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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삼성가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이건희는 값을 따지지 않는 名品주의자

이건희 유족이 기증한 국보 등 미술품 2만3000여점은 어떻게 수집됐나

[편집자 주] 고 삼성 이건희 회장의 유족이 2만3000여점의 미술품을 기증하겠다고 28일 밝혔다. 이 회장이 소유한 미술품 중에는 국보는 물론 국내외 유명 작가의 초고가 작품들이 대량 포함돼 있다. 감정가만 3조원에 달해 유족의 매각 여부가 관심을 끌었지만, 유족들은 기증을 선택했다.

구체적으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1393호), 고려 불화 '천수관음 보살도'(보물 2015호) 등 지정문화재 60건(국보 14건, 보물 46건)을 비롯해 국내에 유일한 문화재 또는 최고(最古) 유물과 고서, 고지도 등 개인 소장 고미술품 2만1600여 점은 국립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이중섭의 '황소', 장욱진의 '소녀, 나룻배' 등 한국 근대미술 대표작가들의 작품 및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작가들의 미술품과 드로잉 등 근대미술품 1600여 점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할 예정이다.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호안 미로의 '구성',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및 샤갈, 피카소, 르누아르, 고갱, 피사로 등의 작품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다.

이처럼 방대한 컬렉션을 만든 이건희 회장은 미술품의 값을 따지지 않는 '명품주의' 수집가였다. <월간조선> 2016년 3월호에 실린 '삼성가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를 다시 소개한다.


 

 

삼성家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이병철의 독창주의, 이건희의 名品주의

글 : 이종선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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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이병철은 비싸다고 판단되는 작품은 누가 뭐래도 구입하지 않았다. 이에 비하면 이건희는 값을 따지지 않는 편이었다. 별로 많이 묻지도 않았다. 좋다고 하는 전문가의 확인만 있으면 별말 없이 결론을 내리고 구입했다

⊙ 이병철 회장, 〈가야금관〉 〈청자진사주전자〉 음미하며 하루 日課 시작
⊙ 이건희 회장, 국보 100점 프로젝트 추진… 삼성의 一流 지향 경영철학과 일맥상통
⊙ 美大 출신으로 전문성 갖춘 홍라희 여사, 리움미술관의 현대미술 컬렉션 주도
⊙ 이재용 부회장, 古地圖 관심 가져
李鍾宣
⊙ 68세.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졸업,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수학.
⊙ 호암미술관 부관장, 동국대 교수, 서울역사박물관 초대관장, 경기도박물관장,
    한국박물관협회 부회장, 한국박물관학회장, 삼성미술관-리움 자문위원 역임.
    현재 고고학자·미술사학자·수집학자·박물관학자로 활동.

[편집자 주]
이 글은 《월간조선》 편집진의 청탁으로 최근 본인이 발간한 《리 컬렉션(2016년 1월, 김영사)》에 담은 내용을 중심으로 약간의 첨삭을 했음을 밝혀 둔다.
 
이병철 회장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가야금관〉의 소재를 파악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애착이 대단했다. 사진=삼성미술관-리움 소장(문화재청 사용허가)
  수집(컬렉션·Collection)은 노름이나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다. 수집은 개인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우연한 계기를 통해 구체화하고 체계화-정식화의 길을 걷는다. 개인들은 여가를 쏟거나 연구를 통해 차츰 ‘수집마니아’의 길로 들어선다. 일부는 사고팔고 하면서 재미를 보기도 하지만, 수집은 수집행위 자체에서 희열과 만족을 얻는다. 수집은 어떤 한 개인을 들여다보는 데 좋은 수단이다.
 
