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준
1956년생. 고려대 노문과 졸업,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 조선일보 사회부장, 국제부장,
주간조선편집장,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 부위원장,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현 조선뉴스프레스 고문, 한국문화포럼 이사장 /
관훈클럽 국제보도부문상(1999), 체육훈장 백마장(2012) / 《내려올 때 보인다》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오른다》 출간
1956년생. 고려대 노문과 졸업,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 조선일보 사회부장, 국제부장,
주간조선편집장,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 부위원장,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현 조선뉴스프레스 고문, 한국문화포럼 이사장 /
관훈클럽 국제보도부문상(1999), 체육훈장 백마장(2012) / 《내려올 때 보인다》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오른다》 출간
- 저자인 앤드루 솔로몬이 자신의 우울증 기록을 바탕으로기술한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
우울함은 정상적인 감정이다. 인간의 희로애락(喜怒哀樂) 중 하나다. 그러나 우울증은 오로지 ‘슬픈’ 애(哀)의 감정에 집중시킨다. 서서히 희망을 빼앗고 절망을 주입시키는 병이다. 어느날 갑자기 상실감이 몰려오면서 삶의 활동이 정지되고 감정이 무감각해지며 인생 자체가 무의미해짐을 느끼게 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우울증은,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이나 죽음에서 발현된다. 자신의 우울증 기록을 바탕으로 베스트셀러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을 쓴 앤드루 솔로몬은 첫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이요 정상적인 것이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비가 그치면 햇볕이 나듯, 보통 며칠, 길어야 몇 주 지나면 다시 정상 상태로 복귀하게 된다. 그래서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나 몸살로 부르기도 한다.
우울증은 21세기를 대표하는 병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우울증이 21세기 세계 인류에게 가장 큰 부담을 줄 3대 질병 중 하나며, 2020년까지 주요 사망 및 장애 원인들 중 2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우울증 환자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으며, 특히 취업난에 허덕이는 20대 남성 환자 수는 지난 5년간 40% 넘는 증가율을 보였다.
질병은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 독일 베를린예술대 한병철 교수의 철학적 진단은 무척 흥미롭다. 그가 2010년 출간한 베스트셀러 《피로 사회(Mudigkeits Geselschaft)》의 서두를 요약하면 이렇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과거가 박테리아·바이러스중심의 세균성 질환 시대였다면, 지금은 우울증·불안장애 등 신경증(神經症) 질환 시대다.〉
역사 이래 인류를 가장 괴롭혀 온 질병은 세균성 질환이었다. 콜레라·페스트·천연두·결핵·장티푸스·독감 등 병원체(적군)가 침입하면 인체 안에 항체(아군)가 형성돼 싸운다. 세균성 질환은 20세기 들어 항생제 등 면역학 기술의 발달로 크게 약화됐다.
한 교수에 따르면 지금 이를 대신한 것이 우울증·소진증후군(Burnout syndrome) 등 신경증적 질환이다. 이 병들은 내가 나를 공격하는 자학적(自虐的) 특징을 보인다. 자신이 가해자요 피해자다. 공격·방어 중심의 면역학적 방법으로는 퇴치가 안 된다.
한 교수의 책을 접한 2012년에 나는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의 견해에 동감했다. 우울증은 바로 내 자신과의 싸움이다. 엄청난 자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한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21세기는 성과사회다. 신자유주의경제가 지배하는 이곳은 타자가 아닌자기 착취 사회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목표 달성과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완전히 타버릴 때(burnout)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스스로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여기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가 양산된다.〉
바로 내가 그랬다. 끊임없이 목표를 만들어 자신을 채찍질했고 결국 그 피로가 극대화돼 우울증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어느 날 찾아온 장년기의 허탈감과 상실감이 스스로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어 불면의 날이 계속됐다. 신체적·정신적 밸런스는 깨어졌고 공황발작으로 이어졌다. 결국 종합병원의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스스로 버티기에는 한계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나는 지인의 소개로 처음엔 변두리 개인병원을 찾았다. 서너 사람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심 가득한 표정의 40대 아주머니, 백수로 보이는 20대 청년, 30대 초반 여성 등…. 활기 잃은 모습들이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원장이 몇 가지 테스트와 진찰을 마친 뒤 말했다.
“우울증인데 한 1년은 치료 받아야 될 겁니다. 선생님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심신이 지친 것이죠.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쉬세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내 나이 이제 56세. 현역에서 물러나라니….
그는 덧붙였다.
“무릎을 많이 쓰면 연골이 닳듯, 머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뇌세포도 닳고 신경전달물질들이 원활히 공급되지 않아 활동이 둔화되죠. 행복감을 증진시켜 줄 신경전달물질을 인공적으로 공급해줘야 합니다.”
“그게 뭐죠?”
“세로토닌(serotonin)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신경전달물질이죠. 우울증에 걸리면 뇌에서 세로토닌 분비량이 적어져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겁니다.”
“치료 받으면 완쾌되나요?”
