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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잡기 위해 「녹슨 칼」 새로 가는 국정원 高泳耉(고영구) 체제의 국가정보원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高泳耉-徐東晩(기조실장) 체제 출범 당시 제기됐던 親北ㆍ思想的 편향성에 대한 걱정은 안해도 된다는 겁니다(월간조선 6월호는 이 문제에 대한 추적기사를 통해 우려와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高원장은 취임 이후 대대적 내부감사를 실시하는 등 집안단속을 강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울러 직원을 대상으로 국정원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간첩 잡는 데 적극 나서라』고 독려했다고 합니다. 국정원 관계자의 말입니다. 『高泳耉 원장이 요즘 상당히 독이 올라 있습니다. 그는 결코 진보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하다가 그런 쪽에 발을 들여 놨는 지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 모습은 완전히 오른 쪽입니다. 그가 국정원장으로 있는 이상 그 자리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요즘 국정원 수사국 소속 직원들은 「일 할 맛이 난다」고 합니다. 그 쪽 일이 간첩 잡는 것 아닙니까. 林東源(임동원), 辛建(신건) 체제에서는 위축돼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아무튼 高泳耉 원장에 대해 좋게 말하면 조직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쉽게 색깔을 바꾸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옳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국회 정보위 소속 한 의원도 高泳耉 원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 사람 요즘 완전히 극우가 된 것 같아요. 「국정원에 들어가 보니 (북한 및 남북관계의) 실상이 어떠냐」고 물어보니 「허허」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더군요. 국정원이라는 곳이 그런 곳인가 봅니다. 청와대나 다른 부처에 있는 책임자들도 국정원에서 근무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高泳耉 원장은 국회 정보위에서 「KAL機 폭파 사건이 한국정부의 음모에서 비롯됐다」는 내용의 책을 쓴 著者에 대해서도 『利敵性(이적성)을 검토, 필요하다면 조사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北은 지난 90년 초반 무렵 초기 수준의 핵폭탄 3~4개 정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최근
6월28일 토요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어느 한정식집. 남경필, 원희룡, 이성헌, 권오을, 김성식, 정태근, 고진화, 박종윤, 권영진 그리고 김부겸, 김영춘 등 한나라당 미래연대 소속 회원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탈당파들은 탈당이유를, 대부분의 잔류 회원들은 마지막 설득 작업을 했다. 저녁 식사 자리였지만 술이 밥을 대신했다. 소주, 맥주 그리고 백세주. 술 병이 그들의 식탁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개혁을 위해, 그리고 한나라당의 개혁을 위해 우리는 맹세하지 않았나? 미래연대를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닌가? 그런데 왜 나가려고 하는가. 『한나라당에는 희망이 없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서 나간다』 -희망이 뭔가. 『지금 한국정치는 지역정치에 묶여 있다.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정치를 하고 싶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한나라당도 이제 새 지도부가 탄생했으니 두고 보자. 그리고 개혁을 위해 여기서 같이 일을 더 해보자. 만약 그것이 안되면 내년 총선 이후에 같이 나가자. 지금 나가고자 하는 것은 盧武鉉 정권 이후 나타난 새로운 「권력」의 힘을 빌어 뭔가를 해보겠다는 것 아닌가. 결국 盧武鉉 정권과 같이 하겠다는 것 뿐이다. 『위험도 있다. 내년 총선에서 떨어질 각오도 돼 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왜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가. 한나라당도 개혁노선을 걷고자 하고 있다. 초기 같이 맹세했던 우리의 다짐을 위해 같이 노력하자. 『...』 이들은 식탁 위에 놓여진 술 잔을 하나 둘 비웠다. 일부 회원은 취기가 올랐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허탈감, 아쉬움 그리고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다. 『이대로 탈당하면 우리는 무슨 명분으로 내년에 출마를 하겠는가. 남아 있는 사람들도 생각을 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안된다면 내년 총선 이후 같이 떠나자』 김성식 서울 관악갑지구당 위원장은 눈물로 호소했다. 탈당을 결심한 김부겸 의원은
1990년, 盧泰愚 정부 시절 인신매매가 번지고, 무역수지는 적자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의 상황은 총체적 난국』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조폭과의 전쟁을 하고, 경제를 살리자는 캠페인도 일어 났습니다. 내각은 경제를 살릴 방편을 의논한다며 연일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그러더니 내 놓은 결론이 「노는 날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글날과 국군의 날은 다음해인 1991년부터 국정 공휴일에서 제외됐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한글날 만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며 그 부당성을 주장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글날은 잊혀진 날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책 결정자들은 국경일을 포함, 한글날을 단순히 하루 「노는 날」로 인식했던 모양입니다. 한글날은 1970년 공휴일로 지정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현실은 「노는 날」을 걱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보리죽도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달러 한푼 벌기 위해 우리의 누님들의 머리카락까지 잘라서 내다 팔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배고픈 시절에도 조상들은 다 깊은 뜻이 있어서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해놓고 특별하게 기념을 했던 것입니다. 한글의 우수성과 중요성은 많은 석학들이 이미 충분히 언급해 놓았습니다. 한글은 문자역사상 만든 날짜와 만든 사람, 만든 목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입니다. 한글은 제자 원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입니다. 한글은 일점 일획도 소리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아 인류가 만든 문자 중 경제성 면에서 단연 앞선 문자입니다. 한글은 소리 생성원리만 잘 연구하면 앞으로도 수많은 소리를 더 만들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입니다. 한글은 天地人의 조화를 표현하여 문자에 철학을 담고 있는 유일의 문자입니다. 공기가 소중함을 잘 모르듯이 우리는 한글이 없이 단 하루도 우리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보화의 강국 대열에 든 것도 한글이란 훌륭한
