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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베트남史 〈끝〉

117년간의 항쟁 끝에 프랑스-미국 몰아내

글 : 송정남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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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베트남을 3分해 지배, 응우옌 왕조 명맥은 유지
⊙ 2차대전 중 일본군 점령, 200만명 굶어 죽어
⊙ 프랑스, 호찌민의 북베트남에 대항해 남베트남에 바오다이 정권 수립, 분단의 단초 제공

송정남
1959년생. 한국외대 베트남어과 졸업. 하노이국가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역사학 박사 /
한국외대 동양어대학 부학장, 베트남어과 학과장 역임. 現 한국외대 베트남어과 교수 /
《베트남 탐구》 《베트남 역사 읽기》 출간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으로 북베트남군 전차가 진입하면서 오랜 전쟁은 끝이 났다.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은 1858년부터 시작되었다. 동남아시아가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인도차이나반도의 동쪽에 위치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비껴나 있었다. 일찍부터 가톨릭 포교 활동을 통해 속속들이 베트남을 알고 있던 프랑스는 지금까지 식민지 쟁탈전에서 뒤졌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 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이 자국(自國) 선교사를 처형한 데 대한 징벌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같은 이유로 스페인도 동참했다.
 
  베트남 중부 다낭을 공격하는 것으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가 베트남을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기까지는 27년이나 걸렸다.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산업화에서 월등히 앞선 프랑스의 역량 앞에 베트남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중국(청)에 기대려 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1884년 베트남을 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청(淸)나라는 이듬해 베트남에 대한 종주·종속관계를 포기했다.
 
 
  인도차이나연방 결성
 
프랑스 식민지 시대 총독부. 지금은 대통령궁으로 이용하고 있다.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는 교묘했다. 베트남을 남·중·북으로 삼분했다. 처음에 점령한 남부는 할양받았고, 북부는 식민지로 만들었다. 중부에는 응우옌 왕조를 존치시켰다. 하지만 중부도 프랑스 식민정부 흠차대신의 관할하에 두었기 때문에 사실상 반식민지 상태였다. 프랑스가 응우옌 왕조를 존속시킨 것은 허수아비 왕조나마 남김으로써 베트남인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랑스는 베트남에 이어 이웃한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점령하였다. 프랑스는 이 세 나라에다가 중국으로부터 조차한 광저우(廣州)만을 합하여 인도차이나연방을 세웠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 베트남인이나 프랑스인이 ‘인도차이나’라고 할 때에는 인도와 중국의 사이에 있는 동남아시아 모든 국가가 아니라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세 나라를 통합해서 지칭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통치하기 위해 군대와 경찰, 사법권의 강화에 힘썼다. 군대와 경찰은 소수의 프랑스인에 다수의 베트남인으로 구성되었다. 나아가 프랑스는 베트남 애국지사들을 탄압할 목적에서 특별군사재판소를 두었다. 지금은 프랑스 식민지배시대나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꼰 자오’섬의 감옥은 1862년에 만들어졌다. 이 감옥은 베트남 전쟁 시 남베트남 정부의 수많은 베트콩들을 투옥, 고문, 살해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세계 제2위의 쌀 생산국
 
프랑스는 재정 확보를 위해 본국에서는 금지된 아편 판매와 흡연을 허용했다.
  프랑스 식민정부는 1900년 인도차이나재정법을 제정, 식민지 정부의 소요예산은 식민지에서 거두는 세금으로 충당하도록 했다. 식민정부는 재정수입을 높이기 위해 소금, 술, 아편의 생산과 판매를 완전히 독점하였다. 식민정부의 재정수입을 높이기 위해 프랑스 본국에서는 금지된 아편 판매와 흡연도 허용했다.
 
