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로고
2007년 2월호

[호주 현지취재] 金判根의 청소년 축구학교「PSI」

『축구만 하는 학교가 아니라, 축구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한국의 축구 꿈나무는 초등학교 3~4학년이 되면 이미 인생이 결정돼 버립니다. 아이의 목표는 「국가대표」로 못 박혀 버립니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요.』(金判根)
개인기가 부족한 한국 축구
존 폴 칼리지의「PSI」코칭스태프. 가운데 金判根 前 축구 국가대표 선수. 오른쪽이 김의석 과장. 그 뒤가 제프 축구수석코치.
  한국축구가 이상해졌다. 국제대회만 나가면 맥을 못 춘다. 2002년 韓·日 월드컵에서 세계 4위에 올랐던 「붉은악마」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선 16강 문턱도 밟지 못하고 쫓겨났다.
 
  아시아 무대에서도 통하지 않는다. 2006년 11월 아시안컵 최종예선에선 이란과 두 판을 맞붙어 한 판도 못 이겼고, 12월의 아시안게임에선 동메달도 구경 못 했다. 한국축구의 「거품」이 빠진 걸까?
 
  최근 세계축구연맹(FIFA) 기술연구그룹(TSG)이 내놓은 한국축구의 평가는 이랬다.
 
  「열심히 뛰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소득이 없다. 개인기가 부족한 탓이다」
 
  축구의 개인기는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혀야 한다. 커서는 익히기 힘들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렇다 할 청소년 축구 프로그램이 없다. 초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어린이 축구교실」은 몇 군데 있다. 그러나 15~18세의 청소년들을 상대로 한 축구클럽은 없다.
 
  프로팀들이 「FC(Football Club)」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뿐 정작 클럽시스템을 운영하는 곳은 없다.
 
  축구를 좋아하는 청소년들이 뛸 수 있는 곳은 학교뿐이다. 그 무대는 너무 좁고 경쟁이 치열하다. 학업을 사실상 포기하는 게 우리나라 中·高 축구 특기생들의 엄연한 현실이다.
 
오후 축구훈련 시간에 맞춰 몸을 풀고 있는 PSI 3기생 조강래(왼쪽)와 이민규(오른쪽). 둘은 2006년 9월 수원工高에 스카우트돼 귀국했다.
 
  호주 브리즈번의 축구교실
 
   필자는 지난해 연말 호주 여행길에 브리즈번에 있는 「존 폴 칼리지(JPC)」의 「PSI(Pan Sports International)」 축구교실을 방문했다.
 
  현지 교포들로부터 『왕년의 국가대표선수인 金判根(김판근·42)씨가 설립한 축구학교에 한국에서 온 40여 명의 꿈나무들이 다니고 있는데 그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체육부 기자 시절 그를 취재했던 필자로선 金대표도 만나 보고 PSI 꿈나무들의 발재간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브리즈번의 중심가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李文煥(이문환·50) 사장이 안내를 자청했다. 그는 김판근 선수의 열성 팬이다.
 
  『金대표는 한국에선 멕시코 4강 주역으로 기억되지만 이곳에선 축구학교 교장으로 더 유명합니다. 호주에 외국인 축구학교를 세운 건 그가 처음이니까요』
 
  M1 고속도로를 타고 골드코스트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한 30분 정도 달리니 언덕배기에 「존 폴 칼리지」란 사인보드가 나타났다.
 
  『여깁니다. PSI는 저 학교 캠퍼스 안에 있습니다』
 
  李사장이 말했다.
 
  ―그럼 PSI가 대학부설기관입니까.
 
  『아니오. 호주에서는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가 한 곳에 모여 있는 종합학교를 「칼리지」로 부릅니다』
 
  정문에서 100m쯤 돌아 들어가자 태극기와 호주 국기가 나란히 걸린 기숙사가 나타났다. 대형 컨테이너를 10여 개 맞붙여 놓은 모양새다.
 
  출입구에는 「Pan Sport International」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신흥 명문학교
 
안양 LG 시절의 김판근 선수.
  ―Pan이 무슨 뜻입니까.
 
