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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화감독을 만나다

이명세

영화를 詩로 읽어 내는 ‘시네아티스트’

글 : 임도경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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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적 실험, 뮤지컬 요소 도입한 초기 작품은 관객들로부터 외면받아
⊙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빗속 액션신은 국내외 영화계가 기억하는 명장면
⊙ 쉽고 간결한 플롯 구조 속에 종종 사실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 만들어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이명세(54) 감독의 영화는 그의 시각에서 재해석된 독자적인 영화적 시간과 공간으로 유명하다. 혹자는 그 영상을 놓고 ‘동화적 현실’이라고도 하고 ‘몽환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스타일을 통해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형태의 영화언어를 창조해 냈다는 점이다. 한국영화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이 녹록지 않은 것은 장르를 넘나들며 보여줬던 이런 작가적 실험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업적을 동문들도 인정해 올 2월 그는 서울예대에서 주는 제18회 ‘삶의 빛’상을 받았다. 선정위원회는 이 감독을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무엇보다 그의 독특한 작품 해석과 특유의 정교함으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화제를 몰고 다닌 혁신적인 시네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기렸다.
 
  또 4월 28일부터 5월 6일까지 전주에서 개최되는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그의 영화적 업적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는 ‘전작전’이 열린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안성기, 박중훈씨 등 각 영화에 주연을 맡았던 배우들과 함께 관객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그의 작품세계는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고전은 세월과 함께 가치를 더해 가듯 그의 영화 역시 시간 속에서 더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영화를 시작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한국영화계는 안팎으로 그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새로운 영화적 환경에 놓였다. 직선제 도입 등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목을 조이던 영화검열이 완화되면서 영화의 소재가 다양해졌다.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가 직배(直配)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대변혁기를 맞아 배급시장이 요동을 쳤다. 이 시기에 독립프로덕션의 활성화는 신인감독들이 활동할 무대를 확장시켜 줬다.
 
 
  다양한 시각적 실험을 한 데뷔작 <개그맨>은 흥행에 실패
 
〈남자는 괴로워〉.
  이런 뉴웨이브를 타고 등장한 이명세 감독은 그 이전의 영화들과는 확실히 다른 ‘새로운 한국영화’를 보여줬다.
 
  데뷔작 <개그맨>(1988)은 자신이 천재라는 환상을 가지고 언젠가는 위대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삼류 카바레 개그맨 이종세(안성기), 장차 화려한 영화배우가 꿈인 변두리 이발소 주인 문도석(배창호), 그리고 한 여자(황신혜)가 만나서 자신들의 꿈을 이뤄 줄 영화를 탄생시키기 위해 은행털이를 시도하는 이야기다.
 
  일반적인 극영화와 장르의 관습에서 벗어나 몽환적인 분위기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이야기가 중심이 아니라 기존의 한국영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다양한 시각적인 실험에 주력하면서 이명세 식의 낯선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런 낯설고 새로운 시도는 관객에게 외면당하면서 일주일 만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은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이다. 독창적인 이명세 스타일이 그대로 나타나면서도 아기자기한 신혼부부의 모습을 코믹한 터치로 그려내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데뷔작 <개그맨>의 혹독한 실패 경험 탓인지 어느 정도 대중적인 코드를 적절히 사용하면서도 인위적인 내러티브의 파괴는 여전했다. 이 영화는 막 결혼한 신혼부부(박중훈과 최진실)를 통해서 사랑이란 일상의 담담함과 그저 그런 삶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해답을 구하고 있다. 신선한 발상으로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드라마를 지양하고 7개로 나눠진 이야기, 정감 어린 연기, 잘 짜인 미장센으로 호평을 받았다.
 
  첫사랑의 설렘과 아픔을 보여주었던 <첫사랑>(1993)은 이런 그의 노력이 최대로 발휘된 작품이다.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순수한 여대생 영신(김혜수)은 어느 날 연극반에 새로 오신 선생님(송영창)에게 반해 무작정 그를 짝사랑하게 된다. 무언가를 사랑할 때 느끼는 그 포근하고 부드러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 감독은 예의 특유의 화면구성을 십분 이용한다. 신비스런 달이 뜬 밤, 상쾌한 봄의 공기, 벚꽃, 자전거, 플레어스커트, 별똥별, 우체통, 시계, 찻잔 등 환상적인 이미지가 첫사랑에 빠진 여대생의 내적 세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감정과 정서를 자신의 영상언어로 표현한 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관객들과 성공적으로 조우하지 못했다.
 
