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검·경, 이미 ‘가벼운 죄’로 결론내고 국무부 통보후 후속조치 취하지 않아
⊙ “한국정부가 반대하지 않으면 FBI가 한국에서 윤씨 잡아갈 수도”
⊙ 피해 여성 인턴, 미국 경찰의 조사 기간 동안 한국에 체류
⊙ 피해 여성의 아버지, 한국언론의 선정적 보도에 강한 불만 토로
⊙ 사실상 사건 수사 마무리… 한국 정부, 6월 지방선거후 발표 요청설
⊙ “한국정부가 반대하지 않으면 FBI가 한국에서 윤씨 잡아갈 수도”
⊙ 피해 여성 인턴, 미국 경찰의 조사 기간 동안 한국에 체류
⊙ 피해 여성의 아버지, 한국언론의 선정적 보도에 강한 불만 토로
⊙ 사실상 사건 수사 마무리… 한국 정부, 6월 지방선거후 발표 요청설
미국 워싱턴 DC에 파견돼 있는 한국 특파원들은 지난해 5월 8일 이후 늘 미완(未完)의 취재 숙제를 안고 있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인턴 여성 성추행 사건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8개월, 해까지 넘긴 이 사건의 수사결과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사건 처리의 열쇠를 쥔 미국 연방검찰은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도대체 요지부동이다.
미국의 사법 당국과 국무부 등이 이 사건 처리를 위해 정중동(靜中動) 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미국 검찰이 수사결과를 전격적으로 공식 발표하고,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사법처리에 돌입하는 순간이 바로 내일일 수도 있어 한국 기자들은 늘 잠을 설치기 일쑤다.
수사, 어떤 단계인가
미국 워싱턴 DC 경찰청, 검찰청, 한국과 미국 정부 관계자, 윤 전 대변인 측 변호인 등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몇 가지 사실은 드러난다.
우선 죄목이 사실상 결정됐다. 미국 경찰과 검찰은 그동안 윤 전 대변인의 행위가 ‘경죄(輕罪)’인지 ‘중범죄(重犯罪)’에 해당하는지 수사를 계속해 왔다. 검·경이 내린 결론은 ‘경죄 성추행’이라고 한다. 윤씨는 지난해 5월 7일 워싱턴 DC W호텔 와인바에서 제1차 성(性)추행을 했고, 그 다음 날 호텔 객실에서 제2차 성추행을 했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피해 여성 인턴의 아버지도 지난해 5월 15일 기자와 인터뷰에서 “어디 엉덩이를 한 번 툭 친 것을 가지고 경찰에 신고하고 그러겠느냐”고 말해 제2차 성추행을 문제 삼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미국 검·경은 그러나 제2차 성추행 역시 경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윤씨가 당시 호텔 방에서 알몸 또는 속옷만 입은 상태였으나 피해 여성에게 강제적인 성적(性的)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텔 객실 등 밀폐된 공간에서 성적인 접촉 시도가 있었으면 강간 미수 등 중범죄에 해당된다.
그 다음은 기소 여부이다. 윤씨가 다섯 단계로 분류돼 있는 워싱턴 DC의 성범죄 관련 형법상 가장 낮은 단계인 경죄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검찰은 그를 기소하기로 사실상 결정했다고 수사 관계자가 말했다. 이 사건 수사결과를 넘겨받은 연방검찰청이 ‘기소 동의’ 의견을 내지 않으면 이번 사건은 사법 절차 없이 종결된다. 그러나 비록 경죄이지만 검찰이 윤 전 대변인을 기소하고, 공소를 유지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검찰은 그 상태에서 이 사건 수사 내용을 국무부에 통보하고, 국제법적인 검토 작업을 맡긴 뒤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체포영장 발부 문제도 중요한 결정 사항 중의 하나였다. 미국 검·경은 체포영장 집행이 실제로 이뤄질지 여부를 떠나 일단 영장을 발부 받기로 내부 결론을 내렸다고 수사 관계자들이 설명했다. 검찰이 체포영장을 청구하면 미국 법원은 거의 예외 없이 즉각 현장에서 영장을 발부해 주고 있다. 경죄 체포영장의 유효기간은 발급일로부터 1년이고, 2번에 걸쳐 연장이 가능하며 워싱턴 DC에서만 집행한다. 그러나 윤씨가 체포에 불응하면 경죄 공소시효가 3년이어서 체포영장 시한보다 빠른 2016년 5월 7일에 이 사건은 자동 종결된다.
그날 호텔 방에서 무슨 일이…
기자가 파악한 바로 인턴 여성은 쾌활한 성격이다. 그 여성은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윤 전 대변인이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거리낌 없이 말했다고 한 친구가 기자에게 전해 주었다. 인턴 여성의 친구가 말한 내용이다.
“윤 전 대변인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성적 모욕감을 주는 행위를 계속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그랬다. 결코 일시적·우발적으로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니다. 5월 8일 오전에는 윤 전 대변인으로부터 직접 호텔 방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그 방에 갔던 것이다. 그 방에는 두 사람밖에 없어서 목격자는 있을 수 없다. 그때 그 전에 한 행동과 다 연결이 되는, 여성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윤 전 대변인의 언행이 있었다.”
윤 전 대변인 측은 그의 알몸 노출 의혹과 호텔 방에서 있었다는 제2차 성추행 혐의에 대해서도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윤 전 대변인이 알몸 노출을 했다고 해도 그 행위가 어디서 이뤄졌는지 따져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장소가 포인트이며, 호텔에서는 얼마든지 알몸으로 있을 수 있다고 윤 전 대변인 측이 반박했다. 만약 호텔 복도나 공공장소에서 알몸 노출을 했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호텔 객실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는 얼마든지 알몸 상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호텔 방에 있던 윤 전 대변인이 노크 소리를 듣고 방문을 열어 주었을 때 상황도 중요하다고 한다. 문을 열어 주면서 얼굴만 조금 내밀었는지, 아니면 어느 자세, 어느 각도에서 문을 열었는지도 따져 봐야 하고, 그에 따라 법적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윤 전 대변인이 그 여성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요구하거나, 물리적인 힘을 가하면서 그 여성과 몸싸움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윤 전 대변인 측 주장이다.
워싱턴 DC에 인접한 버지니아주 페어펙스 경찰국의 한 경찰관은 이름과 직책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이렇게 설명했다.
“윤 전 대변인이 호텔 방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이번 사건의 관건이다. 그가 만약 여성 인턴을 호텔로 불러 ‘바바리 맨’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경죄의 범주를 넘어갈 수 있다. 워싱턴과 버지니아주는 바바리 맨을 성 범죄자로 규정하고, 그 명단을 작성해 일반 시민이 알 수 있도록 공지하고 있다. 경찰 당국은 그 리스트를 점검하고, 이들의 추가 행동을 항상 추적하고 있다.
윤 전 대변인이 여성 인턴을 호텔 방으로 불렀을 때 호텔 방문이 닫혀 있었는지 여부도 이번 사건의 성격 규정에 매우 중요한 변수이다. 만약 문이 닫혀 있는 밀폐된 공간에서 윤씨가 옷을 벗은 상태로 인턴 여성의 몸에 손을 댔다면 그것은 강간 미수에 해당된다. 또 밀폐된 공간에 잠시라도 여성이 갇혀 있었다면 그것은 감금, 납치에 해당되는 심각한 범죄이다.”
피해 여성은 수사 진행 기간 한국에 머물러
미국에서 자라는 한인 교포 1.5세 또는 2세를 흔히 트윙키(twinkie)와 파브(FOB)로 분류한다. 트윙키는 겉은 갈색이나 속은 하얀 케이크이다. 겉은 한국인이지만 문화적으로는 미국인에 가까운 사람을 일컫는다. 파브는 ‘Fresh Out of Boat’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말 그대로 배에서 갓 내렸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국 문화와 정서를 그대로 간직한 채 미국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말한다.
미국의 중·고·대학교, 대학원에서 트윙키와 파브는 확연히 구분된다. 서로 문화가 다르기에 두 집단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 학생이 많은 대학에는 흔히 한인학생회가 두 개로 나눠져 있는 곳이 많다. 트윙키들이 결성한 학생회가 있고, 파브가 주축이 된 학생회가 따로 있다.
피해 여성은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원까지 진학한 한인 2세이다. 얼핏 트윙키일 것 같다. 그러나 이 여성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어를 한국에서 자란 또래의 학생처럼 유창하게 구사한다. 이는 곧 부모의 교육과 함께 한국 문화에 대한 스스로의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한인학생회장을 지내고, 대학원에서도 한인학생회의 간부를 맡아 활동하면서도 그 학생은 트윙키와 파브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인 학생의 결속을 다지는 리더로 활약했다.
그 인턴은 대학원 1학년 과정이 거의 끝나 가던 지난해 5월에 성추행 사건을 겪었다. 외교관이 돼 일을 해 보고 싶었던 그 학생이 그 사건 이후 진로를 바꿨는지, 한국에는 정이 뚝 떨어져 버렸는지 궁금했다. 피해 여성의 근황을 취재하던 기자는 ‘조금은 놀랄 만한’ 소식을 들었다.
사건 발생 후 워싱턴 경찰청의 조사에 응하고, 피해자 증언을 몇 차례 한 뒤 그 여성은 미국을 떠났다. 그 학생이 택한 곳은 한국 대구였다. 그곳에서 ‘스터디 어브로드’(Study Abroad) 프로그램으로 공부를 계속했다. 미국 대학은 일정 기간을 해외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 학생은 대학원생이지만 국제관계를 전공하고 있으며 스터디 어브로드 대상 국가로 한국을 선택했다. 이 프로그램은 대체로 한 학기 또는 1년 단위로 운영된다.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 여성은 윤 전 대변인 사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 전문가로 성장하려는 꿈을 접지 않은 것 같다. 그 여성은 미국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는 내내 한국 대구에 체류했다.
이번 사건, 누가·어떻게 수사했나
사건 발생 직후에 한국의 취재진이 워싱턴 DC 메트로폴리탄 경찰청으로 몰려갔다. 이때 경찰청 대변인실은 두 장짜리 문건을 뿌렸다. 그것은 ‘사건-초기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 ‘혐의자가 피해자의 허락 없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며 경범죄 성추행 건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또한 이 초기 보고서에 이 사건 수사 담당자의 명단이 들어 있다.
이 사건은 2013년 5월 8일 12시30분에 전화로 접수됐다. 최초로 받은 사람은 워싱턴 DC 경찰청 소속의 스키너 순경(Ofc. Skinner)이다. 이 순경은 레인 경사(Sgt. Lane)에게 보고했다. 성범죄였기 때문에 이 건은 즉각 경찰청 내 성폭행과(SAU·Sex Assualt Unit)로 넘겨졌다. SAU 소속의 성범죄 전문 경찰관인 크레들 경장(Det. Credle)과 구더리 경사(Sgt. Gutherie)가 이 사건을 맡았다. 이 두 경찰관이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둘은 윤 전 대변인과 피해 여성이 투숙했던 워싱턴 시내 페어펙스 호텔에서 피해 여성을 대상으로 1차 진술을 받았다. 그 결과를 슬레즈 경감(Capt. Sledge)에게 보고했다.
슬레즈 경감은 크레들 경장과 구더리 경사에게 수사를 맡기면서 경찰청 소속의 한국계 미국인 형사를 찾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수행하던 청와대 대변인이 혐의자이고, 피해 여성도 한국계 미국인이어서 한국계 형사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경찰청에서 베테랑 한국계 형사가 사실상의 수사팀장 역할을 수행했다.
수사팀에 속해 있는 경찰관은 기자 전화를 일절 받지 않았다. 경찰청에 문의하면 대변인실로 연락하라고 한다. 대변인들은 앵무새처럼 “현재 수사 중이다”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한다. 대변인실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을 것 같아 이번 사건 수사 담당과인 ‘성폭행과’에 전화를 걸었다. 성폭행과 수사관은 역시 대변인과 얘기하라며 전화를 끊으려 들었다. 일반적인 성범죄 사건 수사 절차라도 알려 달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몇 마디 해 주면서 웹사이트를 알려주고 참고하라고 한다.
그 내용은 이랬다. 워싱턴 DC 경찰청(MPDC)의 ‘성폭행과’는 성범죄 피해자가 18세 이상인 사건을 맡고 있다. 워싱턴 경찰청은 피해자가 18세 미만이면 ‘청소년조사국’(YIB)에 사건을 배당한다. 성폭행과 소속의 성범죄 전문 수사관은 모두 성폭행에 관한 특수 교육 과정을 마친 경찰관이다. 이 수사관들은 성폭행 범죄의 민감성 및 사생활 침해 속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는 경찰관이다. SAU는 성폭행 범죄 사건에 대해서는 피의자와 피해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방식으로 수사를 한다고 설명했다.
또 SAU의 전문 수사관이 성범죄 수사를 할 때 경찰청 내의 ‘피해자서비스과’(VSU) 에 소속돼 있는 피해자 전담 스페셜리스트와 공조하고 있다. 이 피해자 전담 수사관은 성범죄 수사가 이뤄지는 내내 성폭행 피해자와 그 가족에 관한 정보를 수사관에게 제공하는 등 지원 업무를 맡는다. 피해자와 직접 접촉해 ‘범죄피해 보상 프로그램’을 신청하도록 유도하는 일도 피해자 전담 수사관이 맡는다.
경찰관이 성범죄 신고를 접수하면 즉각 사건 현장으로 달려간다. 이때 피해자에게 어떤 성범죄 피해를 입었는지 질문한다. 사건 접수 경찰관이 성범죄 전담 수사관에게 이 내용을 통보하면 성범죄 전담 경찰관도 사건 현장에 출동하도록 돼 있다. 이 성범죄 전문 수사관은 피해자를 상대로 보다 심층적인 인터뷰를 한다. 성범죄 전문 수사관은 또 ‘증거과학수사국’에 연락해 사건 현장에서 증거물을 수집하도록 요청한다.
이런 정도의 뻔한 내용으로는 취재 갈증을 도저히 해소할 수 없었다. 기자는 워싱턴 DC 경찰청에 한국계 베테랑 형제 형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워싱턴 경찰청의 ‘투캅스’
시니어 디텍티브(Senior Detective) 벤자민 오(한국명 오영석), 조셉 오(오영조). 워싱턴 일원에 널리 알려져 있는 워싱턴 경찰청의 형제이다. 그들은 1976년 부친 오덕준(작고)씨가 외교관으로 미국에 부임할 때 따라왔다. 그때가 동생 조셉이 초등 5학년 때이다. 오덕준씨는 군인 출신으로 제11사단장과 제3군단장을 지내다 예편한 뒤 초대 농협중앙회장을 지냈다.
외교관으로 미국에 나왔던 오덕준씨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이 나자 한국으로 서둘러 귀국했다. 그때 두 아들은 미국에 계속 남아 초·중·고교 및 대학까지 다녔다. 형제는 대학 졸업 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워싱턴 DC 경찰청 형사가 됐다. 형 벤자민 오는 워싱턴 DC 시장 경호팀장을 지내기도 했다. 동생 조셉 오는 아시아계 이민자 범죄와 강력범죄 수사로 이름을 날렸고, 현재 경찰청 형사과장을 맡고 있다. 조셉 오는 1999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 자격증도 소지하고 있다. 조셉 오 형사과장은 지난해 5월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장기 근속상을 받았다. 두 형제는 현재 경찰관 생활을 28년가량 했으며 앞으로 2년 정도 일을 더 한 뒤 30년을 채우면 함께 은퇴할 예정이다.
윤 전 대변인 성추행 의혹 사건이 터지자 워싱턴 경찰청은 한국어가 능통한 한국계 형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가해자가 한국인이고, 피해자가 한국계 미국 여성이며 주미 한국대사관과 청와대 등 한국 정부 관리 등 증인과 참고인이 죄다 한국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워싱턴 경찰청은 아시아계 범죄 수사의 최고 베테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조셉 오 형사과장을 차출했다. 조셉 오 과장에게 사실상의 수사반장이 돼 윤 전 대변인 사건 수사를 지휘하게 했다.