요사이 시골에 가면 생태계에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논둑 길을 걷노라면 사라 졌던 메뚜기, 개구리가 눈에 제법 많이 보입니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사라진 솔개, 독수리, 부엉이, 소쩍새 같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었던 날짐승들은 좀처럼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메뚜기와 잠자리 같은 곤충이 많아지면 개구리나 들쥐가 많아지고, 다시 개구리나 들쥐를 잡아 먹는 뱀이나 족제비들이 증가합니다. 뱀, 들쥐, 족제비가 늘어나면 부엉이, 소쩍새, 독수리가 나와야 자연의 이치에 맞는데 유독 이들 날짐승만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메뚜기와 개구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습니다. 어릴 때 나지막한 야산이나 논둑 길을 걸으면 메뚜기 떼가 좌우로 파도 치듯이 날아 다녔습니다. 풀무치는 「푸르르」하고 날았기 때문에 「푸랭이」, 방아깨비 수놈은 「때때때」하고 날았기 때문에 「때때미」, 눈이 없고 맛없게 생긴 놈은 「문둥이 메뚜기」라고 불렀습니다. 개구리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도랑이 있는 둑길을 걸어 갈 때 미쳐 방향을 잡지 못한 개구리들이 발 뒤축에 와서 부딪히곤 했습니다. 흰색계통 개구리는 백개구리, 청색계통 개구리는 청개구리, 손바닥 만큼 커서 두 손으로 잡을 만큼 힘이 센 개구리는 떡개구리, 풀잎이나 나무에 착 달라 붙는 개구리는 철봉개구리(흔히 청개구리라고 하는 이놈은 먹으면 큰 일 남), 연못에 살면서 등이 우둘투둘 징그러운 놈은 오똘(옻)개구리, 배때기가 알록달록 한 놈은 무당개구리라고 불렀습니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을 대 놓은 논은 올챙이로 논 바닥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렇게 메뚜기 개구리가 많으니 그 위에 포식자들은 먹이 걱정을 하지 않고 번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많던 메뚜기와 개구리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1980년 중반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농약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 논 저 논
特檢이 未完의 수사로 끝났습니다. 對北송금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밝히되 사법처리는 최소한으로 하겠다던 特檢의 다짐이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물거품이 돼 버렸습니다. 宋斗煥 特檢도 아쉬움을 피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特檢은 아쉬움이 많은 수사였습니다. 特檢은 1억 달러가 頂上회담 대가로, 4억 달러는 경협자금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4억 달러가 국정원을 통해 비밀리에 전달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朴智元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150억원은 또 뭡니까? 그리고 궁금한 게 또 하나 있습니다. 特檢은 정상회담이 하루 연기된 것은 「경호 上의 이유」였다고 밝혔습니다. 特檢이 이 같은 판단을 내린 것은 전적으로 林東源 前 국정원장의 진술에만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난 달 취재한 바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2000년 6월 남북 頂上회담 당시 「대통령의 안전과 경호」를 위해 우리측 선발대로 평양에 먼저 가 있던 한 고위인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인사는 頂上회담 전체의 일정은 물론 대통령의 움직임까지 자세히 알아야 했던 인물입니다. 이 인사는 회담이 연기된다는 사실을 발표 전까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6월12일부터 회담이 시작될 거라 알고 있던 이 인사는 회담이 하루 연기된다는 사실을 평양 현지에서, 발표에 의해 알았던 것입니다. 대통령의 안전과 경호를 위해 목숨까지 받쳐야 하는 사람으로서 회담이 갑자기 연기된다는 것을 통보 받고서는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회담이 하루 연기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회담일정이 6월12일에서 14일 2박3일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기된다는 사실을 6월11일 발표를 전후해서야 알게 됐습니다』 저는 이 인사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林東源 당시 국정원장이 일정 조정을 협의하기 위해 2000년 6월3~4일 양일간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했고 북측 고위층와 이를 협의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셨습니까?』 『林東源 원장
『2002년 12월 19일 제 16대 대통령 선거를 마치고 그 길었든 시간들 속에 일장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 마침표가 또 다른 시작이 될 거라 믿었든 저희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12월 20일 한나라당 제 16대 대통령후보 이회창님은 눈물로서 정계은퇴 선언을 하셨습니다. 항상 무언가의 끝에서면 길었다고 생각했든 기간들이 왜 그리도 짧게 느껴지는지 또 아쉬움은 왜 그리도 많은 지요』(「내 마음 속의 대통령」서문 일부)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李會昌 前 한나라당 총재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네티즌들의 글이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내 마음 속의 대통령」이라는 제목으로 나올 이 책은 대선 이후 한나라당 홈페이지, 창사랑 홈페이지, 다음 카페 등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진 글들이 대부분이다. 이 일을 기획하고 출판까지 담당한 이는 「창사랑(이회창씨 지지자들의 온라인 모임)」의 대구지역 대표였던 정해은씨(57ㆍ개인사업). 정씨는 『李會昌씨가 정계은퇴를 발표하던 12월20일 인터넷에 올려진 글을 읽고 무척 많이 울었던 게 생각난다』면서 『좋은 글들을 컴퓨터 속에 사장시킬 수 없어 책을 만들 생각을 했다』며 출판 배경을 밝혔다. 