  1995년 샐러리맨 남성들의 고뇌와 지친 삶에 대한 블랙코미디 <남자는 괴로워>는 현대를 살아가는 남성들에 대한 이야기로 출근과 퇴근, 상사와 후배, 부양해야 할 가족들 사이에서 꿈을 잃어 가는 남성들의 애환과 고단함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도 사무실을 배경으로 꽉 짜인 미장센을 고수하면서 뮤지컬의 요소를 도입한 색다른 시도를 선보였지만 이 또한 관객들에게 외면당했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린 유부남과 한 여자의 사랑을 그린 <지독한 사랑>(1996)은 그간 이명세 감독이 추구했던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여전하지만 현실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시인이자 대학교수인 영민(김갑수)은 잡지기자 영희(강수연)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격정적인 사랑으로 서로를 미친 듯이 탐닉하게 된 두 사람의 지독한 사랑은 세상에서 완벽한 사랑이란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첫사랑>이나 <남자는 괴로워>보다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의 기를 살려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이명세 영화의 백미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과 잇단 흥행실패로 의기소침해진 그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다. 남성 중심의 액션과 추격이 있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였다. 이 작품은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는 형사(박중훈)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언제나 유유히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살인범(안성기)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이 작품에서 현란한 컷들이 서로 경쟁을 하듯, 갓 총신에서 뿜어져 나온 듯한 화려한 연출력을 보여주면서도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아 관객과 의사소통에 성공하며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둔다. 만화적인 요소, 그림자놀이, 화면의 속도 변화, 음악의 시용, 색깔과 조명, 질감을 살린 촬영, 여러 장르의 차용 등은 잘 구축된 ‘이명세 표 영화’의 백미를 그대로 보여줬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도 상영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 작품을 인상 깊게 본 <양들의 침묵>의 조너선 드미 감독은 박중훈을 <찰리의 진실>에 출연시키기도 했다.
 
  이 영화는 그에게 미국 진출의 길을 열어 줬지만, 미국생활 4년 동안 그는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귀향 직후 만든 다모 스타일의 무협극 <형사 Duelist>(2005)나 추리작가 한민우(강동원)가 첫사랑의 흔적을 좇아가는 과정을 그린 심리극 (2007)은 평론가들에게는 격찬을 받았지만 관객으로부터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가 지나온 시절에 비하면 많지 않은 작품 수지만, 영화계에 담긴 족적은 확실하다. 그중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99)는 그의 스타일을 관객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 대히트작이다. 특히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빗속 액션신은 워쇼스키 형제의 작품 <메트릭스3-레볼루션>(2003)에서 그대로 표절했다는 시비가 벌어질 정도로 국내외 영화계가 기억하는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는 영화를 시(詩)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영화작가이다. 그가 “장편영화의 시대가 가고 단편의 시대가 왔다”고 얘기하는 것도 이런 접근법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는 영화 속의 서사구조 자체는 TV가 갖고 있는 특징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영화 한 편의 러닝타임인 1시간40분 안에 보여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으려면 중·단편의 함축적 요소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장르는 의미가 없다. 어떤 장르의 영화를 만들더라도 그의 목표는 ‘비욘드 장르(beyond genre)’에 있다.
 
  또 대부분 많은 한국 감독이 내러티브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면서 영상과 음향을 채워 나가는 스타일인데 비해 그는 관습적인 영화 만들기를 거부하며 자신만의 연출테크닉을 매 작품에 펴 보이는 탐미주의적 영상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특히 이 감독은 자신의 모든 영화 시나리오를 직접 쓰면서 문학이 가지지 못하는 영상미학에 천착해 왔다. 이명세 영화들의 특징은 보통 주제와 내러티브에 종속되기 쉬운 양식적 스타일을 오히려 주제와 내러티브를 이끄는 주요한 장치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쉽고 간결한 플롯 구조 속에 종종 현실은 사실성의 경계를 넘어 마치 꿈이나 환상처럼 보이며 독특한 정서를 환기시키게 만든다. 그가 세트촬영을 자주 활용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첫사랑> <나의 사랑 나의 신부> 같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만화적 기법과 환상적 장면들은 사랑이라는 것을 시적 언어로 영상화시켜 보겠다는 그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첫사랑>은 당시 관객동원에 실패했지만,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최진실이라는 스타를 탄생시키며 대단한 흥행을 거뒀다. 이 감독 역시 이 작품으로 1991년 청룡영화제, 대종상영화제,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춘사대상영화제 등 주요 영화제의 신인감독상을 석권하며 일약 한국 영화계의 기대주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관객에게 외면받았던 <첫사랑>은 한국영화사적인 의미로서는 최근 <나의 사랑 나의 신부>보다 더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첫사랑>은 영화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 번은 들여다봐야 할 한국영화의 대표적 영화텍스트로 자리잡고 있다. 또 2008년에 한국영상자료원과 이동진닷컴이 실시한 ‘다시 보고 싶은 한국영화’ 설문에서는 2위를 차지하는 기록도 세웠다. 이 두 작품은 모두 1996년 이전에 만들어진 한국영화 걸작 100선에 들어가 있다.
 
 
  만화, 연극 등 다른 매체의 요소를 영화에 융합
 
  그가 여덟 편의 작품으로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감독이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세계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영화인생도 궁금한 부분이다.
 
