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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모스 전 대통령 타계로 본 필리핀과 한국

족벌지주세력이 정치-경제를 지배하는 필리핀...이승만의 농지개혁, 박정희의 산업화 바탕으로 성공한 한국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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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모스 추모 포스터. 라모스의 일생을 담고 있다.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 7월 31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1950년 미국 육사를 졸업한 라모스는 신장수술을 받은 직후였음에도 한국전 파병을 자원, 1952년 5월 이리(Eerie ) 고지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다. 월남전 때는 민사지원부대 참모장으로 참전했다.

이후 착실하게 군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마르코스 정권 시절에는 경찰군사령관으로 승승장구했으나 1986년 2월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혁명이 일어나자 후안 폰세 엔릴레 국방장관과 함께 코라손 아키노가 이끄는 혁명 세력에 가담했다. 당시 그와 엔릴레 장관이 기관총을 들고 코라손을 호위하면서 거리를 행진하는 사진은 ‘피플 파워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라모스와 엔릴레의 이반(離叛)은 마르코스정권에 치명타가 되었으며, 군부의 지지를 잃은 마르코스는 일가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아키노 정권이 들어선 후 그는 필리핀군 참모총장, 국방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9차례에 걸친 쿠데타 시도를 막아내 아키노 정권이 뿌리를 내리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코라손아키노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1992년 5월 대선에 출마, 미리암 디펜소로 산티아고 전 농업개혁부장관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그의 득표율은 23.58%에 불과했다. 재직 중 공산반군과의 화해, 외국인 투자유치와 경제발전 등의 업적을 남겼다. 가톨릭이 주류인 필리핀에서 유일한 개신교도 대통령이기도 했다. 2001년 부패한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축출하고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부통령을 대통령으로 세운 제2차 피플파워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 국가 원로로서 활동했다.

 

흔히 라모스는 필리핀 민주화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는 필리핀 정치의 민낯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파가시난주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언론인‧변호사 출신으로 5선 의원과 외무부장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어머니 앙헬라 발데스는 일로코스 노르테주 출신의 여성운동가이자 교육가로 그녀의 집안 역시 일로코스 노르테주의 유력 가문 중 하나였다. 일로코스 노르테주는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출신 지역으로, 라모스는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6촌이기도 하다.

여기서 보듯 필리핀은 소수의 유력 가문이 정치와 경제를 모두 지배하는 족벌(族閥)정치의 나라다. 대개 화교의 후예이거나 화교와 원주민의 혼혈의 후예인 200여개의 유력 가문이 토지의 70%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단순한 지주가 아니다. 농산물 생산에서부터 가공, 유통에 이르는 일련의 산업 체인을 지배하는 재벌이다. 자신들의 땅과 산업체를 지키기 위한 사병(私兵)도 거느리고 있다. 이들은 농민과 직원들을 거의 봉건영주처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이 자신들의 부(富)를 지키기 위해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필연이다. 필리핀의 역대 대통령, 유명 정치인, 장관, 주지사들은 대개 이들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

 

이런 기득권세력에 도전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 1960년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죽은 막사이사이 전 대통령은 두고두고 추앙의 대상이 됐다. 반면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개혁을 외치면서 대통령이 됐다가 그 자신이 기득권세력이 되고 말았다. 

마르코스는 경제발전과 부패척결, 농지개혁 등을 내세워 1965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1972년 9월 공산반군의 위협을 이유로 돌연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독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3년 8월에는 미국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는 정적(政敵) 베니그노 아키로를 공항에서 암살했다.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개헌을 통해 다시 대통령이 된 마르코스는 ‘신사회운동’을 제창했지만, 그 ‘신사회’는 반체제세력에 대한 투옥, 고문, 강제수용소 수감, 그리고 가난으로 얼룩진 사회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가는 나라라는 소리를 들었던 필리핀은 1960년대 후반이 되면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5·16이 일어나던 1961년 한국의 1인당 GDP는 92달러였지만, 필리핀은 그 3배 가까운 260달러였다. 1969년 한국의 1인당 GDP는 239달러를 기록, 237달러를 기록한 필리핀을 앞질렀다.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1979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747달러였지만, 필리핀은 587달러에 불과했다. 서울 장충체육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옛 문화체육관광부 청사), 주한미국대사관 건물을 필리핀 건설업체가 감리했다는 얘기는 아득한 전설이 되어 버렸다.

가장 고약한 것은 마르코스 자신이 기득권세력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원래 주목받은 신진 엘리트 정치인이었던 그는 집권 기간 동안 출신 지역인 일로코스 노르테주를 사실상 자신의 영지화했다. 마르코스는 1986년 2월 피플파워혁명으로 축출되고 3년 후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봉봉 마르코스)는 1992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고 이어 일로코스 노르테 주지사, 상원의원 등을 거쳐 지난 6월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어떻게 보면 1986년 피플파워혁명 이후 필리핀의 ‘민주화’라는 것은 마르코스를 대표로 하는 ‘신(新)족벌정치세력’에 대한 아키노가문 등 ‘구(舊)족벌정치세력’의 반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지친 국민들은 영화배우 출신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 지방정치인 출신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 같은 ‘매버릭’들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도 했지만, 그들 역시 곧 부패하거나 기득권세력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필리핀 정치를 보면, 대한민국이 건국 직후 농지개혁을 단행한 이승만 대통령, 이를 바탕으로 산업화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것은 무척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 세력이 해체되었고, 산업화를 통해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고 중산층이 형성된 덕분에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달성’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 구(舊)지주-양반세력이나 산업화에 거부감을 가진 먹물들은 이른바 ‘민주화’를 내걸고 이승만-박정희의 성취를 부정했다. 50여년의 투쟁 끝에 그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사실상의 주류 세력이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입력 : 2022.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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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lt;박정희 바로보기gt;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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