  이렇게 마련한 재정을 기반으로 프랑스는 철도 및 도로 건설, 토목건축, 항만시설 등 인프라 구축 사업을 벌였다. 여기에는 경제적 목적 외에 연방 전체의 연계 및 저항 운동 진압이라는 정치·군사적 목적도 작용했다. 오늘날에도 이용되고 있는 북남(北南) 종단 철도, 하이퐁-쿤밍 철도, 북남 종단 도로, 사이공-프놈펜 도로 등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베트남 물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이공항과 하이퐁항도 이때 만들어졌다. 베트남에서 가장 큰 호찌민시의 ‘떤선’ 공항도 프랑스가 만든 것이다.
 
  농업은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 개발에서 적은 투자로 가장 많은 수익을 남겼던 산업이다. 프랑스는 준설 및 관개공사 등을 통해 농업생산성을 높였다. 오늘날 베트남이 세계 제2위의 미곡 수출국가가 된 것은 이 시기 투자에 힘입은 바 크다. 아프리카의 구 프랑스 식민지 국가 주민들의 주식이 쌀이 된 것도 이 시절 베트남에서 엄청나게 생산된 쌀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농업 투자에 앞서 토지수탈부터 자행했다. 1945년까지 프랑스가 수탈한 토지는 베트남 전체 토지의 1/4에 해당하는 120만 헥타르에 달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메콩강 하류에 대한 토목공사가 시행되고 이곳의 농업 생산 조건이 크게 향상되면서 남부로 더욱 인구 이동이 가속화되었다. 오늘날 베트남 남부의 인구가 많은 이유다.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은 베트남의 문화도 철저하게 바꾸어 놓았다. 이전까지 중국 중심이었던 베트남의 문명은 프랑스의 식민지배 이후 프랑스화, 서구화되었다.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는 달리 가톨릭 신자가 많은 것도 프랑스의 식민지배의 유산이다.
 
 
  일본의 베트남 점령
 
1940년 9월 베트남 랑선에 진격한 일본군. 일본은 전쟁 말기까지 프랑스 비시정권의 식민통치기구와 공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4월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그해 8월, 독일의 동맹국이던 일본은 나치독일의 괴뢰정권인 비시정권으로부터 ‘인도차이나의 보전과 프랑스의 주권이 존중’되는 것을 조건으로 ‘군사상의 특수한 편의’를 제공받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로 및 비행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비시정권이 일본의 요구들을 수락했음에도 일본군은 9월 22일 베트남-중국 국경지역으로 진격했다.
 
  일본이 인도차이나로 진출한 것은 이곳을 후방기지로 삼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고, 동남아시아를 완전히 식민지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일본은 프랑스 식민정부의 지배 시스템을 그대로 존속시켰다. 일본의 베트남 점령은 손 안 대고 코 푸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일본의 점령기간 중 베트남인 200만명이 굶어 죽었다. 필자는 베트남 유학 시절 베트남 사학자들로부터 “일본 역사가들을 비롯해 많은 일본인이 일본 점령기간 중 200만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아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그런 얘기를 하면 일본인들은 오히려 무슨 근거로 그러느냐고 되묻는다고 했다.
 
  대량 아사는 1944년 말부터 이듬해 7월까지 약 10여 개월 동안 ‘꽝찌’를 포함한 32개 성(省), 특히 북부 베트남에서 많이 발생했다. 이 중 인구가 가장 많은 ‘타이빈’성에서는 전체 인구의 25%인 28만명이 아사했다. 아사가 가장 극점에 도달했던 기간은 1945년 3~6월이었다.
 
