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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金日成과 손정도 목사의 일화, 완전 날조돼"

김형석 고신대 석좌교수 주장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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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무장독립운동가였던 해석 손정도 선생의 유해가 서거 65주년만인 1996년 9월 11일 오후 김포공항을 통행 봉환됐다. 사진=조선일보DB

손정도(孫貞道·1872~1931)는 감리교 목사이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장(현, 국회의장에 해당)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그의 삶은 기독교와 독립운동의 두 영역에서 많은 자취를 남겼으며, 이로 인해 ‘신앙적 양심에서 민족 구원의 책임감으로 자신을 희생한 목사’(남한, 이덕주) ‘그리스도교 정신을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애국의 거성’ (북한, 최상순) ‘악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조선 신학을 수립한 인물’(중국, 원시희) 등 남한과 북한은 물론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도 존경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손정도를 미스터리한 인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것은 김일성과의 부정확한 일화가 휴먼스토리로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역사학자 김형석 고신대 석좌교수가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의 관계에 대한 재조명>이란 논문을 《월간조선》에 보내왔다.

이 논문은 11월 2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리는 ‘애국지사 손정도 학술세미나’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김 교수의 양해를 얻어 논문 일부를 요약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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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목사와 김일성의 관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92년 북한의 조선노동당출판사에서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면서부터다. 이전에도 손정도 목사의 가족과 지인들에 의해 단편적인 일화가 소개된 적은 있지만, 북한이 《세기와 더불어》를 출판하면서 ‘손정도 목사’라는 별도의 절을 만들고 다양한 일화를 소개한 사실이 알려지자 연구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북한의 대표적인 ‘손정도 연구자’인 최상순은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를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부활시켰다고 주장한다. 


“손정도 목사님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분의 응당한 지위와 역할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한 사업이 활발하게 벌어지게 된 데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의 맨 앞에 <손정도 목사>라는 독립된 절을 설정하고 소개한 것과 때를 같이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령님께서는 회고록에서 손정도 목사님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높이 일러주시고 세상에 널리 소개해주심으로써 역사의 망각 속에 점차 희미해지던 손정도 목사님을 다시금 민족사의 복판에 세워주셨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볼 때 손정도 목사님은 우리 수령님에 의해 부활하셨습니다.”

- 최상순, 《손정도 목사의 생애와 사상》,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세기와 더불어》 2권의 첫 장에 나오는 ‘손정도 목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만주의 정세가 매우 험악한 때에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감옥을 나와 내가 맨 처음 찾아간 곳은 우마항에 있는 손정도 목사의 집이었다. 일곱 달 동안 꾸준히 옥바리지를 해온 손정도 일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떠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자기 자식이 감옥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기뻐하면서 나를 맞아 주었다.”

- 2권, p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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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 자료전'에서 전시된 자료중 하나. 1921년 임정 직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들의 신년축하 기념사진. 김구(앞줄 왼쪽 3번째)선생과 김붕준(오른쪽에서 3번째) 선생의 모습이 앞줄에서 눈에 띈다. 둘째줄에 신익희, 신구식, 이시영, 이동휘, 손정도(왼쪽 3번째부터 차례로) 선생과 안창호(오른쪽에서 5번째) 선생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1930년 5월 7일 길림감옥에서 출옥한 김일성은 곧장 손정도 목사 집으로 찾아갔다. 그것은 손정도 목사가 옥고를 치룰 때, 자기를 옥바라지해주고 석방이 되도록 도와 준 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에 손정도 목사의 차남 손원태가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그를 만난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님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표현한 일도 있다.


“(손정도) - 군벌이 자네를 일본 놈들에게 넘겨줄까봐 우리는 가슴을 조였네. 형을 지지 않고 무사히 풀려 나왔으니 천만다행일세.”

  “(김일성) - 목사님께서 후원을 잘해 주신 덕에 저는 감옥생활을 한결 헐하게 했습니다. 저 때문에 옥리들에게 돈도 많이 찔러주셨다는데 그 신세를 무엇으로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의 은혜를 일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2권, 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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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와 맏아들 수향(水鄕) 손원일(孫元一) 해군 제독.

