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기관지가 약해서 기침 가래 등을 달고 살았습니다.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이 기관지가 이렇게 안 좋으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듣기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병원을 여기저기 전전(轉轉)하다가 만난 한 대학병원 의사선생님은 니시 의학책을 초등학생인 나에게 권해주셨고 그때 익힌 목욕탕 냉온욕법은 저의 건강관리법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목포의 한 용하다는 할아버지 한의사를 어머니랑 찾아갔습니다. 처음 갔을 때 할아버지는 나의 맥을 1시간 넘게 잡고서 노트에 빽빽이 본인만 알 수 있는 마킹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그 분의 치료와 어머니의 정성으로 몸은 건강해졌습니다. 나중에 군대를 제대하고 할아버지를 한번 뵈러 갔을 때는 연세가 거의 90 전후이셨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할아버지는 본인께서 맥을 잡으면 저의 발뒤꿈치 뒤에 흐르는 맥까지도 다 파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자신의 맥법을 아들에게 가르쳤는데 아무리 가르쳐도 나만큼은 못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한의사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주의 깊게 듣지 않았습니다. 

제가 굳이 과거의 제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양방 의사선생님들이 치료하지 못하는 질병을 한의사가 치료했다 와!’ ‘역시 한의학이 대단해!’ ‘역시 한의사라면 맥으로 모든 것을 알아야지!’…. 물론 아닙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손을 내밀면서 “맥좀 잡아주세요. 그리고 내 몸이 어디가 문제인지 알려주세요”라고 하는 환자분들이 요즘은 많이 줄었습니다. 맥에 대한 막연하고도 만연한 신비주의가 좀 없어진 듯합니다. 그 말을 들으면 역학인들에게 자신의 생년월일을 불러주고 운명을 알려달라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저는 맥진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맥으로서 어느 정도 몸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진단의 표준화, 과학화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 덕분에 맥진기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맥진만으로 암을 파악하고, 임신여부를 판단하는 등 모든 질병을 파악하지는 못 합니다. 

흔히 맥진에 통달한 한의사를 만나보신 분들은 한의사가 마치 무당처럼 척보고 척 아는 것을 좋아합니다. “네가 한의사라면 맥을 잡고 내가 어떤 질병이 있는지 정도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되지 않겠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에 부응해 한의사 본인들도 마치 신 내린 사람처럼 척 보고 척 아는 것만이 진정한 한의사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오랜 직업적 훈련과 연습으로 환자분들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 이런 능력을 길러주는 면도 있고 능력이 뛰어난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한의사가 도인처럼 될 수도 없고 도인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제(徒弟)식으로만 전수되는, 혹은 더 나아가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형식으로 전수되는 전통적인 동양학의 전달방식으로서의 한의학의 모습은 현대적인 한의학의 모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달되어 재생산되지 못하는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통으로 내원하신 50대 여자분이 있었습니다. x-ray를 보니 요추 5번 라인에서 끊어진 흔적이 보였습니다. 침치료 후 추나를 하려다가 일단 CT 의뢰를 하였더니 척추분리증으로 인한 척추전방전위증이 보였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척추분리증 환자인지도 모르고 추나의 테크닉의 하나인 ‘드랍’을 쳐서 요통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x-ray 없이도 이 환자가 척추분리증임을 알 수 있는 의사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동료 의사도 그럴 것입니다.  

저는 현재의 ‘과학기술’이 과거의 ‘도술’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화타라는 명의(名醫)는 사람을 보면 그 안의 내부 장기까지 보았다고 전해지는데, 사실여부를 떠나 이제는 영상진단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축지법을 쓰는 도인이 현재에도 자동차를 안타고 축지법으로 다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육을 받고 규칙을 지키면서 운전을 하면 됩니다. 

실례되고 슬픈 이야기이지만 전해들은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동료 한의사의 아내분이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한의사인 남편은 통증을 호소하시는 아내를 위해 한약을 드시게 했고, 아내는 한약을 드실 때마다 통증이 없어져서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정밀검진을 위해 병원을 방문했더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고 합니다. 남편은 자신이 차라리 한의사가 아니었더라면 병원에 빨리 갔을 것이고 아내의 암도 조기에 발견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후회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만약 한의사가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암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 한의사는 무능한 것일까요? 현대를 살고 있는 한의사들이 과거 ‘음양오행’의 잣대만으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이 한의학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현대학문과 융합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한약재나 침구학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나라에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임상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검증을 수십, 수백 번하고 또 연구를 거듭하는 겁니다. 더 나은 방법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지요. 

이런 방법으로 이런 병을 치료했으니 동일한 방법을 쓰면 어느 의사라도 상응한 효과를 가지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과 환경이라는 변수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기계적 인과관계로만 문제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치료방법을 찾아 노력하는 것은 의사들의 숙명이기에 단지 과거의 책과 모습에 갇히지 않고, 동료 의료인들과 더 나아가 환자들과 소통하면서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현재를 살고 있는 한의학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위 이야기는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둔 이야기이기에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