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파’와 ‘토착왜구’는 헌법과 유엔인권헌장을 위반하는 인종차별 선동이다
⊙ 문다혜가 다닌 일본의 극우대학(고쿠시칸대학)은 조선 침략 인맥이 설립
⊙ 문재인은 친일파, 박정희·전두환은 克日波
⊙ 문다혜가 다닌 일본의 극우대학(고쿠시칸대학)은 조선 침략 인맥이 설립
⊙ 문재인은 친일파, 박정희·전두환은 克日波
- 국민주권실현적폐청산대전운동본부 회원들은 2019년 7월 26일 자유한국당 대전시당 당원교육장 앞에서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를 ‘토착왜구’로 모는 시위를 벌였다. 사진=뉴시스
자유민주체제의 우방국인 오늘의 일본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사람을 ‘친일파(親日派)’니 ‘토착왜구(土着倭寇)’니 하고 공격하는 세력이 문재인(文在寅) 정권 편에 많다. 북한 노동당 정권과 같은 논리와 용어로 한국의 애국세력을 공격한다. 이는 유대인, 흑인 학대 같은 반(反)문명적 인종차별주의(Racism)이다. 이런 반일(反日)종족주의 집단을 국내법으로 처벌하고 국제사회에 고발하는 방법을 모색할 때이다.
1. 문재인 정권과 그 지지세력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유일한 이유를 가지고 국민의 상당수를 친일파, 토착왜구, 적폐세력, 수구(守舊)세력으로 규정하고 청산이나 응징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이는 양심의 자유를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및 유엔 인권선언 위반이고 문명의 기초를 허무는 반인도범죄 행위이다.
* 유엔 인권선언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性),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과 같은 어떠한 종류의 차별이 없이,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
*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제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2. 이런 행태의 근저엔 반일종족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軍國主義)가 아닌 오늘의 일본까지도 무조건 미워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비난이나 숙청 대상으로 여기는 생각이다. 인류 보편적 가치관에 역행(逆行)하는 부족국가 시대의 논리다. 특정한 나라나 특정한 민족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 및 유엔 헌장과 유엔 인권선언은 물론 가치(價値)동맹이기도 한 한·미·일 군사동맹 정신의 위반도 된다.
‘우리민족끼리=우리민족반역자끼리’
3. ‘토착왜구’는 ‘친일파’보다 더한 차별적 용어로서 지금의 민주국가 일본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한국 국적자를 반역자, 매국노, 일본 부역자(附逆者), 강도단에 비유,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반인도적 폭언이다. 선진국에서 이런 말을 공직자가 하면 형사처벌을 받고 정치적으로 매장될 것이다.
4. ‘친일파’와 ‘토착왜구’는 북한 노동당 정권도 애국세력을 공격할 때 문재인 정권 세력과 같은 논리로, 같은 목적으로 쓰는 공통어가 되었다. 남북한의 반문명, 반인도세력이 연대·협력하고 있다. 한·미·일 동맹을 깨고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한 전술 용어이다. 국민을 친일(親日) 대(對) 반일(反日)로 분열시킨 다음 대한민국 수호세력을 친일파, 토착왜구로 몰아가려 한다.
5. ‘우리민족끼리’도 배타적 인종차별 용어이다. 더구나 민족반역자 김일성 세력이 말하는 ‘우리민족끼리’는 본뜻이 ‘우리민족반역자끼리’이다. 민족반역자와 민족공조하겠다는 자도 민족반역세력이다.
6. 결국 ‘친일파’ ‘토착왜구’는 종족주의에 근거한 반(反)문명·반인도·반국가적 인종차별 용어이므로 사용 금지하고 사용자를 색출, 응징해야 한다. 반대한민국 세력의 가장 유효한 무기인 ‘친일파’와 ‘토착왜구’를 무력화(無力化)시키면 대한민국이 이긴다.
‘외세보다 더 나쁜 토착세력’
토착왜구, 일명 ‘토왜’라 하는 이 용어는 2019년 3월 15일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들이 분열됐다”라는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발언을 문정선 민주평화당 대변인이 논평하면서 정치판에 처음 등장하였다.
〈국민을 분열시킨 것은 반민특위가 아니라 친일파들이었다. 실패한 반민특위가 나경원과 같은 국적 불명의 괴물을 낳았다.… 다시 반민특위를 만들어서라도 토착왜구는 청산되어야 한다. 토착왜구 나경원을 역사의 법정에 세워야 한다.〉
사학자 전우용은 ‘토왜’가 을사늑약(1905년) 이후 사용됐고 소위 친일파와 유사한 뜻이며 현대식으로 풀어쓴 게 토착왜구라는 취지의 주장을 펴면서 그 근거로 1910년 《대한매일신보》의 ‘토왜천지(土倭天地)’라는 글을 들었다. 을사늑약 이전 기록에서도 ‘토왜’라는 용어가 확인된다. 1899년 김화식의 《소의신편(昭義新編)》에서 “오늘날 개화배(開化輩)를 세상 사람들은 소위 토왜라고 한다. 토왜는 진왜(眞倭)와는 다른 종자이다[今日開化輩(금일개화배), 世所謂土倭也(세소위토왜야), 土倭有不如眞倭種子(토왜유불여진왜종자)]”라며 개화파를 ‘토왜’라 지칭했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 6권 1908년 기록에서도 “우리 통역관들이 무고, 살인, 약탈 등을 외적(外敵)보다 심하게 하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토왜(土倭)’라 하였다[時我民爲譯舌者(시아민위역설자), 誣人殺掠(무인살약), 甚於外寇(심어외구), 人謂之土倭(인위지토왜)]”라며 ‘외세보다 더 나쁜 토착세력’의 뜻으로 사용했다.
‘토왜’가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08년 4월5일자 《대한매일신보》에서다.
〈壹團厲氣凝聚(일단려기응취)하야 一進會(일진회)가 生出(출생)이라 大和魂魄換着(대화혼백환착)하니 土倭之稱難免(토왜지칭난면)이라…〉
풀이하자면 ‘한 단체에 역병의 기운이 모여 일진회가 태어나 일본 혼백으로 옷을 바꿔 입으니 토왜라 불리기를 면하기 어렵다’인데, 한일합병에 즈음해서부터 일본의 조선 통치 시기를 거치며 ‘토왜’를 친일 부역자의 의미로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에 와서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현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일본 친화적인 언행을 보이는 모든 대상을 몰아붙이는 데 악용되고 있다.
북한도 발맞춰 ‘토착왜구’ 타령
흥미로운 점은 북한의 대남(對南) 선전기구인 ‘우리민족끼리’에서도 ‘토착왜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민족끼리’는 2019년 3월 28일 “토착왜구는 한마디로 얼굴은 조선 사람이나 창자는 왜놈인 도깨비 같은 자란 뜻”이라고 정의하며 나경원 전 원내대표를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라경원은 자기의 도를 넘는 망언으로 인해 《토착왜구》 《나베》 《아베 수석대변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였다.… 해방 직후 반민족행위를 일삼은 친일앞잡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조직되였던 《반민특위》가 국민분렬을 일으켰다는 라경원의 망언은 그야말로 《토착왜구》가 아니고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나경원 전 원내대표는 ‘친일파’ ‘토착왜구’로 낙인찍힌 대표적 정치인이다. 시작은 2004년 6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일본 자위대 창설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면서부터다. ‘토착왜구’ 용어의 정치권 공식 등장을 야기한 2019년 3월의 발언도 나 전 원내대표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데 일조했다. 국가보훈처가 친일을 잣대로 독립유공 서훈자들을 전수(全數)조사하겠다고 업무 보고한 데 대해, 나 전 원내대표가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지적한 발언을 문제 삼았다.
“본인들 마음에 안 드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는 친일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결국 ‘우파는 곧 친일’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앞으로 이 정부의 ‘역사공정’이 시작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해방 후에 (좌익세력이 가담, 반미 프락치 사건으로 해체된)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 모두 기억하실 것이다. 또다시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해주실 것을 말씀드린다.”
2019년 8월 국회 패스트트랙 사태 때는 나 전 원내대표가 국회 농성 당시 착용한 양말이 ‘일본 캐릭터’라는 점을 들어 친일파로 몰아세웠다. 나경원 전 원내대표는 “한국에서는 저를 친일 정치인이라 하고, 일본에선 반일 정치인이라고 합니다. 제 정체성을 모르겠습니다. 저에 대해 좌파 정당이 계속 친일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우파 정당, 그리고 우파 정치인에 대한 낙인찍기”라고 억울해하였다.