 

그런데 이 장면에서 우리는 아주 불편한 ‘역사적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정말 손정도 목사는 옥리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김일성을 구출했을까? 이 주장이 사실이면 우리가 한국교회사에서 만났던 손정도 목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평소 그는 ‘신행일치의 삶’을 살면서 개인의 ‘종교적 정화’가 사회의 ‘윤리적 성화’로 이어진다고 설교하던 목회자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손정도 목사가 김일성을 감옥에서 구해내기 위해  옥리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주장은 믿기가 어렵다.  

심지어 김일성은 손정도가 가정문제(맏딸 손진실과 윤치호의 이복동생 윤치창의 혼사)까지도 서슴없이 털어 놓고 조언을 구했다고 주장한다. (2권, pp.6~7)


김일성 투옥사건의 진실을 가장 확실하게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손정도 목사 일가의  증언이다. 그런데 손원태(손정도의 2남)의 ‘회고록’과 손인실(손정도의 3녀)의 ‘전기’에는 김일성과 관련한 일화들을 소개하면서도, 정작 김일성의 감옥생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게다가 세간에서 김일성을 옥바라지한 것으로 알려진 손인실은 생전에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경향신문》 1994.12.18일자 6면)

 

화면 캡처 2021-11-24 205731.jpg

 

그렇다면 왜 손정도 목사 가족들은 김일성의 감옥생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김일성이 투옥되었다고 주장하는 시기(1929.10~1930.5)에 길림에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병 치료 차 봉천의 동복대학병원에 입원한 손성실을 간병하려고 1929년 1월에 봉천으로 이사했다가, 1930년에 다시 북경으로 이주하였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주목되는 것이 손원일의 회고담이다. 그는 1991년 《한국일보》에 전재한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길림에서 투옥되지 않고 도주한 것으로 증언하였다.


“김성주(김일성)는 1929년 5월까지 길림에 있다가 전부터 연고가 있는 극렬 좌익의 군소 독립군 부대이던 이종락 부대 휘하로 도망쳐갔다.”


따라서 김일성의 옥중생활에 관한 얘기는 주변 정황상 맞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이고, 출처도 불분명하다. 그냥 김일성의 일방적인 주장일 따름이다. 


그러면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의 실제 관계는 어떠했을까? 손정도와 김일성의 처음 만남에 관한 기록은 1991년에 평양을 방문한 손원태가 김일성을 만나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나는 길림에 가서 우리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고 연계가 깊었던 손정도 목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손정도 목사의 집은 길림시 우마항에 있었습니다. 내가 찾아가니 손 목사는 몹시 반가워하였습니다.…나는 김강의 소개로 시험도 치지 않고 길림 육문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한 학년을 뛰어넘어 2학년에 편입하였습니다.”

-김일성, 《재미교포 손원태와 한 담화》, p.8


이 대화의 내용처럼 손정도 목사가 김일성을 도와 준 배경에는 ‘숭실중학교 동문’인 그의 아버지 김형직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열두 살의 나이차가 나는 손정도 목사와 김형직은 숭실중학교를 함께 다닌 적은 없다. 그러나 김형직이 국민회에서 활동하던 1917~18년 어간에는 손정도가 서울 정동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에 내려와 중국 망명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두 사람이 교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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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 김형석 석좌교수

 

필자(김형석 교수)가 지난 한달 여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서 김일성 일가에 관한 자료들을 살펴본 결과 나름으로 얻은 결론은 손정도 목사와 김형직과의 관계는 동향 출신의 후배이자 숭실중학교 동문으로서의 친분관계 이상으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발견할 수 없었다.

 

김일성과의 관계 또한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 길림에 유학하는 동안 경제적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손정도 목사 입장에서는 목회자로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도와 준 것이지, 그를 전도유망한 혁명가로 인정해서 특별대우를 해준 것은 아니다.

 

특히 감옥에 갇힌 김일성을 옥바라지하고 뇌물을 써서 구출해주었다는 일화는 완전히 날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올곧은 성품으로 조국 독립을 위한 희생적 삶을 산 손정도 목사가 사회주의자라는 오해를 벗고, 민족운동가로서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입력 :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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