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검사 심재륜의 수사일지 ⑦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김현철 사건 (上) : 월간조선

청와대에는 단 한 줄 보고나 귀띔도 없이 한보 수사를 콱콱 밀어붙이던 1997년 3월 28일. 오후 5시 좀 넘어 내 방(중수부장실) 문 앞의 여직원 목소리가 날카롭다. 드문 일이다. 아마 전화를 걸어 온 누군가와 싸움이라도 붙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고, 문을 열고 내다보니 여직원이 수화기를 든 채 “술 취한 사람이 무조건 부장님을 바꾸라고 소리친다” 한다. “누구라더냐” 묻자 “김용태라는 분인데요”란다.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그러나 여직원으로서는, 아직 바깥이 훤한 그 시간에 대통령 비서실장이 설마 술에 취해 중수부장에게 큰 소리로 전화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터다. 나는 그저 “방으로 전화를 돌리라” 하고는 정중히 “어쩐 일이시냐” 물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대뜸 호통이 떨어졌다.

―중수부장, 그러면 안 돼요.

“….”

―신문에는 50%만 얘기하세요. (한보 수사 내용에 대해) 뭘 쓸데없이 죄다 일일이 불고 있는 거요.

“그건 오해십니다. 검찰에서 내는 자료나 브리핑하는 대로만 신문에 보도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자기들이 마구잡이로 취재해서 보도하고는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하고 갖다 붙이는 겁니다. 실장님도 기자 출신이시니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저희도 갑갑하지만, 뭐 크게 신경 쓰지는 마십시오.”

―그렇다면 뭔가 신문 대책이 있어야 하는 거 아뇨? 엉터리로 쓰는 기자들이 있으면 몇몇 구속해 버리시오. 물론 국민에게 필요한 사항은 발표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만, 어쨌든 (시시콜콜 알리는) 그런 식으로는 (언론 플레이) 하지 마시오.

“….”

―이봐요! 중수부장. 각하가 울고 있어요. 우리 각하가 ….

김 실장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욱하고 감정이 북받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전화기를 통해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마 자신이 옆에서 모시는 대통령 때문에 답답한 나머지 낮술을 들이켜고 곧바로 집에 들어갔나 보다.

각하가 울고 있다 …. 그것은 한보 부도가 전격 발표된 바로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누구든 바라지도 예상치도 못한 사태의 진전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칼을 뽑은 것을. 한보 사태의 한가운데 서 있던 나는 그저 착잡할 따름이었다.

대통령을 울게까지 한 한보 사태와 김현철 그리고 나. 이 셋이 얽힌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내가 한보 부도와 알게 모르게 엮여 들어간 그해 벽두의 검찰 인사부터 시작하는 게 맞을 것 같다.

1997년 벽두의 난데없는 검찰 인사

눈이라도 오려나 …. 잔뜩 찌푸린 하늘의 1997년 1월 17일 광주지방검찰청. 마치 알람을 맞추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오전 11시 정각에 지검장실 전화벨이 따르르 울렸다. 여직원이 받아 넘겨준 저쪽 목소리는 서울의 대검(大檢) 차장.

―아, 심 검사장. 나요.

“어이쿠, 이 먼 데까지 웬 일이십니까.”

―영전 소식 들으셨는가 해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야 원체 떨어져 있으니 어떤 얘기들이 돌아다니는지 도통 알 길이 있어야지요.”

―허허, 좌우지간 축하합니다. 인천으로 영전하시게 됐네요.

“인천요?”

광주에 부임한 지 1년5개월. 인사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던 터였다. 원래 정기인사는 한참 뒤 가을(9월)이다. 설사 앞당긴다 해도 으레 겨울 나고 3월쯤이 관례다. 검찰총장이나 법무부장관이 바뀐 것도 아니고, 또 인사를 앞두고는 필경 이런저런 소문이 먼저 돌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런데 웬 인사? 게다가 인천이라?

