3000명 줄여
 
 
  ―그동안의 改革 실적을 計量化(계량화)하면 어느 정도나 될까요.
 
  『기업구조조정과 금융구조조정은 지금까지 半(반) 이상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금융은 전반기 내각에서 상당히 많이 했고, 조금만 더 추진하면 거의 끝나는 단계에까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公共(공공)부분이 문제죠. 정부와 정부 산하기관의 구조조정, 그리고 공기업의 민영화 등인데, 정부와 정부 산하기관은 지난 2년여 동안 약 9만3000명 정도 정리했어요. 총리실에도 필요한 인원을 늘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강한 의지로 작은 정부를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인원 감축에 굉장한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공기업 민영화는 전반기에 6개를 선정해 놓았는데 3개는 끝냈어요. 浦鐵(포철), 한국중공업은 거의 끝났어요. 민영화 문제는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입니다. 다만 韓電은 발전부분을 몇 개로 쪼개고 원자력과 水電(수전)은 國營(국영)으로 유지하면서 配電(배전) 送電(송전) 등 기능별로 쪼개 민영화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그러려면 韓電法 개정이 먼저 돼야 해요. 이게 지금 정기국회에 제출돼 있습니다. 경영 분야의 여러 부조리 등은 감사원 감사와 국무총리실의 점검을 통해 착실히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勞使(노사) 개혁은 勞使政(노사정) 위원회를 통한 원만한 합의를 토대로 추진되도록 해나갈 겁니다』
 
  ―公的(공적)자금 투입에 대해 국민들의 의문과 불만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투입된 公的자금 내역을 보면, 원래 조성한 것이 64조원이고 추가 조성한 것까지 포함해 실제 투입된 것은 101조원쯤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 2차 公的자금으로 50조가 필요한데, 10조원은 자체적으로 조달해 충당하고 40조는 국회 동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公的자금의 대부분은 금융기관에 돈을 맡긴 예금자 보호에 다 쓰여진 것 아닙니까. 公的자금을 투입해서 公的자금을 받은 은행이 건전한 은행으로 육성 발전되면 투입된 公的자금은 그 은행의 株價가 올라가는 것에 맞춰 회수되게끔 돼 있는 거지요. 일부 자산관리공사에 1차 투입된 것은 거의 다 해결됐습니다.
 
  문제는 예금보험공사에 남아 있는데, 이번에 2차 기업구조조정 발표 이후에 또 새로운 公的자금 수요가 늘 것 아니냐는 추측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더 들지는 확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급적 지금 신청해 놓은 40조로 마무리해 보려는 것이 정부의 입장입니다』
 
 
  내각제는 신중하게 추진
 
 
  ―자민련 총재도 맡고 계시는데 黨務(당무)는 언제 챙깁니까.
 
  『솔직히 말해 정부에 들어오면서 당무에 관해서는 金宗鎬(김종호) 대행에게 全權을 위임하고 왔어요. 일상적인 당무에 관해서는 결재하는 게 없고 모든 것을 金대행에 맡기고 있습니다. 더러 金대행을 만나면 黨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구두로 보고받습니다』
 
  ―金鍾泌 명예총재와는 자주 만납니까.
 
  『자주 뵙지요. 골프도 모시고 자주 만납니다』
 
  ―金鍾泌 명예총재와 金大中 대통령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기 어려운 대목인데요. 金鍾泌 명예총재께서는 민주당이 내각제 약속을 강령에 채택하지 않은 이후, 또 4·13 총선을 전후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당에 대해 상당히 서운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지요. 그렇지만 金鍾泌 명예총재와 나눈 대화를 종합해 보면 그 분의 기본 생각은 「국민의 정부는 DJP합의를 통해서, 두 사람이 힘을 합하고 두 黨이 힘을 합해서 탄생시킨 정권이다」는 것입니다.
 
  金鍾泌 명예총재는 2년 동안 총리로 재임하면서 경제위기를 극복했었잖아요. 이같은 정권 창출과 정권운영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이 정권의 對국민적인 책임감은 변함이 없다고 봅니다』
 
  ―내각제는 어떻게 돼 갑니까.
 