  삼성가(家)의 행보는 오래 전부터 관심의 초점이었다. 굳이 박물관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이미 수집의 중심에 항상 있어 왔기 때문이다. 수집행위가 대(代)를 이어 1대로부터 2대, 혹은 3대까지 이어지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동양화·서예 작품으로 가득 찬 이병철 회장의 자택
 
  이병철(李秉喆) 회장에서 시작된 삼성가의 수집은 이건희(李健熙) 회장을 통해 이미 2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은 박물관을 세웠다. 시민들이 그들의 행보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의 수집이 3대로 이어질지에 있다. 보도에 의하면, 삼성의 3대 이재용(李在鎔) 부회장은 옛 지도 수집에 관심이 있다 하니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수집은 어렵고도 고생스러운 길로 접어드는 경우가 의외로 많고, 그에 대한 보상은 적거나 거의 없다. 많은 수집가가 당대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수집은 돈이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정성을 쏟아도 되지 않는다.
 
  생전(生前)의 이병철 회장은, 대구 거주 시절 주변 인사들의 권유에 의해 수집을 시작했다는 회고담을 내게 직접 들려준 적이 있다. 단순히 주변의 권유에 따라서인지 본인의 결심이 우선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집안의 유교적인 가풍과 선비 같은 그의 자세가 취미로 이어졌을 가능성은 높은 것 같다. 그는 일찍부터 붓글씨를 즐겼고, 집안을 동양화와 서예로 채워 왔다. 삼고초려(三顧草廬)처럼 인재 발탁 내용이거나 당시(唐詩) 등 문학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병철의 명품컬렉션 중, 그 첫째와 둘째를 다투는 작품이 있다면 아마도 〈가야금관〉과 〈청자진사주전자〉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야금관〉(사진1)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소재를 파악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이 회장의 애착이 대단했다. 금관의 부속 장식들을 금관의 몸체에 직접 부착하며 들여다보았을 정도로 그의 〈가야금관〉 사랑은 다른 수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경비를 강화하는 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던 이 회장은 금관과 똑같은 모조품을 만들어 진품(眞品) 대신 전시하도록 지시했다. 꽤 오랜 시간 박물관에는 모조품이 진품의 자리를 차지한 채 전시되는 기이한 일이 지속되었고, 당시 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대부분 진품이 아닌 모조품을 보고 돌아가야 했다. 박물관을 지키는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대중에게 유물의 진면모를 보여주어야 할 박물관이 도난을 걱정해 모조품을 전시해야 하는 아이러니라니…. 양심을 찌르던 그 갈등을 견디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박물관으로 들어온 이상, 그것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모두가 아껴야 하는 유물이 아닌가.
 
  이병철 회장의 금관에 대한 애착은 금관이 겪은 모진 수모에 대한 연민과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도둑들의 영향으로 더욱 커져 갔지만, 무엇보다 그에게 금관을 소개했던 이의 과장된 수식의 영향이 컸다. 이 회장에게 〈가야금관〉을 소개한 누군가가 금관의 연대를 실제보다 오래되었다고 전했고 결국 더욱 금관을 곁에 두고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했다. 금관의 실제 연대는 AD 5~6세기 삼국시대 후반이지만 소개한 이는 수백 년을 앞선 최초의 금관이라며 가치를 추켜세웠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의 취향
 
지금의 호암컬렉션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국보 133호의 〈청자진사주전자〉. 사진=삼성미술관-리움 소장(문화재청 사용허가)
  그 무렵 이 회장의 집에선 골동품만큼이나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그에게 골동품을 소개하려는 인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찾아온 것이다. 이 회장은 하루 일과처럼 골동계 인사들을 만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장 아무개는 이 회장의 신임을 얻었다. 지금의 호암컬렉션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청자진사주전자〉(靑磁辰砂蓮華文瓢形注子·후일 국보 133호로 지정·사진2)도 그 무렵 그가 소개한 작품이었다. 워낙 귀한 물건이기도 했지만, 자태를 보면 압도당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특유의 분위기가 일품이다. 그렇다 보니 이 회장의 〈진사주전자〉 사랑 또한 끔찍했다. 1982년에 호암미술관 개관을 위해 2층에 전시실을 마련하면서 30mm 방탄유리로 쇼 케이스를 제작했다. 〈진사주전자〉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탄유리는 두껍고 물색이 짙어서, 원래 유물의 색이 제대로 나지 않는 단점이 있다.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경비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이는 그저 전시에만 급급한 기존의 박물관들의 사정을 생각해 보면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는지, 평상시에는 모조 작품으로 대체해 전시하라고 지시했다.
 
