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인가수 B씨가 스포츠신문에 연예계 경험 수기를 실은 것이 수사의 단초
⊙ 방송사 기자들까지 서울지검장 방에 가 항의 농성
⊙ 구조적 비리 밝혀지자 언론탄압 운운하며 전방위적 저항
⊙ 방송사 기자들까지 서울지검장 방에 가 항의 농성
⊙ 구조적 비리 밝혀지자 언론탄압 운운하며 전방위적 저항
- 2003년 10월 8일 연예계 비리 혐의로 구속이 결정된 L(가운데)씨와 S(오른쪽)씨가 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2009년 3월. 스물아홉 살 미모의 여성 탤런트가 자살했다. 장자연. 그녀의 자살은 지금도 연예계 뒤안에서 술시중, 성상납 등 여성 연예인에게 부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강한 의혹을 남겼다. 검찰과 경찰은 무덤덤하게 이 사건을 ‘우울증에 의한 자살’로 결론지었다.
확실히 연예계, 연예인을 둘러싼 환경은 그들이 ‘딴따라’로 불리던 옛날과는 사뭇 달라졌다. 당장 극도의 디지털 기술 발달과 함께 연예인들이 자신을 드러낼 대중매체가 다양해졌다. 여기다 연예인의 데뷔 때부터 모든 움직임을 기업(기획사)이 철저하게 관리한다. 그러면서 연예인은 과거의 ‘광대’ 혹은 ‘딴따라’를 넘어 이제는 아이돌(idol)이니 스타니 하며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그들은 오늘날 대중문화의 당당한 주역이다. 특히 광고시장이 무지 막대하게 성장하면서 연예인들에게 떼돈까지 몰아준다. 흔한 말로 ‘떴다’ 하면 일약 상류층이 되고 경제적으로도 갑부 대열에 든다. 이제 연예인이란 직업은 수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선망하는 꿈의 대상이다.
그러나 연예계, 연예인이 지금처럼 꿈의 대상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20여 년 전인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연예계의 화려한 무대와 조명 뒤에는 실로 음습하고 무서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연예인은 거의 예외 없이 인기를 얻기 위해서, 또 인기를 얻으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부조리를 감내해야 했다. 호시탐탐 연예인을 뜯어먹으며 기생하려는 숱한 폭력에도 시달려야 했다. 한마디로 떠도 걱정, 안 떠도 걱정이었다. 어떤 인연인지, 나는 그처럼 우리 연예계를 수십 년 짓눌러 오던 악관행(악습비리)과 두 차례나 전쟁을 치렀다.
PD에게 거액 주고 드라마 주연 발탁된 탤런트 A씨
서울지검 형사2부 평검사이던 1975년 봄. 한 스포츠신문에 신인가수 B씨가 자신의 연예계 경험을 고백하는 수기(手記)를 실었다. 거기서 방송국 PD들의 비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가수들이 자기 노래를 방송에 틀어 달라, 혹은 방송에 자신을 출연시켜 달라며 PD들에게 ‘교제비’ 명목의 금품을 관행적으로 상납했다는 것이다. B씨는 그러면서 자신은 “3000만원이나 날렸다”고 했다. 당시 웬만한 집 세 채 값이다. 검찰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명백한 범죄 고발이었고 나아가 피해자 진술까지 확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 나는 백광현(白光鉉) 형사2부장, 김진세(金鎭世) 검사와 함께 수사에 착수했다.
아직 TV도 별로 보급되지 않아 라디오가 주류 매체이던 시절이고, 은행 온라인 시스템 같은 것도 없던 때였다. 대개 가수 지망생이나 그의 매니저가 방송사 주변의 허름한 여관방을 잡아 놓고 PD들을 만났다. 그러고는 가수의 노래를 담은 레코드판에 돈을 끼워 건넸다. 대개 1만원짜리 지폐 한두 장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작은 액수이고 영세한 것처럼 보이나 1만원권 한 장이 현재의 100만~200만원은 족히 나가는 액수다. 내 월급이 4만8000원일 때다.
그것도 시간이 가면서 점점 그 액수가 늘어났다. TV 보급이 늘어나면서 가수뿐만 아니라 탤런트 등 연예계 전반으로 그러한 ‘상납 관행’이 확산됐다. 방송사 자체는 물론 경찰이든 검찰이든 아무도 그 같은 부조리를 손대지 않아 무풍지대가 됐던 탓이다. 가령 이제는 너무도 유명한 탤런트 A씨 역시 이 같은 편법을 통해 자신의 연예 인생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나중에 엄청난 인기를 얻은 TV 드라마의 주연 발탁을 놓고 과감하게 PD에게 100만원을 투자(?)한 결과라고 소문이 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연예인과 매니저들을 통해 저간의 흐름을 확인한 나는 이윽고 그해 4월 18일, 방송가에서 내로라하던 PD 9명을 검찰에 소환했다. 공무원이라면 뇌물죄에 해당하지만 공무원 아닌 PD들이 자기 직무와 관련해 부정하게 돈을 받은 까닭에 모두 배임수재 (背任受財) 혐의를 적용했다. 방송 및 연예계 주변에서 막강한 게이트키퍼(gatekeeper)이자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하던 PD들을 집단 소환한 것이다.
우리나라 방송 및 연예계 사상 초유의 일인 만큼 세상이 들끓었다. 더욱이 PD 역시 넓게 보면 언론계 종사자들이다. 수사대상이 된 PD들뿐 아니라 그들과 한솥밥 먹는 방송기자들까지 들고일어났다. 당시 서울 서소문 검찰청사의 김일두(金一斗) 서울지검장 방에 기자들이 몰려가 항의, 농성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소환된 PD들에 대한 조사는 흔들림 없이, 신속히 진행했다. 나는 그동안 손에 쥔 그들의 혐의를 일일이 확인하여 사흘 뒤인 4월 21일 무려 7명을 전격 구속했다. 방송 및 연예계와 나의 첫 인연은 그렇게 일단락됐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고 일단 방송가와 연예계는 평온해졌다. 겉으로는.
방송가는 검사들에겐 ‘물半 고기半’일 정도로 부조리 판쳐
시간은 흘러 1989년 중반,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시작된 6공화국은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가 지속되면서 정치가 불안정했다. 특히 군사정권에서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어수선한 틈에 조직폭력, 인신매매, 음란퇴폐사범, 강도 등 4대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자연스럽게 검찰 내부에서도 강력범죄 소탕 및 민생치안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바로 그 핵심부서인 서울지방검찰청 특수1부장이던 나 역시 각종 정보와 자료를 수집, 축적해 가며 민생치안 문제에 대비했다.