얼핏 겉으로야 관할인구 200만인 광주지검장에서 300만 인천지검장으로, 또 수도권으로 자리를 옮기니 언필칭 영전이랄 수도 있겠다 싶지만 현실은 다르다. 인천(지검장)이라면 검사장으로는 으레 옷을 벗기 직전의 고참이 가는 ‘마지막 자리’ 아닌가. 역시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을 대검 차장은 “광주에서 인천으로 올라오시니 섭섭한 자리는 아닐 겝니다”라고 굳이 뒷말을 붙인다.

그러면 다른 쪽은? 다들 관심을 갖는 검찰 상부의 핵심자리들은 어찌 됐을까. 특히 요직 중 요직인 서울지검장은? 사법시험 6회 최환 서울지검장 후임으로는 8회 출신 안강민 대검 중수부장이, 또 중수부장 자리에는 9회 출신 최병국 대검 공안부장이 임명됐단다. 결국 나를 포함한 7회생들은 일단 핵심요직에서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난 셈이다.

한보, 터지다

신광식 제일은행장, 김시형 산업은행 총재, 우찬목 조흥은행장(왼쪽부터)이 1997년 1월 23일 제일은행 본점에서 한보철강 부도결정을 발표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당장 내가 인천으로 가게 됐다는 것, 그러면서 나를 포함한 사시 7회가 속된 말로 ‘제쳐졌다’는 두 가지 사실이 겹치면서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인사가 그렇게 났다는데 어쩌랴. 도대체 무슨 사정일까? 예정에 없던, 더욱이 기수(期數) 서열까지 건너뛴 이번 인사의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전화를 끊고 자리에 앉아 모처럼 담배를 한 개비 깨무니, 짚이는 바가 없지 않다.

대한민국 최상선의 법무 라인이 ‘한 줄’로 죽 늘어섰으니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울산 출신 법무부장관(안우만)에 양산 출신 검찰총장(김기수), 그리고 이번 인사로 임명된 마산 출신 서울지검장(안강민)과 울산 출신 대검 중수부장(최병국)까지 PK(부산·경남)다. YS(김영삼)의 대통령 임기 말년, 일사불란하게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는 1월 23일 목요일 한보그룹 부도 사태가 터졌다. 이날 오후 5시 반, 서울 제일은행 본점 회의실에서 열린 한보철강 채권단 회의에서 한보의 부도 처리가 결정되고, 신광식 제일은행장이 이 같은 사실을 발표한 것이다. 검찰 인사 발표가 나고 배치까지 마친 1월 24일과 거의 동시였다.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이것이었구나’ 돌아가는 사정을 금방 감 잡을 수 있었다. 새해 벽두에 난데없이, 더욱이 핵심요직에 대한 인사를 단행해 검찰 쪽을 PK로 줄 세운 배경이 선명하게 머리 속에 그려졌다. 투자 규모만 5조원대인 한보철강의 부도 사태, 그 ‘뒤처리’를 검찰에 맡겨 어떻게든 파장을 최소화하고 넘어가려는 저쪽(청와대)의 뜻이로구나 ….

한보 부도 사태로 세상이 뒤집어진 어수선함 속에 광주를 떠나 1월 24일 인천지검장 취임식을 가졌다. ‘이렇게 30년 검찰 생활이 끝나가는구나. 이제는 내가 직접 수사할 일도 없고, 후배 기수들이 주요 자리를 치고 올라왔으니 더 이상 내가 갈 자리도 없고 …. 마음이나 편안하게 가져야 한다.’ 이래저래 불편한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방문자들이 인사차 혹은 아예 취임 첫날부터 민원 청탁을 하러 지검장실에 줄을 잇는다.

