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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제독의 Periscope(잠망경) 〈1〉

“백두산! 백두산! 여기는 한라산!”… NLL 해상에서 취재기자들과 남북한 함정교신 지켜봐

글 : 유영식  전 예비역 해군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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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 연평해전 승전으로 이지스 구축함 사업 가능… 500톤급 유도탄 고속함도 탄생
⊙ 제2 연평해전 교전 대응 부족, 정보전파 묵살 논란으로 홍역 치러… 교전규칙 3단계로 간소화
⊙ 2004년 금강산 초대소에서 열린 남북한 장성급 회의 참석… 3차회담 때 남북 함정 간 충돌방지
    합의

유영식
1962년생으로 해군사관학교를 39기로 졸업했다. 35년9개월간의 군 생활 가운데 17년간을 해군본부와 국방부 대변인실 등에서 정훈장교로 일했다. 2009년부터 5년 동안 해군 공보과장으로 재직하며, 최장수 해군 공보과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2014년 해군 준장으로 해군본부 정훈공보실장(해군 대변인)을 지냈다.
  1999년 6월 15일 아침, 우리 해군 장병들의 숨 가쁜 교신소리와 함께 서해 NLL(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과 우리 해군 참수리 편대 간의 제1 연평해전이 발생했다.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을 동원해 오전 9시7분과 9시20분 두 차례 선체 충돌 공격을 가했다. 북한 경비정은 소총으로 선제 사격을 하다가 25mm 기관포를 발사했으며, 북한 어뢰정 3척도 공격에 가담했다. 이 교전에서 북한 어뢰정 1척이 침몰했고, 420t급 경비정 1척이 대파됐으며, 경비정 4척도 선체에 파손을 입은 채 퇴각했다.
 
  6월 15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 사이의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상 교전 문제가 논의됐다. 북한 측은 남한이 먼저 도발해 왔다고 억지를 부렸다. 심지어 교전이 일어난 곳은 북한 영해라고까지 주장했다.
 
  남북한 함정 간의 교전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우리 고속정이 선택한 밀어내기식 충돌 공격이다. 왜 해군은 적 경비정의 사정거리 내에서 위험을 무릅쓰면서 충돌 공격을 한 것일까? 현대적 전투함정이 충돌 방법으로 영해를 지키는 해상전 사례는 해전사의 시각으로 볼 때 참 생뚱맞은 전술이다. 이는 목재선박 시대의 전투 방식으로, 철선(鐵船) 시대에 들어서는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협 앞에 놓인 무장한 선박이 총격을 가하지 않고 승조원 모두의 생명을 담보로 충돌 작전을 하는 것은 NLL이 정치·군사적으로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장에서 충돌 공격을 가한 당시 편대장 김모 소령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군은 우리 함정이 돌격하는 모습에 경악했다고 한다. 북한 경비정의 함미(艦尾)를 올라타는 과감한 충돌을 북한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평해전酒
 
  당시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햇볕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상태여서 남북한 교전은 여러 고민을 낳게 했다. 남북한 간 교전이 패전으로 종결되면, 국민들은 국군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군과 정부를 비판할 것이다. 북한과의 전투는 이겨놓고 봐야 군대를 유지하고, 군을 통수하는 대통령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1999년 제1차 연평해전은 우리 해군의 승리로 끝났다. 해군은 승전의 기쁨으로 ‘연평해전주’를 즐겼다. 맥주는 서해, 맥주 위에 떠 있는 소주잔은 북한 경비정, 소주는 해군 고속정 40mm 함포에 비유하면서 맥주잔 위에 소주잔을 띄우고 소주잔에 술을 부어 가라앉혀 마시는 ‘격침주(擊沈酒)’라는 지금의 ‘소맥’을 즐긴 것이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거나 지휘계선상의 모든 장병이 무공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그중 북한군이 발사한 총 세 발 가운데 두 발이 방탄조끼, 한 발이 목 부위에 스쳤던 안지영 대위는 지금 대령으로 진급했다. 당시 안 대위는 “지금부터의 삶은 덤이다”라고 말을 했다. 안 대위가 방탄복에 맞은 총탄의 충격에 대해 “‘쿵’ 하는 느낌을 받고 정신을 잃고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 고속정을 지휘했다”고 말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해군이 제1차 연평해전에서 패했더라면 북한과의 교류는 불가능한 상태가 됐을 것이다. 우리 해군이 패했더라면 북한의 도발에 무능하게 대처했다는 비판이 쏟아졌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남북교류를 진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김대중 정부 당시 이지스함 건조 계획 반영에 대해 해군은 이를 승전의 대가로 생각했다. 패전의 군대는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은 동서와 고금을 관통하는 교훈이다. 당시 해군은 이지스 구축함 건조 사업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1척당 건조비, 전투체계, 무장 비용이 약 9800억원이었다.
 
