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그가 생산해 내는 상품인 영화 그 자체로 받은 상은 없다. 한마디로, 영화와 관련된 문화체육관광부보다는 기업의 부가가치에 신경을 쓰는 지식경제부 쪽과 더 가까운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심형래(53) 감독의 열 번째 작품이며 세 번째 할리우드 진출작인 <라스트 갓파더>가 화제다. 볼 것이냐 말 것이냐는 갑론을박 속에 전작 <디 워>(2007)의 800만 관객 동원을 넘어설 수 있을지 관심이다. <라스트 갓파더>는 미국 마피아 보스의 숨겨진 아들인 영구(심형래)가 조직을 물려받을 후계자로 지목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담은 코믹영화. 심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영구’식 슬랩스틱 코미디와 1950년대 뉴욕을 재현한 영상을 담고 있다.
작년 12월 29일 개봉 당시, 그의 바로 전작 <디 워>(2007) 때부터 작품성을 놓고 한판 붙어온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불량가게 제품”이라고 단정 지은 심 감독의 작품에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평가들은 ‘할리우드 공략용’임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는 그의 영화들이 애국심 마케팅에 의존해서 흥행을 이어간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대중이 그렇게 자비로운 존재였던가. 한 번도 아니고 번번이 애국심 차원에서 기꺼이 주머니를 털어주며 시간 내서 극장까지 와주는 대중이 이 땅에 존재할까?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그의 영화를 기꺼이 봐주는 관객과 심 감독의 작품을 바라보는 눈높이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그의 작품을 영화제 심사기준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답이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심 감독은 “흥행이 예술”이라고 믿으며 영화를 찍어내는 철저한 상업주의 감독이고, 관객들은 그의 영화를 보고 그저 두 시간 정도 즐겁기 위해 극장을 찾기 때문이다. 의미보다는 재미를 찾는다면 잘못된 영화감상 태도일까?
물론 재미없다는 관객평도 적지 않다. 무엇을 재미있다고 보는지 개개인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나이 제한 없이 볼 수 있는 ‘영구 무비’ 시리즈의 한 가지라 어린이들이 박장대소하며 보는 데 주안점을 뒀다. 또 ‘바보 영구’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성장한 30~40대 성인의 향수를 자극하겠다는 속셈도 있었다. 영구에 대한 추억도 없고, 세상사에 찌든 어른의 눈높이로 보면 재미없다 해도 진실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유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으면 안 보면 된다. 영화의 성패는 관객이 정한다. 그런데 심 감독의 영화는 비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판대 위에 놓여 안쓰럽다. 물론 과도한 비판이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나쁜 면을 부각시켜 눈길을 잡아끄는 것)’에 한몫을 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 의미에서 안 보겠다고 선언한 진중권씨가 이번 영화홍보의 일등공신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편견 없는 해외 시장에서 먼저 승부 걸어
이런 현상에 대해 심 감독 자신은 담담하다. 지난해 연말부터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다시 영구 분장을 하고 종횡무진 방송사를 누비는 한편, 또 차기작인 <추억의 붕어빵> 제작에 들어가 있다.
어설프게 시작했지만, 심 감독이 1992년 <영구와 흡혈귀 드라큐라>로 입봉한 지 벌써 19년이 되어 간다. 그는 남기남 감독이 만든 80여 편의 영구시리즈에 출연하면서 영화판을 익힌 대로 좌충우돌식으로 자신의 영화세계를 구축해 갔다. 스크린 쿼터제(한국영화 4편을 제작해야 외화 한 편의 상영권을 받는 것)하 열악한 국산영화 제작환경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가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된 것도 사실은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를 만드는 한국 감독들의 처지를 지켜보면서 할리우드와 같은 세계영화 시장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된 탓이다. 한편으로는 코미디언인 자신이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쳐다봐주지도 않는 한국영화 시장보다는 편견이 없는 해외영화 시장에서 승부를 내고 싶다는 개인적 욕구도 강했다.
심 감독이 그간 만든 영화는 모두 10편. 결코 다작(多作)이 아니다. 그만큼 나름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왔다는 이야기다. <디 워> 제작에만 7년을 쏟아부었다. 작품의 완성도는 그다지 높은 평을 받지 못했지만, <용가리>를 기점으로 그의 작품세계에서 보여주는 기술적인 완성도는 영화계 인사들의 눈길을 끌 만큼 한국영화계 발전에 기여했다. 이 점이 같은 개그맨 영화인이지만 이경규나 서세원씨와는 비중이 다른 점이라고 영화계는 이야기한다.
심 감독은 1993년 (주)영구아트(1996년에 영구아트무비로 개편)라는 영화사를 차리면서 제작자 겸 감독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회사를 차린 그해 <핑크빛 깡통>과 <영구와 공룡쭈쭈>를 내놓았고, 이어 <티라노의 발톱>(1994), <파워킹>(1995), <드래곤 투카>(1996), <용가리>(1999), <2001 용가리>(2000), <디 워>(2007)에서 이번의 <라스트 갓파더>까지 모두 10편을 제작·감독했다. <티라노의 발톱> 전까지 그가 만든 영화는 극장을 잡지 못해 시민회관이나 구민회관, 심지어 예식장에서도 상영됐다. 그가 개그맨이라는 이유로 주류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탓이었다.

<티라노의 발톱>, 흥행에 실패했지만 기술력 진보에 기여
할리우드의 대작 <쥬라기 공원>과 같은 시기에 개봉된 <티라노의 발톱>은 그에게 가장 큰 패배를 안겨준 작품이다. 그 당시 돈으로 엄청난 액수였던 24억원의 제작비를 들였는데, 고작 30만명이 찾았다. 공룡에 대한 상상은 같았지만, 1000억원을 들인 <쥬라기 공원>에 대패한 것이다. 모처럼 극장에 걸어주겠다고 약속했던 극장주도 외면하는 바람에 눈물을 흘리며 다시 시민회관을 수소문해 상영해야 했다.
<티라노의 발톱>은 그에게 많은 추억을 남긴 영화이다. 그중 앞다퉈 무료출연을 해줬던 개그맨 동료들의 뜨거운 동료애도 잊지 못할 일로 기억된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수많은 원시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양종철은 촬영기간 중 운전 잘못으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당시 양종철의 말인즉, 영화촬영보단 차라리 유치장이 낫다며 잡아 가둔 경찰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고 한다. 양종철이 심 감독에게 “제발 나 좀 빨리 공룡에게 밟혀 죽게 해달라”고 통사정할 만큼 힘든 촬영이었다고 한다.
살아 있는 멧돼지를 구하지 못해 일반돼지에 페인트칠 한 일, 그것도 여의치 않자 진짜 멧돼지를 구해왔지만 연기자들을 물어뜯은 일 등 많은 일화를 남기며 완성됐지만 <티라노의 발톱>은 결국 관객동원에는 실패한다. <티라노의 발톱>의 실패로 그는 직원들의 월급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밤무대에 서는 개그맨 생활을 하는 한편 1억원 예산의 비디오 영화를 찍는 등 생계를 위한 투쟁의 시기로 들어섰다.
하지만 <티라노의 발톱>으로 잃은 것만 있진 않았다. 그 작품을 하며 특수 분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실사 크기의 공룡 6마리가 등장하는 등 규모가 그 전과는 달라졌다. 당시 제작팀들이 한국 특수효과 시대의 발전을 이끌어냈다고도 평가받는다.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용가리>에서 <디 워>까지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티라노의 발톱> 이후 “순수 국내 기술을 축적해 만든 걸 해외에 내다 판다”는 생각을 바꾼 적이 없다.
그 다음 해 <파워킹>(1995)으로 그는 재기한다. <아미크론>으로 이름을 바꾼 이 영화의 20~30분짜리 데모 테이프와 함께 영구아트에 대한 소개서를 70개 배급사에 보냈는데, 거의 모든 배급사로부터 거래를 하고 싶다는 답을 들은 것이다. 이 결과, 30개국에 123만6000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이어 만든 <드래곤 투카>는 해외시장에 나갔지만 절반이 넘는 나라에서 클레임을 받았다. 녹음이나 음향효과 등 후반 작업이 엉성하다는 이유였다. 그는 이렇게 실패하면서 하나씩 배워나갔다. 그래서 외부의 자극에 대해 더 단단해졌는지도 모른다.
<아시아위크>의 밀레니엄리더로도 뽑혀
그는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면서 바이어들의 머릿속에 그려 있는 영화지도를 읽게 됐다고 한다. 잔재미를 느낄 만한 영화는 홍콩영화를 찾고, 예술영화는 유럽영화를 선호했으며, 애니메이션은 무조건 일본영화였다. 또 블록버스터라 불리는 대형 액션물은 할리우드 메이저영화사의 땅이었다.