이병철 회장의 수집은 특정분야에 쏠리거나 집중되지 않았다. 〈군선도병풍〉(사진)이나 고려 불화(佛畵)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노년에 접어들면서 수집한 유물들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고민도 많이 했다. 사진=삼성미술관-리움 소장(문화재청 사용허가)
  이 회장의 취미생활이었던 수집에는 그의 취향이 잘 드러나 있다. 〈가야금관〉 같은 역사유물과 〈청자진사주전자〉, 〈군선도병풍〉(사진3) 등 명품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특정 분야에 쏠리거나 집중되는 경향은 없었고, 고려 불화(佛畵)의 역수입에서 보듯이 애국적인 역할의 수집경쟁에 뛰어들었다. 수집을 서두르거나 값에 휘둘리지는 않았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수집한 유물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수집품 전체를 기증한 것은 그런 고민에 대한 해답이다.
 
이병철 회장의 수집품들로 가득찬 호암미술관.
  골동품이나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 그의 수집품들로 호암미술관(사진4)이 가득 채워졌다. 일본에서 되돌려 받은 것도 있고 한때 북한의 골동품을 사들인 적도 있었다. 미술품에 대해 소유욕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한옥’에 대한 욕심만은 남달랐다. 용인에 목조 한옥을 짓고 노년을 보냈다. 옷이나 생활용품은 고급으로 명품(名品) 일색이었다. 겉으로는 물 흐르듯 고요하지만, 속으로는 엄청나게 깐깐한 사람이었다. 깔끔하고 단아하게 평생을 보내며 자신의 고집을 꺾는 일이 거의 없었다. 특이한 점은 믿음을 뒤집는 배신행위와 본인에게 맞서는 대항을 아주 싫어했다.
 
  도자기는 〈청자운학문매병〉(보물 제558호)과 국보 133호 〈진사주전자〉를 제일 좋아했는데, 그는 흠이 없고 깔끔하며 때깔이 뛰어난 작품을 주로 찾았고 좋아했다. 싸도 결함이 있는 작품은 사지 않았다. 그림은 이당 김은호와 월전 장우성 그리고 서양화가로는 문학진을 가까이했다. 이당의 작품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가는 내용을 그린 〈삼고초려도(三顧草廬圖)〉를 제일 훌륭한 작품으로 꼽았고, 인물화에 장기를 보인 장우성에게는 본인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골동품에서 마음의 기쁨과 정신의 조화 찾아”
 
  언젠가 차를 타고 가면서 앞 좌석에 앉은 내게 미술품을 수집하게 된 동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대강을 요약하면 이렇다.
 