그 주요 타깃 가운데 하나가 연예계 부조리였다. 앞서 내가 연예계 비리에 손을 댄 지 1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일찍이 내가 특수1부장을 맡은 1988년 말 이후 이런저런 첩보들을 통해 그 안을 들여다보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많은 부조리가 판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아무도 연예계 문제를 손대지 않다 보니 금품 상납은 물론 폭력, 갈취 등 온갖 범죄가 만연한 것이었다. 속된 말로 ‘물 반(半) 고기 반’이 아니라, 손만 대면 잡아 올릴 만큼 물고기가 더 많은 형국이었다. 우리 검사들 표현으로 반드시 한번 털기는 털어야 했다. 그러던 차에 연예계 쪽에서 먼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1989년 11월 7일 ‘가수의 날’ 기념식이 계기였다. 서울 강남의 리베라호텔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서 원로·중견·신인가수 300여 명이 연예계 주변 부조리를 폭로하고 이의 근절을 결의한 것이다. 이들은 폭력문제와 아울러 방송 담당자들(PD들)의 비리를 성토했다. 라디오와 TV의 대중가요 프로그램 담당자들이 상습적으로 금품을 요구하며, 그것을 토대로 방송출연 및 가요 인기순위를 조작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가수는 “방송사의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데 100만원을 내야 한다”, “인기가수 반열에 오르려면 전국 방송망에 최소 1억원은 뿌려야 한다”고 털어놨다. 1980년대였으니 엄청난 금액이다. 또 다른 한 가수는 실제로 모 PD에게 억대 금품을 제공해서 크게 알려지지 않던 자기 노래를 당시 인기순위 10위권 안으로 끌어올렸다는 고백도 내놨다. 톱클래스 연예인들까지 나서서 문제를 제기한 데다, 구체적인 비리 사례들까지 공개된 마당에 검찰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PD들 반발 우려해 방송가 폭력부터 수사
당시 검찰 안팎에 돌아가던 상황도 연예계와 방송가 수사에 힘을 실었다.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마침 법무부장관, 검찰총장도 연초 시무식에서 1990년을 ‘민생치안 확립의 해’로 선포하는 등 법조뿐 아니라 국민들의 관심이 민생침해사범 척결 문제에 쏠렸다. 이런 가운데 1990년 1월 3일 서울지검 민생특별수사부(민생특수부)가 전격 발족하게 되었고, 나는 기존 특수1부장 직과 함께 민생특수부장 직을 겸임하게 됐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그동안 내사 수준으로 진행돼 오던 연예계 비리의 본격 수사를 벌였다. 나의 지휘 아래 문세영(文世永·2011년 작고) 검사와 함승희(咸承熙) 검사가 팀을 이루어 밤낮으로 일에 매달렸다. 최종 목표는 연예계와 방송가의 고질적 비리인 금품상납 문제를 치는 것이었다. 결국 주로 PD들이 수사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전(1975년)에 겪었던 것처럼 방송 PD들을 건드리는 것은 이래저래 난감한 일이었다.
설사 명명백백 그들의 비리나 부조리를 밝혀 낸다 해도 ‘언론탄압’이니 ‘정치음모’니 하면서 달려들기 십상이다. 더욱이 PD들은 대중문화계를 주무르는 실력자이자 언론인이다. 특히 인기 연예인은 일부 정치인이나 재벌 2세 등 실력자들과 묘한 관계나 인연으로 얽히어, 그들을 건드릴 경우 어떤 불똥이 튈지 알 수 없다. 자칫 검찰이 칼을 허투루 휘두르면 일은 일대로 그르치고 담당 검사들도 이래저래 망신 혹은 그보다 더한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들을 짚어 가면서 나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래서 다소 힘들더라도 우회하는 수사전략을 짰다. 금품상납 관행을 손대기에 앞서 연예인 폭력 문제부터 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지 효과를 기대했다.
하나는 연예계 수사를 펼쳐 나가는 데 있어서 상대가 누가 됐든 기선(機先)을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범죄인 폭력행위를 응징하여 건전한 연예가 풍토를 조성하면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면서 소위 ‘딴죽’ 걸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폭력 수사와 (PD들에 대한) 금품상납 수사의 ‘자연스러운 연결’이었다. ‘폭력수사 과정에서 연예인들의 금품상납 관행이 드러나는 바람에 PD들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하게 됐다’고 비치게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PD 및 방송계 쪽의 반발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 한 것이다.
줄줄이 드러난 방송가 폭력의 생생한 사례들
물론 연예인들에 대한 폭력 쪽 수사도 당장 쉬운 일은 아니었다. 폭력사건 수사의 성패를 가르는 요소는 피해사실의 확인이다. 폭력 피해자들로부터 직접 피해 진술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배들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으레 보복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신이 당한 피해사실에 대해 아예 입을 꾹 닫거나 피해자 진술을 꺼리게 마련이다. 하물며 대중에 비치는 이미지와 인기를 생명으로 삼는 연예인들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폭력배들에게 감금, 폭행당한 가수 L양의 경우, 우리 수사팀이 범행 증거까지 확보한 상황에서 피해 진술을 요청해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 이처럼 연예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을 여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알음알음 첩보를 입수해 가며 수사팀은 수십 명의 연예인을 직접 만나 조사했다. 비밀리에 검찰에 소환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그들을 만났다. 행여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까 싶어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 극도로 숨겼다. 심지어 검찰 상부에서도 눈치를 못 챌 정도로 감쪽같이 조사해 나갔다. 수사팀의 치열한 노력 끝에 피해사실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1987년 9월 개그맨 L씨는 자신이 출연 중이던 서울 영동호텔 나이트클럽에서 광주 OB파 폭력배들에게 납치됐다. 그러고는 경기도 이천의 설봉 나이트클럽에 무료 출연할 것을 강요당했다.
▲1988년 10월 코미디언 L씨가 경영하던 서울 캐피탈호텔 나이트클럽에 이리파 폭력배 3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L씨에게 싸구려 동양화를 들이밀며 이를 300만원에 사라고 강요했다. L씨가 머뭇거리자 “사시미(생선회) 맛을 보여주겠다”며 협박했다.
▲1989년 1월 연예가 폭력배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선행(善行)가수로 이름난 A씨를 한강 고수부지로 끌고 가 집단폭행을 가했다. A씨는 이날 머리를 크게 다쳤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사실에 대해 입도 뻥긋 못하고 교통사고라며 병원에 입원했다. 뇌수술을 받고 수개월간 병원에서 지냈고, 이후 여러 해 동안 가수활동도 접어야 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당시 한창 뜨던 유명 개그맨 O씨가 “시키는 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며 폭력배들에게 납치됐다. 그는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한강변 백사장 놀이터의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채 모진 폭행과 수모를 당했다.
▲앞서 강남 리버사이드호텔에서의 ‘가수의 날’ 결의대회 직후, 이 대회를 주관한 정상급 코미디언 L씨는 폭력배들로부터 “앉은뱅이로 만들겠다”는 등 갖은 협박에 시달렸다.