  그는 1957년 충남 아산에서 아버지 이성로씨와 어머니 유정희씨 사이에 2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미군부대 식당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아갈 정도로 호인이었다고 한다.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방랑벽으로 인해 일찍부터 살림을 도맡아 꾸려 온 탓에 평생 소처럼 근면하게 일했다. 그래서 자식들과 깊은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 아버지와 나눈 대화시간이 한 시간도 채 안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성장한 후 영화판을 돌아다니며 늘 술에 취해 있던 그를 나무라던 어머니에게 “내버려둬. 쟤는 말리면 심장이 터져 죽을 거야”라고 했던 아버지의 한마디 말이 그의 심장에 박혔다. 말은 없었지만 아버지는 늘 아들을 바라보며 이해하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는 1986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말없이 늘 그 곁에 존재하며 사랑하고 있었듯, 영화도 그렇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가 영화 속에서 제기한 사랑은 늘 존재론적인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미군부대가 있는 곳으로 옮겨 다닌 탓에 부평, 문산에서도 살았다. 고등학교는 동대문상고에 들어갔는데, 이민을 갈 생각으로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미군부대 근무기간이 긴 사람들에게 이민자격을 주었는데, 이 감독 가족도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먼저 이민을 떠난 아버지 전임자의 가족이 교통사고로 몰살하는 비극을 겪자 결국 낯선 땅 미국행을 포기하고 주저앉게 됐다고 한다.
 
  이 감독은 영화감독의 꿈을 안고 서울예전 영화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해 처음 본 책이 사실주의 연기주의 연기이론의 시조인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배우수업》이었다. 영화학과를 졸업하고 난 뒤 바로 김수용 감독의 연출부에 참여해 <달려라 만석아>(1979) <빨주노초파남보>(1979) 두 편을 만들었다. 그 후 군에 입대했는데, 로맨티스트인 그는 군에서 ‘악성 불만분자’로 찍혀 군부대를 13군데나 전전하다가 1982년에 제대했다.
 
  제대 뒤 홍파 감독의 연출부에서 <외출>(1982), 김정일 감독의 연출부에서 (1985), 배창호 감독의 연출부에서 <철인들>(1982) <고래사냥>(1984) <고래사냥2>(1985) <황진이>(1986)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 등 대표작 8편에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1985년, 영화에 한창 열중하며 고생하던 시절에 박수영씨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그가 조감독 생활 10년을 뒤로 하고 데뷔한 작품 <개그맨>에 배창호 감독을 주연배우로 기용하자 그와 배 감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영화계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갱스터, 로맨틱 코미디, 스크루볼 코미디, 하드보일드 느와르 등 할리우드 영화 장르를 차용하거나 혼용한다. 뿐만 아니라 회화, 만화, 사진, 연극 등 계속적으로 다른 매체의 요소를 자신의 영화 속에 도입해서 융합시킨다. 그는 다양한 영화 장르와 스타일을 차용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내러티브로 만들어 왔다.
 
  이명세 감독은 지금도 새로운 영화에 대한 꿈을 꾼다. 한국 영화사에는 보기 드문 독특한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와 사운드를 중시하는 스타일리스트로서, 그의 다음 작품 속에는 어떤 영상언어가 담길지 기대된다.⊙
 

 
이명세 인터뷰

 
  “지금 한국영화는 르네상스”
 
   요즘 이명세 감독은 MBC 보도국에서 대한민국 50년사를 통찰하는 대작 다큐멘터리로 기획한 <타임> 25부작 중에서 한 작품을 맡고 있다. 이 작업에는 그를 비롯해 <짝패> <부당거래>의 류승완 감독, <싱글즈>의 권칠인 감독, <시라노 연예조작단>의 김현석 감독이 참여했다. <타임>은 충무로 영화감독들이 자신의 인적·기술적 자원을 방송자원과 결합해 지상파 채널인 MBC에서 ‘하이브리드 다큐’로 제작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50분 분량인데, 6월 초부터 방영될 예정이다.
 
  이 작업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이 감독을 그의 사무실인 서울 보광동 신동아아파트에서 만났다. 세월이 비켜 가는지 십년 전과 다름없는 모습. 사진을 찍겠다니까 그의 상징인 빛바랜 카키색 모자가 등장했다. 비가 내리는 오후,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며 맨발의 그와 마주앉았다.
 
 
 
몸 좀 풀어 볼까 하는 차원에서 MBC 다큐 맡아

 
  ―MBC 창사 5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이창동 감독님 부탁으로 하게 됐어요. 언젠가 나도 한번 다큐 같은 거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어도 들어가질 못했는데, 농담처럼 얘기하면 쉽게 하나 먹어 볼까, 몸 좀 풀어 볼까 하는 차원에서 맡았어요. 촬영한 지 오래되고 해서 했는데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영화를 TV에서 상영해 주는 것과 TV를 위한 영화를 찍는 건 다를 것 같은 데, 어려움은 없는지요.
 