 
 
“紅江에선 끊임없이 시체가 떠내려 오고…”

 
베트남을 점령한 일본군이 굶주린 끝에 낟알을 줍는 베트남 소년을 총대로 때리고 있다.
  아사자 200만명은 당시 북베트남 인구 1000만명의 1/5에 해당된다. 농촌은 물론 도시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병사였던 경제학자 고바야시 노보루는 《내 속의 베트남》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농민의 가족들이 문자 그대로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로 길거리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영양실조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 아예 굶어 죽는 것이었다. 거리에는 숨을 거둔 남편의 시체 옆에서 통곡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즐비했다. 몇 시간 지나서 다시 돌아와 보면, 아내 또한 죽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홍강(紅江)에선 끊임없이 시체가 떠내려 오고, 강둑에는 들개들이 무리지어 다녔다.〉
 
  베트남 북부에서 1945년 발생했던 아사사건의 요인은 복합적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 요인은 일본에 있다. 보호국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1940년 이후 일본군에게 협력한 프랑스 당국에도 책임은 있다.
 
  1959년 일본은 남베트남과의 전쟁 보상 협상 과정에서 “전쟁 중 많은 물자를 징발하는 바람에 베트남인 30만명이 아사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남베트남과 일부 일본인 그리고 북베트남이 주장하는 100만명과 200만명은 과장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사 이전의 영양이 결핍된 사람들까지 감안한다면 그럴 수 있다”는 내용의 자료를 국회에 제출했다. 협상 결과 1960년 일본은 남베트남에 3900만 달러의 전쟁보상금을 지불했다. 이런 식으로 1955~1977년 일본은 전쟁보상금(준배상금 포함)으로 미얀마 등 11개국에 총 15억 달러를 지불했다.
 
  일본이 남베트남에 배상금을 지불한 것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노린 것이기도 하다. 나카무라 마사노리는 《일본 전후사 1945-2005》에서 “베트남 전쟁은 한국 전쟁만큼은 아니나 일본 경제의 또 다른 약진을 가능하게 했다. (중략) 베트남 전쟁이 없었다면 이 정도의 규모와 속도로 제2의 고도성장이 진행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베트남의 대 프랑스항쟁
 
  1858년 침략부터 1954년 철수하기까지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는 베트남인의 끈질긴 저항에 부딪혔다. 장장 96년 동안의 대불(對佛)항쟁은 세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첫째, 사대부 계층이 중심이 되어 왕조를 보존, 회복하자는 것이다.
 
  둘째, 유교적 전통을 저변에 깔면서 서구 근대사상에 영향을 받은 애국지사들이 축이 되어 주권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추구하는 국가형태는 입헌군주국가와 민주국가였다.
 
  셋째, 프랑스 식민지배하에서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자라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이 형태는 주체가, 자산가 계급과 무산자 계급으로 나뉜다. 전자(前者)가 조직, 연계성, 방법론 등의 결여로 실패한 반면, 후자(後者)는 철저한 조직과 훈련을 바탕으로 연계성, 방법론, 주변부 상황 등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하여 독립은 물론 민족의 통일까지 이뤄냈다.
 
  대불항쟁에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인물과 조직이 있다. 바로 호찌민(胡志明)과 베트남공산당이다. 호찌민은 공산주의 이론에 입각한 민족주의운동의 제일 선구자이다. 그는 독립운동기간에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성뿐만 아니라 이름도 수없이 바꾸었다. 한국에 알려진 그의 아명(兒名) ‘떳 타인’은 잘못된 것이다. 그의 어렸을 적 성명은 ‘응우옌 신꿍’이다. 떳 타인은 아명 이후에 지은 이름이다. 오늘날 일반화된 성명 호찌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과의 협력을 모색하기 위하여 1942년 8월 중국에 건너갈 때부터 사용했다. 그는 중국국민당계의 군벌인 장파쿠이(張發奎)에게 체포되어 1943년 9월까지 중국 광시성의 13개 현에 산재한 18개 감옥을 옮겨다니며 옥고를 치렀다. 그의 유명한 《옥중일기》는 이 기간에 쓰였다.
 