기자는 지난해 5월 16일 조셉 오 형사과장을 처음으로 인터뷰했다. 사실 첫 인터뷰를 할 때까지 그가 윤 전대변인 사건 수사팀에 가담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가 워싱턴 경찰청의 강력사건 수사 전문이고, 형사과장이며 성범죄 사건 등을 여러 차례 다뤄 왔기 때문에 윤 전 대변인 사건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 시나리오를 얻으려고 그를 만났다. 조셉 오도 윤 전 대변인 사건의 수사 내용을 일절 공개할 수 없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면서 워싱턴 경찰청의 일반적인 성범죄 수사 관행을 설명하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조셉 오라는 이름이 신문에 큼지막하게 나간 뒤 그는 워싱턴 기자 사회에서 핵심 취재공략 대상으로 떠올랐다. 심지어 워싱턴 DC에 상주 기자가 없는, 한국에 있는 언론사도 국제전화로 오 과장을 취재하려고 경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도 가세했다. 워싱턴의 한국 정부 관계자들도 수사 진전 상황을 파악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 때문에 한국계인 오 과장을 통해 전반적인 분위기를 알아보려 했다.
오 과장은 수사 내용이나 진전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성범죄 수사 관행, 워싱턴 경찰청의 사건 처리 방식, 경찰청과 검찰청의 업무 협력 문제 등 일반적인 사항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한국 기자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한국식 수사 모델을 미국에 그대로 대입하는 중대한 오류를 잡아 주는 데 일조했다. 한국과 미국 간에 법적으로, 관행적으로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한국의 수사 절차나 관행으로 재단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FBI가 한국 가서 윤씨 납치할 수도”
사건 초기에 경찰의 수사권과 검찰의 기소권한을 놓고 혼선이 빚어졌다. 한국의 일부 언론이 ‘워싱턴 경찰청이 검찰의 지휘를 받아 윤 전 대변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 과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 워싱턴 DC에서 경찰관이 검사의 지휘를 받아 사건을 수사하지 않는다. 윤 전 대변인 사건에서는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담당이 된다. 그가 조서를 꾸미면 성범죄 전담 수사관들이 본격 수사를 한다. 또 사건 담당 경찰관이 수사를 마치면 그때 연방 검사에게 모든 수사 기록을 넘긴다. 담당 검사는 이때 기소권한을 행사한다. 담당 경찰관이 피의자 신병 확보를 위해 체포영장 발부 신청서를 내면 담당 검사가 ‘기소 동의’란에 사인한 뒤 담당 검사가 법원에 체포영장을 발부해 달라고 요청을 하게 된다. 검사가 피의자를 기소하고, 재판이 진행되면 사건 담당 경찰관은 ‘검찰 측 수사관’이 돼 재판에 참여한다.”
윤 전 대변인 사건을 수사하는 기간에 대해서도 한국과 미국 간 인식의 차가 컸다. 이번 사건은 극히 단순하다. 윤 전 대변인이 호텔 와인바에서 인턴 여성의 엉덩이를 움켜쥐었고, 그 다음 날 호텔 방으로 그 여성을 불러 제2차 성추행을 했다는 게 의혹의 전부이다. 그런 정도의 수사를 하는 데 최소한 몇 개월이 걸린다는 게 한국인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사실 확인 작업이 쉽게 끝난다고 해서 사건 처리를 빨리 하는 게 절대 아니다. 사건 수사에 관한 한 한국이 ‘속전속결’이라면 미국은 ‘철두철미’이다.
오 과장은 “윤 전 대변인 사건 수사에만 통상 3~6개월이 걸릴 것이고, 늦어지면 1년가량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오 과장의 그런 얘기를 익명의 미국 경찰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하기도 했다.
기자는 그 보도가 나간 뒤 우연히 한국의 종합편성채널 시사 토크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때 교수 출신의 진행자가 신문에 이번 사건 수사가 몇 달 걸릴 것이라는 보도가 있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된다고 얘기했다. 그 진행자 역시 한국의 수사 관행과 경험이라는 잣대로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사 상황을 재단하는 것 같았다.
그뿐 아니다. 기자가 사건 발생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수사가 신속하게 진행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얘기하면 많은 한국 관계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코웃음을 쳤다.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오 과장이 예고한 대로 지난해 5월 8일 사건 신고가 접수됐고, 그해가 다 지나고 새해가 밝았으나 미국 사법 당국의 수사결과 발표가 나오지 않았다.
오 과장은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문제에 대한 오해도 해소해 주었다. 한국에서는 윤씨의 죄목이 경죄 성추행으로 결론이 나면 인신 구속을 하지 않고, 중범죄 혐의를 받아야 체포영장을 발부 받을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오 과장은 “윤 전 대변인이 경죄 혐의를 받아도 미국 검찰과 경찰이 법원으로부터 얼마든지 체포영장을 발부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사건 담당 검사가 윤씨를 기소할 때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있으며 이때 구속 기소를 할지, 불구속 기소를 할지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체포영장의 유효기간을 둘러싼 논란도 불거졌다. 미국 검찰이 경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법원으로부터 발부 받으면 그 유효기간이 1년이다. 이 기간은 두 번에 걸쳐 연장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영장 발부일로부터 3년간 이 영장을 집행할 수 있다는 게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또 경죄 체포영장은 워싱턴 DC 행정 구역 내로 한정이 돼 있다는 것이다.
오 과장은 “일반적으로 그 얘기가 다 맞지만 이 사건이 3년 후에 자동으로 종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오 과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믿기지 않는 얘기를 했다.
“범인 체포와 관련된 미국과 한국 법이 다르다. 한미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라 1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는 범죄자는 서로 신병을 넘겨 주도록 돼 있다. 그러나 이 조약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미국 경찰이 한국으로 도망가 있는 범인을 잡을 수 없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미국 법의 판례와 미국 경찰의 범인 체포 전례를 보면 외국에서도 미국 경찰이 범죄인을 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 경찰이 멕시코에서 마약 사범을 잡아오고 있는 게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미국의 마약 단속 전문 경찰관들이 멕시코에 잠입해 미국으로 마약을 비밀리에 공급하는 멕시코 마약상을 직접 잡아오고 있다.
약간 성격은 다르지만 파나마의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납치 사건을 보라. 미국은 마약 범죄자 체포 등을 명분으로 파나마를 침공해 노리에가를 체포했다. 이런 식의 공개 체포 작전만 있는 게 아니다.
미 연방수사국(FBI)이 해외에서 얼마든지 극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윤 전 대변인의 죄목이 경죄로 결정되고, 한미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른 소환 대상이 아닐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윤씨를 미국으로 보내고 싶어도, 그가 거부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윤씨가 미국에 자진해서 오지 않으면 FBI 요원들이 한국에서 비밀리에 윤씨를 체포해서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윤씨의 미국 송환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런 시나리오가 전개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앞으로 그렇게 할 것이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
미국과 미국인에게 해를 입힌 범죄자를 미국 법에 따라 징벌한 전례와 그 적법성을 보장하는 판례는 얼마든지 있다.”
피해 여성 가족 취재를 통한 조각 그림 맞추기
윤 전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우선 그는 대학 선배이다. 또 영자 일간신문 《코리아타임스》 선배이고, 《세계일보》 선배이기도 하다. 그가 《세계일보》에 입사해서 떠날 때까지 정치부에서 동고동락했다. 그가 정치부장이 됐을 때 기자는 정치부 행정팀장으로 그의 ‘왼팔’ 역할을 했다. 그런 그가 청와대 대변인이 됐고, 박근혜 대통령을 수행해 2013년 5월 7일 워싱턴 DC를 찾았다. 그를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바쁜 일정 탓에 기자는 7일 그를 만나지 못했고, 그 다음 날 ‘사건’이 터져 그가 부랴부랴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가 대통령 방미 행사를 지원하던 인턴 여성을 성추행한 의혹을 받고 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워싱턴 DC 한국 특파원들에게 초특급 비상이 걸렸다. 사건의 재구성, 이게 우리 특파원이 해야 할 일이다. 기자는 그러나 그와의 특별한 인연 탓에 별로 취재하고 싶지가 않았다. 기자에게 늘 형이고, 선배이고, 상사였던 사람의 그 어두컴컴한 스토리를 앞장 서서 캐고 싶지가 않았다.
기자가 소극적인 생각을 하면 반드시 물을 먹게 돼 있다. 아니나 다를까. 각 언론사의 간판 스타 기자들이 워싱턴 DC에 포진해 있기에 몇 번 물을 먹었다. 그 사건을 신고한 인턴의 친구인 주미 대사관 문화원 직원 아버지 인터뷰를 놓쳤다. 그 다음에는 윤 전 대변인이 W호텔에서 인턴 여성과 와인을 마셨을 때 동석했던 운전기사 인터뷰도 놓쳤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더구나 기자는 타사 특파원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워싱턴 DC에 상주하고 있는 ‘고참’이었기에 자책감은 금방 자괴감으로 변했다. ‘짬밥’ 값을 좀 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때 남은 취재 대상은 피해 여성이나 그 가족뿐이었다. 피해 여성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 그리 품이 들지 않았다. 그 인턴의 이름과 졸업한 대학, 현재 재학하고 있는 대학원 등의 정보는 금방 나왔다. 그 여성은 특히 어디를 가든 리더로 활동하는 열성파였다. 대학에 다닐 때는 한인학생회장으로 활동했고, 인근 대학의 다른 한인학생회까지 아우르는 통합 한인 학생 모임을 주도하는 등 리더 중의 리더로 맹활약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한인학생회 임원을 맡았다.
그 학생은 미국에서 태어났음에도 한국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졌던 사실이 하나씩 드러났다. 한국에서 국제행사가 열렸을 때에는 한국으로 달려가 방학 내내 자원봉사를 했다. 한국에서 자원봉사한 경험을 대학 신문에 싣기도 했다. 한국 대학에서 한국어 어학 연수를 마친 것은 물론이다.
그 학생의 친구들을 수소문해 보니 도처에 포진해 있었다. 그 학생의 대학 졸업 연도를 알아내 같은 대학, 같은 학년이었던 한국계 학생들에게 연락했더니 금방 그 학생의 일거수일투족이 드러났다. 대학원 친구들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기자가 왜 그 학생의 인적사항을 알려고 하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 친구들은 대충 짐작하고 있는 눈치였다. 많은 친구가 전화번호나 주소 등을 기자에게 절대 알려 줄 수 없다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기자는 그 학생의 지도교수와도 만났다. 그 지도교수는 기자가 그 학생 얘기를 꺼내자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교수로서 그 어떤 얘기도 해 줄 수 없다며 기자를 쫓아냈다.
사실 기자의 취재는 조각그림 맞추기와 비슷하다. 여러 가지 작은 정보의 파편을 하나하나씩 꿰맞춰 가다 보면 큰 그림이 나오게 된다. 인턴 여성을 아는 여러 사람과 접촉해 보니까 그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 인턴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일은 비교적 간단했다. 대학과 대학원의 한인학생회 명단을 입수하고, 그 학생 친구들에게 전화번호가 혹시 바뀌었는지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언론이 피해자의 신상 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여학생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었지만 그것을 기사로 한 줄도 쓸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피해 여성에게는 문자만 보냈다. 혹시 한국 언론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없었다.
기자는 피해 여성의 부모나 언니를 만나 보기로 작정했다. 이제 피해 여성 본인이 아니라 그 아버지, 어머니, 언니의 연락처가 필요했다. 다시 수소문해 보니 그 가족은 워싱턴 DC 근처에서 10여 년 살다가 그곳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가량 떨어져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간 사람들이었다. 피해 여성의 아버지를 알고 지내는 지인들을 찾아내 주소와 집 전화번호를 받아 냈다.
피해 여성 아버지와의 면담
기자는 사건 발생일인 2013년 5월 7일로부터 1주일이 지난 14일 밤에 피해 여성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아버지가 ‘헬로우’ 하며 전화를 받았다. 영어로 전화를 받았지만 발음을 들으니 한국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기자가 한국말로 용건을 꺼냈다. 피해 여성의 이름을 대며 그 여성의 집 아니냐고 물었다. 그 아버지가 갑자기 영어로 “You got the wrong number”라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전화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집에 직접 쳐들어가는 수밖에.
그 다음 날 아침 회사 동료와 함께 오전 7시에 집을 떠났다. 자동차 GPS(위성항법장치)에 그 집 주소를 넣어 보니 2시간가량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를 타고 가면서 은근한 걱정이 들었다. 오전 9시쯤 도착하면 이미 가족들이 출근을 했거나 집에서 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미국에 사는 절대다수의 교민은 자영업자이다. 자영업자는 가게 문을 열기 위해 새벽같이 집을 비우기 마련이다.
정확히 오전 9시에 집 앞에 도착했다. 집이 특이했다. 미국 주택가에는 흔히 ‘이즈먼트’(easement)라고 부르는 주택 진입용 개인 도로가 나 있는 곳이 있다. 그 집 앞에는 길가에 있는 다른 집 사이에 그 개인 도로가 나 있고, 그 길을 쭉 따라가면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돼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 개인 도로가 비포장 상태이고, 그 길이 몇 십 미터나 길게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길에서 보면 그 집이 전혀 보이지 않고, 이웃집들의 뒤쪽 숲 속에 위치해 있다. 자동차로 한참 들어가 그 집 마당에 도착하니 두 개의 빌딩이 나타났다. 하나는 일반적인 주택이었고, 그 집 앞 마당을 사이에 두고 네모난 별도의 빌딩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빌딩 앞에 ‘Office’라는 영어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 순간, 인턴 여성의 아버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주택가 가정집에 상업용처럼 빌딩이 있는 것도 특이했다. 그 빌딩에서 무슨 비즈니스를 하는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 순간도 잠시, 동료 기자와 함께 그 집 마당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중년의 한 남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한국 사람 두 명이 찾아왔기에 이 사람들이 기자인지, 경찰인지, 대사관 직원인지 가늠하느라 여러 생각이 그 아버지 머릿속을 스쳤을지 모른다.
A 선생님이시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맞게 찾아왔구나 싶었다.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고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A씨는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면서도 몇 가지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A씨는 “어디 엉덩이를 툭 친 것 가지고 경찰에 신고하고 그러겠느냐”는 말을 했다. 워싱턴의 W호텔 와인바에서 일어난 제1차 성추행보다 그 다음 날 호텔 방에서 있었던 제2차 성추행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윤 전 대변인을 민사로 한국이나 미국에서 고소할지 여부가 관심사였다. A씨는 “미국 경찰이 수사하고 있으니 철저하게 할 것이고, 미국 경찰 발표가 나온 뒤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A씨 집 마당에서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A씨가 갑자기 집 안에 있던 골프채를 하나 손에 쥐었다. 짧은 거리에 사용하는 피칭이나 샌드웨지 같았다. 그는 얘기를 나누다 말고 그 골프 채로 마당에 흩어져 있던 공을 가볍게 치는 골프 연습을 했다.
사생활 침해 수준까지 간 언론의 보도 태도
분위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집으로 화제를 돌렸다. 집의 대지가 꽤 클 것 같은데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5에이커(ac)가량 된다고 했다. 5에이커는 6120평이고, 2만234m²에 달한다. 국제축구연맹 (FIFA) 규정 축구장 넓이가 7100m²이니 줄잡아 축구장 3배 크기라는 얘기다.
기자는 그 말을 듣고 피해 여성이 상당한 부잣집 딸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 미국 집 시세를 알아보는 Zillow.com으로 들어가 그 집 가격을 알아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그 집은 워싱턴 DC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큰 도시 옆에 있지만 집값은 워싱턴 DC 일원의 평범한 주택 가격과 거의 비슷했다. 거주 주택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 피해 여성은 평범한 중산층 한인 가정 출신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자꾸 말을 아끼려는 A씨에게 다시 캐물었다. A씨의 부인이 2층 창문 사이로 “아빠, 전화 왔어요. 아주 급한가 봐요”라며 큰 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기자는 그때 정말 전화가 온 줄 알았다. 그러나 A씨가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기자가 기다리다 못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현관 문을 열면 바로 계단이 나오고, 그 계단으로 올라가야 거실이 있는 구조로 돼 있었다. 현관 문에서 A씨를 불렀더니 A씨가 깜짝 놀라며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기자가 머뭇거리며 몇 가지 더 확인할 게 있다고 말했다. A씨는 현관 계단 위에서 기자를 내려다보면서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현관 문을 나서면서 아래쪽을 둘러보니 젊은 여성이나 학생이 즐겨 신을 것 같은 모양새의 운동화 두 켤레가 놓여 있었다. 그때 집 안에 피해 여성 인턴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A씨가 마치 어린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 동물과 비슷한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그 집에서 빠져나오면서 전화가 왔다고 남편을 불러들인 피해 여성 어머니의 기지가 떠올랐다. 남편이 기자들과 나누는 얘기에 몹시 신경이 쓰였기에 남편이 더 이상을 얘기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가 상당히 교양 있고, 지혜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시간으로 지난해 5월 17일 자에 피해 여성 아버지 A씨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워싱턴 한국 특파원 사회가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한 분위기로 급변했다. 한국 기자들은 취재망을 총 가동해 그 피해 여성 부모의 집을 찾아 나섰다. 기자에게 직접 물어본 동료 특파원도 상당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자는 그 집 주소를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게 피해자 가족에게 기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자는 문제의 인터뷰를 내보내면서 작은 실수를 범했다. ‘A씨는 워싱턴 DC에서 자동차로 2시간가량 떨어진 버지니아주 자택에서 인터뷰를 가졌다’는 대목을 기사에 포함시켰다. 워싱턴 일원에 거주하는 사람이면 그곳에서 2시간 떨어져 있는, 한인이 다수 거주하는 도시는 딱 1개밖에 없다는 걸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꼭 그 힌트가 없었다 해도 한국 기자들이 그 집 주소를 알아내는 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피해 여성 아버지 인터뷰가 나간 다음 날부터 그 집에 한국 기자들이 몰려가기 시작했다. 후속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다.