  “어려움은 아니고, 제가 손을 대면 다큐도 뭔가 스타일리시하리라는 이상한 착각을 하시더라고(웃음). 다큐는 다큐인데, 뭔가가 번쩍번쩍하고, 스타일리시하게 쓸 수 있는 게 아닌데, 압박감이 막 오더라고요.”
 
  ―방송국에서 요청했을 때는 그 스타일을 원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타임’이라는 주제로 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하는 거예요. 전화기면 전화기, 어머니의 변천사면 변천사, 그런 식인데 저는 개인적인 여행을 주제로 한 ‘M’으로 컨셉트를 얼마 전에 정했어요. 제가 대충 50년 살았으니까. 시간도 맞고. 제가 돌아보는 시간들 속에서 만난 연기자들이 등장할 거예요. TV 드라마랑 연결시킬 수도 있고요.”
 
  ―또 이번 4월 말에 개막하는 제12회 전주영화제에서 전작전도 열지요?
 
  “회고전으로 한다고 해서 회고전이란 이름은 빼라고 했어요. 회고전은 10년 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미국 미시간 대학을 비롯해 몇 군데에서 했어요. 그런데 자꾸 회고전이라니까 느낌이 이상해요. 영화를 그만둔 것도 아닌데…. 그래서 그 용어를 고친다면 나도 참여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전작전이라고 한 거 같아요.”
 
  ―감독 입장에서 전작전을 갖는다고 하면 느낌이 다른 거 같더군요. 자신의 전기를 써 내는 느낌이 든다고 하던데.
 
  “전 잘 모르겠어요. 그동안 영화제를 돌면서 제 영화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 느낌은 별로 없어요. 전주 가서 막걸리 마실 생각밖에 없는데요(웃음). 내가 영화작업을 그만뒀다면 모르겠는데 계속 하는 입장에선 별다른 느낌 없어요.”
 
  ―얼마 전 배창호 감독을 만났을 때 전작전에 대해 얘기를 들었는데, 감독 입장에서 영화를 쭉 다시 보면서 당시 자신이 왜 저 부분을 저렇게 찍었는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기도 하고, 개봉 당시 저평가받은 영화를 재발견하는 기쁨도 있다고 하던데요.
 
  “2000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회고전할 땐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비롯해 그때까지 만든 영화 6편이 상영됐는데, 소홀히 했던 장면이 나오면 내가 피했다는 걸 알게 되니까 부끄럽더라고요. 또 지나치게 설명적인 장면은 지루하게 다루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을 고심하게 되더라고요. 한 번 그런 시간을 갖고 나니까 이제는 그냥 내 영화 본다 그런 마음밖에 안 들어요.”
 
 
  한국에서 영화감독은 은행대출도 안되는 대상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시간이나 공간의 차이를 두고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있지 않아요?
 
  “물론 해외에서 볼 때는 해외에 있는 관객들은 어떤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내 영화의 메시지가 통용되는가, 글로벌하게 소통되고 있는가, 아직도 유효한가, 살피게 되지요. 이번에도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할 건데, 지금 젊은 사람들이 지나간 영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들어볼 생각이에요.”
 
  ―임권택 감독은 일흔이 넘어서도 현역인데, 사실 회고라는 말을 하기엔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죠. 그런데 한국영화계가 이상하게 됐어요. 제가 임 감독님 바로 다음 세대로 자리 잡고 있어요. 배창호 감독님이든 중간 세대 감독님들이 활동을 안 하셔서 그래요.”
 
  ―1988년 <개그맨>으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영화 8편을 만들었는데, 22년간 8편이면 결코 많은 작품이 아니거든요. 시기별로 특징이 있을 것 같아요.
 
  “처음 프랑스에 갔을 때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 타르코프스키(Tarkovsky, Andrey Arsenyevich)의 이름을 들었어요. 그 감독은 4년에 한 편씩 영화를 찍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 역시 좋은 영화는 그렇게 찍어야 돼’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가 쓴 <순교일기>를 보니까 일 년에 두편 세편 찍고 싶었는데 현실이 안돼서 못 찍었다는 거예요(웃음). 뭔가 반추하면서 작업하느라 4년에 한 편 찍은 게 아니고 현실이 결과를 제약한 거지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예요. 1년에 두 편은 힘들고, 2년이나 1년반에 한 편 만들고 싶은 소망은 있는데, 현실적 제약으로 못했어요. <순교일기> 보면 알겠지만, 재미있게도 타르코프스키의 노트와 제 노트가 비슷하더라고요. 정해진 기일까지 꾼 돈을 갚기 위해서 영화를 찍어야 하는 현실에서 반추할 여유가 없는 거지요. 할리우드의 흥행감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이 가장의 역할을 하면서 반추하며 영화를 만들 여유가 있겠어요? 한국에서 영화감독은 대출도 안되는 대상이에요. 빨리 뭔가를 만들어서 돈 갚아야 하고. 영화감독은 대출도 안 해 주더라고, 집을 담보로 잡혀도. 어머니 집까지 설득해서 했는데도. 내가 시티은행 갔을 때 보더라도.”
 
