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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外交史를 통해 본 日本의 良心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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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포럼 9월 강연 誌上 중계 韓中日 三國은 장기가 아닌 바둑을 두어야 한다 <편집자 注> 최서면(崔書勉) 在日국제한국연구원장은 지난 9월19일 오전 7시 세종문화회관 소연회장에서 한강포럼 주최로 월례 조찬 강연을 했다. 이 기사는 崔원장이 행한 강연 「오늘의 일본―일본인,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약한 것이다. -------------------------- 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 약력 1926년 강원 原州 출생. 연희전문 文科 수료, 충남大 대학원 문학박사, 단국大 명예문학 박사. 大東新聞 기자, 고아원 「聖방지거의 집」 원장, 서울천주교총무원 사무국장, 日本 아세아大 교수, 日本 도쿄 한국연구원 원장, 安重根 의사 숭모회 이사, 全國아리랑보존연합회 초대회장 역임. 現 국제한국연구원장, 한국몽골친선협회 회장, 韓日포럼 자문위원. 저서:「安重根 사료」, 「7년전쟁(임진, 정유왜란)」, 「몽골기행」, 「새로 쓴 安重根 의사」 등. 한일합방, 타당한 용어인가 얼마 전 휴전 50주년이 되는 날, 일본 언론계의 중진과 함께 식사를 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늘이 휴전회담 50주년인데 그 동안 고생 많았다』는 말씀에 그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세기나 되었나,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휴전 50년은 어제처럼 느껴지는데, 일제 36년은 그보다 짧은데도 불구하고 왜 훨씬 길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아무리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한일관계의 기본 같다』고 했더니 일본 언론인들도 『치욕(恥辱)의 1년은 치욕이 없는 10년보다 더 길다』고 동조해 주셨습니다. 그 치욕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 일본의 외교사료관(外交史料館)입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갖지 못한 귀중한 자료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한일 관계와 관련, 한국사람이 가장 많이 입에 올리는 말이 「한일합방(韓日合邦)」입니다. 이 용어가 타당한 것인가. 「합방(合邦)」이라 하면 두 나라가 연방국(聯邦國)을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1867년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합방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라 이름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바꿨습니다. 만약 일본이 한국과 합방을 했다면 나라 이름은 「대일본조선제국(大日本朝鮮帝國)」, 천황은 일본 천황 겸 한국 황제, 이렇게 불러야 합니다. 日本外交史料館에는 우리가 말하는 「한일합방」을 추진한 구라치(倉知) 정무국장이 쓴 「한국병합(韓國倂合)의 경위(經緯)」라는 未공개의 보고서가 남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읽어보면 합방(合邦)이라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일본이 어떻게 조선과 하나가 되느냐, 만약 조선을 삼켰다고 하면 자극이 너무 크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써야 하는가, 그래서 만들어 놓은 것이 「병합(倂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日本의 大韓帝國倂合」,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진회(一進會ㆍ 대한제국 말에 일본의 한국 병탄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그 실현에 앞장선 친일단체-편집자 注)가 부르짖은 것이 바로 한일합방(韓日合邦)입니다. 일한합방(日韓合邦)이 아니고, 한(韓)자를 일(日)자 앞에 두면 자존심이 충족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 예속되는 처지에, 식민지가 되는 상황에서 「합방」이라고 호칭하면 체면이 서는 것처럼 여겼던 것 같습니다. 一進會는 당시 썩어 문드러진 조선 정부에 무엇을 바라겠느냐, 일본하고 合하면 일본 사람과 똑같은 대접을 받고,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은 수준이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에 속은 것이지요. 저 자신도 가끔 가다 「한일합방」이라고 말합니다. 한일간 치욕의 36년은 그 시초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한일병합의 경위」라는 자료를 보면 합방이든 병합이든, 그 발표 시기는 1910년 8월 29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1년 반 전인 1909년 3월에 이미 결정을 보고, 5월에는 천황의 재가(裁可)까지 받아두었던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후임 통감은 데라우치(寺內正毅). 그때 내건 조건이 두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한국은 일본이 병합한다, 두 번째는 (병합을) 실시할 때까지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는 것이었습니다. 安重根 의사의 擧事, 조기합병설은 잘못 그해 10월 26일 安重根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죽으니까 일본이 병합을 서둘렀다고 일본의 역사책들은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구라치는 쓰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병합이라는 것을 감추고 있는 터에 安重根 한 사람으로 끝내야지, 제2 제3의 安重根이 나온다면 병합에 지장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安重根 사건은 安重根이라는 테러리스트의 개인적인 테러이지, 한국민의 의사를 대변(代辯)하는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사건을 가능한 축소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새로운 사실은 구라치가 安重根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무렵, 여순(旅順)으로 가 한 달 반 동안 머물렀고, 그것은 安重根 의사의 처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파렴치범은 사형(死刑)이 됐지만, 확신범 또는 사상범인 경우 무기는 언도해도 사형은 언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安重根 의사를 연구하러 일본에 오지만, 이러한 安重根 의사의 자료를 못 보고 갑니다. 제목을 보고는 安重根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라치 문서를 들여다보면 安重根과 관련된 모든 자료가 다 나옵니다. 그것을 통해 보면 현재 한국 安重根 紀念事業會나 安重根 연구가들이 상상도 못할 자료들이 아직도 未공개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자료들이 있는 곳이 日本外交史料館입니다. 구라치는 일본 外務省 정무국장 겸 大韓帝國 통감 비서관을 겸임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大韓帝國에 친일 외부고문인 스티븐즈가 있었지만 실제로 그 모든 자료는 이 사람의 호주머니 안으로 다 들어갔습니다. 