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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과의 인터뷰

2006년 1월 5일 만나... 첫 집중 인터뷰. 예정시간 넘겨 삶과 신앙 이야기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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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인 2008년 3월 23일 명동대성당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정오미사를 집도하고 있다.

기자는, 추기경 서임을 받기 직전인 2006년 1월 5일 정진석 대주교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만났다. 언론과의 첫 집중 인터뷰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못난 사람이라야 신부가 된다”는 추기경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말은 그를 신학교로 보내준 신부님이 귀청에 거듭 새겨준 말이라고 했다.


“유대인에게 걸려 넘어짐이 되고, 외교인(外敎人)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되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선전하려고 나선 저는 미련한 자임이 분명합니다. 무릇 유한한 가치를 몽땅 버리고 구원의 품에 안겨 파릇파릇한 새싹을 싸늘한 수의로 휘감은 뜨거운 송장의 길을 스스로 택한 저는 어리석은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대전에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세속에 어리석은 자로서 불리었음을 하느님께 무한히 감사드립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 서울대 공대(화학공학과)에 입학, 발명가의 꿈을 키웠다. 6·25라는 ‘거대한’ 죽음의 체험이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끌었다.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 죽음의 행군을 하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군 병참기지에서 일하면서 그는 “영적 갈등을 너무 많이 느꼈다”고 했다.


“어린 시절 발명가가 되고 싶었어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 뭘까 고민했어요. 어린이도서관에 틀어박혀 에디슨 전기(傳記) 같은 책들을 많이 읽고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기계 같은 것을 만들면 좋겠구나’라고 생각했지요. 나만을 위해 산다면 인생의 의미가 별로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과학자가 되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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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전쟁이 났습니다. 전시(戰時) 대학을 다니셨나요.

  

“서울에서 석 달 동안 숨어 살았습니다. 서울이 수복됐는데 부역자로 의심을 받진 않았어요. 얼굴이 창백하고 장발이어서 숨어다녔다는 표시가 뚜렷했기 때문이지요. 그때는 어려웠어요. 좌우 양쪽에서 의심을 하니까. 당시 6~9월 사이 서울에 있던 청년들이 인민 의용군으로 많이 끌려갔어요. 나중에 들으니 대부분 낙동강 전선에서 죽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용케 살아남았던 거지요.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중공군이 몰려와 이젠 피란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까지 피란을 가셨습니까.

  

“1950년 12월 말쯤인가요, 청년들을 강제 피란시키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그냥 피란을 보내지 않고, 동네마다 국민방위군 조직을 결성했어요. 서울 창경원에 모여 대오를 지어 괴나리봇짐 같은 것을 하나씩 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처음 경기 남양주 덕소 쪽으로 갔는데 한밤중에 폭설이 내렸어요. 얼마나 눈이 많이 왔는지, 눈 위에 쓰러져 잠을 청했습니다. 한참 자는데 누가 발로 걷어차요. ‘눈 위에서 자면 얼어 죽는다’고. 그래서 다시 걸어 남한강을 건넜습니다.”

  

─강이 꽁꽁 얼었겠네요.

  

“그랬죠.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이 얼음 위를 건넜으니 얼음이 견디질 못했어요. 제가 건너간 뒤 얼음이 그만 꺼져 버렸어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제 뒤에서 아우성치며 빠져 죽는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하게 됐습니다. 겨우 몇 분 차이로 그렇게 된 겁니다. 그게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첫 체험이었습니다.”

 

정 추기경은 덕소, 여주를 거쳐 문경세재를 넘었다. 안동, 의성의 산길을 걸어갈 때 앞서 가는 사람이 지뢰를 밟아 죽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큰길로 못 가고 숨어서 뒷길로 힘겹게 끌려가는 식이었으니 경로를 기억하진 못해요. 다만 문경새재를 넘은 것은 기억납니다. 발바닥이 얼마나 부르텄던지 엉망진창이었어요.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잠을 잘 데가 없어 산 속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고, 다음날 다시 산을 내려와야 했으니 정시 출발이란 꿈도 못 꿨어요. 매번 그렇게 가는 거예요. 

  

하루 10시간 이상씩 걸었는데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것도 감지덕지했지요. 경북 안동인지, 의성인지를 산길을 타고 가는데 제 앞에 가는 사람이 지뢰를 밟았어요. 제가 목격했습니다. 지뢰가 터지니까, 몰려가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지요. 이제는 제 앞에 가던 사람들이 죽은 겁니다. 그래서 또 한 번 죽음을 체험하게 됐습니다.”


국민방위군은 경남 마산까지 내려갔다. 기간사병이 되었는데 다행히 낙동강 전선으로 가지는 않았다. 기간사병이 되기 전까지 주먹밥으로 연명했다. 매일 교실에 짚을 깔고 누워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면 한두 명은 꼭 얼어 죽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밖에 변을 보지 않았습니다. 먹은 게 없으니까. 당시 저는 꼬불쳐 둔 돈이 조금 있어 친구하고 김밥을 사서 먹었습니다. 철조망 주변에서 김밥 파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주먹밥에다 김밥을 아껴 먹으며 연명했습니다. 그 김밥을 못 먹었다면 저도 시체가 됐을 겁니다.”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잊지 못할 광경이 생각납니다. 주먹밥 크기가 테니스공만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부식이 나오도록 돼 있었는데 중간에 다 떼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주먹밥이랑 담배를 바꿔 피워요. 주먹밥 한 개가 담배 한 개비입니다. 주먹밥을 다 먹어도 굶어 죽을 판에 담배와 바꾸는 거예요. 

  

그래도 주먹밥 한 개를 다 주면 굶어 죽으니 반으로 나눠 담배 반 개비를 구해요. 거기다 호박잎 누렇게 말라빠진 것을 섞어 피우는 겁니다. 너무 기가 막혀 지금도 기억합니다. 담배가 그렇게 무서운 물건인지 그때 알았어요. 도대체 담배가 뭐기에 저러냐 싶었어요. 담배 피우던 사람들은 그때 다 죽었습니다. 그런 꼴을 보다가 기간사병이 되니 그나마 형편이 나아졌습니다. 그대로 계속 있었다면 저도 죽었을 거예요.”


인간은 生命보다 쾌락을 우선한다

  

─자기가 뻔히 죽을 걸 알면서도 주먹밥과 담배를 바꾼 거군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인간이 생명보다 쾌락을 더 추구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게 인간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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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19일 첫 미사를 집전하며

 

─공학도를 꿈꾸던 청년이 사제로 가는 계기가 된 셈이군요.

  

“그래서 아는 신부님을 찾아갔어요. 당시 신부님은 고아원을 운영하셨는데 미군이 도와주지 않으면 못 먹고살아요. 신부님도 영어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예요. 저는 ‘영적 갈등을 너무 많이 느꼈고, 신부님하고 같이 살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마음을 바꾼 모티브는 ‘죽음’이었겠네요.

  

“마음을 바꿨다기보다 죽음에 대한 체험이 발명가가 되는 삶의 의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죽음의 체험이 더 강력한 모티브가 된 셈이지요.”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은 1961년 사제품을 받았고 로마 유학을 거쳐 1970년 만 39세 때 청주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청주교구장 시절엔 음성 꽃동네 설립을 적극 후원했다. 1998년 김수환 추기경 후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돼 서울로 돌아왔다. 2006년 추기경에 임명됐다.

5월 1일 오전 10시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예정돼 있다.

입력 : 202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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