이 틈새에서 그는 괴수영화(몬스터무비)와 SF영화의 접점에 닿아 있는 작품들이 팔리는 소위 B급 영화시장을 발견했다. <터미네이터>도 처음에는 B급 영화시장용으로 만들었다가 세계적인 히트를 치고 2편부터는 A급 시장에서 거래된 작품이다.
일본은 오래전 이 시장에 눈을 떴다. ‘파워레인저’가 바로 그 작품이다. 파워레인저로 일본이 벌어들이는 캐릭터 상품 수익만 4억~5억 달러가 넘을 정도인데, 그의 눈에는 자신이 주연을 맡은 ‘우뢰매’ 시리즈와 별반 다름없어 보였다. 그는 ‘몬스터 무비’가 바로 해외시장을 겨냥할 수 있는 틈새상품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칸 영화제에서 <아미크론>을 팔면서 <용가리>를 사전 홍보했다. 기라성 같은 영화사들이 즐비한 칸 영화제 부스에 한국에서 온 작은 영화사 부스를 사람들이 찾을 리 없었다. 그는 개그맨다운 아이디어로 이 난관을 돌파했다. 사람들이 오가며 반드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 양 문을 이용해, 닫히면 용가리 모습이 되는 포스터를 붙이고, 용가리 피부와 비슷한 우툴두툴한 콘돔을 바이어들에게 나눠줬다. 또 입으면 불이 날 것처럼 뜨거운 팬티도 천 장 뿌렸다. 바이어들 사이에서 용가리는 금방 유명한 존재가 됐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지도 않은 <용가리>가 420만 달러(1998~1999) 사전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여세를 몰아 양평동에 전용스튜디오도 마련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당시 DJ 정권에서 지정한 ‘신지식인1호’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또 그해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아시아위크>지가 선정한 21세기를 움직일 아시아 밀레니엄리더로도 뽑혔다. 심 감독은 컴퓨터 테크놀로지 분야에, 프로골퍼 박세리씨는 스포츠 분야에 각각 선정됐다.
영화감독이 컴퓨터 테크놀로지 부문의 리더로 뽑힌 것도 그렇고, 그는 예술보다는 산업에 더 가까운 사람이고, 그 분야에서 더 인정을 받는다. 그의 이력서에 나타난 공적사항만 봐도 그렇다. 그의 영화사는 2000년 영화 제작사로는 처음으로 기술벤처기업으로 선정됐다. 또 2003년에는 정보통신부에서 주는 디지털 영상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에서 주는 조형연구서 인증서(디자인연구소)를 받았다. 같은 해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로부터 세계 일류상품, 차세대 일류상품으로 선정됐으며, 우수제조기술연구센터로 지정받았다.
그런데 정작 그가 생산해 내는 상품인 영화 그 자체로 받은 상은 없다. 한마디로, 영화와 관련된 문화체육관광부보다는 기업의 부가가치에 신경을 쓰는 지식경제부 쪽과 더 가까운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꿔 말하면, 영화 그 자체의 예술성보다는 그가 영화를 통해 실현시키고 있는 기술력이 더 인정받는다는 말이다.
심형래에게 영화는 예술보다는 산업이다
영화에 대한 그의 소신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한다. 그는 떳떳하게 “영화를 작품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소위 ‘예술’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원하는 영화는 관객동원만 하고 끝나는 영화가 아니라 각종 캐릭터 사업으로 확대돼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그런 소스가 돼야 한다. 그는 미국 홀로바이트사의 스티븐 와인스타인 사장의 말처럼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영상 소프트산업으로 진출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료를 만든다는 의미”라고 굳게 믿고 있다. ‘문화부적 시각’이 아니라 ‘지경부적 시각’임에 틀림없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기발한 생각으로 사고를 많이 치면서 컸다. 여성 속옷인 브래지어를 만드는 일을 하던 아버지를 지켜보며 전열선으로 가슴을 덥혀주는 브래지어를 만들어보겠다고 설치다 아버지 손에 화상을 입혀 죽도록 얻어맞은 적도 있다. 만화책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펴던 그런 어린아이가 1982년 KBS 개그맨 콘테스트를 통해 데뷔했고, 그 후로 3년간 연예인 소득 1위를 기록할 정도의 인기를 누려보기도 했다. 영구 캐릭터로 영화출연을 하면서 상상력을 실현하는 영화 시장에 뛰어든 것은 그의 천성적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갑부 개그맨에서 가난한 영화사 사장으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개그맨으로서 10년, 감독으로 그 두 배 가까운 19년 세월을 보내왔지만 그는 여전히 개그맨으로 있을 때가 더 편하고 좋단다. 개그맨으로서 그는 방송가에 한 획을 그었지만 감독으로서 그의 인생은 아직도 진행형이기 때문 아닐까? 그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터미네이터>를 찍은 후 <타이타닉>이나 <아바타>를 만들었듯 언젠가는 누구도 군소리 못 할 대작을 남기고 싶어한다.
평론가들이 외면하는 그의 영화가 관객들에겐 늘 궁금한 이유는 그가 영화 속에 담고자 하는 이런 열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심형래 인터뷰
“많은 사람이 본 영화가 예술이다”
<라스트 갓파더>는 순항 중이다. 평론가들이 뭐라고 하든 관객은 보고 있다. 지난 1월 5일 오후 심형래 감독을 직접 만나 제작에 얽힌 이야기와 감독 데뷔 이후 그간 못다한 가슴 속 사연을 직접 들어보았다.
―예상 관객 수를 얼마나 생각하나요. 이번에 1000만 관객 돌파가 가능할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건 하느님도 모르는 거 아닌가요. 천만 관객 동원을 달성한다면 너무 좋겠지요. 어제는 어느 네티즌이 문자를 보내줬는데 참 찡했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부모님과 함께 본 유일한 영화가 영구영화였다. 그래서 <라스트 갓파더>를 보면서 부모님 생각에 내내 행복했다’는 말이었어요(휴대폰을 꺼내 보여주면서).”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영화만 제작해 왔지요.
“제 대표작인 <우뢰매>(감독 김청기), <용가리>, <디 워> 모두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그런 영화들이죠. 이번에 <라스트 갓파더> 같은 경우에도 수위를 많이 조절했어요. 코미디영화는 보통 섹스 코드를 많이 넣거나, 외국 코미디 같은 경우에는 말로 하는 것이 많은데요, 제 영화의 경우에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세대가 봐야 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많이 생각해서 수위를 조절했어요.”
―원래 제목은 <더 덤 마피아(The Dumb Mafia)>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라스트 갓파더>라고 바꿨나요.
“<더 덤 마피아>는 한국어로 직역하면 ‘바보 마피아’가 되거든요. 주변에서 이구동성으로 ‘제목으로 안 어울린다. 그것보다는 <라스트 갓파더>가 더 좋다’라고 말해 주더라고요. 해외에 진출할 때는 제목이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기존의 이름은 접고, 지금의 이름을 택한 거죠.”
어차피 어떤 사람은 안 보는 게 영화다
―이번 개봉영화에 대해 일부 평론가 중에는 평론 자체를 기피하거나 ‘이 영화는 보지도 않겠다’라는 입장을 취하는 데 대해 어떤 심정인가요.
“제 영화를 안 좋게 평가하는 분들도 있고, 반대로 적극적으로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뵌 적 없는 한 아주머니께서 ‘정말 잘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주시기도 하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 네티즌이 응원해 주기도 합니다. 하나의 개인적 의견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중 진중권씨가 <라스트 갓파더>를 보지 않겠다고 한 발언이 오히려 사람들을 영화관으로 몰리게 하고 있다는 말도 있던데요.
“앞으로 그런 노이즈 마케팅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자꾸 이슈화시켜서 노이즈 마케팅한다고 말하는데, 저는 바라지 않거든요. 그냥 온 가족이 편하게 웃고 즐기며 영화를 보고, 가족이 모여서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 제 영화의 취지거든요. 저는 그게 편하거든요. 제 영화에 잣대를 들이대고 자기 기준에 맞춰서 이야기하는 건 문제예요. 어차피 어떤 사람은 안 보고, 어떤 사람은 재밌게 보고 하는 게 영화죠.”
―일부 비평가들은 심 감독 영화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리를 하면 ‘심빠’라고 하는 팬그룹이 못살게 굴기 때문에 공정한 비평을 방해한다고 말합니다.