내게는 완쾌 여부가 중요했다. 이 지긋지긋한 병을 고치지 못해 마음이 이렇게 다운된 채 평생 살아가야 한다면 정말 힘들 것 같았다.
“이런 병은 어차피 완치란 없고…, 병과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심드렁한 표정에 사무적 말투. 불치(不治)를 선고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매우 실망했다. 의사는 희망 아닌 절망을 주었다.
그는 1주일 분의 수면제와 세로토닌을 처방해 주었다. 나는 의료보험 대신 일반 진료비로 지불했다. 의료보험 기록이 나중에 어떤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집에 와 약을 먹었다. 수면제 덕분에 푹 잘 수 있었다. 난생 처음 세로토닌을 먹은 기분은 묘했다. 내 정신이 화학물질에 의해 지배받는 듯한 느낌…. 무엇이 진정한 내 자아일까. 그러나 약의 효력은 있었다. 머리도 맑아지고 맥박도 좋아졌으며 마음의 그늘도 걷혔다. 아랫배 통증도 사라졌다.
역시 잠이 보약이었다. 이틀 내리 푹 자고 나니 딴 세상이 나타났다. 기운이 솟고 활력이 생겼다. 우울증의 핵심에 불면(不眠)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잠을 못 잔다는 것은 24시간 심신이 쉬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컨디션이 좋아지니 약에 의존하지 말고 자력으로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3일째 되는 날 약을 끊었다.
딱 그때까지였다. 모든 것이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아니 더 나빠졌다. 모든 일이 다 귀찮아졌다. 저녁 때까지 꼼짝 않고 시체처럼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평생 습관이던 신문 읽기도 그만두었다. 세상만사에 대한 흥미가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렸다.
불면이 계속된 어느 날 밤에는 일어나 주위 사람들에게 ‘사과’ 편지를 썼다. 여러모로 도와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보내지는 않았지만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내게 여행을 권유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기분 전환도 되고, 의욕도 생기지 않을까.”
3박4일 계획으로 혼자 차를 몰고 나왔다. 충청도 어느 자연휴양림을 거쳐 경남 함양에 위치한 지리산 자락 마을로 왔다. 여행 내내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고 계속 불면증에 시달렸다. 삼일째 아침 나는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1915m)에 오르겠다고 마음먹었다. 등산로 입구에서 약 8km. 예상 시간은 5시간. 과거에 오른 경험이 있어 어쨌든 올라가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고 땀은 비오듯 흘러내렸다. 결국 2km도 오르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패배자 같은 심정으로 터덜터덜 내려와 등산로 초입 어느 식당 앞 파라솔에 앉아서 막걸리와 파전을 시켰다. 땀을 많이 흘려선지 막걸리 맛이 아주 좋았다. 두 잔 연거푸 먹었더니 취기가 돌며 오랜만에 흥이 났다. 사람들의 활기찬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리고, 멀리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죽어 있던 내 감각기관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우울증이 진행되면 희로애락이 사라지고 목석이 된다. 마음이 ‘사막화’하는 것이다. 몇 달간 나는 웃어 본 적도, 울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희로애락의 감정이 돌아왔다. 기분이 좋아져 막걸리를 두 병 연거푸 마셨다. 숙소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회복되고 있다. 다시 열심히 살 것이다. 하늘도 도울 것이다.”
소리를 냅다 질렀더니 가슴이 시원해지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몇 달간 말라붙었던 가슴에 촉촉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너무나 당연했던 감정과 느낌의 변화가 감각기관을 통해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축복이 느껴졌다.
이날 오후는 모든 것이 정상적인, 아니 매우 행복한 시간이었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눈부셨고, 스치는 산들바람이 시원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산책의 즐거움이 느껴졌고, 마주치는 동네 아이에게 미소를 보여줄 수 있었다.
최근 괴롭히던 변비 증세도 사라졌다. 식욕도 되살아났다. 인근에서 잘한다는 식당을 찾아가 등심구이와 소주를 시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역시 지리산에 오길 잘했어. 산의 정기(精氣)를 받았는지,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어. 좋다. 약기운 말고 자력으로 이겨내 보자.’
그런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
고대하던 잠은 오지 않았다. 또 지옥 같은 불면의 밤과 싸워야만 했다.
방이 답답해 이불을 들고 거실로 나와 잠을 청했다. 10분쯤 지나니 냉장고의 ‘웅’ 하는 소리가 우레처럼 커졌다. 냉장고 전선을 뽑아 버렸다. 속에서 열이 뻗쳐 이불을 차 버렸더니 이번에는 한기가 느껴져 다시 덮어 썼다. 1부터 1000까지 숫자도 세어 보고, 정좌를 하고 단전호흡도 해 보는 등 별의별 짓을 다 해 봤으나 소용 없었다.
서서히 동이 트면서 내 마음은 만신창이가 됐다. 잠깐의 희망은 다시 절망으로 바뀌었다.
다음 날 조찬 강연 때문에 이날은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너무 머리가 어수선해 과연 제대로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10분이면 될 짐 꾸리기에 한 시간 넘게 보내고 차를 몰고 나왔다. 저 멀리 톨게이트(요금정산소)가 보였다.