 
 
호찌민, 조선독립운동에도 관심

 
  호찌민은 1890년 5월 19일 ‘응에 안’성에서 ‘응우옌 신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1901년 회시(會試)의 부방(副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한 바 있으나 1910년 파면되었다. 이후 그는 고향에서 한약 조제업에 종사했다. 호찌민에게는 위로 두 명의 누나와 형이 있었는데, 모두 항불(抗佛)투쟁을 하다가 붙잡혀 옥사했다. 이들 외에도 호찌민은 어려서 죽은 남동생도 있었다. 부친의 지도하에 한학을 깊이 배운 그는 수도 트어 티엔-훼의 고등학교에서 근대교육도 접할 수 있었다.
 
  호찌민은 견문을 넓힌 이후에 귀국하여 조국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신념으로 1911년 프랑스 상선의 보조요리사가 되었다. 그해 6월부터 1913년 말까지 그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아메리카를 항해했고, 1914년 초부터는 영국에 머물렀다. 1917년 말 프랑스로 왔을 때, 그는 다국어 능력에 국제적 감각을 겸비한 독립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러시아에서는 10월혁명이 성공했고, 인도차이나에서는 항불투쟁이 가열되고 있었다.
 
  호찌민은 프랑스에 머물면서 그곳의 노동자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1918년 말 프랑스에서 가장 큰 정당이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해 주던 프랑스사회당에 가입했다. 호찌민은 3·1운동과 조선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19년 9월 4일자 《르 포퓔레르(Le Populaire)》에 〈인도차이나와 조선〉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1920년 1월 8일에는 조선인의 자결권에 대한 토론을 위한 프랑스지리회에 참석, 인도차이나 문제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같은 달에는 주불 조선공화통신사무실과 연락을 갖고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발행하고 있는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를 포함한 각종 저널과 통신 자료 등을 제공받기로 약속받았다. 중국에서의 활동기간에 호찌민은 상하이에서 김구(金九) 등과도 직접 교류를 가졌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호찌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호찌민. 지금도 베트남의 국부로 존경받고 있다.
  호찌민은 1920년 여름 어느 날 프랑스의 《뤼마니떼》에 실린, 제2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에서 레닌이 발표했던 〈민족과 속지문제에 관한 강령〉을 접했다. 그의 전집에 의하면, “그는 이 강령을 수십 번 반복하여 읽은 후에 흥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방에 앉아 마치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것처럼 큰소리로 ‘압박받는 동포여!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해방에 절대 필요한 이정표입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호찌민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인류 지혜의 정화(精華)와 정상(頂上)이자, 착취 계급을 분쇄하고 노동자·농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유일한 사상과 무기라고 신봉하게 되었다. 1921년 2월에 프랑스공산당이 창당되자 그는 당원이 되어 인도차이나인으로 첫 번째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로써 그의 애국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결합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그의 민족해방론은 이후 소련과 중국 등지에서의 이론 학습에 따라 더욱 체계화되었다.
 
  호찌민은 1925년 6월 베트남공산당의 전신(前身)인 월남청년혁명동지회(약칭 ‘청년’이라 함)를 중국의 광주에서 세웠다. 청년은 활동목표를 프랑스 제국주의와 봉건제도, 그리고 자본주의를 타도하여 노동자·농민·병사의 정권을 세우는 것과 이어 세계의 공산화를 위해 압박받는 민중과 무산계급과의 연합에 두었다.
 
  1930년 2월 3일에 베트남공산당이 홍콩에서 설립됐다. 이 무렵 유산자(有産者) 계급의 대표 정당으로서 독립운동의 한 축을 주도하던 베트남국민당이 와해됐다. 베트남공산당은 이때부터 베트남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됐다. 베트남공산당은 활동 과정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한 민중·민족 혁명세력을 결집하는 차원에서 일시 해체하기도 하였다. 1945년 11월 베트남공산당은 이러한 전략에서 해산하는 대신 전위(前衛)조직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월맹)을 건설했다. 냉전시대에 우리가 북베트남을 ‘월맹’이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1951년 2월 베트남공산당은 베트남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립되었다가 통일 이듬해인 1976년 베트남공산당으로 개칭했다.
 
