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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제독의 Periscope(잠망경) 〈2〉 서해 북방한계선

서해 NLL상의 남북한 해군, 서로 보복의 칼을 품고 산다

글 : 유영식  전 예비역 해군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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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 NLL의 실효적 관리는 전투원들의 목숨을 담보 … 64년간 132명 전사상자 발생
⊙ 대청해전 승전 이후, 해안포 전력 급격히 증강해 백령도와 연평도 포격 노려
⊙ 천안함, 북한 어뢰공격으로 침몰 확인 … 아직도 암초 침몰 주장하는 무리 있어

유영식
1962년생으로 해군사관학교를 39기로 졸업했다. 35년9개월간의 군 생활 가운데 17년간을 해군본부와 국방부 대변인실 등에서 정훈장교로 일했다. 2009년부터 5년 동안 해군 공보과장으로 재직하며, 최장수 해군공보과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2014년 해군 준장으로 해군본부 정훈공보실장(해군 대변인)을 지냈다.
2009년 11월 10일 ‘대청해전’에서 해군은 새로운 교전규칙으로 교전 2분 만에 완승을 거뒀다.
사진은 덕적도 인근해상에서 해군 2함대 235편대 참수리정이 서해 NLL 해상경계태세 훈련 중 사격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2002년 6월 발생한 제2연평해전 이후 3개월간의 심각한 논란을 뒤로 하고 합참의 전비태세 검열실의 조사를 거쳐 해전은 종결됐다. 정부는 북방한계선(NLL) 근처에서의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한 남북한 장성급 회담을 시작으로 상호 소통채널을 확보했다. 회의 결과, 서해상에서 긴장이 완화되는 듯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기간 동안 남북교류가 이뤄지는 가운데 서해상에서 교전수준의 충돌은 사실상 없었다.
 
  해군은 제2연평해전에서 ‘기습’의 교훈을 얻었다. 서해 경비작전 중 “교전이 발생하면 다시는 도발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과, 만약 북한의 기습으로 피해가 발생하면 NLL을 북상해서라도 도발세력을 궤멸적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NLL 현장을 지키는 군인들은 날마다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역대 정부는 NLL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이곳에서 남북한 교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주요 관심사항이었고, 이명박(李明博) 정부도 그러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고 남북한 간의 교류정책 기조에 변화를 맞으면서, 북한의 대남선전에 있어서도 비난의 수위가 높아지며 “원칙 없는 북한 지원은 없다”는 정책 방향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서해의 NLL 선상에서도 긴장감이 과거보다 높아졌다. 북 경비정의 움직임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2함대는 일시적으로 NLL을 침범하는 북한 선박에 대해 남북한 간 우발적 충돌을 예방한다는 목적으로, 지정한 북 경비정 호출부호를 통해 “백두산 응답하라”를 요구해도 대답 없는 메아리가 돼 가고 있었다. 이 호출부호는 2007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무효화됐다.
 
 
  대청해전, 발발 2분 만에 북 경비정 무력화
 
  2009년 11월 10일 오전 11시경 등산곶에서 출항한 북한 경비정 383호가 서해 대청도 동쪽 6마일 해상의 NLL을 1.2마일 침범했다. 당시 우리는 고속정 3척을 1개 편대로 기동을 하고 있었으며 북측은 NLL 선상을 따라 조업 어선을 통제하기 위해 6척가량의 경비정이 백령, 대청, 연평도를 잇는 NLL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대청도 인근의 383호정이 NLL을 월선해 계속 남하했고 이에 대응해 우리 해군의 참수리 325호와 336호가 대응 기동을 하며 경고통신을 5차례나 보냈으나 북한 경비정이 이를 무시하고 남하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과감하게 월선하고 경고통신에도 아랑곳 않고 NLL을 월선해서 기동했다. 그날따라 북 경비정이 6척가량 NLL 인근 북측 수역에서 경비작전 중인 상태여서 우리도 긴장상태에서 대응기동을 했다.
 
  우리 고속정 편대는 경고통신을 무시하며 월선한 북 383호정에 경고사격을 한다는 통신을 보내는 등 신중하고 통제된 대응을 했다. 경고사격을 통신한 후 참수리 325호정은 대응규칙에 따라 11시36분 북 경비정 1km 전 후방에 경고사격을 실시했다.
 
  우리 고속정의 경고사격이 있자 북 경비정은 기다렸다는 듯 우리 고속정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조사결과처럼 교전 후 20여 발 정도가 참수리 325호정 외부에 피탄(被彈)된 것을 확인했다. 제2연평해전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있던 2함대 전투원들은 20mm 벌컨포로 즉각적인 대응사격을 통해 2분 만에 북한 경비정을 무력화했고, 반파당한 북한 경비정은 겨우 침몰을 면한 채 북한 경비정에 의해 예인돼 퇴각했다.
 