그런데 도대체 진입로를 찾을 수 없었다. 갑자기 왼편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그리로 가면 안 됩니다. 이리로 오세요.”
어리둥절해 쳐다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요금정산소가 있지 않은가.
가까스로 차를 후진해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 왕복 4차선 도로에 진입했다. 저 앞에서 웬 승용차가 정면으로 다가오면서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렸다. 급히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려 피하니 상대편 운전사가 창문을 열고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야, 죽으려고 환장했니!”
내 차가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차선에서 달린 것이었다. 나는 온 신경을 운전에 집중하며 차를 몰았다. 그러나 의지와 달리,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 내 차는 어느새 또 반대편에서 달리고 있는 것 아닌가. 등골이 오싹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서울행 고속도로 진입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분명히 그쪽으로 갔는데 나는 엉뚱한 길로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러기를 수차례. 계속 길을 잘못 들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뱅뱅 도는 바람에 한 시간 가까이 허비했다.
이건 거의 금치산자(禁治産者) 수준이었다. 간신히 서울행 도로에 진입해 달리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몰려 왔다. 과연 이런 상태로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저 멀리 갓길이 보였다. 차를 세우고 운전석 등받이를 뒤로 젖혀 쉬려 했다. 그러나 다시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다시 차를 몰았다. 갑자기 샤머니즘적 생각이 났다. 악령이나 마귀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토록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것도 처음이었다.
불현듯 세상을 끝내 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처음이었다.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괴롭고…. 인생 전체를 돌아봐도 되는 것도 없고 발전도 없으며 늘 힘들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끝내자. 그게 덜 구차한 방법 아닐까.’
순간적으로 든 자살 충동은 곧 지배적인 생각으로 바뀌었다. 시속 100km. 왼쪽으로 중앙분리대를 넘어 뛰어들까. 아니면 오른쪽 난간을 들이받을까. 어떻게든 바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의 전화였다.
“얘야. 너 어디냐?”
“옛, 어-어머니세요? 저 지리산에 놀러 갔다가 지금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에요.”
“별일 없니? 괜히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걱정이 돼서 전화한 거야.”
순간 가슴에 뜨거운 무엇이 치밀어 올랐다. 평소 어머니는 세심하게 자식을 챙기는 분이 아니셨다. 냉철하고 개인주의적인 분이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전화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전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10여 분 지나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는 지인의 전화였다.
그는 안부와 함께 요즘 어떤 일을 하냐고 물었다.
“좀 쉬고 있습니다.”
그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아, 그래요? 실은 함형에게 맞을 만한 자리가 있어서 알려드리려고요. 미디어 관련 공기업에서 경영진을 응모 중이던데 한번 신청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경력에도 맞고, 잘할 수도 있을 텐데….”
깊은 절벽 아래 떨어진 사람에게 하늘에서 동아줄 내려오는 장면이 연상됐다. 거의 앞날을 포기한 내게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다니. 난생 처음 초자연적인 어떤 느낌을 가졌다.
인생에서는 간혹 인간의 이성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만약 그날 그 시각, 그 두 통의 전화가 없었으면 난 어떻게 됐을까?
새 병원을 찾다
가까스로 서울로 돌아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처음 떠오른 단어가 구사일생(九死一生)이었다. 불과 반나절 사이에 상황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바로 이것이 우울증의 한 단면이다.
많은 이가 일순간 판단에 의해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넜다. 2014년 미국 할리우드의 스타 로빈 윌리엄스가 우울증으로 자살했을 때 나는 그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 등 숱한 영화에서 그는 특유의 인간적이고 낙천적이며 사려 깊은 역할로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부터 지독한 우울증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속으로는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우울증 환자의 특색이다. 특히 정신과에 가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우리 풍토에서 병원에도 못 가고 가족에게 말도 못한 채 혼자 끙끙 앓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삶을 정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10여 년 전 대법원장까지 지낸 우리 사회 원로 인사는 구순을 코앞에 둔 나이에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렸다. 우울증은 사람을 비합리적이고 무모하게 만든다.
서울로 올라와서 본격적인 입사 준비를 했다. 그 공기업 임원직에 응모를 했다. 회사 관계자들과 인터뷰도 했다. 업무 성격상 내게 익숙하고 맞는 일이라, 잘 설명할 수 있었다.
며칠 뒤 고대하던 합격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내심 매우 불안했다. 과연 잘할지, 경영을 이끌어 나갈지…. 자신감이 바닥인 상태였다. 기억력과 이해력이 급격히 쇠퇴했다. 회사 소개 책자도 정신을 집중해야 조금씩 이해될 만큼 머릿속이 산만해져 있었다. 불안감은 회사 직원들이 나를 반대할 것 같다는 두려움으로 발전했다. 노조원들이 출근을 저지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러면 어쩌지? 밀고 들어가? 지금 나로선 도저히 못해….’