“누가 하는 어떤 평가가 공정한 건가요.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죠.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공정의 기준을 정할 수 있습니까. 자신들이 보면 공정하고, ‘심빠’들이 보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말 자체가 모순이 되는 거죠.”
―이번 영화를 한국수출보험공사의 투자보증을 받고 문화수출보험 1호로서 나랏돈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있던데요.
“문화수출보험 1호는 맞는 말인데요. 이번 작품 비용은 대출형으로 받은 겁니다. 다시 갚아야 하는 건데, 저희가 받아쓴 걸로 와전이 됐어요. 지금 30억원 보증서를 받아서 은행에서 대출받았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저희가 지고 있습니다. 우리 덕분에 다른 영화도 그렇게 대출을 받아서 만든 작품이 몇 편 있어요. 각 언론사에 정정보도를 요청했는데, 안 해주시더라고요.”
―심 감독의 영화는 늘 이슈를 몰고 다니는데요, <디 워> 때는 MBC-TV <100분 토론>의 주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곤혹스럽지 않은가요.
“아무래도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하다 보니까 토론의 주제가 된 것이죠. 제가 보니까 말이 되는 것도 있고, 말이 안 되는 것도 있고 했어요. 그래도 100분 동안 제 영화를 놓고 토론을 잘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런 토론도 제가 만든 영화에 쏟아지는 많은 관심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케이틀이 대본 읽어보고 재미있다며 출연 승낙
―<라스트 갓파더>의 주연배우로 할리우드의 대표적 성격파 배우 하비 케이틀을 섭외한 것에 대해 다들 놀라워하는데요. 숨은 이야기라도.
“<디 워> 때는 좋은 배우들을 쓰고 싶어도 접근조차 힘들었죠. 그런데 <디 워> 덕분에 섭외가 쉬웠어요. 하비 케이틀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연기파 배우인데, 그런 배우가 코미디를 했을 때는 웃음 강도가 더 세거든요. 케이틀이 처음에 시나리오를 봤을 땐 마피아영화인 줄 알았대요. 그런데 읽어보니까 너무 재미있어서, 재혼해서 얻은 자신의 네 살짜리 아들에게 보여주려고 출연했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말런 브랜도를 CG로 살릴 계획이었지요.
“저희가 테스트를 다 끝내놓고 업그레이드를 시키는 과정이었는데, 접촉하는 과정에서 보니까 비용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미국배우들은 죽어서 더 돈을 많이 벌어요. 유족, 에이전시 등 관련된 것들을 풀어나가려면 돈도 엄청나게 들고 영화도 못 찍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배우와 영화를 찍자고 결정했죠.”
―하비 케이틀이 ‘영구’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던가요.
“영구에 대한 이해를 시나리오를 보면서 많이 연구해 왔더라고요. 영구는 바보가 아니라 착한 사람이죠. 영구는 세상물정 모르는 깨끗한 사람이에요. 그런 영구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을 맡게 되는데, 그게 생각대로 잘 안 되는 캐릭터로 설정이 된 거죠.”
―영구가 대부의 후계자가 되는 설정은 어떻게 생각해 냈습니까.
“마피아는 전 세계가 다 아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마피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가 영구잖아요. 외국시장에 나가려면 어떤 설정이 좋을까 연구하다가 생각해 낸 거죠. 영구라는 캐릭터가 한 번 뜨면 그 캐릭터의 변형을 통해서 외국시장으로 진출이 용이하기 때문에 영구 캐릭터를 사용하기 위해서 첫 모티브를 마피아로 잡은 거죠.”
<영구와 땡칠이>는 시민회관에서 하루 1만4800명이 봐
―영화를 개그처럼 하는 것 같습니다. 심 감독 영화의 원천적 힘은 개그 아이디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를 꼭 심각하게 만들 필요가 없잖아요(웃음). 1999년 칸에서 <용가리> 프로모션 할 때도 메이저사에서 좋은 자리를 모두 선점한 상황에서 내용을 알리려면 방법이 필요했어요. ‘용가리 팬티’도 제작해 가서 입으면 불이 나온다고 하면서 나눠줬죠. 그리고 ‘용가리 보디가드’라고 핀을 빼면 소리가 나는 제품도 제작해 가서 바이어들에게 어필했죠. 퍼즐도 일부러 가방에 넣을 수 없는 사이즈로 제작해서 들고 다니면서 내 영화의 샌드위치맨(홍보전단판을 메고 홍보하는 사람)이 되도록 했죠.”
―초기 영화들이 대부분 극장이 아니라 시민회관이나 예식장에 걸렸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처음에 제가 만든 영화는 영화로 안 쳐줘서 개봉관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만들어놓고 상영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구민회관이나 시민회관에 부탁을 해서 상영을 했죠. 노는 예식장에서도 커튼으로 가리고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흥행을 해서 극장으로 옮겨간 적도 있습니다. <영구와 땡칠이>가 시민회관에서 하루에 1만4800명이 봤는데, 그 기록은 아직도 안 깨지고 있습니다.”
―남기남 감독의 영화로 데뷔하고, 88편의 영화를 같이 작업했지요. 자서전에도 남 감독 이야기가 많던데.
“그분이 영화를 만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많이 생각도 했고 제작을 한 거죠. 영화현장은 스튜디오와 조명이 모두 잘 갖춰진 현장에서 작업하는 방송에 비해 굉장히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거든요. 저는 처음에 영화시장이 방송보다 현장이 훨씬 크고 잘되어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당시는 현장에서 카메라 한 대만으로 작업하는 그런 시절이었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미국은 영화의 스케일도 크고 장르도 다양한데, 우리나라 영화는 왜 이런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래서 내가 영화 제작을 하게 된다면 기술을 많이 키워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당시는 컴퓨터그래픽도 없을 때라서, 일일이 손으로 조작해야 했던 시절이에요. 당시 미국의 <킹콩>이나 <공룡백만년> 같은 영화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만들 수가 있나’ 그런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한계를 넘어보자’라는 생각으로 계속 여러 시도를 하면서 영화를 만들어왔죠.”
―남 감독으로부터 배운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쿼터제’ 때문에 짧은 기간 내에 영화를 만들어서 의무편수를 채워줘야만 영화관을 할당받을 수 있어서 굉장히 빨리 찍으셨어요. 누구나 영화를 돈과 시간 들여 성의 있게 찍고 싶죠. 하지만 그 악조건 속에서도 주어진 여건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굉장히 높이 사야 되거든요. 사람들이 남기남 감독님을 폄하하거나 우습게 보기도 하는데, 그분이야말로 정통 충무로 한국영화의 산증인이라고 보시면 돼요. 돈과 시간이 많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어요. 주어진 시간에 적은 돈을 가지고 그런 영화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지금 봐도 참 대단한 것입니다.”
코미디·괴물영화는 세계시장에도 먹혀
―영화를 직접 만들어보고 나서, 그런 점을 더욱 강하게 느낀 거군요.
“영화를 제작해 본 사람이라면 그걸 압니다. 처음에 영화를 같이 찍을 때 ‘이걸 이렇게 찍으면 어떡하느냐’라며 남 감독과 많이도 싸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그렇게 찍을 수밖에 없었구나’하고 이해가 되죠. 지금이야 디지털로 편집이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16mm로 뽑아서 잘라서 편집했거든요. 우리나라 영화가 100년 가까이 됐잖아요. 영화제는 각 지자체마다 다 있거든요. 그런 영화제보다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인프라 구축에 투자해야 합니다. 칸 영화제처럼 우리나라도 큰 영화제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비용을 차라리 영화장비나 세트, 인력을 키워내는 것에 투자해 주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공기관이나 영화계가 본질적인 곳보다는 소모적인 데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는 이야기네요.
“<아바타>와 <반지의 제왕>을 만들어낸 뉴질랜드의 스튜디오는 ‘<아바타> 한 편만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강남의 빌딩을 8000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고부가가치를 올리는 동안 우리나라는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물론 모든 여건이 받쳐준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가 자본이 많은 것도 아니고, 기술력이 월등한 것도 아니고, 인프라가 좋은 것도 아니고, 정말 열악한 조건에서 만들어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최소 영화티켓값에서 가져가는 문예진흥기금이라도 영화발전에 써주어야 하는데 그런 순환구조가 없다는 것이 문제죠.”
―영화소재를 잡을 때 포인트를 해외시장 공략 차원에 두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괴물들이나 마피아 다 그런 데서 나온 아이디어겠지요.
“사실 우리 영화를 가지고 미국 등 전 세계 시장으로 나가려면 어떤 콘셉트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배우나 스토리가 없어서 많이 고민했어요. 저는 세계시장에 괴물영화와 코미디영화 두 콘셉트가 먹힌다는 걸 파악하고 도전하고 있어요. 제가 생각한 괴물은 어린 시절 어머니들이 해주셨던 ‘이무기의 전설(마을에 가뭄이나 질병이 나돌면 이무기가 해코지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고요.
