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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12년 4월호

18 경남 하동군 악양면 토지길

지리산과 섬진강의 풍요 속을 거닐다

글 : 황소영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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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는 거리 : 13km
⊙ 걷는 시간 : 4시간
⊙ 코스 : 평사리공원~최참판댁~조씨고가~취간림~
    평사리공원
⊙ 난이도 : 무난해요
⊙ 좋은 계절 : 4~5월, 10~11월










토지길의 대표적 풍광인 평사리 무딤이들녘과 ‘부부송’으로 불리는 두 그루의 소나무.
  하동군 악양면은 중국의 악양과 지형이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악양루와 동정호 등 소상 팔경의 이름도 그대로 옮겼다. 지리산 인근에선 보기 드문 너른 평지도 이곳 악양에선 낯선 모습이 아니다. “거지가 악양에 들어와 한 집에 한 끼씩 1년 동안 얻어먹어도 몇 집이 남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 풍요와 여유가 가득한 곳이다.
 
  악양 초입의 평사리는 박경리 작가가 대하소설 《토지》를 쓸 때 이야기가 전개되는 무대로 삼은 곳이다. 그러나 정작 작가 자신은 먼발치에서 평사리를 스쳤을 뿐 들어가 본 적은 없다고 한다. 작가는 책의 서문을 통해 “악양 평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넘볼 수 없는 호수의 수면같이 아름답고 광활하며 비옥한 땅이다. (중략) 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이상향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악양의 토지길은 이 평사리를 주축으로 한 원점 회귀형 걷기길이다.
 
 
  드라마 〈토지〉의 무대 평사리와 최 참판댁
 
최 참판댁과 더불어 SBS-TV 드라마 <토지> 세트장으로 쓰였던 초가집들.

  KBS-2TV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에서 아무 말 없이 군대에 간 기훈(천정명)을 원망하며 은조(문근영)가 서글프게 울어대던 곳,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린 채 커다란 눈망울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던 강변이 토지길의 출발점인 평사리공원이다. 토지길 1구간을 걷기 위해선 공원 입구로 나와 2차선 국도를 건너야 한다. 차량 통행이 많은 곳이지만 벚꽃이 흐드러진 계절이라면 걱정이 덜하다. 적어도 이때만큼은 주차장이 따로 없다.
 
  봄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어딘들 있을까마는 경남 하동, 그중에서도 화개와 악양의 봄은 과히 으뜸이라 할 만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 지리산과 그 산의 청정 계곡수가 합해진 섬진강, 또 4월 초순이면 19번 국도를 거슬러 화개의 쌍계사 너머까지 이어진 벚꽃잎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하여 차들이 쌩쌩 내달리는 국도조차도 아름다움의 대상이 된다. 유홍준은 그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에서 “단연코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이 아름답다” “이 세상에 둘이 있기 힘든 아름다운 길”이라고 치켜세운다.
 
  섬진강을 등 뒤에 두고 도로를 건너면 이번엔 자로 잰 듯한 너른 평야가 와락 가슴 속을 헤집는다. 최 참판댁의 땅을 빌려 살았던 무지렁이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허리 펼 새 없이 땀을 쏟아냈던 땅이지만 이제는 이 길을 걷는 이들이 드라마나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될 차례다. 그야말로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풍경들이 펼쳐질 테니까.
 
  ‘무딤이들’로 불리는 들판의 한가운데에는 ‘부부송’으로 불리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땅을 넓히기 위해, 쌀 한 줌 더 넣기 위해 이 나무를 베어낼 수도 있으련만 악양 사람들은 슬기롭게 두 나무를 지켜냈고, 덕분에 무딤이들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악양은 비닐하우스가 없는 곳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의 햇살과 바람, 흙과 물로 온전히 농산물을 키우는 전형적인 슬로시티(slow city)인 셈이다.
 