갑자기 불안이 나를 지배하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맥박이 빨리 뛰며 땀이 비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손사래를 쳤다.
“당신 왜 그래?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아니고, 노조가 반대할 만큼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
맞는 말이었다. 마음이 다소 놓였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또 다른 불안감이 스멀스멀 들었다.
‘혹시 누군가 악의적으로 지어낸 투서를 보낸다면….’
마치 국회 청문회를 준비하는 장관 후보자나 된 것처럼 온갖 불안을 초대해 최악의 시나리오들을 만들고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속담이 있다. 우울증은 멀쩡한 사람도 제 발을 저리게 만든다. 일종의 불안장애(anxiety disorder) 증상이었다.
나는 아는 의학 전문기자를 통해 임상경험이 풍부한 개인병원을 소개받았다. 강남의 이 병원 원장은 내가 나온 대학의 2년 후배인데도 오히려 한참 선배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마 당시 내가 위축돼 있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나 싶다. 내 증상과 과거 이야기를 들은 원장이 말했다.
“급성인 것 같은데 완쾌될 수 있습니다. 원래 그런 기질이나 병력의 소유자도 아니고 일시적으로 우울증이 찾아올 상황과 연령대입니다. 요즘은 약이나 치료방법이 좋아져 만성 환자도 고치죠. 물론 본인 스스로 이겨내야겠다는 의지, 의사의 처방을 믿고 따라가겠다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고요.”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그의 말투에서 희망과 신뢰를 동시에 느꼈다. 아, 의사는 이래야 된다.
“어느 정도 치료받아야 하나요?”
“넉넉 잡고 1년 정도? 환자마다 다르죠. 더 갈 수도, 단축될 수도….”
“완쾌된다면 전처럼 정상 생활로 돌아올 수 있나요?”
나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우울증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절망감의 시그널을 계속 주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오히려 멘탈이 더 강해지기도 하는데요. 자신의 약점을 알면 더 조심하게 되고, 그래서 노력하다 보면 오히려 더 강해지는 것 말입니다. 성공한 스포츠 선수들을 보면 어렸을 적에 병에 걸려 운동을 시작한 경우가 많아요.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말은 내게 하늘에서 내리는 복음(福音)같이 들렸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관건은 환자의 의지와 자신감입니다. 극복할 수 있다고 마음먹으면 극복할 수 있는 것이요, ‘난 못해’라고 생각하면 못하는 것이죠. 꼭 이겨내야겠다는 마음으로 임하십시오.”
그는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을 분명히 말해 주고 꺼져 있던 전의(戰意)를 되살려 주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이 환해졌다. 희망의 빛이 솟는 것 같았다. 나는 치료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크게 세 가지죠. 잠을 자게 하는 수면제, 자율신경 조절을 통해 불안·초조를 완화시키는 진정제, 그리고 항(抗)우울제입니다.”
그에 따르면, 뇌 속에는 평온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세로토닌이란 신경전달물질이 있는데, 우울증에 걸리면 이 세로토닌 호르몬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때문에 뇌 안에서 세로토닌의 배출을 강화하고 인체 내 흡수를 억제하는 ‘항우울제’를 처방하는 것이다.
지난번 동네병원에서도 세로토닌 치료를 받았는데 3일 먹고 그만두었다고 하자, 원장은 정색을 했다.
“이 약은 소화제 같은 게 아닙니다. 꾸준히 복용해야 효능이 나옵니다. 뇌 속에 세로토닌 양이 증가되면 즐거워집니다. 햇볕이 날 때 기분이 좋죠? 그럴 때 세로토닌 배출이 잘됩니다. 환희, 희열, 쾌락 같은 큰 기쁨이 아니라 작은 기쁨…,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커피 한잔을 나눌 때 찾아오는 편안함, 휴일날 푹 쉴 때 느껴지는 평온감, 친한 사람과 만날 때의 설렘 등이죠. 한마디로 마음의 평화라고 할까, 평상심의 회복이라고 할까. 그런 마음을 찾게 해 드리는 게 치료의 포인트입니다.”
그는 다시 강조했다.
“처방전에 따라 약을 드십시오. 임의로 줄이거나 중단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1주일에 두 번씩 오실 텐데, 본인 상태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효험이 없으면 약 복용량을 늘리겠고, 효과가 좋으면 차츰 줄여 나가다 끊을 것입니다.”
그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의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세요. 죄책감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단호히 차단하십시오. 지금까지 인생 경력으로 보면 어려운 여건을 잘 참아 오셨고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니 좋게 생각하십시오. 세상만사 마음 정한 대로란 말 있죠? 정말 맞는 말입니다.”
그의 환자들 중에는 부유층 환자가 적지 않다고 했다.