  『김판근의 「판」이라고 합니다』
 
  10평 남짓한 사무실에는 회의용 탁자와 책상이 3개 있었다.
 
  金判根 대표는 안 보였다. PSI의 살림을 맡고 있는 김의석 과장이 벌떡 일어났다.
 
  『金대표가 선약이 있어 좀 늦어지는 것 같으니 학교부터 먼저 둘러보시지요』
 
  ―이 기숙사는 학교에서 지어 준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지은 겁니다. 부지만 학교에서 빌렸을 뿐이지요. 땅은 JPC, 건물은 PSI 소유입니다. JPC 교정에 PSI가 입주한 셈이지요』
 
  캠퍼스는 한없이 넓고 푸르렀다. 먼저 첫눈에 들어오는 것이 축구장 4면과 크리켓 경기장을 합쳐 놓은 대운동장이다. 트랙을 따라 돌면 800m가 족히 넘을 것 같다.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이곳에선 오전 수업이 끝나야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학업이 우선이니까요』
 
  金과장의 말이다.
 
  2층 본부석에는 VIP 라운지와 200명 수용의 관람석이 있으며, 아래층에는 선수들의 샤워실·마사지실·응급실 등이 들어서 있다. 홈팀과 어웨이팀의 라커룸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
 
  30m쯤 떨어진 곳에는 3평 남짓한 바비큐 시설이 보인다.
 
  『경기에서 이긴 선수들이 자축파티를 하는 곳이지요. 우리 학생들도 가끔 훈련을 마친 뒤 고기를 구워 먹습니다』
 
  내친걸음에 학생들의 수업 장면도 보고 싶었다. 金과장이 앞장섰다.
 
  『학교를 돌아보시려면 출입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따라간 곳이 JPC 교무실. 마침 「스테핀 폴」 교장이 로비로 나오다 우리와 마주쳤다.
 
  金과장이 방문 이유를 설명하자 악수를 청하며 반색을 한다. 50代 초반의 교장은 학교 관련 자료들을 수북이 챙겨 줬다.
 
  안내서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JPC는 15헥타르의 잔디밭과 정원 그리고 13헥타르의 스포츠 필드를 갖고 있다」
 
  스포츠 관련 시설은 대운동장 외에 실내체육관과 테니스코트, 체력단련장이 있고 수영장은 공사 중이었다.
 
  1982년 144명의 학생으로 개교한 이 학교는 2001년부터 3년 연속 호주의 「10代 베스트 스쿨」로 선정된 신흥 명문사립으로, 재학생은 2600여 명이다.
 
  이곳에 1997년 문을 연 「존 폴 국제학교(JPIC)」가 인기다. 외국 유학생에게 호주의 언어(영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예비학교로 세계 20여 개국에서 300여 명이 몰려와 있다.
 
 
  한국의 축구 꿈나무들
 
  한국의 축구 꿈나무들이 처음 발을 딛는 곳도 여기다. 이곳에서 말문을 트고 외국 학생들과 함께 호주 문화를 배운다.
 
  강의실들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한 교실에 학생은 20명 안팎으로 아시아계 학생들이 많았다. 그중 韓·中·日 학생이 절반 이상이다.
 
  아무리 축구를 잘 해도 학점이 미달되면 1년 만에 짐을 싸야 한다고 했다.
 
  수업은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3시30분까지. 과목은 영어와 수학, 물리, 호주역사 등이다.
 
  그러나 PSI 학생은 오후 1시까지 4교시만 수업하면 된다. 오후의 2시간 축구훈련을 학교가 정식수업으로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이곳을 수료하면 본교로 올라가나요.
 
  『예. 그때쯤은 영어가 통하니까 본교에 진학해 자신의 學齡(학령)에 맞는 학년을 골라 호주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받습니다. 오후의 축구 프로그램은 이전과 마찬가집니다』
 
골드코스트컵(17세 이하)에 출전한 PSI팀이 브리즈번시티팀과 격돌하고 있다. PSI는 이 대회에서 준우승했다.
 
  PSI 1期 기성용
 
  도서관 옆은 실내체육관이었다. 현관 정면에는 각종 우승컵과 우승기가 가득 진열돼 있다.
 