정씨는 최근 한나라당 일각에서 나오는 「이회창 복귀론」을 의식한 듯 『李會昌씨가 다시 정계 복귀하는 데는 반대한다. 세대가 바뀌고 있는데 한나라당도 변해야 할 것 아닌가』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 『李會昌씨를 좋아 하지만 얼굴 한 번 직접 본 일이 없고, 악수 한 번 한 적도 없다』며 「昌」 복귀세력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정씨는 우선 일차로 2000권 정도를 찍을 예정이다. 출간일자는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6월26일. 그는 전당대회가 열리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앞에서 직접 책을 팔 예정이다. 정씨는 『책을 만드는 데 1000만원 정도 들어갔기 때문에 기본 비용 정도는 벌어야 한다』면서 『수익금은 창사랑 기금으로 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책 출간과 관련해 한나라당 대표경선에 나선 한 후보측은 『李會昌 총재께서 「
국가인권위에 북한 人權문제 개선 요구 진정서 제출 ‘북한 人權에 대해 위원장이 모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안다는 사람, 나와보라.’ ‘이라크 국민들의 人權을 운운하면서 한 민족인 북한 주민들의 人權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못하는 인권委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가 말이오. 어서 문을 열라우요.’ 지난 6월 3일, 서울 중구 프레스 센터 국제회의실에서 탈북자들과 북한 人權 문제에 관심을 가진 시민, 대학생등 3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대회를 가진 후 이들은 곧바로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7층에 있는 인권상담센터로 몰려갔다. 최근 정부의 유엔인권委의 對北 결의안 표결에 불참과 인권위원장의 발언 등으로 3000여명의 탈북자들은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며 金昌國 위원장의 면담을 요구했으나 金위원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13층에 있는 金昌國 국가위원회장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金昌國 위원장은 지난 4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북한 人權에 관한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계량화된 자료가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해 의원들의 거센 질타를 받은 바 있다. 이들은 1) 정부는 북한 人權 문제 개선을 남북회담의 최우선 의제로 채택하라. 2) 인권委는 북한의 人權 문제를 다루는 전담부서를 죽각 구성하라는 등의 진정서를 인권委에 제출했다. 이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은 安赫(안혁. 36. 1992년 입국)씨와 姜哲(강철환. 35. 1992년 입국. 朝鮮日報 기자)씨를 비롯한 김성민(탈북동지회 사무국장), 오수룡, 차성수등 5명은 金昌國 위원장 대신 강명득 인권정책국장과 대회를 나눴다. 강국장은 인권委가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 아는 바 없다고 한것에 대해 ‘충분한 자료와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강국장은 또 ‘최근 인권委에 북한 인권연구팀을 만들었다.’며 오는 6월 5일 시민 및 사회단체와 간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동북3省(흑룡강성ㆍ길림성ㆍ요녕성)의 몇몇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북한과 가까운 곳도 다녀왔습니다. 사스(SARSㆍ급성호흡기증후군)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런 걸 무서워해서는 안되겠죠. 취재는 잘 안됐습니다. 그러나 기자는 중요한 걸 깨닫고 왔습니다. 「통일은 되어야 한다」는 大전제 하에 「북한동포를 살리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통일을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어쩌면 북한문제 해결과 통일 달성을 위해서는 美國보다 中國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우리의 또 다른 동포 중국 조선족 그리고 탈북자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등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했습니다. 물론 이 같은 내용들은 국내 언론을 통해 수 없이 보도돼 왔던 것들입니다. 기자는 그 동안 이런 문제에 대해 『그려러니』하는 생각만 해 왔습니다. 이번 중국 방문이 제게 준 또 하나의 「충격」이 있습니다. 月刊朝鮮 기자로서의 역사적 사명감입니다. 『북한 인민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金正日 독재 타도』라고 주장하고 있는 한 탈북자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는 이 같은 혁명적 사업을 위해 작지만 엄청난 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탈북자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 월간조선 기자라면 정말 열심히 취재하시오. 월간조선은 우리의 糧食(양식)이오. 투쟁양식 말이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조선(북한)에는 분명 김정일 타도 세력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월간조선이 생명수와 같은 것이오. 비록 그들이 월간조선을 접하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비밀리에 보내려고 하고 있소.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간다는 생각으로 일 하시오』 이 말을 들은 기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탈북자는 몇몇 지인들을 통해 월간조선을 몰래 입수해 읽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순간 기자의 머리를 「때리는」 말들이 생각났습니다. 「극우 보수언론, 반개혁적 언론, 반통일 언론...」 솔직히 기자 주변에는 「안티조선」은 아니지만 「親조선」은 아닌 언론계 선배들이