“정말 부러울 것 없는 여건을 가지고도 전혀 행복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열 가지 중 아홉 가지가 잘돼도 한 가지가 안 돼 불행해하는 분들입니다. 이것이 우울증입니다. 그러나 남편도 없이 파출부를 하면서 자식들을 키워 나가는 아주머니들에게는 삶이 힘들지언정 우울증이 찾아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오직 자식 잘 키워야겠다, 잘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료 시간은 30분을 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약을 드시는 동안 심리적으로 굉장히 좋아질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 행복감과 자신감이 넘치고 병이 다 극복됐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조심하십시오. 그러다 다시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일종의 조울증 증상인데 당분간 어떤 큰 결정을 내리지 마십시오. 가령 이사를 가겠다든가 직장을 옮기겠다든가 등등 말입니다.”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 순간 원장은 또 덧붙였다.
“술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당분간 안 드셨으면 합니다. 드시더라도 조금만 드세요. 마시고 나면 더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수납 창구에서 나는 의료보험보다 몇 배 비싼 일반 의료수가로 돈을 지불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우울증은,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이나 죽음에서 발현된다. 자신의 우울증 기록을 바탕으로 베스트셀러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을 쓴 앤드루 솔로몬은 첫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이요 정상적인 것이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비가 그치면 햇볕이 나듯, 보통 며칠, 길어야 몇 주 지나면 다시 정상 상태로 복귀하게 된다. 그래서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나 몸살로 부르기도 한다.
우울증은 21세기를 대표하는 병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우울증이 21세기 세계 인류에게 가장 큰 부담을 줄 3대 질병 중 하나며, 2020년까지 주요 사망 및 장애 원인들 중 2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우울증 환자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으며, 특히 취업난에 허덕이는 20대 남성 환자 수는 지난 5년간 40% 넘는 증가율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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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베를린예술대 한병철 교수의 《피로 사회》. |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과거가 박테리아·바이러스중심의 세균성 질환 시대였다면, 지금은 우울증·불안장애 등 신경증(神經症) 질환 시대다.〉
역사 이래 인류를 가장 괴롭혀 온 질병은 세균성 질환이었다. 콜레라·페스트·천연두·결핵·장티푸스·독감 등 병원체(적군)가 침입하면 인체 안에 항체(아군)가 형성돼 싸운다. 세균성 질환은 20세기 들어 항생제 등 면역학 기술의 발달로 크게 약화됐다.
한 교수에 따르면 지금 이를 대신한 것이 우울증·소진증후군(Burnout syndrome) 등 신경증적 질환이다. 이 병들은 내가 나를 공격하는 자학적(自虐的) 특징을 보인다. 자신이 가해자요 피해자다. 공격·방어 중심의 면역학적 방법으로는 퇴치가 안 된다.
한 교수의 책을 접한 2012년에 나는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의 견해에 동감했다. 우울증은 바로 내 자신과의 싸움이다. 엄청난 자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한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21세기는 성과사회다. 신자유주의경제가 지배하는 이곳은 타자가 아닌자기 착취 사회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목표 달성과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완전히 타버릴 때(burnout)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스스로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여기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가 양산된다.〉
바로 내가 그랬다. 끊임없이 목표를 만들어 자신을 채찍질했고 결국 그 피로가 극대화돼 우울증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어느 날 찾아온 장년기의 허탈감과 상실감이 스스로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어 불면의 날이 계속됐다. 신체적·정신적 밸런스는 깨어졌고 공황발작으로 이어졌다. 결국 종합병원의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스스로 버티기에는 한계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나는 지인의 소개로 처음엔 변두리 개인병원을 찾았다. 서너 사람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심 가득한 표정의 40대 아주머니, 백수로 보이는 20대 청년, 30대 초반 여성 등…. 활기 잃은 모습들이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원장이 몇 가지 테스트와 진찰을 마친 뒤 말했다.
“우울증인데 한 1년은 치료 받아야 될 겁니다. 선생님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심신이 지친 것이죠.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쉬세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내 나이 이제 56세. 현역에서 물러나라니….
그는 덧붙였다.
“무릎을 많이 쓰면 연골이 닳듯, 머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뇌세포도 닳고 신경전달물질들이 원활히 공급되지 않아 활동이 둔화되죠. 행복감을 증진시켜 줄 신경전달물질을 인공적으로 공급해줘야 합니다.”
“그게 뭐죠?”
“세로토닌(serotonin)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신경전달물질이죠. 우울증에 걸리면 뇌에서 세로토닌 분비량이 적어져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겁니다.”
“치료 받으면 완쾌되나요?”
내게는 완쾌 여부가 중요했다. 이 지긋지긋한 병을 고치지 못해 마음이 이렇게 다운된 채 평생 살아가야 한다면 정말 힘들 것 같았다.
“이런 병은 어차피 완치란 없고…, 병과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심드렁한 표정에 사무적 말투. 불치(不治)를 선고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매우 실망했다. 의사는 희망 아닌 절망을 주었다.
그는 1주일 분의 수면제와 세로토닌을 처방해 주었다. 나는 의료보험 대신 일반 진료비로 지불했다. 의료보험 기록이 나중에 어떤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집에 와 약을 먹었다. 수면제 덕분에 푹 잘 수 있었다. 난생 처음 세로토닌을 먹은 기분은 묘했다. 내 정신이 화학물질에 의해 지배받는 듯한 느낌…. 무엇이 진정한 내 자아일까. 그러나 약의 효력은 있었다. 머리도 맑아지고 맥박도 좋아졌으며 마음의 그늘도 걷혔다. 아랫배 통증도 사라졌다.