또 전 세계 영화 시장의 40%를 코미디영화가 차지하고 있거든요. 찰리채플린 시절부터 시작된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액션을 과장한 희극)는 <미스터 빈>에서도 보이듯 국적과 관계없이 누구나 즐겨볼 수 있는 장르로 장수하고 있어요. 게다가 제가 했던 코미디가 전부 슬랩스틱이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우리의 콘텐츠를 가지고 세계시장으로 나가보자고 이야기가 됐죠. 또 우리나라 콘텐츠를 가지고 세계시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분이 한국 콘텐츠진흥원의 이재웅 원장님이세요. 그분이 안 계셨으면 지금의 <라스트 갓파더>는 없었다고 보시면 될 거예요.”
비판자들도 세계시장을 향한 노력을 해야
―SF영화에 올인해 왔는데, 특별한 취향이 있었나요.
“그것도 해외시장에 나가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는 <로마의 휴일>, 같은 로맨틱무비거든요. SF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어요. 어마어마한 돈과 기술력이 투입되지만, 세계시장에서 가장 잘 먹히는 장르가 <쥬라기 공원>, <인디펜던스데이>, <반지의 제왕>, <아바타> 같은 SF영화잖아요. 그래서 SF 쪽으로 도전을 한 거죠.”
―영화기술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충무로에서는 심 감독 영화의 스토리텔링에 설득력이 떨어진다면서 본인의 영화에 대한 비판을 오히려 자신이 개그맨 출신이라는 핑계로 비켜가려고 한다고도 이야기하던데요.
“비판은 개인의 자유니까 뭐라고 할 것은 못 되죠. 실질적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해야 한다’라고 말만 하는 상황에서 직접 미국에 작품을 가지고 가서 제작하고 상영을 하기까지의 노력과 그에 수반되는 고통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겁니다. 사실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거든요. <타이타닉>을 가져다 놔도 재미없는 사람에게는 재미없는 겁니다. 일부의 생각이 전체의 생각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스토리라는 것이 어른에게는 재미있는데, 아이에게는 재미있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전 세계 어린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라는 건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하겠지요.
“전 세계를 상대로 영화를 만들다 보면 여러 입장을 수용해야 하거든요. 국적이나 인종에 관계없이 이해하기 쉬워야 해요. 수위를 어떻게 맞추느냐에 따라서 어른과 아이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겁니다. 특히 미국은 굉장히 보수적이라서 조금만 엇나가도 ‘전체상영가’를 받기가 힘듭니다. 그런 여러 가지를 계산해서 영화를 만드는 겁니다. 세계시장이 목표인데, 특정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토리텔링에 맞출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아바타>의 제임스 캐머런도 ‘아직도 아쉬운 점이 많다’고 이야기하잖아요. 하나의 영화를 두고도 ‘오 좋다’라는 사람이 있고, ‘저게 어떻게 세계시장에 통하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영화계에서 심 감독 영화의 기술력은 상당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장비나 기술이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한 점이 굉장히 크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끼리는 내부에서 논란을 펴봐야 소모적일 뿐입니다. 미국시장에 진입하는 방법이나 미국배우들과의 계약방법 등이 <디 워> 때는 굉장히 어색했죠. 하지만 하면 할수록 어떤 장비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노하우가 생깁니다. 그런 노하우는 해보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어요. 제가 욕을 먹어가면서도 SF장르를 고집하는 것은, 모든 것을 축적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임스 캐머런도 <터미네이터> 같은 영화를 안 만들었으면 <타이타닉>을 못 만들었을 거예요. 사실 <타이타닉>은 사랑영화지만, 그 안에 담긴 배가 침몰하는 장면, 젊은 주인공들이 늙어가는 장면 등은 모두 첨단 테크놀로지가 동원된 장면이에요. 이런 것들이 모여서 수준 있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미국이 이렇게 차례대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가는 동안 언제까지 우리는 상대를 비판하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고 있을 거냐는 거죠. 그렇다면 자신들도 스토리텔링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서 개봉을 하고 마니아를 만들고, 전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시도를 자꾸 해봐야죠. 소모적인 건 그만하고.”
―비판을 하려면 먼저 세계적으로 흥행할 만한 작품들을 만들어 놓으라는 얘기네요.
“그런 건 아니지만, 서로 비판하는 소모적인 일보다는 세계시장을 향한 노력을 많이 하고 좋은 스토리들을 만들어내라는 겁니다.”
이제 세계시장이 <디 워> 제작사를 알아준다
―세계시장을 겨냥해서 만든 심 감독의 <디 워>보다 국내용이었던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돈이 더 많다는 말이 있던데요.
“<괴물>이 얼마나 팔렸는지 몰라서 정확한 수치는 제가 잘 모르겠네요. <디 워>가 아직 팔리고 있는 상황이고, 지금 <디 워> 영화 한 편 때문에 메이저 영화사들이 서로 <디 워2>를 가져가려고 시나리오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이번 <라스트 갓파더> 캐스팅 때도 <디 워>를 제작한 회사라고 소개해서 수월하게 진행된 겁니다. 그런 재순환 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누가 많이 벌었나 같은 것을 논하고 비난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거든요. 한 편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들였던 시간과 끊임없는 노력들, 그리고 그 이후의 성과까지 생각해 줘야지, 얼마를 벌었는가의 수치가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현대자동차와 삼성이 세계시장 진출할 때도 안팎으로 비난을 많이 받았거든요. 근데 끊임없이 투자하고 노력을 해서 지금의 명성을 얻은 거죠. <디 워2>도 <디 워>로 돈을 많이 벌었으니까 해외 영화사들이 관심이 있는 거죠. 하지만 우리의 기술력으로 그 정도가 되기까지 든 노력과 비용은 어떻게 다 따지겠어요.”
―그럼 다음 작품은 <디 워2>가 되는 건가요.
“<디 워2> 시나리오는 금강이라는 무협소설 작가가 쓰고 있는데, 같이 작업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 <추억의 붕어빵>이 먼저 선보이게 될 거예요. 이 영화는 60년대를 배경으로 붕어빵이라는 당시의 최고의 간식을 하나의 상징으로 하고 있어요. 당시 판자촌이나 부서진 건물 주변에서 머리에 이가 있고, 피부에는 마른버짐이 피고, 손등이 터진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놀았던 추억들이 그냥 잊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추억의 붕어빵>도 가족영화겠네요. 언제 개봉하나요.
“제일 타깃은 나이 드신 분들이고요. 제가 콘텐츠진흥원에서 당시 풍물 미니어처 전시를 한번 했어요. 전시기간이 짧았는데도 1만4000명이나 왔다갔어요. 그걸 보고 ‘힘들었지만 그때를 회상하는 사람들이 참 많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이 작품을 국내용이라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뮬란>은 청나라 이야기지만 세계적으로 흥행했잖아요. <게이샤의 추억>도 일본 이야기지만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코드로, 한 가정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한 장면씩 크리스마스카드처럼 만들어내 보려고 합니다. 내년 여름방학 즈음으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디 워>의 제작기간이 7년이었는데, <디 워2>는 또 몇 년이 걸릴까요.
“<디 워2>는 기술력이 축적되어 있어서 빨라질 것 같아요. 입체모형도 벌써 만들어 놨으니까…”
<아바타>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이기는 게 꿈
―심 감독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구아트의 전문가들을 계속 끌어안아 왔고, 그 사람들이 성장해 현재 요소요소에서 한국영화기술의 핵심인력들이 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쉬리> 전후의 한국영화가 다른 것은 영구아트가 가진 기술력 때문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영구아트 출신들이 이 분야 컴퓨터 그래픽이나 특수효과 쪽에 많이 진출해 있어요. 근데 사실 제가 해온 일이 국가에서 해야 할 사업이지 개인이 사비 털어서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는 기술력이 너무 없어서 필름카메라 한 대만 가져다 놓고 ‘이걸로 어떻게 담아낼까’ 고심하기만 했어요.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 미니어처 제작 등 고난도의 기술력이 너무나 필요한데, 인력이 없는 거예요. 앞으로 영화진흥위원회에서는 무엇보다 이런 인력을 더욱 발굴하고 키워나가야 됩니다.”
―영구아트의 기술력으로 <아바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기가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이번 <디 워2>는 제가 사활을 걸고라도 <아바타>에 근접하게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평소에 천직은 코미디언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심 감독에게 영화감독은 어떤 의미인가요.