A씨는 단호했다. 더 이상 기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지켰다. A씨는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들어오면서 한국 기자가 탄 차량이 보이면 차를 돌려 집 밖으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운 좋게 A씨와 조우한 기자는 신변 보호를 위해 경찰을 부르겠다는 험악한 경고를 들었다고 한다.
밤 11시께 그 집을 찾아간 기자는 그 집에 불이 다 꺼져 있고, 인기척이 전혀 없더라고 했다. 아마 기자를 피해 그 가족들이 친지 집이나 호텔로 피신을 갔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 기자들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경쟁을 하다 보니 사단이 났다. 한국의 모 텔레비전 방송 취재 기자가 카메라 팀을 이끌고 그 집으로 가서 집 입구부터 집 전경까지 카메라에 담아 뉴스 시간에 내보냈다. 미국에 사는 많은 교포들도 그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 방송 뉴스를 본 A씨의 지인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기자에게 전화했다.
그 지인은 A씨와 그 가족을 잘 알고 있고, 기자와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다. 그 지인이 모 방송의 보도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가 보면 알겠지만 그 집은 특이하게 생겼다. 미국에서는 모임을 주로 집에서 갖기 때문에 그 집에 가 본 교민이 많다. 그 뉴스를 보고, A씨가 피해 여성 아버지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 한국의 방송이 무책임하게 그렇게 보도를 해도 되느냐. 이것은 명백한 사생활 침해이다.”
워싱턴 경찰청 대변인들과 한국 기자들이 함께 돈 쳇바퀴
워싱턴의 한국 기자들은 대체로 정치, 외교, 통상 기사를 쓴다. 사건, 사고 기사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발생하는 대형 사건, 사고는 미국 언론이 집중적으로 취재하고 있어 미국 언론을 참고해서 기사를 작성할 때가 많다. 아시아나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추락했을 때처럼 한국과 관련된 사고가 났을 때에는 현장에서 직접 취재하기도 한다.
윤 전 대변인 성추행 의혹 사건은 워싱턴 기자들에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특이한 취재 경험을 제공했다. 핵심 취재 대상 기관이 워싱턴 DC 경찰청과 연방 검찰청이고, 미국 경찰과 검찰의 수사 상황을 알아내야 하는 게 임무였다. 백악관, 의회, 국무부, 국방부, 무역대표부(USTR) 등에 익숙한 이곳 기자들에게 경찰청과 검찰청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워싱턴 경찰청과 검찰청이 기자들의 취재를 사실상 원천 봉쇄했다. 수사팀에 대한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다. 경찰청 관계자들은 기자라는 신분을 밝히면 무조건 대변인과 얘기하도록 했다.
워싱턴 DC 경찰청에는 슈라이 레언, 그웬돌린 크럼프, 폴 맷캐프 대변인이 번갈아 가며 근무했다. 이들에게 수사 상황을 묻는 질문을 하면 언제나 똑같은 답변을 반복했다. 지금 수사 중이니 그 어떤 것도 확인해 줄 수 없다는 게 대변인들의 일관된 답변이었다.
윤 전 대변인이 어떤 혐의를 받고 있으며 수사가 언제 끝날지 등등 기자들의 의문 사항은 끝이 없었지만 경찰청 대변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현재까지 발표할 게 없고, 진전된 사항이 있으면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찰청 대변인실과 접촉하는 것은 언제나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감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기자로서는 혹시 대변인이 다른 얘기를 할지 몰라 이번 사건이 발생한 직후부터 거의 매일 습관처럼 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 기자들도 지치고, 대변인들도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었다. 기자는 어느 날 워싱턴 경찰청 대변인실에 제안을 했다. 경찰청에 매일같이 문의를 하는 기자들의 이름, 소속 회사, 연락처 등을 취합해서 경찰청이 사건 수사 진전 상황을 브리핑할 때 미리 연락해 주면 매일같이 반복되는 확인 전화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여성인 슈라이 레언 경찰청 대변인이 감정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목소리로 “우리 경찰청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이번에는 그런 연락망을 가동하면 서로 좋지 않겠느냐고 따졌다. 레언 대변인은 “그러지 말고, 궁금하면 지금처럼 언제든 전화해라. 우리가 언제든지 전화를 받아 주겠다”고 한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경찰청의 대변인들과 한국 기자들이 함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소모전을 무한 반복하다가 어느 날 경찰청 대변인에게 다시 한 번 같은 제안을 했다. 그들도 지쳤는지 이번에는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을 남겨 놓으라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 수사가 사실상 종료될 때까지 경찰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미국 검찰청의 기자 상대 방법
경찰청이 지난해 7월 말에 수사 기록을 연방 검찰청에 넘긴 뒤에 워싱턴 경찰청은 공을 검찰청으로 넘겼다. 미 법무부 산하 연방 검찰청 대변인은 윌리엄 밀러이다. 그는 처음부터 한국 기자들이 전화를 하면 이름, 회사, 전화번호, 이메일을 남기라고 했다. 밀러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먼저 당부했다. 힘들게 매일같이 전화하지 말고, 연락처를 남겨 놓으면 연락해 줄 테니 안심하고 기다리라고 한다.
그래도 미심쩍어 밀러 대변인에게 전화를 하면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말 이외에는 해 줄 얘기가 없다”고 매번 같은 소리를 한다. 밀러 대변인은 그래도 전화를 꼬박꼬박 잘 받을 뿐 아니라 전화 메시지를 남기면 반드시 리턴 콜을 해 주고, 이메일을 보내면 답신을 보내는 일을 잊지 않는다. 밀러 대변인의 성실한 태도는 감동적이었지만 취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밀러 대변인은 “오늘도 아무런 진전 상황이 없다”는 말 이외에 다른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다.
조셉 오 형사과장에게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미국 경찰청을 상대로 어떻게 취재해야 하는지를. 오 과장은 한국 기자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지만 경찰관에게 수사 중간에 그 내용을 알려 달라는 것은 미국의 관행에 맞지 않고, 법에도 저촉된다고 잘라 말했다.
“수사 내용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사건 담당 수사관들과 수사팀의 직속 상관, 담당 검사뿐이다. 그 외에 누구도 수사결과를 알 수 없도록 돼 있다. 만약 수사결과가 유출되면 담당 수사관 등이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한국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 미국 경찰이 그 점을 의식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정당하게 이 케이스를 처리하면 그뿐이다. 수사관은 수사 마무리를 위해 윤씨의 신병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혐의자 진술 및 사실 확인 작업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사관은 이를 위해 윤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법원으로부터 발부 받는 것을 목표로 수사를 진행했다. 혐의자를 체포해서 24시간 안에 조사를 마치고, 그 결과를 담당 검사에 넘기면 수사관의 임무는 끝난다. 그때부터는 경찰도 검찰의 감독을 받는다. 그렇지만 윤씨를 체포하기 전까지 모든 수사에 관한 권한은 경찰이 행사한다.
담당 수사팀이 윤씨의 죄목을 결정해도 그것이 최종 확정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담당 검사와 협의 과정을 거쳐 죄목을 확정한다. 검사는 피의자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면 법정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그에 합당한 죄목으로 혐의자를 기소해야 한다. 검사가 담당 경찰 수사팀에 증거나 자료 등을 추가로 확보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담당 검사와 경찰관이 체포영장 발부 문제를 놓고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경찰관이 체포영장을 발부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하려면 담당 검사가 ‘기소 동의’란에 사인을 해 줘야 한다. 그래야 담당 경찰관이 그 서류를 가지고 법원에 가서 판사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 받아 이를 집행하게 된다. 혐의자 체포 권한은 경찰에 있다. 그러나 담당 검사가 ‘기소 동의’를 거부할 수 있다. 경찰은 그렇게 되면 체포영장 없이 피의자를 불러 조사를 마치게 된다.
담당 검사가 윤씨의 체포영장에 기소 동의를 했다는 것은 이 사건을 형사재판으로 끌고 가겠다는 뜻이다. 검찰과 경찰이 여기까지 와야 사건 처리의 윤곽이 드러난다. 검사의 동의를 받아 수사 담당 경찰관이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 받는 그 시점에 검찰 또는 경찰이 윤씨를 무슨 죄목으로 기소할지 짤막하게 언론에 발표한다.
이때까지도 수사 당국은 상세한 수사 내용을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재판을 해서 반드시 혐의를 입증하고, 혐의자를 사법처리해야 하는 게 검사의 임무이다. 그런 검사가 피의자의 혐의 내용을 사전에 공개하면 피의자와 변호인 측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 들 것이다. 그러니 윤씨의 자세한 혐의 내용은 재판 과정에서 비로소 드러나게 돼 있다. 한국 기자들이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혐의 내용을 알려고 든다. 미국의 수사와 재판 시스템을 고려하면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사건의 1차 피해자는 미국이지 인턴이 아니다
이번 수사는 성격 급한 한국인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이 아닌 것 같은데도 미국 수사 당국은 부지하세월로 시간을 끌었다.
조셉 오 과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일반인의 성범죄 사건이 아니다. 한국의 대통령 수행 고위 공직자가 연루돼 외교적인 문제가 개입돼 있다. 한미 범죄인인도조약 등 법적인 문제를 정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었다. 워싱턴의 경찰과 검찰은 혹시라도 실수를 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이 사건을 다뤄 왔다.
윤 전 대변인이 외교관으로서 면책특권을 받을 수 있는지도 면밀하게 따져봐야 했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완벽하게 일을 하자는 자세로 임했다. 엉터리로 수사했다는 비난을 받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우리는 혐의자를 기소할 수 있도록 수사를 해 왔다.”
수사가 장기화하면서 워싱턴 경찰청 안팎에서는 윤 전 대변인과 피해 여성 간 모종의 합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뜬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기자가 아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윤 전 대변인 측이 피해 여성과 접촉해 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 측도 일절 피해 여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 미국 국무부는 주미 한국대사관에 “피해자 또는 그 가족과 접촉하지 말라”고 요청했었기 때문이다.
오 과장은 피해 여성 측의 태도나 입장이 이번 사건 수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건은 기본적으로 형사 사건이다. 피해 여성 측이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경찰이 사건 수사에 착수한 이상 피해자는 더 이상 수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윤 전 대변인이 미국에서 한인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때 제1차 피해자는 미국이고, 제2차 피해자가 그 여성이라는 게 미국 경찰 당국의 기본적인 인식이다. 그 피해 여성은 신고를 취소할 수 없다. 만약에 그 피해 여성이 수사에 영향을 미치려 하거나 수사 및 향후 재판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면 사법 당국으로부터 구금 등의 처분을 받게 된다.”
사건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피해 여성 측은 언론과의 접촉을 극구 꺼렸다. 미국에서 30년가량을 산 피해 여성의 부모가 사건 수사 중에 언론에 입장을 밝히면 수사 과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 과장은 피해 여성의 언론 접촉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여성이 언론에 입장을 발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여성의 자유다. 경찰이 말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본인에게 득이 될 게 없지 않은가. 피해자 측이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사건에 관해 얘기하면 법정에서 그 발언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법적으로나 실질적인 득실을 고려할 때나 피해 여성은 할 말이 있어도 재판까지 기다리는 게 좋다.”
미국 수사 당국이 수사 상황에 대해서는 일절 알려주지 않았지만 한국 기자들이 매일같이 경찰청과 검찰청에 체크를 했기 때문에 중요한 변화의 흐름을 감지할 수는 있었다. 우선 워싱턴 DC 경찰청은 지난해 5월 8일 수사에 착수한 뒤 7월 24일에 수사결과를 검찰에 넘겼다고 확인했다. 수사결과가 검찰에 넘어간 날짜가 24일인지 알 수는 없으나 워싱턴 경찰청 대변인실은 24일부터 기자들의 전화를 검찰청으로 돌렸다. 이는 곧 경찰청이 3개월 반 이상 이 사건 수사를 계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건을 넘겨받은 연방 검찰청은 7월 말부터 8월이 끝나갈 때까지 이 사건을 움켜쥐고 있었다. 기자가 검찰청과 경찰청 관계자들에게 지난해 9월 10일에 확인해 본 결과 이 사건은 국무부로 넘어가 있었다. 이 사건을 국무부가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수사 당국의 한 관계자는 이 사실을 당분간 기사화해서는 안 된다고 누차 강조했었다.
기자가 이 사건이 국무부로 넘어갔다며 그 배경을 취재하려고 한국 정부 당국자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정부 당국자들은 국무부가 사건 처리에 개입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 당국자들도 이 사건이 국무부로 넘어가 있는 사실만큼은 나중에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윤 전 대변인의 변호를 맡은 김석한 애킨 검프 수석 파트너의 영향력이 이 사건 수사가 장기화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김 변호사가 속한 애킨 검프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막강한 로비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대형 로펌이다. 이 로펌이 연방 검찰청을 상대로 검찰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사건 처리 속도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관측이 나왔다. 김 변호사는 이 사건이 대중의 뇌리에서 어느 정도 사라질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게 윤 전 대변인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경죄인가, 중범죄인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수사가 종결될 때까지 기자들이 반드시 알아내야 할 핵심 중의 핵심이 윤 전 대변인의 혐의 내용이다. 죄목이 경죄와 중범죄 중에서 어느 쪽으로 판명이 나느냐에 따라 이번 사건의 전개 양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만약 경죄이면 한미 범죄인인도 대상 범죄가 아니어서 윤 전 대변인이 한국에서 버티고 있으면 실질적인 후속 절차를 진행하기 어렵다. 반면 중범죄 혐의를 받으면 윤 전 대변인이 미국 워싱턴 DC로 와서 재판을 받는 스펙터클 법정 드라마가 전개된다.
아마 한국 기자들이 워싱턴 경찰청과 검찰청 및 윤 전 대변인의 변호인인 김석한 변호사,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취재를 할 때 경죄인지, 중범죄인지 물어보지 않고 넘어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김석한 변호사와 한국 정부 측은 경죄 쪽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그러나 워싱턴 경찰청과 검찰청 관계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죄가 될 수도 있고, 중범죄가 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 답을 알고 있는 미국의 경찰과 검찰이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잡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자들로서는 끝까지 양쪽 가능성을 모두 열어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석한 변호사는, 사건 경과를 물어볼 때마다 “왜 그렇게 한국 기자들이 이 사건에 신경을 쓰느냐”고 반문했다. 기자가 사회적으로 관심 있는 사건이 아니냐고 반문하면 김 변호사는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고 단언했다. 김 변호사를 상대한 취재는 늘 이렇게 첫 단추부터 어긋났다. 김 변호사는 한국 기자들이 신경을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사건은 한마디로 해프닝이다. 지난해 5월에는 윤씨가 청와대 전 대변인이었기 때문에 큰 이벤트로 여겨졌다는 점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 민간인이다. 또 피해 측면에서 봤을 때에도 심각한 수준의 범죄가 발생했던 게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조용하게 해결하는 게 모두에게 좋다.”