  『울스포츠컵(Uhlsport Cup)과 빌트너컵(Bill Turner Cup)은 우리 학생들이 따온 겁니다』
 
  복도 벽에는 학교를 빛낸 선수들의 사진과 유니폼이 걸려 있다. 파란색 축구유니폼의 하단에는 「기성용」이란 이름이 적혀 있다.
 
  ―저 친구가 누굽니까.
 
  『지금 FC서울에서 막내로 뛰고 있는 선수입니다. 성용이가 빌트너컵에서 우승했을 때 입었던 옷이지요』
 
  기성용(17)은 축구전문가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다.
 
  열두 살 때 「차범근 축구대상」을 타며 「떡잎」을 보인 기성용은 호주로 훌쩍 떠났다. 그는 열다섯 살인 2004년 8월 한국축구협회의 부름을 받고 도요타컵(U-16) 국제청소년대회에 출전, 네덜란드와의 결승에서 연속 골을 터뜨리며 우승을 견인했던 축구 영재이다.
 
  당시 J리그의 「나고야 그램퍼스」가 그를 스카우트하려고 끈질기게 매달렸으나 실패했다.
 
  『PSI 1기생으로 5년 동안 이곳에서 뛰다 2005년에 귀국했지요. 2006년 FC서울에 입단했는데 나이보다 두 살이나 많은 19세 청소년대표팀에 뽑혔더군요』
 
  키 187cm, 체중 75kg. 미남에 영어도 잘하는 시쳇말로 「얼짱 계보」란다.
 
  『안녕하세요?』
 
  유니폼을 쳐다보느라 서 있는데 누군가가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 왔다. 헌칠한 키에 목소리가 굵다. 金과장이 그를 소개했다.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장외룡 감독의 아들입니다』
 
  ―이 학생도 여기서 축구를 합니까.
 
  『아닙니다. 동훈이는 농구선수입니다. 축구유학을 온 게 아니고 일반 유학생으로 와서 농구를 하고 있습니다』
 
  장동훈君은 JPC 12학년. 한국으로 치면 「高3」이었다. 金과장은 「요즘은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아들이 별로 없다」고 했다. 뒤에야 안 일이지만 그 역시 그랬다.
 
  金과장의 아버지는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축구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하고, 전북 현대와 대전 시티즌의 사령탑을 맡았던 김기복 내셔널리그 부회장이었다.
 
  사무실에 돌아오니 金判根 대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와는 근 15년 만의 만남이다. 1983년 멕시코 청소년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일군 뒤 고려大를 거쳐 대우와 LG에서 뛸 때 선수와 기자로 만났으니까.
 
  그는 국내 축구사상 최연소 국가대표 기록을 갖고 있다. 생후 17년 184일.
 
  ―아직도 그 기록이 유효합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성인 대표팀에는 더 어린 선수가 안 나오네요』
 
  ―포지션이 미드필더였지요.
 
  『예.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포지션입니다』
 
  대표경력 14년. 장수 비결에는 수비수란 위치가 한몫 했을 듯싶다.
 
 
  호주 「말코니 클럽」으로 이적
 
김판근
  ―호주로 오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까.
 
  『LG에 몸담고 있던 1997년 겨울, 정규시즌이 끝나고 FA컵만 남았을 때 20일쯤 휴가를 얻어 대학선배가 있는 시드니로 왔습니다. 나이 서른셋이라 앞날의 계획도 세울 겸 호주에 「일자리」가 있나 둘러보러 왔지요. 선배가 이탈리아 사람들이 운영하는 축구클럽을 소개해 주기에 그리로 가서 몸을 풀었습니다. 마침 호주는 시즌이 시작될 때라 훈련 파트너가 절대 부족했습니다』
 
  그게 「말코니 클럽」이었다. 당시 성적은 중하위권이었다. 성질 급한 이탈리안 클럽 멤버들이 「동양에서 온 붉은악마」의 플레이를 보고 야단이 났다. 어느 날 감독이 좀 보자고 했다.
 
