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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증언] 인민군 출신 李光燮씨

“인민군, 北派공작원, 국군으로 3번 군대 생활했다”

배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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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직후 인민군에 입대, 후방부대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하다가 늑막염 가장해 제대
⊙ 1·4 후퇴 때 越南해 첩보부대 공작원으로 후방 침투 작전 참가, 제대 후 대학 다니다가
    다시 입대해 1년6개월 복무
  경기도 고양시 지하철3호선 마두역 앞 호수광장. 이광섭(李光燮)씨가 모습을 나타냈다. 바로 기자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면서 다가온 그는 무척이나 정정했다. 호적상 올해 나이가 75세, 실제 나이는 그보다 두 살 많은 77세.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쩡쩡했고, 허리는 곧았으며, 걸음걸이는 빠르고 힘찼다.
 
  “연세에 비해 정정하시네요”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학창시절부터 늘 운동을 했으니까…. 인민군에 끌려갔을 때도 매일 수평대(평행봉)를 했어요.”
 
  그렇다. 그는 6·25 직후엔 인민군이었다. 중공군 개입 이후 휴전이 될 때까지는 북파(北派)공작원이었다. 제대 후 남한의 대학에 다니다가 재입대했다. 남들은 한 번 하기도 힘들어 하는 군생활을 세 번이나 한 것이다.
 
  평양 태생의 이씨는 호수광장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이 겪은 6·25와 세 번의 군생활을 털어놓았다.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누가 일으켰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심지어 북침(北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더군요. 나 같은 사람의 증언이라도 기록으로 남겨두면 6·25를 바로 아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장군환영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金日成.
  이광섭씨는 1933년 평양 서(西)구역 기림리에서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빈병을 수집해다가 세척한 후 인근 칠성사이다 공장에 납품하는 사업을 했다. 광복 후 시골에서는 토지개혁, 도시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상공업을 국유화(國有化)하는 조치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에는 영향이 없었다. 그의 말이다.
 
  “공산 치하 5년 동안 배급을 받은 적이 없었어요. 시장이 그대로 돌아가서 물자(物資) 귀한 줄 모르고 살았어요. 농촌에서는 토지개혁이 됐지만, 농민들도 현물세 25%를 납부하고 남은 것은 시장에 내다 팔았어요.”
 
  그는 광복 전과 달라진 것으로 “교회에 나가기 힘들어진 것”을 꼽았다.
 
  “학교에서 일요일에 회의를 소집하는 식으로 교회에 못 나가게 훼방을 했어요. 나야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그 무렵에는 교회에 잘 나가지 않을 때였어요. 내가 공산당 때문에 교회 안 나가게 된 건 아니었지만, 교회 나가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어요.”
 
  그해 10월,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金日成) 장군 환영대회’가 열렸다. 마침 집 근처라 그도 환영대회에 나갔다.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나와 김일성 장군을 소개했어요.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등장했는데, ‘저거 가짜 아냐?’라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럴 만도 한 게, 나도 일제(日帝)시대에 친척 형님들로부터 김일성 장군에 대한 얘길 많이 들었거든. 보천보 전투? 그런 얘긴 못 들어봤고, 그냥 ‘만주벌판에 김일성 장군이란 분이 있는데, 하늘을 붕붕 날아다닌다’ 그런 얘기였어요.
 
  이승만(李承晩) 박사? 못 들어봤어요. 상해(上海)에 김구 선생이란 분이 계시다는 얘기는 들어봤고…. 얼마 지나고 난 후부터 ‘소련군 대위였다더라’ ‘본명이 김성주라더라’ 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1950년 초부터 전쟁 소문
 
세 번째로 입대한 후 제5전차대대 시절의 이광섭씨(왼쪽).
  공산당이 기반을 다져 나가는 사이에 평양 주민들은 ‘지역감정’을 경험했다. 당시 공산당 간부들 가운데는 함경도 출신이 많았다. 함경도 일대에서는 일제시대에 공업이 발달하면서 노동운동, 사회주의운동이 일찍부터 활발했었다. 이들이 공산당 간부로 중용되어 평양에 올라오면서 평안도 사람들과 알력(軋轢)을 빚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영남하고 호남 사람들이 사이가 안 좋지만, 이북에서는 평안도 사람들과 함경도 사람들이 사이가 안 좋았어요. 말씨도 달라서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 공산당 감투를 쓰고서 이래라 저래라 하니, 기분이 나빴지.”
 