  『내각제는 자민련의 내각제 추진위원회에서 민주당에 여러 가지 질의를 하면서 자민련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습니까. 徐英勳(서영훈) 대표도 민주당의 입장을 정리해서 말한 바가 있습니다. 내각제에 관해서는 좀더 지켜보면서 신중하게 생각해볼 문제라고 봅니다. 이 정부의 총리로 있으면서 내각제 문제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제와 내각제 중 어느 것이 나라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제 생각은 있는데 지금은 말할 기회가 아닌 것같습니다』
 
  ―姜昌熙(강창희) 자민련 부총재가 총리에게 총재직 사퇴를 요구했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앞서 말했지만 金宗鎬 대행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입니다. 자민련의 당면 현안인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위시해 黨조직 정비 등 모든 것이 정상화되면 언제든지 정상체제로 복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정쩡한 DJP 共助
 
 
  ―민주당과 자민련 간의 共助(공조)체제는 지금 어떻게 돼 있습니까.
 
  『4·13 총선을 전후해 공조체제가 깨졌잖아요. 총선 이후에 제가 총리로 들어오고 黨 소속 위원장 한 사람이 각료로 입각하고 국영기업체 사장에 임명된 분도 있고 하지만, 소위 DJP 합의에 근거한 공조체제는 완전히 복원된 것은 아니거든요. 어정쩡한 그런 공조인데, 완전한 공조라고는 볼 수 없고, 그렇다고 공조가 되는 게 없다고 보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저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선 상당히 어려운, 중간적인 모습 아닌가 하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공조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結者解之(결자해지)라고, 金鍾泌 명예총재와 金大中 대통령 두 분이 언젠가는 정리를 해야 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번 國監에서 李총리의 민주당 입당론이 제기됐습니다.
 
  『금시초문입니다』
 
  ―정치적 행보를 너무 조심스럽게 한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지금 가장 바람직한 총리의 모습은 행정총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소임을 다하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갈 것입니다. 총리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행정총리의 역할에 충실해야겠다는 마음입니다』
 
  ―내년쯤 되면 언론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대권문제가 거론되고 그렇게 되면 총리도 차기 후보群(군)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요새 잡지에 비슷한 여론조사들을 하던데 저는 관심권 밖에 있는 것 같던데요』
 
  ―지난 총선 유세에서 총리께서는 고려 태조 王建의 포용정책을 거론하며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국민통합을 이룩해 나갈 그런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중부권 역할론」도 제기했는데 경기도 출신인 총리 본인께서 그런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중부권 역할론은 지난 총선 때뿐 아니라 신한국당 시절에도 이야기했습니다. 중부권 역할론은 아마 제가 처음 이야기했을 겁니다. 하도 영호남간 지역감정이 격화돼 있으니까, 東西간에만 정권이 왔다갔다 하면 지역감정 해소가 어렵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중부지역 사람들이 東西를 화해시킬 수 있는 시대적인 역할을 다하는 쪽으로 선거권을 행사해 주었으면 좋은 일이 아니냐는 이야기였어요.
 
  東西는 지역감정에 근거해 투표를 하잖아요. 그러나 중부는 8道(도) 사람들이 다 사니까 지역감정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공평무사한 후보를 선택할 수 있는 분위기가 중부권에는 마련돼 있습니다. 지역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투표권을 행사하자는 취지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王建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했지요』
 
 
  王建의 리더십
 
 
  ―王建의 「국민통합론」은 무얼 말합니까.
 
  『王建은 후삼국을 통일해 고려를 창건했습니다. 그 당시 신라와 후백제의 갈등은 지금의 東西 간 지역감정만큼 심했는데, 이를 통일한 王建의 고려 건국 이념, 민족 대통합, 화합의 정신 같은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동서간, 영호남 간의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국민대화합을 이룰 수 있는 리더십입니다. 王建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武力(무력)만 사용하지 않았어요. 武力 플러스 德(덕)이죠. 우리 역사 속의 어느 지도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리더십이에요.
 