그가 민간인이 됐다 해도 당시의 성추행 혐의가 달라지는 게 아니지 않으냐고 기자가 따졌다. 김 변호사는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윤 전 대변인이 경죄에 해당하는 일을 저질렀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주미 한국대사관의 정부 관계자들도 경죄로 결론난 것 같다고 기자들에게 귀띔했다. 수사결과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미 범죄인인도조약까지 검토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 여성 측과 미국 경찰관들의 입장은 달랐다. 피해 여성의 아버지 A씨는 지난해 5월 15일에 기자와 만나 “어디 엉덩이를 한 번 툭 친 것 가지고 그랬겠느냐”며 그보다 심각한 성추행이 있었음을 강력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워싱턴 경찰청의 폴 맷캐프 대변인은 경죄인지, 중범죄 혐의인지 물어보면 언제나 같은 대답을 했다. 그는 “사건 보고서에 경죄로 돼 있지만 경찰이 수사를 마친 뒤에 어떤 죄목을 적용할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속보다 정확을 강조하는 미국식 수사
이번 사건 수사에 참여한 워싱턴 경찰청의 조셉 오 형사과장은 경죄인지, 중범죄인지 여부를 놓고 한국 언론이 널뛰기 보도를 계속하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 경찰이 한국 언론사가 보도한 기사 내용을 모두 다 보고 있다. 수사결과는 수사가 완전 종결될 때까지 누구도 공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이 여러 가지로 보도하고 있더라.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수사 내용을 언론에 흘리면 그 정보를 흘린 경찰관은 파면을 당하거나 징역을 살게 돼 있다. 그러니 누가 수사 과정을 공개하겠느냐.”
오 과장은 경찰청 사건 보고서에 ‘경죄, 성추행’이라고 돼 있는 이유도 이렇게 설명했다.
“사건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사건의 모든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경찰관은 처음에 들은 신고 내용만을 토대로 피해자의 허락 없이 엉덩이를 만진 경죄 사건이라고 기술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제목을 단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성범죄 전문 수사관이 추가 수사를 할 때 죄목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 여성의 신체를 한 번 만졌는지 아니면 두 번 만졌는지에 따라서도 죄목이 달라질 수 있다. 또 인턴을 호텔 방으로 부른 정황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리가 수사를 할 때에는 일련의 행동을 연결해서 전체 그림을 보려고 한다. 행동을 하나씩 나눠서 보는 게 아니다. 행동의 패턴이 범죄의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 전체적인 행동을 보았을 때 경죄인지, 중범죄인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한때 검·경이 죄목을 놓고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경찰은 경죄로 결론을 냈으나 검찰이 중범죄 쪽으로 몰아 가려 한다는 얘기도 퍼졌다.
오 과장은 그 소문을 확인하려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검찰과 경찰이 견해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추측일 뿐이다. 수사권을 행사하는 경찰이 수사를 마치면 무슨 죄목을 붙이는 게 좋을지 입장을 정해서 검찰에 결과 보고서를 넘기는 것은 사실이다. 검찰은 그 보고서를 검토하면서 향후 전개될 형사재판에서 승산이 있는 죄목을 붙여 혐의자를 기소한다. 이때 검찰이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반드시 재판에서 이겨야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혐의자가 가장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가장 높은 단계의 죄목을 붙이는 것이다. 경찰도 혐의자가 가장 강력한 처벌을 받도록 기소하는 데 전적으로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만약에 검찰이 혐의자의 처벌 수위를 높이기 위해 경찰에 보강수사를 요구할 수도 있다. 경찰과 검찰이 이런 협의와 조정 과정을 거쳐 최종적인 죄목을 결정하면 검사가 기소 절차를 밟는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는 못한다. 죄목은 경찰이 법원으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 받을 때 그 체포영장에 명확하게 나와 있다.
죄목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내용을 죄목으로 정한다. 경죄와 중범죄가 종이 한 장 차이로 갈릴 수가 있다. 경죄와 중범죄가 섞여 있다면 당연히 중범죄로 가는 것이다. 체포영장에 경죄의 내용을 열거하지는 않지만 재판 과정에서 범죄의 상세한 내용이 드러나게 된다.”
오 과장은 또 한국 기자들이 경죄인지, 중범죄인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미국 경찰 당국은 그런 문제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경찰 당국은 정정당당하게 이 케이스를 수사하겠다는 입장을 지켰다. 경죄인지, 중범죄인지 성격 규정을 먼저 하고 수사하는 게 아니다. 수사를 해 보고, 어떤 결론이 나오는지 따져 보는 것이다. 우리는 수사 마무리를 위해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체포영장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체포영장을 집행할 수 있는지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또 공소시효 문제로 체포영장을 집행할 수 없다는 점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영장이 떨어지면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집행하겠다는 게 우리의 기본 입장이다.”
한국의 6월 지방선거와 수사결과 발표 시점
미국 사법 당국과 국무부가 가장 신경쓰는 대목은 윤 전 대변인의 법적 신분이다. 미 국무부가 이번 사건에 개입한 것도 그의 신분 문제에 대한 외교적 판단 때문이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국무부가 몇 개월에 걸쳐 윤씨 사건과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고, 법적인 검토 작업을 했지만 국가 수반의 미국 방문을 수행한 대변인과 같은 고위 공직자가 연루된 유사 사건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특히 워싱턴 경찰청과 검찰청이 윤 전 대변인의 혐의를 성범죄의 5단계 중에서 가장 수위가 낮은 ‘경죄 성추행’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요란한 사법처리에 국무부가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의 고위 공직자가 미국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대체로 일반에 공개하지 않은 채 양국 정부가 협의해서 ‘조용히’ 처리해 왔다. 물론 스트로스 칸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성추문 사건 등 일반에 널리 알려진 사건은 예외이다. 칸 전 총재는 2011년 5월 뉴욕의 한 호텔에서 알몸 상태로 있다가 호텔 여성 청소원을 성폭행하려 했었다. 뉴욕 경찰은 칸 전 총재가 탑승한 비행기가 이륙하기 10분 전에 그를 체포하고, 뉴욕의 한 아파트에 보호 수감했었다.
미국 경찰과 검찰 및 국무부는 윤씨에 대한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는 쪽이라고 한다. 특히 한국 정부가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신속한 수사를 미국 정부 측에 요청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로서도 윤씨를 기소하는 데 따른 외교적 부담을 덜 수 있게 됐다고 이 소식통이 설명했다.
남은 문제는 기소 시점이다. 이번 사건 수사가 장기화하고 해를 넘기면서 미국 사법 당국의 윤 전 대변인 기소 시점이 한국 내에서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커졌다. 바로 6월로 예정된 한국의 지방선거 일정 때문이다. 통상 성추행 사건 수사에 1년 정도 소요된다면 이번 사건 수사 발표가 사건 발생일인 5월 7일께 나올 수 있다. 한국의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미국 측이 윤 전 대변인 사법처리 작업에 착수하면 한국의 선거 분위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 사법 당국이 윤 전 대변인 기소 시점을 6월 지방선거 이후로 늦춰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이 말했다. 특히 한국 지방선거의 열기가 후끈 달아오를 때 미국 검찰과 경찰이 이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지는 말아 달라는 게 한국 측의 주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 처리의 열쇠는 현재 미국의 검찰이 쥐고 있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미국 국무부가 한국의 지방선거를 의식해 수사결과 발표 시점을 조절하는 게 좋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이를 검찰에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미국 검찰과 경찰이 이번 사건의 정치·외교적 파장까지 고려하지는 않고 있는 것 같다”면서 “한국의 지방선거를 의식해 미국 사법 당국이 윤씨의 사법처리 시점을 조정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미국 검찰이 올해 상반기 중에 윤씨를 기소할 것이라는 게 워싱턴 외교가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인터뷰] 윤창중 사건 맡은 김석한 변호사
“윤창중 미국으로 보내라는 건 제 얼굴에 침뱉기”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윤 전 대변인이 변호사 선임을 참 잘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김석한 변호사가 들고 있는 방패는 일단 한국 기자들의 취재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 냈다. 기자는 김 변호사와 사건의 고비마다 여러 차례 장시간 통화하고, 실제로 만나 취재를 했지만 그에게서 새로운 정보를 얻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이번 사건을 조용히 매듭짓는 게 모두에게 좋다는 이유로 공개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지난 1월 2일 그가 서울을 방문하기 앞서 《월간조선》 기고를 위해 꼭 필요하다며 인터뷰 요청을 하자 마지못해 시간을 내주었다. 그는 대형 로펌의 수석 파트너로 일하고 있지만 그의 주요 고객이 한국 기업과 한국 기업인이다. 김 변호사는 미국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국익을 지켜 왔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이 때문에 윤 전 대변인 사건도 그와 한국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생각에서 수임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민주당 등 정치권과 여성계 등이 윤씨를 미국으로 보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체포영장이 나왔다고 해서 대통령의 대변인으로 일했던 사람이 미국에 간 전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 조용히 끝낸다. 문제가 있어도 자국에서 벌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사대주의 문제를 얘기하는데, 그렇게 미국으로 보낸다면 그것은 사대주의가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 백악관 대변인이 그런 일에 연루됐다면 100% 미국으로 데려간다.
만약에 윤씨의 신병이 미국으로 넘어오면 한국이 약한 나라라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다. 윤 전 대변인이 미국에 와서 재판을 받도록 한다면 그것은 한국 입장에서 누워서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다른 나라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미국도 외국에서 자국민의 문제가 생기면 100% 자국으로 데려온다.
그런데 왜 한국이 그 사람을 미국으로 보내야 하느냐. 미국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윤 전 대변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전체의 문제이다.
윤씨가 미국에 온다, 오지 않는다는 식의 얘기는 처음부터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번에 그가 미국에 오면 잘못된 선례를 남기게 된다. 한국을 망신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일단 미국에서 체포영장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군이 외국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거의 모두 미국으로 데려오지 않느냐. 만약 백악관의 제이 카니 대변인이 한국에서 그런 일을 했으면 미국이 한국에 신병을 맡기겠느냐.”
“한국 정부가 미리 면책특권 포기하면 안 돼”
—한국 정부 측이 지금이라도 수습할 여지가 있나.
“한국 정부가 ‘미국이 간여할 일이 아니다(none of your business)’라고 하면 된다. 다른 나라도 다 그렇게 한다. 지금까지 그런 유형의 사고가 왜 없었겠느냐. 외국 정상이 미국을 방문할 때 외국의 고위 공무원이 술, 마약, 여자 등의 문제에 연루되는 등 별별 사건이 다 일어나지만 조용히 끝이 나는 것 같다. 그래서 미국에서 유사한 사건의 판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나라가 하지 않는 일을 우리가 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윤씨 변호를 맡은 것도 윤씨 개인 때문이 아니다. 윤씨를 위한 최선의 결과가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도 최선이기 때문이다.”
—윤 전 대변인이 당시에 외교관 여권이 아니라 공무원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면책특권이 적용될 수 있나.
“면책의 종류 및 범위는 여러 가지이다. 공무원 여권이냐, 외교관 여권이냐는 식의 얘기는 전체를 보지 못하면서 하는 말이다. 면책특권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외교관 면책특권이고, 또 하나는 공무 수행 면책특권이다. 윤 전 대변인은 대통령을 공식 수행해서 미국에 온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공무 수행 면책특권 대상이다. 우리가 수많은 케이스를 찾아보았다. 정부 대변인이 외국에 나가서 문제를 일으켰다고 해서 그 나라에 신병을 넘겨준 사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백악관 경호인들이 콜롬비아에서 매춘 사건에 연루됐을 때 어떻게 처리했는지 보라. 당장 미국으로 데려오지 않았느냐.
미국 시민권자가 피해자이고, 미국 경찰과 검찰이 개입돼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미국 법 절차에 맡겨야 되는 게 아니다. 윤 전 대변인이 엄연히 대통령 공무 수행을 위해 미국에 와서 일어난 사건인데 한국 정부가 미리 면책특권을 포기하면 안 된다. 윤 전 대변인에 대한 면책특권 부여 여부를 떠나 한국 정부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미국이 사법처리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
한국이 이번에 면책특권을 포기한 전례가 남으면 한국에 결코 도움이 안 된다. 앞으로 한국의 고위 공무원이나 외교관이 다른 나라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에 한국이 다시 면책특권을 주장하는 데 어려움을 줄 수가 있다.”
—한국 정부의 초기 대응에 문제가 있었나.
“이 문제에 미국인 피해자가 연루돼 있고, 미국 경찰과 검찰이 개입된 미국의 법적인 케이스에 해당된다고 한국 정부 측이 판단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가 개입하면 곤란할 것이라고 예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국 정부가 좀 더 신중하게 이 문제에 대처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윤씨가 청와대 대변인이고, 대통령의 공식 수행원이었기 때문에 외교 관례를 존중해 조용히 사건을 매듭지으려 했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신속한 수사를 미국에 요청했는데.
“한국 정부가 신속한 수사를 요청했고, 한국 정치권 일각에서 윤씨를 즉각 미국으로 보내라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그런 말은 곧 미국이 윤 전 대변인을 사법처리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다. 미국 검찰이 한국의 고위 공직자를 사법처리하는 전례가 남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윤 전 대변인이 미국의 법정에 섰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라. 한국 언론뿐 아니라 미국의 언론도 큰 관심을 보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한국이 망신을 당하는 꼴이 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미국 측에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사법처리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면 미국이 받아들일 것으로 보나.
“한국 정부가 지금이라도 입장이 바뀌었다고 말을 해야 한다. 한국이 이 문제를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하는 게 상책이라고 본다. 한 번 잘못된 결정이나 말을 했다고 해서 이를 번복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한국 정부가 입장을 바꾼다고 해서 미국 사법 당국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입장을 바꾸면 미국 사법 당국의 대응이 달라질 수 있나.
“미국이 한국 정부 입장을 고려할 것이다. 미국 사법 당국의 관계자들은 한국 정부가 마치 윤 전 대변인을 사법처리해도 좋다는 입장인 것으로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처리하겠다고 하면 미국 관계자들이 최소한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 상태에서 미국이 기소중지 및 수사종결 조치를 취할 수 있나.
“다른 나라는 이런 종류의 사건을 다 조용히 처리한다. 한국 정부가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면 미국이 외교 관계를 고려해서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타이밍이 이미 늦었다고 볼 필요도 없다. 타이밍이 아니라 사건의 본질이 문제이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본질적으로 조용히 끝내는 게 관행이다.
미국에는 1년 내내 수많은 정상이 오고 있다. 이때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나지만 미국이 외국의 대통령 방문단 일원을 법적으로 처리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이 너무 단기적으로만 이 문제를 본 것 같다. 이번 사건이 미칠 장기적인 영향을 생각해 봐야 한다.”
“윤 전 대변인은 99% 집에만 있다”
—변호사로서 이번 사건을 처리하면서 한국과 미국 간에 어떤 차이를 느꼈나.
“미국에서는 확정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 정반대이다. 무죄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유죄이다. 한국 언론이 윤 전 대변인에 대해 이미 유죄로 몰고 가지 않았느냐.
지금 양측의 주장만 있을 뿐이다. 영어로 말해서 ‘He said, she said’ 단계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 변호사, 혐의자, 피해자 등의 입장이 다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재판이라는 절차가 진행되는 것이다. 공정한 재판을 통해 사실이 드러나게 돼 있다. 윤 전 대변인이 재판을 받기도 전에 ‘유죄’로 몰고 가는 것은 온당치 않다.”
—성 범죄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이 중요한 것 아닌가.
“성추행 사건의 경우 신체의 성적인 기관을 만졌느냐, 성적 의도가 있었느냐는 두 가지 점이 관건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성적인 의도 없이 신체의 특정 부위를 만질 수도 있는 일이다. 아직 사실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다. 앞으로 무엇이 사실인지 규명돼야 한다.”
—이제 남은 절차는 무엇인가.
“검찰이 정식으로 기소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검찰은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안다. 검찰의 스케줄에 따라 이번 사건이 처리될 것이다.”
—그 시점이 언제가 될 것으로 보나.
“미국 검찰이 이 사건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사건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사건은 범죄의 내용으로 볼 때 중대한 것이 아니지 않으냐. 강간이나 구타가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케이스에 우선순위를 둘 수는 없어 사건 처리가 늦어지고 있다.”
—윤 전 대변인과 자주 접촉하고 있나.
“지금까지 3번 서울에서 만났다. 물론 윤 전 대변인으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소상하게 들었다. 변호사로서 의뢰인의 진술을 들은 상태라고 보면 된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재판이 진행될 경우를 대비해서 충분히 사실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윤 전 대변인의 증언 이외에 다른 사실 확인 작업을 하지는 않고 있다.”