“사실 감독이라는 말은 조금 부담스러워요. 감독은 저하고 거리가 조금 먼 것 같아요. ‘감독님’이라는 말보다 ‘코미디언’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제 태생은 코미디언이잖아요. 태생은 꾸민다고 해서 변하는 게 아니거든요. 제가 영화를 만들 때는 영화현장에 리더가 하나 있어야 하니까 감독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태생은 코미디언 같습니다.”
―‘못하니까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니까 못하는 거다’는 심 감독의 말이 유명한데, 상당히 저돌적으로 들립니다.
“어제도 <추억의 붕어빵> 회의하면서 제가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한 베스트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매번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는 상황이 슬프더라고요.”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예술영화라는 소신은 변함없나요.
“저는 영화장르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이 본 영화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꿈이 한국의 ILM(Industry of Light & Magic, <쥬라기 공원>이나 <스타워즈> 같은 영화의 첨단영상을 제작한 회사) 같은 회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구아트를 시작하고 보니까 제약도 많고 힘든 일이 많지만, 최종적으로는 대한민국 최고의 ILM이 되는 게 목표죠. 제 꿈은 <아바타>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이기고,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를 해보는 것입니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궁극적으로는 <타이타닉>이나 <아바타>처럼 예술성과 흥행에 모두 성공하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지금 제 영화를 예술적 측면으로 비교하지는 않지만, 흥행에서 최고가 되려면 그런 요소가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조건이 맞춰져야 하기 때문에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런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현재의 목표입니다.”⊙
작년 12월 29일 개봉 당시, 그의 바로 전작 <디 워>(2007) 때부터 작품성을 놓고 한판 붙어온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불량가게 제품”이라고 단정 지은 심 감독의 작품에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평가들은 ‘할리우드 공략용’임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는 그의 영화들이 애국심 마케팅에 의존해서 흥행을 이어간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대중이 그렇게 자비로운 존재였던가. 한 번도 아니고 번번이 애국심 차원에서 기꺼이 주머니를 털어주며 시간 내서 극장까지 와주는 대중이 이 땅에 존재할까?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그의 영화를 기꺼이 봐주는 관객과 심 감독의 작품을 바라보는 눈높이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그의 작품을 영화제 심사기준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답이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심 감독은 “흥행이 예술”이라고 믿으며 영화를 찍어내는 철저한 상업주의 감독이고, 관객들은 그의 영화를 보고 그저 두 시간 정도 즐겁기 위해 극장을 찾기 때문이다. 의미보다는 재미를 찾는다면 잘못된 영화감상 태도일까?
물론 재미없다는 관객평도 적지 않다. 무엇을 재미있다고 보는지 개개인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나이 제한 없이 볼 수 있는 ‘영구 무비’ 시리즈의 한 가지라 어린이들이 박장대소하며 보는 데 주안점을 뒀다. 또 ‘바보 영구’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성장한 30~40대 성인의 향수를 자극하겠다는 속셈도 있었다. 영구에 대한 추억도 없고, 세상사에 찌든 어른의 눈높이로 보면 재미없다 해도 진실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유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으면 안 보면 된다. 영화의 성패는 관객이 정한다. 그런데 심 감독의 영화는 비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판대 위에 놓여 안쓰럽다. 물론 과도한 비판이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나쁜 면을 부각시켜 눈길을 잡아끄는 것)’에 한몫을 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 의미에서 안 보겠다고 선언한 진중권씨가 이번 영화홍보의 일등공신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편견 없는 해외 시장에서 먼저 승부 걸어

어설프게 시작했지만, 심 감독이 1992년 <영구와 흡혈귀 드라큐라>로 입봉한 지 벌써 19년이 되어 간다. 그는 남기남 감독이 만든 80여 편의 영구시리즈에 출연하면서 영화판을 익힌 대로 좌충우돌식으로 자신의 영화세계를 구축해 갔다. 스크린 쿼터제(한국영화 4편을 제작해야 외화 한 편의 상영권을 받는 것)하 열악한 국산영화 제작환경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가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된 것도 사실은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를 만드는 한국 감독들의 처지를 지켜보면서 할리우드와 같은 세계영화 시장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된 탓이다. 한편으로는 코미디언인 자신이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쳐다봐주지도 않는 한국영화 시장보다는 편견이 없는 해외영화 시장에서 승부를 내고 싶다는 개인적 욕구도 강했다.
심 감독이 그간 만든 영화는 모두 10편. 결코 다작(多作)이 아니다. 그만큼 나름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왔다는 이야기다. <디 워> 제작에만 7년을 쏟아부었다. 작품의 완성도는 그다지 높은 평을 받지 못했지만, <용가리>를 기점으로 그의 작품세계에서 보여주는 기술적인 완성도는 영화계 인사들의 눈길을 끌 만큼 한국영화계 발전에 기여했다. 이 점이 같은 개그맨 영화인이지만 이경규나 서세원씨와는 비중이 다른 점이라고 영화계는 이야기한다.
심 감독은 1993년 (주)영구아트(1996년에 영구아트무비로 개편)라는 영화사를 차리면서 제작자 겸 감독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회사를 차린 그해 <핑크빛 깡통>과 <영구와 공룡쭈쭈>를 내놓았고, 이어 <티라노의 발톱>(1994), <파워킹>(1995), <드래곤 투카>(1996), <용가리>(1999), <2001 용가리>(2000), <디 워>(2007)에서 이번의 <라스트 갓파더>까지 모두 10편을 제작·감독했다. <티라노의 발톱> 전까지 그가 만든 영화는 극장을 잡지 못해 시민회관이나 구민회관, 심지어 예식장에서도 상영됐다. 그가 개그맨이라는 이유로 주류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탓이었다.

<티라노의 발톱>, 흥행에 실패했지만 기술력 진보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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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노의 발톱>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기술적으로는 큰 진전을 이루는 계기가 된 영화다. |
<티라노의 발톱>은 그에게 많은 추억을 남긴 영화이다. 그중 앞다퉈 무료출연을 해줬던 개그맨 동료들의 뜨거운 동료애도 잊지 못할 일로 기억된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수많은 원시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양종철은 촬영기간 중 운전 잘못으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당시 양종철의 말인즉, 영화촬영보단 차라리 유치장이 낫다며 잡아 가둔 경찰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고 한다. 양종철이 심 감독에게 “제발 나 좀 빨리 공룡에게 밟혀 죽게 해달라”고 통사정할 만큼 힘든 촬영이었다고 한다.
살아 있는 멧돼지를 구하지 못해 일반돼지에 페인트칠 한 일, 그것도 여의치 않자 진짜 멧돼지를 구해왔지만 연기자들을 물어뜯은 일 등 많은 일화를 남기며 완성됐지만 <티라노의 발톱>은 결국 관객동원에는 실패한다. <티라노의 발톱>의 실패로 그는 직원들의 월급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밤무대에 서는 개그맨 생활을 하는 한편 1억원 예산의 비디오 영화를 찍는 등 생계를 위한 투쟁의 시기로 들어섰다.
하지만 <티라노의 발톱>으로 잃은 것만 있진 않았다. 그 작품을 하며 특수 분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실사 크기의 공룡 6마리가 등장하는 등 규모가 그 전과는 달라졌다. 당시 제작팀들이 한국 특수효과 시대의 발전을 이끌어냈다고도 평가받는다.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용가리>에서 <디 워>까지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티라노의 발톱> 이후 “순수 국내 기술을 축적해 만든 걸 해외에 내다 판다”는 생각을 바꾼 적이 없다.
그 다음 해 <파워킹>(1995)으로 그는 재기한다. <아미크론>으로 이름을 바꾼 이 영화의 20~30분짜리 데모 테이프와 함께 영구아트에 대한 소개서를 70개 배급사에 보냈는데, 거의 모든 배급사로부터 거래를 하고 싶다는 답을 들은 것이다. 이 결과, 30개국에 123만6000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이어 만든 <드래곤 투카>는 해외시장에 나갔지만 절반이 넘는 나라에서 클레임을 받았다. 녹음이나 음향효과 등 후반 작업이 엉성하다는 이유였다. 그는 이렇게 실패하면서 하나씩 배워나갔다. 그래서 외부의 자극에 대해 더 단단해졌는지도 모른다.
<아시아위크>의 밀레니엄리더로도 뽑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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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리〉 포스터. |
이 틈새에서 그는 괴수영화(몬스터무비)와 SF영화의 접점에 닿아 있는 작품들이 팔리는 소위 B급 영화시장을 발견했다. <터미네이터>도 처음에는 B급 영화시장용으로 만들었다가 세계적인 히트를 치고 2편부터는 A급 시장에서 거래된 작품이다.
