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6·25박물관’ 건립에 파주 시민들이 나섰다 : 월간조선

‘영국의 6·25박물관’ 건립에 이역만리 떨어진 한국의 한 지자체 주민들이 성금을 모금하고 나섰다. 파주시는 파주상공회의소, 자원봉사단체협의회,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파주시지회, 주민자치연합회 등 대표 44명이 모여 지난해 12월 6일 ‘영국의 6·25박물관 건립 지원위원회’(위원장 송달용)를 구성해 넉 달째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파주 시민들이 나선 것은 6·25 때 파주 임진강전투 참전부대인 영국 육군 글로스터연대 출신 기업인과 노병들이 ‘영국 6·25박물관(가칭·Great Britain's Korean War Museum)’을 건립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지원위원회 송달용 위원장은 “6·25전쟁 당시 영국의 희생과 관심, 글로스터연대의 깊은 인연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기쁘다”고 밝혔다.

영국 글로스터시에 건립 예정인 6·25박물관은 글로스터연대 출신 기업인과 참전용사들이 휴전 60주년이 되는 2013년 완공을 목표로 건립비용 약 45억원을 모금 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파주시민들이 모은 성금은 지난 3월 23일 현재 1억5200만원. 이에 따라 이인재 파주시장 등 파주시 관계자들은 지난 3월 22일 주한 영국대사관을 방문, 스콧 와이트먼(Scott Wightman) 대사와 성금 전달시기와 방법 등에 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이 시장은 “파주시민들이 자유 수호를 위한 역사를 기억하고 글로스터연대와의 깊은 인연에 대해 보답하고자 자발적으로 성금을 마련한 만큼, 시민들의 뜻이 잘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고, 이에 대해 와이트먼 대사는 “파주 시민들이 박물관 건립에 관심을 갖고 성금을 모아 준 데 대해 매우 기쁘고 감사한다”며 “영국 측 준비위 및 글로스터시와 접촉해 성금전달 방법 등을 신속하게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3월 22일 이인재 파주시장 등 파주시 관계자들이 스콧 와이트먼 주한 영국대사를 만나 성금 지원방안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글로스터성당의 자랑스런 유물

앤드루 새먼(Andrew Salmon) 《더 타임스》 서울특파원은 파주 시민들을 성금 모금의 대열로 이끌었다. 그가 지난해 11월 9일 《조선일보》에 투고한 ‘유럽의 첫 6·25전쟁박물관 건립을 돕는 길’이란 글이 파주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새먼 기자는 2년여 동안 임진강전투에 참전했던 생존자 50여 명을 인터뷰해 2010년 1월 《마지막 한 발(To The Last Round)》이란 단행본을 출간했다.

새먼 기자는 기고에서 “내가 아는 한 서유럽에는 한국을 단독 주제로 다룬 박물관이 없다”면서 “경제도 중요하고 문화 수출도 중요하지만 정치와 전략 역시 무시해선 안 된다”며 “그것이 전쟁 때 도와준 우방(友邦)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영국인인 그는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글로스터성당’을 아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글로스터성당은 영국 남서부에 있는, 1000년 넘는 성당이다. 연간 36만명이 찾아온다. 수백만 명이 직접 와 보지 않고도 성당을 봤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호그와트 마법학교 내부가 이 성당이다.

<해리포터> 영화엔 안 나오지만, 이 성당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유물이 있다. 성당 중앙 기둥에 걸린 30cm 길이의 켈틱 십자가다. 이 십자가는 제임스 카네 영국 육군 중령이 6·25 때 인민군 포로수용소 독방에서 손으로 깎은 것이다. 카네는 글로스터연대 소속이었다. 1951년 임진강 전투 당시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싸웠다. 사흘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그가 이끌던 대대가 비극적으로 궤멸했다. 그는 2년간 포로 생활을 했고, 그중 18개월을 독방에서 십자가를 깎으며 보냈다. 글로스터시가 자리 잡은 초록빛 구릉지대는 1951년의 임진강과 불가사의하게 닮았다. 그래서 한국과 영적인 인연이 깊은 건지도 모른다.