  1948년 4월 남북정치협상차 김구(金九) 선생 등이 평양을 방문했다. 시청 앞에서 수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총동원된 가운데 환영대회가 열렸다.
 
  “시청 발코니에서 김구 선생이 연설을 했어요. 내용? ‘남북이 분열하지 말고 힘을 합쳐 통일을 해야 한다’ 그런 거였지, 뭐.”
 
  1949년.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잦다는 얘기가 들렸다. 1950년 초부터는 평양 주민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집이 서평양역 부근이었는데, 밤마다 군수품이 열차에 실려 남으로 내려가는 것을 목격했어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러다가 전쟁 나는 것 아냐’라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죠.”
 
  소문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당시 그는 평양제1 고급중학교(일제시대의 평양고보) 2학년이었다. 학년말(당시 북한에서는 소련학제를 본떠 9월에 1학기가 시작됐음) 시험이 끝나갈 무렵이던 6월 25일 아침, ‘인민군 최고사령부 발표’가 나왔다. 남조선이 쳐들어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시험이 끝난 후 학생들을 강당에 모으더군요. 학생회 격인 민주청년동맹(민청) 간부들과 학교의 당 세포 선생들이 나서서 ‘당장 지원 입대해야 한다’고 선동했습니다.”
 
  덜컥 겁이 난 그는 슬그머니 학교를 빠져나와 집으로 갔다가, 얼마 후 어머니와 함께 강서에 있는 외가로 도망쳤다. 6월 28일부터 미군 B-29폭격기가 나타나 평양 외곽의 군수공장 등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광섭씨의 중학 시절 학적부와 졸업 사진.
 
  서울 입성했던 戰車 장교의 豪言
 
  7월로 접어든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무렵, 강서 외가로 아버지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담임선생님이 다녀갔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이 ‘지금 인민군이 계속 남으로 밀고 내려가고 있다. 곧 통일이 될 텐데 이럴 때 도피하면 본인은 물론 가족도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더군요. 담임선생님은 황영일이라는 분이었는데 평양고보 34회로 5년 선배였어요. 월남해서 황패강(黃浿江)으로 개명(改名)했는데, 후일 동국대 부총장을 지냈습니다. ‘나 때문에 가족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7월 초 어느 날, 그는 같은 학교 학생 500여 명과 함께 인민군에 입대했다. 이들은 평양 종로인민학교를 거쳐 도보로 대동강철교를 건너 평양 사동 미림에 있는 군부대로 이동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군 아키오쓰(秋乙)부대가 주둔해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 집결한 사람은 타(他)지역에서 온 사람까지 합쳐 모두 2000여 명이었다.
 
  “연병장에 앉으라고 하더니, 무조건 반으로 자르더라고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앉은 쪽은 인민군 17기계화여단, 다른 쪽은 인민군 16기계화여단으로 편입됐습니다. 같은 학교 친구들 중에서도 화장실에 갔다 오느라고 늦은 친구들은 16여단에 편입됐어요.”
 
  16여단에 편입된 사람은 그 길로 화물차편으로 강원도 철원으로 이동해서 10일가량 훈련을 받은 후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다고 한다.
 
  “그들 가운데 두 명은 미군 폭격에 파편상을 입었는데, 그 자리에서 소독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준 후 알아서 평양으로 돌아가라고 했답니다. 그중에서 신중길이라는 친구는 북으로 올라오다가 수원 인근에서 미군에 투항,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가 반공포로 석방 때 석방됐습니다. 전순철이라는 친구는 상처에 생긴 구더기를 손으로 쓸어내면서 평양까지 올라왔다가 1·4 후퇴 때 아버지와 함께 월남했습니다. 지금 부산 동래상고 이사장을 하고 있어요.”
 