역시 잠이 보약이었다. 이틀 내리 푹 자고 나니 딴 세상이 나타났다. 기운이 솟고 활력이 생겼다. 우울증의 핵심에 불면(不眠)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잠을 못 잔다는 것은 24시간 심신이 쉬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컨디션이 좋아지니 약에 의존하지 말고 자력으로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3일째 되는 날 약을 끊었다.
딱 그때까지였다. 모든 것이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아니 더 나빠졌다. 모든 일이 다 귀찮아졌다. 저녁 때까지 꼼짝 않고 시체처럼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평생 습관이던 신문 읽기도 그만두었다. 세상만사에 대한 흥미가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렸다.
불면이 계속된 어느 날 밤에는 일어나 주위 사람들에게 ‘사과’ 편지를 썼다. 여러모로 도와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보내지는 않았지만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내게 여행을 권유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기분 전환도 되고, 의욕도 생기지 않을까.”
3박4일 계획으로 혼자 차를 몰고 나왔다. 충청도 어느 자연휴양림을 거쳐 경남 함양에 위치한 지리산 자락 마을로 왔다. 여행 내내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고 계속 불면증에 시달렸다. 삼일째 아침 나는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1915m)에 오르겠다고 마음먹었다. 등산로 입구에서 약 8km. 예상 시간은 5시간. 과거에 오른 경험이 있어 어쨌든 올라가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고 땀은 비오듯 흘러내렸다. 결국 2km도 오르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패배자 같은 심정으로 터덜터덜 내려와 등산로 초입 어느 식당 앞 파라솔에 앉아서 막걸리와 파전을 시켰다. 땀을 많이 흘려선지 막걸리 맛이 아주 좋았다. 두 잔 연거푸 먹었더니 취기가 돌며 오랜만에 흥이 났다. 사람들의 활기찬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리고, 멀리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죽어 있던 내 감각기관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우울증이 진행되면 희로애락이 사라지고 목석이 된다. 마음이 ‘사막화’하는 것이다. 몇 달간 나는 웃어 본 적도, 울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희로애락의 감정이 돌아왔다. 기분이 좋아져 막걸리를 두 병 연거푸 마셨다. 숙소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회복되고 있다. 다시 열심히 살 것이다. 하늘도 도울 것이다.”
소리를 냅다 질렀더니 가슴이 시원해지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몇 달간 말라붙었던 가슴에 촉촉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너무나 당연했던 감정과 느낌의 변화가 감각기관을 통해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축복이 느껴졌다.
이날 오후는 모든 것이 정상적인, 아니 매우 행복한 시간이었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눈부셨고, 스치는 산들바람이 시원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산책의 즐거움이 느껴졌고, 마주치는 동네 아이에게 미소를 보여줄 수 있었다.
최근 괴롭히던 변비 증세도 사라졌다. 식욕도 되살아났다. 인근에서 잘한다는 식당을 찾아가 등심구이와 소주를 시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역시 지리산에 오길 잘했어. 산의 정기(精氣)를 받았는지,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어. 좋다. 약기운 말고 자력으로 이겨내 보자.’
그런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
고대하던 잠은 오지 않았다. 또 지옥 같은 불면의 밤과 싸워야만 했다.
방이 답답해 이불을 들고 거실로 나와 잠을 청했다. 10분쯤 지나니 냉장고의 ‘웅’ 하는 소리가 우레처럼 커졌다. 냉장고 전선을 뽑아 버렸다. 속에서 열이 뻗쳐 이불을 차 버렸더니 이번에는 한기가 느껴져 다시 덮어 썼다. 1부터 1000까지 숫자도 세어 보고, 정좌를 하고 단전호흡도 해 보는 등 별의별 짓을 다 해 봤으나 소용 없었다.
서서히 동이 트면서 내 마음은 만신창이가 됐다. 잠깐의 희망은 다시 절망으로 바뀌었다.
다음 날 조찬 강연 때문에 이날은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너무 머리가 어수선해 과연 제대로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10분이면 될 짐 꾸리기에 한 시간 넘게 보내고 차를 몰고 나왔다. 저 멀리 톨게이트(요금정산소)가 보였다.
그런데 도대체 진입로를 찾을 수 없었다. 갑자기 왼편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그리로 가면 안 됩니다. 이리로 오세요.”
어리둥절해 쳐다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요금정산소가 있지 않은가.
가까스로 차를 후진해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 왕복 4차선 도로에 진입했다. 저 앞에서 웬 승용차가 정면으로 다가오면서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렸다. 급히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려 피하니 상대편 운전사가 창문을 열고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야, 죽으려고 환장했니!”