—변호사가 어떤 사실 확인 작업을 하나.
“피해자 측의 진술이나 증언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진술에 대응할 수 있는 정보를 충분히 수집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변호사는 검찰과 피해자 측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도록 독자적인 조사를 실시한다. 예를 들면 윤 전 대변인 운전자, 호텔 종업원 등 목격자나 참고인과 접촉해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 아직 그런 독자적인 인터뷰 절차를 밟지 않고 있다.”
—윤 전 대변인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99% 집에만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한국 언론이 유죄로 판결을 받은 것처럼 그를 다루고 있으니 외부 활동을 하기 어렵게 된 것 아닌가. 그가 만약 미국에 와서 처벌을 받았어도 한국에서 이미 받은 벌보다는 가벼웠을 것 같다. 그는 일자리를 잃었고, 그의 가족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사생활의 뿌리가 뽑힌 상태에 있다.”
—피해 여성 측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
“윤 전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해서 피해 여성을 나쁘게 얘기한 것은 명백하게 잘못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시간이 지난 뒤에 차분히 생각해 보자. 이번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가서 무슨 득을 보겠는가. 이것은 윤 전 대변인에게 좋지 않은 일이고, 한국에도 좋지 않은 일이며 피해 여성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을 조용히 매듭짓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본다.”⊙
미국의 사법 당국과 국무부 등이 이 사건 처리를 위해 정중동(靜中動) 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미국 검찰이 수사결과를 전격적으로 공식 발표하고,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사법처리에 돌입하는 순간이 바로 내일일 수도 있어 한국 기자들은 늘 잠을 설치기 일쑤다.
수사, 어떤 단계인가
미국 워싱턴 DC 경찰청, 검찰청, 한국과 미국 정부 관계자, 윤 전 대변인 측 변호인 등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몇 가지 사실은 드러난다.
우선 죄목이 사실상 결정됐다. 미국 경찰과 검찰은 그동안 윤 전 대변인의 행위가 ‘경죄(輕罪)’인지 ‘중범죄(重犯罪)’에 해당하는지 수사를 계속해 왔다. 검·경이 내린 결론은 ‘경죄 성추행’이라고 한다. 윤씨는 지난해 5월 7일 워싱턴 DC W호텔 와인바에서 제1차 성(性)추행을 했고, 그 다음 날 호텔 객실에서 제2차 성추행을 했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피해 여성 인턴의 아버지도 지난해 5월 15일 기자와 인터뷰에서 “어디 엉덩이를 한 번 툭 친 것을 가지고 경찰에 신고하고 그러겠느냐”고 말해 제2차 성추행을 문제 삼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미국 검·경은 그러나 제2차 성추행 역시 경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윤씨가 당시 호텔 방에서 알몸 또는 속옷만 입은 상태였으나 피해 여성에게 강제적인 성적(性的)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텔 객실 등 밀폐된 공간에서 성적인 접촉 시도가 있었으면 강간 미수 등 중범죄에 해당된다.
그 다음은 기소 여부이다. 윤씨가 다섯 단계로 분류돼 있는 워싱턴 DC의 성범죄 관련 형법상 가장 낮은 단계인 경죄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검찰은 그를 기소하기로 사실상 결정했다고 수사 관계자가 말했다. 이 사건 수사결과를 넘겨받은 연방검찰청이 ‘기소 동의’ 의견을 내지 않으면 이번 사건은 사법 절차 없이 종결된다. 그러나 비록 경죄이지만 검찰이 윤 전 대변인을 기소하고, 공소를 유지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검찰은 그 상태에서 이 사건 수사 내용을 국무부에 통보하고, 국제법적인 검토 작업을 맡긴 뒤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체포영장 발부 문제도 중요한 결정 사항 중의 하나였다. 미국 검·경은 체포영장 집행이 실제로 이뤄질지 여부를 떠나 일단 영장을 발부 받기로 내부 결론을 내렸다고 수사 관계자들이 설명했다. 검찰이 체포영장을 청구하면 미국 법원은 거의 예외 없이 즉각 현장에서 영장을 발부해 주고 있다. 경죄 체포영장의 유효기간은 발급일로부터 1년이고, 2번에 걸쳐 연장이 가능하며 워싱턴 DC에서만 집행한다. 그러나 윤씨가 체포에 불응하면 경죄 공소시효가 3년이어서 체포영장 시한보다 빠른 2016년 5월 7일에 이 사건은 자동 종결된다.
그날 호텔 방에서 무슨 일이…
기자가 파악한 바로 인턴 여성은 쾌활한 성격이다. 그 여성은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윤 전 대변인이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거리낌 없이 말했다고 한 친구가 기자에게 전해 주었다. 인턴 여성의 친구가 말한 내용이다.
“윤 전 대변인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성적 모욕감을 주는 행위를 계속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그랬다. 결코 일시적·우발적으로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니다. 5월 8일 오전에는 윤 전 대변인으로부터 직접 호텔 방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그 방에 갔던 것이다. 그 방에는 두 사람밖에 없어서 목격자는 있을 수 없다. 그때 그 전에 한 행동과 다 연결이 되는, 여성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윤 전 대변인의 언행이 있었다.”
윤 전 대변인 측은 그의 알몸 노출 의혹과 호텔 방에서 있었다는 제2차 성추행 혐의에 대해서도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윤 전 대변인이 알몸 노출을 했다고 해도 그 행위가 어디서 이뤄졌는지 따져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장소가 포인트이며, 호텔에서는 얼마든지 알몸으로 있을 수 있다고 윤 전 대변인 측이 반박했다. 만약 호텔 복도나 공공장소에서 알몸 노출을 했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호텔 객실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는 얼마든지 알몸 상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호텔 방에 있던 윤 전 대변인이 노크 소리를 듣고 방문을 열어 주었을 때 상황도 중요하다고 한다. 문을 열어 주면서 얼굴만 조금 내밀었는지, 아니면 어느 자세, 어느 각도에서 문을 열었는지도 따져 봐야 하고, 그에 따라 법적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윤 전 대변인이 그 여성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요구하거나, 물리적인 힘을 가하면서 그 여성과 몸싸움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윤 전 대변인 측 주장이다.
워싱턴 DC에 인접한 버지니아주 페어펙스 경찰국의 한 경찰관은 이름과 직책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이렇게 설명했다.
“윤 전 대변인이 호텔 방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이번 사건의 관건이다. 그가 만약 여성 인턴을 호텔로 불러 ‘바바리 맨’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경죄의 범주를 넘어갈 수 있다. 워싱턴과 버지니아주는 바바리 맨을 성 범죄자로 규정하고, 그 명단을 작성해 일반 시민이 알 수 있도록 공지하고 있다. 경찰 당국은 그 리스트를 점검하고, 이들의 추가 행동을 항상 추적하고 있다.
윤 전 대변인이 여성 인턴을 호텔 방으로 불렀을 때 호텔 방문이 닫혀 있었는지 여부도 이번 사건의 성격 규정에 매우 중요한 변수이다. 만약 문이 닫혀 있는 밀폐된 공간에서 윤씨가 옷을 벗은 상태로 인턴 여성의 몸에 손을 댔다면 그것은 강간 미수에 해당된다. 또 밀폐된 공간에 잠시라도 여성이 갇혀 있었다면 그것은 감금, 납치에 해당되는 심각한 범죄이다.”
피해 여성은 수사 진행 기간 한국에 머물러
미국에서 자라는 한인 교포 1.5세 또는 2세를 흔히 트윙키(twinkie)와 파브(FOB)로 분류한다. 트윙키는 겉은 갈색이나 속은 하얀 케이크이다. 겉은 한국인이지만 문화적으로는 미국인에 가까운 사람을 일컫는다. 파브는 ‘Fresh Out of Boat’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말 그대로 배에서 갓 내렸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국 문화와 정서를 그대로 간직한 채 미국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말한다.
미국의 중·고·대학교, 대학원에서 트윙키와 파브는 확연히 구분된다. 서로 문화가 다르기에 두 집단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 학생이 많은 대학에는 흔히 한인학생회가 두 개로 나눠져 있는 곳이 많다. 트윙키들이 결성한 학생회가 있고, 파브가 주축이 된 학생회가 따로 있다.
피해 여성은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원까지 진학한 한인 2세이다. 얼핏 트윙키일 것 같다. 그러나 이 여성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어를 한국에서 자란 또래의 학생처럼 유창하게 구사한다. 이는 곧 부모의 교육과 함께 한국 문화에 대한 스스로의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한인학생회장을 지내고, 대학원에서도 한인학생회의 간부를 맡아 활동하면서도 그 학생은 트윙키와 파브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인 학생의 결속을 다지는 리더로 활약했다.
그 인턴은 대학원 1학년 과정이 거의 끝나 가던 지난해 5월에 성추행 사건을 겪었다. 외교관이 돼 일을 해 보고 싶었던 그 학생이 그 사건 이후 진로를 바꿨는지, 한국에는 정이 뚝 떨어져 버렸는지 궁금했다. 피해 여성의 근황을 취재하던 기자는 ‘조금은 놀랄 만한’ 소식을 들었다.
사건 발생 후 워싱턴 경찰청의 조사에 응하고, 피해자 증언을 몇 차례 한 뒤 그 여성은 미국을 떠났다. 그 학생이 택한 곳은 한국 대구였다. 그곳에서 ‘스터디 어브로드’(Study Abroad) 프로그램으로 공부를 계속했다. 미국 대학은 일정 기간을 해외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 학생은 대학원생이지만 국제관계를 전공하고 있으며 스터디 어브로드 대상 국가로 한국을 선택했다. 이 프로그램은 대체로 한 학기 또는 1년 단위로 운영된다.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 여성은 윤 전 대변인 사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 전문가로 성장하려는 꿈을 접지 않은 것 같다. 그 여성은 미국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는 내내 한국 대구에 체류했다.
이번 사건, 누가·어떻게 수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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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12월 27일 윤창중 인수위원회 수석대변인이 1차 인선결과를 발표한 후 기자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
이 사건은 2013년 5월 8일 12시30분에 전화로 접수됐다. 최초로 받은 사람은 워싱턴 DC 경찰청 소속의 스키너 순경(Ofc. Skinner)이다. 이 순경은 레인 경사(Sgt. Lane)에게 보고했다. 성범죄였기 때문에 이 건은 즉각 경찰청 내 성폭행과(SAU·Sex Assualt Unit)로 넘겨졌다. SAU 소속의 성범죄 전문 경찰관인 크레들 경장(Det. Credle)과 구더리 경사(Sgt. Gutherie)가 이 사건을 맡았다. 이 두 경찰관이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둘은 윤 전 대변인과 피해 여성이 투숙했던 워싱턴 시내 페어펙스 호텔에서 피해 여성을 대상으로 1차 진술을 받았다. 그 결과를 슬레즈 경감(Capt. Sledge)에게 보고했다.
슬레즈 경감은 크레들 경장과 구더리 경사에게 수사를 맡기면서 경찰청 소속의 한국계 미국인 형사를 찾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수행하던 청와대 대변인이 혐의자이고, 피해 여성도 한국계 미국인이어서 한국계 형사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경찰청에서 베테랑 한국계 형사가 사실상의 수사팀장 역할을 수행했다.
수사팀에 속해 있는 경찰관은 기자 전화를 일절 받지 않았다. 경찰청에 문의하면 대변인실로 연락하라고 한다. 대변인들은 앵무새처럼 “현재 수사 중이다”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한다. 대변인실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을 것 같아 이번 사건 수사 담당과인 ‘성폭행과’에 전화를 걸었다. 성폭행과 수사관은 역시 대변인과 얘기하라며 전화를 끊으려 들었다. 일반적인 성범죄 사건 수사 절차라도 알려 달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몇 마디 해 주면서 웹사이트를 알려주고 참고하라고 한다.
그 내용은 이랬다. 워싱턴 DC 경찰청(MPDC)의 ‘성폭행과’는 성범죄 피해자가 18세 이상인 사건을 맡고 있다. 워싱턴 경찰청은 피해자가 18세 미만이면 ‘청소년조사국’(YIB)에 사건을 배당한다. 성폭행과 소속의 성범죄 전문 수사관은 모두 성폭행에 관한 특수 교육 과정을 마친 경찰관이다. 이 수사관들은 성폭행 범죄의 민감성 및 사생활 침해 속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는 경찰관이다. SAU는 성폭행 범죄 사건에 대해서는 피의자와 피해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방식으로 수사를 한다고 설명했다.
또 SAU의 전문 수사관이 성범죄 수사를 할 때 경찰청 내의 ‘피해자서비스과’(VSU) 에 소속돼 있는 피해자 전담 스페셜리스트와 공조하고 있다. 이 피해자 전담 수사관은 성범죄 수사가 이뤄지는 내내 성폭행 피해자와 그 가족에 관한 정보를 수사관에게 제공하는 등 지원 업무를 맡는다. 피해자와 직접 접촉해 ‘범죄피해 보상 프로그램’을 신청하도록 유도하는 일도 피해자 전담 수사관이 맡는다.
경찰관이 성범죄 신고를 접수하면 즉각 사건 현장으로 달려간다. 이때 피해자에게 어떤 성범죄 피해를 입었는지 질문한다. 사건 접수 경찰관이 성범죄 전담 수사관에게 이 내용을 통보하면 성범죄 전담 경찰관도 사건 현장에 출동하도록 돼 있다. 이 성범죄 전문 수사관은 피해자를 상대로 보다 심층적인 인터뷰를 한다. 성범죄 전문 수사관은 또 ‘증거과학수사국’에 연락해 사건 현장에서 증거물을 수집하도록 요청한다.
이런 정도의 뻔한 내용으로는 취재 갈증을 도저히 해소할 수 없었다. 기자는 워싱턴 DC 경찰청에 한국계 베테랑 형제 형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워싱턴 경찰청의 ‘투캅스’
시니어 디텍티브(Senior Detective) 벤자민 오(한국명 오영석), 조셉 오(오영조). 워싱턴 일원에 널리 알려져 있는 워싱턴 경찰청의 형제이다. 그들은 1976년 부친 오덕준(작고)씨가 외교관으로 미국에 부임할 때 따라왔다. 그때가 동생 조셉이 초등 5학년 때이다. 오덕준씨는 군인 출신으로 제11사단장과 제3군단장을 지내다 예편한 뒤 초대 농협중앙회장을 지냈다.
외교관으로 미국에 나왔던 오덕준씨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이 나자 한국으로 서둘러 귀국했다. 그때 두 아들은 미국에 계속 남아 초·중·고교 및 대학까지 다녔다. 형제는 대학 졸업 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워싱턴 DC 경찰청 형사가 됐다. 형 벤자민 오는 워싱턴 DC 시장 경호팀장을 지내기도 했다. 동생 조셉 오는 아시아계 이민자 범죄와 강력범죄 수사로 이름을 날렸고, 현재 경찰청 형사과장을 맡고 있다. 조셉 오는 1999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 자격증도 소지하고 있다. 조셉 오 형사과장은 지난해 5월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장기 근속상을 받았다. 두 형제는 현재 경찰관 생활을 28년가량 했으며 앞으로 2년 정도 일을 더 한 뒤 30년을 채우면 함께 은퇴할 예정이다.
윤 전 대변인 성추행 의혹 사건이 터지자 워싱턴 경찰청은 한국어가 능통한 한국계 형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가해자가 한국인이고, 피해자가 한국계 미국 여성이며 주미 한국대사관과 청와대 등 한국 정부 관리 등 증인과 참고인이 죄다 한국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워싱턴 경찰청은 아시아계 범죄 수사의 최고 베테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조셉 오 형사과장을 차출했다. 조셉 오 과장에게 사실상의 수사반장이 돼 윤 전 대변인 사건 수사를 지휘하게 했다.
기자는 지난해 5월 16일 조셉 오 형사과장을 처음으로 인터뷰했다. 사실 첫 인터뷰를 할 때까지 그가 윤 전대변인 사건 수사팀에 가담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가 워싱턴 경찰청의 강력사건 수사 전문이고, 형사과장이며 성범죄 사건 등을 여러 차례 다뤄 왔기 때문에 윤 전 대변인 사건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 시나리오를 얻으려고 그를 만났다. 조셉 오도 윤 전 대변인 사건의 수사 내용을 일절 공개할 수 없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면서 워싱턴 경찰청의 일반적인 성범죄 수사 관행을 설명하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조셉 오라는 이름이 신문에 큼지막하게 나간 뒤 그는 워싱턴 기자 사회에서 핵심 취재공략 대상으로 떠올랐다. 심지어 워싱턴 DC에 상주 기자가 없는, 한국에 있는 언론사도 국제전화로 오 과장을 취재하려고 경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도 가세했다. 워싱턴의 한국 정부 관계자들도 수사 진전 상황을 파악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 때문에 한국계인 오 과장을 통해 전반적인 분위기를 알아보려 했다.