  “젊은 나이에 대구에서 뛰어난 상재를 발휘해 삼성상회(지금의 삼성물산)를 설립해 거부(巨富)로의 첫발을 딛게 되었다. 초기에는 사업 사이사이에 자연스럽게 대구 사람들과 미술품을 주고받으며 수집을 이어 나갔다. 향리의 서예인이나 대구 출신 화가 서동진의 작품을 한두 점씩 모아 나가며, 차츰 그 분야와 수집 양을 다른 쪽으로 넓혀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살아 있는 서예인의 작품에 머물러 있었지만, 재미가 붙어 옛날 고서화 쪽으로, 또 도자기 골동품 쪽으로, 다시 현대미술품으로까지 관심이 바뀌면서, 그 대상이 크게 확대되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재미도 있고 집중력이 발동해 규모와 수준을 대폭 늘려 나가게 되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재테크가 일반화해 있지 않아 그가 골동품을 수집한다는 소문은 시중에 금방 퍼져 나갔다. 그의 집에는 골동품을 소개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입수경위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은 〈청자진사주전자〉가 호암컬렉션의 백미(白眉)를 이루게 된다. 〈청자주전자〉의 입수는 세간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는데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백지수표 건이고, 다른 하나는 희귀한 진사(辰砂) 안료가 듬뿍 발린 청자주전자라는 점에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진사주전자〉 사랑은 유별나서 1982년 개관한 호암미술관 2층 전시실에는 30mm 방탄유리로 쇼케이스를 만들어 사고에 대비했고, 평상시에는 도예가 석봉 조무호가 복제한 모조청자로 전시를 대체하도록 했다. 그가 1976년 《니혼게이자이신문》에 기고한 글에 이 주전자와 관련된 부분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나의 수집품에는 명품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평가는 자유지만, 나는 수집 자체보다는 그런 골동품으로부터 마음의 기쁨과 정신의 조화를 찾는다. 그런 이유로 폭넓은 수집보다는 기호에 맞는 물건만을 선택한 것이 나의 소장품이다. 나의 소장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유물은 〈청자진사연화문주전자〉나 청자상감의 〈운학모란국화문매병〉 등이다. 자랑하기는 그렇지만, 고려청자 중에서도 최고의 명품이라고 나 스스로 인정할 정도이다.”
 
  골동가에서 가끔 이병철 회장의 친형 이병각의 이름이 거명되곤 한다. 그는 특별한 이유 없이 골동품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병철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업계에서는 그를 통해 이 회장에게 유물을 대려는 움직임이 많았다.
 
  한 예가 〈가야금관〉이었다. ‘금관’이라는 말 한마디만 갖고도 골동업계는 흥분하게 마련이다. 〈가야금관〉은 빅 뉴스였다. 신라금관은 여럿 알려져 있었지만 〈가야금관〉의 출현은 최초였다. 우여곡절 끝에 최초의 〈가야금관〉은 호암컬렉션이 인수했고, 1971년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던 ‘호암수집문화재특별전’에 출품돼 시민들에게 그 아름다운 자태를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이병철 회장의 사돈 홍진기(洪璡基) 중앙일보 회장도 수집에 관심을 보였다. 호암미술관 초대 관장을 역임한 홍진기 회장은 언론 관계의 일로 유럽 출장이 잦았고 그때마다 여러 박물관을 찾았다. 유럽의 공예미술 ‘아르누보’ 유리작품에 빠져 체계적으로 수집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르누보는 이름 그대로 당대의 새로운 미술활동의 소산이었다. 중앙일보 빌딩 지하 1층 호암아트홀 맞은편에 자리한 호암갤러리(현 국제교류재단 전시장)에서 ‘아르누보유리공예전’ 전시를 갖고, 유럽 유리공예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했다. 홍석현(洪錫炫) 중앙일보 회장과 홍라영 리움미술관 총괄부관장이 뒤를 이어 이들을 관리하고 있을지 모르나, 추측에 머무를 뿐이다.
 
 
 
이인희, 종이 관련 유물과 현대미술 작품 선호

 
종이박물관과 현대미술관을 겸해 2013년 문을 연 한솔뮤지엄은 국보 제277호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을 비롯해 종이 관련 유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의 자녀들은 대부분 수집과 인연을 맺었다. 장녀 이인희 고문은 전주제지의 대주주가 되면서 종이박물관을 세울 계획을 가졌었다. 한때 전주에서 ‘한솔종이박물관’을 개관, 운영하기도 했다. 과거 신라호텔의 경영에 관여하면서 미술품에 관심을 갖고, 수화 김환기의 작품 등을 비롯한 현대미술품의 수집에 관심을 보였다. 강원도 문막에 오크밸리리조트를 조성하면서, 종이박물관과 현대미술관을 겸한 ‘한솔뮤지엄’을 2013년에 개관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사진5).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1941년 오사카 출생)가 설계한 미술관 한솔뮤지엄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월송리 한솔오크밸리에 자리 잡고 있다. 뮤지엄(면적 1만4000m²)에는 한솔그룹 이인희가 수집, 소장해 온 종이 관련 유물(박물관)과 현대미술 작품(미술관)들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강원도 특유의 때묻지 않은 주변 자연에 조각작품들을 조화롭게 배치해, 오크밸리의 다른 유락시설과 함께 문화명소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미술평론가 오광수씨가 관장을 맡아 운영을 하기도 했다.
 
