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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년 12월호

[연재]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생애 (9권10장)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전쟁에 가장 가까이 갔던 날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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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미치광이 金日成 도당들의 이 야만적인 행위에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저 미련하고도 무지막지한 폭력배들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걸 잊지 말지어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1976년 8월18일 朴正熙 일기)
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트럭을 몰고온 북한군인들이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과 노무자들을 습격하고 있다(UN군 측 감시카메라가 찍음)
  
  〈전쟁 미치광이 金日成 도당들의 이 야만적인 행위에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저 미련하고도 무지막지한 폭력배들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걸 잊지 말지어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1976년 8월18일 朴正熙 일기)
 
 
  [日記 속의 인간과 권력]
 
 
  아내와 나 사이엔 24년만 주어져
 
  朴대통령은 유신시대에 일기를 쓰고 있었다. 자신만의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朴正熙 일기는 그의 인간됨을 소박하게 드러낸다. 1975~1976년 무렵의 日記와 발언록을 중심으로 그의 숨결과 육성을 느껴 보자.
 
  1975년 10월3일(금) 맑음
 
  단기 4308년 개천절이다. 단군 聖祖가 이 땅에 나라를 세우신 지 4308년. 弘益인간이란 민족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지난 4천년 동안 우리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생을 영위하면서 가꾸고 건설하고 키워 왔다. 영고성쇠, 민족이 걸어온 역정에는 허다한 굴곡과 기복이 있었으나 민족의 전진은 계속되어 왔다. 앞으로도 영원히 계승될 것이다. 올바른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배달민족이 걸어온 전통과 정통을 우리들이 계승하고 창조적인 발전을 위하여 온 겨레가 가일층 분발하고 정진해야 하겠다.
 
  1975년 11월6일(월) 맑음
 
  서울신문 오늘자 5면을 읽고 조국을 사랑하는 정념이란 것을 새삼 생각해 보았다. 「값진 선물 자신감을 뿌듯이 안고」라는 표제 아래 김모라는 在美(재미) 교포(예비역 대령)가 쓴 글이다. 김씨는 광복 30주년 행사의 하나로 在美 기독교 지도자 친선 모국 방문단의 일원으로 돌아온, 羅聖(로스앤젤레스) 거주 장로직 기독교인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4년 만에 고국의 발전상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고국 동포들의 진지하고도 활기찬 모습과 입이 딱 벌어지는 고국의 발전상이 눈물겹도록 대견하고 고맙다』고 했다.
 
  이번 고국 방문을 통해서 값진 선물을 가지고 간다면서 그것은 자신감이라고 했다. 『그동안 조국이 초라하다는 데 얼마간 기가 죽어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나는 가슴을 활짝 펴고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떳떳이 조국의 모습을 전하고 자랑하겠노라』고 하였다. 얼마 전 조총련계 교포들이 34년 만에 고국땅을 밟고 『이만한 조국이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고 자랑할 수 있다』고 한 기사가 기억 난다.
 
  조국이 부강하고 잘살고 훌륭하면 어디를 가나 어깨가 으쓱하고 자랑스럽고, 그러지 못하고 가난하고 빈약하고 못살면 그와는 반대로 공연히 어깨가 수그러지고 기가 죽어서 움츠리고 다니게 되는 것은 도리가 없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겪고 느낀 일이다. 일제 시대 때가 그러했고 해방 후도 그러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우리 국민들은 이 점,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 확실하다. 자신감과 긍지가 생기기 시작했고 앞으로 몇 년 후에는 우리도 당당히 선진 국가로서 어깨를 재고 살 수 있다는 자신이 만만하다. 이것이 국민의 사기다. 이것이 필요하다. 失意(실의), 비굴, 열등의식, 패배의식 이런 것들은 이제부터 과감하게 씻어 버리고 패기, 자신, 긍지를 가지고 대한민국이 나의 조국이란 것을 어디서나 자랑할 수 있는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 이것이 민족의 염원인 조국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는 정신적인 원천이요, 원동력이라고 확신한다.
 
  金모라는 在美 동포의 그 정신은 오늘 우리 모든 국민의 가슴속에서 싹트고 있는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1975년 12월12일(금) 맑음
 
  오늘이 아내와 결혼한 지 만 25년이 되는 날이다. 아내가 있었다면 은혼식을 올리고 축배를 올렸을 터인데…. 1950년 12월12일 대구시 모 교회에서 일가친척·친지들의 축배를 받으며 식을 거행하고, 아내와 백년해로를 맹세하였다. 24년 만에 아내는 먼저 가고 말았다. 남은 은혼식·금혼식을 올리며, 일생의 반려로 자손들의 축복을 받으며 老後를 즐기는데 아내와 나의 사이는 어찌 24년밖에 시간을 주지 않았을까.
 
  25년 전 오늘의, 그 착하고 수줍어하던 아내의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이번 25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아내와는 幽(유)와 明(명)을 달리하게 되었으니 인생이란 果是(과시) 무상하도다.
 
 
  봉급을 배만 더 인상해 줄 수 있다면
 
  1976년 1월 20일(목) 맑음
 
  연두 중앙관서 순시 개시. 오전 10시 경제기획원. 오후 1시30분 재무부 방문.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종사원에게 봉급을 물어보았더니 작년 12월에는 4만4000원이었는데 1월부터 7만7000원 정도이고 상여금을 합치면 월평균 8만여원이 된다고 하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사람에게 현재 물가 표준으로 倍만 더 보수를 인상하여 줄 수 있다면 극히 만족하겠지,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1976년 2월24일(화) 맑음
 
  금년도 각 대학 입학 시험에 학과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신체부자유라는 이유로 불합격된 학생들의 억울하다는 호소 소리가 작금 보도를 통하여 알려짐으로써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 문교부 장관을 통하여 관계 각 대학 총학장에게 권유하여 이들을 구제해 주도록 지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체 부자유 학생과 학부모들의 기뻐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고 참으로 흐뭇하기 그지없다.
 
  중국 고사에 漢武帝 때 사마천은 신체 불구가 되어서 더욱 분발하여 「史記 (사기)」 130권을 저술하여 고대중국사를 남겼다고 한다. 손자병법을 후세에 남긴 孫武도 두 다리가 없는 불구였다고 한다.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의 명저를 남긴 공자의 제자 左丘明은 눈이 멀었던 失明者라고도 한다.
 
  신체 일부가 불구라고 하여 사회에서 버림을 받거나 폐인 취급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들 중에 굳은 의지로써 훌륭한 일을 성취하여 후세까지 빛을 남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학이 이들 불구한 사람들을 차등 대우하였다는 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金日成은 남침 시기 놓쳤다』
 
  1976년 4월13일. 朴대통령은 청와대 출입 기자단 및 공보비서관들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朴대통령은 1월15일 연두기자회견 때 발표했던 포항석유 시추에 대해서 얘기를 꺼냈다.
 
  『3월25일 미국에서 기계를 들여와 하루에 20m씩 파고 있습니다. 시추를 할 때 기계에 물을 붓는데 그 물과 합쳐서 기름이 나오고 있어요. 아직까지 경제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시중에 떠도는 얘기는 전부 거짓말이야. 한 번 포항에 같이 가봅시다. 그때 기름이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어』
 
  화제는 미국 하원의원 프레이저가 시작한 朴東宣(박동선)의 對美로비 스캔들, 즉 코리아게이트 사건 조사로 옮아갔다.
 
  『프레이저의 본색이 드러났는데, 즉 한국의 민권을 위해 투쟁했다는 기록을 남겨서 지지표를 더 얻으려는 속셈입니다』
 
  朴대통령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미국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
 
  『미국의 군사 원조는 내년에 완전히 종결됩니다. 유상원조도 8년 상환이고, 이자 8%는 상업차관과 다를 바 없어요. 내 생각 같아서는 차라리 구라파에서 얻어 오는 것이 좋겠어.
 
  그 전에 닉슨이 국군 현대화를 위해서 무상으로 15억 달러를 준다고 했었는데, 이것이 점차 변질되어 유상으로 바뀌었고, 내년에 받게 될 2억3000만 달러로 15억 달러 약속은 다 이루어진 셈이지요. 미국의 군사 원조 실태를 국민에게 전부 다 알려 주시오』
 
  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확고한 방침을 갖고 있었다.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우리 국군만으로 북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도 미군을 쉽게 뽑아 가지는 않을 것이오. 지난번 美 의회에서 딜럼스 수정안이 압도적 다수로 부결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에 지상군을 요청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해군과 공군, 병참 원조만을 適期에 대주면 좋겠어.
 
  걱정되는 것은 이북의 기습이오. 이북에서 일단 기습을 가해 오면 처음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넘어온 敵은 모두 분쇄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즉각 전방에서 막을 수 있어요』
 
  그는 물가에 관해서도 자신감을 보였다.
 