일본은 오래전 이 시장에 눈을 떴다. ‘파워레인저’가 바로 그 작품이다. 파워레인저로 일본이 벌어들이는 캐릭터 상품 수익만 4억~5억 달러가 넘을 정도인데, 그의 눈에는 자신이 주연을 맡은 ‘우뢰매’ 시리즈와 별반 다름없어 보였다. 그는 ‘몬스터 무비’가 바로 해외시장을 겨냥할 수 있는 틈새상품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칸 영화제에서 <아미크론>을 팔면서 <용가리>를 사전 홍보했다. 기라성 같은 영화사들이 즐비한 칸 영화제 부스에 한국에서 온 작은 영화사 부스를 사람들이 찾을 리 없었다. 그는 개그맨다운 아이디어로 이 난관을 돌파했다. 사람들이 오가며 반드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 양 문을 이용해, 닫히면 용가리 모습이 되는 포스터를 붙이고, 용가리 피부와 비슷한 우툴두툴한 콘돔을 바이어들에게 나눠줬다. 또 입으면 불이 날 것처럼 뜨거운 팬티도 천 장 뿌렸다. 바이어들 사이에서 용가리는 금방 유명한 존재가 됐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지도 않은 <용가리>가 420만 달러(1998~1999) 사전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여세를 몰아 양평동에 전용스튜디오도 마련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당시 DJ 정권에서 지정한 ‘신지식인1호’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또 그해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아시아위크>지가 선정한 21세기를 움직일 아시아 밀레니엄리더로도 뽑혔다. 심 감독은 컴퓨터 테크놀로지 분야에, 프로골퍼 박세리씨는 스포츠 분야에 각각 선정됐다.
영화감독이 컴퓨터 테크놀로지 부문의 리더로 뽑힌 것도 그렇고, 그는 예술보다는 산업에 더 가까운 사람이고, 그 분야에서 더 인정을 받는다. 그의 이력서에 나타난 공적사항만 봐도 그렇다. 그의 영화사는 2000년 영화 제작사로는 처음으로 기술벤처기업으로 선정됐다. 또 2003년에는 정보통신부에서 주는 디지털 영상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에서 주는 조형연구서 인증서(디자인연구소)를 받았다. 같은 해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로부터 세계 일류상품, 차세대 일류상품으로 선정됐으며, 우수제조기술연구센터로 지정받았다.
그런데 정작 그가 생산해 내는 상품인 영화 그 자체로 받은 상은 없다. 한마디로, 영화와 관련된 문화체육관광부보다는 기업의 부가가치에 신경을 쓰는 지식경제부 쪽과 더 가까운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꿔 말하면, 영화 그 자체의 예술성보다는 그가 영화를 통해 실현시키고 있는 기술력이 더 인정받는다는 말이다.
영화에 대한 그의 소신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한다. 그는 떳떳하게 “영화를 작품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소위 ‘예술’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원하는 영화는 관객동원만 하고 끝나는 영화가 아니라 각종 캐릭터 사업으로 확대돼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그런 소스가 돼야 한다. 그는 미국 홀로바이트사의 스티븐 와인스타인 사장의 말처럼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영상 소프트산업으로 진출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료를 만든다는 의미”라고 굳게 믿고 있다. ‘문화부적 시각’이 아니라 ‘지경부적 시각’임에 틀림없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기발한 생각으로 사고를 많이 치면서 컸다. 여성 속옷인 브래지어를 만드는 일을 하던 아버지를 지켜보며 전열선으로 가슴을 덥혀주는 브래지어를 만들어보겠다고 설치다 아버지 손에 화상을 입혀 죽도록 얻어맞은 적도 있다. 만화책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펴던 그런 어린아이가 1982년 KBS 개그맨 콘테스트를 통해 데뷔했고, 그 후로 3년간 연예인 소득 1위를 기록할 정도의 인기를 누려보기도 했다. 영구 캐릭터로 영화출연을 하면서 상상력을 실현하는 영화 시장에 뛰어든 것은 그의 천성적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갑부 개그맨에서 가난한 영화사 사장으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개그맨으로서 10년, 감독으로 그 두 배 가까운 19년 세월을 보내왔지만 그는 여전히 개그맨으로 있을 때가 더 편하고 좋단다. 개그맨으로서 그는 방송가에 한 획을 그었지만 감독으로서 그의 인생은 아직도 진행형이기 때문 아닐까? 그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터미네이터>를 찍은 후 <타이타닉>이나 <아바타>를 만들었듯 언젠가는 누구도 군소리 못 할 대작을 남기고 싶어한다.
평론가들이 외면하는 그의 영화가 관객들에겐 늘 궁금한 이유는 그가 영화 속에 담고자 하는 이런 열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심형래 인터뷰

―예상 관객 수를 얼마나 생각하나요. 이번에 1000만 관객 돌파가 가능할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건 하느님도 모르는 거 아닌가요. 천만 관객 동원을 달성한다면 너무 좋겠지요. 어제는 어느 네티즌이 문자를 보내줬는데 참 찡했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부모님과 함께 본 유일한 영화가 영구영화였다. 그래서 <라스트 갓파더>를 보면서 부모님 생각에 내내 행복했다’는 말이었어요(휴대폰을 꺼내 보여주면서).”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영화만 제작해 왔지요.
“제 대표작인 <우뢰매>(감독 김청기), <용가리>, <디 워> 모두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그런 영화들이죠. 이번에 <라스트 갓파더> 같은 경우에도 수위를 많이 조절했어요. 코미디영화는 보통 섹스 코드를 많이 넣거나, 외국 코미디 같은 경우에는 말로 하는 것이 많은데요, 제 영화의 경우에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세대가 봐야 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많이 생각해서 수위를 조절했어요.”
―원래 제목은 <더 덤 마피아(The Dumb Mafia)>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라스트 갓파더>라고 바꿨나요.
“<더 덤 마피아>는 한국어로 직역하면 ‘바보 마피아’가 되거든요. 주변에서 이구동성으로 ‘제목으로 안 어울린다. 그것보다는 <라스트 갓파더>가 더 좋다’라고 말해 주더라고요. 해외에 진출할 때는 제목이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기존의 이름은 접고, 지금의 이름을 택한 거죠.”
어차피 어떤 사람은 안 보는 게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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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형래 감독의 휴대폰으로 네티즌이 보낸 문자. |
“제 영화를 안 좋게 평가하는 분들도 있고, 반대로 적극적으로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뵌 적 없는 한 아주머니께서 ‘정말 잘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주시기도 하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 네티즌이 응원해 주기도 합니다. 하나의 개인적 의견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중 진중권씨가 <라스트 갓파더>를 보지 않겠다고 한 발언이 오히려 사람들을 영화관으로 몰리게 하고 있다는 말도 있던데요.
“앞으로 그런 노이즈 마케팅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자꾸 이슈화시켜서 노이즈 마케팅한다고 말하는데, 저는 바라지 않거든요. 그냥 온 가족이 편하게 웃고 즐기며 영화를 보고, 가족이 모여서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 제 영화의 취지거든요. 저는 그게 편하거든요. 제 영화에 잣대를 들이대고 자기 기준에 맞춰서 이야기하는 건 문제예요. 어차피 어떤 사람은 안 보고, 어떤 사람은 재밌게 보고 하는 게 영화죠.”
―일부 비평가들은 심 감독 영화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리를 하면 ‘심빠’라고 하는 팬그룹이 못살게 굴기 때문에 공정한 비평을 방해한다고 말합니다.
“누가 하는 어떤 평가가 공정한 건가요.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죠.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공정의 기준을 정할 수 있습니까. 자신들이 보면 공정하고, ‘심빠’들이 보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말 자체가 모순이 되는 거죠.”
―이번 영화를 한국수출보험공사의 투자보증을 받고 문화수출보험 1호로서 나랏돈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있던데요.
“문화수출보험 1호는 맞는 말인데요. 이번 작품 비용은 대출형으로 받은 겁니다. 다시 갚아야 하는 건데, 저희가 받아쓴 걸로 와전이 됐어요. 지금 30억원 보증서를 받아서 은행에서 대출받았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저희가 지고 있습니다. 우리 덕분에 다른 영화도 그렇게 대출을 받아서 만든 작품이 몇 편 있어요. 각 언론사에 정정보도를 요청했는데, 안 해주시더라고요.”
―심 감독의 영화는 늘 이슈를 몰고 다니는데요, <디 워> 때는 MBC-TV <100분 토론>의 주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곤혹스럽지 않은가요.