[심층분석] 駐韓美軍 철수時 戰力 대체 비용은 얼마나 들까? 駐韓美軍의 「하드웨어」 대체 비용만 31조원… 정보수집ㆍ인력 등 「소프트웨어」는 대체가 불가능… 방위비 부담은 두 배로 매년 100억 달러 추가 지출… GDP 2% 감소 ● 오산ㆍ수원 기지 등에 배치된 48基의 패트리어트 미사일 요격 미사일의 가치는 2조원 ● 유사시 사용하는 「전쟁 예비탄」은 10만t 이상… 6조원 ● KH-11ㆍ12 첩보위성, U-2機, 통신감청 장비 등 미군의 정보자산 가치는 돈으로 환산 어려워 ● 주한미군, 운용비 年 30억 달러 ● 한국 국방연구원(KIDA)의 「국방경제모형(KODEM-2)」 시뮬레이션 결과, 『현재 주한미군 철수하면 방위비 약 2배 돼야』 ● 再배치 추진될 경우, 야전부대인 2사단이 옮겨갈 수백만 평의 땅을 물색하기 어렵다 ● 제프리 존스 美 상공회의소 명예회장, 『주한미군에 대해 외국 투자자들은 「투자 보호막」으로 인식. 核문제로 인해 외국인 직접투자가 40% 이상 줄었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駐韓美軍 가치는 140~260억 달러 駐韓美軍이 완전 철수할 경우, 그 공백을 메우고 駐韓美軍이 있을 때와 같은 수준의 戰力(전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얼마나 될까. 정부는 駐韓美軍이 당장 철수할 경우 자체능력으로 대체戰力을 구축하기 위해선 30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했다. 지난해 9월30일 통일부가 국방부로부터 입수, 국회 통일외교통상委 曺雄奎(조웅규·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駐韓美軍이 보유한 장비와 물자에 대한 평가액만도 약 140억~259억 달러(약 16조8000억~31조원)에 달한다. 물론, 주한미군 장비 및 탄약, 정보 수집 수단과 연간 운영유지비 등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계산에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총병력 3만7000여 명
초여름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계를 담당하는 캠프 보니파스를 찾았습니다. 이 부대는 적과 얼굴을 맞대고 경계근무를 하는 까닭에 부대구호도 forever in front of them all!(최전방에서!)이더군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했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굽어보이는 3초소(찰리초소)에서 바라본 북측 기정동 마을의 모습은 부산해 보였습니다. 논에 물을 대고 트랙터로 밭을 가는 모습이 우리네 모습과 큰 차이가 없더군요. 남측 대성동 농부들은 모내기를 진작 끝냈습니다. 반듯한 논에 물이 넘실거렸고, 모들은 벌써 땅내를 맡은 듯 노릿한 색깔이 검푸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사방은 고요하고 새소리만 들렸습니다. 가장 긴장이 흐르는 곳이 가장 평화롭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고 문득 황지우 시인의 시 '아직은 바깥이 있다'가 생각이 났습니다. *
몽클라 장군의 백의종군 기자는 최근 지갑종(池甲鍾ㆍ76)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이 연합신문 정치부 차장시절, 몽클라(Monclar) 장군을 인터뷰한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됐다. 인터뷰를 보면 그가 스스로 ‘계급 강등’의 길을 선택한 이유가 나온다. 기사 全文을 소개한다. 중령 계급장 달고 참전한 몽클라 中將 會見談-연합신문 1959년 1월13일자 “韓國軍은 세계 제1급 군대 조속한 시일내 통일 冀願” 한국참전 16개국중 10번째로 벨기에(白耳義)의 방문을 마친 본 기자는 그 인국(隣國)인 佛불란서(佛蘭西)를 열한번째로 방문하게 되었다. 여정도 초조(焦燥)히 이 나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당지시간(當地時間)으로 1월9일 하오 6시 30분이었다. 드골씨 지도하에 제5공화국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어 디디려는 이 불란서공화국은 오랜 역사를 두고 세계의 중심을 이룬 나라이지만 우리의 기억에 무엇보다도 생생한 것은 6.25동란 당시 용약(勇躍) 한국에 파병하여 그 전통적인 무용을 대공전(對共戰)에 바친 사실이다. 동란이 발생한 해인 8월20일에 일부 지상선발대를 파병하고 계속하여 주력부대인 1개독립 보병대대를 갖고 한국동란에 참전하였던 것이다. 3차에 걸쳐 병력의 교대가 있었는데 이 동안 참전한 용사들은 전부가 지원으로 이루어진 장병으로서 구성되었으며, 제1차 파병은 저 유명한 말세이유 항(港)을 출발하여 1950년 11월24일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에서 좋던궂던 기자가 들은 불란서 파병 이면(裏面)의 일단을 소개하건대, 당시 이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막대한 출혈에 지친 나머지 한국파병의 첫 1개 대대가 ‘말세이유’항을 떠나려던 때 일부 시민들이 부두와 대로에서 트럭을 통과 못하게 방해 메모를 하여 1일간 출발을 연기하여 다음날 새벽 일찌기 승선시켰다는 것이다. 이들 일부 시민들의 파병반대 이유는 세금이 오른다는 것이었다 한다. 그러나 현명한 佛蘭西 지도부는 인류정의의 굳은 신념 밑에 기어코 파병은 단행하고야 말았다. 한편 불
해군, 한국전쟁 기간중 국산비행기 제작 성공 우리 비행기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공군이 아닌 해군이라는 재미있는 기록이 발견됐다. 해군본부가 밝힌 해군일화집에 따르면 1951년 8월 해군이 단독으로 국산비행기 '서해호'를 제작했다고 한다. 우리 국산비행기가 어떤 산고를 겪어 태어났고 어떤 벽에 부딪혀 좌절했는가 하는 기록이 해군일화집 제1장 "초창기편"에 나온다. 참고로 전문을 소개한다. 국산비행기 제작의 효시 1951년 8월 우리 해군이 단독으로 국산비행기 '서해호'를 제작 완성한 것은 조경연 중위와 배종민, 김종건 문관을 비롯하여 그밖에 17명의 공창 기술진의 피땀어린 노고의 결정이었다. 1946년 9월에 우리 해군은 처음으로 300톤급의 쾌속정 '충무공정'을 만들어 세인을 놀라게 한바 있거니와 그후 해군은 또다시 국산 비행기를 만들어 공창 기술진의 기량과 기개를 드높였다. 우리 나라에서 비행기를 만든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서 그대의 애로와 난관이란 참으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비행기 제작에 주동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조경연(趙敬衍) 중위였다. 조 중위는 일제부터 항공기 연구에 몰두해 온 청년으로서 그는 모형비행기를 만들기를 몹시 좋아하였다. 그가 해군에 입대 PF기관장으로 있을 무렵이었다. 목포지구에 미군 비행기 1대가 추락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 중위는 미군이 버려둔 추락 비행기의 엔진과 그 밖의 부속품을 사모아 어떻게 하든지 비행기를 만들어 놓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후 그는 목포에서 주어온 엔진을 말끔히 수리하는 한편 여러 방면으로부터 자재를 구득하기에 온갖 열성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마침내 조 중위를 비롯하여 배종민, 김종건 등 10여명은 수상비행정 1대를 제작, 시험비행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함대사령부 편제에는 건공반이 새로 생기게 되었고 건공반이 창설되자 대원들은 더욱 분발하여 해군 603정으로 강원도 설악산까지 가서 추락된 비