  봄기운이 스멀스멀 붉은 흙을 비집고 올라오는 너른 들을 지나 소설 속 가상공간을 현실로 끄집어낸 최 참판댁으로 올라선다. 매표소(입장료 1000원)와 좌우로 문을 연 상가들 사이사이로 제각기 모양을 달리한 오랜 세월의 돌담들이 좁은 골목을 만들며 길을 안내한다. 말 그대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떡 하니 길을 막는다. 뜰 안으로 들어서면 윤씨 부인, 최치수, 별당아씨 그리고 서희와 길상, 집안 곳곳 손때를 묻혔을 소설 속 인물들의 이미지가 3D 영화처럼 확연하다. 최 참판댁 담 너머로 드라마 세트장으로 쓰인 낮은 지붕의 초가집들과 좀 전에 느릿느릿 걸었던 무딤이들이며 섬진강이 보인다.
 
  고소산성(사적 제151호)에 오르면 풍경의 범위는 훨씬 넓고 깊어진다. 비록 토지길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체력과 시간이 허락된다면 한번쯤 다녀와도 좋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원군인 왜병의 섬진강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구축”한 것으로 추측된다는 고소성의 하얀 석축 위에 서면 지리산의 위용과 굽이진 섬진강의 짙푸른 물줄기와 강 너머 광양 백운산의 불끈대는 능선, 그 사이에 거침없이 펼쳐진 들녘과 두 그루의 소나무, 한쪽 귀퉁이에 자리를 튼 동정호까지 모든 것이 한눈에 조망된다.
 
  소설 《토지》의 편찬사와 지리산권 문학작품을 만날 수 있는 ‘평사리문학관’까지 둘러본 후에야 ‘토지장터’로 내려선다. 막걸리 한 잔에 부침개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상가 쪽으로 길을 거슬러 방향을 튼다. 관광객이 몰리는 최 참판댁과는 달리 이후로는 길이 한적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조 부잣집
 
120여 년 전에 지어진 조씨고가(조부잣집)는 최 참판댁의 모델이 된 고택이다.

  민가는 거의 없이 차 한 대 겨우 지날 만한 길 옆으로 밭들이 즐비하다. 간혹 똑같이 토지길을 걷는 이들을 스치기도 하고, 바쁘게 일하는 주민들을 만나기도 한다. ‘털털털’ 덜컹대며 달리는 경운기 뒤로 풍년을 기원하는 농민들의 염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악양의 대표적 먹거리는 왕의 진상품으로 올려진 대봉감이지만 매화가 지고 매실이 열리기 전까지인 4~5월엔 차(茶)가 제1의 효자 상품이다. 하루종일 딴 찻잎은 그날 바로 뜨거운 가마솥에서 덖어야 한다. 집마다 막 수확한 찻잎의 싱그러운 향기와 구수한 냄새가 끊이질 않는다. 풍부한 농산물과 수려한 풍광 덕분에 하동은 경남 도내에서 가장 많은 귀농 인구를 자랑하는 곳이 되었다.
 
  대촌과 입석마을에서는 20분쯤 지리산둘레길과 합쳐지다 입석 마을회관에서 길이 나뉜다. 우측의 둘레길 방향으로 몇 걸음만 내려서면 공지영의 지리산행복학교에 소개된 ‘형제봉주막’이 있다. 이미 토지장터에서 한 잔 들이켜기도 했지만 이곳은 저녁 영업뿐이라 한낮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 다시 토지길로 돌아와 좁은 길로 내려선다.
 
  지대가 조금만 높아도 발아래 무딤이들판이 펼쳐지더니, 마을 깊은 곳으로 들어온 탓인지 등 뒤의 들녘은 구불구불 길들에 가려 보이지 않고, 대신 왼쪽 형제봉 능선이 호위하듯 따라붙는다. 저 장쾌한 능선은 지리산 영신봉(세석대피소)에서 발원해 형제봉~신선대~고소산성을 거쳐 섬진강 앞에서 그 맥을 맺는다. 길 위에서도 봉우리 사이를 연결한 산 속의 구름다리가 빠끔 올려다 보인다.
 