▲앞의 L씨 피해사례와 비슷한 시기, 인기 여가수 B씨의 매니저는 연예계 주변에 기생하던 상습 폭력배 5명에게 수백만 원을 뜯겼다. 이들 폭력배는 B씨가 전주의 모 스탠드바에 출연하지 않아 손해를 보았다며 당초 1000만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B씨는 예의 스탠드바와는 아무런 계약도 인연도 없었다.
▲인기 개그맨 Y씨도 같은 케이스. 그 역시 폭력배들로부터 뜬금없는 손해배상 요구를 받았다. Y씨가 전남 강진의 한 나이트클럽에 출연하지 않는 바람에 큰 손해를 입었다며 협박해 100만원을 뜯어간 것이었다.
▲톱 가수 N씨는 연예계 폭력배를 경찰에 신고했다는 이유로, 그 폭력배의 일당 5명에게 집단 보복을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변에서 생선회칼로 다리를 난자당하는 끔찍한 폭행이었다.
▲1989년 11월 25일, 미국서 활동하다 돌아온 인기가수 T씨는 전남 순천에서 공연하던 중 폭력배들에게 납치, 집단폭행을 당했다. 폭력배들은 T씨에게 계약에도 없던 여수 나이트클럽에 출연을 강요하며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차에 감금돼 끌려다니던 T씨는 도로에서 차창 밖으로 피 묻은 손수건을 흔들어 이를 이상하게 여긴 택시기사의 신고로 구출됐다.
▲1989년 11월 27일 개그맨 E씨는 다름 아닌 KBS 방송사 개그맨실(室)에서 노골적으로 모 나이트클럽 출연 협박을 받았다. 한 기획사의, 폭력 전과자들인 사장과 상무가 백주에 거기까지 찾아와 그런 짓을 벌인 것이었다.
조폭뿐 아니라 프로덕션 관계자, 매니저도 폭력 행사
당초 우리 수사팀의 기대 이상으로 폭력 피해 사례들이 줄줄이 확보됐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정상급, 중견 연예인은 물론 신인과 무명 연예인들도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었다. 연예인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이런저런 폭력에 시달리고 있거나 시달린 경험을 갖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피해 유형은 7가지 정도로 분류됐다.
▲계약 여부에 관계없이 특정 나이트클럽에 유료 또는 무료 출연 강요 ▲특정 나이트클럽에 출연하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았다며 손해배상 명목으로 금품 갈취 ▲술값을 내놓으라거나 대신 술값을 내게 하는 방식의 금품 갈취 ▲싸구려나 저질 상품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강매 ▲나이트클럽과 기타 업소의 연예인 출연료 중 일정비율을 상습 갈취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업소에 출연하지 말 것을 강요 ▲미성년 연예인의 퇴폐적인 공연이나 유흥업소 강제 출연 등이었다.
이러한 폭력행사 및 금품갈취, 협박을 일삼은 자들은 비단 폭력배뿐만 아니었다. 조직폭력배는 물론 연예인들을 거느리고 방송이나 유흥업소 출연을 알선하는 프로덕션 관계자, 그리고 연예인을 직접 관리하는 매니저들도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이들 폭력배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여지없이 잔인한 보복이 뒤따르는 까닭에 연예인들은 이들을 가장 무서워했다. 언제 어디서든 폭력배들이 부르면 연예인들은 곧바로 달려가 술시중 등까지 마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같은 연예인 폭력 수사는 1990년 1월 22일 폭력배 10명을 구속하고 프로덕션 관계자 등 5명을 수배, 매니저 등 15명을 불구속입건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민생특수부의 ‘첫 작품’이었다. 언론 보도를 통해 겉으로 드러난 시간만 따지면, 처음 민생특수부가 발족하고 불과 20일 만의 개가였다. 그러나 사실 짧은 기간에 그런 결과가 가능했던 것은 이미 5~6개월 전부터 우리 검사들이 치열하게 이 사건에 매달린 덕분이었다. 당시 연예인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늘 폭력에 시달리던 그들로서는 속이 후련했을 것이다. 폭력 쪽 수사가 이처럼 매듭지어지면서 거의 동시에 검찰의 칼날은 이제 방송, PD들 쪽으로 휙 돌려졌다.
3당 합당하는 날, PD들 무더기 소환
연예계 폭력에 대한 검찰의 응징 소식이 보도된 1990년 1월 23일, 또 하나의 연예·방송 관련 중대뉴스가 도하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검찰이 KBS와 MBC 양 방송사의 중견 PD들을 한꺼번에 10여 명이나 소환했다는 것이었다. 연예·방송·언론·대중문화계를 아우르는 실력자인 PD들이 집단으로 검찰에 불려 왔다는 사실은 당시 얼마든지 신문의 1면 톱기사가 되고도 남을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이날 1면에 실리지 못하고 사회면 톱기사로 밀렸다. 1면 톱기사는 당시 민주정의당(총재 노태우 대통령), 통일민주당(총재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총재 김종필)의 3당 합당 소식이었다.
또한 바로 이날, 검찰 내부에서도 작은 변화가 있었다. 서울고검과 지검 청사가 서초동 종합청사로 이사한 것이다. ‘서소문시대’의 끝, ‘서초동시대’의 개막이었다. 직원들이 미처 이삿짐을 풀어 정리하기도 전에, 우리 서울지검 민생특수부에서 PD 집단소환 방침을 터뜨린 것이었다. 고맙게도 언론은, 검찰의 PD 소환 배경에 대해 일제히 ‘연예계 폭력수사 과정에서 PD들의 금품수수가 우연히 드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우리 수사팀 입장에서는 PD들이 집단반발할 빌미 하나를 덜어 준 셈이었다. 나의 두 번째 PD 수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검찰총장, 돌연 “왜 (PD들) 두드려 패냐”며 엉뚱한 질문
그러나 아무리 신중을 기하고 우회작전을 폈어도 역시 방송 쪽은 만만치 않았다. KBS와 MBC 양 방송사의 PD들은 물론 관련단체까지도 검찰의 소환 조치에 반발하고 나섰다.
PD들을 소환한 지 하루 만인 1월 24일, 당장 KBS TV 예능국의 쇼 담당 프로듀서들이 집단사표를 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이번 사태를 자성의 계기로 삼기 위해 사직원을 낸다”면서 실질적인 파업을 단행, 검찰을 압박했다. MBC TV 쪽도 팔을 걷어붙였다. 쇼 담당 프로듀서 30여 명 전원이 집단사표를 내기로 한 것이다. TV에 이어 양 방송사의 라디오 가요프로 담당 프로듀서들도 이에 동조하는 회의를 거듭했다.
나아가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도 검찰을 성토하는 성명을 냈다. “방송조직의 부패한 곳을 도려내는 것은 마땅하지만 왜 이 시기에 이런 모양으로 모든 프로듀서들의 일반적 상황인 양 일거에 단죄돼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면서 “양심에 따라 자율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해 온 쇼 프로듀서들에 대한 검찰의 일방적인 수사발표는 언론탄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거들고 나선 것이다.