  『현재 추세로 보아 연말까지 도매 물가 인상률을 10%, 소비자 물가는 12% 선에서 억제하겠소. 절대 자신이 있어요. 석유가 안 나와도 우리 경제는 자신 있습니다』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북은 모순이 저렇게 쌓여 가면 반드시 망합니다. 중국도 외세의 압력이 없었던 淸나라는 약 300년 갔지만, 대부분의 통일 중국은 200년 정도밖에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毛澤東(모택동) 死後에는 굉장한 혼란이 있을 겁니다. 金日成도 마찬가지요. 金日成도 초조하겠지만, 이제 남침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봅니다』
 
  朴대통령은 집무실에 포항에서 나왔다는 석유를 병에 담아 놓고 방문객들에게 자랑하곤 했었다. 그때 이 석유가 땅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지상에서 정유된 기름이 스며든 것이었음을 알고 있던 사람은 吳源哲 경제2수석비서관과 이 석유를 분석했던 석유공사 劉載興 사장 정도였다.
 
  1976년 4월17일(토) 맑음
 
  1년 전 오늘 크메르 공화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항복하고 프놈펜이 함락된 날이다. 작년 이맘때 국내 정세를 회고하니 감개무량할 뿐이다. 조국을 死守하겠다는 의지가 박약하고 국난을 당하고도 국민이 단결할 줄 모르고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이익보다 자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고 위기에 처해서 국론을 통일하고 국민을 결속시킬 수 있는 지도자를 갖지 못한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他山之石으로 삼고 우리가 갈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金大中의 군축 이야기 듣고 오싹』
 
  1976년 4월24일. 朴대통령은 기자들을 초청해서 오찬을 하면서 보도금지를 전제로 한 뒤, 크메르(캄보디아) 공산군의 양민 학살에 언급했다.
 
  『우리가 6·25 동란을 겪어 봐서 알겠지만 크메르 사람들 고생하고 있을 겁니다. 공산당은 자기와 같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사람 대접을 하지 않아요. 차라리 소나 말을 더 귀하게 여긴다고 하더군요.
 
  이럴 때 평화니 인권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합심해서 학살의 마수로부터 크메르 국민들을 건져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세계인권옹호위원회는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법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들만 몇 명 잡아서 법의 절차를 밟아 처리하는 데도 야단법석을 떨면서, 크메르에 관심을 안 보인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기자 양반들 社(사)에 가면 이야기해요. 크메르 국민들을 도와야 한다고. 이런 것이야말로 대서특필해야 하는 것 아니오.
 
  인도차이나 3國은 사서 고생하는 것 같아. 월남에 들렀을 때 들은 얘기인데, 우리 공병대가 다낭인가 어디에다 팔각정을 멋지게 세워 주었으나 월남 국민들이 하도 돌보지 않아서 우리 공병들이 매일 아침 청소해 주었다고 합디다. 그곳 사람들은 멀거니 우리 공병들이 청소하는 모습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하니, 이게 될 말입니까. 전투는 미군과 한국군에게 맡겨 놓고, 자기들은 反정부 구호나 부르면서 재미는 볼 대로 보겠다는 겁니다. 심지어 軍 장교가 軍需(군수)를 맡아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미군에게서 원조받은 무기의 일부를 야간에 베트콩에게 슬슬 팔아먹은 예도 있었다고 해요.
 
  그 후 나는 派越(파월) 지휘관들에게 일렀습니다. 큰 전과를 세우려 하지 말고, 희생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내도록 하고, 한국군에 지정된 지역 안의 보호에만 힘쓰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의 지원이 없어도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국방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몇 년 전 선거에서 金大中씨가 군축을 선거 구호로 내세웠을 때는 내 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모두가 다 위선이었구나
 
  1976년 4월24일(토) 흐림
 
  작금 紙上과 방송을 통하여 공산화된 크메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은 지 1년간에, 크메르 인구의 약 1할에 가까운 50만~60만 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이다.
 
  6·25를 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우리들이기에 크메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천인공노할 이 참상을 누구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義憤(의분)을 금할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에서 이와 같은 잔인무도하고 야만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을 보고도 全인류가 특히 툭하면 남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평화니 人道니를 찾던 각국의 인사들, 언론·종교단체, 무슨 무슨 옹호 단체들이 어찌하여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다는 그 자체가 더욱 해괴하고 이해할 수 없다.
 
  유엔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소위 세계평화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 하는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 모양인지? 모든 것이 다 위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만 한다. 크메르의 참상을 들으면서 나의 머리에서 문득 떠오르고 잊혀지지 않는 일은, 작년 이 무렵 크메르가 적화되자 서울에 와 있던 크메르 대사관 직원들 소식이 궁금하기만 하다.
 
  대사와 기타 몇몇 고급 직원들은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밖의 하급 직원들은 본국이 공산화되었더라도 자기들 부모 형제와 친척들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귀국할 여비가 없어서 우리 정부에서 여비를 도와주고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그 후 그들이 방콕을 경유, 본국으로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사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만행이 있을 줄이야 그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공산주의란 왜 이처럼 잔인하고 포악할까? 인류 사회에 어찌 이런 극악무도하고 잔인무도한 主義니 국가니 하는 것이, 존재가 용인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국토 북반부에도 크메르 루즈와 똑같은 살인 집단이 존재하고 이들이 무슨 혁명이니 해방이니 평화니 조국의 통일이니 연방제가 어떠니 하고 광적으로 설치고 주제넘게도 우리를 보고 독재니 파쇼니 비방을 하고 돌아가니, 가소롭다고나 할까, 한심스럽다고나 할까.
 
  1976년 4월26일(월) 흐림
 
  초봄을 장식한 개나리·진달래·벚꽃·목련들은 어느새 다 지고 시들고 2陣으로 철쭉·라일락·서부해당화 등이 활짝 피었다. 모든 나뭇가지에 새싹이 푸릇푸릇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게 푸르러 간다. 싱그러운 신록이 무럭무럭 눈에 보이듯 자라만 간다.
 
  1976년 4월30일(금) 맑음
 
  1년 전 자유월남공화국이 패망한 날이다. 작금 우리 사회에서는 印支반도 적화의 이야기가 紙上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연일 보도되고 있다.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우리 이웃의 자유 우방이 어이없게도 패망하고 세계 지도의 색깔이 달라져 가는 것은 참으로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다. 왜 印支가 적화됐느냐. 그들이 패망한 원인이 무엇이냐.
 
  우리는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3500만 동포들이 제각기 가슴에 손을 얹고 엄숙한 마음으로 깊이 반성하고 크게 각성해야 할 것이다. 자기의 조국을 자기들이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고 국민들의 단결이 없을 때 그 나라는 망하는 법이다. 이는 비단 印支의 예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의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1976년 5월6일(목) 맑음
 
  부처님 오신 날 2520주년 석탄일이다. 금년부터 「초파일」을 공휴일로 제정하여 그 첫해가 된다. 전국 각지와 5000여 사찰에서 석존의 탄신을 경축하고 국태민안과 평화적인 국토 통일을 기원하는 법회와 각종 불교행사가 거행되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지 1600여년이 된다고 한다(고구려 소수림왕 시대). 신라시대에는 國敎로서 정하여 넓게 보급이 되고 護國불교로서 그 시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우리 민족의 사상과 정신면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는 승려들이 법복을 벗어 던지고 무기를 들고 일어서서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을 섰다. 그 정신과 전통은 고려를 거쳐서 이조시대까지도 계승되었다. 李氏왕조에 들어와서 소위 崇儒抑佛(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가 다소 쇠약해진 느낌이 없지도 않으나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에 미친 영향력은 감퇴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이 되고 해방 후 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사상적 혼란기를 지나오는 과정에서 불교 내부에서 분열이 생기고 타락 현상이 일어남으로써 불교의 과거 찬연한 역사와 전통을 날이 갈수록 퇴색케 하는 경향을 노정하게 된 것을 몹시 아쉬워한 바 있었다.
 
  작금 불교계 내에서 새로운 정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고 화합 단결하는 운동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모쪼록 대동단결 불교 중흥을 위하여 불교계 지도자 여러분들의 분발이 있기를 기대한다.
 