  16여단 친구들이 죽을 고생을 하고 있을 때, 17여단으로 간 그는 아주 편하게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부대에 배치되던 날, 작달막한 인민군 대위 하나가 나타났는데 아주 원기왕성한 사람이었어요. ‘이곳은 인민군 101전차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곳인데, 101전차사단은 여기서 교육받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 38선으로 이동했다가 전쟁이 나자마자 곧바로 밀고 내려갔다. 우리 부대가 제일 먼저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에 입성했다. 통일이 멀지 않았다. 나는 부상을 당해 여기서 여러분의 교육을 맡게 됐다’고 일장연설을 하더군요. 미아리라는 지명을 그때 첨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뭔지 모를 감동이 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때 그 인민군 장교 얘기는 자기들이 준비하고 있다가 남침했다는 자백이었던 셈이죠.”
 
 
  늑막염 환자 행세해 依病제대
 
1950년 6월 28일 서울시내로 진입하는 인민군 전차.
  여기서 그는 위생병이 됐다. 매일 점호 후 환자가 발생하면 의무대로 데려다 주고, 환자 발생 상황을 일지에 기록하는 임무였다. 매일 적으면 3~4명, 많으면 6~7명 정도의 환자가 발생했다. 다른 병사들이 교육을 나간 사이에 그는 병이 난 병사들을 앞에 두고 수평대(평행봉)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병사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샛노란 것이 한눈에 봐도 병색(病色)이 완연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평양 제2 고급중학교 출신인 그 병사는 자기는 늑막염 환자인데 인민군 부사단장인 아버지 때문에 입대하지 않을 수 없어 군대에 왔지만, 곧 의병(依病)제대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늑막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결핵성 늑막염과 타박성 늑막염이 있는데, 자기는 결핵성 늑막염이라고 하더군요. 타박성 늑막염이 뭐냐고 물으니까, 세게 맞거나 운동을 하다가 강한 충격을 받으면 늑막염 증세가 나타날 수 있는데 그게 타박성 늑막염이라고 하더군요.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며칠 후, 여느 때처럼 평행봉을 하다가 일부러 땅바닥으로 떨어져 의무대로 실려갔다. 군의관들은 평양의대 3~4학년에 다니다가 전쟁 발발과 함께 소위나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임관한 신참들이었다. 청진기 하나만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을 속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러다가 타박성 늑막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군의관들을 보며 그는 남 몰래 미소를 지었다. 며칠 후 그는 군의관에게 결핵성 늑막염을 앓던 병사에게 들은 대로 “아침에 일어나면 미열(微熱)이 있다”고 말했다. 군의관은 그를 중환자로 분류했다.
 
  8월 중순, 병사들이 1달간의 훈련을 끝내고 야영훈련을 나갈 때가 됐다. 부대의 중환자 실태를 점검하고 재분류하기 위해 민족보위성(국방부)에서 군의관들이 내려왔다. 소좌·중좌(소령·중령)급 고급군의관들인 그들도 기존 기록을 살펴본 후 청진기로 검사하면서 문진(問診)하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그는 다른 15~16명의 병사들과 함께 다시 중환자로 분류돼 며칠 후 ‘인민군 122부대 제대증’을 손에 쥐었다.
 
 
  드럼통 뗏목 타고 대동강 건너
 
1950년 12월 피란민들이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건너고 있다.
  거리에서는 젊은 사람들을 보이는 족족 잡아서 인민군에 강제입대시키던 시절이었지만, 인민군 제대증을 가진 그는 거리를 활보했다. 열차편으로 다시 외가인 강서로 갔다. 거기서 유엔군의 인천상륙과 서울탈환 소식을 들었다.
 
  10월 말 국군이 평양에 입성한 후 그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친구들 절반 정도만이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다. 시민환영대회가 열렸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젠 통일이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11월에 접어들어 중공군(中共軍)이 압록강을 넘어 밀고 들어오면서 그는 품속에 황해 사리원의 8촌 형님 집 주소가 적힌 편지봉투를 간직하고 초등학교 친구 홍기와 함께 피란길에 올랐다.
 