  조선 태조 李成桂(이성계)는 순전히 武力만 동원했고 심지어 잔인하기까지 했어요. 王建은 그게 아니었어요. 王建의 그러한 리더십이 신라와 후백제 간의 엄청난 갈등을 조화시킨 겁니다. 신라는 王建에게 점령당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王建에게 가서 천년사직을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거둬들여 주시오」라고 말한 게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입니다. 그러자 王建은 자기의 딸을 경순왕에게 시집보내 경순왕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王建은 경순왕을 신라의 옛 땅인 남도 지역의 巡撫使(순무사)로 임명해 민심 순화를 위한 대사로 이용합니다.
 
  그리고 후백제도, 王建이 마지막 전투에서 후백제를 멸하지만, 金聲翰(김성한)씨 소설을 보면 견훤의 아들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천하의 영웅이던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란 절에 유폐시켜요. 그러자 견훤은 고려로 탈출해 王建에게 몸을 의탁한 뒤, 王建이 후백제를 치러 갈 때 작전계획을 정리해 주잖아요. 견훤이 노렸던 것은 후백제는 망할 수밖에 없지만 후백제 군사가 한 사람이라도 덜 죽게끔 작전을 유도했어요. 전쟁이 끝나고 견훤이 죽자, 王建은 國葬(국장)으로 장례를 치러 줍니다.
 
  후삼국 시대의 英傑(영걸)은 王建, 견훤, 궁예지요. 이중 전술과 전략에 있어서는 견훤이 제일이고, 덕성과 포용력에 있어서는 王建이 제일입니다. 이 두 사람을 합해 놓은 것이 궁예였어요. 그런데 궁예는 망했어요. 그게 하늘이 하는 일이오.
 
  궁예가 鐵原(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사냥을 나갔다가 산 속에서 범의 공격을 당해 바위에 떨어지는데, 그래서 머리를 다칩니다. 외상은 아물었지만 정신질환이 생겨 망하는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높은 덕성과 포용력이 결국은 최후의 승리를 가져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王建은 특이한 지도자예요』
 
 
  改憲論
 
 
  ―총리께서는 「憲政의 정상화란 측면에서 5년 단임제 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해 왔고, 지난번 인사청문회에서는 『내각제 개헌이 되지 않는다면 미국식의 부통령제 도입을 곁들인 4년 중임제 개헌을 심각히 이야기해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改憲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평소의 생각을 간명하게 정리해서 한 말입니다. 대통령 5년 단임제 헌법은 1987년 與野(여야) 8인의 정치회담에서 與野 완전합의로 만든 것 아닙니까. 그때 제가 8인 회담의 민정당 대표여서 그 과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국민들은 장기집권으로 갈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굉장했었어요. 두 번씩 하게 되면 또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는 우려 때문에 單任(단임)으로 가야 한다는 것으로 타결됐던 것입니다.
 
  5년 單任이란 것은 어떻게 보면 장점도 있긴 있어요. 대통령을 또 한다는 욕심을 가질 수 없으니까 한 번 잡으면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든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점이 있는데, 헌법체제상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때는 어려운 시국을 수습하고 직선제에 대한 與野간 합의를 위해 수습방안으로 받아 들이자고 했던 겁니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두었지만 이제는 국가 백년대계를 밀고 나갈 수 있는 그런 권력구조로 바꿔줘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차원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4월 자민련 총재로 있을 때 일본 NHK와의 인터뷰에서 『金대통령 임기 말까지 내각제 개헌이 안 되고 현행 체제로 갈 때 보수정당으로 발전하고 있는 자민련이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을 수 없다. 그때는 내 능력과 경험과 정성을 다해 중부정권 창출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는데, 大權 도전 의사로 받아들여도 되는지요.
 