  한때 전주에서 종이박물관을 운영해 왔던 한솔그룹은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작품(국보 제277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보물 제1153호 묘법연화경 권 제1-3)을 포함한 종이 관련 유물들과 고미술품들을 선보이고 있다(사진6). 전주에서 한솔종이박물관을 개관, 운영하다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 외국 회사에 매각한 후 최근에 다시 재매입해 서울에 있는 한솔문화재단으로 옮겨 관리하고 있다.
 
  한솔뮤지엄은 이인희 필생의 역작으로 건립됐는데 며느리 안영주(조동길 회장 부인)가 거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솔그룹이 운영해 온 강원도 문막의 오크밸리 컨트리클럽에는 이인희 고문이 직접 코스를 따라 조각품을 배치하고, 클럽하우스에 유명화가들의 작품을 내거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설치작가 제임스 터렐의 하늘을 볼 수 있는 〈빛의 방〉 같은 특이한 현대작품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고, 야외에는 거장 헨리 무어의 조각과 국내작가 문신, 최만린 등의 작품을 비롯해 회화, 도자기, 판화, 민화 등이 다양하게 구비돼 있다. 국내의 여러 화랑이나 옥션 등에서 구입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며, 개중에는 외국작가의 작품들도 섞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선 경매에 방혜자의 작품을 내놓는 것으로 보아 다양한 수집 경향을 알 수 있다.
 
 
  서양화 大家 작품 선호하는 이명희
 
신세계미술관과는 별개로 용인의 연수원에 우리나라 유통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을 운영해 오다가, 최근 면모를 일신해 새로 선보인 상업사박물관.
  이병철 회장의 막내딸 이명희(신세계 회장)도 일찍부터 미술품에 관심을 보여 왔다. 오래 전 신세계백화점 내에 신세계미술관을 운영하며, 국내 유수의 미술품 수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작품의 수집 경향은 특별히 어느 경향에 집중하거나 휩쓸리지 않고, 김환기나 유영국 등 서양화 대가(大家)들의 작품을 주로 수집했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언론에 소개됐듯이, 현대 세계미술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팝아트 조각가 제프 쿤스의 작품을 구입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프 쿤스의 작품을 위시해 많은 야외용 조각들로 도심 내에 아름다운 전시공간을 꾸미고 있다.
 
  과거 신세계미술관은 단순히 백화점의 부속 미술관에 그치지 않았다. 척박했던 당시 주요 미술작품의 발표장이자 수집의 출발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70~80년대에 신세계미술관은 많은 작가들이 발표회를 갖는 중요 전시공간으로서, 지금은 없어진 명동화랑과 함께 시내 중심부에서 미술계의 핵심 자원 역할을 했다. 한때 고려대박물관의 이규호 선생이 고문을 맡아 미술관의 틀을 마련했는데 미술계에서 큰 역할을 해 오며 미술관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굳혀 왔다. 신세계미술관과는 별개로 용인의 연수원에 우리나라 유통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을 운영해 오다가, 최근에 그 면모를 일신해 새로운 모습의 상업사박물관으로 재개관하고 있다(사진7).
 
 
 