  『당신, 한국에서 받는 만큼 줄 테니 이리로 오시오』
 
  당시 그의 연봉은 9800만원. LG에선 최고 수준이었다. 내일모레가 은퇴인데 11만 호주달러를 주겠다고 하니 귀가 번쩍했다. 귀국해서 구단에 슬쩍 흘렸더니 그러잖아도 버거운 선수였던지 두말없이 사인해 줬다.
 
  『시드니로 온 직후 한국에 IMF 외환위기가 터졌어요. 환율이 널을 뛰더니 금세 1억4000만원이 됩디다. IMF가 목돈을 챙겨 준 셈이지요』
 
  그는 호주에서 4년을 뛰면서 꽤 많은 돈을 모았다.
 
 
  「축구만 하지는 않는 학교」
 
한국 축구 꿈나무들의 호주 베이스캠프. 왼쪽은 숙소이고 오른쪽은 휴게실. 앞에 보이는 높은 나무에 코알라가 산다.
  ―어떻게 축구학교 설립을 생각했습니까.
 
  『어릴 때부터 막연히 갖고 있던 꿈이었습니다. 공부도 하고 축구도 하는 그런 곳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싶었지요. 우린 죽자 사자 공만 찼으니까요』
 
  그는 축구학교를 「축구만 하는 학교」가 아닌 「축구만 하지는 않는 학교」로 만들고 싶다고 한다. 큰 선수가 되기 위해선 지식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PSI를 JPC 캠퍼스 안에 설립했군요.
 
  『제가 이곳에서 프로생활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게 언어였습니다. 말이 통해야 사람 구실을 하지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남의 말을 못 듣고. 선수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나이 들어 외국으로 이적할 수도 있고 축구 후진국의 지도자로 갈 경우도 있는데 제 나라 말밖에 모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영어권인 호주를 선택했다고 한다.
 
  2001년 5월 말코니 클럽의 계약종료와 함께 시드니에 PSI의 사무실을 차렸다. 그리고 한국의 축구선배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제가 호주에 축구학교를 세우니 자녀들을 보내 주십시오」 라고.
 
  두 달 뒤 3명이 날아왔다.
 
  『그중 한 명이 기성용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제 모교인 금호高의 축구감독을 맡았던 기영옥 선배님입니다』
 
  그는 이들을 랭귀지 스쿨에 입학시키고 훈련장소 물색에 나섰다. 시드니에는 마땅한 곳이 없었다. 브리즈번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마주친 곳이 「존 폴 칼리지」였다.
 
  『첫눈에 「여기다」 싶데요. 깨끗한 환경에 넓은 운동장이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외국학생들을 위한 인터내셔널스쿨이 있다는 점이 흡족했습니다』
 
  도심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어린 학생들에게는 도움이 됐다. 그는 학교장을 만나 PSI의 설립목적을 얘기하고 축구학교의 특성상 오후 수업을 훈련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양해를 구했다.
 
  얼마 뒤 학교 측은 영어·수학·과학 등 필수과목의 이수를 전제로 퀸즐랜드州 교육부의 승인을 얻었다고 통보해 왔다. 학사문제는 JPC가 맡고 축구훈련은 PSI가 맡았다.
 
  ―JPC의 학업성적을 한국에서 인정해 줍니까.
 
  『물론입니다. JPC의 성적증명서와 호주 체류증명서, 한국 총영사관의 확인서를 첨부하면 됩니다』
 
 
  기숙사 완공
 
2006년 8월에 입학한 PSI 신입생들. 왼쪽부터 최웅락·김영웅·정대희·인호진·최근철.
  남은 문제는 숙소인데 교내 언덕부지 1000평을 빌렸다. 임대기한은 영구적이다. PSI가 확장을 요구하면 땅을 더 빌려 주고 이사하거나 폐교할 때는 지상건물을 JPC에 팔기로 단서를 붙였다.
 
  계약을 완료한 뒤 그 언덕에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선수촌 숙소로 사용했던 조립식 건물을 옮겨 왔다. 모두 12채로 방 4개가 들어가는 숙소 6채와 사무실·식당·도서실·휴게실·훈련장·코치숙소가 그것이다.
 
  ―얼른 보니 컨테이너 하우스 같던데요.
 
