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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패의 명장, 李秉衡 장군 永眠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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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육군 중장인 이병형(李秉衡·77) 초대 전쟁기념관장이 지난 9월23일 오전 6시50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1947년 육사 4기로 임관한 李 前 전쟁기념관장은 6·25전쟁에 대대장과 연대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6·25 때 백골부대 대대장으로 130여 차례의 전투 중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不敗의 名將」이었다. 휴전 이후, 그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과 5군단장, 합참본부장, 2군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인민군의 휴전선 도발에 155mm 포탄 400발을 퍼부은 배짱있는 군인이었다. 그는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의 최초 발상자이기도 했으며, 전쟁기념관 건립사업을 주도했다. 李장군은 「한국판 전쟁론(클라우제비츠)」으로 불리는 名著(명저) 「大隊長(대대장)」 「연대장」등 야전지휘관의 지휘철학을 담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용숙(金容淑·71)씨와 이용운(李龍雲) 다임러크라이슬러 이사 등 1남2녀가 있다. 2001년 3월 기자와 만난 故 李秉衡 장군은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참모습』이라고 말할 만큼 國軍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참군인이었다. 1976년 제2군사령관을 끝으로 군복을 벗은 李장군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부인과 같이 은거해 왔다. 당시 기사 「은퇴의 美學」에서 기자와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한다. <『분당이 살기 참 좋습니다. 큰딸하고 아들하고 걸어서 1300보 거리 내에 다 살아요(李장군의 군사학적인 설명이다). 일부러 운동하는 셈치고 자식들 집에 걸어다닐 때가 많습니다. 심심하니까, 1보 2보 3보 세어가면서 가는 거예요. 왕복 2600보죠』 李장군은 요즘 星友會에 나가거나 친구들과 만나는 것이 일과다. 때로는 통일부 자문기구인 통일고문회의에도 나간다.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골프연습 장에서 스윙연습을 한다. 『골프는 軍시절부터 했는데, 여러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지요. 長打(장타)라고들 해요. 그런데 나이가 먹으니까 운동도 못 하겠더라고』 최근엔 부인(김용숙·69)이 요양차 외유중이라 잠시 홀아비 신세가 됐다. 아침은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손수 라면도 끓여 먹는다. 李장군은 軍에서 단련된 체력과 걷기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저녁은 웬만하면 안 먹 는다. 『15년 전 환갑 전후해서 누가 小食(소식)을 권하길래 저녁을 죽으로 조금 먹었어요. 저녁을 많이 먹으면 나이 든 사람에겐 건강에 해로워요』 그는 1976년 제2군사령관을 끝으로 퇴역했을 때 가장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천직인 줄 알았는데, 군인이 사회에 나가서 뭘 하겠느냐는 생각도 들고요. 군인은 군복을 입고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는 것이 참모습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李장군은 「軍事文化(군사문화)」를 소중히 하는 민족만이 선진국의 대열에 올랐다고 주장했다. 군사 문화를 가진 민족이 세계적으로 지도적 국가가 되었고, 후에 경제적 리더로 변해갔다고 말했다. 즉 군사력을 가지고 남의 땅을 뺏고, 남의 백성을 잡아다 노예화시키고 해서 富國强兵(부국강병)을 했다는 설명이다. 『미국사람들은 전형적으로 군사문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자기 나라가 안전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굉장히 예민해요. 情報(정보) 훈련이 아주 잘 돼 있어요. 학교에서 가르쳐 준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의 지도자 혹은 지휘관론은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로마사에서도 로마 집정관이 전투 선두에 서서 늘 戰死(전사)하지 않았습 니까』 화제는 자연스럽게 방위산업으로 이어졌다. 李장군은 오늘날 우리나라 방위 산업의 기초를 다진 주역이다. 李장군은 1967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부임하면서 방위산업에 관심을 가져 서치라이트 개발을 시작으로 낙하산 국산화, 105mm 야포 개발 등 국방부 산하 국방과학연구소(ADD)를 통해 무기 국산화에 주력했다. ―朴正熙 대통령 당시 자주국방 원칙을 세웠던 방위산업이 오늘날에는 그 목표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외국제 첨단무기도입 등 자주국방 의지가 퇴색된 것 아닙니까. 『국산화를 한 부분도 있고 못한 부분도 있다고 봐요. 군수산업은 부가가치가 10~20배까지 생기는 굉장한 사업이지요. 대통령이 직접 관장하니까 「대통령 경제」라고도 하잖아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보고 우리 민족이 대단히 우수한 민족이라고 생각했어요』 ―북한의 대남전략의 기본은 남한 적화통일 아니겠습니까. 북한의 전쟁수행 능력을 어떻게 보십니까. 『북한과 같이 무장능력을 가진 정치 집단은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전쟁의 가능성은 常存(상존)합니다. 전쟁이란 건 경제력이 있어야 돼요. 군사력 그 자체는 힘이 아니고 순간 전투력밖에는 안 됩니다』李장군은 6ㆍ25 전쟁 발발 이후 국군은 영천에서 再무장을 한 후 인민군과의 전투에서 한 번도 진 일이 없다고 말했다. 『인민군은 肉彈攻擊(육탄공격)을 못했고, 국군은 육탄공격을 했어요. 누가 시킨 게 아니에요. 국군은 부대단위로 항복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청진 부근서 제가 지휘하는 대대에 인민군 일개 중대가 백기를 들고 항복했어요』 李장군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전쟁기념사업회장을 맡아 전쟁기념관을 세웠다. 전쟁영웅으로서 전쟁이 끝난 후 전쟁에서 희생된 국민의 업적을 눈으로 확인시키는 작업을 마무리했던 것이다. 李장군은 아파트의 방 하나를 畵室(화실)로 쓰고 있다. 『그림을 손자녀석 에게 주고 미국에 있는 친척들에게도 선물로 준다』고 했다. 현관에 신발이 출입문 방향으로 가지런히 놓인 것을 보고 앞서 들은 「군사문화」이야기가 생각났다.>

입력 : 200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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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msi@chosun.com 기자클럽 「Soldier’s Story」는 국내 최초로 軍人들의 이야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軍隊版 「피플」지면입니다. 「Soldier’s Story」에서는 한국戰과 월남戰을 치룬 老兵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후손들에게 전하는 전쟁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또한 전후방에서 묵묵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軍人들의 哀歡과 話題 등도 발굴해 기사로 담아낼 예정입니다. 기자클럽 「Soldier’s Story」에 제보할 내용이 있으시면 이메일(gomsichosun.com)로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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