내 차가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차선에서 달린 것이었다. 나는 온 신경을 운전에 집중하며 차를 몰았다. 그러나 의지와 달리,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 내 차는 어느새 또 반대편에서 달리고 있는 것 아닌가. 등골이 오싹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서울행 고속도로 진입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분명히 그쪽으로 갔는데 나는 엉뚱한 길로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러기를 수차례. 계속 길을 잘못 들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뱅뱅 도는 바람에 한 시간 가까이 허비했다.
이건 거의 금치산자(禁治産者) 수준이었다. 간신히 서울행 도로에 진입해 달리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몰려 왔다. 과연 이런 상태로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저 멀리 갓길이 보였다. 차를 세우고 운전석 등받이를 뒤로 젖혀 쉬려 했다. 그러나 다시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다시 차를 몰았다. 갑자기 샤머니즘적 생각이 났다. 악령이나 마귀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토록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것도 처음이었다.
불현듯 세상을 끝내 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처음이었다.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괴롭고…. 인생 전체를 돌아봐도 되는 것도 없고 발전도 없으며 늘 힘들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끝내자. 그게 덜 구차한 방법 아닐까.’
순간적으로 든 자살 충동은 곧 지배적인 생각으로 바뀌었다. 시속 100km. 왼쪽으로 중앙분리대를 넘어 뛰어들까. 아니면 오른쪽 난간을 들이받을까. 어떻게든 바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의 전화였다.
“얘야. 너 어디냐?”
“옛, 어-어머니세요? 저 지리산에 놀러 갔다가 지금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에요.”
“별일 없니? 괜히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걱정이 돼서 전화한 거야.”
순간 가슴에 뜨거운 무엇이 치밀어 올랐다. 평소 어머니는 세심하게 자식을 챙기는 분이 아니셨다. 냉철하고 개인주의적인 분이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전화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전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10여 분 지나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는 지인의 전화였다.
그는 안부와 함께 요즘 어떤 일을 하냐고 물었다.
“좀 쉬고 있습니다.”
그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아, 그래요? 실은 함형에게 맞을 만한 자리가 있어서 알려드리려고요. 미디어 관련 공기업에서 경영진을 응모 중이던데 한번 신청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경력에도 맞고, 잘할 수도 있을 텐데….”
깊은 절벽 아래 떨어진 사람에게 하늘에서 동아줄 내려오는 장면이 연상됐다. 거의 앞날을 포기한 내게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다니. 난생 처음 초자연적인 어떤 느낌을 가졌다.
인생에서는 간혹 인간의 이성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만약 그날 그 시각, 그 두 통의 전화가 없었으면 난 어떻게 됐을까?
새 병원을 찾다
가까스로 서울로 돌아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처음 떠오른 단어가 구사일생(九死一生)이었다. 불과 반나절 사이에 상황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바로 이것이 우울증의 한 단면이다.많은 이가 일순간 판단에 의해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넜다. 2014년 미국 할리우드의 스타 로빈 윌리엄스가 우울증으로 자살했을 때 나는 그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 등 숱한 영화에서 그는 특유의 인간적이고 낙천적이며 사려 깊은 역할로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부터 지독한 우울증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속으로는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우울증 환자의 특색이다. 특히 정신과에 가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우리 풍토에서 병원에도 못 가고 가족에게 말도 못한 채 혼자 끙끙 앓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삶을 정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10여 년 전 대법원장까지 지낸 우리 사회 원로 인사는 구순을 코앞에 둔 나이에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렸다. 우울증은 사람을 비합리적이고 무모하게 만든다.
서울로 올라와서 본격적인 입사 준비를 했다. 그 공기업 임원직에 응모를 했다. 회사 관계자들과 인터뷰도 했다. 업무 성격상 내게 익숙하고 맞는 일이라, 잘 설명할 수 있었다.
며칠 뒤 고대하던 합격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내심 매우 불안했다. 과연 잘할지, 경영을 이끌어 나갈지…. 자신감이 바닥인 상태였다. 기억력과 이해력이 급격히 쇠퇴했다. 회사 소개 책자도 정신을 집중해야 조금씩 이해될 만큼 머릿속이 산만해져 있었다. 불안감은 회사 직원들이 나를 반대할 것 같다는 두려움으로 발전했다. 노조원들이 출근을 저지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러면 어쩌지? 밀고 들어가? 지금 나로선 도저히 못해….’
갑자기 불안이 나를 지배하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맥박이 빨리 뛰며 땀이 비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손사래를 쳤다.
“당신 왜 그래?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아니고, 노조가 반대할 만큼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
맞는 말이었다. 마음이 다소 놓였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또 다른 불안감이 스멀스멀 들었다.
‘혹시 누군가 악의적으로 지어낸 투서를 보낸다면….’
마치 국회 청문회를 준비하는 장관 후보자나 된 것처럼 온갖 불안을 초대해 최악의 시나리오들을 만들고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속담이 있다. 우울증은 멀쩡한 사람도 제 발을 저리게 만든다. 일종의 불안장애(anxiety disorder) 증상이었다.