 
  영국군과 중국군의 분할 점령
 
  1945년으로 접어들면서 일본의 패색이 분명해졌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유지되어 온 일본과 프랑스 식민당국 간의 공조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프랑스는 연합군의 인도차이나 진격을 이용하여 인도차이나의 지배권을 회복하려 했다. 이를 간파한 일본은 1945년 3월에 무력으로 인도차이나 전역을 장악했다. 이로써 4년 이상 유지돼 오던 일본과 프랑스 식민정부와의 불편한 공존관계가 깨졌다. 아울러 80년 동안 계속되었던 프랑스의 식민통치체제도 종식됐다. 일본은 그해 8월 패망할 때까지 베트남에서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종전(終戰) 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복귀를 반대하면서, 인도차이나에 대한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장제스(蔣介石) 중국 총통은 동의했다. 하지만 처칠 영국 총리는 인도차이나가 신탁통치를 받게 될 경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에도 그 여파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그 후 미국의 인도차이나 정책도 영국의 압력, 프랑스의 복귀 주장, 미국 국무부 내 유럽 담당자들의 반대 주장, 중국 본토의 혼란, 소련의 부상 등의 이유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식민지의 신탁통치는 식민 본국의 동의하에서만 가능하다”는 조항에 동의했다.
 
  1945년 9월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북베트남에는 중국 국민당군이, 남베트남에는 영국군이 진주했다. 영국군을 따라 프랑스군도 베트남 재(再)식민지화를 위해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영국은 1946년 3월 남베트남 관할권을 프랑스에 이관하고 철수해 버렸다. 중국은 이를 베트남을 다시 병합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한편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프랑스의 패퇴
 
디엔비엔푸에서 포로가 된 프랑스군.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물러났다.
  따라서 신생 베트남민주공화국과 프랑스, 중국 간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은 국공내전 때문에 베트남에 개입할 여유가 없었다. 장제스는 1946년 4월에 중국 내 프랑스의 조계와 할양지 반환, 쿤밍-하구철도 판매, 하이퐁의 1개 특구 양보, 인도차이나 주재 화교의 지위 향상 등을 담은 중불(中佛)협상을 체결하고 북베트남을 프랑스에 인도하였다.
 
  프랑스와 베트남민주공화국 간에는 전쟁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프랑스연방 내 독립 베트남’과 ‘완전독립’이라는 양자의 주장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식민정부는 1946년 6월에 베트남자치공화국을 수립한 후, 1946년 12월 군대를 북베트남으로 북상시켰다. 베트남민주공화국 국가 주석 호찌민은 전민(全民)항전을 호소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 푸’에서 최정예 프랑스군이 북베트남군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길고 긴 프랑스 지배는 끝났다.
 
  제네바회담 결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북에는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월맹)이, 남에는 베트남공화국(월남)이 들어섰다. 원래 프랑스는 베트남자치공화국의 원수(元首)로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를 앉혔었다. 하지만 베트남 우파지도자인 응오 딘 디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몰아내고 1955년 10월 베트남공화국의 대통령이 됐다.
 
  제네바회담으로 인도차이나반도에는 ‘잠시’ 평화가 왔다. 가톨릭교도인 디엠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펴면서 반대세력을 탄압했다. 불교도들을 중심으로 국민들이 저항했다. 북베트남의 공산정권은 남베트남 내 저항세력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를 공산주의의 세력 확대로 간주한 미국은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베트남에서는 이 전쟁을 ‘대미항전’ 혹은 ‘구국대미항전’이라고 한다.
 