  이 교전에서 해군 경비정은 확실하고 충분한 대응으로 적 경비정을 초토화시켰다. 필자는 당시 해군 공보과장으로서 언론의 질의에 답변을 준비하고 있었고, 동시에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전사한 6명의 전우들을 떠올렸다.
 
  약 3km 거리를 사이에 두고 교전을 벌였던 ‘대청해전(大靑海戰)’의 결과, 해군 2함대는 인명피해 없이 교전을 승리로 마쳤고, 북한 측은 공식적으로 8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으나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당국은 평가했다.
 
  교전과정에서 우리 고속정의 우월한 대응사격에 대해 상급부서 일부에서는 과도한 대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전해졌으나, 당시 국방부와 합참은 북한과의 교전에서 적절한 대응규칙에 따라 응전하고 사상자 없이 종결된 사안으로 당연히 그 전과에 상응해 현장 지휘관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대청해전 직후 나타난 북한의 군사적 징후
 
  북한 해군은 대청해전으로 인해 다시금 패전의 길에 놓였다. 교전 직후 북한은 공식 대남 선전매체를 통해 “남조선의 도발”이라는 주장을 펴고 다시 NLL 무력화를 위한 선전전을 시작했다. 다시 서해상에 긴장이 고조됐다. 서해상에서 3번째 교전인 대청해전이 발생한 이후, 해군 2함대사령부는 앞으로 북한이 또다시 보복전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해군의 전투장교와 정보장교들은 ‘어떤 양상이 될지 모르나 반드시 다시 온다’고 생각했다.
 
  2009년 11월 10일 해군창설 기념일 전날에 일어난 대청해전 이후 2함대사 예하 전투원들과 함정은 전투준비 태세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북한 경비정의 월선이 있을 때마다 최고의 긴장상태에서 대응작전을 했고 모든 출동함정은 실탄을 장전하고 방아쇠만 당기면 곧바로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준비했다.
 
  고속정 장병들은 손과 발이 파도에 얼고 또 얼어도 40mm 함포와 탄약을 철저히 관리했다. 전투함정의 장병들은 그것이 유사시 스스로의 생명을 보장하는 첩경이라고 느끼며 대비태세에 매진했다. 2함대 전투함정과 전투원들은 “쏘라고 할 때 나가지 않으면 내 총이 아니다. 그리고 쏘라는 말 없이 나가도 내 포가 아니다”라는 말을 입과 머리에 달고 살았다.
 
  이 구호는 NLL 선상에서 고도로 통제된 대응, 즉 NLL 월선을 허용하지 않고 도발시는 즉각적으로 대응해 승전을 담보하며 동시에 과도한 대응이라는 해석을 낳지 않는 상태라는, 매우 어려운 작전 종결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청해전 이후 나타난 특이한 군사적 징후는 북한이 서해 NLL 인근 지점의 해안포를 이용해 사격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NLL 해상도발은 북한 해군이 해상교전에서 북한 함정의 전투력 열세를 극복하려는 방편으로 해안포를 이용하겠다는 의도와 함께, 해안포의 방향만 돌리면 포탄의 탄착점은 백령도 연평도 대청도를 해안포 사정거리 내에 둔다는 의미도 있었다.
 
 
  2함대사령부, 해안포와 유도탄 공격에 집중 대응
 
2009년 12월 9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김태영 국방부 장관(사진 맨 왼쪽)이 대청해전을 승리로 이끈 고승범 소령, 김상훈 대위, 김성완 대위(왼쪽부터)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돌이켜보면 북한은 서해 도서(島嶼)에 대해 해안포 공격 훈련을 염두에 두고 진행했다는 점을 연평도 포격 도발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NLL 선상에 대한 북한의 해안포 사격은 2009년 11월부터 2010년 3월까지 집중적으로 이어졌다.
 
  우리 6여단과 연평부대는 NLL 이남으로 넘어오는 포탄의 숫자를 평가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NLL 북측 지점에 K9 자주포로 비례성의 원칙에 따라 대응사격을 가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NLL은 실질적인 해상 군사분계선이라는 불변의 기준을 유지하고 적의 도발에 대한 응전의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해안포 도발에 대한 대응은 참으로 어려웠다. 포탄이 NLL을 월선한 탄착점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포탄의 숫자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해병 6여단과 연평부대 관측부대는 24시간 감시와 대응사격에 주력했다. 2함대 전투전대 함정과 작전요원들은 앞으로 해상교전이 발생하면 북한이 우리 함정과 지원전력에 대해 해안포 공격과 유도탄을 이용한 통합전력을 운영하거나, 평상시 경비 중인 함정을 공격할 것이라는 도발형태를 상정하고 이에 집중 대비했다.
 