나는 아는 의학 전문기자를 통해 임상경험이 풍부한 개인병원을 소개받았다. 강남의 이 병원 원장은 내가 나온 대학의 2년 후배인데도 오히려 한참 선배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마 당시 내가 위축돼 있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나 싶다. 내 증상과 과거 이야기를 들은 원장이 말했다.
“급성인 것 같은데 완쾌될 수 있습니다. 원래 그런 기질이나 병력의 소유자도 아니고 일시적으로 우울증이 찾아올 상황과 연령대입니다. 요즘은 약이나 치료방법이 좋아져 만성 환자도 고치죠. 물론 본인 스스로 이겨내야겠다는 의지, 의사의 처방을 믿고 따라가겠다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고요.”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그의 말투에서 희망과 신뢰를 동시에 느꼈다. 아, 의사는 이래야 된다.
“어느 정도 치료받아야 하나요?”
“넉넉 잡고 1년 정도? 환자마다 다르죠. 더 갈 수도, 단축될 수도….”
“완쾌된다면 전처럼 정상 생활로 돌아올 수 있나요?”
나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우울증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절망감의 시그널을 계속 주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오히려 멘탈이 더 강해지기도 하는데요. 자신의 약점을 알면 더 조심하게 되고, 그래서 노력하다 보면 오히려 더 강해지는 것 말입니다. 성공한 스포츠 선수들을 보면 어렸을 적에 병에 걸려 운동을 시작한 경우가 많아요.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말은 내게 하늘에서 내리는 복음(福音)같이 들렸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관건은 환자의 의지와 자신감입니다. 극복할 수 있다고 마음먹으면 극복할 수 있는 것이요, ‘난 못해’라고 생각하면 못하는 것이죠. 꼭 이겨내야겠다는 마음으로 임하십시오.”
그는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을 분명히 말해 주고 꺼져 있던 전의(戰意)를 되살려 주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이 환해졌다. 희망의 빛이 솟는 것 같았다. 나는 치료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크게 세 가지죠. 잠을 자게 하는 수면제, 자율신경 조절을 통해 불안·초조를 완화시키는 진정제, 그리고 항(抗)우울제입니다.”
그에 따르면, 뇌 속에는 평온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세로토닌이란 신경전달물질이 있는데, 우울증에 걸리면 이 세로토닌 호르몬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때문에 뇌 안에서 세로토닌의 배출을 강화하고 인체 내 흡수를 억제하는 ‘항우울제’를 처방하는 것이다.
지난번 동네병원에서도 세로토닌 치료를 받았는데 3일 먹고 그만두었다고 하자, 원장은 정색을 했다.
“이 약은 소화제 같은 게 아닙니다. 꾸준히 복용해야 효능이 나옵니다. 뇌 속에 세로토닌 양이 증가되면 즐거워집니다. 햇볕이 날 때 기분이 좋죠? 그럴 때 세로토닌 배출이 잘됩니다. 환희, 희열, 쾌락 같은 큰 기쁨이 아니라 작은 기쁨…,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커피 한잔을 나눌 때 찾아오는 편안함, 휴일날 푹 쉴 때 느껴지는 평온감, 친한 사람과 만날 때의 설렘 등이죠. 한마디로 마음의 평화라고 할까, 평상심의 회복이라고 할까. 그런 마음을 찾게 해 드리는 게 치료의 포인트입니다.”
그는 다시 강조했다.
“처방전에 따라 약을 드십시오. 임의로 줄이거나 중단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1주일에 두 번씩 오실 텐데, 본인 상태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효험이 없으면 약 복용량을 늘리겠고, 효과가 좋으면 차츰 줄여 나가다 끊을 것입니다.”
그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의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세요. 죄책감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단호히 차단하십시오. 지금까지 인생 경력으로 보면 어려운 여건을 잘 참아 오셨고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니 좋게 생각하십시오. 세상만사 마음 정한 대로란 말 있죠? 정말 맞는 말입니다.”
그의 환자들 중에는 부유층 환자가 적지 않다고 했다.
“정말 부러울 것 없는 여건을 가지고도 전혀 행복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열 가지 중 아홉 가지가 잘돼도 한 가지가 안 돼 불행해하는 분들입니다. 이것이 우울증입니다. 그러나 남편도 없이 파출부를 하면서 자식들을 키워 나가는 아주머니들에게는 삶이 힘들지언정 우울증이 찾아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오직 자식 잘 키워야겠다, 잘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료 시간은 30분을 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약을 드시는 동안 심리적으로 굉장히 좋아질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 행복감과 자신감이 넘치고 병이 다 극복됐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조심하십시오. 그러다 다시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일종의 조울증 증상인데 당분간 어떤 큰 결정을 내리지 마십시오. 가령 이사를 가겠다든가 직장을 옮기겠다든가 등등 말입니다.”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 순간 원장은 또 덧붙였다.
“술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당분간 안 드셨으면 합니다. 드시더라도 조금만 드세요. 마시고 나면 더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수납 창구에서 나는 의료보험보다 몇 배 비싼 일반 의료수가로 돈을 지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