“해리스 대사 비난은 인종주의”(美 CNN)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토착왜구’ 중 하나다. 2019년 7월 일본 정부가 우리 대법원의 징용공 배상 판결에 대응하여 내놓은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황 전 대표가 “여당에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식의 감정적 주장을 내놓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의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되겠나?”라고 한 발언이 토착왜구의 증거란다. 2019년 4월 황 대표가 장외 집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의 대변인 노릇만 하고 다닌다”고 발언한 데 대해서도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대변인으로부터 “태극기 극우세력과 토착왜구 옹호세력의 대변인 노릇을 한다”고 비난받았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 1월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인상 관련 발언과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對北) 낙관주의 비판에 대한 발언이 빌미가 되어 ‘토착왜구’ 반열에 올랐다. 해리스 대사의 발언을 못마땅해하는 일부 언론이 그가 일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미국인임을 문제 삼았고, 나아가 그의 콧수염마저 비난의 대상이 됐다. 일제(日帝) 때 총독의 콧수염이 연상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CNN은 ‘인종주의, 역사, 정치: 왜 한국인들은 미국대사의 콧수염에 펄쩍 뛰나’라는 기사에서 “이상한 비난이며 한국인의 인종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CNN은 “해리스 대사는 미국 시민으로, 그를 ‘일본 혈통’으로 치는 것은 미국에선 인종차별이다. 인종적 다양성이 없는 균질한 사회인 한국에선 혼혈 가정이 드물고 외국인 혐오는 놀라울 정도로 일반적”이라고 비판했다.
미래통합당(구 자유한국당)도 ‘토착왜구’가 됐다. 지난 4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유시민 이사장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옛날에 조폭들이 팔에 ‘착하게 살자’고 문신을 했듯이 미래당은 무슨 미래당이냐. 지금까지 해온 게 전부 다 발목 잡기에 토착왜구 그런 것 아니냐. 천박하고 주책없는 당하고 우리가 싸울 가치가 없다”고 막말을 쏟아냈다.
위안부 할머니도 토착왜구
지난 4·15총선에서 충남 아산을 지역구에서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강훈식 의원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지역구민들을 ‘토착왜구’로 싸잡아 비판했다. 총선 선거운동 기간 중 김어준의 유튜브 채널에서 “우리 지역구에 가면 4년 전엔 저쪽을 규정하는 말이 없었는데, 지지하는 선배들이 상대 지지층은 ‘토착왜구’로 지칭하고 있다”고 발언해 논란이 됐다.
친노(親盧) 시인 김정란 상지대 명예교수는 4·15총선에서 대구·경북 전 지역구를 통합당 후보들이 휩쓸자 “대구는 독립해서 일본으로 가시는 게 어떨지. 소속 국회의원과 지자체장들 거느리고. 귀하들의 주인나라 일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일본이 팔 벌려 환영할 겁니다”라며 대구시민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비판받고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경북 경주시는 지난 5월 자매결연 도시인 일본 나라시와 교류 도시인 교토시 등에 코로나19 관련 방역물품을 지원했다가 ‘토착왜구’가 됐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2016년 경주 지진 때 일본을 비롯한 해외 자매 도시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등 ‘상호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반일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극일”이라고 해명했지만 ‘친일 매국노’ ‘토착왜구’ ‘쪽발이’ 등의 비난은 계속됐다.
가장 최신(?) ‘토착왜구’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다.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전 이사장을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고 공개 비판하며 정의기억연대의 회계 부실에 대해 폭로했기 때문이다. 2007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이끌어낸, 반일(反日) 아이콘이던 이용수 할머니가 하루아침에 왼쪽 진영에선 친일파 딱지가 붙어 ‘토착왜구’ ‘치매노인’이 됐다.
反日 대통령의 딸이 다닌 일본의 極右대학
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롯데호텔은 2014년 주한 일본대사관의 ‘자위대 60주년’ 행사에 소공동 롯데호텔 3층 사파이어볼룸을 대관하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며 비난 여론에 시달렸다. 일부 시민들의 ‘친일 기업’ 항의 전화와 대규모 시위 예고, ‘호텔을 폭파하겠다’는 협박에 시달리던 롯데호텔은 결국 행사 하루 전 계약을 취소했다. 롯데 회장 일가가 귀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반일 기업으로 비난받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작년 초 《산케이신문》의 서울특파원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는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대통령 부인(김정숙 여사)은 부산에서 일본 전통 다도(茶道)의 맥을 잇는 우라센케(裏千家)의 다도 교실에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딸 다혜씨는 일본의 고쿠시칸(國士館)대학에 유학했다. 이런 것을 보면 문 대통령의 가정은 의외로 친일적(?)인지도 모르겠다.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측근은 일본을 즐기고 있는데, 문 대통령 본인은 친일규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를 ‘관제(官製) 민족주의’라고 비웃는 목소리도 자주 들린다.〉
짧지만 참 아픈 지적이었다. 《조선일보》 정권현 논설위원은 자신의 칼럼에서 〈기사가 나간 지 열흘이 지나도록 청와대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가짜 뉴스’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구로다 기자가 부산에 취재차 가 현지에서 들었다고 했고, 다른 칼럼에선 다혜씨에 대해 ‘일본 유학 경험도 있는 국제파 같다’고 썼다가, 이번 칼럼에선 ‘고쿠시칸대학’이라고 콕 찍었기 때문이란다.
주일 특파원 출신인 정권현 위원은 〈도쿄에 있는 이 학교는 일본의 메이지(明治)유신 이래 대륙 침략의 향도 역할을 한 우익 단체 현양사(玄洋社) 계열의 인사들이 설립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반일(反日) 대통령’으로 알려진 문재인 대통령의 딸이 일본 대학에, 그것도 우익세력이 설립한 대학, 즉 유명한 극우대학에 유학했다면 일본에서도 당연히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구로다 기자에게 전화를 해서 어떻게 확인했느냐고 물었다. 설명은 납득이 갔다. 문다혜씨는 도쿄에 있는 고쿠시칸대학에 편입하여 21세기아시아학부에서 졸업하였다는 것이 추가설명이었다.
조선 침략 인맥과 닿아 있다
고쿠시칸대학은 일본에선 정평이 나 있는 국가주의적 성향의 건학(建學) 이념을 가진 대학이다. 1917년에 설립된 배경에는 조선 및 중국 침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극우적 결사체 현양사 인맥의 역할이 있고 이 대학의 지금 교가(校歌)엔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지도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이름이 나온다. 요시다의 제자들 중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조선 침략과 관련된 인사들이 많다.
민주당의 이해찬 대표는 미래통합당을 가리켜 ‘토착왜구’라고 부른 적이 있다. 정권 주도의 반일 노선에 제대로 반기를 든 적도 없는 정당을 그렇게 부른다면 문재인 일가도 ‘토착왜구’로 불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문다혜씨가 다닌 극우대학의 뿌리를 따라가 보았다.
우선 이 대학 설립의 이념적 배경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현양사를 살펴본다. ‘대륙낭인(大陸浪人)’이란 말과 연관되기도 하는 이 조직은, 후쿠오카 무사 출신들이 주도하여 1881년에 만들어졌다. 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면서 대륙 진출 및 조선 침략에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창립 멤버 중엔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도야마 미쓰루(頭山満), 우치다 료고로(內田良五郞-內田良平의 父) 등 중국 및 조선 침략과 관련된 인사들이 있다. 이 결사체 출신들은 군부, 관료, 재벌, 정계(政界)에 진출해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합병, 제1·2차 세계대전에서 활동하였다. 현양사의 강령은 ‘황실을 받들고, 조국을 존중하며, 인민의 권리를 고수한다’이다.
고쿠시칸대학은 戰犯대학
현양사가 내건 유명한 슬로건은 ‘대(大)아시아주의’인데, 이들은 조선의 친일(親日) 개화운동가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를 비호하였다. 특히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는 현양사의 해외지부 격인 흑룡회(黑龍会)를 조직하고, 조선의 대중조직인 일진회 이용구(李容九)를 포섭해 한일합병에 이용하였다. 러일전쟁 때 활약했던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는 현양사 출신 군인으로서 1910년 7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통감 직속 헌병사령관 및 경무총감으로 조선에 부임해 한일합병과 무단정치를 주도하였다.
현양사의 사상에 공감한 시바타 도쿠지로(柴田德次郞)에 의하여 도쿄 부근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 청년대민단(靑年大民團)이다. 1917년, 이 조직은 현양사의 사상을 청년들에게 교육하기 위하여 사숙 고쿠시칸(私塾國士館)을 설립하였다.
이런 관계로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이후엔 군국주의적이라고 하여 교명(校名)을 쓰지 못한 때도 있었다. 전범(戰犯)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일본 해군의 욱일기(旭日旗)를 전범 깃발이라 주장하는 한국인들 눈에는 고쿠시칸대학도 전범이고, 이 학교에 다닌 문다혜씨와 이를 허용한 아버지도 ‘친일파’나 ‘토착왜구’로 분류되어야 공평하다. 온건한 성품의 한 일본인 교수는 “내 딸이 그 대학에 가려고 했다면 말렸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대학 출신들은 지금도 국사(國士) 기질이 있어서인지 공무원으로 많이 취직한다.