김정일, 삼지연 별장에 숨어있었다 지난 5월12일자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미군 당국은 지난 2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김정일이 약 50일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미군의 폭격을 두려워하여 은신처에 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북(對北) 정보부서에서 오래 근무했던 한국군 장성은 최근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金正日)이 백두산 근방에 있는 양강도의 삼지연 지하 은신처에 숨어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1만1000여개 지하갱도 가운데 김정일의 은신처로 추정되는(미군은 확실히 파악중이라 함) 곳은 평양 근방 자모산을 비롯, 묘향산, 삼지연 별장(북한에선 특각이라 함) 등 5~6곳이라고 했다. 은신처는 평양을 중심으로 중국 국경을 향해 종심(縱心)에 위치하고 있는데, 여차하면 김정일이 국경선을 넘어 중국으로 도주하기 쉽도록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북한 김정일은 유사시 대피할 수 있는 시설을 1985년부터 건설해 왔다고 한다. 비행기로 대피할 수 있도록 주석궁에서 순안비행장으로 가는 지하통로를 만든 것을 비롯, 각 시군마다 지하갱도를 뚫어 김일성 사적물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했으며, 당ㆍ행정기관의 지휘부가 숨을 수 있는 곳을 만들었다. 그는 金正日의 은신처가 지하 갱도 50m 이하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미군이 이라크전에서 사용한 벙커 파괴 폭탄으로도 파괴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미군은 스텔스 전폭기로 미리 은신처로 파악한 지점을 공격해 입구를 무너뜨리고, 미군 降襲(강습)부대를 침투시켜 환기구(ventilating opening)에 최루가스 등을 넣어 김정일과 지휘부를 제거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했다. 미군은 현재 24대의 B-1, B-52 폭격기를 괌에 배치하여 북한을 작전 반경안에 두고 있다. B-1폭격기는 특히 레이다망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스텔스 기능을 가진 폭격기로서 북한의 방공망을 빠져나갈 수 있다. 최근 미군이 지난 3월 한미독수리연습을 위해 한반도에 와 있던 F-117스텔스
기자는 최근 한 月刊朝鮮 독자로부터 장문의 글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장교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힌 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탈출기」였습니다. 글의 주인공은 올해 일흔 넷인 유창상이라는 분입니다. 대한석탄공사 공무부장을 거쳐 웨스팅하우스에서 상무이사를 지내셨던 분이랍니다. 유씨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9월 서울대 공과대학 재학생으로 있다가, 「연락장교」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불행히도 그 해 11월 그는 북한지역에서 작전 중에 중공군의 포로가 됩니다. 장교신분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상당한 고문을 당할 것 같아 그는 잡히기 직전에 계급장과 서울대학생증, 도민증 등을 숨깁니다. 『5연대, 이등병, 유창상』 유씨는 敵軍의 심문에 이렇게 자신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는 평남 덕천, 신흥, 청천강 서부지역, 온정리 등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추위와 굶주림, 고문, 복구부대에서의 강제노동 그리고 탈출계획까지... 유씨는 글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1953년 포로교환으로 한국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유씨는 결론부분에서 『70세 이상의 고령인 그들(국군포로)이 생전에 고국에 돌아올 수 있도록 당국이 정책을 마련하고 강력히 시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고 말했습니다. 유씨는 현재 뇌졸중 증세가 있어 몸이 약간 불편하다고 합니다. 유씨의 부인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남편이 나라 걱정을 참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전쟁에 나가 온갖 고통을 받으며 애국을 했는데 요즘 우리나라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 잘 반영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밤을 새며 글을 쓰더군요』 살아온 날 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유씨. 그는 자신보다 「나라」를 더 소중히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자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젊은이들에게 알리고자 익숙치 않은 컴
美 핵추진 항공모함 칼 빈슨(9만5000t) 탐험기 艦內 탈영해도 찾는 데 며칠이 걸린다 ●수송기 C-2A 「그레이 하운드」를 타고 칼 빈슨에 착륙… 『선회비행 때 G5 느껴』 ●1분 간격으로 전투기가 뜨고 내리는 떠다니는 「전투 기지」… 건조비 40억 달러, 1년 운영 예산만 3570억원 ●5200여 명의 승무원… 5種75대 전투기 실어 ●항모의 3대 요소는 격납고, 캐터펄트, 엘리베이터 ●10여 척의 순양함·구축함·핵잠수함·지원함 거느려 吳 東 龍 月刊朝鮮 기자 4년 만의 한반도 나들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이튿날인 지난 3월21일, 美 핵추진 항공모함 칼 빈슨(Carl Vinson)호에 승선하기 위해 국내외 언론사 기자들이 새벽 어스름에 국방부 정문 앞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항공모함 칼 빈슨은 지난 3월4일 시작돼 4월2일까지 연례적으로 실시되는 韓美연합 기동연습인 「독수리 연습」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것이다. 韓美연합사에 따르면, 美 항모는 한반도 주변 해역으로 이동해 독수리 훈련에 참가해 왔지만, 훈련기간에 한국 항구(부산)를 방문하는 것은 1999년 이후 4년 만의 일이다. 칼 빈슨은 이라크戰에 참가하기 위해 중동지역으로 이동한 7함대 소속 항공모함 키티호크의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지난 3월15일 우리 동해에 배치돼 훈련에 참가하게 됐다고 한다. 칼 빈슨의 「독수리 연습」 참가는 최근 북한 핵위기, 美정찰기 위협사건 등으로 西태평양 지역에 미군 전력이 증강배치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주목을 끌 만한 사건이었다. 평양방송은 지난 3월11일 보도를 통해 『美帝(미제)가 우리를 힘으로 압살하기 위해 핵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려고 침략과 전쟁으로 악명을 떨친 항공모함 칼 빈슨호까지 남조선 항구에 끌어들여다 놓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조건에서 우리도 결코 가만있을 수 없게 됐다』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오산 공군기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韓美동맹 50년의 證言 - 白善燁 장군 『우리는 美國을 붙잡아야 산다고 생각했다. 草根木皮의 나라가 세계 최강대국과 손을 잡았기에 안보도, 번영도 가능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발상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제의했던 白善燁 장군 ● 美 해군성 전략기획국장(알레이 버크)이 『아이젠하워에게 휴전의 代價로 한미 군사동맹을 요구하라』고 충고… 美 대통령과 단독 면담, 원칙에 합의 ●『한미동맹은 함께 피를 흘린다는 전제에서 출발. 