  1976년 5월16일(일) 흐림
 
  5·16혁명 15주년 기념일이다. 15년 전 오늘 새벽에 이 나라의 젊은 군인들이 기울어져 가는 國運을 바로잡기 위하여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고 궐기했다. 오늘 새벽 동녘이 틀 무렵 전차 부대를 선두로 하는 1陣의 혁명군 부대가 결사의 각오를 굳게 간직한 채 새벽바람 찬이슬을 마시며 숙연히 한강대교를 渡江했다. 고요히 잠든 수도 서울은 역사의 새로운 장이 바뀌는 이 순간까지 적막 속에 초여름의 피곤한 잠을 이루고 있다가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부패와 부정과 무능과 안일, 정체와 무기력으로 氣息(기식)암암하던 이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와 소생의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몽롱한 깊은 잠길에서 잠을 깨고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전 5시 국영 방송을 통해서 혁명 공약이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새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1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혁명은 아직 완결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줄기차게 진행 중에 있다. 가지가지의 고난과 저항과 毁譽褒貶(훼예포폄)을 들어가면서. 5·16의 완성은 우리나라를 선진 공업국가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자주국방·자립경제를 달성하여 평화적 남북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여야만 한다. 1980년대 초에는 이 목표가 달성될 것으로 확신한다.
 
  1976년 6월25일(금) 흐림
 
  大逆 金日成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 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또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 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治罪해야 하나. 길은 단 하나뿐이다. 全力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 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 전몰군경, 반공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이 대업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원장 사택이 너무 해』
 
  1976년 7월6일에 朴正熙 대통령은 정무, 공보비서관을 데리고 수원 새마을연수원, 경기 도청, 청소년지도자 연수원 등의 신축 공사장을 시찰했다.
 
  새마을연수원 원장실에서 대통령은 金準 원장과 농업진흥청장, 鄭相千 정무2비서관과 환담을 나누었다. 주로 새마을운동의 성과가 화제로 올랐다. 청소년지도자 연수원으로 갈 때는 길을 잘못 들어 고속도로 양지터미널에서 舊도로로 들어가는 바람에 차가 자갈길을 한 시간 이상이나 힘들게 달려야 했다. 도착하고 나서 청소년지도자 연수원을 둘러본 대통령은 趙炳奎 경기지사에게 물었다.
 
  『저 꼭대기에 있는 집이 뭐요?』
 
  『원장 사택입니다』
 
  『교육장을 먼저 짓고 나서 연수원장 집을 짓는 것이 순서인데, 어떻게 원장 관사부터 지었소』
 
  그런 다음에 먼저 도로를 놓지 않은 점, 식당이 중앙에 위치한 점, 원장 관사가 호화롭다는 점, 교관 숙소의 건축 양식이 기이하다는 점 등을 꼼꼼하게 지적했다.
 
  『이것을 재검토하는데, 여기 교통 사정도 나쁘니까 공사 중이지만 더 좋은 곳이 있으면 그쪽으로 옮겨서 순서대로 건물을 짓도록 하시오. 특히 이 청소년연수원은 원장 사택과 교관 숙소를 먼저 지어 놓고, 또 그것도 우리가 보통 보는 건물과 달리 사치스러우니 오히려 청소년들을 연수시키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과 주민들로부터 반발을 사지 않겠소?』
 
  대통령의 못마땅한 반응에 수행했던 鄭相千 정무2비서관과 경기지사는 당황해서 다른 설명은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대통령은 다음 시찰지를 포기하고 곧장 청와대로 돌아왔다.
 
 
  경제정상화
 
  1976년 7월9일(금) 우천
 
  오랫동안 한발이 계속되어 일부 모내기가 늦어지거나 이미 모내기를 마친 논(旣植畓)의 일부가 말라 들어간다고 농민들은 비를 몹시 기다리는 중에 어젯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장마전선이 북상하여 전국적으로 비가 내리다. 이 비는 내일도 계속될 듯하다니 이것으로 완전 해갈이 되고, 금년도 풍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석유 파동으로 심대한 타격을 받던 우리 경제가 금년 봄부터 서서히 회복을 하기 시작, 이제 완전 정상화되고 생산과 유통, 수출, 모든 부분이 급격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수출도 작년 同期(동기) 대비 약 57%의 신장을 하였고 정부 보유 외화도 20억 달러를 초과, 기초 수지 면에서도 흑자를 시현하기 시작했다. 국민이 단합하고 근면하고 노력하면 국력은 매일매일 자라게 마련이다. 근면·자조·협동은 나 자신을 잘 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길이다.
 
  1976년 7월16일(금) 흐림
 
  7월14일부터 16일까지 을지연습을 실시, 오늘밤 22:00을 기해 종료된다. 1968년부터 이 연습을 매년 1회씩 실시하여 금년으로 9회째가 된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연습 내용이 충실화되고 모든 공무원들도 이제는 숙달이 되어 일단 유사시에는 자신 있게 모든 문제를 처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연습의 주된 목적은 戰時에 소요되는 인적·물적 자원 동원 능력을 정확히 판단하여 전쟁 수행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는 데 있다. 종합 강평은 8월 말경에 있을 예정이나 총평해서 이 정도면 북괴 단독 남침이 있더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이 섰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보완해야 할 점이 많으나 이 연습을 처음 시작하던 초기 상황에 비교하면 그간 우리의 국력이 크게 증강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고, 9회에 걸친 을지연습을 통해서 우리의 방위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퍽 흐뭇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결코 우리가 만족해서는 안 된다. 계속 부단히 검토하고 보완하고 내실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이 연습은 절대로 중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재혼 안 해요』
 
  7월 말부터 朴대통령은 진해 휴양지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7월 31일, 대통령은 수행 기자단과 비서진 몇 명과 함께 수영을 하고 나서 환담을 나누던 중, 한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큰영애 근혜 양이 얼마 전 텔레비전 방송국에 나와서 나라 사랑하는 길을 말하면서, 「나에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장미꽃이 피어 있는 아담한 집에서 손님들에게 차를 끓여 대접하는 일」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영애의 결혼 문제에 대해 생각하신 바가 있으십니까? 그리고 국민의 더 큰 관심은 송구스러워 묻지 못하겠습니다』
 
  『근혜도 출가할 나이가 되었으니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출가시켜야지. 내 재혼 문제는 생각해 본 일도 없고, 마음도 내키지 않고…』
 
  이 말을 하고 나서 朴대통령은 한참 동안이나 하늘을 쳐다보았다.
 
  『더군다나 애들이 커서 장가도 보내고 출가도 시켜야 하는데, 아직 한 사람도 출가시키지 못했어요. 우선 근혜부터 시집 보내고 다음에 근영이 차례가 되겠지요. 되풀이하지만 내 문제는 뒤로 미루고 애들 문제를 앞세워야 할 것 아니오. 지만이가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니 예비고사를 위해 지금이 황금 시기라면서 공부하고 있어요. 내년에 대학 시험 치를 때 잘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번 여름 휴가에 애들이 따라오지 않은 것도 지만이 시험 공부를 도와주느라 셋이 같이 있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지만이 엄마가 없으니까 나 혼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어. 말이 그렇지 부모로서 자식을 결혼시킨다는 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오. 우선 내 머리에는 애들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되겠다는 생각뿐이오. 나는 재혼 안 해요』
 
  이 말을 할 때 대통령은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였다.
 
  화제는 안보 문제로 넘어갔다.
 
  『국군 지휘권 문제에 대해 내가 한 마디 하지. 지금껏 韓美 양측이 모두 이 문제를 제기해 본 일이 없어요. 그러나 미군 지상군이 現 수준에서 줄어들면 당연히 지휘권 문제는 제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군의 숫자가 적은데, 별만 넷을 달았다는 것만으로 작전권을 장악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내세우고 있는 자주국방에 대해 미국 측은 그 진의를 명백히 아는 것 같지 않아요. 우리의 자주국방 개념은 북괴가 소련이나 중공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남침할 경우에 이를 우리 힘만으로 막자는 것인데, 미국 측은 우리 국군이 여세를 몰아 이북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는 북괴가 우리를 침범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고, 만일 침해당했을 경우에는 북괴를 휴전선 이북으로 쫓아버리겠다는 방어 위주의 전쟁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지, 절대 힘이 넘친다고 북괴를 침범할 생각은 없어요. 설령 중국과 소련이 북괴를 지원한다 해도 美 해군과 공군이 우리를 지원하면 별로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공군도 空對空 미사일을 갖게 되었고, 해군도 미사일을 갖고 있으며, 북괴의 잠수함(현재 14척)에 대해서도 이를 즉각 발견할 수 있는 미군의 초계기가 있어요. 또 우리 해군의 주축이 잠수함을 격파하는 구축함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敵이 우리를 침범한다고 해도 막아낼 수 있는 자신감이 이젠 생겼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평화로운 가운데 한반도를 통일하자는 것이 지상 목표입니다. 아무리 통일을 하겠다고 하더라도 동포의 피를 보면서까지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15명의 韓美 경비병과 노무자들이 남측 초소의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북한군 장교 박철이 부하들을 데리고 오더니 가지치기를 중단하라고 했다. 미군 장교 아서 보니파스 대위는 이를 묵살하고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서 1년 기한의 한국근무를 3일 남겨두고 있었다.
 