이 대학 홈페이지에는 ‘건학(建學)의 유래와 이념’ 항목이 있는데 이런 대목이 있다.
〈창립자들이 목표로 한 것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정신을 모범으로 삼아 하루하루의 실천 속에서 심신을 단련하고 인격을 도야하며, 국가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지력(智力)과 담력(膽力)을 구비한 인재 ‘국사(國士)’를 양성하는 것이다.〉
교장(校章)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고쿠시칸 창설 동인들은, 격동의 막말기(幕末期)에 사상가, 교육가로서 준열한 삶으로 일관한 요시다 쇼인의 쇼가손주쿠(松下村塾)를 계승하는 학숙을 육성하려 하였다. 초대 관장인 시바타 도쿠지로(柴田德次郞)는 새빨간 단풍나무를 보고 요시다 쇼인의 일편단심을 연상, 이를 교장(校章) 도안으로 채택하였다. ‘칠생보국(七生報國)의 무사들을 상징하는 일곱 조각의 단풍잎’.〉
‘皇國에 목숨 바칠 대장부’를 기르는 대학
반일 대통령의 딸이 듣고 불렀을지도 모르는 교가(校歌, 館歌라고 부름)의 한 구절은 ‘황국(皇國·일본)에 목숨 바칠 대장부를 기르는 이곳 무사시에 자리 잡은 고쿠시칸’이다. 설립자 시바타의 작사인데, ‘황국(皇國)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한 것이다.
〈(1)
안개를 헤치며 솟아오른 해 우러르고
나뭇가지 높이 뜬 달빛을 받으면서
황국(皇國·일본)에 목숨 바칠 대장부를 기르는
이곳 무사시(학교가 있는 곳)에 자리 잡은 고쿠시칸
(2)
쇼인(松陰·요시다 쇼인을 지칭)을 모신 사당(祠堂)에서 기개(氣槪) 북돋우니
고도쿠지(豪德寺·무사시에 있는 유명한 절) 종소리에 마음 맑아지고
아침이나 저녁이나 내쉬는 숨소리는
후지산(富士山) 넘어오는 하늘의 바람
(3)
저마다 사는 목숨 하찮은 땔감 삼아
커다란 깨달음의 불꽃을 지펴서
방방곡곡 온 세상 모조리 태워버리자
지심(知心)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듯〉
문다혜씨가 다녔다는 21세기아시아학부는 〈일본에 대하여는 물론이고 아시아 문화나 역사적 배경, 가치관, 습관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이해가 깊은 학생들을 육성하여 장래 아시아와 관련 있는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는 곳〉이다.
아베가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을 배우는 대학
반일 대통령의 딸이 다닌 일본 극우대학의 학과(學科)가 아시아학부라고 하니 묘하다. 이 대학의 설립 배경 조직인 현양사의 대륙 및 조선 침략 명분이 ‘아시아주의’였기 때문이다. 이 이념이 21세기적으로 수정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일본인들의 집념을 느끼게 하는 교풍(校風)이다.
아베 일본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다. 친일 청산을 부르짖는 문재인 대통령의 딸이 다닌 학교가 그 요시다 쇼인의 정신으로 학생들을 교육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문재인 일가는 의외로 친일적이란 구로다 기자의 지적이 날카롭다.
요시다 쇼인을 정한론(征韓論)의 발상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 30세에 처형된 그가 주력했던 것은 일본의 개혁이었다. 그 제자들 중엔 조선병합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 있다. 요시다는 일본 정치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지만 한국인으로선 복잡한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이다.
나는 2005년에 일본 자민당 간사장 대리였던 아베 신조(현 총리)를 인터뷰했는데 “정치인으로서 마음에 새기고 계시는 말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저의 고향은 야마구치현, 도쿠가와(德川) 시절엔 조슈번(長州藩)입니다만 메이지유신의 지사(志士)들을 많이 길러낸 요시다 쇼인이란 선생이 계셨습니다. 이분이 인용한 맹자(孟子)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성의를 다하면 움직이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至誠而不動者未之有也)’는 말씀입니다.”
아베 총리는 야마구치(메이지유신 전엔 조슈번) 출신으로선 여덟 번째 총리이다. 요시다 쇼인이란 인물이 있었기에 이 작은 지역이 일본 역대 정권의 핵심인물들을 이렇게나 많이 배출할 수 있었다.
요시다 쇼인은 도쿠가와 막부(幕府)를 타도하고 새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르쳤다. 조슈번에서 서당 비슷한 쇼가손주쿠(松下村塾)를 열어 문하생들을 교육한 지 4년째 되는 해, 즉 1859년 막부에 의해 역모죄로 몰려 30세에 처형되었다. 그가 가르친 조슈번의 제자들이 지금의 가고시마(鹿兒島·규슈), 고치(高知·시고쿠) 무사들과 손잡고 막부를 타도해, 천황 중심의 근대 국민국가를 만드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었다.
그의 쇼가손주쿠 출신 43명의 제자들은 난세(亂世)에 어떤 운명을 맞았는가? 할복자살 6명, 전사(戰死) 1명,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어 사망(討死) 4명, 참수형 1명, 옥사(獄死) 1명. 13명이 요사이 말로 하면 비명횡사(非命橫死)했다. 요시다 제자들 중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출세한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 등 5명 정도다. 역사를 움직이는 데는 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인명(人命) 희생이 요구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통계다.
대륙낭인 우치다 료헤이
반일 대통령의 딸이 자유 의지로 선택한 대학이 하필 왜 조선 침략 인맥이 세운 우익학교냐에 대한 설명을 청와대가 한 적은 없다. 반일 대통령의 딸이 다닌 이 극우대학의 건학 이념과 닿아 있는 대륙낭인의 숨결을 느끼려면 도쿄 교외 다마레이엔(多磨靈園) 공원묘지에 갈 필요가 있다.
36년 전 여름, 나는 이 묘지의 14구(區) 1종(種) 9속(屬) 12호를 찾았다. 한일합병의 막후 실력자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화장한 뼛가루가 묻혀 있는 묘가 이곳에 있었다. 돌난간으로 둘러 쳐진 30평쯤(약 99m2) 되는 큰 무덤이었다. 우람한 비석이, 묻힌 인물의 크기를 말하는 듯했다. 나를 안내한 우치다 연구가 다키자와 마코도(瀧澤誠) 씨(당시 45세·저술가)가 분향·묵념했다.
우치다는 일본 우익사상의 뿌리에 터 잡고 있는 대륙낭인이다. 우치다는 1874년에 ‘국권(國權)주의와 대륙팽창주의의 요람’이라고 불린 후쿠오카에서 검객(劍客) 집안의 아들로 났다. 그는 숙부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에게서 글과 칼을 함께 배우며 자랐다. 검도·유도의 달인이 된 우치다는 히라오카가 창립한 정치결사이자 일본 우익단체의 효시인 현양사에 들어갔다. 현양사는 ‘반일 대통령’의 딸이 다닌 대학의 정신적 모태이기도 하다.
우치다가 반도와 대륙에서 활동무대를 찾게 된 것은 청일전쟁 뒤였다. 일본의 가상적(假想敵)으로 등장한 러시아에 대해 일본 국론(國論)이 ‘민족주의의 발흥’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우치다는 1895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유도 도장을 차렸다. 이 도장은 대륙낭인과 일군(日軍) 첩보원들의 기지가 되었다. 그는 흑룡강변을 여행하면서 이렇게 썼다.
〈아시아의 전(全) 사회를 이처럼 아름다운 꽃밭으로 가꾸는 것이 일본의 사명이다.… 누가 광활한 황야를 러시아로부터 지킬 것인가. 그 일은 우리 일본이 해야 하며, 그러려면 일본의 국력을 흑룡강까지 뻗게 해야 하고, 그러기에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다.〉
뒤에 그가 조직한 우익단체가 흑룡회란 이름을 딴 것도 만주 벌판에 대한 우치다의 집착을 상징한 것이었다.
우치다는 시베리아 철도를 경유해 러시아를 돌면서 정탐 여행을 했다. 러일전쟁 뒤 우치다의 관심은 다시 한반도로 기울었다. 메이지 정계(政界)의 막후 거물인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는 한반도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가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말했다.
“지금 일본에는 비길 데 없는 명마(名馬)가 한 필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그 말을 부릴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그 말에 재갈을 물리고 한번 부려봄이 어떻겠습니까?”