  『올림픽 대표선수들을 컨테이너에 수용했다면 IOC가 가만있었을까요?』
 
  기숙사를 자세히 볼 겸 인터뷰 장소를 사무실 바깥으로 옮겼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그늘 아래는 서늘했다. 그때 맞은편의 높은 나무 가지에서 이상한 물체가 보였다. 시커먼 놈이 날아가지도 않고 가지에 매달려 출렁이고 있었다.
 
  ―저놈이 뭡니까.
 
  金대표가 돌아앉아 한참을 보더니 답했다.
 
  『코알라입니다. 저놈들이 여기 많이 삽니다. 새벽에 나가 보면 기숙사 안마당에 작은 배설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기숙사는 2003년 8월1일 완공됐다. 총 투자액 8억원. 공사기간 동안 한국에선 2002년 월드컵 4강의 기세를 타고 학부모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덩달아 입학생이 늘어났다. 2002년 28명, 2003년 36명, 2004년 42명, 2005년 40명, 2006년 44명.
 
  ―몇 명까지 수용이 가능합니까.
 
  『50명이 엔트립니다』
 
2006년 8월15일 울스포츠컵 결승전에서 스테이트 고교를 꺾고 2연패를 달성한 존 폴 칼리지(JPC) 17세 팀. 뜻깊은 광복절 밤이었다.
 
  4명의 코칭스태프와 연령별 훈련
 
  ―PSI의 학사 일정은 어떻습니까.
 
  『먼저 국제학교(JPIC)에 입학합니다. 그날부터 JPC 학생이 되는 거지요. 그곳에서 오전 수업을 받습니다. 과목은 영어·수학·과학·호주문화 등입니다. 오후에는 운동장에서 저희 코칭스태프로부터 축구실기를 배웁니다. 훈련은 13-15-17세 연령별로 나눠 실시됩니다』
 
  학생들은 호주축구협회에 등록돼 그들이 출전한 각종대회의 성적을 기록으로 남겨 뒷날 선수경력의 자료로 사용하게 된다.
 
  ―코칭스태프는 몇 명입니까.
 
  『저를 포함해 4명입니다. 수석코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출신의 제프 홉킨스로 유럽축구연맹(UEFA)의 A코치 자격증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영국식 훈련 프로그램은 아주 독특하고 내용이 알찹니다. 올해로 3년째 근무하는데 PSI 선수 전체를 관리합니다.
 
  한국인 코치는 김동기(36)씨와 강남길(28)씨가 있습니다. 김코치는 한국의 대우과 포항 프로팀을 거쳐 4년 전 호주로 와서 클럽 팀에서 뛰면서 코치자격증을 딴 학구파고, 강코치는 한국에서 유소년 클럽을 맡았던 어린이 축구 전문코치입니다. 저는 총감독이고요』
 
  훈련내용은 연령별로 다르다고 한다.
 
  13세 그룹은 볼 컨트롤과 패스 등 축구 기본기와 달리기·스트레칭·조깅 등의 기초체력 단련에 중점을 둔다. 수요일과 일요일은 쉬고, 토요일에 한 차례 경기를 갖는다.
 
  15세 그룹은 스토핑·트래핑·저글링 등 개인기를 연마하며, 장거리 달리기를 통한 지구력 보강에 주력한다. 세트플레이와 팀 전술훈련도 배운다. 週 2회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며 역시 토요일에 경기를 갖는다.
 
  17세 그룹은 週 6회 훈련과 週 2회 웨이트트레이닝을 갖는다. 경기에 대비한 팀워크와 전술훈련을 익히며 스스로 컨디션을 조절하는 체력관리에 치중한다. 경기 후에는 결과에 따른 승부 분석을 한다.
 
  퀸즐랜드州에는 축구클럽이 200개가 넘어 주말마다 홈 앤드 어웨이로 게임을 갖는다고 한다. 대진표는 1년 전에 이미 짜인다.
 
  ―경기를 하다가 다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 선수들은 입학과 동시에 JPC 학생이 되니 학교에서 가입한 의료보험과 상해보험의 혜택을 자동적으로 받게 됩니다. 시합을 하다 다치면 전문의의 진료를 거쳐 병원에서 무상치료를 받지요』
 
  아직까지는 수술이 필요한 병에 걸린 학생은 없었다고 한다. 시합 중 부딪혀 인대를 다쳐 물리치료를 받은 경우는 몇 차례 있었지만.
 