수사를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외압이나 반발이 있으면 검찰로서도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초연한 척하려 해도 신경이 쓰인다. 검찰 역시 하나의 ‘조직’이요, 검사는 그 조직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조직의 속성은 어디나 비슷하다. 윗사람들일수록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잡음이 나는 것, 문제가 생기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한창 PD 수사가 진행되던 중 검찰총장과 마주앉을 기회가 있었다. 총장이 불쑥 “왜 두드려 패냐”고 물었다. 이게 무슨 얘긴가, 나는 깜짝 놀라 “뭘 두드려 팹니까?” 되물었다. 총장은 “나도 다 이야기를 듣는 데가 있어”라면서 거의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PD들을 고문해 가며 수사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바깥의 누군가를 통해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런 곁가지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또 그런 이야기를 믿든 안 믿든 윗사람들은 대개 아랫사람에게 한마디 던지기 십상이다. 설사 별다른 뜻이 없다 해도 부하 입장에서는 저 양반이 부하보다 바깥 사람 말을 더 믿는구나’ 하고 서운해하기 마련이다. 그런 한마디는 곧 가시가 되어 박힌다. 그런 이야기가 고위층에 전달되면 외압 내지 청탁으로 변질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데 실제로 수사과정에 자꾸 잡음이 나고, 옆에서 다른 이야기 들리는 일이 반복되면 해당 검사는 속된 말로 ‘찍히게’ 된다. 아무리 사실이 아니라 해도 ‘매끄럽지 못한 놈, 일을 세련되게 못하는 놈’이란 이미지를 뒤집어쓴다. 그러니 검사도 사람인 이상 수사과정에 이런저런 소리가 나오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자숙해야 할 PD들, ‘언론탄압’ 운운하며 저항
그러나 나는 PD들의 반발이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분명히 자숙해야 할 장면이었다. 그런데도 적반하장, 또 언론탄압 운운하며 집단행동에 나선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면으로 되받아쳤다. 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이틀에 걸쳐 소환한 17명의 PD 가운데 6명을 구속한 것이다. 당초 검찰 안팎에서의 예상은 2~3명 정도 구속이었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면서 나는 사건을 엄정 처리해야 했다. PD들이 온라인 송금으로 받은 돈의 액수가 생각보다 컸기 때문이다. 앞서 1975년 7명을 구속한 데 이어 PD들에 대한 사상 두 번째 규모의 사법처리였다. 혐의는 역시 모두 배임수재.
미리 진행됐던 연예계 폭력수사에 비해 PD들의 혐의를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현찰 거래하던 과거와 달리, 은행 온라인 송금이 정착되면서 상납비리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PD들을 소환하기 전 우리 수사팀은 이미 그 같은 온라인 송금 증거 및 관련 장부들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PD들을 대거 소환해 불과 이틀 만에 혐의사실을 밝히고 6명을 구속한 것도 철저한 준비 덕분이었다.
‘물보다 물고기가 더 많은 지경’이라고 앞서 표현했듯이, 당시 연예인과 PD 간의 상납 비리는 그야말로 ‘노골적’이었다.
은행 온라인 거래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작든 크든 ‘검은 돈’은 으레 현찰로 오고 간다. 그래야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속된 PD들은 버젓이 은행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계좌로 착착 ‘수금’을 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도 교제비니 촌지니 하는 말이 무색하게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대 거액이 오고 갔다. 더욱이 ‘통대’라고 해서 대표 격 혹은 총무 격인 PD가 있어서 이들이 여러 연예인들로부터 돈을 거둬 동료 PD나 상부에 나눠주는 관행도 있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오랜 세월 누구 하나 이를 단속하는 이가 없었다. 당연히 ‘다 그렇고 그런 것,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거리낌 없는 ‘상납문화’가 횡행했다. 그렇다 보니 연예인 쪽에서도 ‘알아서 상납’하는 관행이 자리 잡게 되었다. 수사팀은 PD들에 이어 연예인 매니저들도 무려 50여 명이나 소환해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그 가운데 다수를 배임증재(背任贈財) 혐의로 입건했다.
수사 진행하자 방송 횟수가 뜸하던 가수 노래가 갑자기 정상에 올라
검찰이 강경한 모습을 보이자 순식간에 저쪽(방송사, PD, 연예인들) 분위기가 달라졌다. 1월 31일 KBS 간부들이 자성(自省)의 뜻을 담은 성명서를 냈다. 2월 1일에는 MBC 노조에서도 성명을 발표해 “이번 PD 사건을 혁신의 계기로 삼는다”고 밝혔다. 이어 2월 2일에는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서도 “그간의 잘못된 관행을 대중에게 사과하고 자정(自淨)을 다짐한다”는 결의를 밝혔다.
인기프로인 TV 라디오 ‘올스타쇼’ ‘젊음의 행진’ ‘가요톱10’ ‘연예가산책’ 등이 중단되거나, 심지어 그 프로그램 안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까지 인기 절정이던 탤런트나 가수 등이 한순간에 몰락한 것이다. 대신 방송출연이나 라디오 방송 횟수가 뜸하던 N 가수의 노래들이 정상에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런데 정작 구속된 PD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또 다시 검찰을 자극하는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PD들이 법정진술을 통해 “검찰의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을 했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나아가 이런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일부 언론과 단체들이 덮어놓고 ‘검찰의 고문’ 부분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당시 PD들의 고문 주장은 우리 검찰로서는 참으로 실소(失笑)를 금치 못할 것들이었다. 가령 한 PD는 사뭇 진지하게 “한겨울인데 검찰청사 베란다에 밤새 세워 놓았다”고 주장했다. 검찰뿐 아니라 판사들도 웃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검찰청사 어디에도 베란다는 손바닥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또 “검사들이 성기 끝에 전기봉을 댔다” “하루 종일 쪼그려뛰기를 시켰다” “원산폭격을 당했다” 등등 영화나 군대 경험 때나 있을 법한 이야기도 나왔다. 자신들이 저지른 비리 때문에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황당한 이야기들이었다. 법원은 그것을 전연 받아들이지 않고 구속된 이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PD들에 대한 두 차례의 형사처벌로 방송과는 악연
연예계 폭력 및 부조리에 대한 수사가 끝난 뒤 주변에서는 “왜 그 정도 선에서 수사를 그쳤느냐, 계속해서 수사를 해야 되지 않느냐”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범죄, 모든 범죄자를 잡아 내고 처벌할 수는 없다. 일벌백계. 범죄를 상징적으로 응징함으로써, 여타 범죄의 재발을 막고 사회와 경제 질서를 유지해 가는 것이 검찰의 역할이요 기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연예계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데 PD 6명을 구속하는 것으로도 일단 충분하다고 보았다. 당시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 이후 연예계는 과거의 주먹구구식 연예인 관리시스템을 벗고 오늘과 같은 ‘기획사 체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검찰이 아무리 강력하게 사법처리를 한다 해도 연예계 비리가 근절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연예계를 둘러싼, 확인되지 않는 온갖 비리에 관한 소문은 무성하다. 실제로 지난 2000년대 중반, 대형 연예기획사를 겨냥한 검찰수사가 또 한차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그 바람에 지금은 거물급 인사로 성장한 L씨, 그리고 연예계의 큰손으로 통하는 S씨 등이 황급히 해외로 나가 들어오지 않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수사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으나 요란했던 만큼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대형기획사가 전문적으로 연예인을 관리한다. 홍보, 섭외 등 방송사와의 비즈니스도 합법적으로 추진한다.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한다. 만약 지금 연예계에 대한 모종의 수사를 시작하려면, 이처럼 확 달라진 전체 패러다임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대비가 필요할 것이다.