  박철이 북한병력을 불렀다. 30여 명의 북한군이 트럭을 타고 왔다. 손에는 쇠몽둥이와 도끼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가지치기를 하던 노무자들을 에워쌌다. 박철은 한국군 장교를 통역삼아 미군 장교에게 다시 작업중단을 요구했다.
 
  보니파스 대위가 이를 무시하고 등을 돌리는 순간 박철은 손목시계를 풀어 손수건으로 싼 뒤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죽여!』라고 고함치면서 보니파스 대위의 목을 손으로 쳐 쓰러뜨렸다.
 
  동시에 북한군인들은 韓美 경비병과 노무자들을 덮쳤다. 보니파스 대위는 몽둥이와 도끼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다른 미군 장교 마크 바렛 중위는 사병을 도우려다가 맞아죽었다. 미군 기동타격대가 도착했을 때는 북한군이 분계선을 넘어가 정렬을 끝낸 뒤였다.
 
  이 뉴스가 워싱턴으로 전해졌을 때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캔자스시티에서 대통령 후보를 뽑는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으로부터 공산당에 대해 너무 무르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대통령이 부재 중인 관계로 키신저 국무장관이 백악관 지하 상황실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미국 CIA 요원은 이런 요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돈 오버도퍼 著 「두 개의 코리아」).
 
  <우발적인 사고는 아닐 것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기간에 주한미군에 대한 반대 여론을 조장하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합참을 대표해서 나온 해군참모총장 제임스 I. 할러웨이 제독은 『북한이 남침에 성공하려면 기습을 해야 하는데 이미 우리가 만반의 경계태세에 돌입한 이상 북한의 대규모 군사공격은 없을 것이다』고 분석했다. 이 회의에서 키신저 장관은 포드 대통령과 통화한 뒤 『북한놈들이 이번에는 반드시 피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리처드 스틸웰 駐韓 유엔군사령관은 회의 전에 합참으로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어 버리자는 보복案을 냈으나 키신저는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는 태도였다.
 
 
  한반도에 병력집중
 
  긴급대책회의는 구체적인 보복방안을 결정하지 않고 먼저 한국으로 병력을 집결시키기로 했다. 오키나와 기지로부터 팬텀 편대를 한국으로 이동시키고, 아이다호州에 있던 F-111 전폭기를 한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괌에 있는 B-52 전략폭격기를 휴전선 상공까지 보내 폭탄투하 연습을 하도록 하는 한편 일본에 있던 미드웨이 항공모함 전대를 대한해협으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소련과 중국을 의식하지 않고 상당히 강경한 보복안들을 쏟아 냈다.
 
  「도끼만행」이 감정적 반응을 부른 점도 있었을 것이다. 북한 선박 나포에 이어 북한 해안선 인근 해역에 核폭탄을 터트리자는 案도 나왔다. 북한 측 휴전선의 동쪽 끝 부분을 폭격하자는 발상도 있었다. 美 합참은 미루나무를 베어 버린 뒤 초정밀 유도병기나 地對地 미사일로 북한의 전략적 기간시설을 파괴하는 응징案도 냈다. 키신저도 미루나무만 자르는 행위는 너무 나약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온건론으로 귀착되었다. 美 국방부와 해군 측에서는 『강경한 조치가 또 하나의 한국전쟁을 부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포드 대통령도 「한반도에서 지나친 무력과시는 자칫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있다. 적정한 수준의 병력 사용으로 미국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북한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의 심각성에 놀라 먼저 전투준비 태세에 들어갔다. 평양에선 등화관제가 실시되고 요인들은 지하 방공호로 들어갔다. 全전선에서 북한군은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한국군과 주한미군도 경계태세를 데프콘(Defcon) 3으로 높이고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유엔군 측은 즉각 군사정전회의를 열자고 제의했다. 북한은 즉시 이에 응했다. 이것을 본 스틸웰 사령관은 『판문점 사건이 북한 측의 우발적 행동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이날 朴대통령은 평상시처럼 집무했다. 오전에는 朴東鎭 외무장관의 보고를 받았고, 오후엔 金龍煥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부가가치세제 도입에 관련한 보고가 있었다. 오후 4시20분부터 1시간30분간 朴대통령은 부가가치세제 도입에 대해 소극적이던 南悳祐 부총리를 불러 이 문제를 의논했다.
 
  워싱턴에서는 이 시간 긴박한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지만 戰時는 물론이고 平時 작전통제권도 갖지 못한 朴대통령으로선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을 응징책으로 제안했던 리처드 스틸웰 유엔군사령관.

  이날 밤 朴대통령은 이런 일기를 남겼다.
 
  <오전 10시30분경 판문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인 유엔군 장병 11명이 곤봉·갈고리 등 흉기를 든 30여 명의 북괴군의 도전으로 패싸움이 벌어져서 유엔군 장교(미군) 2명이 사망하고, 한국군 장교 1명과 병사 4명이, 미군 병사 4명, 계 9명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전쟁 미치광이 金日成 도당들의 이 야만적인 행위에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목하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개최 중인 비동맹회의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정치 선전에 광분하고 있는 북괴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하나의 계획적인 만행이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의 이 만행을 언제까지 참아야 할 것인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이들의 이 만행을 언젠가는 고쳐 주기 위한 철퇴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저 미련하고도 무지막지한 폭력배들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사건 다음날인 8월19일 오전(9시50분부터 45분간) 청와대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徐鐘喆 국방장관, 盧載鉉 합참의장, 스틸웰 유엔군사령관, 金正濂 비서실장, 崔侊洙 의전수석은 통역으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朴대통령은 대화 내내 차분하고 사려 깊었으며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고 스틸웰은 워싱턴에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합참본부장으로서 스틸웰과 함께 對北 응징책을 계획했던 柳炳賢 중장.

  <북한 측에 사과 배상 재발방지 등 최대한으로 강력한 항의를 전달해야 하겠지만 나 자신도 이것이 통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북한에 교훈을 주기 위해 적절한 군사적 대응조치를 하되 화력을 사용하는 것에는 반대이다>
 
  그 다음날(8월20일)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은 청와대로 와서 오전 11시부터 45분간 朴대통령에게 워싱턴에서 결정된 보복계획을 보고했다.
 
  『미군이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가서 문제의 미루나무를 잘라 버린다. 만약 이때 북한군이 대응공격을 한다면 우리도 즉각 무력으로 대응하여 휴전선을 넘어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평야 깊숙이 진격하여 수도에 대한 서부전선의 근접성을 해결한다』고 스틸웰 사령관이 보고했다고 한다(배석했던 金正濂 비서실장 증언).
 
  「두 개의 코리아」를 쓴 돈 오버도퍼가 美 국방부 문서를 인용한 내용은 좀더 구체적이다. 미국 정부가 스틸웰 사령관에게 승인한 보복계획은 「북한군이 소총으로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방해할 경우에는 작업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박격포와 대포를 쏜다. 북한군이 (분계선을 넘는) 지상공격을 해올 경우엔 대기 중인 지원부대가 인근의 북한군 목표물에 대한 집중포격을 개시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후자의 경우는 제2의 한국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뜻했다. 이런 경우에는 유엔군과 한국군이 개성과 연백평야까지 진출하되 더 북쪽으로는 전선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 같다.
 
  스틸웰 유엔사령관의 보고를 들은 朴正熙 대통령은 『군사작전은 미루나무 절단에 한정하고 북한이 확전할 때만 우리도 확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때 한국은 중화학공업 건설이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평화만 깨지지 않는다면 체제경쟁에서 金日成에게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도끼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그런 평화가 중단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이해 1월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 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해야겠는데 무력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십 년간 통일이 또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엔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이날 朴대통령은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에게 주문을 하나 했다.
 
  『공동경비구역이 미군 관할이라고 해서 우리가 가만 있을 수 없다. 미군 지휘관을 제외하고 절단작업, 경호, 근접지원 등 제1선 임무는 한국군이 맡고 미군은 제2선을 맡도록 했으면 한다』(金正濂 비서실장 증언)
 
서울 방문 때의 포드 대통령. 그는 도끼만행 사건에 따른 對北 보복작전을 제지했다.

 
  수류탄을 가슴에 숨기고 들어가다
 
  1976년 8월21일 오전 4시쯤 美 2사단內 RC4 체육관. 한국 공수부대원으로 구성된 특공대원 64명이 출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朴熙道 여단장은 특공대 장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지시했다.
 