  제1차 연평해전에서 승리하자 이지스 구축함 건조 사업도 탄력을 받았다. 이때 시작해 만들어진 세종대왕함은 2009년 북한의 탄도 미사일을 정확히 탐지했다. 미군의 정보자산 이외에 한국군 자산으로 북한의 미사일을 탐지하는 최초의 탐지전력이 된 것이다.
 
 
  DMZ보다 더 위험한 NLL
 
1999년 6월 제1차 연평해전 때 참수리 325정(오른쪽)이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에 직접 부딪치며 ‘밀어내기’작전을 펴고 있다. 참수리 325정은 11ㆍ10 서해교전에서도 직접 북측 함정과 맞섰다. 사진=조선일보
  제1차 연평해전 이후, 서해에서 교전이 발생한 것에 대해 “NLL의 법적근거는 있는가” “공동 관리구역을 설정하자”는 등 NLL을 둘러싼 안보논쟁이 불붙었다. 당시 언론들은 남북 함정 간 충돌예방을 위한 방안, NLL은 남북기본합의서상에 존재하는 확실한 해상분계선으로서의 기본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두 갈래의 보도를 이어갔다.
 
  당시 중령으로 공보실에 근무하던 필자는 향후 NLL이 국방부와 해군 차원을 넘어, DMZ보다 더한 남북한 간의 대결장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개인적으로 다소 뚱딴지같지만 새만금 간척 사업처럼 바다를 매립해 갈등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제1차 연평해전의 결과, 우리 정부는 NLL은 확실한 해상분계선임을 천명하고, 북한의 NLL 무력화 기도에 대해 강력히 군사적으로 대응한다는 기조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NLL에 대한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잊혔다.
 
  노태우(盧泰愚) 정부 시절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함께 추진된 남북한 군사회담의 핵심은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결이다. 1991년에 체결된 남북한 기본합의서에 명시된 핵심 내용은 해상경계구역 지정(NLL에 대해 실질적 해상분계선으로 북측이 인정했다는 의미)과 불가침 행위, 그리고 무력 사용 금지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남북한이 공동 서명한 것은 남한의 주장에 강력한 근거를 제공하는 기초가 됐다.
 
  북한은 1999년 이후 지금까지 NLL을 놓고 일어나는 심각한 갈등의 과정에서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한 것에 대해 두고두고 후회를 거듭했다고 한다. 필자의 이러한 얘기의 근거는 노무현(盧武鉉) 정부 때 열린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북측 협상단 일원이 우리 협상단 일원에게 과거의 이 서명에 대해 그토록 후회스러워했음을 토로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유도탄 고속함의 탄생
 
2013년 6월 29일 제2 연평해전 11주년 기념식이 열린 경기도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에서 故 윤영하 소령과 황도현 중사의 유가족들이 윤영하함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해군은 제1 연평해전 결과를 바탕으로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우선 당시의 PKM, 즉 참수리 고속정에 대해 보완을 추진했다. 해군이 보유한 PKM의 후속 고속함으로 PKG, 즉 유도탄 고속함이라는 새로운 함형(艦型)을 구상한다.
 
  북한 경비정에 저격수가 있다는 점에서 정장의 지휘 위치가 기존의 노출형에서 방탄으로 보호돼야 하고, 낮은 수심에서 기동이 월등해야 한다는 점에서 워터제트 엔진을 장착했으며, 북한 경비정을 장거리에서 요격하기 위해 함대함 미사일의 탑재를 추진했다. 유도탄 고속함은 500톤급 규모이지만 1000톤급 이상의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고속함으로, 10년 후 해군에 매우 유용한 전력을 제공하게 된다.
 