“아무래도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하다 보니까 토론의 주제가 된 것이죠. 제가 보니까 말이 되는 것도 있고, 말이 안 되는 것도 있고 했어요. 그래도 100분 동안 제 영화를 놓고 토론을 잘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런 토론도 제가 만든 영화에 쏟아지는 많은 관심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케이틀이 대본 읽어보고 재미있다며 출연 승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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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말 개봉 이후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는 <라스트 갓파더>. |
“<디 워> 때는 좋은 배우들을 쓰고 싶어도 접근조차 힘들었죠. 그런데 <디 워> 덕분에 섭외가 쉬웠어요. 하비 케이틀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연기파 배우인데, 그런 배우가 코미디를 했을 때는 웃음 강도가 더 세거든요. 케이틀이 처음에 시나리오를 봤을 땐 마피아영화인 줄 알았대요. 그런데 읽어보니까 너무 재미있어서, 재혼해서 얻은 자신의 네 살짜리 아들에게 보여주려고 출연했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말런 브랜도를 CG로 살릴 계획이었지요.
“저희가 테스트를 다 끝내놓고 업그레이드를 시키는 과정이었는데, 접촉하는 과정에서 보니까 비용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미국배우들은 죽어서 더 돈을 많이 벌어요. 유족, 에이전시 등 관련된 것들을 풀어나가려면 돈도 엄청나게 들고 영화도 못 찍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배우와 영화를 찍자고 결정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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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갓파더>에 출연한 할리우드의 성격파 배우 하비 케이틀(왼쪽). |
“영구에 대한 이해를 시나리오를 보면서 많이 연구해 왔더라고요. 영구는 바보가 아니라 착한 사람이죠. 영구는 세상물정 모르는 깨끗한 사람이에요. 그런 영구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을 맡게 되는데, 그게 생각대로 잘 안 되는 캐릭터로 설정이 된 거죠.”
―영구가 대부의 후계자가 되는 설정은 어떻게 생각해 냈습니까.
“마피아는 전 세계가 다 아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마피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가 영구잖아요. 외국시장에 나가려면 어떤 설정이 좋을까 연구하다가 생각해 낸 거죠. 영구라는 캐릭터가 한 번 뜨면 그 캐릭터의 변형을 통해서 외국시장으로 진출이 용이하기 때문에 영구 캐릭터를 사용하기 위해서 첫 모티브를 마피아로 잡은 거죠.”
<영구와 땡칠이>는 시민회관에서 하루 1만4800명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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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와 땡칠이> 시리즈에 출연하면서 심 감독은 영화에 대한 감을 익혔다. |
“영화를 꼭 심각하게 만들 필요가 없잖아요(웃음). 1999년 칸에서 <용가리> 프로모션 할 때도 메이저사에서 좋은 자리를 모두 선점한 상황에서 내용을 알리려면 방법이 필요했어요. ‘용가리 팬티’도 제작해 가서 입으면 불이 나온다고 하면서 나눠줬죠. 그리고 ‘용가리 보디가드’라고 핀을 빼면 소리가 나는 제품도 제작해 가서 바이어들에게 어필했죠. 퍼즐도 일부러 가방에 넣을 수 없는 사이즈로 제작해서 들고 다니면서 내 영화의 샌드위치맨(홍보전단판을 메고 홍보하는 사람)이 되도록 했죠.”
―초기 영화들이 대부분 극장이 아니라 시민회관이나 예식장에 걸렸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처음에 제가 만든 영화는 영화로 안 쳐줘서 개봉관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만들어놓고 상영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구민회관이나 시민회관에 부탁을 해서 상영을 했죠. 노는 예식장에서도 커튼으로 가리고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흥행을 해서 극장으로 옮겨간 적도 있습니다. <영구와 땡칠이>가 시민회관에서 하루에 1만4800명이 봤는데, 그 기록은 아직도 안 깨지고 있습니다.”
―남기남 감독의 영화로 데뷔하고, 88편의 영화를 같이 작업했지요. 자서전에도 남 감독 이야기가 많던데.
“그분이 영화를 만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많이 생각도 했고 제작을 한 거죠. 영화현장은 스튜디오와 조명이 모두 잘 갖춰진 현장에서 작업하는 방송에 비해 굉장히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거든요. 저는 처음에 영화시장이 방송보다 현장이 훨씬 크고 잘되어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당시는 현장에서 카메라 한 대만으로 작업하는 그런 시절이었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미국은 영화의 스케일도 크고 장르도 다양한데, 우리나라 영화는 왜 이런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래서 내가 영화 제작을 하게 된다면 기술을 많이 키워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당시는 컴퓨터그래픽도 없을 때라서, 일일이 손으로 조작해야 했던 시절이에요. 당시 미국의 <킹콩>이나 <공룡백만년> 같은 영화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만들 수가 있나’ 그런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한계를 넘어보자’라는 생각으로 계속 여러 시도를 하면서 영화를 만들어왔죠.”
―남 감독으로부터 배운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쿼터제’ 때문에 짧은 기간 내에 영화를 만들어서 의무편수를 채워줘야만 영화관을 할당받을 수 있어서 굉장히 빨리 찍으셨어요. 누구나 영화를 돈과 시간 들여 성의 있게 찍고 싶죠. 하지만 그 악조건 속에서도 주어진 여건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굉장히 높이 사야 되거든요. 사람들이 남기남 감독님을 폄하하거나 우습게 보기도 하는데, 그분이야말로 정통 충무로 한국영화의 산증인이라고 보시면 돼요. 돈과 시간이 많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어요. 주어진 시간에 적은 돈을 가지고 그런 영화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지금 봐도 참 대단한 것입니다.”
코미디·괴물영화는 세계시장에도 먹혀
―영화를 직접 만들어보고 나서, 그런 점을 더욱 강하게 느낀 거군요.
“영화를 제작해 본 사람이라면 그걸 압니다. 처음에 영화를 같이 찍을 때 ‘이걸 이렇게 찍으면 어떡하느냐’라며 남 감독과 많이도 싸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그렇게 찍을 수밖에 없었구나’하고 이해가 되죠. 지금이야 디지털로 편집이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16mm로 뽑아서 잘라서 편집했거든요. 우리나라 영화가 100년 가까이 됐잖아요. 영화제는 각 지자체마다 다 있거든요. 그런 영화제보다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인프라 구축에 투자해야 합니다. 칸 영화제처럼 우리나라도 큰 영화제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비용을 차라리 영화장비나 세트, 인력을 키워내는 것에 투자해 주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공기관이나 영화계가 본질적인 곳보다는 소모적인 데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는 이야기네요.
“<아바타>와 <반지의 제왕>을 만들어낸 뉴질랜드의 스튜디오는 ‘<아바타> 한 편만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강남의 빌딩을 8000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고부가가치를 올리는 동안 우리나라는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물론 모든 여건이 받쳐준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가 자본이 많은 것도 아니고, 기술력이 월등한 것도 아니고, 인프라가 좋은 것도 아니고, 정말 열악한 조건에서 만들어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최소 영화티켓값에서 가져가는 문예진흥기금이라도 영화발전에 써주어야 하는데 그런 순환구조가 없다는 것이 문제죠.”
―영화소재를 잡을 때 포인트를 해외시장 공략 차원에 두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괴물들이나 마피아 다 그런 데서 나온 아이디어겠지요.
“사실 우리 영화를 가지고 미국 등 전 세계 시장으로 나가려면 어떤 콘셉트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배우나 스토리가 없어서 많이 고민했어요. 저는 세계시장에 괴물영화와 코미디영화 두 콘셉트가 먹힌다는 걸 파악하고 도전하고 있어요. 제가 생각한 괴물은 어린 시절 어머니들이 해주셨던 ‘이무기의 전설(마을에 가뭄이나 질병이 나돌면 이무기가 해코지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고요.
또 전 세계 영화 시장의 40%를 코미디영화가 차지하고 있거든요. 찰리채플린 시절부터 시작된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액션을 과장한 희극)는 <미스터 빈>에서도 보이듯 국적과 관계없이 누구나 즐겨볼 수 있는 장르로 장수하고 있어요. 게다가 제가 했던 코미디가 전부 슬랩스틱이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우리의 콘텐츠를 가지고 세계시장으로 나가보자고 이야기가 됐죠. 또 우리나라 콘텐츠를 가지고 세계시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분이 한국 콘텐츠진흥원의 이재웅 원장님이세요. 그분이 안 계셨으면 지금의 <라스트 갓파더>는 없었다고 보시면 될 거예요.”
비판자들도 세계시장을 향한 노력을 해야
―SF영화에 올인해 왔는데, 특별한 취향이 있었나요.