  2함대의 모든 함정은 유도탄 방어 훈련에 집중했고 해안포 도달 거리를 경비작전구역에 적용해 안전을 확보하는 노력을 병행하면서 경비작전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래도 최전방 해역 ○○○기지에 전개해 대응하는 고속정과 전투원들은 NLL 근접작전을 해야 하기에 북의 해안포 거리 내에서 작전기동을 해야 했다. 유사시 경비정의 NLL 월선 없이 북한이 해안포와 유도탄으로 도발할 경우를 대비해 평소 우리의 중형 경비함은 사격거리를 고려해 경비작전을 수행했다.
 
  기동경비작전 중 기상악화로 항해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이르면 항해하면서 북 해안포와 유도탄 사격을 피할 수 있는 음영구역을 찾아 피항을 실시했다. 장기간 기상악화가 예상되면 함정의 손상, 승조원의 피로도를 고려해 기지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으나 곧바로 경비구역 복귀를 위해 북한 유도탄과 해안포 표적이 잡히지 않는 음영구역으로 이동했다.
 
 
  증거의 인멸성 보복, 천안함 피격
 
2010년 4월 24일 인양한 천안함 함수(위). 인양한 천안함의 아래 부분을 촬영한 사진. 외부 충격으로 천안함의 동체가 안쪽으로 눌려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천안함이 내부 폭발이 아닌 외부 폭발로 침몰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사진=조선일보
  2010년 3월 26일 천안함이 피항한 지점이 바로 백령도 용기포 인근 해역이다. 북한은 이곳에 종종 대피하는 초계함을 노리고 있었으며 이날 북한 잠수정은 용기포로 피항해 있던 천안함을 야간에 어뢰로 공격한 것이다. 잠수정에 의한 천안함 공격은 대청해전이 일어난 후 4개월 만에 발생했다.
 
  대청해전은 2009년 11월 10일 발생했고, 이 교전은 2함대사령관이 취임한 지 5개월 정도 지나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안함 피격은 그 후 4개월 후인 2010년 3월 26일에 발생했다. 북한이 대청해전의 보복을 생각하고 감행할 때 가장 우선시한 것은 무엇인가? 증거의 인멸성과 확실한 보복성이라고 본다.
 
  증거의 인멸성 차원에서 잠수정 어뢰를 이용한 공격을 선택한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잠수정의 출항시기를 구름 낀 기상상태로 잡은 것은 북한 군사기지에서 잠수정의 입출항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대외적으로 도발의 원인을 확증하지 못하게 증거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의도로 잠수정에 의한 공격을 선택했다.
 
  서해의 해저가 뻘 지역이라는 점에서 어뢰의 추진체를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도 작용했다. 또한 작전적으로 북 잠수정의 경우 서해상에서 장기간의 항해가 제한되고 기동중인 함정에 대한 공격은 성공 확률이 낮다는 점과 잠수정이 노출될 경우 등을 고려할 때 NLL 인근의 위치에서 매복해 공격 후 복귀하는 선택을 했다고 추정된다.
 
  확실한 공격, 즉 미수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정지한 함정에 대한 공격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피항 중인 함정을 타깃으로 정했다. 아울러 백령도와 연평도 인근 해역에 대한 잠수함정의 이동을 탐지하기가 어렵고 초계함의 대(對)잠수함정 탐지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잠수정에 의한 초계함(PCC급) 어뢰공격을 선택했다고 본다.
 
  이러한 작전적 판단뿐만 아니라 북한의 공격이 2010년 3월에 이뤄진 점에는 보복의 성격이 농후한 시기의 문제가 숨어 있다. 해군의 주요 전투 지휘관 인사 시기는 대외 비공개 사안으로 그 시기와 대상이 일정치 않으나 대청해전이 발생한 이듬해인 2010년 중순이 가까워지면서 당시 참모총장의 임기 만료로 인해 순환인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함대사령관과 전투전대장 그리고 함장의 일부가 인사이동을 맞이할 시기가 다가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공격했다고 추정한다. 즉 남한의 2함대사령부에 대청해전에서 얻은 승전의 메달을 남기지 않겠다는 북한 해군의, 더 나아가 북한군 전체의 보복의지가 담겨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우선 대청해전에서 완전히 패배한 결과를 그대로 넘길 수 없다는 북한 서해함대사와 약 4개월에 걸친 NLL 포격도발 양상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2010년 3월 26일 저녁 102명의 승조원이 타고 있던 두 동강 난 천안함 속에서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전사가가 46명이고, 살아난 장병은 58명이었다. 피격 당시 함장 최원일 중령은 배를 떠나지 않겠다고 전복된 함정의 일부에 서서 발길을 옮기지 않았으나 생존 장병의 권유로 배를 이탈해 수색작전을 지원했다.
 