내가 중수부장이라면…

참으로 오랫동안 수사하는 데만 진력했던 습관 혹은 관성 때문일까. 몸은 인천에 있으되 신경은 줄곧 서울로 뻗는다. 말할 것도 없이, 과연 검찰이 어떻게 한보 사건을 처리해 나갈 것인가 궁금증이 솟는 것이다. 인천지검장 취임식을 마친 다음 날과 그 다음 날, 그러니까 1월 25일 토요일과 26일 일요일, 습관대로 휴일임에도 청사에 출근했다. 나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게 되니 자연스럽게 부질없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채운다. 때가 때인지라 상상의 ‘화두’는 역시 한보 수사다. 그것도 ‘내가 만약 중수부장이라면 …’이라는 가정을 해 놓고는.

<… 이런 시기에 누가 중수부장이 되든 결국 무거운 돌덩어리에 짓눌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 과연 저 중수부장이라는 자리가 빛나는 자리가 될까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리가 될까. … 지금 한보 수사는 검찰의 수사체질부터 확 뜯어고쳐서 어떤 난관도 돌파하겠다는 굳은 의지부터 세워야 한다. 필요하다면 인적 구성부터. … 국가정책이니 국가이익이니 하는 명분을 내세워서 해명성 수사나 정치권 눈치 보는 수사 따위를 해서는 안 될 것이고. … 범죄혐의가 포착되면 무조건 밀고 나가야 하고,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수사를 맡은 쪽의 책무다. … 정권이나 검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대와 국가의 요청을 기준으로 삼아야 ….>

그러다 눈을 떠 보면 그런 것들을 내가 뭣하러 걱정하는가, 부질없다는 생각뿐.

‘한보 문제에 대한 수사는 더 없이 선명하고 다부지게 해 내야 성공한다’는 내 상상과 달리 현실에서 검찰 수사는, 검찰의 한식구로서 보기에 안타깝기 짝이 없는 쪽으로 굴러갔다. 한보 부도가 발표되고 4일 만인 1월 27일 검찰은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주로 대출 관련 비리를 겨냥해 검찰은 신속하게 수사를 진행했다. 이윽고 수사에 착수한 지 24일 만인 2월 19일 검찰은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 등 9명을 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수사를 일단락지었다. 정 총회장과 김우석 내무부장관, 홍인길, 황병태, 정재철, 권노갑씨, 신광식 제일은행장, 우찬목 조흥은행장, 김종국 전 한보그룹 재정본부장 등이었다.

속전속결하겠다는 수사, 그러나…

금액으로만 무려 5조원대, 게다가 수백 수천 개 기업 및 허다한 사람들의 이해와 사연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켰을 중대한 사건을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속전속결로 처리한 것이다. ‘어떻게든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면서 사건을 빨리 수습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흡족할 만한 수사였다 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형편없는 단견(短見)이요 하책(下策)인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의 신속한(?) 일처리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악화시킨 것이다.

첫째, 검찰 수사의 진행과 마무리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평범하고 단순한 사건이라 해도 실제 그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물며 국가 경제를 흔들고 온 국민을 들끓게 한 중대하고 심각한 사건을 불과 3주 남짓, 그렇게 짧은 시간에 수습할 도리는 도저히 없다.

둘째, 은행장들을 사법처리하는 데 있어서, 한보 불법대출이 아니라 개인비리 혐의로 구속했다. 이 경우 그들의 뒤에서 한보 대출에 압력을 가했을 ‘몸통’에 대한 수사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검찰이 일찌감치 배후를 파들어 갈 의지를 포기해 버렸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다.

셋째, 실제로 국민과 언론과 야당이 당시 몸통이라고 주장하던 대통령의 둘째 아들, 즉 현철씨에 대해서는 검찰이 눈도 돌리지 않았다. 현철씨는 오히려 그런 주장을 내세운 야당 의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검찰은 그런 현철씨를 2월 21일 고소인 자격으로 한 차례 불러 조사한 뒤 무혐의 처리했다. 검찰이 현철씨에게 사법적인 면죄부를 준 꼴이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상황을 국민들이 모를 리 없었다. 사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일제히 검찰을 성토하고 나섰다. 특히 YS 집안의 평생 집사로 알려진 홍인길씨가 2월 11일 “난 깃터럭지에 불과하다”란 뒷말을 남기고 구속되면서, 이 표현이 한보 사태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감성의 키워드’가 되었다. 국민은 줄기차게 그리고 가열차게 “깃털 아닌 몸통을 잡아 내라”며 검찰을 압박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의 파장이 수그러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권과 검찰에 대한 여론의 압박은 커져만 갔다.