오 과장은 수사 내용이나 진전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성범죄 수사 관행, 워싱턴 경찰청의 사건 처리 방식, 경찰청과 검찰청의 업무 협력 문제 등 일반적인 사항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한국 기자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한국식 수사 모델을 미국에 그대로 대입하는 중대한 오류를 잡아 주는 데 일조했다. 한국과 미국 간에 법적으로, 관행적으로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한국의 수사 절차나 관행으로 재단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FBI가 한국 가서 윤씨 납치할 수도”
사건 초기에 경찰의 수사권과 검찰의 기소권한을 놓고 혼선이 빚어졌다. 한국의 일부 언론이 ‘워싱턴 경찰청이 검찰의 지휘를 받아 윤 전 대변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 과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 워싱턴 DC에서 경찰관이 검사의 지휘를 받아 사건을 수사하지 않는다. 윤 전 대변인 사건에서는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담당이 된다. 그가 조서를 꾸미면 성범죄 전담 수사관들이 본격 수사를 한다. 또 사건 담당 경찰관이 수사를 마치면 그때 연방 검사에게 모든 수사 기록을 넘긴다. 담당 검사는 이때 기소권한을 행사한다. 담당 경찰관이 피의자 신병 확보를 위해 체포영장 발부 신청서를 내면 담당 검사가 ‘기소 동의’란에 사인한 뒤 담당 검사가 법원에 체포영장을 발부해 달라고 요청을 하게 된다. 검사가 피의자를 기소하고, 재판이 진행되면 사건 담당 경찰관은 ‘검찰 측 수사관’이 돼 재판에 참여한다.”
윤 전 대변인 사건을 수사하는 기간에 대해서도 한국과 미국 간 인식의 차가 컸다. 이번 사건은 극히 단순하다. 윤 전 대변인이 호텔 와인바에서 인턴 여성의 엉덩이를 움켜쥐었고, 그 다음 날 호텔 방으로 그 여성을 불러 제2차 성추행을 했다는 게 의혹의 전부이다. 그런 정도의 수사를 하는 데 최소한 몇 개월이 걸린다는 게 한국인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사실 확인 작업이 쉽게 끝난다고 해서 사건 처리를 빨리 하는 게 절대 아니다. 사건 수사에 관한 한 한국이 ‘속전속결’이라면 미국은 ‘철두철미’이다.
오 과장은 “윤 전 대변인 사건 수사에만 통상 3~6개월이 걸릴 것이고, 늦어지면 1년가량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오 과장의 그런 얘기를 익명의 미국 경찰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하기도 했다.
기자는 그 보도가 나간 뒤 우연히 한국의 종합편성채널 시사 토크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때 교수 출신의 진행자가 신문에 이번 사건 수사가 몇 달 걸릴 것이라는 보도가 있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된다고 얘기했다. 그 진행자 역시 한국의 수사 관행과 경험이라는 잣대로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사 상황을 재단하는 것 같았다.
그뿐 아니다. 기자가 사건 발생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수사가 신속하게 진행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얘기하면 많은 한국 관계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코웃음을 쳤다.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오 과장이 예고한 대로 지난해 5월 8일 사건 신고가 접수됐고, 그해가 다 지나고 새해가 밝았으나 미국 사법 당국의 수사결과 발표가 나오지 않았다.
오 과장은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문제에 대한 오해도 해소해 주었다. 한국에서는 윤씨의 죄목이 경죄 성추행으로 결론이 나면 인신 구속을 하지 않고, 중범죄 혐의를 받아야 체포영장을 발부 받을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오 과장은 “윤 전 대변인이 경죄 혐의를 받아도 미국 검찰과 경찰이 법원으로부터 얼마든지 체포영장을 발부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사건 담당 검사가 윤씨를 기소할 때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있으며 이때 구속 기소를 할지, 불구속 기소를 할지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체포영장의 유효기간을 둘러싼 논란도 불거졌다. 미국 검찰이 경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법원으로부터 발부 받으면 그 유효기간이 1년이다. 이 기간은 두 번에 걸쳐 연장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영장 발부일로부터 3년간 이 영장을 집행할 수 있다는 게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또 경죄 체포영장은 워싱턴 DC 행정 구역 내로 한정이 돼 있다는 것이다.
오 과장은 “일반적으로 그 얘기가 다 맞지만 이 사건이 3년 후에 자동으로 종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오 과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믿기지 않는 얘기를 했다.
“범인 체포와 관련된 미국과 한국 법이 다르다. 한미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라 1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는 범죄자는 서로 신병을 넘겨 주도록 돼 있다. 그러나 이 조약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미국 경찰이 한국으로 도망가 있는 범인을 잡을 수 없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미국 법의 판례와 미국 경찰의 범인 체포 전례를 보면 외국에서도 미국 경찰이 범죄인을 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 경찰이 멕시코에서 마약 사범을 잡아오고 있는 게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미국의 마약 단속 전문 경찰관들이 멕시코에 잠입해 미국으로 마약을 비밀리에 공급하는 멕시코 마약상을 직접 잡아오고 있다.
약간 성격은 다르지만 파나마의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납치 사건을 보라. 미국은 마약 범죄자 체포 등을 명분으로 파나마를 침공해 노리에가를 체포했다. 이런 식의 공개 체포 작전만 있는 게 아니다.
미 연방수사국(FBI)이 해외에서 얼마든지 극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윤 전 대변인의 죄목이 경죄로 결정되고, 한미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른 소환 대상이 아닐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윤씨를 미국으로 보내고 싶어도, 그가 거부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윤씨가 미국에 자진해서 오지 않으면 FBI 요원들이 한국에서 비밀리에 윤씨를 체포해서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윤씨의 미국 송환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런 시나리오가 전개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앞으로 그렇게 할 것이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
미국과 미국인에게 해를 입힌 범죄자를 미국 법에 따라 징벌한 전례와 그 적법성을 보장하는 판례는 얼마든지 있다.”
피해 여성 가족 취재를 통한 조각 그림 맞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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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5월 6일(현지시각) 박근혜 대통령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방문을 수행한 윤창중 대변인(왼쪽 끝). |
워싱턴 DC 한국 특파원들에게 초특급 비상이 걸렸다. 사건의 재구성, 이게 우리 특파원이 해야 할 일이다. 기자는 그러나 그와의 특별한 인연 탓에 별로 취재하고 싶지가 않았다. 기자에게 늘 형이고, 선배이고, 상사였던 사람의 그 어두컴컴한 스토리를 앞장 서서 캐고 싶지가 않았다.
기자가 소극적인 생각을 하면 반드시 물을 먹게 돼 있다. 아니나 다를까. 각 언론사의 간판 스타 기자들이 워싱턴 DC에 포진해 있기에 몇 번 물을 먹었다. 그 사건을 신고한 인턴의 친구인 주미 대사관 문화원 직원 아버지 인터뷰를 놓쳤다. 그 다음에는 윤 전 대변인이 W호텔에서 인턴 여성과 와인을 마셨을 때 동석했던 운전기사 인터뷰도 놓쳤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더구나 기자는 타사 특파원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워싱턴 DC에 상주하고 있는 ‘고참’이었기에 자책감은 금방 자괴감으로 변했다. ‘짬밥’ 값을 좀 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때 남은 취재 대상은 피해 여성이나 그 가족뿐이었다. 피해 여성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 그리 품이 들지 않았다. 그 인턴의 이름과 졸업한 대학, 현재 재학하고 있는 대학원 등의 정보는 금방 나왔다. 그 여성은 특히 어디를 가든 리더로 활동하는 열성파였다. 대학에 다닐 때는 한인학생회장으로 활동했고, 인근 대학의 다른 한인학생회까지 아우르는 통합 한인 학생 모임을 주도하는 등 리더 중의 리더로 맹활약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한인학생회 임원을 맡았다.
그 학생은 미국에서 태어났음에도 한국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졌던 사실이 하나씩 드러났다. 한국에서 국제행사가 열렸을 때에는 한국으로 달려가 방학 내내 자원봉사를 했다. 한국에서 자원봉사한 경험을 대학 신문에 싣기도 했다. 한국 대학에서 한국어 어학 연수를 마친 것은 물론이다.
그 학생의 친구들을 수소문해 보니 도처에 포진해 있었다. 그 학생의 대학 졸업 연도를 알아내 같은 대학, 같은 학년이었던 한국계 학생들에게 연락했더니 금방 그 학생의 일거수일투족이 드러났다. 대학원 친구들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기자가 왜 그 학생의 인적사항을 알려고 하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 친구들은 대충 짐작하고 있는 눈치였다. 많은 친구가 전화번호나 주소 등을 기자에게 절대 알려 줄 수 없다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기자는 그 학생의 지도교수와도 만났다. 그 지도교수는 기자가 그 학생 얘기를 꺼내자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교수로서 그 어떤 얘기도 해 줄 수 없다며 기자를 쫓아냈다.
사실 기자의 취재는 조각그림 맞추기와 비슷하다. 여러 가지 작은 정보의 파편을 하나하나씩 꿰맞춰 가다 보면 큰 그림이 나오게 된다. 인턴 여성을 아는 여러 사람과 접촉해 보니까 그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 인턴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일은 비교적 간단했다. 대학과 대학원의 한인학생회 명단을 입수하고, 그 학생 친구들에게 전화번호가 혹시 바뀌었는지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언론이 피해자의 신상 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여학생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었지만 그것을 기사로 한 줄도 쓸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피해 여성에게는 문자만 보냈다. 혹시 한국 언론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없었다.
기자는 피해 여성의 부모나 언니를 만나 보기로 작정했다. 이제 피해 여성 본인이 아니라 그 아버지, 어머니, 언니의 연락처가 필요했다. 다시 수소문해 보니 그 가족은 워싱턴 DC 근처에서 10여 년 살다가 그곳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가량 떨어져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간 사람들이었다. 피해 여성의 아버지를 알고 지내는 지인들을 찾아내 주소와 집 전화번호를 받아 냈다.
피해 여성 아버지와의 면담
기자는 사건 발생일인 2013년 5월 7일로부터 1주일이 지난 14일 밤에 피해 여성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아버지가 ‘헬로우’ 하며 전화를 받았다. 영어로 전화를 받았지만 발음을 들으니 한국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기자가 한국말로 용건을 꺼냈다. 피해 여성의 이름을 대며 그 여성의 집 아니냐고 물었다. 그 아버지가 갑자기 영어로 “You got the wrong number”라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전화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집에 직접 쳐들어가는 수밖에.
그 다음 날 아침 회사 동료와 함께 오전 7시에 집을 떠났다. 자동차 GPS(위성항법장치)에 그 집 주소를 넣어 보니 2시간가량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를 타고 가면서 은근한 걱정이 들었다. 오전 9시쯤 도착하면 이미 가족들이 출근을 했거나 집에서 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미국에 사는 절대다수의 교민은 자영업자이다. 자영업자는 가게 문을 열기 위해 새벽같이 집을 비우기 마련이다.
정확히 오전 9시에 집 앞에 도착했다. 집이 특이했다. 미국 주택가에는 흔히 ‘이즈먼트’(easement)라고 부르는 주택 진입용 개인 도로가 나 있는 곳이 있다. 그 집 앞에는 길가에 있는 다른 집 사이에 그 개인 도로가 나 있고, 그 길을 쭉 따라가면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돼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 개인 도로가 비포장 상태이고, 그 길이 몇 십 미터나 길게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길에서 보면 그 집이 전혀 보이지 않고, 이웃집들의 뒤쪽 숲 속에 위치해 있다. 자동차로 한참 들어가 그 집 마당에 도착하니 두 개의 빌딩이 나타났다. 하나는 일반적인 주택이었고, 그 집 앞 마당을 사이에 두고 네모난 별도의 빌딩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빌딩 앞에 ‘Office’라는 영어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 순간, 인턴 여성의 아버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주택가 가정집에 상업용처럼 빌딩이 있는 것도 특이했다. 그 빌딩에서 무슨 비즈니스를 하는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 순간도 잠시, 동료 기자와 함께 그 집 마당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중년의 한 남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한국 사람 두 명이 찾아왔기에 이 사람들이 기자인지, 경찰인지, 대사관 직원인지 가늠하느라 여러 생각이 그 아버지 머릿속을 스쳤을지 모른다.
A 선생님이시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맞게 찾아왔구나 싶었다.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고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A씨는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면서도 몇 가지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A씨는 “어디 엉덩이를 툭 친 것 가지고 경찰에 신고하고 그러겠느냐”는 말을 했다. 워싱턴의 W호텔 와인바에서 일어난 제1차 성추행보다 그 다음 날 호텔 방에서 있었던 제2차 성추행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윤 전 대변인을 민사로 한국이나 미국에서 고소할지 여부가 관심사였다. A씨는 “미국 경찰이 수사하고 있으니 철저하게 할 것이고, 미국 경찰 발표가 나온 뒤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A씨 집 마당에서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A씨가 갑자기 집 안에 있던 골프채를 하나 손에 쥐었다. 짧은 거리에 사용하는 피칭이나 샌드웨지 같았다. 그는 얘기를 나누다 말고 그 골프 채로 마당에 흩어져 있던 공을 가볍게 치는 골프 연습을 했다.
사생활 침해 수준까지 간 언론의 보도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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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창중 전 대변인이 경질된 직후인 2013년 5월 10일 취재진이 윤 전 대변인의 거주지로 알려진 서울 서대문구의 한 오피스텔 복도에 진을 치고 있다. |
기자는 그 말을 듣고 피해 여성이 상당한 부잣집 딸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 미국 집 시세를 알아보는 Zillow.com으로 들어가 그 집 가격을 알아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그 집은 워싱턴 DC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큰 도시 옆에 있지만 집값은 워싱턴 DC 일원의 평범한 주택 가격과 거의 비슷했다. 거주 주택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 피해 여성은 평범한 중산층 한인 가정 출신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자꾸 말을 아끼려는 A씨에게 다시 캐물었다. A씨의 부인이 2층 창문 사이로 “아빠, 전화 왔어요. 아주 급한가 봐요”라며 큰 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기자는 그때 정말 전화가 온 줄 알았다. 그러나 A씨가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기자가 기다리다 못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현관 문을 열면 바로 계단이 나오고, 그 계단으로 올라가야 거실이 있는 구조로 돼 있었다. 현관 문에서 A씨를 불렀더니 A씨가 깜짝 놀라며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기자가 머뭇거리며 몇 가지 더 확인할 게 있다고 말했다. A씨는 현관 계단 위에서 기자를 내려다보면서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현관 문을 나서면서 아래쪽을 둘러보니 젊은 여성이나 학생이 즐겨 신을 것 같은 모양새의 운동화 두 켤레가 놓여 있었다. 그때 집 안에 피해 여성 인턴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A씨가 마치 어린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 동물과 비슷한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그 집에서 빠져나오면서 전화가 왔다고 남편을 불러들인 피해 여성 어머니의 기지가 떠올랐다. 남편이 기자들과 나누는 얘기에 몹시 신경이 쓰였기에 남편이 더 이상을 얘기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가 상당히 교양 있고, 지혜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시간으로 지난해 5월 17일 자에 피해 여성 아버지 A씨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워싱턴 한국 특파원 사회가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한 분위기로 급변했다. 한국 기자들은 취재망을 총 가동해 그 피해 여성 부모의 집을 찾아 나섰다. 기자에게 직접 물어본 동료 특파원도 상당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자는 그 집 주소를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게 피해자 가족에게 기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자는 문제의 인터뷰를 내보내면서 작은 실수를 범했다. ‘A씨는 워싱턴 DC에서 자동차로 2시간가량 떨어진 버지니아주 자택에서 인터뷰를 가졌다’는 대목을 기사에 포함시켰다. 워싱턴 일원에 거주하는 사람이면 그곳에서 2시간 떨어져 있는, 한인이 다수 거주하는 도시는 딱 1개밖에 없다는 걸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꼭 그 힌트가 없었다 해도 한국 기자들이 그 집 주소를 알아내는 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피해 여성 아버지 인터뷰가 나간 다음 날부터 그 집에 한국 기자들이 몰려가기 시작했다. 후속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다.