연예인과 PD가 한솥밥을 먹는 엔터테인먼트(기획)사는 분명히 합법적인 기업이다. 그러나 설사 그런 모습을 갖추었어도 역시 사람과 돈이 몰리는 그 뒤안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불법행위나 비리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두 차례에 걸쳐 적지 않은 PD들을 형사처벌하면서 방송계와 악연을 맺게 됐다. 저쪽에서 보면 두고두고 달가운 얼굴이 못 될 것이다.
끝으로 이 기회를 통해 지난 2011년 10월 유명을 달리한 문세영 검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가 없었으면 연예계 폭력 및 비리 수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확실히 연예계, 연예인을 둘러싼 환경은 그들이 ‘딴따라’로 불리던 옛날과는 사뭇 달라졌다. 당장 극도의 디지털 기술 발달과 함께 연예인들이 자신을 드러낼 대중매체가 다양해졌다. 여기다 연예인의 데뷔 때부터 모든 움직임을 기업(기획사)이 철저하게 관리한다. 그러면서 연예인은 과거의 ‘광대’ 혹은 ‘딴따라’를 넘어 이제는 아이돌(idol)이니 스타니 하며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그들은 오늘날 대중문화의 당당한 주역이다. 특히 광고시장이 무지 막대하게 성장하면서 연예인들에게 떼돈까지 몰아준다. 흔한 말로 ‘떴다’ 하면 일약 상류층이 되고 경제적으로도 갑부 대열에 든다. 이제 연예인이란 직업은 수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선망하는 꿈의 대상이다.
그러나 연예계, 연예인이 지금처럼 꿈의 대상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20여 년 전인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연예계의 화려한 무대와 조명 뒤에는 실로 음습하고 무서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연예인은 거의 예외 없이 인기를 얻기 위해서, 또 인기를 얻으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부조리를 감내해야 했다. 호시탐탐 연예인을 뜯어먹으며 기생하려는 숱한 폭력에도 시달려야 했다. 한마디로 떠도 걱정, 안 떠도 걱정이었다. 어떤 인연인지, 나는 그처럼 우리 연예계를 수십 년 짓눌러 오던 악관행(악습비리)과 두 차례나 전쟁을 치렀다.
PD에게 거액 주고 드라마 주연 발탁된 탤런트 A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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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연예계 비리를 함께 수사한 김진세 검사. |
아직 TV도 별로 보급되지 않아 라디오가 주류 매체이던 시절이고, 은행 온라인 시스템 같은 것도 없던 때였다. 대개 가수 지망생이나 그의 매니저가 방송사 주변의 허름한 여관방을 잡아 놓고 PD들을 만났다. 그러고는 가수의 노래를 담은 레코드판에 돈을 끼워 건넸다. 대개 1만원짜리 지폐 한두 장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작은 액수이고 영세한 것처럼 보이나 1만원권 한 장이 현재의 100만~200만원은 족히 나가는 액수다. 내 월급이 4만8000원일 때다.
그것도 시간이 가면서 점점 그 액수가 늘어났다. TV 보급이 늘어나면서 가수뿐만 아니라 탤런트 등 연예계 전반으로 그러한 ‘상납 관행’이 확산됐다. 방송사 자체는 물론 경찰이든 검찰이든 아무도 그 같은 부조리를 손대지 않아 무풍지대가 됐던 탓이다. 가령 이제는 너무도 유명한 탤런트 A씨 역시 이 같은 편법을 통해 자신의 연예 인생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나중에 엄청난 인기를 얻은 TV 드라마의 주연 발탁을 놓고 과감하게 PD에게 100만원을 투자(?)한 결과라고 소문이 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연예인과 매니저들을 통해 저간의 흐름을 확인한 나는 이윽고 그해 4월 18일, 방송가에서 내로라하던 PD 9명을 검찰에 소환했다. 공무원이라면 뇌물죄에 해당하지만 공무원 아닌 PD들이 자기 직무와 관련해 부정하게 돈을 받은 까닭에 모두 배임수재 (背任受財) 혐의를 적용했다. 방송 및 연예계 주변에서 막강한 게이트키퍼(gatekeeper)이자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하던 PD들을 집단 소환한 것이다.
우리나라 방송 및 연예계 사상 초유의 일인 만큼 세상이 들끓었다. 더욱이 PD 역시 넓게 보면 언론계 종사자들이다. 수사대상이 된 PD들뿐 아니라 그들과 한솥밥 먹는 방송기자들까지 들고일어났다. 당시 서울 서소문 검찰청사의 김일두(金一斗) 서울지검장 방에 기자들이 몰려가 항의, 농성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소환된 PD들에 대한 조사는 흔들림 없이, 신속히 진행했다. 나는 그동안 손에 쥔 그들의 혐의를 일일이 확인하여 사흘 뒤인 4월 21일 무려 7명을 전격 구속했다. 방송 및 연예계와 나의 첫 인연은 그렇게 일단락됐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고 일단 방송가와 연예계는 평온해졌다. 겉으로는.