  갑자기 주위가 시끌시끌해졌다.
 
  『다녀왔습니다~』
 
  파란색 상의에 반바지 차림의 학생들이 기숙사로 들어오면서 金대표를 향해 복창을 한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학생들이다. 이들은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뒤 점심을 먹고 축구장으로 나간다. 오후 학습을 시작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평가서 3개월마다 통보
 
숙소에서 열린 기성용의 생일파티. 학생들의 생일이 든 주말에는 식당에서 한국 아주머니가 미역국을 끓여 준다.
  ―학생들의 성적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저희는 네 가지 항목으로 나눠서 평가합니다. 신체변화, 생활태도, 학업성적, 훈련성과. 이를 매달 한 번씩 체크해 3개월마다 학부모님들에게 통보합니다』
 
  ―평가서 사본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
 
  『프라이버시 문제가 있는 만큼 이름은 가리겠습니다』
 
  金대표는 사무실에서 평가서 한 장을 갖고 나왔다. K군의 2006년 3학기(7-8-9월) 평가서는 이랬다.
 
  ▲신체변화: 키(176.5cm)는 3개월 동안 변화 없음. 체중은 70-66-67kg로 매달 조금씩 변동. 건강은 양호함.
  ▲생활태도: 긍정적이고 부지런하나 다소 산만함.
  ▲학업성적: 출석률 100%. 영어는 레벨 2에서 레벨 3으로 한 단계 올랐음.
  ▲훈련성과: 지구력은 향상됐으나 기복이 심하고 집중력이 떨어짐.
 
  ―성적이 시원찮은 학생은 어떻게 합니까.
 
  『본인과 학부모에게 먼저 통보합니다. 축구선수로서의 가능성이 안 보일 때는 진로 변경을 권유합니다. 본인과 학부모가 원할 경우 이 학교의 일반고교 과정으로 옮겨 체육을 전공하거나, 스포츠마케팅과 관련된 학과를 선택하도록 지원합니다』
 
  ―실제 그런 학생이 있나요.
 
  『2002년 우리 학교에 입학해 3년간 수업한 A군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그는 JPC를 졸업하고 2006년 퀸즐랜드의 명문대학인 그리피스大에 입학해 스포츠사이언스의 학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아직도 축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야간에는 2부 리그인 S클럽에서 선수로 뜁니다』
 
  ―국내로 스카우트돼 유턴한 선수는 없습니까.
 
  『많습니다. FC서울의 기성용, 2기생 서영덕(FW)이 고려大, 김홍일(MF)과 김주영(DF)은 연세大로 진학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16세 이하 청소년대표를 거쳐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실력파들입니다』
 
 
  국내로 스카우트된 선수들
 
  3기생 이민규(17)와 조강래(17)는 수원工高에 스카우트돼 2006년 9월 귀국했다. 팀의 기둥인 스트라이커 주영재(16)와 서울시 유소년대표 출신 정찬일(16)은 여러 고교로부터 「오퍼」를 받고 고심 중이다.
 
  ―학생들이 제 길을 찾아가니 일단은 성공한 셈이군요.
 
  『아직은 판단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저희들 덕분에 JPC가 단기간에 호주의 축구 명문교로 발돋움한 건 자랑할 만하지요. 학교대항전은 우리 선수들이 거의 싹쓸이했으니까요』
 
  울스포츠컵은 2005년에 이어 2006년도 거머쥐었다.
 
  17세 팀이 출전하는 이 대회는 2006년 8월15일 스테이트高와 결승전을 가졌는데, 김태원(16)이 종료 30초를 남기고 결승골을 뽑아 3대 2로 우승했다.
 
  스테이트高는 2005년 대회 때도 결승전에서 맞붙었는데 그때는 임동혁의 해트트릭으로 연장전 끝에 승부를 뒤집었다.
 
  15세의 빌트너컵에서는 2004년과 2005년 거듭 우승했다.
 