‘깃털’과 ‘몸통’

김현철씨의 YTN 인사개입 전화통화 내용을 공개해 파문을 일으킨 의사 박경식씨가 1997년 3월 12일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과 김현철씨의 관계 등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한보 사태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정치스캔들, 그것도 넘어 한보게이트로 번지며 YS 정권을 궁지로 몰아댔다. ‘깃털과 몸통’이란 구호가 난무하는 가운데 김 대통령은 “아들(현철)도 조사하라”고 발언한 데 이어 2월 25일에는 한보 사태 관련 대국민 사과 담화를 냈다.

어수선한 중에 3월 10일 이른바 ‘박경식 녹화테이프’가 돌출, 폭로됐다. 현철씨가 대통령 주치의 박경식(비뇨기과)씨에게 치료받을 당시, 그 진료실에 몰래 설치된 폐쇄회로(CC) TV에 의하여 녹화된 장면들이 전격 폭로된 것이었다. 그 장면들 가운데는 현철씨가 직접 전화로 모 방송국에 인사압력을 넣는 모습과 구체적인 대화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그때까지 의혹으로만 제기되고 현철씨 자신도 극구 부인해 오던 부당한 각계 인사 개입과 국정농단 행위가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는 불타오르던 여론에 기름을 끼얹었다. 당연히 한보 부도 사태를 둘러싼 각종 비리에도 그가 직간접으로 관여했으리라는 세간의 의혹 역시 더더욱 커졌다.

어떻게든 한보 사태의 파장을 단시간에 무마하려는 눈치가 역력하던 정권의 얄팍한 의도는 좌절되고 있었다. 앞서도 나의 추측을 잠깐 내비쳤지만, 한보 사태에 대응하는 정권의 속내는 누가 봐도 뻔한 것이었다.

한보그룹이 철강사업을 한다면서 5조7000억원대 천문학적 액수의 은행대출을 받고도 계속 ‘돈을 더 달라, 더 달라’한 것이 빌미였다. 그러나 밑 빠진 독, 금융권과 정부로서도 더 이상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한보의 부도를 결정하되 그 파장은 일정 선에서 차단해야 했다. 이에 따라 후속 처리를 맡을 검찰 인사까지 미리 단행한 것이다.

그러나 사태가 무마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의 극한 반발을 일으켰다. 당시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여론을 업고 연일 “검찰의 PK 라인을 개편하고 ‘몸통’을 잡아 내라”며 YS정권과 정부를 밀어붙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고건 총리까지도 법무부장관을 통해 검찰의 한보 사태 재수사를 종용했다. 온 나라가 펄펄 끓고 있었다.

위기의 검찰

국민의 분노와 반발은 특히 한보 사태 처리의 최전선(?)에 자리 잡고 있던 검찰에 집중됐다. 검찰이 한보 수사를 일단락하고도 열흘 가까이 지난 2월 27일―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웬만한 사건이라도 대개 관심이 시들해지게 마련인데―신문에 한 기업인의 광고가 실리면서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 제목은 <마피아의 총대로 만든 잣대>였다.

자신이 직접 문안을 쓰고 자기 돈으로 지면을 산 ㈜재이손 산업의 이영수 사장이 <새로운 역사의 물길을 잡아야 하는 중차대한 순간에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부패하고 무능하면서도 교활하고 줄을 잘 타는 검찰수뇌부>라고 검찰을 질타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고용주로서 부패한 권력의 시녀로 하수인인 검찰 수뇌부를 이날 자로 해고한다>고 일갈했다. 나아가 <부정부패 비리의 실질적 옹호세력은 다수의 정치적 검찰과 그 수뇌부>라 지적하고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백해무익한 ‘영감’들을 그냥 둘 것이냐>고 울분을 터뜨렸다.