  『글쎄, 그런 답변을 했는지 기억이 없어요』
 
  ―차기 지도자의 자질과 덕목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인권문제, 민주주의 시장경제라고 하는 큰 이념, 그리고 큰 신념을 갖고 이를 완벽하게 추구해 나갈 수 있는 강한 의지와 확고한 철학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막스 웨버도 이야기했지만 통찰력, 판단력, 강한 추진력을 뒷받침하는 정열 같은 것들이 지도자의 자질과 덕목이라고 봐요』
 
  ―세계화 추세에 대응한 우리 국가의 발전전략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계화 체제란 국제 질서 속에서도 세계 제일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잖아요. 세계화에 부응해 나가는 길은 뭐니 뭐니 해도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일 이상은 없어요.
 
  세계 제일의 상품을 수출해 경제를 지속적으로 키워 나가야 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경쟁력이지요. 전통산업과 IT산업의 보완, 그리고 IT산업은 IT산업대로 제대로 육성발전시키되 부차적으로 새로 등장하는 바이오 테크(BT)를 육성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우리 산업을 제대로 끌고 가려면 전통산업은 구조조정을 통해서 경쟁력을 키워 나가고, IT와 NT(나노 테크놀로지=초정밀기술)의 도움을 받아서 경쟁력을 키워 나가는 방향으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 반도체 분야는 지금도 세계 제일입니다. 造船(조선)도 일본에 비해 수주액이 52對 28이니까 괜찮아요. 자동차도 수출이 잘되지요. 家電(가전)분야, 석유화학 등 전통산업 쪽도 잘되고 있고요.
 
  어떻든 어려운 4大부분 개혁만 마무리되고 금융시장이 안정되고 국제적인 신인도를 높여가면 다음 21세기에는, 그렇게 오래지 않은 시점에서 우리가 「G9」쯤은 진입할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세계 일류국가란 말을 많이 쓰는데 저는 「세계사의 주역국가」란 표현을 씁니다. 지금 세계사의 主役(주역)은 「G7」 아닙니까. 「G7」에 한두어 개 더 보태면 「G10」이 되고, 그러면 세계사의 주역이 되는 겁니다. 2010년에서 2020년 사이에 우리도 「G10」 안에는 들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통일은 프로그램대로 되지 않는다』
 
 
  ―총리께서 생각하는 바람직한 통일방안은 어떤 것입니까.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고 그 프로그램에 따라 통일을 추진해 간다는 것은 非현실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서독의 통일과정을 보면 서독이 통일방안을 갖고 일관되게 추진한 결과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확실한 통일방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통일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들이 「반드시 통일이 된다」는 신념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서독 통일이 보여주듯 여러 가지 국제관계와 남북관계 변화에 대비해 어떻게 되든 國力(국력)을 확실히 키우는 것이 중요한 통일방안이 아닌가 하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정부가 추진중인 통일정책은 크게 두 가지 아닙니까.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공존공영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교류협력입니다. 이것은 당장의 통일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든 통일이 올 수 있도록 하는 노력입니다. 저는 이 정부의 對北정책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家訓(가훈)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지요.
 
  『「德不孤必有隣(덕불고 필유린)」입니다. 德을 베풀고 살면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이지요』
 
  ―슬하에 1남2녀를 두셨는데요.
 
  『큰 딸은 시집갔는데 사위가 증권회사 상무고, 아들은 유학중입니다』
 
  ―막내 딸이 동아일보 金炳琯(김병관) 회장의 며느리가 되셨는데요.
 
  『金회장 아들이 제 아들하고 학교 친구여서 저희 집에 자주 놀러오고 하다가 친해졌는가 봐요. 처음에는 저도, 집사람도 결혼을 반대했어요. 정치하는 사람이 언론사업 하시는 분과 사돈을 맺는 것이 부담스러운 점이 있었는데 둘이 좋아하니 어쩝니까』
 
  ―여러 가지 경제지표나 숫자 등을 잘 기억하고 계시는데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아마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기억력은 좋은 편입니다』
 
 
  朴正熙 대통령과의 만남
 
 
  ―사나이로서 마음놓고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대학졸업 후 고시를 치르고 軍에 입대하면서 한 번 되게 울었던 적이 있어요. 장남으로 시골집에서 시험공부를 하면서 여러 동생들 공부시키는데 농사만으로 어려워 제가 직접 닭을 키웠습니다. 산에 가서 나무를 베다가 양계장을 짓고 병아리 수백 마리를 사다 길렀죠. 그런데 그 병아리들이 상당히 컸을 때 軍 입대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걱정하실까봐 그냥 서울 다녀오겠다고만 하고 집을 나서 바로 입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훈련소에서 보내온 사복을 보고 입대사실을 알고는 옛날식 한글로 편지를 보내셨어요.
 