그것이 血盟이다. 입으로만 동맹이 되지는 않는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3·1절 대회장에 나타난 「多富洞의 영웅」 지난 3월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약 10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에서는 歷戰(역전)의 용사들의 함성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이날 사회를 본 奉斗玩(봉두완)씨는 白善燁(백선엽·84) 장군을 단상으로 올라오게 해 『한국전쟁의 영웅 白善燁 장군. 이분이 1950년 낙동강 多富洞 전선에서 버티어 주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생존한 것』이라고 참석자들에게 소개했다. 白장군은 高齡(고령)이 믿기지 않게 힘차게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 참석자들의 열띤 박수를 받았다. 軍歌 「전우야 잘 자라」를 목청껏 불러 대는 歷戰 용사들의 눈시울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白善燁 장군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평양사범, 만주군관학교, 군사영어학교, 1사단장, 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한국군 최초의 육군 대장을 지낸 전쟁영웅이다. 그는 3년1개월간 치러진 6·25전쟁 기간 중 제1사단장으로 平壤(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했고, 그 후 군단장, 육군참모총장으로 60만 大軍을 지휘하면서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에 대한 不敗(불패)의 기록을 남긴 百戰百勝(백전백승)의 장군이었다. 그런 그가 거리로 나온 까닭은 무엇일까? 기자는 지난 3월4일 오후 전쟁
진중가요 「전우야 잘자라」작사자 兪湖의 노래 인생 『울분과 술기운으로 단숨에 지은 노래』 ● 서울 수복 되던 날 明洞에서 朴是春씨 만나… 단숨에 「전우야 잘자라」 작사ㆍ작곡 ● 작곡가 朴是春씨의 의뢰로 히트곡 「신라의 달밤」,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63곡 作詞 ● TV드라마「유호극장」5년간 250회 방송… 프로그램 제목에 처음으로 작가 이름 붙여 兪 湖 1921년 황해도 해주 출생. 1939년 제2공립고등보통학교(現 경복高) 졸업. 1942년 東京제국미술학교 도안과 2년 수료. 1943년 동양극장 미술부ㆍ문예부 입사. 1945년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근무. 1949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1954년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ㆍ부장. 1962년 방송작가로 복귀. 1980년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1985년 한국방송작가 교육원장. 1968년 방송문화상, 1987년 한국방송 60주년 문화포상, 1993년 서울시문화상, 2002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 작사곡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전선야곡」, 「삼다도 소식」, 「이별의 부산정거장」, 「고향만리」, 「럭키 서울」, 「맨발의 청춘」, 「님은 먼 곳에」, 「전우야 잘자라」 「진짜 사나이」(군가) 등 63곡.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반세기 만에 돌아온 「전우야 잘자라」 지난 3월24일,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兪湖(유호·본명 兪海濬·83) 선생은 반세기 전의 감격이 느껴지는 듯 조용히 가사를 읊조리고 있었다. 3월1일, 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서울시청 광장)에 참석한 참전 용사들이 그의 노래 「전우야 잘자라」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에게 『「전우야 잘자라」를 다시 부르며 우는 사람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콧날이 시큰했다』고 했다. 1950년 10월은 국군장병과 민족 전체를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가 통일이
남대문이란 말은 일제가 만들어 유포 시킨 말이기 때문에 그 원래 이름인 「숭례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줄 알고 있고, 몇일 전 모 일간지의 독자투고란에도 같은 주장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대문은 남대문일뿐 일제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 산이름에는 유독 앞산, 남산 이란 이름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동네 앞에 있는 산은 거의 대부분 앞산 혹은 남산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물론 북쪽에 있는 산은 뒷산으로 불렀습니다. 현재 서울의 남산은 조선시대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습니다. 목멱산은 「남쪽에 있는 산」이란 말로 남산과 같은 말입니다. 서민들 입장에서는 「목멱산」이란 말 대신 친근한 「남산」이란 말을 더 선호 했을 것이고, 이 말이 오늘날 그대로 이어져 남산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쪽에 있는 「흥인문」은 「동대문」으로, 서쪽의 돈의문은 「서대문」으로, 남쪽의 숭례문은 「남대문」으로 그냥 그렇게 불러 왔습니다. 옛 문헌에도 남대문이라고 기록한 것을 셀 수도 없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흥인문도 굳이 「흥인지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흥인문」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명은 현지 사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사용하면서 굳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백제가 망하고 백제의 많은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이들 유민들은 일본에 정착하면서 주변의 산과 강 고을에 옛 고향의 지명을 그대로 많이 붙혔습니다. 아마 한반도에서 건너간 유민들이 붙인 이름중에는 앞산도 있었을 것이고, 뒷산이란 이름도 있었을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 백제나 신라 고구려 사람들이 붙여 놓은 지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참고로, 애국가 가사 중에 나오는 「남산」은 서울에 있는 남산이 아니라, 우리 나라 어느 동네에나 있는 「남산」즉 「우리의 산하」로 봐야 할 것입니다. ps: 이 글을 읽고 월간조선 조남준 부국장이 다음과