방송가는 검사들에겐 ‘물半 고기半’일 정도로 부조리 판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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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TV 가요 프로그램의 모습. 1989년 11월 7일 ‘가수의 날’ 기념식에서 가수들은 가요 프로그램 담당자들의 금품 요구 관행을 고발했다.(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 없음) |
그 주요 타깃 가운데 하나가 연예계 부조리였다. 앞서 내가 연예계 비리에 손을 댄 지 1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일찍이 내가 특수1부장을 맡은 1988년 말 이후 이런저런 첩보들을 통해 그 안을 들여다보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많은 부조리가 판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아무도 연예계 문제를 손대지 않다 보니 금품 상납은 물론 폭력, 갈취 등 온갖 범죄가 만연한 것이었다. 속된 말로 ‘물 반(半) 고기 반’이 아니라, 손만 대면 잡아 올릴 만큼 물고기가 더 많은 형국이었다. 우리 검사들 표현으로 반드시 한번 털기는 털어야 했다. 그러던 차에 연예계 쪽에서 먼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1989년 11월 7일 ‘가수의 날’ 기념식이 계기였다. 서울 강남의 리베라호텔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서 원로·중견·신인가수 300여 명이 연예계 주변 부조리를 폭로하고 이의 근절을 결의한 것이다. 이들은 폭력문제와 아울러 방송 담당자들(PD들)의 비리를 성토했다. 라디오와 TV의 대중가요 프로그램 담당자들이 상습적으로 금품을 요구하며, 그것을 토대로 방송출연 및 가요 인기순위를 조작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가수는 “방송사의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데 100만원을 내야 한다”, “인기가수 반열에 오르려면 전국 방송망에 최소 1억원은 뿌려야 한다”고 털어놨다. 1980년대였으니 엄청난 금액이다. 또 다른 한 가수는 실제로 모 PD에게 억대 금품을 제공해서 크게 알려지지 않던 자기 노래를 당시 인기순위 10위권 안으로 끌어올렸다는 고백도 내놨다. 톱클래스 연예인들까지 나서서 문제를 제기한 데다, 구체적인 비리 사례들까지 공개된 마당에 검찰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PD들 반발 우려해 방송가 폭력부터 수사
당시 검찰 안팎에 돌아가던 상황도 연예계와 방송가 수사에 힘을 실었다.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마침 법무부장관, 검찰총장도 연초 시무식에서 1990년을 ‘민생치안 확립의 해’로 선포하는 등 법조뿐 아니라 국민들의 관심이 민생침해사범 척결 문제에 쏠렸다. 이런 가운데 1990년 1월 3일 서울지검 민생특별수사부(민생특수부)가 전격 발족하게 되었고, 나는 기존 특수1부장 직과 함께 민생특수부장 직을 겸임하게 됐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그동안 내사 수준으로 진행돼 오던 연예계 비리의 본격 수사를 벌였다. 나의 지휘 아래 문세영(文世永·2011년 작고) 검사와 함승희(咸承熙) 검사가 팀을 이루어 밤낮으로 일에 매달렸다. 최종 목표는 연예계와 방송가의 고질적 비리인 금품상납 문제를 치는 것이었다. 결국 주로 PD들이 수사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전(1975년)에 겪었던 것처럼 방송 PD들을 건드리는 것은 이래저래 난감한 일이었다.
설사 명명백백 그들의 비리나 부조리를 밝혀 낸다 해도 ‘언론탄압’이니 ‘정치음모’니 하면서 달려들기 십상이다. 더욱이 PD들은 대중문화계를 주무르는 실력자이자 언론인이다. 특히 인기 연예인은 일부 정치인이나 재벌 2세 등 실력자들과 묘한 관계나 인연으로 얽히어, 그들을 건드릴 경우 어떤 불똥이 튈지 알 수 없다. 자칫 검찰이 칼을 허투루 휘두르면 일은 일대로 그르치고 담당 검사들도 이래저래 망신 혹은 그보다 더한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들을 짚어 가면서 나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래서 다소 힘들더라도 우회하는 수사전략을 짰다. 금품상납 관행을 손대기에 앞서 연예인 폭력 문제부터 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지 효과를 기대했다.
하나는 연예계 수사를 펼쳐 나가는 데 있어서 상대가 누가 됐든 기선(機先)을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범죄인 폭력행위를 응징하여 건전한 연예가 풍토를 조성하면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면서 소위 ‘딴죽’ 걸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폭력 수사와 (PD들에 대한) 금품상납 수사의 ‘자연스러운 연결’이었다. ‘폭력수사 과정에서 연예인들의 금품상납 관행이 드러나는 바람에 PD들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하게 됐다’고 비치게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PD 및 방송계 쪽의 반발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 한 것이다.
줄줄이 드러난 방송가 폭력의 생생한 사례들
물론 연예인들에 대한 폭력 쪽 수사도 당장 쉬운 일은 아니었다. 폭력사건 수사의 성패를 가르는 요소는 피해사실의 확인이다. 폭력 피해자들로부터 직접 피해 진술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배들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으레 보복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신이 당한 피해사실에 대해 아예 입을 꾹 닫거나 피해자 진술을 꺼리게 마련이다. 하물며 대중에 비치는 이미지와 인기를 생명으로 삼는 연예인들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폭력배들에게 감금, 폭행당한 가수 L양의 경우, 우리 수사팀이 범행 증거까지 확보한 상황에서 피해 진술을 요청해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 이처럼 연예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을 여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알음알음 첩보를 입수해 가며 수사팀은 수십 명의 연예인을 직접 만나 조사했다. 비밀리에 검찰에 소환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그들을 만났다. 행여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까 싶어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 극도로 숨겼다. 심지어 검찰 상부에서도 눈치를 못 챌 정도로 감쪽같이 조사해 나갔다. 수사팀의 치열한 노력 끝에 피해사실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1987년 9월 개그맨 L씨는 자신이 출연 중이던 서울 영동호텔 나이트클럽에서 광주 OB파 폭력배들에게 납치됐다. 그러고는 경기도 이천의 설봉 나이트클럽에 무료 출연할 것을 강요당했다.
▲1988년 10월 코미디언 L씨가 경영하던 서울 캐피탈호텔 나이트클럽에 이리파 폭력배 3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L씨에게 싸구려 동양화를 들이밀며 이를 300만원에 사라고 강요했다. L씨가 머뭇거리자 “사시미(생선회) 맛을 보여주겠다”며 협박했다.
▲1989년 1월 연예가 폭력배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선행(善行)가수로 이름난 A씨를 한강 고수부지로 끌고 가 집단폭행을 가했다. A씨는 이날 머리를 크게 다쳤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사실에 대해 입도 뻥긋 못하고 교통사고라며 병원에 입원했다. 뇌수술을 받고 수개월간 병원에서 지냈고, 이후 여러 해 동안 가수활동도 접어야 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당시 한창 뜨던 유명 개그맨 O씨가 “시키는 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며 폭력배들에게 납치됐다. 그는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한강변 백사장 놀이터의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채 모진 폭행과 수모를 당했다.
▲앞서 강남 리버사이드호텔에서의 ‘가수의 날’ 결의대회 직후, 이 대회를 주관한 정상급 코미디언 L씨는 폭력배들로부터 “앉은뱅이로 만들겠다”는 등 갖은 협박에 시달렸다.
▲앞의 L씨 피해사례와 비슷한 시기, 인기 여가수 B씨의 매니저는 연예계 주변에 기생하던 상습 폭력배 5명에게 수백만 원을 뜯겼다. 이들 폭력배는 B씨가 전주의 모 스탠드바에 출연하지 않아 손해를 보았다며 당초 1000만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B씨는 예의 스탠드바와는 아무런 계약도 인연도 없었다.