國寶 100점 수집 프로젝트

 
이건희 회장이 삼성의 2대 회장이 아니었더라면 리움미술관의 탄생은 요원했을지도 모른다. 이건희 회장의 수집은 부친이 억지로 시켜 된 일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이건희 회장은 어려서 일본에서 산 적이 있다. 소일거리로 영화관을 출입하면서 영화 테이프를 수집하며 영화광으로서의 수집력을 키워 나갔고, 그런 바탕 위에 수집가의 면모를 갖췄다. 그는 부친의 수집 과정을 보면서 스스로 독자적인 수집력을 쌓아 가며 호암과는 다른 차원의 ‘리움 컬렉션’을 만들어 갔다. 만약 삼성의 2대 회장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리움미술관(사진8)의 탄생은 요원했을지도 모른다. 이건희 회장의 수집은 부친이 억지로 시켜 된 일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현재 삼성가는 국보급 문화재 160여 점(문화재청 통계)을 소장하고 있다.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 있지 않은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의 시작은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업을 일구는 능력 못지않게, 이건희의 수집철학은 ‘명품(名品)’을 목표로 하되 일류가 되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수집철학이 삼성의 경영이념에 보이는 넘버원 즉 제일주의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강조하는 중요 포인트이며, 이미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건희가 택한 건 국보 100점을 삼성이란 이름하에 두는 것이었다. 이건희가 심혈을 기울여 수집 달성한 ‘국보 100점 프로젝트’의 내용은 대단한 수집품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 1980~90년대에 들어 집중적으로 수집한 결과인데 이는 탁월한 문화적 기여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그 일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필자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지론에 따르면, 시장에서 2등은 없고 오로지 1등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며, 명품만이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런 면이 도자기 수집에 있어서도 빛을 발했다. 조선 초기 청화백자에 대해 그는 전문가 뺨치는 지식과 감정실력을 가졌다. 모조품을 여럿 만들어 청화 안료의 푸른색을 비교하며 받은 인상을 정리했을 정도인데, 그런 면은 부친을 닮은 것 같다.
 
  이건희 회장은 미술품 수집에 있어서도 그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호암은 비싸다고 판단되는 작품은 누가 뭐래도 구입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호암이 거부하면 주변에서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1960~70년대에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좋은 물건을 살 수 있었다. 호암컬렉션(국보 12점, 보물 9점)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명품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국전 순례 등에서 보듯, 본인이 판단해서 ‘값이 싸면서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들을 거둬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이에 비하면 이건희는 값을 따지지 않는 편이었다. 별로 많이 묻지도 않았다. 좋다고 하는 전문가의 확인만 있으면 별말 없이 결론을 내리고 구입했다. 그래서 현재의 삼성컬렉션(국보 37점, 보물 115점 삼성문화재단 구입품 포함)에는 과거에 비해 명품이 상당히 늘었다. 어느 개인도 이보다 많지 않다. 이건희 회장의 명품주의가 미술에 있어서도 적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명품주의는 “특급이 있으면 컬렉션 전체의 위상이 덩달아 올라간다”는 지론에 따른 결과이다. 필자는 일찍부터 그런 점을 간파하고 명품을 보면 무조건 구입하도록 권했다. 부인 홍라희 여사는 나만 보면 “이종선씨는 너무 많이 사는 게 흠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이건희의 ‘명품주의론’을 따라가기가 여간 벅차지 않았음을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다 바꿔’에 대한 그의 집념은 문화재 수집에 있어서도 기존의 한계를 바꾸고자 했다. 그 하나가 ‘국보 100점 수집하기’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사실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1980년대 후반까지 여러 수장가의 알짜 수집품들이 거간을 통해, 혹은 직접 삼성으로 들어왔다. 다양한 수집품은 고대(古代), 현대(現代)를 가리지 않고 그 폭과 깊이를 더해 갔다. 그 결과 현재 삼성가에는 무려 160여 점에 달하는 국보급 유물들이 수집돼 있다.
 
 
  이병철은 청자 마니아, 이건희는 백자 전문가
 
이건희 회장의 개인적 수집은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호암미술관과는 별개로 진행됐다. 개인수집가들로부터 이미 상당히 좋은 작품들을 인수해 소장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인왕제색도〉와 〈고구려반가상〉이다. 사진=삼성미술관-리움 소장(문화재청 사용허가)
  이건희는 백자통이다. 이병철이 ‘청자 마니아’라면, 이건희는 ‘백자 마니아’라는 얘기다. 당시 백자에 깊이 젖어 있던 그를 두고 일본말로 ‘구로도’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수집에 대한 그의 경지가 이미 보통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백자를 좀 더 깊이 알기 위해 홍기대 같은 이에게 백자수업을 많이 들었다. 도자기를 알려면 도자기의 생산 전반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태토나 유약을 감별하는 일은 감정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이건희는 한번 빠지면 끝을 보는 성미라서 그런지는 나중에는 백자 감정까지 해도 좋을 정도가 됐다.
 