  대동강 철교(鐵橋)는 폭격으로 끊어져 있었다. 임시로 부설된 목교(木橋)는 국군 헌병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헌병들은 “내일 다리를 열어 주겠다”면서 군용차량들만 통과시켰다.
 
  그와 친구 홍기는 대동강변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가 능라도 인근에서 드럼통 위에 나무를 얹어 만든 뗏목을 발견했다. 삿대도 있었다. 두 사람은 뗏목에 올랐다.
 
  “살얼음을 헤치며 100m쯤 건넜을 때, 강가에서 누가 ‘돌아오라’고 소리를 지르더군요. 뗏목 주인인데, 아마 가족을 데리러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우리도 ‘알았다’고 소리치긴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뱃머리가 뾰족한 배가 아니라 드럼통으로 만든 뗏목이다 보니 속도가 안 나고 방향전환도 안 되는 데다가 살얼음이 얼어붙고 있었어요. 자꾸만 얼어붙는 얼음을 깨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2시간 넘게 걸려 강을 건넜습니다.
 
  기진맥진해서 쉬고 있는데, 목교 쪽에서 불길이 치솟으면서 아우성이 들리더군요. 국군이 철수하면서 다리에 불을 지른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越南, 입에 풀칠하려고 入隊
 
  100리를 걸어 황해도 황주에 도착한 그들은 막 출발하려는 사리원행 열차에 무작정 올라탔다. 이 열차는 목적지인 사리원에는 서지도 않고 그냥 남으로 내달렸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남행(南行)을 거듭한 열차가 12월 8일 서울 수색역에 도착했다.
 
  뜻하지 않게 서울까지 내려온 그들을 반겨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구 홍기가 서울음대(音大)에 다니는 홍춘자라는 먼 친척 아가씨가 평양에 있는 자기 집을 다녀간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남산에 있던 서울음대로, 다시 명동 입구에 있던 정훈음악대로 물어물어 홍춘자라는 사람을 찾아갔다. 완전히 ‘서울 가서 김서방 찾기’였다.
 
  그러나 일껏 찾은 홍춘자씨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들이 찾으려던 홍춘자의 1년 선배였다. 하지만 그들이 ‘친척 홍춘자’를 찾았을 때 그녀도 피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며칠 그 집에서 묵은 두 사람은 “군대라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군대에 가면 굶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거리 곳곳에 국민방위군, 학도의용군 모집 공고가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을지로입구에 있던 학도의용군 본부를 찾아갔다. 담당자에게 평양 제1 고급중학교 학생증을 내밀었다. 하지만 담당자는 “남한 출신 학생들만 받는다”면서 두 사람을 퇴짜 놓았다.
 
  두 사람은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평양고보 1년 선배를 만났다. 그는 “효자동에 있는 평남도청 임시사무소에 가면 이북 출신만 모집하는 부대가 있다”고 알려줬다. 그곳에 가서 학생증을 제시하니 OK였다. 담당자는 “내일 파고다공원 뒤에 있는 수운회관으로 오라”고 했다.
 
  다음 날 두 사람이 찾아간 수운회관에는 2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군(軍)트럭도 보였다. 육군 중령 한 사람이 “이제 여러분은 멸공(滅共)전선에 나서야 한다”고 일장훈시를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군트럭 편으로 동대문구 전농동에 있는 서울시립농대(지금의 서울시립대 자리)로 이동했다. 학교 앞에는 계급장이 없는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육군정보국 소속 정보학교였다.
 