  정서마을을 지나 최 참판댁의 실제 모델이 된 조씨고가에 닿는다. 조선 개국공신 조준(1346~1405)의 직계 후손인 조재희가 100년도 훨씬 전에 지은 집으로, 20년 가까이 버려두다시피 한데다 사랑채와 행랑채 등이 소실돼 예전 만석거부의 위세는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조준의 19대손인 조한승(87세) 옹만이 홀로 거처 중이다. 광복 직후 빨치산을 피해 고향을 떠났던 조 옹은 부산과 대구, 멀리 강원도에서까지 직장생활을 하다 13년 전 노구를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지난겨울엔 독거노인에게 무상으로 지급되는 연탄 400장을 받았다며 활짝 웃는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뒤꼍의 작은 텃밭을 돌보거나 가끔씩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따뜻한 커피를 내고, 대문 밖까지 나와 손을 흔드는 일이 조 옹의 하루 일과다. 수십 년 전만 해도 40~50명이 거주하며 궁중음식을 먹었다지만 이제는 비어 버린 장독이 훨씬 더 많다. 빛바랜 담장 위로 화사한 봄볕만 수북이 내려앉는다.
 
  조씨고가가 있는 상신마을을 벗어나 잠시 아스팔트 큰 길을 따르다 ‘취간림(翠澗林)’ 이정표를 보고 왼쪽으로 몸을 돌린다. 숲 가운데는 쉬어갈 수 있는 정자와 항일독립투사의 넋을 기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형제봉 능선에 기대 걷느라 잊고 있던 무딤이들이 취간림을 벗어나면서 다시 펼쳐진다.
 
  강 너머 백운산 방향으로 숨을 쉬는 지리산 능선들과 들녘의 파릇한 봄기운을 실은 섬진강 바람이 비포장 둑길 위에서 상큼하게 뒤섞인다. 벚꽃 가로수 너머로 19번 국도를 오가는 차량들이 보인다. 저 도로 너머에 처음 출발했던 평사리공원이 있다. 최 참판댁 입구나 취간림이 있는 면소재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손 치더라도 넉넉히 한나절이면 가능한 길, 봄기운이 완연한 남녘에서 나만의 드라마가 이렇게 끝을 맺는다.
 
● 슬로시티 토지길 가이드
 
  토지길 제1코스는 평사리공원에서 시작해 무딤이들~최 참판댁~입석마을~조씨고가(상신마을)~취간림~악양천 제방~평사리공원으로 돌아오는 13km의 원점 회귀 코스로 약 4시간쯤 걸린다. 책자마다 토지길 코스와 거리에 약간씩 차이가 있으므로 참고자료로만 삼고, 19번 국도를 건넌 다음부터는 토지길 안내표와 도로 위에 그려진 노란색 페인트를 따라 걷는다. 토지길은 화개장터~십리벚꽃길~쌍계사~불일폭포로 연결된 총 13km의 2코스와 섬진강과 19번 국도 사잇길로 이어진 3코스로 나뉜다. 신설 구간인 3코스는 총 9.5km로 수해 유실에 따른 보수공사가 잦다. 길이 끊겼을 경우엔 국도로 올라서면 되지만 차량통행에 유의해야 한다. 문의 070-4146-1607.
 
 
  ● 교통
 
  서울의 경우 경부고속도로 → 대전통영간고속도로 → 남해고속도로 하동IC → 19번 국도를 이용한다. 부산과 대구, 광주 등에서도 남해고속도로 하동IC로 진입한다. 출발지점인 평사리공원에 주차할 수 있다. 주차요금은 승용차 1000원. 계절과 요일에 따라 무료주차도 가능.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에 아침 6시30분 첫차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9회 악양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요금은 2만1800원(막차 심야 2만4천원)이며 3시간40분쯤 걸린다. 부산 등 경상권에서는 배차 간격이 빠른 하동으로 먼저 이동 후 악양으로 가는 것이 좋다. 전라권에서는 구례를 거쳐 악양으로 이동한다.
 
 
  ● 숙식
 
  최 참판댁 한옥체험관(055-880-2960), 주막장터민박(017-556-3335)이 있고, 정서마을에 황토방펜션(055-884-3999), 취간림이 있는 악양면소재지에 지리산농원(010-4157-2483) 등이 있다. 토지길이 직접 지나지는 않지만 인근 화개면에 숙박시설이 밀집돼 있으며 하동읍 터미널 건물에는 24시간 운영하는 찜질방(055-883-2665)이 있다. 식당은 주로 최 참판댁과 악양면소재지에 밀집돼 있다. 최 참판댁 매표소 직전에 지리산갑부네(018-230-1431)가 있고, 취간림 주위에 솔봉식당(055-883-3337)과 돈우가(055-883-3167) 등이 있다. 밥값은 1인당 5천~6천원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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