당시 한보 사태와 이에 대한 검찰의 대응을 보는 국민의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것 이상의 내용이었다. 이 광고는 언론의 사설들과 맞물리며 한보 수사에 대한 국민적 분노의 파장을 증폭시켰다. 언론은 연일 검찰의 축소 수사를 비판했다. 검찰은 여야 핵심 정치인과 금융권 주요 관계자들을 신속히 구속시키고도 ‘권력의 시녀’ ‘썩은 고기만 먹는 하이에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검찰보다 먼저 국민의 분노에 대응하고 나선 것은 정권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2월 25일 대국민 사과 담화를 통해 “한보 사건 관계자들의 정치적·행정적 책임을 묻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실제로 3월 5일 안우만 법무부장관을 경질하는 등 개각을 단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3월 10일에는 앞서 언급한 박경식 테이프 공개의 충격과 함께 한보 사태의 ‘몸통’을 규명하라는 국민의 목소리가 더더욱 커지게 됐다.

기자들이 귀띔한 중수부장 경질설

한보 특혜대출 의혹사건과 관련, 황병태 의원과 김우석 내무장관이 소환된 1997년 2월 12일 김기수 검찰총장이 긴장된 표정으로 대검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이렇듯 사태가 확산 일로에 있는가 싶더니 급기야 3월 중순 넘어서는 대검 중수부장 경질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3월 18일이 지나 평소 친분이 있던 기자들에게서 전화가 불쑥불쑥 들어온다. 그것도 ‘중수부장이 경질된다는 게 사실이냐’는 확인성 질문이 아니라 ‘후임이 누구일 것 같으냐’는 전화들이다.

기자들이 실제로 중수부장 교체의 낌새를 알아챈 것인지 아니면 넘겨짚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 “무슨 소리냐”고 응대할 따름이다. 기자들의 질문에는 다분히 ‘당신이 중수부장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뉘앙스가 묻어 난다. 내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속으로 웃고 만다.

3월 20일에는 한 기자가 직접 인천지검장실에 찾아와서는 대놓고 “오늘이나 내일 중수부장 경질이 정해지고, 후임자가 복수 추천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만약 중앙에서 심 검사장님한테 전화가 오면 곧바로 좀 알려주십사”라며 특종 의지를 내비쳤다. 그런 그의 말을 나는 역시 가벼운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내가 중수부장이 된다? 그때의 나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보 사태와 같은 중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장수를 바꾸는 일이란 거의 없다. 더욱이 이미 그 자리는 나보다 사법시험 아래 기수인 안강민 검사장(8회)이 거쳐 갔고, 그 무렵에도 역시 두 기수 아래인 최병국 검사장(9회)이 맡고 있었다.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리지 않기로 소문난 것이 검찰 인사다. 그런 관행상, 사법시험 7회 출신인 내게 그 자리가 돌아올 일은 다시 없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광주지검장에서 인천지검장으로 인사 문제가 다 정리된 터에 “다시 중수부장이 바뀐다 해도 내가 그 자리에 갈 일은 없지’ 하고 나는 마음을 온전히 비워 놓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흘렀다. 1997년 3월 21일 금요일 오전 11시. 인천지검 간부들과 아침회의를 마치고 (회의실에서) 내 방으로 돌아오는데 여직원이 “총장실입니다”라며 수화기를 건네 왔다. 때가 때이니 만큼 유쾌한 일은 아닐 테고 …. 일단 전화를 받았다.

“중수부장을 맡아 주시오”

―아 심 검사장? 나요.

“예. 검사장입니다.”

―부임한 지 얼마 안돼서 많이 바쁘지요?