  「네가 군대에 나간 뒤 병아리들이 많이 자랐다. 軍에 가는 줄 알았으면 약병아리라도 한 마리 잡아 먹여 보냈을 텐데」라는 내용이었어요. 훈련소에서 그 편지를 보니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 냅다 벌판으로 달려나가 포플러 숲속에서 실컷 울었어요. 그 외에는 울어본 적이 없어요. 제가 집안의 장남이라 잘 안 울어요』
 
  ―軍 입대 후 사법시험 합격발표가 났고, 그 바람에 이등병에서 중위로 진급했다면서요.
 
  『정훈장교실에서 신문을 보고 합격한 줄 알았어요』
 
  ―그후 법무관으로 복무했는데 어디서 근무했습니까.
 
  『6관구사령부입니다. 사령부가 지금의 이태원에 있었어요. 朴正熙 소장이 사령관이었죠. 한번은 장교식당에 있는데 그분이 들어오고 그 앞에서 덩치가 큰 분이 뭐라고 떠드는데 그 사람이 참모장 金在春(김재춘)씨였습니다. 법무장교가 부대에 부임하면 사령관에게 신고를 하게 돼 있는데 군대규율을 모르는 제가 신고를 안 했거든요.
 
  그러다가 식당에서 사령관을 만난 겁니다. 그랬더니 金在春 참모장이 「요즘 법무장교들은 신고도 안 하나」 해서 걸렸구나 생각했는데 그걸로 그냥 넘어가더라고요. 朴대통령은 말이 없는 분이었어요. 식사를 하면서도 말하는 걸 못 들었어요. 朴대통령은 매일 장교식당에서 초급장교들하고 같이 식사를 하지, 외식을 전혀 안 했어요.
 
  제가 법무장교로 있을 때 사령부에 불이 났습니다. CP(지휘부)가 몽땅 타버렸어요. 金在春 참모장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신문에 한 줄도 안 나고, 문책 없이 그냥 넘어갔어요. 만일 그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었더라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사령관이었던 朴대통령의 운명이 달라졌을 테니까요. 그후 부산 군수기지사령부가 창설되면서 朴대통령은 초대 사령관으로 내려갔지요』
 
 
  『전쟁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軍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저는 사병에서 대위로 제대하면서 4·19 혁명과 5·16 혁명을 겪었습니다. 軍 생활을 하고 느낀 점은 전쟁을 겪어본 군인과 그렇지 않은 군인은 마음 자세에서 완전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10·26 사건 때, 경호실장이었던 車智澈(차지철)이가 전쟁을 겪어본 사람이었더라면 金載圭(김재규)에 대한 대응이 달랐을 거라고 봅니다. 경호실장이 화장실에 숨지 않고 대응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겁니다. 전쟁을 겪은 金載圭와 전쟁을 모르는 車智澈의 차이를 나는 압니다』
 
  ―정치를 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좌우명이 있다면.
 
  『海不讓水(해불양수), 즉 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 않고 바다는 어떤 강물도 마다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호는 없습니까.
 
  『정치인들은 대체로 자신의 출신지 이름에서 유래된 아호를 갖는 것이 보통인데, 저는 고향이 「울미」란 곳이라 그걸 아호로 할 수도 없고 해서 생각중인데 내년 초쯤에는 아호 선포식을 가질까 합니다』
 
  ―국민여론은 어떻게 수렴하고 있습니까.
 
  『언론매체가 중요 정보원이지요. 여러군데서 올라오는 정보보고, 민정비서관실에서 취합해서 올려주는 정보, 국정원, 각 市道 지사들의 업무보고를 통해 여론수렴을 하고 있습니다』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입력 : 202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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