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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비화

1969년 3선 개헌 당시 차지철과 김재규의 싸움

김재규, 정구영 전 공화당 의장에게 3선 개헌 찬성 강요한 차지철과 다퉈.... ‘두 사람의 불행한 관계는 그때부터 싹튼 게 아닐까’(예춘호 전 의원)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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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은 2015년 4~6월호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에서 예춘호 전 공화당 사무총장의 증언을 기록했다. 6·7·10대 국회의원을 지낸 예춘호 전 의원은 제3공화국 초기 김종필 당 의장의 측근으로 공화당 원내 부총무, 공화당 사무총장, 국회상공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3선 개헌에 반대하다가 공화당에서 축출됐다. 1970~1980년대에는 재야 민주화운동에 참여, 민추협 부의장 등을 지냈다. 10‧26사태 41주년을 맞아, 1969년 3선 개헌 당시 차지철 의원과 김재규 육군보안사령관의 갈등, 1979년 5,6월경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만남에 대한 예춘호 전 총장의 증언을 다시 소개한다.
국회의원 시절의 차지철(왼쪽)과 육군보안사령관 시절의 김재규.

1969년 8월 초 어느 날 정구영 선생의 북아현동 자택으로 차지철(車智澈) 의원이 찾아왔다. 그즈음 나는 매일같이 정 선생님 댁을 찾아가 개헌 저지 대책을 논의하고 있을 때였다. 공수부대 대위로 5·16에 참여했던 차지철은 민정 이양 이후 국회의원이 됐다. 국회에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라면 무조건 실행하는 ‘행동대원’으로 활동했다.

차지철은 전날에도 충북 옥천에 머무르고 있던 정구영 선생을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개헌 찬성을 압박하고 돌아갔었다. 정 선생의 자택을 찾아온 차지철은 가족들에게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말한 후, 사랑채에서 정 선생에게 박 대통령의 친서에 대한 회답을 달라고 졸랐다.

나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랑채 문을 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때 김재규(金載圭) 육군보안사령관도 정구영 선생을 찾아왔다. 정구영 선생의 아들 중 한 명이 육사 2기로 김재규와 절친한 사이였다. 김재규는 정 선생을 무척 존경했다. 그도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정 선생을 설득하러 온 것이었다.

내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재규까지 오자, 어색해진 차지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선생과 김재규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주기 위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후 김재규도 밖으로 나왔다. 내가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데 등 뒤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차지철이 정구영 선생께 무례하게 군 데 대해 김재규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10·26 후 나는 ‘두 사람의 불행한 관계는 그때부터 싹튼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차지철이 전화를 걸어왔다. “예 의원, 내가 이번에 이사를 했는데 식사라도 한 번 했으면 합니다. 우리 집에 한 번 와주십시오.”

6·7대 국회의원을 함께했지만, 우리는 특별히 가깝게 지낼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차지철은 대인관계가 그리 원만한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게는 “형”이라고 부르면서 살갑게 대했다. 그가 첫 부인과 이혼하고 재혼을 하면서 국회의원 중에서 결혼식 하객으로 부른 두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다른 한 사람은 박종태 의원이었다.

차지철의 집은 동교동에 있었다. 그의 집에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느니 하는 소문이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 그런 대단한 호화주택은 아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마시면서 차지철이 말했다.

“형, 나도 노모(老母)를 모시고 있어요. 내 딴에는 효도를 한다고 하는데, 잘 안 되네요. 형도 아시겠지만, 내가 어제 정구영 의장님께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습니다. 집에 와서도 그 때문에 한 잠도 못 잤어요.”

박 대통령을 위해서라면 물 불 안 가리는 그가 밤잠을 못 자고 후회할 정도면, 그가 얼마나 정구영 선생에게 무례하게 했을지 짐작이 갔다. 차지철은 “정 의장님께 내가 무척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정 선생 댁으로 가서 차지철의 말을 전하자, 정 선생은 “그에게도 노모가 있었군요”라면서 말을 돌렸다.

 

 박정희와 DJ의 만남이 무산된 사연


그 후로 나와 차지철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유신 시절 나는 재야(在野)의 길을 걸었고, 그는 경호실장이 되어 ‘부통령’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권세를 누렸다. 내가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79년 5, 6월경이었다.

아마 그해 5월쯤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김대중(DJ)씨가 나를 보자고 해서 갔더니 이런 얘길 했다.

“예 의원,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한번 만났으면 합니다. 나 때문에 박 대통령이 대통령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박 대통령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일을 못 하는 것도 아니지 않소?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면 내가 박 대통령에게 협조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것이고, 박 대통령이 나를 도와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그러니 예 의원이 힘을 써서 박 대통령과의 만남을 한번 주선해 주시오.”

나는 당시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에게 기별을 넣었다. 차지철은 즉시 만나자고 했다. 경호실장 방으로 찾아갔더니, 그는 나를 무척 반겨주었다. 식사를 같이하면서 DJ의 뜻을 전했다.

얼마 후 차지철에게 연락이 와서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는 “각하께 말씀드렸더니, 각하께서도 좋다고 하신다”고 했다. 차지철은 그 무렵 재야활동을 하고 있던 박종태·양순직 전 의원의 안부를 물으면서 “다음에 올 때는 두 분과 함께 들어오라”고 했다.

네 번째 만남 때 양순직·박종태 두 사람과 함께 들어갔다. 오래간만의 만남이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식사를 하면서 지난 시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양순직 전 의원이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말했다.

“이제 각하께서 그만두실 때도 되지 않았소? 차 실장도 각하께서 그 자리에서 잘 내려오실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소?”

순간 차지철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이 XX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지금이 어떤 때인데 그런 소릴 해? 나가요. 나가!”

우리는 글자 그대로 밥을 먹다 말고 쫓겨나왔다. 박정희 대통령과 DJ의 만남도 물 건너 가고 말았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과 DJ는 한 번도 만남을 갖지 못했다. 만약 그때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혹시 역사는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입력 :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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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lt;박정희 바로보기gt;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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