글로스터 사람들이 영국 6·25박물관을 지을 계획이라는 기사가 지난 3월 25일자 《조선일보》에 실렸다. 어느 정도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계획일까. 요즘 영국은 불황이다. 박물관 건립에는 ‘굿 뉴스’다. 박물관건립 준비위원들은 250만 파운드(45억원)만 확보하면 부지구입·리모델링·인력 충원을 너끈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 강남 아파트 두어 채 값이다. 하지만 이만한 돈을 영국인들 성금으로만 충당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게 ‘배드 뉴스’다. 준비위원들이 한국 후원자를 기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는데, 정부는 뭐하나

《마지막 한 발》의 저자 앤드루 새먼 《더 타임스》지 서울 특파원.

파주시청 관계자는 “당시 새먼 기자의 칼럼을 본 이인재 시장이 영국의 6·25박물관 건립을 파주시에서 돕고 싶다는 의향을 담은 편지를 새먼 기자에게 보냈다”면서 “이와 함께 파주시는 즉각적으로 ‘영국의 6·25박물관건립’ 지원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고 했다.

새먼 기자는 파주시에 “파주시의 지원계획에 감사하며, 글로스터시에 파주시의 의사를 전달하겠다”는 이메일 답신을 보냈다. 지원준비위가 구성된 지 나흘 만에 마틴 유든 전 주한 영국대사와 크리스 위츠 글로스터 자매도시연합회장도 파주시로 결연(結緣) 의사를 담은 편지를 보내 왔다.

이인재 시장은 “앤드루 새먼 특파원이 쓴 칼럼을 읽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영국이 먼저 나선 것에 대해 참으로 부끄러웠다”면서 “파주는 6·25전쟁 때 수많은 영국군 사상자를 내면서 지켜 낸 땅으로 주한 영국대사관은 글로스터대대의 희생을 기리는 일을 매우 중요한 업무로 삼고 해마다 참전 용사를 초청해 장엄한 기념식을 연다. 나는 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영국 사회가 전쟁 희생자들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하는지 마음 깊이 느꼈다”고 했다.

그는 “영국 글로스터연대원들의 용맹성과 거룩한 희생을 기리는 기념관을 파주에 건립하고자 관련 부처에 서한을 보냈고, 마틴 유든 당시 영국 대사를 만나기도 했다”면서 “열악한 자치단체 예산으로 사업을 벌일 엄두도 못 내고 있던 차에 영국에서 먼저 6·25전쟁의 역사와 한국의 발전상을 알리는 박물관을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파주 시민이 나섰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대한민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해 준 이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관내 6·25참전유공자회, 자원봉사단체협의회, 상공회의소 등 40여 기관·단체가 모여 지원위원회를 구성하고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벌였다”면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건립 지원에 나서고 있는데 정부가 손을 놓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설마리전투 생존자들, 유럽 첫 6·25박물관 세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1999년 4월 22일 이한을 앞두고 주한 영국대사관을 찾아 영국의 한국전 참전용사협회가 지원하는 장학금을 적성고등학교의 박정우 양과 김대수 군에게 전달하고 있다.

‘영국의 6·25박물관’은 유럽에 처음으로 들어서는 6·25박물관이라는 점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6·25전쟁 참전부대인 영국 육군 글로스터연대 출신 기업인과 노병들이 박물관 건립을 위한 기금모금에 나서자 글로스터시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폴 제임스(Paul James) 글로스터 시장은 “최근 역사·문화 관광지역으로 재정비하고 있는 구도심에 6·25박물관 부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시청과 준비위가 긴밀하게 협의 중”이라면서 “박물관이 완성되면 글로스터성당 등 기존 유명 관광지와 묶어 적극적으로 홍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영국은 6·25 당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5만8000명)을 한반도 전장에 투입했다. 글로스터연대는 영국군의 주력 부대 중 하나였다. 1951년 4월 영국 글로스터연대는 파주 설마리에서 퇴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중공군 3개 사단 4만2000명의 총공세에 맞서 사흘간 버티다 이 연대 장병 620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는 희생을 치르며 파주를 사수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진격을 늦춰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에서 새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고, 전사에서도 ‘고립방어’의 대표적인 전투로 꼽힌다.