SUBJ: US Forces Korea Public Relations Officer Speaks on USFK-ROK People Relations SOURCE: Seoul Wolgan Choson in Korean 01 Apr 03 pp 461-476 TEXT: [Article by Wolgan Choson reporter O Tong-yong: "Testimony by US Forces Korea Public Relations Officer Kim Yong-kyu From His 25-Year Career"; bolded subheads as published] [FBIS Translated Text] US Forces Committed Many "Foolish Acts" of Doing Good Deeds But Being Blamed for Them" Without losing his cool-headedness while being caught between the fires of anti-US and anti-ROK sentiment, he stated that "US Forces believe us to be a companion, but we are entrenched in 1960's and 1970's notions and think that they are looking down on us." A Man Who Has Three Official Titles Kim Yong-kyu (age 56) lives with three "official" titles, pubic relations officer for US Forces Korea [USFK] Headquarters, United Nations Command [UNC], and US Forces Combined Headquarters. Mr. Kim has his office in the public relati
駐韓美軍 공보관 - 金永圭의 25년 체험 증언 『美軍들은 좋은 일 하고도 욕 먹는 「바보짓」을 많이 했다』 反美 감정과 反韓 감정의 협공 속에서 냉정함을 잃지 않는 그는 『미군들은 우리를 동반자라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1960~70년대식 생각에 매여 그들이 우리를 얕잡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세 가지 직함을 가진 사람 金永圭(김영규ㆍ56)씨는 세 가지 타이틀을 가지고 산다. 駐韓(주한)미군사령부, 駐韓유엔군사령부, 韓美연합사령부의 공보관이 그의 「공식」 직함이다. 金씨의 사무실은 서울 용산 美8군 메인포스트內에 있는 공보실. 그의 사무실 전화와 휴대전화는 內外信의 문의 전화로 종일 몸살을 앓는다. 남들은 한번 충전하면 며칠씩 사용한다는 휴대전화 배터리도 퇴근 무렵인 오후 5시면 바닥이 난다. 韓美 관계의 「接點(접점)」에 있는 그는 韓美 50년 동맹사상 최악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동맹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전화부터 걸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답변은 대변인의 성명처럼 우렁차고 간단 명료했다. 『내일 외신기자들과 판문점엘 들어가는데 날 만나려거든 오전 9시에 통일대교 입구로 나오시오. 鄭周永(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끌고 들어간 다리 말이오!』 지난 1월29일 설연휴 직전, 기자는 승용차를 몰고 자유로를 달렸다. 간밤에 도로에 쌓인 눈이 영하 14도의 맹추위로 얼어붙어 고속으로 달리는 차를 위태롭게 했다. 판문점으로 가는 길의 주변 산들은 눈을 뒤집어쓴 채 얼어 있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를 상회하는 칼바람 속에서 AP, AFP 등 세계의 주요 통신사의 기자들이 유엔군사령부의 협조로 판문점을 찾은 것이다. 駐韓미군 공보관인 金씨가 外信기자들을 따라나서는 일은 그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
행사의 이모 저모는 '카메라 산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현직 대통령들의 정보기관 보고서 취향] 정보기관에 대한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의 개혁의지가 확고해 보입니다. 특히 국정원에 대해서는 「特別」할 정도입니다. 盧대통령은 민주당 大選(대선) 후보시절은 물론 당선자 신분 때도 『국정원 보고서는 한 줄도 보지도 읽지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盧대통령은 검찰인사 파동 당시 「평검사와의 대화」에서도 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국정원 보고서를 직접 보지는 않지만 국정원은 여전히 청와대에 보고서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보고절차와 내용이 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국정원 보고서는 수석비서관들이 참고한다고 합니다. 盧武鉉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 기자간담회에서 『정책상황실이나 국정상황실쪽에서 보고서를 우선 순위와 중요도에 따라 배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국정상황실 등이 국정원 보고서는 물론 관계기관 정보를 일차로 스크린 한 뒤 청와대 해당부서에 회람ㆍ배포를 하거나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절차를 거친다는 것입니다. 盧대통령이 국정원 보고서를 직접 보지는 않지만 사실상 비서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국정원 보고서의 내용은 「정치사찰 성격」을 탈피하고 있다고 합니다. 청와대는 이런 종류의 보고서를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국정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정치정보 외의 경제ㆍ남북관계ㆍ해외정보가 강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국정원뿐만 아니라 경찰청 보고서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경찰청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경찰 정보요원들의 업무가 정치분석ㆍ전망에서 査正(사정) 정보 수집으로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한 관계자의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정치동향 수집에서 정치인 非違(비위) 사실을 수집하는 쪽으로 업무 중심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아무튼 盧武鉉 대통령의 정보보고서 취향이 과거와는 좀 달라지고있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며칠 있으면 설날입니다. 설날 풍경이야 전국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 설날은 무척 설레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설날인가? 어른들에게 세배가 끝나고 나면 또래끼리 짝을 지어 동네 노인들에게 세배를 하러 다니곤 했습니다.어쩌다 백원짜리 하나 건네 주는 노인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탕이나 떡, 과일, 쌀과자 등을 줍니다. 어떤 노인분은 초등학생 꼬맹이들인 우리들에게 정종을 한잔 따라 주기도 합니다. 노인들 위주로 세배를 돌지만 친구 부모님에게는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제일먼저 세배를 하곤 했습니다. 동네 친구 아버지 중에 깐깐하기로 소문난 분이 한분 계셨습니다. 저와 세배를 다닌 친구 일행은 그 친구 아버지 집에 도착해서 안방문을 휙 열고 『세배하러 왔습니다』하고는 방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친구 부모님을 모셔놓고 큰절을 한 것 까지는 좋았습니다. 