  1950년 12월 15일경 대구에 도착한 이들은 대구문화극장에서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인엽(白仁燁) 준장으로부터 “여러분은 이제 교육을 받은 후 정보활동에 투입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후 대구달성국민학교로 이동했다. 정보학교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사격 한 번 안 한 정보학교 교육
 
  교관은 정봉욱(鄭鳳旭) 중령 등 인민군 출신 귀순장교 3~4명이었다. 정 중령은 인민군 중좌로 있다가 귀순했다고 했다. 인민군 출신으로 군내에서 백안시(白眼視)당하고 있던 그는 후일 좌익전력자인 박정희(朴正熙) 준장이 2군단 포병사령관으로 있을 때 함께 근무하면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情)을 나누었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 장군과 단짝이 된 그는 나중에 5·16에 가담했고,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정보학교에서 이북 출신 청년들은 소련군 무기매뉴얼을 갖다 놓고 인민군의 차량, 포(砲), 전차 등 무기식별법, 인민군 편제 등을 익혔다. 교육은 주로 실내에서 이루어졌고, 체력단련을 병행했다.
 
  “특수훈련? 그런 건 없었어요. 사격훈련도 안 했어요. 그때 받은 교육 중에서 ‘성동격서(聲東擊西)’라는 말이 기억나네. ‘이쪽으로 침투하려면 반대쪽에서 소란을 피워 주의를 거기로 돌린 다음에 침투하라’ 뭐 그런 얘기였지.”
 
  1달 이상 교육을 받은 후 시험을 치렀다. 남들이 50, 60점 나올 때 그와 홍기는 90점 이상을 받았다. 이북에서 알아주는 명문학교 출신인 데다가 학창 시절 인민군 장교로부터 교련 교육을 받은 덕분이었다.
 
 
  육군첩보부대 동해안支隊
 
  1951년 2월 초 어느 날 밤 비상이 걸렸다. 대원들을 태운 트럭은 동해안을 따라 북으로 달렸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강릉 인근 안인진. 여기서 이들은 첩보부대(HID) 동해안제1지구대(대장 이창옥 소령)에 편입됐다.
 
  부대장은 “담력을 길러야 한다”며 이들을 최전방 전투현장으로 내보냈다. 무장도 하지 않은 이들 머리 위로 총알이 핑핑 날아다녔다. 일선 전투요원으로 투입된 것이 아니었기에 이들은 정동진으로 후퇴했다. 2월 말까지 이들은 강릉, 주문진, 속초를 전전했다.
 
  2월 말 이들은 지구대 2파견대 소속 공작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대원은 11명이었다. 교육이 계속됐다.
 
  “인민군으로 위장하는 법 등을 주로 배웠어요. 국군과 인민군은 위장망 꾸미는 법도 다르거든요. 인식표 만드는 법도 배웠습니다. 인식표는 헝겊에 숫자를 적어 돌돌 만 것인데, 옷 적당한 곳에 꿰매 넣게 되어 있었어요. 인민군으로 위장해 들어가다가 국군에게 잡혔을 때, 그 인식표를 제시하면 사단 정보처를 통해 우리 부대로 연락이 와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3월 초 부대가 다시 개편됐다. 수도사단 G-2(정보처)와 지구대가 육군첩보부대 동해안지대(支隊)로 통합된 것이다. 부대의 성격이나 소속이 좀 애매했다. 명칭은 육군첩보부대 예하 부대였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그 지역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던 수도사단을 위해 전투정보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지대장 김광 대위 이하 수도사단 G-2 출신들은 주로 함경도 출신이었어요. ‘이북에 있을 때에도 함경도 놈들하고 싸웠는데, 여기서도…’ 하는 생각에 기분이 안 좋았어요.”
 
  얼마 후 첫 작전에 들어갔다. 따발총과 카빈총, 인민군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강원도 고성군 설악산 울산바위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적의 위치를 파악해 무선으로 사단(수도사단) 정보처로 좌표를 불러주면, 사단 정보처는 미 해군 함정에 적의 위치를 통보하고, 그러면 1시간 이내에 함포사격이 가해졌습니다.”
 
  두 달 동안 7~8회가량 그런 작전이 있었다. 보통 5명 이하의 공작원이 작전에 투입됐다. 현역 정규군은 작전명령만 하달할 뿐, 실제 작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4월에 국군이 북진을 시작했다. 5월에 지대는 강원도 고성 봉수리까지 올라가 그곳에 본부를 두었다. 이상했다. 그때 수도사단의 주(主)저항선은 거진이었다. 필요시 공작원을 침투시킨다면 몰라도, 첩보부대의 일개 지대가 그보다 훨씬 북쪽인 고성까지 올라가 본부를 설치할 이유가 없었다.
 