  『일단 교전이 붙으면 누가 먼저 발포했느냐는 문제가 안 된다. 교전 결과가 중요하다. 일단 우리 편의 피해가 없어야 한다. 敵의 공격이 예상되면 그 즉시 선제 기습이 이뤄지도록 특공대장 이하 간부들이 즉각 조치하라. 내가 현장에서 직접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특공대장의 판단하에 움직여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朴熙道 여단장은 무기를 숨겨 가라고 지시했다. 방탄조끼를 입고 계급이 없는 철모를 쓴 특공대원들은 몽둥이(곡괭이 자루)만을 든 채 트럭 3대에 나눠 탔다. 방탄조끼 안에는 권총과 수류탄이 숨겨져 있었다. 이러한 무장은 공동경비구역內의 규정과 스틸웰 사령관의 「비무장 지시」와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한국 특공대 병력이 공동경비구역으로 가는 전진 기지인 키티호크 캠프(注: 이 캠프는 후에 8·18 도끼만행 사건으로 사망한 미군 대위의 이름을 따 「보니파스 캠프」로 바뀌었다)에 도착한 것은 잠시 후였다.
 
  이날 오전 7시 韓美호송 차량 23대가 북한 측에 사전 통보 없이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했다. 미군 공병대원 16명은 전기톱과 도끼로 미루나무를 베어 내기 시작했다. 공동경비구역 안에 북한이 멋대로 설치한 두 개의 바리케이드도 철거했다. 한국군 특공대가 이 작업을 엄호했다. 하늘에는 미군 보병이 탄 20대의 汎用헬기와 7대의 코브라 공격용 헬기가 굉음을 내면서 선회 중이었다. 상공에서는 B-52 전폭기 편대가 韓美 전투기의 엄호를 받으며 선회하고 있었다. 오산에는 중무장한 F-111 편대가 대기 중이었다. 해상엔 미드웨이 항공모함 전대, 판문점 가까운 전선에는 韓美 보병, 포병이 방아쇠를 만지고 있었다.
 
  미루나무 절단작업이 시작된 직후 유엔군 측은 당직 장교를 통해 북한 측에 메시지를 전달했다.
 
  「유엔사 작업반은 8월21일 JSA(공동경비구역) 안에 들어간다. 그것은 지난 8월18일 당신네 경비병들의 도발로 마무리짓지 못한 작업을 평화적으로 완료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측 작업반은 유엔司 초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나무를 베어 낼 것이다. 작업반은 임무가 끝나는 대로 JSA에서 철수할 것이다. 이 작업반이 아무런 도발을 받지 않는 한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키신저 국무장관은『이번에는 북한이 피를 흘려야 한다』고 말했으나 제2의 한국戰을 걱정해야 했다.

  金正濂 비서실장과 崔侊洙 의전수석은 이미 오전 6시에 청와대로 출근하여 유엔군 사령부 지하 벙커에 있는 柳炳賢 합참본부장과 전화 통화를 한 뒤 비서실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유엔군 사령부와 연결돼 있는 핫라인을 통해 작전 진행 상황을 파악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절단 작전이 시작되었을 즈음 朴正熙 대통령은 본관 2층 거실에서 아래층 집무실로 내려왔다. 金正濂 실장과 崔侊洙 수석은 유엔군 사령부에서 보고가 들어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첫 번째 보고는 「지금 작업반이 들어가 미루나무를 베고 있다」였다. 崔侊洙 수석이 집무실로 가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내용을 보고했다. 崔수석은 작전이 끝난 오전 7시55분까지 두 번 더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오전 7시22분쯤 「敵 200여 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방향으로 오고 있다」라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 「敵이 다리를 넘어오지는 않고 사진만 찍고 돌아갔다」라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였다.
 
  이날 전방의 북한군 부대 통신을 감청한 미군은 『그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고 평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쪽에서 북한군은 미루나무가 작전 개시 42분 만에 잘려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20분 후 북한 측 군사정전위 수석대표 한주경 소장이 金日成의 친서를 전달하고자 미국 측 수석대표에게 비밀면담을 요청했다. 金日成이 유엔군 사령부에 편지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내용은 「유감표명」이었다.
 
  미국 측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였다. 절단 작전이 끝난 뒤 金正濂 실장은 최종 보고를 하러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朴正熙 대통령은 서류를 보면서 보고를 다 듣고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래, 끝났다고, 알았어』라고 말했다.
 
  얼마가 지난 뒤 金正濂 실장은 朴正熙 대통령의 인터폰을 받았다. 朴대통령은 『金실장이 국방장관, 합참의장, 참모총장, 그리고 스틸웰 사령관에게 애썼다는 말을 전해 줘』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폭격·봉쇄 등 강경한 보복조치를 생각했다가 온건한 대응으로 물러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북한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1967년의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號 납치, 1969년의 미국 전자첩보기 격추 때도 미국은 무력시위에 그쳤다.
 
  북한이 一戰不辭(일전불사)의 자세를 취하니까 미국으로서도 제2의 한국전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강경대응이 어려웠던 것이다. 6·25 전쟁에서 미군이 뼈저리게 느낀 교훈이 하나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군과 절대로 육상전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도끼만행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韓美공동작전을 위한 지휘체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때부터 韓美연합사 설치를 위한 협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내가 제일 존경했던 相熙 형님』
 
  1976년 9월7일 오후 3시20분쯤 대변인실을 통해 朴대통령이 직접 鮮于煉 공보비서관을 찾았다. 그는 아침에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나왔기에 당황하더니 金永斗 행정관의 흰 와이셔츠를 빌려 갈아입고 서둘러 본관으로 달려갔다.
 
  안경을 쓰고 책상에서 서류를 읽고 있던 朴대통령은 반가이 그를 맞았다. 朴대통령은 회의용 테이블 쪽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고생 많은 줄 내가 알고 있어. 추석은 지내야지』라는 말과 함께 봉투를 주었다.
 
  朴대통령은 모교인 구미국민학교에 과학실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鮮于씨에게 계획을 추진하라고 얼마 전에 지시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올린 과학실 건립 계획서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朴대통령은 보고서를 일일이 체크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이 계획서 가지고는 충분치 않아. 좀더 면밀한 계획을 세워서 모범이 되는 과학실을 만들어 주도록 하게』
 
  『그러시다면 서울의 성동工高가 우수한 공업고등학교인 만큼 그곳 기술 담당 교사와 협의하여 再검토한 후 빈틈없이 짜도록 하겠습니다』
 
  『성동工高도 좋지…. 그보다 정수직업훈련원 사람들을 불러서 물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런 다음 필요한 기계와 부속품은 서울에서 충분히 사서 운반하여 설치해 주고, 李聖祚 교육감과도 의논해서 모범적인 교습장을 만들도록 모든 책임을 지고 완성하도록 해.
 
  현지에 있는 금호工高에서 기술 지원을 받도록 하고. 이왕 구미에 내려가거든 우리 선영을 좀 돌보고 오게. 산 중턱까지 지하수가 많아 지표에 물이 스며 나오는 것이 확인되거든, 땅 밑에 토관을 두 개 정도 묻어서 배수로를 만들면 선영에 물이 배지 않을 거야』
 
  朴대통령은 일일이 지도를 그리면서 설명해 주었다.
 
  朴대통령은 相熙형 묘소로 가는 길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묘소 앞까지 차 진입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래? 누가 했지』
 
  『외아들 준홍씨가 했습니다』
 
  『다음에 고향에 내려가면 한번 들러봐야지. 내가 제일 존경하는 형님이었는데, 그간 차가 들어가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제는 직접 가볼 수 있게 됐구먼』
 
  대통령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구미국민학교 사진 몇 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전에는 이 자리에 보잘것없는 校舍(교사)만 있었는데, 이제는 강당도 세웠구먼. 애들 옷 좀 봐. 내가 다닐 때는 후줄근한 한복들만 입었었는데, 지금은 옷들도 잘 입고 있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여기 좀 봐. 이 사진에서 내가 세어 봐도 선생님들이 36명이나 되지 않아. 참 훌륭하게 발전했구먼』
 
  『제가 알아본 바로는 교사가 47명에 학생은 2700명이었습니다』
 
  『내가 다닐 때는 男선생님 다섯인가 여섯 분에 女선생님은 두 분밖에 안 계셨고, 학급도 한 학년에 하나뿐이었어』
 
  『각하가 최고회의 의장 당시에 구미 상공을 지나면서 쓰신 편지를 보통학교 동창인 당시 면장이 갖고 계시더군요』
 
  『張月相이 말이지, 허허허. 그 친구 큰소리 잘 치지. 참, 그리고 李聖祚 교육감은 내 대구사범 동기생이야』
 
 
  『난 언제나 가짜 생일 쇠고 있어』
 
  대통령의 얘기는 자신의 생일로 옮아갔다. 대통령의 생일은 그때까지 9월30일로 알려져 있었다. 해마다 이날 대통령은 인사도 받고 선물도 받으면서 그때마다 쑥스러워했다.
 
  『난 언제나 가짜 생일을 쇠고 있어. 일생 동안 진짜 생일을 지내 본 적이 없어. 아버님이 출생 신고를 하실 때 음력 생일을 그대로 적었거든』
 
  鮮于비서관이 말을 꺼냈다.
 