  골동상 K씨도 선생 자격으로 출입이 잦았다. 이 무렵 나는 이건희 회장을 뵈었는데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건희 회장과의 첫 만남은 단순히 젊은 일꾼이 상사에게 선보이는 자리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이종복이 이건희 회장에게 고고학과 출신인 나를 데리고 인사시키러 갔다는 사실은, 당시 삼성의 후계자 결정 구도가 이미 이건희(당시 이사)에게로 무게추가 상당 부분 옮아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서 본다면 이건희의 목표는 명백하다. 이건희가 시작한 국보 수집이 이병철과 의논되었던 일은 아니었다. 이건희의 개인적 수집은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호암미술관과는 별개로 진행됐다. 개인수집가들로부터 이미 상당히 좋은 작품들을 인수해 소장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인왕제색도〉(사진9), 〈금강전도〉 등의 고서화를 비롯해 특급의 도자기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본격적인 국보급 유물의 수집은 〈고구려반가상〉(사진10)으로 잘 알려졌던 김동현의 수집품 인수로부터 시작된다.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는 미술대학 출신의 미술관장으로 전문성을 갖춘 수집가로 손꼽힌다. 홍진기의 장녀로 삼성가의 며느리가 된 그녀는 일찍부터 수집가의 훈련을 받았는데, 시아버지 이병철에게서 일정 금액의 돈을 받아 인사동 골동가에서 값싼 미술품을 사면서 눈에 익혔다고 전한다. 현재 삼성미술관-리움의 관장으로 재직하면서 전시회 개최나 미술계 인사의 접견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선에 나서기 전에도 천재 비디오작가 백남준을 직접 만나 작품 수집에 포함시키는 일을 포함해, 리움미술관의 현대미술 컬렉션을 주도해 왔다. 이병철이 부인 박두을에게 엄격한 내조를 요구했던 데에 비해, 이건희는 홍라희가 미술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8년 6월 삼성 특검(特檢) 당시 관장직에서 물러났던 홍라희 여사가 3년 만에 리움의 관장으로 조용히 복귀했다. 언론에서는 ‘여왕의 귀환’이라는 타이틀로 다뤘다. 경제계에서 삼성의 역할이 큰 만큼, 문화 쪽에서도 그의 활발한 활동을 암시하는 예후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이 있게 한 수집가와 기증자들
 
간송 전형필은 자신이 모은 문화재를 보관 관리하기 위해 서울 성북동 북단장 안에 보화각을 짓고 최초로 박물관을 개관해 오늘의 간송미술관이 있도록 했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배가 극성을 부릴 무렵, 수집의 대열에 일본 유학 중이던 전도유망한 청년 간송 전형필이 뛰어들었다. 식민지 시대라 누구나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는데, 간송은 상속받은 많은 재산을 보람 있게 활용하기 위해 고심 끝에 우리 문화재의 지킴이로 나서기로 작정했다. 서예가 위창 오세창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지도에 크게 영향을 받았지만, 스스로가 문인화에 탐닉할 정도의 문인이었다. 돈푼깨나 있는 인텔리들이 세상을 한탄하거나 멀리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나 있거나 할 때, 그는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한 첫발로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인이나 일본 본토로부터 많은 유물들을 되찾아오려고 애를 썼다. 경매에 올려지기 전 중요한 문화재들을 거금을 들여 사들이거나, 일본상인들과 경합이 붙으면 되찾는 데 열성을 다했다. 후일 모아진 문화재를 보관 관리하기 위해, 성북동 북단장 안에 보화각을 짓고 최초로 박물관(사진11)을 개관해 오늘의 간송미술관이 있도록 했다. 간송미술관은 최근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에서 명품 중심의 특별전을 통해 시민들에게 소장품을 소개하고 있다.
 