  ―그 정도의 명성에도 은행 담이 높나요.
 
  “그때 신인감독 때 아니고 <지독한 사랑>(1996) 무렵인데, 어머니를 설득해 집을 담보로 대출받으려고 갔는데, 영화 한다니까 영어 할 줄 아냐고 물어보더라고. ‘우리는 월급이 아니라 개런티다’ 그런 얘기 하는 동안 피곤하고 갑자기 눈물이 핑 돌더군요. 월급을 안 받으면 안 된다고 해서 결국 대출을 못 받았어요.”
 
  ―은행원이 결국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느라 그런 질문을 던진 거군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거지요. 마이너스 통장을 메워야 하는데 이걸 어디서 마련하나 생각하니 막막하더라고요.”
 
  ―영화를 시작할 때 한 말을 보면, 영화는 예술이기 때문에 빈곤함 자체를 각오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렇죠. 그래서 누구를 원망하진 않아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데, 누가 밀어서 시킨 것도 아니고 원망할 일은 없는 거지요.”
 
 
  <첫사랑>의 김혜수가 관객 없는 극장 맴돌던 모습 떠올라
 
〈첫사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저는 없어요.”
 
  ―다 못난 자식이에요?
 
  “못난 자식은 아니고. 다 귀하고 다 나름대로 뭐가 있지 특별히 어떤 작품에 대한 애착은 없다는 거예요. 단지 사연들이 있죠. <첫사랑>(1993)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이 작품은 얼마 전에 한국영화 10대 걸작선에 뽑혔지만, 당시 흥행이 제일 안돼서 그때 당시는 정말 버려졌던 영화예요. 그때 여주인공 김혜수가 대학교 2학년이었는데, 관객 없는 극장을 백팩을 메고 들락거리던 안쓰러운 뒷모습이 늘 남아 있어요.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는 오늘날의 저를 있게 해 준 영화인데, 그 영화로 인해서 최진실 신드롬까지 일어났었지요. 최진실씨를 다시는 볼 수 없는 상황이라 유쾌하게 얘기하기에는 그림자가 있는 영화가 됐어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야 터닝 포인트가 돼서 제가 지금 버티고 있을 수 있게 한 영화고요. <형사 Duelist>나 같은 경우도 각자의 사연이 있어서 특별히 어떤 영화에 대한 애착은 없어요.”
 
  ―이렇게 공들여서 만든 영화인데 예상보다 관객이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을 때는 아쉽죠.
 
  “제가 부족한 거니까 관객 탓을 할 건 없고요. 조금은 섭섭할 수 있겠지만, 그런 생각은 아예 안 하려고 해요.”
 
  ―가장 예상을 벗어난 영화는?
 
  “<첫사랑>이지요. <첫사랑>이야말로 그때 하이틴 영화들이 한동안 없어졌고 급변할 때니까 이런 영화들이 어느 정도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랐어요. 또 내적으로도 회사가 거의 도산되는 지경에서 스태프들이 고생하면서 돈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찍으면서 1년 만에 겨우 만들어 냈었던 영화였어요. 어렵게 만들었는데 흥행도 안되고, 당시 평가도 못 받았어요.
 
  <첫사랑>은 지금 할머니들이 좋아해요. 그래서 제가 당시 흥행에 실패했다고 생각했어요. 일본 후쿠오카 영화제 같은 때 보면. 나이 드신 분들이 울면서 기립박수를 치는 거예요. 그 영화는 그런 얘기예요. 사라진 시간들, 흘러간 시간들. 그 눈 자체로만 보면 첫사랑이 유치한 거지만 나이 든 시각으로 보면 돌아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얘기라는 것을 그들은 읽어 낸 거죠. 그래서 이 영화가 왜 당시 흥행에 실패했는지 알았어요. 난 당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이런 걸 전하려고 했으니 기획적으로 잘못 맞춘 거지요.”
 
  ―<남자는 괴로워>(1995)는 현실적 사안을 영화화하는 데 있어 광장 예술화의 기점이 된 작품으로 해석되는데, 그런 시각엔 동의하는 건가요.
 
  “그렇죠. 극장이란 공간은 광장이고. 그렇게 해서 교류되는 거니까. 영화의 한 면이 광장예술로서의 측면이 있죠.”
 
  ―반면 <지독한 사랑>(1996)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립니다. 이 작품은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일부 비평가들은 이 감독의 예술가적 기질이 어수룩하게 세속화됐다고 평가하더군요.
 