  『2년 전에 각하 생일을 알아보니 양력으로 11월14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발표할 기회를 기다리다가 이번부터는 각하께 욕먹을 각오하고 발표했습니다』
 
  『그래? 사실 내 생일이 정확하지 않았어. 양력 9월30일이면 외국 원수들에게서 축전이 오는데, 그게 거북하단 말이야. 그렇다고 이제 새삼스럽게 모든 나라에 경위를 정식으로 통보하기도 멋쩍고…』
 
  『지시하실 필요 없습니다. 신문에 발표된 것을 보고 외무장관이 알아서 在外공관장들을 통해 조치를 하여 해결할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더니 崔侊洙 의전수석을 불렀다.
 
  『생일 바꾸는 문제 말인데 鮮于는 국내를 맡고, 崔비서관은 국외를 담당하되, 공문이나 공식통지는 하지 말도록 해요. 자연스럽게 해 나가도록 하고, 외국에 대해서는 崔비서관이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지나가는 말로 슬쩍 말하라고. 절대 법석 떨지 말고 해야 돼』
 
  朴대통령은 시종 웃는 얼굴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모교의 과학실 건립에 잔신경을 많이 썼던 朴대통령은 陸英修 여사 추모사업회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것은 중지시켰다. 이유는 『아직 우리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고 독립운동기념관과 6·25 전쟁기념관도 없는데 비록 국가예산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지을 시기는 아니다』였다.
 
 
  『퍼스트 레이디로 대접해야』
 
  1976년 9월20일 오후 1시경 朴대통령이 갑자기 鮮于煉 공보비서관을 불렀다. 朴대통령은 鮮于비서관이 짠 구미국민학교 과학실 계획 내용을 그대로 승인하고, 따로 실습용 재료비로 50만원을 더 주었다. 鮮于비서관은 보고를 마친 후 내려가려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대화 상대를 찾는 기분으로 『거기 좀 앉아 봐요. 대통령이 그렇게 무섭습니까』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그 며칠 동안 감기에 걸렸었는데, 몇 가지 우스갯소리를 했다.
 
  『감기에 걸리면 꼭 목감기란 말이야. 바깥 공기가 코를 통해 목으로 들어갈 때 코 속에서 한 번 더 걸러 줘야 하는데, 그대로 직행하니까 목이 상하는 모양이야. 몇 년 전 왼쪽 코 속에 조그만 살점 같은 것이 하나 생겨서 그것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그런지 바람이 그냥 들어가는 것 같아』
 
  朴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면서 코 얘기를 계속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 담당 의사도 조금 많이 잘랐다고 하더구먼. 적당히 자를 일이지, 허허』
 
  朴대통령은 큰딸 근혜양의 儀典(의전)에 대해서 몇 가지 불만을 털어놓았다.
 
  『우리 근혜가 아무리 어려도 퍼스트 레이디인데, 그에 맞는 접대가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부인들은 어떤 한계를 잘 모르는 것 같지?』
 
  朴대통령은 8월26일 오후 경복궁內 경회루에서 있었던 행사에 참석한 근혜 양의 얘기를 소상하게 설명하면서 불경스런 행동을 저지른 몇 사람을 거명했다.
 
  『우리 부인단체 간부들과 세계 여성단체 지도자들 모임에 근혜가 그날 참석했었는데, 행사장 저 끝에 있던 李○○ 여사가 사람들을 비집고 근혜에게 다가와서는 대뜸 한다는 소리가 「내가 이○○이야!」 하더라는 거야. 임자도 잘 알겠지만 신민당의 金○○ 의원은 말이야. 근혜를 보더니 아무런 공식 인사도 없이 곧장 반말로 「어머니도 없는데 고생이 많지」라고 했다는 거야. 그날 근혜가 돌아와서 몹시 불쾌했다고 하면서 울더군. 뭔가 잘못된 것 아니오?』
 
  『그 사람들이 의전을 몰라서 그랬을 것입니다. 수행한 사람들이 적절한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래, 그게 옳은 말이야』
 
  『누가 따라가서 예의를 지키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멀리하게 하고, 예의 바른 사람을 가까이 하게 하는 등 뭔가 조치가 있어야 될 것 같아. 그것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점진적으로 조용히 할 필요가 있지』
 
  『앞으로 더욱 신경을 쓰겠습니다』
 
  朴대통령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鮮于비서관에게 지시를 했다
 
  『그 일을 임자가 맡아서 하도록 하시오. 청와대 내에서도 소문나지 않도록 주의하게』
 
  朴대통령은 몇 번이고 입조심할 것을 강조했다.
 
  1976년 9월26일
  秋夕有感(추석유감)
 
  팔월 한가위
  해가 뜨고 달이 지고 지구가 돌고 돌면
  해마다 가을이면 이날이 오건만은
  올해는 보기 드문 풍년 중에도 대풍년
  농민들의 흘린 땀이 방울방울 결실했네
  높고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들과 산에 단풍이 물들어 가는데
  오곡이 풍성하고 백과가 익어 가니
  나라는 기름지고 백성은 살쪄 가니
  이 어찌 天佑와 조상의 보살핌이 아니랴
  국화의 향기 드높은 중천에
  팔월 대보름 둥근달 높이 떠서 온누리를 비치니 격앙가도 높더라
  이 강산 방방곡곡에 풍년이 왔네
  이 강산 좋을시고 풍년이 왔네
 
  1976년 9월30일
 
  지만이가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하기 위하여 오늘 입학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어제 저녁에 원서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지만이가 벌써 육사를 지원할 만큼 컸구나 생각하니 세월이 퍽 빠른 것만 같이 느껴진다. 「저희 어머니가 살아 있더라면 얼마나 대견해 할까」하고 아내를 생각한다.
 
 
  一葉知秋
 
  1976년 10월1일(일)
 
  一葉知秋(일엽지추). 뒤뜰에서 한잎 두잎의 낙엽이 소리 없이 잔디 위에 떨어지고 있다. 청초한 국화들의 그윽한 향기와 맑고 높은 하늘은 가을이 한창이라는 소식을 소슬바람에 실어서 창가에다 전하고 간다. 오곡이 영글어 가고 백과가 익어 가니 모든 것이 풍성하고 가난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는 것만 같다.
 
  옛말에도 秋收冬藏(추수동장)이라고 하였으니 가을에 거두어 들여 차곡차곡 저장을 해두고 추운 겨울에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족끼리 모여 앉아 밤이 늦도록 옛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정경이 아득히 뇌리에 떠오른다. 가을은 역시 지나간 봄과 여름을 뒤돌아보게 되는, 추억과 사색에 잠기게 되는 계절인가 보다.
 
  1976년 10월17일(일) 흐림
 
  10월유신 4주년이 된다.
 
  유신 4년 동안에 우리나라는 과거 10년 내지 20년 정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국력이 그만큼 커졌다. 정부와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피땀 흘려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그동안 1973년 말부터는 유류 파동으로 시작된 국제 경제의 일대 불황이 있었다. 1975년 초에는 인도지나 반도의 비극이 있었다. 북괴의 남침 땅굴 발견도 이 기간 중에 있었다. 8·18 판문점 만행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꾸준히 국력을 신장시켜 왔고, 주변 정세의 격변과 북한 침략 집단의 집요한 도발과 위협에 미동도 하지 않고 우리의 안보 태세를 훨씬 더 튼튼하게 다져 놓았다.
 
  우리의 방위 산업도 괄목할 만큼 발전 성장하였다. 우리의 경제 발전은 국제 사회에서 경이의 대상이 되고 개발도상국 중의 모범 국가로서 선전이 되고 있다. 그 원인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일대 자각과 단결과 땀 흘려 일한 노력의 代價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이 건설의, 성장의 결과는 값진 것이고 보람 있는 것이다.
 
  하늘은 한민족이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 개척하겠다는 결의와 노력을 경주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응분한 보상을 준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농촌 사회에서 5천년의 유산인 가난이 하나하나 벗겨져 나가고 새로운 생기 약동하는 농촌모습으로 달라져 가는 것은 새마을 운동의 성과다.
 
  농민들의 의지와 의욕과 노력의 代價가 농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0월유신은 救國의 결단이었다. 우리 국민 전체의 결단이었다. 새 역사의 출범이었다. 근면·자조·협동하는 데에서 새 역사가 하루하루 창조되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중단해서는 안 된다. 계속해야 한다. 밝은 내일은 반드시 도래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金泳三이는 보기보다 얌전해』
 
1976년 3·1 민주선언으로 金大中씨는 징역 5년刑을 선고받았고, 가족·측근들은 항의 침묵시위를 했다.

  1976년 9월 하순 鮮于煉 비서관이 결재를 받기 위해 대통령 집무실로 갔다가 짧은 대화가 있었다.
 