  간송과는 다르지만,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실에 가면 여러 기증자들의 사연을 알 수 있다. 의사 박병래는 아름다운 수집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주머니 사정에 맞추어 문방구 중심으로 수집했던 그는, 타계 직전 수집품 전부를 국립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무소유의 아름다움을 실천했다.
 
  영어(英語) 참고서로 부를 모은 송성문도 비슷한 경우이다. 그는 국보급 불경이나 사경 중심의 수집품 전부를 박물관에 기증하면서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남양분유의 홍두영 회장은 수집품이 장물로 걸려 곤욕을 치렀는데, 조선 초 〈청화백자철화수조문호〉를 압수당하고 국보 〈청자죽절문병〉을 이건희 회장에게 양도하고는 수집과 인연을 끊었다. 수집가에게 간혹 있을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시련이 아닐 수 없다. 악질 거간들의 말만 믿고 있다가 선의(善意)의 피해를 입은 수집가들이 적지 않다. 골동계의 상거래는 믿기 어려운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상도의(商道義)가 정립되어 있지 않고 한탕주의가 만연한 때문이랄까, 철저하게 신용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일본의 골동업계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주요 재벌가의 수집 類型
 
  기업인들을 살펴보면, 현대그룹의 설립자 정주영(鄭周永) 회장은 수집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부분의 자동차 메이저들은 자동차박물관을 갖고 자(子)회사의 생산품을 포함한 자동차컬렉션을 갖고 있는 것에 크게 대비된다. 이병철 회장과의 경쟁이 격화하는 관계에 있을 때, 모 컬렉션을 인수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 사실 여부는 확인된 적이 없다. LG의 구자경 회장은 장학사업과 난초 가꾸기에 몰입해, 1촉에 수억 원을 호가하는 난초 수집품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SK는 워커힐호텔 구내에 미술관을 열고 운영하다가 중단했다. 이후 시내 본사 빌딩에 IT제품 중심의 미디어미술관 아트센터 나비를 열었는데, 며느리로 들어간 노소영(노태우 대통령의 딸)이 관장으로 있다. 호림박물관은 신관까지 새로 갖추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1세대 윤장섭 회장에 이어 며느리 오윤선이 관장으로 움직이고 있다. 검사 출신 유창종은 기와에 심취해 개인적으로 와당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일부를 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코리아나화장품의 유상옥 회장은 화장용품과 장신구 등을 수집해 박물관과 함께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아모레화장품도 신갈에 박물관을 열고 있으나 최근에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다. 그 외에도 많은 수집가들이 있지만 대개는 개인 차원에 머물고 있고, 간혹 박물관을 열고 있기는 하지만 운영이 원활하지 못한 실정이다.
 
 
  권할 일은 못 돼
 
  수집은 대부분 취미로 시작하지만, 수집에 빠지다 보면 대개는 어느 때부터 자신의 경제력을 넘어서는 시점을 맞는다. 수집의 많은 분야가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골동분야는 더욱 그렇다. 골동이라면 원래 도자기, 금속, 고화, 서예 등의 분야에 한정되는 개념이지만, 최근에는 오래된 희귀품 분야까지를 포괄적으로 칭하는 용어가 됐다. 골동을 수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매력에 빠지게 되고, 시간이 흘러, 빠지면 빠질수록 헤어 나오기는 어려워진다. 이는 수집에 대한 순수의지와 욕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도박이나 환각제처럼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기 어렵다.
 
  과거 많은 수집가가 패가망신해 애지중지하던 수집품들을 되파는 경우를 보아 왔다. 거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골동품 수집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뭔가 특별한 마력이 숨어 있다. 때문에 한번 그 맛에 빠진 사람은 주변에서 뭐라 해도 듣지 않고 파국을 맞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서서 권할 일은 못 된다.⊙

입력 : 202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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