이토는 “그 말에 한번 타고 싶군요” 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 우익의 준마 우치다 료헤이는 이토의 개인 참모로 서울에 왔다. 여기서 우치다와 이용구(李容九)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은 나라를 팔고, 다른 한 사람은 나라를 사는 그런 관계의 만남이었다. 우치다는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합방(合邦)을 한다고 순진한 이용구를 설득해서 이용해 먹었고, 이용구는 합방이 아니라 합병(合倂)임을 알고는 실의(失意) 속에서 일찍 죽었다는 스토리가 이어진다. 일본 우익들은 ‘우리도 정권에 속았다’고 변명하는데, 다 짜고 하는 이야기이다.
속은 자와 속인 자
이용구는 1868년 경북 상주의 양반 가문에서 났다. 12세 때 동학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문하로 들어갔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전봉준(全琫準)의 참모로 참여했다. 공주 전투에서 일본토벌군과 싸우다가 오른쪽 발에 총상을 입었다. 러시아, 일본이 각축하자 이용구는 일본 편으로 기울었다. 반일(反日)의 손병희(孫秉熙)와 헤어져 송병준(宋秉畯)과 함께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했다. 러일전쟁 때 이용구는 일진회를 동원해 일본군의 보급 활동을 지원했다. 철도 부설, 일군(日軍)을 위한 첩보 활동 등에 동원된 일진회원은 10여만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중조직으로서 일진회만큼 큰 단체는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참모로 한국에 온 우치다가 주목한 것은 일진회의 대중 동원력이었다. 우치다는 일진회 고문이 되었다. 그는 일진회 운영경비를 대며 이 조직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우치다는 일진회를 이용, 여론을 조작하여 한일합병에 써먹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직후 이용구는 ‘우리나라를 일본 천황의 은덕 아래 맡기자’는 상주문(上奏文)을 대한제국 황제, 총리, 통감에게 보냈다. 이와는 별도로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에게는 합방청원서를 보냈다. 일본은 합방 아닌 합병을 강행한 뒤 이용가치가 없어진 일진회도 해산시켜버렸다. 해산 명령이 난 다음 날 이용구는 피를 쏟고 입원했다. 서른아홉 살의 우치다는 이즈음 자작시(自作詩)를 읊었다.
〈한의(韓衣)는 일본 옷으로 변하고/ 오늘부터 압록강에서 목욕하고/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의 그림자를 우러러보리.〉
이용구는 심한 신경증상과 폐병으로 쇠약해져 갔다. 일본 효고현의 해안(海岸)에서 요양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내린 작위(爵位)도 거부했다.
이용구 아들, 최후의 인터뷰
이용구의 아들인 오히가시 구니오(大東國男)는 우치다 료헤이의 무덤에서 10리(4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도쿄 교외 기치조지(吉祥寺)시의 조용한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우치다의 무덤보다도 작은 건평 20평(66m2) 정도의 초라한 일본식 목조 건물이었다. 그 다다미방 한구석에서 칠십 노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1984년 여름). 앙상하게 뼈만 남은 그는 허리를 못 쓰고 몇 달째 반듯이 누워 지내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듬성듬성한 수염, 갸름한 얼굴 속에서 깊게 팬 두 눈동자만은 범상치 않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육십 노인의 몸으로 지금도 지압사로 일하며 남편을 부양하고 있는 일본인 부인의 부축을 받고 그는 비스듬히 돌아누웠다.
그는 턱을 괴더니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두서가 없고 중복이 많은 이야기였다. 옆에서는 그의 아내가 “그 이야기는 아까 했는데…”라고 속삭이며 조심스럽게 말리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목소리 좋고 발음 정확한 표준 일본어였다. 표현은 절묘했고, 향수와 분노와 절통함에 떠는 그의 손짓도 격렬했다. 나는 연 사흘 동안, 그의 집에 출근(?)하여 총 15시간에 걸쳐 폭포수 같은 이야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죽기 전에 이것만은 꼭…”이라고 말하며 최단시간 내에 최대량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조급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사흘째 날 밤늦게 헤어질 때 그의 부인은 남편에게 농담을 했다.
“이제 속 시원히 한국 기자에게 털어놓았으니 죽어도 원이 없겠군요.”
이야기의 주제는 아시아주의에 속은 아버지를 위한 변명이었다. 문다혜씨가 다닌 대학이 이용구를 이용하여 합병에 써먹은 우치다의 현양사 인맥이 만들었고, 선택한 학과가 하필 ‘21세기 아시아학과’이기에 ‘20세기 아시아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시아주의의 종언
후쿠오카에서 만난 현양사 거두 스기야마 시게마루(우치다를 이토에게 소개한 사람)의 손자 스기야마 다쓰마루(杉山龍丸)도 한일합병의 모든 책임을 일본 국가에 돌렸다. 할아버지는 대등한 ‘합방’을 원했지 한일합병에는 절대로 반대했다는 거다. 하지만 일본에서 나온 연구서조차도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합병의 주모자로 지목하고 있다.
일본 우익은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 아시아 민족(주로 한국·일본·중국)끼리 연방을 결성하자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천황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은커녕 일본 천황 중심의 합방을 주장하고 있다.
이 모순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아시아주의’는 이론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천황 산하에서의 합방, 즉 천황을 절대자로 받아들이는 합방이란 곧 병합을 의미하지 않을 수 없다. 대륙낭인이나 우익의 주장이 실천 단계에 가서는 꼭 왜곡되고야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 우익의 이 허구성을 역이용한 것이 바로 일본 정부였다. 대륙낭인들을 앞장세워 이상론으로 이용구를 유혹하고 실천 단계에선 나라를 빼앗아버린 것이 일본이었다. 일본의 특징은 그러한 이중적 연극을 각자의 배역들이 너무나 진지하게 수행한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가장 솔직하게(?) 조선 통치를 사죄·반성하는 것은 우익이다. 사죄는 교묘한 변명이다. “우리도 속았다”고 함으로써, 즉 합병의 모든 책임을 정부에 돌림으로써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변신하려는 것이 우익의 실체다.
문재인이 친일파, 전두환은 극일파
지난 5월28일자 《조선일보》 칼럼 ‘누가 친일파인가’에서 이하원 도쿄특파원은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
〈여당과 친문(親文)세력이 자주 활용하는 ‘친일파’는 오래전에 유효기간이 끝난 개념이다. 그럼에도 친일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지난 3년간 일본 사회의 친한(親韓)세력을 위축시키고 혐한(嫌韓)세력의 힘을 키워준 문 대통령과 주변세력을 친일파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문재인이 반일(反日)로 위장한 친일파였다면 전두환·박정희는 친일(親日)로 위장한 극일파(克日派)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시한 한일 경제성장률 비교 통계가 증명한다.
전두환은 집권과정에서 비민주적 방법을 취한 점은 있지만 6·29선언을 통하여 한국의 민주화 흐름을 수용하였을 뿐 아니라 건국(建國) 이후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1980년대 연평균 10.1%로 세계 1위)을 기록해, 민주국가의 든든한 버팀목인 중산층을 육성한 공이 더 크다.
특히 전두환 정부 시절 한·미·일 동맹이 원활하게 작동하였다. 이것이 북한의 거듭된 도발을 저지하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면서 사상(史上)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게 만든 안보 구조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반일종족주의로 망친 한일 관계는 필연적으로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한국의 기업활동을 저해할 것이다. 전두환의 자주적·실용적 대일(對日) 외교에서 배울 바가 많다.

위 통계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전두환-노태우(盧泰愚) 집권기 12년 동안 극일(克日)이 이뤄졌다. 전두환 정부는 일본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을 때 반일을 넘어 극일, 즉 일본을 이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약속은 실천되었다. 1981~1992년 한국 경제는 일본보다 거의 3배나 빨리 성장하였다. 이 시기는 민주화운동의 열풍(熱風)이 불던 때이지만 튼튼한 경제가 그 충격을 흡수해줘, 직선제 개헌(改憲)과 평화적 정권 교대가 이뤄졌다. 당시 일본도 호황(好況)이었지만 한국은 성장률에서 세계 최고였다. ‘일본을 따라잡는다’는 말이 비로소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그 여세(餘勢)를 몰아 10년 내 한국은 구매력 기준으로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을 능가한다.
일본을 결정적으로 돕고 있는 문재인
문재인 대통령이야말로 진짜 ‘친일파(토착왜구)’라고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그가 즐기고 있는 역사조작이 일본에 대한 대한민국의 입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킨 점이 그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주도한 역사조작의 지향점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국가적 정당성을 허물어 북한 정권이 한민족(韓民族)의 챔피언이고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국가임을 뒷받침하는 방향이다. 김일성식 역사관으로 다가가는 조작이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바로잡기 사업을 중단시키고 교과서를 개악(改惡)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유엔 총회가 공인해준 1948년 12월 12일 결의문을 조작해,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의 정통정부가 이 나라 38도선 이남에서만 정통정부라고 교과서에 싣도록 한 것이다. 이는 1965년 한일국교 수립 협상 때 우리가 쟁취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무효화하여 일본에 대한민국과 북한 정권을 동격으로 대하도록 프리핸드를 주는 반역적 역사조작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의 주역이었던 김종필의 생전 증언을 듣는다.