A씨는 단호했다. 더 이상 기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지켰다. A씨는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들어오면서 한국 기자가 탄 차량이 보이면 차를 돌려 집 밖으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운 좋게 A씨와 조우한 기자는 신변 보호를 위해 경찰을 부르겠다는 험악한 경고를 들었다고 한다.
밤 11시께 그 집을 찾아간 기자는 그 집에 불이 다 꺼져 있고, 인기척이 전혀 없더라고 했다. 아마 기자를 피해 그 가족들이 친지 집이나 호텔로 피신을 갔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 기자들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경쟁을 하다 보니 사단이 났다. 한국의 모 텔레비전 방송 취재 기자가 카메라 팀을 이끌고 그 집으로 가서 집 입구부터 집 전경까지 카메라에 담아 뉴스 시간에 내보냈다. 미국에 사는 많은 교포들도 그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 방송 뉴스를 본 A씨의 지인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기자에게 전화했다.
그 지인은 A씨와 그 가족을 잘 알고 있고, 기자와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다. 그 지인이 모 방송의 보도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가 보면 알겠지만 그 집은 특이하게 생겼다. 미국에서는 모임을 주로 집에서 갖기 때문에 그 집에 가 본 교민이 많다. 그 뉴스를 보고, A씨가 피해 여성 아버지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 한국의 방송이 무책임하게 그렇게 보도를 해도 되느냐. 이것은 명백한 사생활 침해이다.”
워싱턴 경찰청 대변인들과 한국 기자들이 함께 돈 쳇바퀴
워싱턴의 한국 기자들은 대체로 정치, 외교, 통상 기사를 쓴다. 사건, 사고 기사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발생하는 대형 사건, 사고는 미국 언론이 집중적으로 취재하고 있어 미국 언론을 참고해서 기사를 작성할 때가 많다. 아시아나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추락했을 때처럼 한국과 관련된 사고가 났을 때에는 현장에서 직접 취재하기도 한다.
윤 전 대변인 성추행 의혹 사건은 워싱턴 기자들에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특이한 취재 경험을 제공했다. 핵심 취재 대상 기관이 워싱턴 DC 경찰청과 연방 검찰청이고, 미국 경찰과 검찰의 수사 상황을 알아내야 하는 게 임무였다. 백악관, 의회, 국무부, 국방부, 무역대표부(USTR) 등에 익숙한 이곳 기자들에게 경찰청과 검찰청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워싱턴 경찰청과 검찰청이 기자들의 취재를 사실상 원천 봉쇄했다. 수사팀에 대한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다. 경찰청 관계자들은 기자라는 신분을 밝히면 무조건 대변인과 얘기하도록 했다.
워싱턴 DC 경찰청에는 슈라이 레언, 그웬돌린 크럼프, 폴 맷캐프 대변인이 번갈아 가며 근무했다. 이들에게 수사 상황을 묻는 질문을 하면 언제나 똑같은 답변을 반복했다. 지금 수사 중이니 그 어떤 것도 확인해 줄 수 없다는 게 대변인들의 일관된 답변이었다.
윤 전 대변인이 어떤 혐의를 받고 있으며 수사가 언제 끝날지 등등 기자들의 의문 사항은 끝이 없었지만 경찰청 대변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현재까지 발표할 게 없고, 진전된 사항이 있으면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찰청 대변인실과 접촉하는 것은 언제나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감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기자로서는 혹시 대변인이 다른 얘기를 할지 몰라 이번 사건이 발생한 직후부터 거의 매일 습관처럼 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 기자들도 지치고, 대변인들도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었다. 기자는 어느 날 워싱턴 경찰청 대변인실에 제안을 했다. 경찰청에 매일같이 문의를 하는 기자들의 이름, 소속 회사, 연락처 등을 취합해서 경찰청이 사건 수사 진전 상황을 브리핑할 때 미리 연락해 주면 매일같이 반복되는 확인 전화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여성인 슈라이 레언 경찰청 대변인이 감정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목소리로 “우리 경찰청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이번에는 그런 연락망을 가동하면 서로 좋지 않겠느냐고 따졌다. 레언 대변인은 “그러지 말고, 궁금하면 지금처럼 언제든 전화해라. 우리가 언제든지 전화를 받아 주겠다”고 한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경찰청의 대변인들과 한국 기자들이 함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소모전을 무한 반복하다가 어느 날 경찰청 대변인에게 다시 한 번 같은 제안을 했다. 그들도 지쳤는지 이번에는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을 남겨 놓으라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 수사가 사실상 종료될 때까지 경찰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미국 검찰청의 기자 상대 방법
경찰청이 지난해 7월 말에 수사 기록을 연방 검찰청에 넘긴 뒤에 워싱턴 경찰청은 공을 검찰청으로 넘겼다. 미 법무부 산하 연방 검찰청 대변인은 윌리엄 밀러이다. 그는 처음부터 한국 기자들이 전화를 하면 이름, 회사, 전화번호, 이메일을 남기라고 했다. 밀러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먼저 당부했다. 힘들게 매일같이 전화하지 말고, 연락처를 남겨 놓으면 연락해 줄 테니 안심하고 기다리라고 한다.
그래도 미심쩍어 밀러 대변인에게 전화를 하면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말 이외에는 해 줄 얘기가 없다”고 매번 같은 소리를 한다. 밀러 대변인은 그래도 전화를 꼬박꼬박 잘 받을 뿐 아니라 전화 메시지를 남기면 반드시 리턴 콜을 해 주고, 이메일을 보내면 답신을 보내는 일을 잊지 않는다. 밀러 대변인의 성실한 태도는 감동적이었지만 취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밀러 대변인은 “오늘도 아무런 진전 상황이 없다”는 말 이외에 다른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다.
조셉 오 형사과장에게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미국 경찰청을 상대로 어떻게 취재해야 하는지를. 오 과장은 한국 기자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지만 경찰관에게 수사 중간에 그 내용을 알려 달라는 것은 미국의 관행에 맞지 않고, 법에도 저촉된다고 잘라 말했다.
“수사 내용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사건 담당 수사관들과 수사팀의 직속 상관, 담당 검사뿐이다. 그 외에 누구도 수사결과를 알 수 없도록 돼 있다. 만약 수사결과가 유출되면 담당 수사관 등이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한국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 미국 경찰이 그 점을 의식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정당하게 이 케이스를 처리하면 그뿐이다. 수사관은 수사 마무리를 위해 윤씨의 신병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혐의자 진술 및 사실 확인 작업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사관은 이를 위해 윤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법원으로부터 발부 받는 것을 목표로 수사를 진행했다. 혐의자를 체포해서 24시간 안에 조사를 마치고, 그 결과를 담당 검사에 넘기면 수사관의 임무는 끝난다. 그때부터는 경찰도 검찰의 감독을 받는다. 그렇지만 윤씨를 체포하기 전까지 모든 수사에 관한 권한은 경찰이 행사한다.
담당 수사팀이 윤씨의 죄목을 결정해도 그것이 최종 확정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담당 검사와 협의 과정을 거쳐 죄목을 확정한다. 검사는 피의자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면 법정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그에 합당한 죄목으로 혐의자를 기소해야 한다. 검사가 담당 경찰 수사팀에 증거나 자료 등을 추가로 확보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담당 검사와 경찰관이 체포영장 발부 문제를 놓고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경찰관이 체포영장을 발부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하려면 담당 검사가 ‘기소 동의’란에 사인을 해 줘야 한다. 그래야 담당 경찰관이 그 서류를 가지고 법원에 가서 판사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 받아 이를 집행하게 된다. 혐의자 체포 권한은 경찰에 있다. 그러나 담당 검사가 ‘기소 동의’를 거부할 수 있다. 경찰은 그렇게 되면 체포영장 없이 피의자를 불러 조사를 마치게 된다.
담당 검사가 윤씨의 체포영장에 기소 동의를 했다는 것은 이 사건을 형사재판으로 끌고 가겠다는 뜻이다. 검찰과 경찰이 여기까지 와야 사건 처리의 윤곽이 드러난다. 검사의 동의를 받아 수사 담당 경찰관이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 받는 그 시점에 검찰 또는 경찰이 윤씨를 무슨 죄목으로 기소할지 짤막하게 언론에 발표한다.
이때까지도 수사 당국은 상세한 수사 내용을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재판을 해서 반드시 혐의를 입증하고, 혐의자를 사법처리해야 하는 게 검사의 임무이다. 그런 검사가 피의자의 혐의 내용을 사전에 공개하면 피의자와 변호인 측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 들 것이다. 그러니 윤씨의 자세한 혐의 내용은 재판 과정에서 비로소 드러나게 돼 있다. 한국 기자들이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혐의 내용을 알려고 든다. 미국의 수사와 재판 시스템을 고려하면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사건의 1차 피해자는 미국이지 인턴이 아니다
이번 수사는 성격 급한 한국인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이 아닌 것 같은데도 미국 수사 당국은 부지하세월로 시간을 끌었다.
조셉 오 과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일반인의 성범죄 사건이 아니다. 한국의 대통령 수행 고위 공직자가 연루돼 외교적인 문제가 개입돼 있다. 한미 범죄인인도조약 등 법적인 문제를 정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었다. 워싱턴의 경찰과 검찰은 혹시라도 실수를 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이 사건을 다뤄 왔다.
윤 전 대변인이 외교관으로서 면책특권을 받을 수 있는지도 면밀하게 따져봐야 했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완벽하게 일을 하자는 자세로 임했다. 엉터리로 수사했다는 비난을 받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우리는 혐의자를 기소할 수 있도록 수사를 해 왔다.”
수사가 장기화하면서 워싱턴 경찰청 안팎에서는 윤 전 대변인과 피해 여성 간 모종의 합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뜬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기자가 아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윤 전 대변인 측이 피해 여성과 접촉해 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 측도 일절 피해 여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 미국 국무부는 주미 한국대사관에 “피해자 또는 그 가족과 접촉하지 말라”고 요청했었기 때문이다.
오 과장은 피해 여성 측의 태도나 입장이 이번 사건 수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건은 기본적으로 형사 사건이다. 피해 여성 측이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경찰이 사건 수사에 착수한 이상 피해자는 더 이상 수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윤 전 대변인이 미국에서 한인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때 제1차 피해자는 미국이고, 제2차 피해자가 그 여성이라는 게 미국 경찰 당국의 기본적인 인식이다. 그 피해 여성은 신고를 취소할 수 없다. 만약에 그 피해 여성이 수사에 영향을 미치려 하거나 수사 및 향후 재판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면 사법 당국으로부터 구금 등의 처분을 받게 된다.”
사건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피해 여성 측은 언론과의 접촉을 극구 꺼렸다. 미국에서 30년가량을 산 피해 여성의 부모가 사건 수사 중에 언론에 입장을 밝히면 수사 과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 과장은 피해 여성의 언론 접촉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여성이 언론에 입장을 발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여성의 자유다. 경찰이 말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본인에게 득이 될 게 없지 않은가. 피해자 측이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사건에 관해 얘기하면 법정에서 그 발언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법적으로나 실질적인 득실을 고려할 때나 피해 여성은 할 말이 있어도 재판까지 기다리는 게 좋다.”
미국 수사 당국이 수사 상황에 대해서는 일절 알려주지 않았지만 한국 기자들이 매일같이 경찰청과 검찰청에 체크를 했기 때문에 중요한 변화의 흐름을 감지할 수는 있었다. 우선 워싱턴 DC 경찰청은 지난해 5월 8일 수사에 착수한 뒤 7월 24일에 수사결과를 검찰에 넘겼다고 확인했다. 수사결과가 검찰에 넘어간 날짜가 24일인지 알 수는 없으나 워싱턴 경찰청 대변인실은 24일부터 기자들의 전화를 검찰청으로 돌렸다. 이는 곧 경찰청이 3개월 반 이상 이 사건 수사를 계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건을 넘겨받은 연방 검찰청은 7월 말부터 8월이 끝나갈 때까지 이 사건을 움켜쥐고 있었다. 기자가 검찰청과 경찰청 관계자들에게 지난해 9월 10일에 확인해 본 결과 이 사건은 국무부로 넘어가 있었다. 이 사건을 국무부가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수사 당국의 한 관계자는 이 사실을 당분간 기사화해서는 안 된다고 누차 강조했었다.
기자가 이 사건이 국무부로 넘어갔다며 그 배경을 취재하려고 한국 정부 당국자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정부 당국자들은 국무부가 사건 처리에 개입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 당국자들도 이 사건이 국무부로 넘어가 있는 사실만큼은 나중에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윤 전 대변인의 변호를 맡은 김석한 애킨 검프 수석 파트너의 영향력이 이 사건 수사가 장기화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김 변호사가 속한 애킨 검프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막강한 로비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대형 로펌이다. 이 로펌이 연방 검찰청을 상대로 검찰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사건 처리 속도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관측이 나왔다. 김 변호사는 이 사건이 대중의 뇌리에서 어느 정도 사라질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게 윤 전 대변인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경죄인가, 중범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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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5월 11일 윤창중 전 대변인이 기자회견에 앞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
만약 경죄이면 한미 범죄인인도 대상 범죄가 아니어서 윤 전 대변인이 한국에서 버티고 있으면 실질적인 후속 절차를 진행하기 어렵다. 반면 중범죄 혐의를 받으면 윤 전 대변인이 미국 워싱턴 DC로 와서 재판을 받는 스펙터클 법정 드라마가 전개된다.
아마 한국 기자들이 워싱턴 경찰청과 검찰청 및 윤 전 대변인의 변호인인 김석한 변호사,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취재를 할 때 경죄인지, 중범죄인지 물어보지 않고 넘어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김석한 변호사와 한국 정부 측은 경죄 쪽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그러나 워싱턴 경찰청과 검찰청 관계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죄가 될 수도 있고, 중범죄가 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 답을 알고 있는 미국의 경찰과 검찰이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잡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자들로서는 끝까지 양쪽 가능성을 모두 열어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석한 변호사는, 사건 경과를 물어볼 때마다 “왜 그렇게 한국 기자들이 이 사건에 신경을 쓰느냐”고 반문했다. 기자가 사회적으로 관심 있는 사건이 아니냐고 반문하면 김 변호사는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고 단언했다. 김 변호사를 상대한 취재는 늘 이렇게 첫 단추부터 어긋났다. 김 변호사는 한국 기자들이 신경을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사건은 한마디로 해프닝이다. 지난해 5월에는 윤씨가 청와대 전 대변인이었기 때문에 큰 이벤트로 여겨졌다는 점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 민간인이다. 또 피해 측면에서 봤을 때에도 심각한 수준의 범죄가 발생했던 게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조용하게 해결하는 게 모두에게 좋다.”
그가 민간인이 됐다 해도 당시의 성추행 혐의가 달라지는 게 아니지 않으냐고 기자가 따졌다. 김 변호사는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윤 전 대변인이 경죄에 해당하는 일을 저질렀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주미 한국대사관의 정부 관계자들도 경죄로 결론난 것 같다고 기자들에게 귀띔했다. 수사결과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미 범죄인인도조약까지 검토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 여성 측과 미국 경찰관들의 입장은 달랐다. 피해 여성의 아버지 A씨는 지난해 5월 15일에 기자와 만나 “어디 엉덩이를 한 번 툭 친 것 가지고 그랬겠느냐”며 그보다 심각한 성추행이 있었음을 강력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워싱턴 경찰청의 폴 맷캐프 대변인은 경죄인지, 중범죄 혐의인지 물어보면 언제나 같은 대답을 했다. 그는 “사건 보고서에 경죄로 돼 있지만 경찰이 수사를 마친 뒤에 어떤 죄목을 적용할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속보다 정확을 강조하는 미국식 수사
이번 사건 수사에 참여한 워싱턴 경찰청의 조셉 오 형사과장은 경죄인지, 중범죄인지 여부를 놓고 한국 언론이 널뛰기 보도를 계속하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 경찰이 한국 언론사가 보도한 기사 내용을 모두 다 보고 있다. 수사결과는 수사가 완전 종결될 때까지 누구도 공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이 여러 가지로 보도하고 있더라.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수사 내용을 언론에 흘리면 그 정보를 흘린 경찰관은 파면을 당하거나 징역을 살게 돼 있다. 그러니 누가 수사 과정을 공개하겠느냐.”