  “그렇게 쓰는 사람도 있고, 좋게 쓰는 사람도 있고. <지독한 사랑>은 대체적으로 나를 씹었던 평론가들이 조금 호의적으로 돌아선 시점에 나온 작품이에요. 그 작품을 보고는 현실에 발을 붙였다, 이명세의 인간탐구가 깊어졌다고 하는 쪽이 많았어요.”
 
 
  영화에서 비평의 역할이란
 
〈형사〉.
  ―이 감독 특유의 첫사랑적 로맨티시즘보다는 현실적 사랑으로 훨씬 많이 가져갔다는 거죠?
 
  “그런 쪽으로 좋은 평가들을 많이 했던 영화예요. 그 전에는 좀 유치하다, 키치(kitsch)하다, 조잡하다고 했어요. 이런 것들이 제 별명 중 하나거든요(웃음). 저는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100점파와 0점파 두 그룹으로 나뉘어요. 1980년대에 직선제 개헌이 되는 와중에서 영화검열도 완화됐을 때 한국영화의 뉴웨이브 세대라고 외국평론가들이 말한 사람이 저, 장선우, 박광수 세 명이었어요. 두 친구들은 의식적인데, 전 <개그맨>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첫사랑> 같은 몽환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니 이명세는 완전히 한국영화에서 없어져야 된다고 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때 <첫사랑>을 보고 ‘뭐 저따위 영화’라고 평했던 친구들이 현재 대학교수가 되면서 강의교재로 하도 많이 써서 이 영화가 그렇게 많이 알려진 게 아닌가 추측을 해요.”
 
  ―<첫사랑>은 시대적 상황 때문에 오히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거네요. 모든 영화가 시대상을 반영해야 할 필요는 없는데요.
 
  “그렇죠. 그 당시 순수문학과 실천문학이 팽팽히 대립되던 시점이었는데, 외국에 있는 평론가들이 아니었으면 난 죽었죠. 물론 그 전작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상업적으로 엄청난 흥행을 한 덕도 봤지만요. 해외에 소개된 제 영화 세 편에 대해 외국 평론가들이 가장 한국적인 영화로 평가를 해 줬어요. <지독한 사랑>은 《타임》지에도 실렸어요. 그다음에 만든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완전히 상업적으로나 해외에서도 터지는 바람에 제가 아직까지 존재하는 거지요. 당시엔 평론가들이 술자리에서 이명세가 나타나서 자기는 재수 없어서 갔다는 얘기까지 공공연하게 글에 쓰고 그럴 때니까.”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2005년 한 좌담회에서 <첫사랑> 이후 이 감독 영화가 나빠지고 있다고 하면서 <형사>에서 시네마틱을 말하는 것 자체가 담론의 미학적 자포자기라는 평을 하더군요.
 
  “그건 그 사람 시각이에요. 그렇다고 내가 그걸 포기할 것도 아니고.”
 
  ―영화에서 비평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제 개인적으로는 박수 쳐 주고 격려해 주는 일이어야 할 것 같아요. 혹평을 하든, 뭘 하든. 사실 만드는 사람도 잘 모르는 경우가 있거든요. 모른다는 건 자기 무의식이 드러날 수도 있는 건데 뭔가를 발견하게 해 주고, 가능성을 암시해 주고, 제시해 줄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비평을 위한 비평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네요.
 
  “예를 들면, 그냥 싸잡아서 연기를 못했다 이럴 게 아니라 발성이나 감정처리나 뭐든 확실한 문제점을 얘기해 줘야 더 나아질 것이 아니겠어요? 뭐. 사실 평론은 어차피 작품이 만들어진 뒤에 쫓아오는 것이지 평론이 앞서 있을 수는 없잖아요. 사실 그런 평가들을 잘 생각해 보면 예전에 고흐를 비난하고 무시했던 사람들은 뭐 하고 있을까 난 궁금해(웃음).”
 
 
  요즘 권위 있는 비평가가 사라져 아쉬움
 
  ―영화에 대한 평가는 평론가들보다 관객들한테 받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일단 관객의 평가는 흥행에 국한되는 거지 작품성에 대한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예요.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좋은 작품은 아니거든요. 예전에 브로드웨이에서는 그곳 멤버들이 제일 기다리는 것이 관객의 평가가 아니라 매일 아침에 나오는 《뉴욕타임스》의 평이었어요. 그 평들이 없었으면 에드워드 올비도 없었고, 유진 오닐도 없었고, 손턴 와일더도 없었어요. 《뉴욕타임스》에서 ‘이건 봐야 할 연극이다’ 해 주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 다 사라졌어요. 우리가 잘 아는 테네시 윌리엄스조차도 사실 처음 무대에 올렸을 때 관객들은 정말 싸늘했어요. 평론가의 펜 끝의 힘이 어떤 것보다 강하다는 걸 절실하게 보여준 시절이지요. 그런 권위있는 비평가들이 사라진 것이 너무 아쉬워요.”
 
  ―영화팬이나 영화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는 평론가 말이죠?
 