“한국·미국·일본과의 동맹관계는 선진국과의 동맹관계, 해양문화권과의 동맹관계 그리고 자유진영과의 동맹관계였습니다. 그 덕분에 한국 사람들의 행동반경이 넓어졌죠. 우리나라는 38선으로 북쪽이 막히는 바람에 사실상 섬이 되었습니다. 섬이 되었으니까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북쪽을 포기하는 대신에,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동맹관계를 맺었습니다. 북한을 잃은 대신에 세계를 얻은 거죠. 세계를 얻도록 한 것이 한미(韓美)동맹과 한일(韓日)수교였다 하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65년 6월에 서로 사인한 한일 기본조약에서 중요한 것은 3조의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결의 제195호에 따라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입니다. 한일 수교에서 일본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주권국가는 한국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협상과정에서 오랫동안 시비가 붙었죠. 일본 측은 ‘북한도 있으니까, 북한을 놓고 어떻게 대한민국만 정통성 있는 유일한 합법국가로 인정할 수 있느냐’며 여러 가지로 발을 뺐는데, 우리 정부는 양보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일본이 북한과 수교를 하게 된다면 이 조항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통성 있는 국가는 대한민국뿐이라는 것은 우리 헌법에 정해진 바입니다. 이 헌법의 정신을 한일 기본조약에 포함시키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애를 썼고 그것이 성공을 했다는 점, 이것이 한일 기본조약의 중요한 의미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기본조약 3조에 따라 앞으로 일본이 북한과 수교하려 할 때 우리는 일본에 여러 가지 요구를 할 수 있고 견제도 가능하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 결의 195호를 조작해, 북한 지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대표성을 포기한 셈이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 제3조가 북한 지역을 우리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 것의 실효(失效)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영토의 포기는 헌법상 대통령 책무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탄핵은 물론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이런 사람이 ‘친일파’나 ‘토착왜구’가 아니라면 그 누구인가?⊙
1. 문재인 정권과 그 지지세력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유일한 이유를 가지고 국민의 상당수를 친일파, 토착왜구, 적폐세력, 수구(守舊)세력으로 규정하고 청산이나 응징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이는 양심의 자유를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및 유엔 인권선언 위반이고 문명의 기초를 허무는 반인도범죄 행위이다.
* 유엔 인권선언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性),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과 같은 어떠한 종류의 차별이 없이,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
*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제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2. 이런 행태의 근저엔 반일종족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軍國主義)가 아닌 오늘의 일본까지도 무조건 미워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비난이나 숙청 대상으로 여기는 생각이다. 인류 보편적 가치관에 역행(逆行)하는 부족국가 시대의 논리다. 특정한 나라나 특정한 민족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 및 유엔 헌장과 유엔 인권선언은 물론 가치(價値)동맹이기도 한 한·미·일 군사동맹 정신의 위반도 된다.
‘우리민족끼리=우리민족반역자끼리’
3. ‘토착왜구’는 ‘친일파’보다 더한 차별적 용어로서 지금의 민주국가 일본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한국 국적자를 반역자, 매국노, 일본 부역자(附逆者), 강도단에 비유,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반인도적 폭언이다. 선진국에서 이런 말을 공직자가 하면 형사처벌을 받고 정치적으로 매장될 것이다.
4. ‘친일파’와 ‘토착왜구’는 북한 노동당 정권도 애국세력을 공격할 때 문재인 정권 세력과 같은 논리로, 같은 목적으로 쓰는 공통어가 되었다. 남북한의 반문명, 반인도세력이 연대·협력하고 있다. 한·미·일 동맹을 깨고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한 전술 용어이다. 국민을 친일(親日) 대(對) 반일(反日)로 분열시킨 다음 대한민국 수호세력을 친일파, 토착왜구로 몰아가려 한다.
5. ‘우리민족끼리’도 배타적 인종차별 용어이다. 더구나 민족반역자 김일성 세력이 말하는 ‘우리민족끼리’는 본뜻이 ‘우리민족반역자끼리’이다. 민족반역자와 민족공조하겠다는 자도 민족반역세력이다.
6. 결국 ‘친일파’ ‘토착왜구’는 종족주의에 근거한 반(反)문명·반인도·반국가적 인종차별 용어이므로 사용 금지하고 사용자를 색출, 응징해야 한다. 반대한민국 세력의 가장 유효한 무기인 ‘친일파’와 ‘토착왜구’를 무력화(無力化)시키면 대한민국이 이긴다.
‘외세보다 더 나쁜 토착세력’
토착왜구, 일명 ‘토왜’라 하는 이 용어는 2019년 3월 15일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들이 분열됐다”라는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발언을 문정선 민주평화당 대변인이 논평하면서 정치판에 처음 등장하였다.
〈국민을 분열시킨 것은 반민특위가 아니라 친일파들이었다. 실패한 반민특위가 나경원과 같은 국적 불명의 괴물을 낳았다.… 다시 반민특위를 만들어서라도 토착왜구는 청산되어야 한다. 토착왜구 나경원을 역사의 법정에 세워야 한다.〉
사학자 전우용은 ‘토왜’가 을사늑약(1905년) 이후 사용됐고 소위 친일파와 유사한 뜻이며 현대식으로 풀어쓴 게 토착왜구라는 취지의 주장을 펴면서 그 근거로 1910년 《대한매일신보》의 ‘토왜천지(土倭天地)’라는 글을 들었다. 을사늑약 이전 기록에서도 ‘토왜’라는 용어가 확인된다. 1899년 김화식의 《소의신편(昭義新編)》에서 “오늘날 개화배(開化輩)를 세상 사람들은 소위 토왜라고 한다. 토왜는 진왜(眞倭)와는 다른 종자이다[今日開化輩(금일개화배), 世所謂土倭也(세소위토왜야), 土倭有不如眞倭種子(토왜유불여진왜종자)]”라며 개화파를 ‘토왜’라 지칭했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 6권 1908년 기록에서도 “우리 통역관들이 무고, 살인, 약탈 등을 외적(外敵)보다 심하게 하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토왜(土倭)’라 하였다[時我民爲譯舌者(시아민위역설자), 誣人殺掠(무인살약), 甚於外寇(심어외구), 人謂之土倭(인위지토왜)]”라며 ‘외세보다 더 나쁜 토착세력’의 뜻으로 사용했다.
‘토왜’가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08년 4월5일자 《대한매일신보》에서다.
〈壹團厲氣凝聚(일단려기응취)하야 一進會(일진회)가 生出(출생)이라 大和魂魄換着(대화혼백환착)하니 土倭之稱難免(토왜지칭난면)이라…〉
풀이하자면 ‘한 단체에 역병의 기운이 모여 일진회가 태어나 일본 혼백으로 옷을 바꿔 입으니 토왜라 불리기를 면하기 어렵다’인데, 한일합병에 즈음해서부터 일본의 조선 통치 시기를 거치며 ‘토왜’를 친일 부역자의 의미로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에 와서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현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일본 친화적인 언행을 보이는 모든 대상을 몰아붙이는 데 악용되고 있다.
북한도 발맞춰 ‘토착왜구’ 타령
흥미로운 점은 북한의 대남(對南) 선전기구인 ‘우리민족끼리’에서도 ‘토착왜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민족끼리’는 2019년 3월 28일 “토착왜구는 한마디로 얼굴은 조선 사람이나 창자는 왜놈인 도깨비 같은 자란 뜻”이라고 정의하며 나경원 전 원내대표를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라경원은 자기의 도를 넘는 망언으로 인해 《토착왜구》 《나베》 《아베 수석대변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였다.… 해방 직후 반민족행위를 일삼은 친일앞잡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조직되였던 《반민특위》가 국민분렬을 일으켰다는 라경원의 망언은 그야말로 《토착왜구》가 아니고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나경원 전 원내대표는 ‘친일파’ ‘토착왜구’로 낙인찍힌 대표적 정치인이다. 시작은 2004년 6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일본 자위대 창설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면서부터다. ‘토착왜구’ 용어의 정치권 공식 등장을 야기한 2019년 3월의 발언도 나 전 원내대표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데 일조했다. 국가보훈처가 친일을 잣대로 독립유공 서훈자들을 전수(全數)조사하겠다고 업무 보고한 데 대해, 나 전 원내대표가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지적한 발언을 문제 삼았다.