  “왜 살아왔냐”라는 질타를 받던 최 중령의 고통이 어떠할까를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합당한 지휘관의 선택이라고 궁극적으로 판단했다. 캄캄한 함정의 복잡한 격실 속에서 손으로 더듬으며 살아온 장병 58명은 전사한 전우들 앞에 그리고 그 가족들 앞에 서면 늘 살아 돌아온 것이 마음의 빚을 진 듯한 모습인데, 이를 보며 모두 가슴 아파했다. 지금도 그 생각을 마음 한 곳에 남기고 있다고 한다.
 
  천안함에 승함했던 정다운 중위는 함정근무를 하지 않는 정훈장교로 병과를 선택해 복무 중이다. 그는 “인생을 두 번 사는 것 같아 모든 것에 어렵게 느껴지는 일이 없다”고 필자에게 고백했다. 젊은 나이에 사지를 뚫고 나온 청년장교의 마음이 그렇게 담담해진 것 같았다.
 
 
  해군 창설 이래 최초로 감사원 감사 받아
 
  함정을 공격한 것은 영토를 공격한 것이라는 점에서 해군 내에서 “이대로 지나가면 대한민국은 군대를 가진 국가가 아니다”라는 의견이 비등했고 다양한 군사적 조치를 강구하자는 비공개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정부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확증발표를 못하고 민군 합동조사단을 발족시켰다. 동시에 원인의 조사와는 별개로 해군 창설 이후 최초로 국방부, 합참, 해군 등 군 기관에 대한 감사원의 군사 대비태세 감사를 받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군의 조치와 대비태세의 무능을 지적하는 언론의 지적이 빗발치는 가운데 작전지휘 계선상에 있는 지휘관들에 대한 직무감사가 이뤄지고 합참의장과 작전사령관, 2함대사령관 및 예하 지휘관들이 줄줄이 조사의 대상으로, 그리고 책임을 추궁받는 대상이 됐다.
 
  대비태세 감사는 대비태세, 교육훈련, 함정장비, 근무기강, 언론조치 분야 등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 이에 대해 국방부, 합참, 해군은 불만의 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국민의 비판 앞에 놓인 군은 온전히 받아들여야 했다.
 
  해군은 46명의 전사자 유족들의 비탄과 원망을 온몸으로 받았다. 동시에 순직자에게 예우를 다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 많은 가족도 국가를 위해 전사했다는 명분으로 비통함을 참았다. 심지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가자”는 일부 가족도 있었으나 유족들은 참고 또 참았다. 유족의 슬픔과 애도에 많은 국민이 동참했고 동시에 분노와 슬픔을 같이했다.
 
  약 한 달간 천안함에 대한 브리핑이 오전 오후 생방송으로 진행됐다. 원인에 대한 일부 기사가 나오면 이어서 해명하고 이를 단번에 설명치 못해 혼선이 지속됐다. 평택 2함대에 300여 명의 기자, 백령도에 150여 명, 국방부에 200여 명의 기자가 관련 보도를 이어 갔다. 시간의 오류, 가족의 증언, 통화기록 차이, 물기둥 영상, 작전지휘관들의 활동 등 모든 것이 시간이 갈수록 불투명해져 가는 듯했다.
 
  심지어는 사건 발생 직후 출동한 인천해양경찰서 소속 해안경비정에 의해 천안함에 탑승하고 있던 승조원 104명 중 58명이 구조되었으나, 최원일 함장이 46명을 탈출시켰다는 어처구니없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민평기 기관총’
 
2011년 3월 25일 오전 경기도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 영주함(1200t급)에서 열린 ‘3.26 기관총 기증식’에서 천안함 순국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씨(왼쪽에서 두번째)와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왼쪽에서 첫번째)이 기관총을 살펴보고 있다. 3.26 기관총은 윤청자씨가 기탁한 1억898만8000원의 성금으로 구입한 K-6 기관총 18정으로, 천안함 피격일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이렇게 명명했다. 사진=조선일보
  수색과정에서 3월 30일에는 UDT 대원인 한주호 해군준위가 작업 중 실신해 병원으로 후송돼 순직했으나, 이에 대해서도 잠수지역이 다른 곳이었고 무엇인가를 수색하려는 별도의 잠수라는 오보가 설명을 거듭해도 기사화되어 나왔다.
 