구라치는 구한말 일본으로 유학간 학생들의 학비 조달도 맡을 정도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진상 밝힐 계기 또한 日本外交史料館에 있는 자료 중 우리 학자들이 열심히 추궁해 줬으면 하는 것은, 명성황후(明成皇后ㆍ1851~1895) 시해 사건의 관련입니다. 진범(眞犯)은 누구인가, 日本外交史料館 자료를 보면 어렴풋이나마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 이유는 명성황후 사건으로 망명한 사람들은 우범선(禹範善ㆍ? ~ 1903, 농학자 禹長春의 父)을 위시하여 30여명, 일본 外務省이 그들에게 월급을 주었던 것입니다. 급수에 따라 최고는 30원. 그 사건으로 도망간 사람에게 월급을 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우리가 추궁해야 할 과제입니다. 당시 일본에 한국사람뿐 아니라 모든 외국사람이 상륙하면 중앙외무대신에게 보고하는데, 그 목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명성황후 시해 후 갑작스레 한국사람의 일본 상륙수가 많아집니다. 조사를 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기 위해 도일(渡日)했다는 것입니다. 극적인 것으로, 그 중 일부는 여비(旅費)가 떨어져 (일본내 지인을 찾아) 돈 좀 꿔달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건 관련,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만 발생하면 도망을 다닙니다. 보복을 당할 것을 겁냈기 때문입니다. 일본 경찰이 경호병을 붙여 주지만, 명성황후 사건에 관련되었다던 사람들 중에, 이름을 바꾸고 시골의 절에 가서 숨어 지낸 사람도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두 사람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걸 추궁해 들어가면 명성황후의 진범도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일본 明治時代 때 우리나라에 와 우리를 해롭게 한 사람들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 번 조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우라 공사는 자기 손으로 법원에 자기 아들을 상속자(相續者)에서 빼달라는 제소를 합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난 날부터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 장가를 보내면 이튿날 이혼을 당하는 등 액운(厄運)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자랑스러웠던 사람은 불행하게 죽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만 속으로는 고소하게 생각될 때가 가끔은 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副주범으로 지목되었던 스기무라(杉村濬)는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는데, 이 사람은 후에 막강한 힘을 가진 외무성 정무국장이 됩니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가 감쪽같이 몰랐던 것인데, 따지고 보면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명성황후의 범인을 내놓으라며 우리가 가서 만난 사람이 바로 명성황후 부주범인 스기무라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이준(李濬) 열사가 할복(割腹)했느니, 감기 들어서 돌아 가셨느니 설이 분분합니다. 日本外交史料館에는 李濬 열사의 사망진단서도 있고, 사망 경위서도 있습니다. 내용은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교과서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오늘 여기서 그 眞相을 발표하는 것은 삼가고 싶습니다만, 우리의 귀중한 사료들이 일본의 외교사료관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한 예로 江華島 條約. 규장각(奎章閣)에 전시된 조약문은 진짜가 아니고, 직인(職印)이 없는 가짜였음이 확인됐습니다. 또한 韓美조약, 韓佛조약, 韓伊조약도 모두 사본(寫本)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한국전쟁 때 누가 가져간 것일까? 훔쳐갔다면 부본(副本)은 가져다 놓았을 터인데, 오랫동안 숙제를 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문건들이 일본 外交史料館에 있었습니다. 그것도 100여 가지에 이르렀습니다. 각국 공사관의 매매계약서, 고종황제 예금통지서조차 목록에 나왔습니다. 그 당시 발간된 신문을 조사해 봤더니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체결 후 高宗께서 이들 외교문서를 처남인지, 매부인지 하는 조남승(趙男升)에 맡겨 숨기게 하고, 이를 다시 치외법권 처지에 있던 뮤텔 천주교 주교에게 맡겼으나 두사람이 독립사건에 연루, 일본 순사들에 체포되면서 모두 빼앗기게 됐다는 것입니다. 乙巳保護條約 체결 후 가장 슬프고 모욕스러웠던 사람들은 당시 해외공관의 외교관들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라이벌 관계, 적대관계에 있던 일본 공사가 한국공사로 부임하여, 『오늘부터 네가 하던 外交는 내가 한다, 乙巳條約의 규정된 바에 의해 모든 집기(什器)와 공관(公館)은 내가 관리한다. 너는 집으로 돌아가라』, 이 치욕 속에서 영국의 이한응(李漢應)이라는 분은 자결했던 것입니다. 장기가 아닌 바둑을 두어야 한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아무리 같아 보여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노래를 가르쳐 보면 기본적으로 한국사람은 3박자 민족, 일본은 2박자 민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사람의 良心에는 한국을 외국으로 보지 않는 눈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그래서 더 일본 사람의 良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일간을 생각하면 중국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중·일, 이 세 나라는 앞으로 잘 협조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기보다 바둑을 두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장기도 바둑도 중국에서 由來합니다. 그런데 이 세 나라 사이의 바둑은 룰이 바뀌지 않았으나 장기만은 바뀌었습니다. 먼저 한국의 기준으로 볼 때, 중국은 楚漢軍 사이 중간에 휴전선 같은 지역이 있어서, 자기 진영일 경우 그곳까지는 한 칸씩만 가야 하고, 일본 장기의 경우도 말들이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상대방의 말을 잡으면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포로(捕虜)를 자기 병(兵)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기는 나름대로의 전통과 국민성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 세 나라는 장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큰 틀에서 바둑을 두듯 협조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일본에 있으면서 지난 7년간 日本外交史料館을 매일 아침 9시에 가서 오후 5시에 돌아오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손을 대지 못했지만 목록만이라도 만들었습니다. 이 목록을 우리 정부 문화기관과 협조하여 출판하기로 며칠 전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입니다.*

입력 : 200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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