“본인들 마음에 안 드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는 친일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결국 ‘우파는 곧 친일’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앞으로 이 정부의 ‘역사공정’이 시작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해방 후에 (좌익세력이 가담, 반미 프락치 사건으로 해체된)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 모두 기억하실 것이다. 또다시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해주실 것을 말씀드린다.”
2019년 8월 국회 패스트트랙 사태 때는 나 전 원내대표가 국회 농성 당시 착용한 양말이 ‘일본 캐릭터’라는 점을 들어 친일파로 몰아세웠다. 나경원 전 원내대표는 “한국에서는 저를 친일 정치인이라 하고, 일본에선 반일 정치인이라고 합니다. 제 정체성을 모르겠습니다. 저에 대해 좌파 정당이 계속 친일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우파 정당, 그리고 우파 정치인에 대한 낙인찍기”라고 억울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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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친북 성향 단체인 국민주권연대와 청년당은 2019년 12월 13일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 인근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겨냥한 ‘참수(斬首)경연대회’를 열었다. 사진=조선DB |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 1월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인상 관련 발언과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對北) 낙관주의 비판에 대한 발언이 빌미가 되어 ‘토착왜구’ 반열에 올랐다. 해리스 대사의 발언을 못마땅해하는 일부 언론이 그가 일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미국인임을 문제 삼았고, 나아가 그의 콧수염마저 비난의 대상이 됐다. 일제(日帝) 때 총독의 콧수염이 연상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CNN은 ‘인종주의, 역사, 정치: 왜 한국인들은 미국대사의 콧수염에 펄쩍 뛰나’라는 기사에서 “이상한 비난이며 한국인의 인종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CNN은 “해리스 대사는 미국 시민으로, 그를 ‘일본 혈통’으로 치는 것은 미국에선 인종차별이다. 인종적 다양성이 없는 균질한 사회인 한국에선 혼혈 가정이 드물고 외국인 혐오는 놀라울 정도로 일반적”이라고 비판했다.
미래통합당(구 자유한국당)도 ‘토착왜구’가 됐다. 지난 4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유시민 이사장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옛날에 조폭들이 팔에 ‘착하게 살자’고 문신을 했듯이 미래당은 무슨 미래당이냐. 지금까지 해온 게 전부 다 발목 잡기에 토착왜구 그런 것 아니냐. 천박하고 주책없는 당하고 우리가 싸울 가치가 없다”고 막말을 쏟아냈다.
위안부 할머니도 토착왜구
지난 4·15총선에서 충남 아산을 지역구에서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강훈식 의원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지역구민들을 ‘토착왜구’로 싸잡아 비판했다. 총선 선거운동 기간 중 김어준의 유튜브 채널에서 “우리 지역구에 가면 4년 전엔 저쪽을 규정하는 말이 없었는데, 지지하는 선배들이 상대 지지층은 ‘토착왜구’로 지칭하고 있다”고 발언해 논란이 됐다.
친노(親盧) 시인 김정란 상지대 명예교수는 4·15총선에서 대구·경북 전 지역구를 통합당 후보들이 휩쓸자 “대구는 독립해서 일본으로 가시는 게 어떨지. 소속 국회의원과 지자체장들 거느리고. 귀하들의 주인나라 일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일본이 팔 벌려 환영할 겁니다”라며 대구시민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비판받고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경북 경주시는 지난 5월 자매결연 도시인 일본 나라시와 교류 도시인 교토시 등에 코로나19 관련 방역물품을 지원했다가 ‘토착왜구’가 됐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2016년 경주 지진 때 일본을 비롯한 해외 자매 도시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등 ‘상호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반일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극일”이라고 해명했지만 ‘친일 매국노’ ‘토착왜구’ ‘쪽발이’ 등의 비난은 계속됐다.
가장 최신(?) ‘토착왜구’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다.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전 이사장을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고 공개 비판하며 정의기억연대의 회계 부실에 대해 폭로했기 때문이다. 2007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이끌어낸, 반일(反日) 아이콘이던 이용수 할머니가 하루아침에 왼쪽 진영에선 친일파 딱지가 붙어 ‘토착왜구’ ‘치매노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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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딸 문다혜씨(오른쪽)는 극우 성향의 학교인 일본 고쿠시칸대학을 나왔다. 사진=조선DB |
작년 초 《산케이신문》의 서울특파원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는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대통령 부인(김정숙 여사)은 부산에서 일본 전통 다도(茶道)의 맥을 잇는 우라센케(裏千家)의 다도 교실에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딸 다혜씨는 일본의 고쿠시칸(國士館)대학에 유학했다. 이런 것을 보면 문 대통령의 가정은 의외로 친일적(?)인지도 모르겠다.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측근은 일본을 즐기고 있는데, 문 대통령 본인은 친일규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를 ‘관제(官製) 민족주의’라고 비웃는 목소리도 자주 들린다.〉
짧지만 참 아픈 지적이었다. 《조선일보》 정권현 논설위원은 자신의 칼럼에서 〈기사가 나간 지 열흘이 지나도록 청와대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가짜 뉴스’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구로다 기자가 부산에 취재차 가 현지에서 들었다고 했고, 다른 칼럼에선 다혜씨에 대해 ‘일본 유학 경험도 있는 국제파 같다’고 썼다가, 이번 칼럼에선 ‘고쿠시칸대학’이라고 콕 찍었기 때문이란다.
주일 특파원 출신인 정권현 위원은 〈도쿄에 있는 이 학교는 일본의 메이지(明治)유신 이래 대륙 침략의 향도 역할을 한 우익 단체 현양사(玄洋社) 계열의 인사들이 설립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반일(反日) 대통령’으로 알려진 문재인 대통령의 딸이 일본 대학에, 그것도 우익세력이 설립한 대학, 즉 유명한 극우대학에 유학했다면 일본에서도 당연히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구로다 기자에게 전화를 해서 어떻게 확인했느냐고 물었다. 설명은 납득이 갔다. 문다혜씨는 도쿄에 있는 고쿠시칸대학에 편입하여 21세기아시아학부에서 졸업하였다는 것이 추가설명이었다.
조선 침략 인맥과 닿아 있다
고쿠시칸대학은 일본에선 정평이 나 있는 국가주의적 성향의 건학(建學) 이념을 가진 대학이다. 1917년에 설립된 배경에는 조선 및 중국 침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극우적 결사체 현양사 인맥의 역할이 있고 이 대학의 지금 교가(校歌)엔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지도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이름이 나온다. 요시다의 제자들 중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조선 침략과 관련된 인사들이 많다.
민주당의 이해찬 대표는 미래통합당을 가리켜 ‘토착왜구’라고 부른 적이 있다. 정권 주도의 반일 노선에 제대로 반기를 든 적도 없는 정당을 그렇게 부른다면 문재인 일가도 ‘토착왜구’로 불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문다혜씨가 다닌 극우대학의 뿌리를 따라가 보았다.
우선 이 대학 설립의 이념적 배경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현양사를 살펴본다. ‘대륙낭인(大陸浪人)’이란 말과 연관되기도 하는 이 조직은, 후쿠오카 무사 출신들이 주도하여 1881년에 만들어졌다. 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면서 대륙 진출 및 조선 침략에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창립 멤버 중엔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도야마 미쓰루(頭山満), 우치다 료고로(內田良五郞-內田良平의 父) 등 중국 및 조선 침략과 관련된 인사들이 있다. 이 결사체 출신들은 군부, 관료, 재벌, 정계(政界)에 진출해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합병, 제1·2차 세계대전에서 활동하였다. 현양사의 강령은 ‘황실을 받들고, 조국을 존중하며, 인민의 권리를 고수한다’이다.
고쿠시칸대학은 戰犯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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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시칸대학은 일본 극우인사 시바타 도쿠지로가 세웠다. 사진=고쿠시칸대학 홈페이지 |
현양사의 사상에 공감한 시바타 도쿠지로(柴田德次郞)에 의하여 도쿄 부근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 청년대민단(靑年大民團)이다. 1917년, 이 조직은 현양사의 사상을 청년들에게 교육하기 위하여 사숙 고쿠시칸(私塾國士館)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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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시칸대학 校章. |
이 대학 홈페이지에는 ‘건학(建學)의 유래와 이념’ 항목이 있는데 이런 대목이 있다.