  이 대회는 호주 전역에서 1500여 개 팀이 출전해 4월부터 각 州별로 지역예선을 거쳐 마지막으로 남은 4강이 시드니에서 최종승부를 가린다. 2005년에는 18전15승3패의 전적으로 예선리그 2위로 본선에 올라와 결승전에서 브리즈번 시티를 4대 1로 꺾고 2연패에 성공했다.
 
  ―2006년은?
 
  『퀸즐랜드州 예선 8강전에서 탈락했습니다. 상대팀도 강했지만 2006년은 그 전년도 멤버들이 다 빠져버려 빈 자리가 컸습니다』
 
  주말마다 「홈 앤드 어웨이」로 벌어지는 클럽축구 17세 대회는 JPC가 무적이다. 2006년 정규시즌에서는 16전15승1무로 완승했다. 그러나 4강끼리 크로스로 맞붙는 최종 플레이오프(9월10일)에서 상대를 얕잡아 봤다가 한 골 차로 패해 2위에 낙착됐다.
 
  이 밖에 골드코스트컵에선 17세 팀과 15세 팀이 나란히 준우승했고, 사우선스키컵에선 모두 3위를 차지했다.
 
  2006년 가장 성적이 나빴던 레벨은 13세 팀. 정규시즌 18전6승3무9패로 9개 팀 가운데 7위를 했다. 2005년에는 7승4무10패로 8개 팀 가운데 5위.
 
  『나이가 어릴수록 성적이 안 좋은 건 체격 차이 때문입니다. 호주 아이들은 13세가 되면 벌써 어른 덩치가 됩니다. 부딪히면 그냥 튕겨 나갑니다』
 
  金과장이 당시 경기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JPC팀에 한국선수 외에 호주선수도 끼어 있었다.
 
 
  韓·濠·日 3개국 합작팀
 
  ―팀 구성이 韓-濠 합작입니까.
 
  『예. 시합에는 학교 이름인 JPC팀으로 출전하기 때문에 호주 학생들도 같이 뜁니다. 축구학교인 PSI 학생만으로는 엔트리를 못 채웁니다. 호주 선수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다 보면 우리 학생들의 영어실력도 부쩍 늘지요』
 
  17세 팀에는 골키퍼를 포함해 3명, 15세 팀에는 5명, 13세 팀에는 6명이 호주학생이란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면 韓-濠-日 3개국 합작입니다. 우리 PSI팀에는 일본학생도 한 명 있거든요』
 
  최광성(17·JPC 11년)君. 그는 효고(兵庫)에 사는 在日교포 3세로 형(최광영·19·그리피스大 골프 경영학 전공)과 함께 이곳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축구를 배우고 있다.
 
  ―학비는 얼마나 듭니까.
 
  『JPC 학비와 PSI 훈련비, 기숙사비를 합쳐 1년에 2900만원 정도 됩니다. 일반 유학생보다는 500만원 정도 많은 편이지요. 훈련장비 구입과 경기참가 비용 등이 추가로 드니까요』
 
  ―별도의 입학자격이 있습니까? 선수경력이 있어야 한다든지….
 
  『처음에는 그런 걸 따졌습니다. 축구전문학교니까 어느 정도 실력이 갖춰진 학생이 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청자가 있으면 서울사무실의 직원이 해당학교에 가서 선수경력을 확인하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따지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 PSI가 축구선수만을 위한 훈련소가 아니니까요』
 
  ―입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홈페이지(www.pansports.com)로 가면 됩니다』
 
  인터뷰가 꽤 길어졌다. 학생들이 축구공 보따리를 들고 운동장으로 나간다. 제프 코치도 사무실을 나선다. 그에게 물었다.
 
 
  축구를 즐기는 호주 어린이들
 
  ―한국 어린이들과 호주 어린이들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한국 어린이들은 너무 열심히 합니다. 축구에 모든 것을 겁니다. 동작이 빠르고 힘이 넘칩니다. 그러니 체력이 한계에 빨리 부딪힙니다. 반면 호주 어린이들은 자신의 능력에 맞춰 쉬어 가면서 운동을 합니다. 축구를 즐기지요』
 
  金대표가 끼어든다.
 