평소 시원시원한 경상도 사투리 대신 김기수 총장은 다소 지친 목소리였다.

“예. 무슨 ….”

“지금 … (상황이) 돌아가는 거야 잘 아실 테니, 전화로 일일이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 아무래도 심 검사장이 날 좀 도와주어야겠어. 정부에서 중수부장을 맡으라고 결정되었으니 …. 일단 서울로 올라와서 …. 그러니까 (3월) 24일부터 대검에서 근무할 준비를 얼른 좀 해 주셔야겠소.”

뜻밖이었다.

검찰에 몸담은 30년을 주로 특별수사로 뛰었던 경력이나 특별수사에 애착이 깊은 ‘개인 적성’에 비추어, 내가 중수부장 자리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더욱이 나는 한보 사태와 같은 국가적인, 중대한 일의 수사를 내심 맡아 보고도 싶었다. 그래서 혼자 머리 속으로 이른바 ‘수사 시뮬레이션’까지 해 보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무리 꽃방석이라도 따뜻한 봄날 폭신폭신 깔려야 제격이다. 바람 쌩쌩한 동지섣달에 차디찬 타작마당에 철퍼덕 깔아 놓은 것은 결코 꽃방석이 아니다. 한보 부도 사태에 대한 검찰의 1차 수사가 일단락된 그 시점의 중수부장 자리가 딱 그랬다. 검찰에 유례없이 혹독한 비난이 쏟아지는 이 ‘엄동설한’에 중수부장을 맡으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자 김 총장은 못을 박겠다는 듯 “그럼 도와주시는 걸로 알고, 자세한 건 월요일에 만나 이야기합시다”라며 탁 전화를 끊었다. 지끈지끈, 머리 속이 엉클어지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2시. TV 뉴스는 벌써 ‘법무부, 중수부장 경질 방침’을 보도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내가 중수부장 자리를 맡지 않을까 저쪽에서 지레 걱정이 되어 언론에 흘렸는지, 이미 중수부장 인사는 빼도 박도 못하는 기정사실이 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언론은 그날을 검치일(檢恥日)이라고도 표현했다. 임명된 지 불과 두 달, 그것도 중요한 수사를 진행하던 대검 중수부장이 여론에 떼밀려 전격 교체된 사태를 빗대어 개탄하는 표현이었다. 내가 중수부장으로 임명되던 그때, 검찰은 유례없는 불신과 비난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나로서는 뭔가 차분하게 생각을 좀 정리해야 하겠는데, 도무지 앞이 캄캄할 따름이었다. 사람이란 참 속 모를 짐승이라, 중수부장이 아닐 때는 중수부장 자리를 상상하더니 정작 자리를 맡으라고 하니 속이 타 들어간다. ‘이건 나더러 총대를 메고 죽으라는 얘기구나’ 하는 생각만 맴돌았다.

여직원에게 “어떤 전화든, 누구든 연결하지 말라” 이르고는 청사 옆 사우나로 갔다. 우선 세상과 나를 차단시켜 놓고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수증기가 속절없이 피어오르는 욕조에 웅크리고 들어앉아 차근차근 상황을 복기(復碁)했다. 왜 굳이 정권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에게 한보 재수사를 맡겼을까 ….

그 부분은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정권과 검찰과 온갖 의혹과 국민의 분노가 뒤범벅된 난리통에 정권이 ‘흘러간 물줄기’인 나를 불러 낸 이유는 불을 보듯 선명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속내일 터였다.

‘… YS 정권과 아무런 연고도 없고 특별수사통으로 통하는 나에게 한보 수사를 맡겼는데 만약 1차 수사 때처럼 아무 것도 나오지 않으면? 그렇게 되면 현철씨 등 정권은 더 이상 한보 사태와 관련해 뒷말이 남지 않는 ‘깔끔한 면죄부’를 받게 된다?’