  베트남 전쟁은 대략 4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960년 1월의 ‘벤째’ 무장봉기에서 1965년 2월 미국이 본격적으로 북폭(北爆)을 전개하게 되는 시기이다. 제2기는 1965년 3월 미(美)지상군의 다낭 상륙을 시작으로 1969년 1월 베트남민주공화국,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미국, 베트남공화국의 4자가 함께 참여한 파리확대회담의 시작 직전까지의 시기이다. 제3기는 1969년 1월 파리확대회담 개시 이후부터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되기 직전까지의 시기이다. 제4기는 1973년 파리평화협정의 조인 이후부터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베트남 전쟁
 
1975년 4월 29일, 남베트남 패망을 하루 앞두고 미국 대사관원들이 헬기를 타고 다급하게 철수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이었지만, 미국·한국 등 6개국이 참전함으로써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소련과 중국이 북베트남에 막대한 전비와 무기를 지원했다. 북한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공군 등 군 병력을 파견했다.
 
  미국이 참전한 논리는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동남아시아 전역이 공산화된다는 도미노 이론에 근거했다. 남베트남의 상황이 게릴라전에서 국지전으로 확대되고 남베트남이 흔들리는 상황에 빠지자 미국의 참전은 가시화되었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 반전여론의 설득과 의회의 동의를 얻기 위해 먼저 국제적 지지가 절실히 우선되었다. 1964년 8월 북베트남 해군이 미 해군함정을 공격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전선이 없는 전장에서의 대가는 엄청났다. 미국이 투하한 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했던 총 화력의 4배에 달하는 800만 톤이었다. 총 54만명의 미군 주둔, 2400억 달러에 달하는 전비 지출, 8000명의 공군을 포함한 5만7000명의 미군 전사, 5700대의 비행기 손실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남베트남을 잃었다. 전쟁의 특수를 노려 한국군도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연인원 32만여 명이 참전했다. 이 중 5099명이 사망하고 1만1232명이 부상을 입었다.
 
  베트남도 많은 대가를 치렀다. 300만명이 죽고 500만명이 부상을 입었다. 피아 식별이 쉽지 않은 베트남전쟁 상황에서 남베트남인, 북베트남인, 미군, 한국군 모두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였다.
 
 
  통일
 
  전쟁 중에도 남베트남의 정정(政情)은 계속 불안했다. 초대 대통령 디엠은 1963년 미국이 묵인한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후 살해되었다. 이후 군사정권 내부의 갈등으로 쿠데타가 잇따랐다. 1965년 응우옌 반 티우가 정권을 잡았으나, 정국은 안정되지 못했다.
 
  전쟁이 수렁에 빠지고 국내외 반전여론에 직면한 미국은 출구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73년 3월 북베트남, 남베트남, 베트남민족해방전선, 미국 간에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됐다. 이것으로 전쟁은 일단락됐다. 1975년 3월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그해 4월 30일 북베트남군의 탱크가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의 철문을 부수며 진입했다. 이것으로 오랜 전쟁은 끝났다.
 
  베트남공산당은 통일 이듬해인 1976년 4월 25일에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는 1946년 1월 6일 실시되었던 첫 번째 전국적 총선거에 이어 베트남 역사에서 두 번째로 실시된 전국적 총선거였다. 그 결과 제6대 국회가 탄생되었다. 제6대 국회는 그해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첫 번째 회의를 소집하여 새로운 단계에서 베트남 혁명의 주임무를 “통일국가 설립과 사회주의 건설에 있다”고 표명했다. 회의에서는 국호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국기를 ‘금성홍기’로, 국가를 ‘진군가’로, 수도를 ‘하노이’로, 사이공시를 ‘호찌민시’로 결정했다.
 
  베트남 공산당과 정부는 베트남 전쟁 참전국들과의 대외관계에서 “과거는 접어두고 장래로 나아가자”고 말하고 있다. 베트남은 96년 기간의 항전에서 입은 손실에 대하여 프랑스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자국민 200만명이 아사당한 것에 대하여 일본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의 상흔에 대하여 미국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지금도 고엽제로 고통받고 있는 수백만 명의 베트남인도 미국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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