  이에 대해 순직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언론중재위에 9개의 매체를 동시에 제소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평소 해군에 이해가 깊었던 언론인이 넌지시 서툰 대응 방법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당시 필자는 국민 앞에 해군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다시금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두 달 가까운 혼란을 거듭하면서 천안함이 인양됐다. 그러나 6명의 전사자를 끝내 찾지 못했으나 유가족들의 동의하에 2010년 4월 29일 영결식을 치렀다. 민평기 상사의 모친은 북한 경비정을 상대로 다시 싸우라고 보상금을 해군에 기탁해 일명 ‘민평기 기관총’이라는 중기관총을 초계함에 장착하기도 했다. 당시 현역 군인 모두가 민 상사의 모친 윤청자 여사의 생각에 머리를 숙였다.
 
  국방부 민군 합동조사단은 2010년 5월 20일 인양한 함수, 함미 선체의 변형형태와 사고해역에서 수거한 증거물들을 조사한 결과, 천안함은 북한에서 제조한 감응어뢰의 강력한 수중폭발에 의해 선체가 절단돼 침몰했다고 최종 발표했다.
 
  그 근거는 침몰해역에서 수거된 어뢰 추진동력 장치와 선체의 변형형태, 관련자들의 진술내용, 부상자 상태 및 시체검안, 지진파 및 공중음파 분석, 수중폭발의 시뮬레이션, 백령도 근해 조류분석, 폭약성분 분석, 수거된 어뢰부품들의 분석결과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임을 밝혔다. 핵심사안은 천안함은 어뢰에 의한 수중폭발로 발생한 충격파와 버블효과에 의해 절단돼 침몰했으며, 폭발위치는 가스터빈실 중앙으로부터 좌현 3m, 수심 6~9m정도이다. 공격무기는 어뢰로서 북한에서 제조한 고성능폭약 250kg 규모의 CHT-02D 어뢰로 확인됐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질문과 일부 전문가 사이에서 다른 견해가 지속적으로 나왔다. 그중에서도 민군 조사단의 일원으로서 추천된 사람은 암초에 의한 침몰을 주장했고 이는 천안함 전사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혼란을 가중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당시 2함대사 공보실장 김○○ 소령의 고소로 인해 3년에 걸친 재판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모전을 벌이기도 했다. 북한의 도발, 즉 침몰의 원인에 대한 다른 주장과 정부 발표 사이의 차이를 두고 시시비비를 법원이 판단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일부의 그 주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NLL 전사상자 132명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한 합동조사단의 발표와 함께 정부의 각종 외교적인 노력이 있었으나 북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국은 천안함 피격원인에 대해 전략적 모호함으로 일관하는 등 실제로 북한에 대한 압박은 실효적이지 못했다.
 
  그해 중국의 반발을 예상했지만, 한미 정부는 종전 동해상이나 남해상 근해에서 실시하던 연합 해상강습훈련을, 핵 항모 조지워싱턴이 참가하는 가운데 훈련해역을 변경해 서해상에서 군산을 기점으로 근해까지 북상해 대북 응징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실시했다. 당시 중국은 서해상의 미 항모 진입 훈련에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수준에서 입장을 정했다.
 
  한반도는 주변해역 5000km 안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가진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중에서도 군함 간에 해상전투가 진행되는 해역인 서해 NLL은 유일한 초갈등 해역이다. 이 전쟁의 바다에서 2002년 연평해전으로 명명된 남북한 해군 간의 교전이 발생한 이후,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에서까지 해군은 교전 중이던 함정이 침몰하고 지휘관과 젊은 군인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우리 해군의 전사자는 52명이며 부상자는 80여 명에 달한다.
 
  접적해역이라는 바다에서 그 불편함을 인내하고 고속정의 갑판에 떨어지는 바닷물과 매캐한 엔진가스를 들이마시며 긴급 출동과 대기를 반복하는 고된 일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지금도 서해 NLL에 있다. 서해 NLL을 실효적으로 관리하고 지키려는 64년간의 노력은 이처럼 전투원들의 목숨을 담보로 계속되고 있다. 평택 2함대 안보공원에는 침몰했던 참수리 357호정과 천안함이 두 동강 난 채 전시돼 있다. 잊지 말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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