  훗날 500톤급 이상을 ‘함(艦)’이라고 분류하던 기준에 따라 함정의 이름을 명명했고, 첫 번째 함의 이름으로 제2 연평해전 참수리 357호 정장 고 윤영하(尹永夏) 소령의 이름을 부여했다. 그리고 5명의 전사자 이름을 후속으로 건조되는 5척의 함에 명명했다. 해군이 함에 제2 연평해전 전사자들의 이름을 붙인 이유는 목숨 걸어 서해를 지킨 이분들의 거룩한 정신을 후배 장병들이 이어받겠다는 의지다.
 
  1999년 이후 언제 다시 NLL 선상에서 재충돌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가 지속됐고, 북한 경비정은 수시로 NLL을 침범하면서 우리 해군의 대응태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해군은 무엇보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북한 해군이 언젠가는 반드시 보복의 칼날을 들이댈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북한 경비정의 연간 NLL 침범 횟수는 평균 수십 차례에 이르렀고, 꽃게잡이 성어기인 4월부터 11월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2002년 월드컵으로 남북한 간에 다양한 교류가 진행되고 있었고, 대부분의 국민은 북한이 평화 무드를 깨는 무력도발을 서해상에서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연평해전에서 40여 명의 전·사상자와 경비정 침몰을 경험했던 북한 해군은 드디어 보복을 실행한다. 3년 후 2002년 6월 29일 제2 연평해전이 발발했다. 제2 연평해전으로 명명된 교전은 북한 해군이 치밀하게 계획했다.
 
 
  北, 경비정에 대전차포 달아 보복 준비
 
  북한 경비정 684호와 지원 경비정은 근접전에 대비해 저격수를 준비하고, 지상에서 사용하는 대전차포를 함정에 장착하는 등 무장을 강화했다.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우리 고속정의 대응 기동 방법을 살피고 ‘매의 눈’으로 보복 을 준비했다.
 
  남북한 경비정의 전투 능력을 비교하면, 우리 군 고속정은 월등히 좋은 기동력과 20·40mm 벌컨 등 무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은 우리 고속정을 조기에 무력화시키지 못하면 우리 경비정과 지원 함정들이 대응태세로 전환해 교전의 결과는 우리 해군이 우세한 상태로 마감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보복을 준비한 북한 해군은 짧은 순간 교전을 종료하고, 퇴각하며 치명적 공격을 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평택 2함대사령부에 전시하고 있는 우리 고속정 357호정의 피해 흔적을 보면, 북한의 선제공격이 선체의 수면하를 노린 점을 알 수 있다.
 
  경비정의 엔진을 파괴해 기동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저격수에게 정장을 제1의 타깃으로 삼아 지휘를 못 하게 하는 전술이었다. 저격수로 하여금 우선적으로 당시 정장 대위 윤영하를 저격하게 하고 이어 357호정의 조타실 기관실에 수천 발의 사격을 가했다. 북한 경비정의 선제공격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우리 장병들은 분전했고, 적 경비정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6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참수리 357정은 예인 중 침몰했다.
 
 
  해군이 제작 지원한 영화가 ‘국민영화’가 되다
 
영화 〈연평해전〉은 해군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2015년 6월 24일 개봉해 관람객 600만명을 돌파했다. 용산 CGV에서 포스터를 배경으로 관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교전 결과에 대해 해군 내에서는 경계심과 교전 대응 부족, 국방부에서는 정보전파 묵살이라는 논란이 이어졌다. 우선 경계심의 부족과 후속 공격이 부족했다는 질타는 현장 지원 함정의 지휘관들에게 큰 멍에를 안겼다.
 
  두 번째로 대북 감청부대의 정보보고를 국방부 수뇌부가 묵살했다는 등의 논란은 교전 이후 엄청난 논란을 유발했으며, 여당과 야당 간 정쟁으로 비화했다. 2002년 당시 국방부는 국회 현안 보고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국회의 질타를 감당해야 했으며, 이후 블랙북(Black Book)이라는 정보보고서의 논란은 몇 년 동안 계속됐다.
 
  언론도 둘로 갈라졌다. 제2 연평해전 교전 경과에 대해 보수언론은 교전규칙의 절차 문제와 당시 김대중 정부의 안이한 군사 대비태세, 긴장감의 이완 등의 이유로 젊은 장병들이 ‘적의 제물’이 됐다는 논리를 폈다. 약 3개월이 지나 당시 야당의 비판에 대한 정치적 타협은 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의 사임으로 마감됐다.
 