이 전투를 기념하는 영국군전적비가 1957년 적성면 설마리고지 하단 암벽에 세워졌으며, 영국의 주요인사들과 참전용사들이 매년 이곳에서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1992년 11월에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이곳을 방문해 헌화했고, 1999년 4월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헌화했다.

영국은 ‘인스워스’ 공군기지를 ‘임진기지(Imjin Barracks)’로 명명했으며, 런던의 한 식당에는 ‘설마리’라는 이름을 간판에 표기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참전용사들은 1976년부터 지금까지 적성고 학생 700여 명에게 총 1억4000여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설마리전투에서 살아남은 노병들은 2010년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한국 정부 초청으로 서울에 왔고, 눈부신 경제성장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노병들의 감동을 전해 들은 글로스터 출신 기업인 크리스 라일랜드(Ryland) 씨가 유럽 최초의 6·25박물관을 짓기 위해 뜻 맞는 사람들을 모아 지난해 8월 건립준비위를 발족했다.

라일랜드 씨는 “6·25는 유엔이 군사적으로 개입한 첫 전쟁이자 포클랜드전쟁·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합친 것보다 6·25 전사자(1109명)가 더 많다”면서 “오늘날의 한국은 20세기 최고의 성공 스토리이고, 6·25전쟁은 잊어져서는 안 되는 전쟁이 잊힌 것”이라고 했다.

“박물관을 영국 내 6·25전쟁 연구의 허브로 활용”

파주시에 따르면, 건립준비위는 글로스터시와 접촉해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 냈다고 한다. 인구 13만명의 글로스터시는 글로스터셔주의 주도(州都)로, 영국 남서부의 유서 깊은 도시다. 때마침 오래된 부두가 있는 구도심(舊都心)을 역사·문화 관광지역으로 재개발하고 있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무대이자, 연간 36만명이 찾아오는 글로스터성당에서 도보로 5~10분 거리다.

글로스터시는 이곳에 박물관 부지를 확보해 시세보다 싼값에 제공하기로 했다. 준비위는 휴전 60주년이 되는 2013년까지 박물관을 완공하기로 하고, 영국복권기금 등과 접촉해 건립비용 250만 파운드(45억원)를 모금 중이다.

설계를 맡은 박물관 디자이너 닉 불팅(Boulting)은 “구두 상자를 늘어놓듯 유물을 쭉 나열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인터넷 교육 장비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한국의 발전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곳에는 한식을 파는 레스토랑도 들어설 예정이다.

박물관 준비위원들은 다양한 인터넷 교육 장비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한국의 발전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 중이라고 한다. 즉, 20세기 최고의 성공 스토리가 가진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측면을 보여주는 쇼케이스다. 기념품점에서는 한국 관련 상품을 팔고, 카페에서는 영국 요리와 한식을 함께 서빙할 계획이라고 한다.

라일랜드 씨는 “글로스터성당과 가까운 곳에 부지를 확보하는 게 관건”이라면서 “연간 2만명 이상 관람객이 들면 별도의 예산 없이 박물관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박물관을 영국 내 6·25전쟁 연구의 허브로 활용하면서, 6·25전쟁을 영국의 역사교육 커리큘럼에 집어넣는 게 준비위의 목표다.

글로스터연대는 박물관 인력도 지원하기로 했다. 스티븐 옥슬래드(Oxlade) 대령은 “258명이 죽은 포클랜드전쟁도 박물관이 있는데 6·25전쟁박물관은 없다”면서 “한국인들도 관심을 갖고 힘을 보태 주면 좋겠다”고 했다.

한편, 파주시는 와이트먼 대사가 오는 4월 임진강전투 추모행사에 박물관 준비위 프로젝트 담당자인 크리스 라일랜드와 함께 적성 설마리 영국군전적비를 찾을 것으로 보고, 6·25전쟁박물관 건립과 관련해 전폭적인 지원을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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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6·25박물관’ 건립에 파주 시민들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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