우리는 뭔가 좀 허전한 것 같아 단체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고 새해 인사를 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따사롭던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졌습니다. 깐깐한 친구아버지는 우리가 일어 섰다 앉기도 전에 『어른한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것이 아니야. 그러면 자네들 아버지가 욕먹어...』하며 혀를 찼습니다. TV에서 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기에 그 말이 입에 배어있던 차에 한명이 그 말을 하자 모두가 엉겹결에 따라 해버린 것입니다. 『어른들에게 세배할 때는 그냥 절만하는 것이 제일 좋고, 정 한마디 하려면 「건강하십시오」라고 하면 된다』 세배하러 왔다가 우리는 꿇어 앉은 채 친구 아버지의 예절 교육을 무릎이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안동식혜가 한 상 나왔지만 숟가락을 갖다 댈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후 우리 할머니에게 세배 오는 사람들을 가만 살펴보니 모두들 그냥 절만 하고 가거나 간혹 『몸 편찮은데 없냐』고 한마디 물을 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그런 불경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큰 절할때는 무조건 입을 꼭 다
전직 국정원 직원 김기환씨가 이번에는 국정원 도청 의혹과 관련한 글을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그는 도청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에 대해 『(검찰이)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것』고 말했습니다. 현재로서 물증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나라당이 지난해 대선 직전 폭로한 도청 문건은 『국정원측이 메모보고서 양식으로 작성한 것을 외부에서 다시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인터넷에 올린 글 중 일부입니다. 김기환씨는 한나라당이 공개한 문건이 국정원에서 작성한 메모보고서와 사실상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영일 사무총장이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나라당이 폭로한 문건은 국정원 내부 문건이 아니다』고 말한 것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동일해 보입니다. 그는 『국정원이 도감청한 내용을 인쇄할 수 없기 때문에 외부에서 그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검찰 수사에 대해 『국정원측이 증거를 없앴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도감청을 했다는 물증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관련 부서를 없앴을 뿐만 아니라 관련 직원들도 여러 부서로 내보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기환씨는 또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과 신건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도감청 문제에 대해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국정원의 도감청 행위에 대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면서 『오히려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도감청과 관련해 국정원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불법적인 도감청은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도청관련 시설도 없다는 것입니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의 말입니다. 『얼마 전 검찰이 불시에 국정원의 감청시설에 대해 현장조사를 벌였습니다. 국정원 입장으로서는 대단히 당황해 할만한 일이었지만 국정원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조사를 받아들였습니다. 현재로서는 불법적인 도청은 없습니다』 감청은 통신비밀보호법 7조에 의해 고등법원 수석 부장판사의 허가나 대통령의 승인 하에 이루어지는
안동식혜는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이 음식은 안동 문화권인 경북 북부 지방에만 맛볼 수 있는 음식입니다. 같은 문화권인 의성이나 예천 서부지방 등지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안동식혜」라고 이름 붙여도 그다지 큰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안동에서는 흔히 「식혜」라고 하면 이 안동식혜를 칭하는 것입니다. 타 지방에서 식혜라고 부르는 것을 안동에서는 「감주(甘酒)」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해서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따라서 안동지방에서는 식혜를 안동식혜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식혜라고 합니다. 안동식혜는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속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무엇보다 그 맛이 워낙 독특해서 처음 먹는 사람은 이게 무슨 맛인가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가장 큰 특징은 겨울철에 만들어 먹는다는 것과, 무우채, 생강, 고춧가루가 기본으로 들어가고 그 외에 당근, 땅콩, 잣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발효를 시켜서 만드는데 이 때문에 독특하게 삭인 맛이 나고 많이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안동 지방에서는 설날 식혜를 만들지 않는 집이 없으며, 찾아 오는 손님에게는 꼭 식혜를 대접합니다. 그 맛이 집집마다 천차 만별이라 돌아다니며 맛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입니다. 안동식혜가 발효식품이라는 점에서 젓갈의 한 종류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경북 북부 내륙지방에서는 생선이나, 새우 등의 젓갈 종류를 구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무 등 야채를 이용해서 젓갈을 담았다는 것입니다. 바다 음식이 얼마나 귀했냐고요? 이쪽 지방 옛날 노인들은 평생 소원이 새우젓하고 밥한번 먹어 봤으면 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구한말 혹은 일제시대 중국 연변 지방으로 옮겨간 안동출신 후손들이 이 식혜를 만드는 것을 보면 매우 걸죽하게 만들어 마치 죽처럼 보입니다. 현재 안동지방에서는 식혜를 이처럼 심할 정도로 걸죽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타지에서 온 분들은 안동댐 올라가는 민속촌에 가면 평소에도 안
'지방선거 구인난' 국민의힘, 추미애에 맞설 경기도지사 후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