〈창립자들이 목표로 한 것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정신을 모범으로 삼아 하루하루의 실천 속에서 심신을 단련하고 인격을 도야하며, 국가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지력(智力)과 담력(膽力)을 구비한 인재 ‘국사(國士)’를 양성하는 것이다.〉
교장(校章)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고쿠시칸 창설 동인들은, 격동의 막말기(幕末期)에 사상가, 교육가로서 준열한 삶으로 일관한 요시다 쇼인의 쇼가손주쿠(松下村塾)를 계승하는 학숙을 육성하려 하였다. 초대 관장인 시바타 도쿠지로(柴田德次郞)는 새빨간 단풍나무를 보고 요시다 쇼인의 일편단심을 연상, 이를 교장(校章) 도안으로 채택하였다. ‘칠생보국(七生報國)의 무사들을 상징하는 일곱 조각의 단풍잎’.〉
‘皇國에 목숨 바칠 대장부’를 기르는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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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기와 후지산에서 모티브를 얻은 고쿠시칸대학 교기. |
〈(1)
안개를 헤치며 솟아오른 해 우러르고
나뭇가지 높이 뜬 달빛을 받으면서
황국(皇國·일본)에 목숨 바칠 대장부를 기르는
이곳 무사시(학교가 있는 곳)에 자리 잡은 고쿠시칸
(2)
쇼인(松陰·요시다 쇼인을 지칭)을 모신 사당(祠堂)에서 기개(氣槪) 북돋우니
고도쿠지(豪德寺·무사시에 있는 유명한 절) 종소리에 마음 맑아지고
아침이나 저녁이나 내쉬는 숨소리는
후지산(富士山) 넘어오는 하늘의 바람
(3)
저마다 사는 목숨 하찮은 땔감 삼아
커다란 깨달음의 불꽃을 지펴서
방방곡곡 온 세상 모조리 태워버리자
지심(知心)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듯〉
문다혜씨가 다녔다는 21세기아시아학부는 〈일본에 대하여는 물론이고 아시아 문화나 역사적 배경, 가치관, 습관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이해가 깊은 학생들을 육성하여 장래 아시아와 관련 있는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는 곳〉이다.
아베가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을 배우는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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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등을 길러낸 요시다 쇼인. 고쿠시칸대학은 그의 정신을 기리는 학교다. |
아베 일본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다. 친일 청산을 부르짖는 문재인 대통령의 딸이 다닌 학교가 그 요시다 쇼인의 정신으로 학생들을 교육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문재인 일가는 의외로 친일적이란 구로다 기자의 지적이 날카롭다.
요시다 쇼인을 정한론(征韓論)의 발상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 30세에 처형된 그가 주력했던 것은 일본의 개혁이었다. 그 제자들 중엔 조선병합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 있다. 요시다는 일본 정치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지만 한국인으로선 복잡한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이다.
나는 2005년에 일본 자민당 간사장 대리였던 아베 신조(현 총리)를 인터뷰했는데 “정치인으로서 마음에 새기고 계시는 말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저의 고향은 야마구치현, 도쿠가와(德川) 시절엔 조슈번(長州藩)입니다만 메이지유신의 지사(志士)들을 많이 길러낸 요시다 쇼인이란 선생이 계셨습니다. 이분이 인용한 맹자(孟子)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성의를 다하면 움직이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至誠而不動者未之有也)’는 말씀입니다.”
아베 총리는 야마구치(메이지유신 전엔 조슈번) 출신으로선 여덟 번째 총리이다. 요시다 쇼인이란 인물이 있었기에 이 작은 지역이 일본 역대 정권의 핵심인물들을 이렇게나 많이 배출할 수 있었다.
요시다 쇼인은 도쿠가와 막부(幕府)를 타도하고 새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르쳤다. 조슈번에서 서당 비슷한 쇼가손주쿠(松下村塾)를 열어 문하생들을 교육한 지 4년째 되는 해, 즉 1859년 막부에 의해 역모죄로 몰려 30세에 처형되었다. 그가 가르친 조슈번의 제자들이 지금의 가고시마(鹿兒島·규슈), 고치(高知·시고쿠) 무사들과 손잡고 막부를 타도해, 천황 중심의 근대 국민국가를 만드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었다.
그의 쇼가손주쿠 출신 43명의 제자들은 난세(亂世)에 어떤 운명을 맞았는가? 할복자살 6명, 전사(戰死) 1명,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어 사망(討死) 4명, 참수형 1명, 옥사(獄死) 1명. 13명이 요사이 말로 하면 비명횡사(非命橫死)했다. 요시다 제자들 중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출세한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 등 5명 정도다. 역사를 움직이는 데는 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인명(人命) 희생이 요구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통계다.
대륙낭인 우치다 료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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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의 막후 실력자 우치다 료헤이(왼쪽)와 이용구(오른쪽). |
36년 전 여름, 나는 이 묘지의 14구(區) 1종(種) 9속(屬) 12호를 찾았다. 한일합병의 막후 실력자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화장한 뼛가루가 묻혀 있는 묘가 이곳에 있었다. 돌난간으로 둘러 쳐진 30평쯤(약 99m2) 되는 큰 무덤이었다. 우람한 비석이, 묻힌 인물의 크기를 말하는 듯했다. 나를 안내한 우치다 연구가 다키자와 마코도(瀧澤誠) 씨(당시 45세·저술가)가 분향·묵념했다.
우치다는 일본 우익사상의 뿌리에 터 잡고 있는 대륙낭인이다. 우치다는 1874년에 ‘국권(國權)주의와 대륙팽창주의의 요람’이라고 불린 후쿠오카에서 검객(劍客) 집안의 아들로 났다. 그는 숙부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에게서 글과 칼을 함께 배우며 자랐다. 검도·유도의 달인이 된 우치다는 히라오카가 창립한 정치결사이자 일본 우익단체의 효시인 현양사에 들어갔다. 현양사는 ‘반일 대통령’의 딸이 다닌 대학의 정신적 모태이기도 하다.
우치다가 반도와 대륙에서 활동무대를 찾게 된 것은 청일전쟁 뒤였다. 일본의 가상적(假想敵)으로 등장한 러시아에 대해 일본 국론(國論)이 ‘민족주의의 발흥’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우치다는 1895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유도 도장을 차렸다. 이 도장은 대륙낭인과 일군(日軍) 첩보원들의 기지가 되었다. 그는 흑룡강변을 여행하면서 이렇게 썼다.
〈아시아의 전(全) 사회를 이처럼 아름다운 꽃밭으로 가꾸는 것이 일본의 사명이다.… 누가 광활한 황야를 러시아로부터 지킬 것인가. 그 일은 우리 일본이 해야 하며, 그러려면 일본의 국력을 흑룡강까지 뻗게 해야 하고, 그러기에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다.〉
뒤에 그가 조직한 우익단체가 흑룡회란 이름을 딴 것도 만주 벌판에 대한 우치다의 집착을 상징한 것이었다.
우치다는 시베리아 철도를 경유해 러시아를 돌면서 정탐 여행을 했다. 러일전쟁 뒤 우치다의 관심은 다시 한반도로 기울었다. 메이지 정계(政界)의 막후 거물인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는 한반도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가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말했다.
“지금 일본에는 비길 데 없는 명마(名馬)가 한 필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그 말을 부릴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그 말에 재갈을 물리고 한번 부려봄이 어떻겠습니까?”
이토는 “그 말에 한번 타고 싶군요” 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 우익의 준마 우치다 료헤이는 이토의 개인 참모로 서울에 왔다. 여기서 우치다와 이용구(李容九)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은 나라를 팔고, 다른 한 사람은 나라를 사는 그런 관계의 만남이었다. 우치다는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합방(合邦)을 한다고 순진한 이용구를 설득해서 이용해 먹었고, 이용구는 합방이 아니라 합병(合倂)임을 알고는 실의(失意) 속에서 일찍 죽었다는 스토리가 이어진다. 일본 우익들은 ‘우리도 정권에 속았다’고 변명하는데, 다 짜고 하는 이야기이다.
속은 자와 속인 자
이용구는 1868년 경북 상주의 양반 가문에서 났다. 12세 때 동학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문하로 들어갔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전봉준(全琫準)의 참모로 참여했다. 공주 전투에서 일본토벌군과 싸우다가 오른쪽 발에 총상을 입었다. 러시아, 일본이 각축하자 이용구는 일본 편으로 기울었다. 반일(反日)의 손병희(孫秉熙)와 헤어져 송병준(宋秉畯)과 함께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했다. 러일전쟁 때 이용구는 일진회를 동원해 일본군의 보급 활동을 지원했다. 철도 부설, 일군(日軍)을 위한 첩보 활동 등에 동원된 일진회원은 10여만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중조직으로서 일진회만큼 큰 단체는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참모로 한국에 온 우치다가 주목한 것은 일진회의 대중 동원력이었다. 우치다는 일진회 고문이 되었다. 그는 일진회 운영경비를 대며 이 조직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우치다는 일진회를 이용, 여론을 조작하여 한일합병에 써먹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직후 이용구는 ‘우리나라를 일본 천황의 은덕 아래 맡기자’는 상주문(上奏文)을 대한제국 황제, 총리, 통감에게 보냈다. 이와는 별도로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에게는 합방청원서를 보냈다. 일본은 합방 아닌 합병을 강행한 뒤 이용가치가 없어진 일진회도 해산시켜버렸다. 해산 명령이 난 다음 날 이용구는 피를 쏟고 입원했다. 서른아홉 살의 우치다는 이즈음 자작시(自作詩)를 읊었다.