▲인기 개그맨 Y씨도 같은 케이스. 그 역시 폭력배들로부터 뜬금없는 손해배상 요구를 받았다. Y씨가 전남 강진의 한 나이트클럽에 출연하지 않는 바람에 큰 손해를 입었다며 협박해 100만원을 뜯어간 것이었다.
▲톱 가수 N씨는 연예계 폭력배를 경찰에 신고했다는 이유로, 그 폭력배의 일당 5명에게 집단 보복을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변에서 생선회칼로 다리를 난자당하는 끔찍한 폭행이었다.
▲1989년 11월 25일, 미국서 활동하다 돌아온 인기가수 T씨는 전남 순천에서 공연하던 중 폭력배들에게 납치, 집단폭행을 당했다. 폭력배들은 T씨에게 계약에도 없던 여수 나이트클럽에 출연을 강요하며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차에 감금돼 끌려다니던 T씨는 도로에서 차창 밖으로 피 묻은 손수건을 흔들어 이를 이상하게 여긴 택시기사의 신고로 구출됐다.
▲1989년 11월 27일 개그맨 E씨는 다름 아닌 KBS 방송사 개그맨실(室)에서 노골적으로 모 나이트클럽 출연 협박을 받았다. 한 기획사의, 폭력 전과자들인 사장과 상무가 백주에 거기까지 찾아와 그런 짓을 벌인 것이었다.
조폭뿐 아니라 프로덕션 관계자, 매니저도 폭력 행사
당초 우리 수사팀의 기대 이상으로 폭력 피해 사례들이 줄줄이 확보됐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정상급, 중견 연예인은 물론 신인과 무명 연예인들도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었다. 연예인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이런저런 폭력에 시달리고 있거나 시달린 경험을 갖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피해 유형은 7가지 정도로 분류됐다.
▲계약 여부에 관계없이 특정 나이트클럽에 유료 또는 무료 출연 강요 ▲특정 나이트클럽에 출연하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았다며 손해배상 명목으로 금품 갈취 ▲술값을 내놓으라거나 대신 술값을 내게 하는 방식의 금품 갈취 ▲싸구려나 저질 상품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강매 ▲나이트클럽과 기타 업소의 연예인 출연료 중 일정비율을 상습 갈취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업소에 출연하지 말 것을 강요 ▲미성년 연예인의 퇴폐적인 공연이나 유흥업소 강제 출연 등이었다.
이러한 폭력행사 및 금품갈취, 협박을 일삼은 자들은 비단 폭력배뿐만 아니었다. 조직폭력배는 물론 연예인들을 거느리고 방송이나 유흥업소 출연을 알선하는 프로덕션 관계자, 그리고 연예인을 직접 관리하는 매니저들도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이들 폭력배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여지없이 잔인한 보복이 뒤따르는 까닭에 연예인들은 이들을 가장 무서워했다. 언제 어디서든 폭력배들이 부르면 연예인들은 곧바로 달려가 술시중 등까지 마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같은 연예인 폭력 수사는 1990년 1월 22일 폭력배 10명을 구속하고 프로덕션 관계자 등 5명을 수배, 매니저 등 15명을 불구속입건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민생특수부의 ‘첫 작품’이었다. 언론 보도를 통해 겉으로 드러난 시간만 따지면, 처음 민생특수부가 발족하고 불과 20일 만의 개가였다. 그러나 사실 짧은 기간에 그런 결과가 가능했던 것은 이미 5~6개월 전부터 우리 검사들이 치열하게 이 사건에 매달린 덕분이었다. 당시 연예인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늘 폭력에 시달리던 그들로서는 속이 후련했을 것이다. 폭력 쪽 수사가 이처럼 매듭지어지면서 거의 동시에 검찰의 칼날은 이제 방송, PD들 쪽으로 휙 돌려졌다.
3당 합당하는 날, PD들 무더기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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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1월, 3당 합당의 와중에 비리 PD 수사가 이루어졌다. |
또한 바로 이날, 검찰 내부에서도 작은 변화가 있었다. 서울고검과 지검 청사가 서초동 종합청사로 이사한 것이다. ‘서소문시대’의 끝, ‘서초동시대’의 개막이었다. 직원들이 미처 이삿짐을 풀어 정리하기도 전에, 우리 서울지검 민생특수부에서 PD 집단소환 방침을 터뜨린 것이었다. 고맙게도 언론은, 검찰의 PD 소환 배경에 대해 일제히 ‘연예계 폭력수사 과정에서 PD들의 금품수수가 우연히 드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우리 수사팀 입장에서는 PD들이 집단반발할 빌미 하나를 덜어 준 셈이었다. 나의 두 번째 PD 수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검찰총장, 돌연 “왜 (PD들) 두드려 패냐”며 엉뚱한 질문
그러나 아무리 신중을 기하고 우회작전을 폈어도 역시 방송 쪽은 만만치 않았다. KBS와 MBC 양 방송사의 PD들은 물론 관련단체까지도 검찰의 소환 조치에 반발하고 나섰다.
PD들을 소환한 지 하루 만인 1월 24일, 당장 KBS TV 예능국의 쇼 담당 프로듀서들이 집단사표를 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이번 사태를 자성의 계기로 삼기 위해 사직원을 낸다”면서 실질적인 파업을 단행, 검찰을 압박했다. MBC TV 쪽도 팔을 걷어붙였다. 쇼 담당 프로듀서 30여 명 전원이 집단사표를 내기로 한 것이다. TV에 이어 양 방송사의 라디오 가요프로 담당 프로듀서들도 이에 동조하는 회의를 거듭했다.
나아가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도 검찰을 성토하는 성명을 냈다. “방송조직의 부패한 곳을 도려내는 것은 마땅하지만 왜 이 시기에 이런 모양으로 모든 프로듀서들의 일반적 상황인 양 일거에 단죄돼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면서 “양심에 따라 자율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해 온 쇼 프로듀서들에 대한 검찰의 일방적인 수사발표는 언론탄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거들고 나선 것이다.