  제2 연평해전에 대한 합참 전비태세 검열실 주간으로 이루어진 조사 결과는 ‘참수리 357호 승조원들은 북한의 계획되고 기습적인 공격에 6명 전사, 함정 침몰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용맹하게 싸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추서 진급이 이뤄지고, 현양(顯揚) 활동이 뒤이어 진행됐다. 2함대 안보공원에는 같은 자리에 제1 연평해전 승전비에 이어 제2 연평해전 기념탑이 세워졌다.
 
  2002년 제2 연평해전 결과는 정부에 대해 NLL에서 해군 간 충돌 가능성은 상존하며, 향후 남북한 교류 정책에 대해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숙제를 제공했다. 해군과 합참의 서해 NLL 대응 작전에 대한 경각심은 더 한층 높아졌다. 그리고 4단계 교전규칙이 현장에서 기습을 허용했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교전규칙을 4단계에서 3단계로 조정, 초동대응을 강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작전을 주도한 당시 2함대사령관 정병칠(鄭炳七) 제독(소장)은 전역 이후 부하의 전사를 가슴 아파하며 지내다 몇 년 후 폐암으로 사망했다.
 
  2014년 필자는 해군 정훈공보실장으로 재직 중 연평해전에 관한 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책임자로 일했다. 김학순(金學詢) 감독의 영화 시나리오를 몇 번이고 고치고 싶었으나, 영화는 영화로서 접근하자는 생각에 지원에만 전념키로 했고, 영화 지원 장교를 선임하면서까지 촬영을 마쳤다.
 
  최초 모금으로부터 2년이 지나서야 촬영을 마친 영화 〈연평해전〉이 개봉될 무렵, 메르스가 창궐해 고민 고민하면서 개봉일을 늦추기도 했다. 군이 지원한 영화가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지켜보면서 개봉일을 맞이했던 영화 〈연평해전〉. 그 영화는 650만명이 관람한 ‘국민영화’가 됐다.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한 장성급 회의 참석
 
2004년 5월 26일 북한 금강산 초대소에서 남북장성급 회담이 열렸으나 서해상의 우발적인 분쟁 방지 대책에 관한 합의안 도출에는 실패했다. 각각 남측과 북측 수석대표인 박정화 합동참모본부 작전차장(왼쪽)과 안익산 인민무력부 정책국장이 회담 시작 전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김대중 정부 집권기에 두 번의 서해교전이 발생했고, 이를 지켜본 노무현 정부는 앞으로 남북한 교류를 지속해야 하는 입장에서 남북한 교류의 기본은 군사적 충돌 예방이라는 것을 우선적 과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004년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방부, 통일부에서는 서해상의 남북한 함정 간의 우발적 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남북한 군사실무 회의를 격상해 남북한 장성급 회담을 추진했다. 남북한을 번갈아가며 열린 이 회의는 파주와 금강산 초대소에서 진행됐다. 총 3차에 걸쳐 진행된 회의 중 1차는 파주에서, 2차는 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북측 금강산 초대소에서 열렸다.
 
  필자가 참석한 회의는 북한 지역에서 열린 2차 회의였다. 삼청동 남북회담사무소를 출발한 버스는 강원도 고성을 지나 북측 군사분계선(MDL) 선상에 이르자 북한 측의 벤츠와 버스로 갈아탔다. 약 20m 간격으로 비무장 북한군 병사를 3km가량의 도로 양측에 세워놓고 남측 일행을 환영하게 했다.
 
  회의 참가단은 장전항 출입국 관리소를 지나 온정리 금강산 관광호텔을 거쳐 1차선 도로를 따라 약 1km를 산속으로 더 들어갔다 금강산 초대소가 보였다. 초대소 우측 강변에는 수십 채의 방갈로가 있었고, 주변 분위기는 당 간부들의 휴양시설임을 직감하게 했다. 북한 측은 촬영을 일절 금지했다.
 