“그것도 해외시장에 나가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는 <로마의 휴일>,
―영화기술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충무로에서는 심 감독 영화의 스토리텔링에 설득력이 떨어진다면서 본인의 영화에 대한 비판을 오히려 자신이 개그맨 출신이라는 핑계로 비켜가려고 한다고도 이야기하던데요.
“비판은 개인의 자유니까 뭐라고 할 것은 못 되죠. 실질적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해야 한다’라고 말만 하는 상황에서 직접 미국에 작품을 가지고 가서 제작하고 상영을 하기까지의 노력과 그에 수반되는 고통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겁니다. 사실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거든요. <타이타닉>을 가져다 놔도 재미없는 사람에게는 재미없는 겁니다. 일부의 생각이 전체의 생각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스토리라는 것이 어른에게는 재미있는데, 아이에게는 재미있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전 세계 어린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라는 건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하겠지요.
“전 세계를 상대로 영화를 만들다 보면 여러 입장을 수용해야 하거든요. 국적이나 인종에 관계없이 이해하기 쉬워야 해요. 수위를 어떻게 맞추느냐에 따라서 어른과 아이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겁니다. 특히 미국은 굉장히 보수적이라서 조금만 엇나가도 ‘전체상영가’를 받기가 힘듭니다. 그런 여러 가지를 계산해서 영화를 만드는 겁니다. 세계시장이 목표인데, 특정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토리텔링에 맞출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아바타>의 제임스 캐머런도 ‘아직도 아쉬운 점이 많다’고 이야기하잖아요. 하나의 영화를 두고도 ‘오 좋다’라는 사람이 있고, ‘저게 어떻게 세계시장에 통하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영화계에서 심 감독 영화의 기술력은 상당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장비나 기술이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한 점이 굉장히 크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끼리는 내부에서 논란을 펴봐야 소모적일 뿐입니다. 미국시장에 진입하는 방법이나 미국배우들과의 계약방법 등이 <디 워> 때는 굉장히 어색했죠. 하지만 하면 할수록 어떤 장비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노하우가 생깁니다. 그런 노하우는 해보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어요. 제가 욕을 먹어가면서도 SF장르를 고집하는 것은, 모든 것을 축적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임스 캐머런도 <터미네이터> 같은 영화를 안 만들었으면 <타이타닉>을 못 만들었을 거예요. 사실 <타이타닉>은 사랑영화지만, 그 안에 담긴 배가 침몰하는 장면, 젊은 주인공들이 늙어가는 장면 등은 모두 첨단 테크놀로지가 동원된 장면이에요. 이런 것들이 모여서 수준 있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미국이 이렇게 차례대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가는 동안 언제까지 우리는 상대를 비판하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고 있을 거냐는 거죠. 그렇다면 자신들도 스토리텔링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서 개봉을 하고 마니아를 만들고, 전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시도를 자꾸 해봐야죠. 소모적인 건 그만하고.”
―비판을 하려면 먼저 세계적으로 흥행할 만한 작품들을 만들어 놓으라는 얘기네요.
“그런 건 아니지만, 서로 비판하는 소모적인 일보다는 세계시장을 향한 노력을 많이 하고 좋은 스토리들을 만들어내라는 겁니다.”
이제 세계시장이 <디 워> 제작사를 알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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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았던 <디 워>는 <라스트 갓파더> <디 워2>를 만드는 토양이 됐다. |
“<괴물>이 얼마나 팔렸는지 몰라서 정확한 수치는 제가 잘 모르겠네요. <디 워>가 아직 팔리고 있는 상황이고, 지금 <디 워> 영화 한 편 때문에 메이저 영화사들이 서로 <디 워2>를 가져가려고 시나리오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이번 <라스트 갓파더> 캐스팅 때도 <디 워>를 제작한 회사라고 소개해서 수월하게 진행된 겁니다. 그런 재순환 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누가 많이 벌었나 같은 것을 논하고 비난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거든요. 한 편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들였던 시간과 끊임없는 노력들, 그리고 그 이후의 성과까지 생각해 줘야지, 얼마를 벌었는가의 수치가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현대자동차와 삼성이 세계시장 진출할 때도 안팎으로 비난을 많이 받았거든요. 근데 끊임없이 투자하고 노력을 해서 지금의 명성을 얻은 거죠. <디 워2>도 <디 워>로 돈을 많이 벌었으니까 해외 영화사들이 관심이 있는 거죠. 하지만 우리의 기술력으로 그 정도가 되기까지 든 노력과 비용은 어떻게 다 따지겠어요.”
―그럼 다음 작품은 <디 워2>가 되는 건가요.
“<디 워2> 시나리오는 금강이라는 무협소설 작가가 쓰고 있는데, 같이 작업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 <추억의 붕어빵>이 먼저 선보이게 될 거예요. 이 영화는 60년대를 배경으로 붕어빵이라는 당시의 최고의 간식을 하나의 상징으로 하고 있어요. 당시 판자촌이나 부서진 건물 주변에서 머리에 이가 있고, 피부에는 마른버짐이 피고, 손등이 터진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놀았던 추억들이 그냥 잊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추억의 붕어빵>도 가족영화겠네요. 언제 개봉하나요.
“제일 타깃은 나이 드신 분들이고요. 제가 콘텐츠진흥원에서 당시 풍물 미니어처 전시를 한번 했어요. 전시기간이 짧았는데도 1만4000명이나 왔다갔어요. 그걸 보고 ‘힘들었지만 그때를 회상하는 사람들이 참 많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이 작품을 국내용이라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뮬란>은 청나라 이야기지만 세계적으로 흥행했잖아요. <게이샤의 추억>도 일본 이야기지만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코드로, 한 가정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한 장면씩 크리스마스카드처럼 만들어내 보려고 합니다. 내년 여름방학 즈음으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디 워>의 제작기간이 7년이었는데, <디 워2>는 또 몇 년이 걸릴까요.
“<디 워2>는 기술력이 축적되어 있어서 빨라질 것 같아요. 입체모형도 벌써 만들어 놨으니까…”
<아바타>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이기는 게 꿈
―심 감독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구아트의 전문가들을 계속 끌어안아 왔고, 그 사람들이 성장해 현재 요소요소에서 한국영화기술의 핵심인력들이 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쉬리> 전후의 한국영화가 다른 것은 영구아트가 가진 기술력 때문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영구아트 출신들이 이 분야 컴퓨터 그래픽이나 특수효과 쪽에 많이 진출해 있어요. 근데 사실 제가 해온 일이 국가에서 해야 할 사업이지 개인이 사비 털어서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는 기술력이 너무 없어서 필름카메라 한 대만 가져다 놓고 ‘이걸로 어떻게 담아낼까’ 고심하기만 했어요.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 미니어처 제작 등 고난도의 기술력이 너무나 필요한데, 인력이 없는 거예요. 앞으로 영화진흥위원회에서는 무엇보다 이런 인력을 더욱 발굴하고 키워나가야 됩니다.”
―영구아트의 기술력으로 <아바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기가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이번 <디 워2>는 제가 사활을 걸고라도 <아바타>에 근접하게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평소에 천직은 코미디언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심 감독에게 영화감독은 어떤 의미인가요.
“사실 감독이라는 말은 조금 부담스러워요. 감독은 저하고 거리가 조금 먼 것 같아요. ‘감독님’이라는 말보다 ‘코미디언’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제 태생은 코미디언이잖아요. 태생은 꾸민다고 해서 변하는 게 아니거든요. 제가 영화를 만들 때는 영화현장에 리더가 하나 있어야 하니까 감독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태생은 코미디언 같습니다.”
―‘못하니까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니까 못하는 거다’는 심 감독의 말이 유명한데, 상당히 저돌적으로 들립니다.
“어제도 <추억의 붕어빵> 회의하면서 제가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한 베스트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매번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는 상황이 슬프더라고요.”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예술영화라는 소신은 변함없나요.
“저는 영화장르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이 본 영화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꿈이 한국의 ILM(Industry of Light & Magic, <쥬라기 공원>이나 <스타워즈> 같은 영화의 첨단영상을 제작한 회사) 같은 회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구아트를 시작하고 보니까 제약도 많고 힘든 일이 많지만, 최종적으로는 대한민국 최고의 ILM이 되는 게 목표죠. 제 꿈은 <아바타>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이기고,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를 해보는 것입니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궁극적으로는 <타이타닉>이나 <아바타>처럼 예술성과 흥행에 모두 성공하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지금 제 영화를 예술적 측면으로 비교하지는 않지만, 흥행에서 최고가 되려면 그런 요소가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조건이 맞춰져야 하기 때문에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런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현재의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