수사를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외압이나 반발이 있으면 검찰로서도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초연한 척하려 해도 신경이 쓰인다. 검찰 역시 하나의 ‘조직’이요, 검사는 그 조직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조직의 속성은 어디나 비슷하다. 윗사람들일수록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잡음이 나는 것, 문제가 생기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한창 PD 수사가 진행되던 중 검찰총장과 마주앉을 기회가 있었다. 총장이 불쑥 “왜 두드려 패냐”고 물었다. 이게 무슨 얘긴가, 나는 깜짝 놀라 “뭘 두드려 팹니까?” 되물었다. 총장은 “나도 다 이야기를 듣는 데가 있어”라면서 거의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PD들을 고문해 가며 수사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바깥의 누군가를 통해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런 곁가지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또 그런 이야기를 믿든 안 믿든 윗사람들은 대개 아랫사람에게 한마디 던지기 십상이다. 설사 별다른 뜻이 없다 해도 부하 입장에서는 저 양반이 부하보다 바깥 사람 말을 더 믿는구나’ 하고 서운해하기 마련이다. 그런 한마디는 곧 가시가 되어 박힌다. 그런 이야기가 고위층에 전달되면 외압 내지 청탁으로 변질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데 실제로 수사과정에 자꾸 잡음이 나고, 옆에서 다른 이야기 들리는 일이 반복되면 해당 검사는 속된 말로 ‘찍히게’ 된다. 아무리 사실이 아니라 해도 ‘매끄럽지 못한 놈, 일을 세련되게 못하는 놈’이란 이미지를 뒤집어쓴다. 그러니 검사도 사람인 이상 수사과정에 이런저런 소리가 나오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자숙해야 할 PD들, ‘언론탄압’ 운운하며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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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연예계 비리는 2002년 7월 《타임》지 아시아판 표지를 장식했다. |
미리 진행됐던 연예계 폭력수사에 비해 PD들의 혐의를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현찰 거래하던 과거와 달리, 은행 온라인 송금이 정착되면서 상납비리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PD들을 소환하기 전 우리 수사팀은 이미 그 같은 온라인 송금 증거 및 관련 장부들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PD들을 대거 소환해 불과 이틀 만에 혐의사실을 밝히고 6명을 구속한 것도 철저한 준비 덕분이었다.
‘물보다 물고기가 더 많은 지경’이라고 앞서 표현했듯이, 당시 연예인과 PD 간의 상납 비리는 그야말로 ‘노골적’이었다.
은행 온라인 거래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작든 크든 ‘검은 돈’은 으레 현찰로 오고 간다. 그래야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속된 PD들은 버젓이 은행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계좌로 착착 ‘수금’을 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도 교제비니 촌지니 하는 말이 무색하게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대 거액이 오고 갔다. 더욱이 ‘통대’라고 해서 대표 격 혹은 총무 격인 PD가 있어서 이들이 여러 연예인들로부터 돈을 거둬 동료 PD나 상부에 나눠주는 관행도 있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오랜 세월 누구 하나 이를 단속하는 이가 없었다. 당연히 ‘다 그렇고 그런 것,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거리낌 없는 ‘상납문화’가 횡행했다. 그렇다 보니 연예인 쪽에서도 ‘알아서 상납’하는 관행이 자리 잡게 되었다. 수사팀은 PD들에 이어 연예인 매니저들도 무려 50여 명이나 소환해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그 가운데 다수를 배임증재(背任贈財) 혐의로 입건했다.
수사 진행하자 방송 횟수가 뜸하던 가수 노래가 갑자기 정상에 올라
검찰이 강경한 모습을 보이자 순식간에 저쪽(방송사, PD, 연예인들) 분위기가 달라졌다. 1월 31일 KBS 간부들이 자성(自省)의 뜻을 담은 성명서를 냈다. 2월 1일에는 MBC 노조에서도 성명을 발표해 “이번 PD 사건을 혁신의 계기로 삼는다”고 밝혔다. 이어 2월 2일에는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서도 “그간의 잘못된 관행을 대중에게 사과하고 자정(自淨)을 다짐한다”는 결의를 밝혔다.
인기프로인 TV 라디오 ‘올스타쇼’ ‘젊음의 행진’ ‘가요톱10’ ‘연예가산책’ 등이 중단되거나, 심지어 그 프로그램 안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까지 인기 절정이던 탤런트나 가수 등이 한순간에 몰락한 것이다. 대신 방송출연이나 라디오 방송 횟수가 뜸하던 N 가수의 노래들이 정상에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런데 정작 구속된 PD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또 다시 검찰을 자극하는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PD들이 법정진술을 통해 “검찰의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을 했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나아가 이런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일부 언론과 단체들이 덮어놓고 ‘검찰의 고문’ 부분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당시 PD들의 고문 주장은 우리 검찰로서는 참으로 실소(失笑)를 금치 못할 것들이었다. 가령 한 PD는 사뭇 진지하게 “한겨울인데 검찰청사 베란다에 밤새 세워 놓았다”고 주장했다. 검찰뿐 아니라 판사들도 웃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검찰청사 어디에도 베란다는 손바닥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또 “검사들이 성기 끝에 전기봉을 댔다” “하루 종일 쪼그려뛰기를 시켰다” “원산폭격을 당했다” 등등 영화나 군대 경험 때나 있을 법한 이야기도 나왔다. 자신들이 저지른 비리 때문에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황당한 이야기들이었다. 법원은 그것을 전연 받아들이지 않고 구속된 이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PD들에 대한 두 차례의 형사처벌로 방송과는 악연
연예계 폭력 및 부조리에 대한 수사가 끝난 뒤 주변에서는 “왜 그 정도 선에서 수사를 그쳤느냐, 계속해서 수사를 해야 되지 않느냐”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범죄, 모든 범죄자를 잡아 내고 처벌할 수는 없다. 일벌백계. 범죄를 상징적으로 응징함으로써, 여타 범죄의 재발을 막고 사회와 경제 질서를 유지해 가는 것이 검찰의 역할이요 기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연예계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데 PD 6명을 구속하는 것으로도 일단 충분하다고 보았다. 당시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 이후 연예계는 과거의 주먹구구식 연예인 관리시스템을 벗고 오늘과 같은 ‘기획사 체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검찰이 아무리 강력하게 사법처리를 한다 해도 연예계 비리가 근절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연예계를 둘러싼, 확인되지 않는 온갖 비리에 관한 소문은 무성하다. 실제로 지난 2000년대 중반, 대형 연예기획사를 겨냥한 검찰수사가 또 한차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그 바람에 지금은 거물급 인사로 성장한 L씨, 그리고 연예계의 큰손으로 통하는 S씨 등이 황급히 해외로 나가 들어오지 않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수사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으나 요란했던 만큼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대형기획사가 전문적으로 연예인을 관리한다. 홍보, 섭외 등 방송사와의 비즈니스도 합법적으로 추진한다.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한다. 만약 지금 연예계에 대한 모종의 수사를 시작하려면, 이처럼 확 달라진 전체 패러다임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대비가 필요할 것이다.
연예인과 PD가 한솥밥을 먹는 엔터테인먼트(기획)사는 분명히 합법적인 기업이다. 그러나 설사 그런 모습을 갖추었어도 역시 사람과 돈이 몰리는 그 뒤안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불법행위나 비리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두 차례에 걸쳐 적지 않은 PD들을 형사처벌하면서 방송계와 악연을 맺게 됐다. 저쪽에서 보면 두고두고 달가운 얼굴이 못 될 것이다.
끝으로 이 기회를 통해 지난 2011년 10월 유명을 달리한 문세영 검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가 없었으면 연예계 폭력 및 비리 수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