  『로비 안 하는 국가가 있나. 송미령씨도 中日전쟁 때 미국을 돌면서 연설도 하고, 돈도 거두고 다니지 않았소. 미국에게 물어보시오, 자기들은 로비 안 하는가. 우리가 로비를 한 것도 철군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 다른 게 있나. 이런 걸로 한국을 이렇게 괴롭힐 수 있어?
 
  내가 존슨 대통령을 만났을 때 6·25 때 도와준 것이 고마워서 즉각 월남 파병을 승낙했는데, 미국이 이렇게 할 수 있냐 말이오. 김형욱이 지금 미국에서 범법을 하고 있잖소. 정보부장으로서 대통령과 한 얘기는 평생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이오. 그럼 미국 정보부장은 그렇게 배신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는 화제를 바꾸어 야당 인사들에 대한 평을 했다. 9월15일에 있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온건한 李哲承씨가 강경한 金泳三씨를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당선된 뒤였다.
 
  『야당에 똑바른 정치가가 있다면 아마 유진산하고 李哲承이야. 신민당이 저렇게 됐으니 다행이야. 李哲承씨가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는데 잘해 나갈지…. 金大中과 金泳三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데, 李哲承은 그래도 자기 분수를 아는 것 같아. 그래도 문제는 말이야, 모든 일이 최고위원 회의에서 합의를 보아야 된다는 것 같던데, 李哲承씨가 어떻게 당을 끌고 나갈 것인지. 아무튼 고생이 많을 거야. 鮮于비서관은 어떻게 생각해요?』
 
  『광복 후 학생연맹 시절부터 잘 알고 있는데, 비교적 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자신의 中道統合論(중도통합론)을 실천하려 할 것입니다』
 
  『아무튼 사람이 괜찮아요. 꿋꿋한 정치를 할 것 같은 인상이더구먼. 얼마 전에 만났던 金泳三씨는 보기보다는 얌전한 것 같던데.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는 것이 그의 태도와 언어에서 비치더군. 그런 사람이 과격한 행동은 안 하겠지?』
 
 
  金大中과 金泳三의 無力化
 
  이해 3월1일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3·1 민주선언」 집회에 참여했다고 하여 金大中씨는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金泳三 신민당 총재도 기자회견에서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요구했다고 하여 불구속 기소된 상태였다.
 
  金씨는 이렇게 썼다(「김영삼 회고록」 2권).
 
  <내 주위의 당직자들은 모두 朴正熙와 중앙정보부의 위협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정보부의 국장 한 사람이라도 만날라치면 대단한 벼슬이라도 한 듯 자랑삼아 떠들기도 했다. 야당의 전당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전국 각지 경찰서의 정보과장들이 총동원되었다>
 
  1976년 5월25일의 신민당 전당대회는 「각목대회」라는 별명이 붙었다. 전당대회장에서 폭력이 춤을 추고 당은 쪼개지는 듯했다. 金泳三 총재는 정보부의 지원을 받은 불량배들이 자신의 再당선을 저지했다고 생각했다. 중앙선관委도 金총재의 총재임기는 소멸되었으므로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신민당은 넉 달간 분당 상태였다.
 
  9월15~16일의 수습전당대회에서 金泳三은 총재경선 1차 투표에선 1위였으나 과반수 표를 얻지 못했다. 2차 투표에서 鄭一亨 후보가 李哲承 후보를 미는 바람에 25표 차이로 李씨가 당선되었다. 李씨는 국방과 외교 분야에선 정권에 협력한다는 방침을 밀고나갔다. 朴대통령은 두 政敵이 무력화되고 협조적인 사람이 야당을 이끌게 됨으로써 속이 편했겠지만 兩金氏가 3년 뒤 손을 잡고 反정부 선명투쟁의 기치를 내걸 때 그 代價를 치르게 된다.
 
 
  청와대 망년회의 합창
 
  1976년 12월30일. 청와대에서 망년회가 있었다. 오후 6시에 대통령은 1급 이상 비서관들과 특보들을 불러 소접견실에서 칵테일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한 비서관이 朴대통령이 지은 「나의 조국」이라는 노래를 테이프에 담아 가지고 행사장으로 올라갔다.
 
  朴대통령이 행사장에 들어선 순간, 누군가가 즉각 그 테이프를 틀었다. 좁은 접견실에 난데없는 합창단의 노랫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朴대통령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아! 그것 참 듣기 좋군』 하면서 흡족해했다.
 
  朴대통령이 소리 내어 그 노래를 끝까지 따라 부르자, 참석자들 모두가 합창을 하게 되었다.
 
  칵테일 파티가 끝나고 식당에서 서양요리를 먹는데, 金東祚 특보가 샴페인이 든 컵을 들어 보이며 『각하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하며 건배를 제의했다.
 
  그때 鮮于비서관은 『축배 내용을 바꾸자』고 했다. 깜짝 놀란 참석자들이 그를 주시하는 가운데 이런 설명이 나왔다.
 
  『각하께서는 애초부터 장수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시조인 혁거세로부터 59代 손이며, 中興(중흥)의 조상인 숙동공으로부터 29代인데 家系가 모두 장수하셨습니다. 역사 이래로 우리 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추정하면 18.5세인 데 비해, 혁거세로부터 각하에 이르기까지 각하 집안의 평균 수명은 25세입니다』
 
  『저 친구가 나보다 우리 집 족보를 더 잘 알아. 잡아다가 조사를 해봐야겠어』
 
  朴대통령의 이 말에 일제히 폭소가 터져 나왔다. 행사는 저녁 8시40분경에 끝났다.
 
 
  농촌을 바꾼 시멘트와 철골
 
신민당은「각목대회」라는 별명이 붙은 1976년 5월25일 전당대회 이후 넉 달 동안 사실상 분당상태에 빠져들었다.

  유신시대에 한국인의 삶을 바꿔 놓은 3大 사업은 중화학공업 건설, 새마을 운동, 中東건설 시장 진출이다. 중화학공업 건설은 朴대통령과 吳源哲 경제2수석 비서관이 주도했고, 中東건설은 기업이, 새마을 운동은 농민지도자들이 주도했다. 새마을 운동은 공업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던 농촌을 바꾸어놓았다. 그 힘은 새마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였다. 우리 민족사상 농민이 수동적 백성의식을 떨쳐 버리고 역사 창조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백성을 국민으로 만든 셈이다.
 
  농촌을 바꾸는 데 기폭제가 된 것은 정부가 새마을 사업을 위해서 전국 농촌마을에 나눠 준 시멘트와 철골이었다. 1971~1978년간 지원된 시멘트는 마을당 2100포대(약 84t)이었고 철골은 마을당 2.6t이었다. 1974년 時價로 환산하면 연간 250만원이다. 그 뒤의 정권이 했던 식으로 정부가 이런 지원을 개별 농가 앞으로 했더라면 국민정신 개혁운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지원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협동체제를 만들어 공동작업으로써 농로·하천둑·마을회관 등 마을의 공동재산을 건설하고 개선하는 일에 나섰다. 청와대 새마을 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朴振煥 박사에 따르면 새마을 운동 성공사례를 동남아 국가 지도자들에게 강의했더니 『물자지원에 따른 부정에는 어떻게 대처했나』라고 묻더라고 한다.
 
  『시멘트와 철골은 부피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훔치기 어렵다. 전국적으로 마을마다 같은 양이 지급되었고, 이것을 마을 주민들이 잘 알고 부정을 감시하는 인원이 너무 많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1970년대에 시멘트와 철골은 국내에서 생산되었으므로 이런 지원이 가능했다.
 
 
  마을 길이 넓어지고 문명이 들어오다
 
  시멘트와 철골은 주로 농촌마을의 길과 둑을 정비하는 데 쓰였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 주는 길을 넓히거나 포장하고 꼬불꼬불한 마을안길을 바로 하고 넓혔다. 동력 경운기가 보급되기 시작했으므로 이런 길 정비는 농촌의 생산성 향상과 직결되었다.
 
  1971년부터 8년간 넓혀지고 바로 된 마을 진입로와 마을안길이 전국적으로 8만5851km였다. 마을당 2601m다. 길을 넓히자니 작은 하천에 놓인 징검다리나 통나무 다리도 콘크리트 교량으로 바꿔야 했다. 1971년부터 5년간 새마을사업으로 건설한 이런 작은 다리들이 전국에 6만5000개, 마을당 두 개였다. 마을주민들 중에는 軍복무 중 다리를 만들어 본 적이 있는 제대장병들이 많아 이들의 지휘下에 공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홍수 때 잘 무너지던 하천의 둑도 보강되거나 물이 잘 흐르도록 직선으로 바꾸어 주었다.
 