  “그렇죠. 그런 것들이 살아 있었어야 하는데, 이제는 없어요. 중심을 잡아 주어야 할 지식인들이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겠지요. 한 술 더 떠서 관객들 사이에서는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영화는 절대 안 본다는 말까지 있잖아요. 평론가들이 자기들끼리의 잔치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겠지요.”
 
  ―작품에 카메오로 몇 번 나왔지요? 연기도 좋아하나 봐요.
 
  “제가 <첫사랑> 때까지는 조금씩 나갔어요. 그런데 저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처럼 카메오 개념이 아니라 돈 아끼기 위해서였어요. 엑스트라 한 명 쓰는 비용이라도 줄여 보려고 한 영화에 몇 번씩 나가요. 연출부도 가끔씩 출연시키지요. 오랜 조감독 생활을 통해 한국영화의 열악한 현실을 아는 사람으로서 경비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줄인다는 게 제 목표예요.”
 
  ―작가주의 감독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사실 그렇게 알뜰하게 살림을 하는 입장은 아닐 줄 알았습니다.
 
  “저는 남의 돈 무서운 거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연출부한테도 늘 내 돈 가지고 찍는 거 아니라고 마음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해요.”
 
  ―배창호 감독을 배우로서 평가하면?
 
  “명연기자죠.”
 
  ―데뷔작 <개그맨>에 배창호 감독을 주인공급으로 출연시킨 것은 사부에 대한 예의도 작용한 건 아닌가요.
 
  “그런 건 아니고요. 사실 그때 배창호 감독님은 스타였어요. 당시 배 감독님의 외모를 가진 배우를 여러 명 생각했는데 제일 낫겠다 싶었어요. 배 감독님도 연세대 연극반 출신이라 원래 연기자에 대한 꿈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살살 꼬셨지요. 영화를 알고 느낌들을 아니까 사실 더 편했죠. 연기는 보시다시피 좋았어요.”
 
 
  후배 감독이 장면 처리를 물어볼 때 제일 기분 좋아
 
〈지독한 사랑〉.
  ―조감독 생활 10년 동안 많은 감독을 거쳤는데, 각 감독들한테 사사받은 것이 있을 법합니다.
 
  “홍파 감독님한테는 자기 집을 팔아서까지 제작하는 열정, 김수용 감독님으로부터는 촬영현장의 매너, 배창호 감독님께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각각 배웠어요. 배 감독님과 저는 사실 같은 날 이장호 감독님의 연출부로 영화현장에 들어왔어요. 제가 군대 간 사이 배 감독님은 데뷔를 하셨어요. 그래서 친한 선후배이자 동료 개념으로 조감독이 됐어요. 같이 일할 때는 영화 쪽의 소울메이트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조감독이지만 <황진이> <기쁜 우리 젊은 날> <안녕하세요 하느님> 세 작품은 연기지도를 직접 했어요. 정말 날 믿어 줬던 덕분에 공부를 많이 한 거죠.”
 
  ―10년간 조감독 생활을 했으니 나름 조감독론도 있을 법합니다.
 
  “조감독은 감독을 편하게 해 줘야 하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는 것이 제 신조였어요. 내가 다 준비해 놓으면 감독님이 판단하시는 일만 하도록 했어요. 그런 조감독이 진짜 조감독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이 감독 영화에는 사랑이라는 주제가 여러 형태로 드러나는데, 사랑은 어떤 상징성이 있나요.
 
  “저한테 사랑은 도(道)와 같이 핵심적인 어떤 요소예요. 여러 가지 껍질로 둘러싸인 어떤 것의 알맹이를 바라다보는 일이지요. 그래서 제 영화 속에서 흔히 우리가 행간(between the lines)에서 발견하는 그런 느낌들이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래서 영화를 할 때 저는 명상하듯 절에 가서 며칠 동안 기도하고, 또 새벽기도 열심히 나가서 기도도 하고 그래요.”
 
  ―크리스찬인가요.
 
  “네. 하지만 절에도 가요. 저는 하나님에게 흥행시켜 달라고 기도한 적 없어요. 제 기도는 ‘내가 찍으려는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가 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발견한 것이 첫사랑은 시간의 비밀을 여는 열쇠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이 감독은 평소에 영화가 드라마보다 시에 가깝다고 하시나 봐요.
 
  “본질적으로 시란 것이 언어의 정수를 뽑아낸 글이듯, 영화도 한 샷 한 샷은 흘러가지만 그 다 정수이기를 바라는 거예요. 남들이 그걸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기본적으로 만드는 사람의 자세는 그래야 한다고 봐요.”
 
  ―동화적 영상미를 중시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미장센에 신경이 많이 쓰이겠어요.
 
  “그렇게 만들어서 선수끼리 ‘저거 정말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찍었을까’라는 말이 나올 때가 기분 좋지요. 후배감독이 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20번 봤다며 장면처리를 물어볼 때 좋더라고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화제가 된 빗속 결투신이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3-레볼루션>(2003)에서 네오와 스미스의 결투신과 똑같아서 표절시비가 있었지요?
 