  금강산 초대소에 도착하자 업무를 보는 박모 선생이 필자를 맞이했다. 초대소 현관 입구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계단과 벽면에 걸린 엄청난 크기의 대형 카펫 형태의 자수가 들어서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1974년에 지은 초대소는 유럽풍의 자재를 사용했고, 각 방마다 은갈색 무늬의 은은한 욕조, 고급 샤워 꼭지 등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공보담당관으로 북측 파트너를 “박○○ 선생”으로 불렀고, 그는 회담 기간 내내 나에게 남측의 정치·사회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했다. 질문지를 만들어서 계획적으로 물어본다는 것을 두 번째 미팅 때 알게 됐고, 나의 목소리를 보이스 레코더로 녹음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내가 “통일부 공무원”이라고 하자, 금세 “국방부 소속의 군인 아니냐”며 “속일 생각 마시라요”라고 했다. 어찌 아는 건지 궁금했으나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남측은 한라산, 북측은 백두산
 
2015년 1월 1일 신년 해상경계태세 점검 P3C에 탑승한 필자(가운데).
  2차 회의 시 남북한 간 합의사항은 남북 장성급 회담을 지속한다는 결과 이외에는 이렇다 할 내용이 없었다. 3차 회의는 남측 설악산에서 하기로 하고 종료했다. 직감적으로 3차 회의 때 무엇인가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설악산에서 진행한 3차 회의 때는 남북한 간 합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이 회의를 통해 나온 핵심적 결과물은 남북한 경비정 간 공용주파수(국제상선 공통망 156.8Mhz, 156.6Mhz)와 발광신호를 활용한 의사소통이었다. 1999년 서해교전 당시 있었던 우발적 무력충돌이 사전방지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원거리에서도 서로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을 얻었기 때문이다.
 
  남측은 한라산, 북측은 백두산이라는 호출부호를 정했다. 당시 합의 사항에 군사분계선상에서 진행하던 대북확성기 방송이라는 강력한 심리전 수단을 중지하는 것이 있었는데 반대가 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남측 장성 대표인 박정화(朴貞和) 해군 준장(해군작전사령관 역임)은 합동참모본부에 근무하는 동료 장성들이 개인적으로 합당치 않은 합의 결과라고 눈총을 준다면서 불편함을 토로했다. 사실 남북한 회의 결과는 현장에 있는 대표 장성의 결정이 아닌 상위의 조정과 협의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장성급 회담의 컨트롤 타워는 청와대의 NSC로서 현장의 남북 군사실무자들은 양측의 의견을 전달하고 마지노선을 지키는 수준의 회의로 진행했을 뿐이다.
 
  남북한 상호 호출부호의 지정과 운영은 심리적으로 남북한 해상 경비 전력 간에 최초로 우발적 충돌을 예방하고자 하는 소통채널을 유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언론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서해바다에 평화의 물결이 넘실거린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정부의 NLL 입장은 불변
 
  국방부는 합의 결과를 보여주는 취재를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국방부에서 새벽 1시에 출발한 취재진을 인천에서 경비정에 태워 오전 11시경 연평도의 NLL에 도착했다. 정해진 날짜와 시각과 위치에서 NLL을 중심에 두고 6척의 남북한 함정이 국제상선 공통망 주파수를 오픈하고 상호간에 호출했다.
 
  현장을 취재하던 연합뉴스 기자는 북한이 응답을 하지 않자 현장 1보 기사를 ‘북한 경비정 통신 무응답’으로 작성했다. 필자가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했더니, 얼마 후 북측 경비정에서 “백두산”이라는 응답이 왔다. 우리 고속정의 통신병이 “왜 늦게 응답하느냐”고 묻자 북측은 “통신기 상태가 안 좋아서 그렇다”고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해왔다. 현장의 우리 해군 장병과 기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남북 해군 간의 교신은 그다지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 간간이 NLL 선상에서 북측 함정과 어선의 항로 착오, 불법어선 확인 등의 사유로 북한 경비정의 NLL 근접 또는 일시적 월선의 경우, 상호 교신이 이뤄졌다.
 
  1999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친 서해상의 교전은 정부의 대북 정책에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이론적으로 정부의 정책은 군사 정책의 상위 개념이다. 따라서 정책에 따라 군사적 대응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영토, 주권, 국민이라는 국가의 3대 요소에 대한 것은 불변의 가치다.
 
  정부의 대북 정책에 따라 변화는 있었고, 대외적으로 표현은 달랐지만 남북한 간의 영토와 영해를 논한 협상에서 어느 정부도 흔들림 없이 북한에 대응했다. 실제로 어떤 사건이 발생해도 늘 그렇게 정책은 발표됐다. 오늘날 서해는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전투의 현장으로 남아 있다. 남북한 교류 정책은 서해상의 군사적 충돌 앞에서 늘 사상누각의 위험을 안고 있다 라는 생각이 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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