〈한의(韓衣)는 일본 옷으로 변하고/ 오늘부터 압록강에서 목욕하고/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의 그림자를 우러러보리.〉
이용구는 심한 신경증상과 폐병으로 쇠약해져 갔다. 일본 효고현의 해안(海岸)에서 요양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내린 작위(爵位)도 거부했다.
이용구 아들, 최후의 인터뷰
이용구의 아들인 오히가시 구니오(大東國男)는 우치다 료헤이의 무덤에서 10리(4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도쿄 교외 기치조지(吉祥寺)시의 조용한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우치다의 무덤보다도 작은 건평 20평(66m2) 정도의 초라한 일본식 목조 건물이었다. 그 다다미방 한구석에서 칠십 노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1984년 여름). 앙상하게 뼈만 남은 그는 허리를 못 쓰고 몇 달째 반듯이 누워 지내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듬성듬성한 수염, 갸름한 얼굴 속에서 깊게 팬 두 눈동자만은 범상치 않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육십 노인의 몸으로 지금도 지압사로 일하며 남편을 부양하고 있는 일본인 부인의 부축을 받고 그는 비스듬히 돌아누웠다.
그는 턱을 괴더니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두서가 없고 중복이 많은 이야기였다. 옆에서는 그의 아내가 “그 이야기는 아까 했는데…”라고 속삭이며 조심스럽게 말리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목소리 좋고 발음 정확한 표준 일본어였다. 표현은 절묘했고, 향수와 분노와 절통함에 떠는 그의 손짓도 격렬했다. 나는 연 사흘 동안, 그의 집에 출근(?)하여 총 15시간에 걸쳐 폭포수 같은 이야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죽기 전에 이것만은 꼭…”이라고 말하며 최단시간 내에 최대량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조급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사흘째 날 밤늦게 헤어질 때 그의 부인은 남편에게 농담을 했다.
“이제 속 시원히 한국 기자에게 털어놓았으니 죽어도 원이 없겠군요.”
이야기의 주제는 아시아주의에 속은 아버지를 위한 변명이었다. 문다혜씨가 다닌 대학이 이용구를 이용하여 합병에 써먹은 우치다의 현양사 인맥이 만들었고, 선택한 학과가 하필 ‘21세기 아시아학과’이기에 ‘20세기 아시아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시아주의의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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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료헤이를 이토 히로부미에게 소개한 스기야마. |
일본 우익은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 아시아 민족(주로 한국·일본·중국)끼리 연방을 결성하자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천황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은커녕 일본 천황 중심의 합방을 주장하고 있다.
이 모순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아시아주의’는 이론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천황 산하에서의 합방, 즉 천황을 절대자로 받아들이는 합방이란 곧 병합을 의미하지 않을 수 없다. 대륙낭인이나 우익의 주장이 실천 단계에 가서는 꼭 왜곡되고야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 우익의 이 허구성을 역이용한 것이 바로 일본 정부였다. 대륙낭인들을 앞장세워 이상론으로 이용구를 유혹하고 실천 단계에선 나라를 빼앗아버린 것이 일본이었다. 일본의 특징은 그러한 이중적 연극을 각자의 배역들이 너무나 진지하게 수행한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가장 솔직하게(?) 조선 통치를 사죄·반성하는 것은 우익이다. 사죄는 교묘한 변명이다. “우리도 속았다”고 함으로써, 즉 합병의 모든 책임을 정부에 돌림으로써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변신하려는 것이 우익의 실체다.
문재인이 친일파, 전두환은 극일파
지난 5월28일자 《조선일보》 칼럼 ‘누가 친일파인가’에서 이하원 도쿄특파원은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
〈여당과 친문(親文)세력이 자주 활용하는 ‘친일파’는 오래전에 유효기간이 끝난 개념이다. 그럼에도 친일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지난 3년간 일본 사회의 친한(親韓)세력을 위축시키고 혐한(嫌韓)세력의 힘을 키워준 문 대통령과 주변세력을 친일파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문재인이 반일(反日)로 위장한 친일파였다면 전두환·박정희는 친일(親日)로 위장한 극일파(克日派)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시한 한일 경제성장률 비교 통계가 증명한다.
전두환은 집권과정에서 비민주적 방법을 취한 점은 있지만 6·29선언을 통하여 한국의 민주화 흐름을 수용하였을 뿐 아니라 건국(建國) 이후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1980년대 연평균 10.1%로 세계 1위)을 기록해, 민주국가의 든든한 버팀목인 중산층을 육성한 공이 더 크다.
특히 전두환 정부 시절 한·미·일 동맹이 원활하게 작동하였다. 이것이 북한의 거듭된 도발을 저지하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면서 사상(史上)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게 만든 안보 구조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반일종족주의로 망친 한일 관계는 필연적으로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한국의 기업활동을 저해할 것이다. 전두환의 자주적·실용적 대일(對日) 외교에서 배울 바가 많다.

위 통계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전두환-노태우(盧泰愚) 집권기 12년 동안 극일(克日)이 이뤄졌다. 전두환 정부는 일본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을 때 반일을 넘어 극일, 즉 일본을 이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약속은 실천되었다. 1981~1992년 한국 경제는 일본보다 거의 3배나 빨리 성장하였다. 이 시기는 민주화운동의 열풍(熱風)이 불던 때이지만 튼튼한 경제가 그 충격을 흡수해줘, 직선제 개헌(改憲)과 평화적 정권 교대가 이뤄졌다. 당시 일본도 호황(好況)이었지만 한국은 성장률에서 세계 최고였다. ‘일본을 따라잡는다’는 말이 비로소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그 여세(餘勢)를 몰아 10년 내 한국은 구매력 기준으로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을 능가한다.
일본을 결정적으로 돕고 있는 문재인
문재인 대통령이야말로 진짜 ‘친일파(토착왜구)’라고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그가 즐기고 있는 역사조작이 일본에 대한 대한민국의 입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킨 점이 그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주도한 역사조작의 지향점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국가적 정당성을 허물어 북한 정권이 한민족(韓民族)의 챔피언이고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국가임을 뒷받침하는 방향이다. 김일성식 역사관으로 다가가는 조작이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바로잡기 사업을 중단시키고 교과서를 개악(改惡)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유엔 총회가 공인해준 1948년 12월 12일 결의문을 조작해,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의 정통정부가 이 나라 38도선 이남에서만 정통정부라고 교과서에 싣도록 한 것이다. 이는 1965년 한일국교 수립 협상 때 우리가 쟁취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무효화하여 일본에 대한민국과 북한 정권을 동격으로 대하도록 프리핸드를 주는 반역적 역사조작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의 주역이었던 김종필의 생전 증언을 듣는다.
“한국·미국·일본과의 동맹관계는 선진국과의 동맹관계, 해양문화권과의 동맹관계 그리고 자유진영과의 동맹관계였습니다. 그 덕분에 한국 사람들의 행동반경이 넓어졌죠. 우리나라는 38선으로 북쪽이 막히는 바람에 사실상 섬이 되었습니다. 섬이 되었으니까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북쪽을 포기하는 대신에,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동맹관계를 맺었습니다. 북한을 잃은 대신에 세계를 얻은 거죠. 세계를 얻도록 한 것이 한미(韓美)동맹과 한일(韓日)수교였다 하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65년 6월에 서로 사인한 한일 기본조약에서 중요한 것은 3조의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결의 제195호에 따라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입니다. 한일 수교에서 일본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주권국가는 한국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협상과정에서 오랫동안 시비가 붙었죠. 일본 측은 ‘북한도 있으니까, 북한을 놓고 어떻게 대한민국만 정통성 있는 유일한 합법국가로 인정할 수 있느냐’며 여러 가지로 발을 뺐는데, 우리 정부는 양보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일본이 북한과 수교를 하게 된다면 이 조항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통성 있는 국가는 대한민국뿐이라는 것은 우리 헌법에 정해진 바입니다. 이 헌법의 정신을 한일 기본조약에 포함시키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애를 썼고 그것이 성공을 했다는 점, 이것이 한일 기본조약의 중요한 의미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기본조약 3조에 따라 앞으로 일본이 북한과 수교하려 할 때 우리는 일본에 여러 가지 요구를 할 수 있고 견제도 가능하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 결의 195호를 조작해, 북한 지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대표성을 포기한 셈이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 제3조가 북한 지역을 우리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 것의 실효(失效)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영토의 포기는 헌법상 대통령 책무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탄핵은 물론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이런 사람이 ‘친일파’나 ‘토착왜구’가 아니라면 그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