  마을안길을 직선화하고 넓히는 과정에서 흙·돌·나뭇가지로 된 담을 헐고 시멘트 담을 쌓는 일이 이어졌다. 길가에 돌출한 農家도 헐어야 했으나 정부가 보상해 주지 않고 마을사람들이 기금을 모아 보상했다. 이렇게 하여 마을안길과 농가 마당까지 자동차와 동력 경운기가 다니게 되니 농업의 기계화가 확산되었다. 1970년엔 두세 마을당 한 대 정도이던 경운기가 1975년에는 마을당 2~3대로 늘어나고, 1980년대엔 마을당 20대로 急增(급증)한다.
 
  이런 농촌개조사업을 정부가 보상해 주면서 주도했더라면 엄청난 재정지출이 따랐을 것이다. 1970년대에 토지소유자가 새마을사업을 위해 자기 땅을 내어놓은 것이 마을당 1700평이었다. 이런 利他的인 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마을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자신의 일처럼 마을의 공동이익사업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마을의 간접자본을 축적해 간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새마을지도자의 양성과 교육에 운동의 成敗가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의 里長 외에 마을마다 새마을지도자를 두 명씩 추대하되 보수를 주지 않도록 했다. 보수를 받지 않는 지도자라야 좋은 사람이 추대되고 마을사람들도 잘 따라 준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1971년부터 8년간 새마을사업을 위해 투입된 마을주민들의 無보수 노동일수는 매년 평균 8일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마을 일을 놓고 회의를 하는 마을회관도 마을마다 서게 되었다. 주로 밤에 마을사람들이 회관에 모여 전등불 아래서 길을 닦고 다리를 놓으며 둑을 쌓는 일을 의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에 원자력 발전이 시작되면서 농촌 電化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마을 속으로 전기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이 마을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현장이 전국 농촌의 풍경이 되었다.
 
  한국의 농민들은 민주주의를 책에서 배우기보다는 자기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더욱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기 위한 自助사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배우게 되었다(朴振煥이 쓴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 경제근대화의 새마을운동」).
 
朴대통령의 새마을 운동 현장 시찰. 시멘트와 철골이 농촌을 바꾸었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이끈 여성지도자들
 
  이런 풀뿌리 민주주의의 현장에서 여성들의 발언권과 참여가 높아졌다. 농촌근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 여성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성들이 새마을 운동 지도자로 등장하는 곳이 점점 많아졌다.
 
  1960년대부터 女工들이 섬유·신발 공업 쪽으로 진출하더니 1970년대엔 드디어 농촌에서도 여성의 역할이 커졌다. 새마을 운동은 여성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1970년대에 양성된 농촌의 지도자群은 그 뒤 농협과 지방자치단체의 간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볏짚으로 이어진 초가지붕은 해마다 갈아입혀야 했다. 겨울철이 되면 이 일이 아주 큰 행사였다. 1970년에 전국 250만 농가의 약 80%가 초가집이었다. 마을안길을 정비하여 농가 마당까지 화물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게 되니 시멘트 기와 슬레이트로 草家지붕을 바꾸는 농가들이 늘기 시작했다. 당시 草家지붕을 갈아입히는 작업을 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이 늘어 가고 있었다. 농촌지붕개량사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草家지붕들이 알록달록한 원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의 성과를 가장 쉽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야였다.
 
  농촌 아궁이도 19공탄용으로 개량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 산에서 땔감을 얻기가 어려워졌다. 朴대통령의 강력한 入山금지 조치가 효과를 내고 있었다. 도시에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가정용 연료가 가스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에 19공탄 수요가 줄어 농가로 퍼져 갔다. 1970년대 후반에 가면 농촌에서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가는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또 다른 가시적 변화였다.
 
  우물에 의존하던 농민생활도 개혁되었다.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간이상수도 공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계곡의 맑은 물을 저수탱크로 끌어왔다가 파이프로 이 물을 개별 농가에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비위생적인 食水로 인해 발생하던 전염병이 많이 줄어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늘었다.
 
  朴대통령은 이 무렵 월간경제동향보고회 직후의 새마을 운동 성공사례 발표 때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농촌에서 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농민들은 어디에 있는 어떤 병원으로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朴대통령은 읍면단위로 보건진료소를 만들고 여기에 의과대학을 졸업한 견습의사와 간호원 한 사람씩을 배치하도록 했다. 1964년 우리나라 농민들 가운데 전등불 아래 살았던 사람들은 약12%였다. 새마을 운동의 하나로 農村電化사업이 확산되면서 1977년 농민들의 98%가 전등불 아래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전기를 끌어오는 데 드는 비용의 약 80%는 장기저리의 융자금으로 충당토록 했다.
 
 
  [여성 새마을지도자 手記]
 
 
  전북 순창군 여성 새마을지도자 서죽자씨 手記에서 일부를 뽑았다.
 
  <우리는 다시 10월22일 그 숙원사업 중의 하나인 양수장 기공식을 갖고 남녀 노소 없이 全부락민이 총동원되어 산을 끊고 도수로를 내고 양수장을 설치하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그 엄청난 산허리를 불과 5일 만에 끊고 도수로를 내게 되었습니다. 너나없이 이 엄청난, 상상조차 못 할 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양수장 설치작업을 계속하면서도 주민들에게 천추의 숙원인 섬진강 대교 건설을 한번 해보자고 계속 설득전을 벌였습니다만 총회를 할 때마다 「하기는 해야 하지만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한 길이 넘는 수심, 수천년 동안 못 놓던 다리, 역대 국회의원들이 선거 때마다 내놓은 공약은 거짓으로 끝나 버렸던 다리, 저곳에 다리만 놓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꾸만 마음의 집념은 이 다리로 쏠리게 되고 더구나 3개 마을 회원들은 모두가 저도 모르게 한마음에 도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숙원」 이렇게 표현하기는 너무나 약합니다. 퇴비 한 짐을 지고 나루터에 서 있다가 저 나룻배가 이쪽으로 닿으면 배에 올라 논밭에 놓고 오고 홍수가 지면 건너가지 못해 그렇게 애타게 길러왔던 누에를 굶겨 버렸던 5년 전의 쓰라림. 강 건너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안부만 확인하고 애태우던 중·고등학교 학생들인 귀여운 자식들. 학교에 가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어린 자식들, 야속하게도 남자들은 하지도 못할 일을 여자들이 무얼 안다고 떠드느냐고까지 했습니다.
 
  나는 부녀회원 3개 마을 총회에서 역설했습니다. 우리 몸이 저 물속에서 차곡차곡 쌓여 완전한 다리가 놓여질 수 있다면 기꺼이 자식들을 위하여 나는 물 속에서 다리발이 되어 주겠다고 말입니다.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남편들의 설득 공작에 돌입하여 그해 겨울 내내 양수장 작업장에서, 밥상머리에서, 심지어 아이들의 호응까지 받으며 남자들 설득에 성공했습니다.
 
 
  교각 두 개 세운 날의 감동
 
  1974년 1월20일 섬진강 연합 새마을교 가설공사 추진위원 30명을 선출하고, 본 사업의 착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추진위원 30명이 분담하여 1년 동안의 배삯을 사전에 미리 받고, 희사를 받아 준비 작업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부녀회에서도 똑같이 이 사업에 호응하게 되니, 저마다 무리를 해서 내놓았는데 180만원의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2800만원이 드는 공사비에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180만원을 면장님에게 가지고 가 우리 힘의 증거를 보이고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시멘트 1200포, 철근 2t을 확약받았습니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섬진강 대교의 기공식을 1974년 3월13일 군수님과 다수 기관장님을 모시고 강변에서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이곳의 새마을 사업에 감동되어 각계 요로에서 45만원의 희사금이 모금되니 부락민은 더욱 더 힘을 얻게 되고 군수님이 현장에서 시멘트 450포대, 철근 5t을 전달하자 모두가 만세로 감사 표시를 했습니다. 온 부락민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우리 회장 3인은 이날 얼마나 기뻤던지 꼬박 밤을 새워 날이 밝기를 기다려 작업장으로 달렸습니다.
 
  그날부터 우리 여자들은 강둑을 막고 남자들은 기초를 파고 우리 부녀회원들은 모래와 자갈을 모았습니다. 3월의 강바람은 차가웠으나 물속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나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추운 줄도 모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손이 부르트고 새 봄이 돌아오자 영세민들의 식량은 떨어져 가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부녀회에서는 구호곡을 거두기로 정하고 집집마다 내놓을 쌀·보리를 확보, 그 영세민들에게 양식을 주면서 일을 했습니다. 자재의 확보도 힘이 들어 면사무소 마루판자를 뜯어다가 거푸집으로 썼습니다. 그 깊은 물속에 기초가 하나둘 만들어져 가고, 착공한 지 25일 만에 교각 「다리발」을 설치하던 날 『야! 만세, 만세!』 강가의 메아리 속에 2개의 교각이 서던 그 감격스러운 순간, 너무도 신기하고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 우람하고 거대한 교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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