  『사실 한국축구는 본인의 선택권이 없습니다. 학부모와 코치가 모든 걸 결정합니다. 축구 꿈나무는 초등학교 3~4학년이 되면 이미 인생이 결정돼 버립니다. 아이의 목표는 「국가대표」로 못 박혀 버립니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요. 부모들도 그걸 알면서 강요하니까 문제입니다』
 
  이젠 기숙사를 둘러볼 차례다.
 
  안내는 김석배(25·경동大 2년) 사감이 맡았다. 대학에서 스포츠마케팅을 전공하다 11개월 전에 이곳에 온 그는 축구보다 영어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15평 남짓한 숙소의 내부는 세탁기와 식사조리대가 있는 공동 공간과 4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2명씩 사용하는 방안에는 각각의 침대와 책상이 있고, 샤워기가 딸린 화장실이 있다.
 
  숙소는 모두 6개 棟(동).
 
  휴게실에는 교육용 대형TV가 설치돼있다. 축구경기 필름이 빽빽이 꽂혀 있다. 유럽프로축구리그전, 월드컵축구, 올림픽축구 등.
 
  ―저 컴퓨터들은 뭡니까.
 
  『학생들이 PC방에 가고 싶어 하기에 컴퓨터 4대를 네트워크로 연결시켜 만들어 놓은 겁니다. 게임도 가능하지요』
 
  냉장고에는 한국에서 부쳐 온 고추장을 비롯해 미숫가루와 한약들이 가득 들어 있다. 음식들은 모두 포장지에 싸여 각 선수들의 이름표가 붙어 있다.
 
  체력단련실에는 각종 운동기구가 설치돼 있다. 버터플라이·역기·아령 등. 독서실은 학생들의 숙제방이다.
 
  『모든 과제물이 영어로 돼 있어서 학생들이 그걸 번역하느라고 애를 먹습니다』
 
  책상 위에는 英韓-韓英사전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日韓사전도 보인다. 독서실에는 책이 꽤 많다. 학생들은 주로 「해리포터」와 「박지성의 멈추지 않는 도전」을 많이 읽는다고 했다.
 
  ―어린 선수들이 집을 그리워하지 않나요.
 
  『같은 또래가 많아서인지 외로움은 덜 타는 것 같습니다. 주말에는 클럽대항전이 열리니까 시합에 갔다 오면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집니다』
 
  식당이 꽤 넓었다. 식단은 뷔페式으로 제공된다. 뚱뚱한 주방장 닐(42)氏는 체구만큼이나 여유가 있어 보인다. 야채와 고기가 주 메뉴지만 밑반찬으로 김치와 고추장을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자녀들의 축구유학 뒷바라지하는 부모들
 
  ―선수들의 생일잔치도 해줍니까.
 
  『토·일요일에는 이웃에 사는 한국 아주머니(이정원·45)가 오셔서 떡볶이와 김치찌개를 만들어 주는데, 그 주간에 생일이 든 학생이 있을 땐 꼭 미역국을 끓여 줍니다』
 
  다시 사무실로 왔다. 金과장이 학생들의 명단 사본을 주었다. 참고로 하라면서. 그런데 이름 옆에 「H」자가 붙은 학생이 4명이나 됐다.
 
  ―이건 무슨 표시입니까.
 
  『자기 집에서 다닌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의 축구유학을 뒷바라지하려고 이곳에 집을 구해 함께 계시는 부모님들이있습니다』
 
  ―외국인이 집을 살 수 있습니까.
 
  『호주에서는 18세 미만의 청소년은 법적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축구학교에 온 학생들의 부모가 희망할 경우 가디언 비자로 입국해서 집을 구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입국해 이곳에 살다가 자녀의 학업이 끝나면 집을 팔고 돌아가면 되지요』
 
  주장인 주영재 선수의 경우 3년 전 집을 구해 어머니, 누나(연진·22·그리피스大 호텔경영학과 3년)와 함께 지내고 있다.
 
  ―집값은 얼마 정도 합니까.
 
  『크기 나름이지만 이 근처에서 방 4개에 수영장이 딸렸다면 대략 3억5000~4억원 정도 됩니다』
 
  4명의 「기러기 아빠」들이 참 힘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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