‘民選 중수부장’

1차 수사 때와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대검 중수부장 한 사람만 교체했다는 것이 그 명백한 정황증거였다. 사람이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가졌다 해도 혼자 할 일이 있고 못할 일이 있다. 중수부장 임명권을 가진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수사에 정통하다 해도 한보 사태에서만큼은 ‘뭔가’를 찾아내기 어려우리라 판단했던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손에 쥔 게 없었다.

당장 서울이 내게는 낯선(?) 임지였다. 1994년 9월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서울을 뜬 이후 광주지검장을 거쳐 인천지검장까지, 꼬박 2년7개월 동안 지방을 돌았다. 아무런 숙제 없이 단순히 서울로 발령이 난다 해도 낯선 판에, 한보 수사라는 엄청난 숙제까지 짊어지고 올라와야 했다. 한보 사태에 대한 이야기나 정보는 일반인과 다름없이 그저 언론을 통해 얻는 것뿐이었다.

조직은커녕 검찰 내부에서 경제·정치권에 이르기까지 나를 도와줄 사람도 전무했다. 당장 직속상관인 검찰총장부터 김 대통령이 임명한, 대통령의 사람이었다. 나와 한몸으로 움직여야 할 수사팀도 1차 수사 때 그대로였다. 그나마 1차 수사를 거치는 동안 의욕도 사기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무슨 흥이 나서 나를 도와 날밤을 새우겠는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분명한 사실 혹은 엄연한 현실은 한 가지, 내가 그 시점에 중수부장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과연 어떻게 한보 수사를 진행해야 할 것인가, 생각을 전혀 진전시키지도 정리하지도 못한 채 그날이 지났다.

3월 22일 법무부는 대검 중수부장 교체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한보 사태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규명하고 공명정대한 검찰 수사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고 심기일전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배경설명도 내놓았다. 말이야 아름답기 짝이 없지만 폭풍의 한가운데로 들어서야 하는 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손에 쥔 것은 없고, 정권이 무엇을 바라는지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마당에 떼밀리듯 서울로 올라가야 했으니 그런 속사정을 세상에 알아줄 이 누가 있을까. 중수부장 교체를 보도한 기사에 실린 내 이름 옆에는 ‘민선(民選) 중수부장’이니 ‘검찰의 9회말 구원투수’니 하는 수식어들이 속절없이 달려 있었다.

정권과 국민 사이에서

참여연대가 1997년 3월 20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연 나라살리기만민공동회에서 <만민보>라는 대자보에 시민들이 한보사태,현철씨,검찰에 대한 의견을 쓰고 있다.

당장 사람도 필요하고 정보도 필요한데 마음만 앞서 달려 나갈 뿐,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특별수사 검사로 숱한 사건을 다루었지만 언제나 철저한 사전 준비 없이는 수사를 개시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나의 철칙이었다. 이번처럼 수사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마음만 급해서, 인천지검을 떠나는 이임식에서조차 나는 한보 수사를 언급했다. “국가와 국민과 검찰의 장래를 위해 오로지 앞만 보는 수사를 해 나가겠노라” 천명했다.

‘잘 수습해서 덮으라’는 정권과 ‘철저히 파헤치라’는 국민 사이에 내가 있었다. 거대한 쇳덩어리 두 개가 나를 짓눌렀다. 하나는 현 정권이 무슨 의도를 갖고 있든 그것을 정면 돌파해 사건의 전모를 파헤쳐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땅에 떨어진 검찰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 국면을 뚫고 나갈 것인가―여의도(집)의 새벽하늘이 부옇게 밝아올 때까지 잠이 올 리 없었다.

그렇게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는 3월 23일, 대검 출근 하루 앞서 대검청사 인근에 위치한 서울 팔레스 호텔로 나갔다. 일요일이었지만 원체 조급한 마음에 중수부 김상희 수사기획관을 비롯해 중수부의 각 과장들을 그곳에 먼저 불러 모은 것이다. 돌아가는 이야기와 각 사람의 의견 등을 두루 들어 보면서 상황 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그날의 사전모임은 그보다 더 중요한 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수사팀의 사기 진작이었다.