  “당시 저는 미국에 머물고 있을 때였는데, 에이전트가 고소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영화에서는 서로 패러디하고 그러는 건데, 놔두자고 했어요. 많은 사람이 보고 좋아하면 되는 거지요, 뭐.”
 
 
  이제 해외영화제 하면 한국 감독 20명은 주루룩 나와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등 기후가 미장센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기후를 통해 무엇을 전해 주고 싶은 건가요.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떤 계절이 되면, 분명 그 계절의 느낌을 줄 수 있는 게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찾는 거지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는 가을을 표현하기 위해 거리에 은행을 깔았고,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는 신혼의 느낌을 주기 위해 드럼통 하나도 예쁘게 칠해서 보여주는 그런 컨셉추얼한 디자인을 영상에 담는 거지요. 그 당시에는 조잡하다고들 했는데, 지금은 많이들 하고 있잖아요?”
 
  ―미장센을 중시하다 보니 액션영화에는 액션조차 영화적 장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화면 안에서 정말 관객들이 임팩트 있는 액션을 느끼게 해 주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신 안에서 배우들의 등장과 퇴장부터 중요하지요.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극적 액션이 아니라 오감을 자극하는 그런 상상력을 입히는 거예요, 그게 영화적 액션이지요.”
 
  ―19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2005년 <형사>로 다시 등장하기 전까지 4년 정도 미국에 체류했지요? 어떻게 지냈나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흥행이 잘돼서 제작자 겸 감독인 리들리 스콧 형제 초청으로 할리우드에 CF 촬영차 갔어요. 마침 그때 모델 노조 파업이 있었어. 1년 동안 거의 놀았지요. 그럴 바에는 영어공부라도 좀 할까 하고 시나리오 쓰고, ‘필름포럼’에 다녔어요. 필름포럼이 제 학교나 비슷해요. 우리 때 20대에 공부할 수 있는 영화책은 《영화개론》 《영화제작기법》 딱 두 권이었어요. 영화책도 없었고. 우리나라에 시네마테크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때 말로만 전해 들었던 영화들을 보면서. 거의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출퇴근하다시피 오전에 한 편 오후에 한 편, 와서 생각하고 정리하면서 나홀로 대학 4년 동안을 공부한 것처럼 졸업했어요(웃음). 그때 공부한 것들에 대한 졸업작품이 바로 <형사>지요.”
 
  ―<형사>에 이 감독이 그간 미국에서 구상했던 모든 기법을 총동원했다고 알려져 있던데요.
 
  “모든 게 영화 한 편에 다 들어갈 수는 없고. 저는 <형사> 같은 경우에는 뮤직비디오만큼 빠른 영화를 좋아하는 세대가 왔다는 느낌으로 만들었는데, 아직 그렇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안거지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까지는 남성 관객이 많았는데, 그 이후부터는 거의 여자관객이 90%예요. 때도 그렇고. 그래서 ‘형사 중독’이라는 팬클럽이 생긴 거죠.”
 
  ―관객 천만시대를 넘긴 한국영화계의 미래는 어떨 것으로 보나요.
 
  “2000년대 들어서 한국영화가 급성장을 하면서 지금 서울대 빼 놓고는 대학마다 다 연극영화과가 있을 정도가 됐어요. 일본에는 딱 한 군데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영화계 사람들을 쏟아낸 반편 수요는 그만큼 안돼서 불황이라는 느낌이 있지만 제가 보기에 한국영화는 르네상스기에 와 있어요.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등 세계영화제에 내놔도 괜찮은 사람이 열 명은 있잖아요. 한 시대에 이렇게 있기는 드물어요. 1970년대 트로이카는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감독이 이끌었고, 1960년대 트로이카는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 감독에 이만희 감독까지 몇 명이 이끌었지만, 지금처럼 풍성하지는 않았어요. 지금 해외영화제 하면 한국 영화감독 20명 이름은 주루룩 나오는 수준이에요. 단지 아쉬운 점이라면, 우리나라에는 감독을 존중하는 풍토가 없다는 거예요. 자신이 존경하는 감독과 일한다면, 지분을 다 팔아도 좋은 제작자가 있기 때문에 할리우드가 있는 거예요. 할리우드에 장사꾼만 있다는 시각은 맞지 않아요.”
 
  ―현역에서 이런 신예감독들과 경쟁해야 하는 입장인데요. 자신 있습니까.
 
  “나는 내가 게으르지만 않으면 평생 할 것 같은데, 별로 경쟁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전혀 다른 작품세계고. 제가 미국에서 깨달은 거지만 아무나 잘되자는 거예요. 후배감독이 잘되고 있으면 분명히 내 길도 있어요. 내가 게으르지 않고 한다면. 그런데 다 같이 안 되면 길이 없는 거야. 비빌 언덕이 없다는 말이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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