오 과장은 경찰청 사건 보고서에 ‘경죄, 성추행’이라고 돼 있는 이유도 이렇게 설명했다.
“사건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사건의 모든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경찰관은 처음에 들은 신고 내용만을 토대로 피해자의 허락 없이 엉덩이를 만진 경죄 사건이라고 기술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제목을 단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성범죄 전문 수사관이 추가 수사를 할 때 죄목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 여성의 신체를 한 번 만졌는지 아니면 두 번 만졌는지에 따라서도 죄목이 달라질 수 있다. 또 인턴을 호텔 방으로 부른 정황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리가 수사를 할 때에는 일련의 행동을 연결해서 전체 그림을 보려고 한다. 행동을 하나씩 나눠서 보는 게 아니다. 행동의 패턴이 범죄의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 전체적인 행동을 보았을 때 경죄인지, 중범죄인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한때 검·경이 죄목을 놓고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경찰은 경죄로 결론을 냈으나 검찰이 중범죄 쪽으로 몰아 가려 한다는 얘기도 퍼졌다.
오 과장은 그 소문을 확인하려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검찰과 경찰이 견해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추측일 뿐이다. 수사권을 행사하는 경찰이 수사를 마치면 무슨 죄목을 붙이는 게 좋을지 입장을 정해서 검찰에 결과 보고서를 넘기는 것은 사실이다. 검찰은 그 보고서를 검토하면서 향후 전개될 형사재판에서 승산이 있는 죄목을 붙여 혐의자를 기소한다. 이때 검찰이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반드시 재판에서 이겨야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혐의자가 가장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가장 높은 단계의 죄목을 붙이는 것이다. 경찰도 혐의자가 가장 강력한 처벌을 받도록 기소하는 데 전적으로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만약에 검찰이 혐의자의 처벌 수위를 높이기 위해 경찰에 보강수사를 요구할 수도 있다. 경찰과 검찰이 이런 협의와 조정 과정을 거쳐 최종적인 죄목을 결정하면 검사가 기소 절차를 밟는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는 못한다. 죄목은 경찰이 법원으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 받을 때 그 체포영장에 명확하게 나와 있다.
죄목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내용을 죄목으로 정한다. 경죄와 중범죄가 종이 한 장 차이로 갈릴 수가 있다. 경죄와 중범죄가 섞여 있다면 당연히 중범죄로 가는 것이다. 체포영장에 경죄의 내용을 열거하지는 않지만 재판 과정에서 범죄의 상세한 내용이 드러나게 된다.”
오 과장은 또 한국 기자들이 경죄인지, 중범죄인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미국 경찰 당국은 그런 문제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경찰 당국은 정정당당하게 이 케이스를 수사하겠다는 입장을 지켰다. 경죄인지, 중범죄인지 성격 규정을 먼저 하고 수사하는 게 아니다. 수사를 해 보고, 어떤 결론이 나오는지 따져 보는 것이다. 우리는 수사 마무리를 위해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체포영장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체포영장을 집행할 수 있는지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또 공소시효 문제로 체포영장을 집행할 수 없다는 점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영장이 떨어지면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집행하겠다는 게 우리의 기본 입장이다.”
한국의 6월 지방선거와 수사결과 발표 시점
미국 사법 당국과 국무부가 가장 신경쓰는 대목은 윤 전 대변인의 법적 신분이다. 미 국무부가 이번 사건에 개입한 것도 그의 신분 문제에 대한 외교적 판단 때문이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국무부가 몇 개월에 걸쳐 윤씨 사건과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고, 법적인 검토 작업을 했지만 국가 수반의 미국 방문을 수행한 대변인과 같은 고위 공직자가 연루된 유사 사건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특히 워싱턴 경찰청과 검찰청이 윤 전 대변인의 혐의를 성범죄의 5단계 중에서 가장 수위가 낮은 ‘경죄 성추행’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요란한 사법처리에 국무부가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의 고위 공직자가 미국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대체로 일반에 공개하지 않은 채 양국 정부가 협의해서 ‘조용히’ 처리해 왔다. 물론 스트로스 칸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성추문 사건 등 일반에 널리 알려진 사건은 예외이다. 칸 전 총재는 2011년 5월 뉴욕의 한 호텔에서 알몸 상태로 있다가 호텔 여성 청소원을 성폭행하려 했었다. 뉴욕 경찰은 칸 전 총재가 탑승한 비행기가 이륙하기 10분 전에 그를 체포하고, 뉴욕의 한 아파트에 보호 수감했었다.
미국 경찰과 검찰 및 국무부는 윤씨에 대한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는 쪽이라고 한다. 특히 한국 정부가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신속한 수사를 미국 정부 측에 요청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로서도 윤씨를 기소하는 데 따른 외교적 부담을 덜 수 있게 됐다고 이 소식통이 설명했다.
남은 문제는 기소 시점이다. 이번 사건 수사가 장기화하고 해를 넘기면서 미국 사법 당국의 윤 전 대변인 기소 시점이 한국 내에서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커졌다. 바로 6월로 예정된 한국의 지방선거 일정 때문이다. 통상 성추행 사건 수사에 1년 정도 소요된다면 이번 사건 수사 발표가 사건 발생일인 5월 7일께 나올 수 있다. 한국의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미국 측이 윤 전 대변인 사법처리 작업에 착수하면 한국의 선거 분위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 사법 당국이 윤 전 대변인 기소 시점을 6월 지방선거 이후로 늦춰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이 말했다. 특히 한국 지방선거의 열기가 후끈 달아오를 때 미국 검찰과 경찰이 이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지는 말아 달라는 게 한국 측의 주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 처리의 열쇠는 현재 미국의 검찰이 쥐고 있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미국 국무부가 한국의 지방선거를 의식해 수사결과 발표 시점을 조절하는 게 좋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이를 검찰에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미국 검찰과 경찰이 이번 사건의 정치·외교적 파장까지 고려하지는 않고 있는 것 같다”면서 “한국의 지방선거를 의식해 미국 사법 당국이 윤씨의 사법처리 시점을 조정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미국 검찰이 올해 상반기 중에 윤씨를 기소할 것이라는 게 워싱턴 외교가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인터뷰] 윤창중 사건 맡은 김석한 변호사
“윤창중 미국으로 보내라는 건 제 얼굴에 침뱉기”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윤 전 대변인이 변호사 선임을 참 잘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김석한 변호사가 들고 있는 방패는 일단 한국 기자들의 취재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 냈다. 기자는 김 변호사와 사건의 고비마다 여러 차례 장시간 통화하고, 실제로 만나 취재를 했지만 그에게서 새로운 정보를 얻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이번 사건을 조용히 매듭짓는 게 모두에게 좋다는 이유로 공개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그러나 지난 1월 2일 그가 서울을 방문하기 앞서 《월간조선》 기고를 위해 꼭 필요하다며 인터뷰 요청을 하자 마지못해 시간을 내주었다. 그는 대형 로펌의 수석 파트너로 일하고 있지만 그의 주요 고객이 한국 기업과 한국 기업인이다. 김 변호사는 미국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국익을 지켜 왔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이 때문에 윤 전 대변인 사건도 그와 한국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생각에서 수임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민주당 등 정치권과 여성계 등이 윤씨를 미국으로 보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체포영장이 나왔다고 해서 대통령의 대변인으로 일했던 사람이 미국에 간 전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 조용히 끝낸다. 문제가 있어도 자국에서 벌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사대주의 문제를 얘기하는데, 그렇게 미국으로 보낸다면 그것은 사대주의가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 백악관 대변인이 그런 일에 연루됐다면 100% 미국으로 데려간다.
만약에 윤씨의 신병이 미국으로 넘어오면 한국이 약한 나라라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다. 윤 전 대변인이 미국에 와서 재판을 받도록 한다면 그것은 한국 입장에서 누워서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다른 나라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미국도 외국에서 자국민의 문제가 생기면 100% 자국으로 데려온다.
그런데 왜 한국이 그 사람을 미국으로 보내야 하느냐. 미국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윤 전 대변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전체의 문제이다.
윤씨가 미국에 온다, 오지 않는다는 식의 얘기는 처음부터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번에 그가 미국에 오면 잘못된 선례를 남기게 된다. 한국을 망신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일단 미국에서 체포영장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군이 외국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거의 모두 미국으로 데려오지 않느냐. 만약 백악관의 제이 카니 대변인이 한국에서 그런 일을 했으면 미국이 한국에 신병을 맡기겠느냐.”
“한국 정부가 미리 면책특권 포기하면 안 돼”
—한국 정부 측이 지금이라도 수습할 여지가 있나.
“한국 정부가 ‘미국이 간여할 일이 아니다(none of your business)’라고 하면 된다. 다른 나라도 다 그렇게 한다. 지금까지 그런 유형의 사고가 왜 없었겠느냐. 외국 정상이 미국을 방문할 때 외국의 고위 공무원이 술, 마약, 여자 등의 문제에 연루되는 등 별별 사건이 다 일어나지만 조용히 끝이 나는 것 같다. 그래서 미국에서 유사한 사건의 판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나라가 하지 않는 일을 우리가 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윤씨 변호를 맡은 것도 윤씨 개인 때문이 아니다. 윤씨를 위한 최선의 결과가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도 최선이기 때문이다.”
—윤 전 대변인이 당시에 외교관 여권이 아니라 공무원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면책특권이 적용될 수 있나.
“면책의 종류 및 범위는 여러 가지이다. 공무원 여권이냐, 외교관 여권이냐는 식의 얘기는 전체를 보지 못하면서 하는 말이다. 면책특권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외교관 면책특권이고, 또 하나는 공무 수행 면책특권이다. 윤 전 대변인은 대통령을 공식 수행해서 미국에 온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공무 수행 면책특권 대상이다. 우리가 수많은 케이스를 찾아보았다. 정부 대변인이 외국에 나가서 문제를 일으켰다고 해서 그 나라에 신병을 넘겨준 사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백악관 경호인들이 콜롬비아에서 매춘 사건에 연루됐을 때 어떻게 처리했는지 보라. 당장 미국으로 데려오지 않았느냐.
미국 시민권자가 피해자이고, 미국 경찰과 검찰이 개입돼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미국 법 절차에 맡겨야 되는 게 아니다. 윤 전 대변인이 엄연히 대통령 공무 수행을 위해 미국에 와서 일어난 사건인데 한국 정부가 미리 면책특권을 포기하면 안 된다. 윤 전 대변인에 대한 면책특권 부여 여부를 떠나 한국 정부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미국이 사법처리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
한국이 이번에 면책특권을 포기한 전례가 남으면 한국에 결코 도움이 안 된다. 앞으로 한국의 고위 공무원이나 외교관이 다른 나라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에 한국이 다시 면책특권을 주장하는 데 어려움을 줄 수가 있다.”
—한국 정부의 초기 대응에 문제가 있었나.
“이 문제에 미국인 피해자가 연루돼 있고, 미국 경찰과 검찰이 개입된 미국의 법적인 케이스에 해당된다고 한국 정부 측이 판단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가 개입하면 곤란할 것이라고 예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국 정부가 좀 더 신중하게 이 문제에 대처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윤씨가 청와대 대변인이고, 대통령의 공식 수행원이었기 때문에 외교 관례를 존중해 조용히 사건을 매듭지으려 했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신속한 수사를 미국에 요청했는데.
“한국 정부가 신속한 수사를 요청했고, 한국 정치권 일각에서 윤씨를 즉각 미국으로 보내라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그런 말은 곧 미국이 윤 전 대변인을 사법처리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다. 미국 검찰이 한국의 고위 공직자를 사법처리하는 전례가 남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윤 전 대변인이 미국의 법정에 섰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라. 한국 언론뿐 아니라 미국의 언론도 큰 관심을 보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한국이 망신을 당하는 꼴이 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미국 측에 윤 전 대변인에 대한 사법처리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면 미국이 받아들일 것으로 보나.
“한국 정부가 지금이라도 입장이 바뀌었다고 말을 해야 한다. 한국이 이 문제를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하는 게 상책이라고 본다. 한 번 잘못된 결정이나 말을 했다고 해서 이를 번복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한국 정부가 입장을 바꾼다고 해서 미국 사법 당국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입장을 바꾸면 미국 사법 당국의 대응이 달라질 수 있나.
“미국이 한국 정부 입장을 고려할 것이다. 미국 사법 당국의 관계자들은 한국 정부가 마치 윤 전 대변인을 사법처리해도 좋다는 입장인 것으로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처리하겠다고 하면 미국 관계자들이 최소한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 상태에서 미국이 기소중지 및 수사종결 조치를 취할 수 있나.
“다른 나라는 이런 종류의 사건을 다 조용히 처리한다. 한국 정부가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면 미국이 외교 관계를 고려해서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타이밍이 이미 늦었다고 볼 필요도 없다. 타이밍이 아니라 사건의 본질이 문제이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본질적으로 조용히 끝내는 게 관행이다.
미국에는 1년 내내 수많은 정상이 오고 있다. 이때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나지만 미국이 외국의 대통령 방문단 일원을 법적으로 처리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이 너무 단기적으로만 이 문제를 본 것 같다. 이번 사건이 미칠 장기적인 영향을 생각해 봐야 한다.”
“윤 전 대변인은 99% 집에만 있다”
—변호사로서 이번 사건을 처리하면서 한국과 미국 간에 어떤 차이를 느꼈나.
“미국에서는 확정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 정반대이다. 무죄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유죄이다. 한국 언론이 윤 전 대변인에 대해 이미 유죄로 몰고 가지 않았느냐.
지금 양측의 주장만 있을 뿐이다. 영어로 말해서 ‘He said, she said’ 단계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 변호사, 혐의자, 피해자 등의 입장이 다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재판이라는 절차가 진행되는 것이다. 공정한 재판을 통해 사실이 드러나게 돼 있다. 윤 전 대변인이 재판을 받기도 전에 ‘유죄’로 몰고 가는 것은 온당치 않다.”
—성 범죄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이 중요한 것 아닌가.
“성추행 사건의 경우 신체의 성적인 기관을 만졌느냐, 성적 의도가 있었느냐는 두 가지 점이 관건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성적인 의도 없이 신체의 특정 부위를 만질 수도 있는 일이다. 아직 사실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다. 앞으로 무엇이 사실인지 규명돼야 한다.”
—이제 남은 절차는 무엇인가.
“검찰이 정식으로 기소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검찰은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안다. 검찰의 스케줄에 따라 이번 사건이 처리될 것이다.”
—그 시점이 언제가 될 것으로 보나.
“미국 검찰이 이 사건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사건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사건은 범죄의 내용으로 볼 때 중대한 것이 아니지 않으냐. 강간이나 구타가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케이스에 우선순위를 둘 수는 없어 사건 처리가 늦어지고 있다.”
—윤 전 대변인과 자주 접촉하고 있나.
“지금까지 3번 서울에서 만났다. 물론 윤 전 대변인으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소상하게 들었다. 변호사로서 의뢰인의 진술을 들은 상태라고 보면 된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재판이 진행될 경우를 대비해서 충분히 사실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윤 전 대변인의 증언 이외에 다른 사실 확인 작업을 하지는 않고 있다.”
—변호사가 어떤 사실 확인 작업을 하나.
“피해자 측의 진술이나 증언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진술에 대응할 수 있는 정보를 충분히 수집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변호사는 검찰과 피해자 측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도록 독자적인 조사를 실시한다. 예를 들면 윤 전 대변인 운전자, 호텔 종업원 등 목격자나 참고인과 접촉해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 아직 그런 독자적인 인터뷰 절차를 밟지 않고 있다.”
—윤 전 대변인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99% 집에만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한국 언론이 유죄로 판결을 받은 것처럼 그를 다루고 있으니 외부 활동을 하기 어렵게 된 것 아닌가. 그가 만약 미국에 와서 처벌을 받았어도 한국에서 이미 받은 벌보다는 가벼웠을 것 같다. 그는 일자리를 잃었고, 그의 가족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사생활의 뿌리가 뽑힌 상태에 있다.”
—피해 여성 측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
“윤 전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해서 피해 여성을 나쁘게 얘기한 것은 명백하게 잘못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시간이 지난 뒤에 차분히 생각해 보자. 이번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가서 무슨 득을 보겠는가. 이것은 윤 전 대변인에게 좋지 않은 일이고, 한국에도 좋지 않은 일이며 피해 여성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을 조용히 매듭짓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본다.”⊙
이윤석
(201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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