전임 중수부장을 중심으로 그들 나름대로 그동안 최선을 다했을 수사팀이었다. 그럼에도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결국 낙담에 빠졌으니, 그 심정들이 오죽하겠는가. 설사 재수사를 통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둔다 해도, 그것은 곧 앞서 자신들의 1차 수사 때 잘못을 드러내는 꼴이 될 터이니 그 또한 난감한 결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수사팀이니 만큼 한보 재수사가 아니라 3차, 4차 수사를 한다 해도 쉽게 신명이 날 리 없을 터였다. 그런 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신명나게 수사에 매진하도록 다독거리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시종 밝은 분위기로 그들과 이날 사전모임을 갖고 헤어졌다.

“어디로 튈지 몰라서…”

1997년 3월 24일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출근하는 필자.

이윽고 3월 24일 월요일 아침. 과천의 법무부장관실과 차관실에 인사 차 먼저 들렀다. 최상엽 장관이 “심 부장은 주변에서 칭찬하는 분들이 많기는 한데, 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인물이라는 얘기들도 많아서 사실 (대통령에게) 추천할 때 고민이 많았다”며 웃는다. ‘어디로 튈지 몰라서’라는 장관의 격려 혹은 당부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나는 “국가와 국민과 검찰 모두를 살리는 수사를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오전 10시가 좀 넘어 대검에 도착했다. 이미 청사 현관 앞에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이 시점에 중수부장을 맡은 소감을 말해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속으로야 ‘골치 아프다, 고민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소감(所感)은 무슨, 나중에 대감(大感)이나 얘기하자”고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김기수 검찰총장실에 들러 인사할 때는 “수사검사를 5명 정도 보강해야 할 것 같다”고 진언했다. 물론 곧이곧대로 직설한 것은 아니었다. 앞서 팔레스호텔 사전모임 때 “김 총장이 한보 수사팀 인원보강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검사들의 귀띔이 있었던 까닭에 미리 생각해 두었던 기지를 부렸다.

“저쪽 과천(장관)에서, 인원을 보강해서라도 반드시 엄정하게 수사하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시더라”고 했다. 법무부장관이 말한 것을, 그것도 ‘강력하게’ 지시했다는데, 검찰총장이 그것을 들춰 가며 확인할 리 만무다. 김 총장은 “아, 그러면 그렇게 해야지”라면서 맞장구를 쳤다.

나로서는 이미 총장실에 처음 부임인사할 때부터 사실상 한보 수사를 위한 사전 포석에 들어간 셈이었다. 새로이 수혈되는 그들 5명이 나의 힘이 되리라 기대하면서.

폭풍 속으로

이윽고 오후 3시, 대검 안팎에 포진한 기자들과 만났다. 한보 사태가 터지고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대검 주변에는 늘 200여 명의 기자가 포진해 있었다. 한보 재수사를 지휘할 ‘사령관’으로서의 첫 공식 간담회 자리, 나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대로 짧게, 그러나 결연하게 수사에 대한 내 생각을 피력했다.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주춤거리는 수사, 머뭇거리는 수사, 조건을 다는 수사, 곁눈질하는 수사는 하지 않겠다. 앞만 보는 수사, 정도(正道)를 걷는 수사를 하겠다.”

공식 간담회를 마쳤는데도 기자들이 내 사무실 문 앞까지 따라붙는다(물론 이 같은 광경은 한보 재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계속됐다). 내 방에서 저만치 떨어진 복도 끝의 화장실을 갈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우습게도, 대검 중수부장이 되어 내부에 내린 제1호 지시가 “부장실에 세면대를 설치하라”는 것이었다. 급한 볼 일은 안에서 해결하도록 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바깥 출입을 삼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나 혼자만의 중수부장실. 그러나 그 자리는 그 무렵 혹독하게 휘몰아치던 거대한 폭풍의 한가운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