 
  금강산 온정리에 침투해 정보 수집
 
  5월 말 그와 동료들은 금강산 인근 온정리로 침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인민군 낙오병 행세를 하면서 마을로 들어갔다. 주민들은 “인민군은 어제 철수해 금강산 내륙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세포위원장과 여맹위원장 등 노동당 지역간부 세 명이 길 안내를 자청하고 나섰다.
 
  인민군이 들어간 방향과 지대가 주둔하고 있는 봉수리로 가는 갈림길에서 안내하던 세포위원장 등에게 총을 겨누고 봉수리로 가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금방 체념했다. 그들을 지대 본부로 넘겼다.
 
  6월 초 파견대장 김광 대위는 온정리 남쪽 고미성으로 침투, 그곳에 있는 인민군 연대본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미성은 온정리보다 남쪽이기는 하지만 내륙에 위치해 있어 침투하기에는 더 어려운 곳이었다. 이번에는 10명이 투입됐다.
 
  “내심 우리 2파견대에만 어려운 일을 시킨다 싶더군요. 대장하고 본부 요원들이 함경도 출신이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고미성으로 향하는 협곡을 지나는데, 정말 으스스하더군요. 위에서 바위를 굴리면 꼼짝 없이 당하겠더라고요.”
 
  저녁 무렵 봉수리를 출발한 지 서너 시간이 지나 어떤 마을에 들어섰다. 집은 10채 남짓했지만, 살고 있는 사람은 노인 10여 명에 불과했다. 노인들이 소를 잡아 줄 테니 먹고 가라고 했다. 배불리 고기를 먹고 난 후 대원들끼리 의논해 마을 노인들을 잘 구슬러 고미성으로 들여보냈다.
 
  보초를 세워 놓고 잠을 자는데, 30리 가량 떨어진 봉수리 쪽에서 총성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인민군 1개 대대가 봉수리를 포위, 첩보부대 동해안지대를 기습한 것이었다.
 
  일행은 의논 끝에 수도사단이 있는 강원도 거진으로 방향을 잡았다. 부상당한 김광 대위도 나타났다.
 
  “봉수리에 있던 30여 대원 가운데 5~6명이 죽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고 하더군요. 우리만 사지(死地)로 몰아넣는다고 지대장 김 대위를 싫어했는데, 죽으러 갔던 우리는 살고, 지대 본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더군요.”
 
  그는 살아 돌아온 지대 본부요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대가 그렇게 무리해서 북쪽으로 올라가 본부를 설치한 이유를 알게 됐다.
 
  “고성의 적 후방에는 인민군이 버리고 간 비축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답니다. 김광 대위 등은 그 비축미를 손에 넣기 위해 수도사단의 주저항선보다 훨씬 위쪽인 고성 봉수리까지 올라가 지대 본부를 설치했던 것이죠.
 
  우리가 적 후방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을 때, 본부 요원들은 통통배를 타고 들어가 인민군 비축미를 실어다가 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적지에 들어가 죽을 둥 살 둥 하면서 싸우는 사이에 대장이라는 자가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히더군요.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대구 육군본부에 가서 김 대위를 고발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동료들의 허무한 죽음
 
  그와 지대본부에 근무하던 민 중사 등 다섯 명이 길을 떠났다. 민 중사는 헌병 출신이었다.
 
  주문진에서 이들은 헌병 트럭을 만났다. 민 중사의 후배 헌병이 묵호로 어망을 팔러 가는 차였다. 이들은 저녁식사를 같이했다. 술도 돌았다.
 
  그런데 이들이 탄 트럭이 경포대 인근에서 길 아래 논바닥으로 굴렀다. 그는 뒤로 넘어가면서 그물에 깔렸지만 다행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다른 친구 두 명은 운이 나빴다.
 
  “그들은 물이 차 있는 논바닥에 얼굴을 박았어요. 그 머리 위를 무거운 어망 뭉치가 누른 거예요. 어망을 들어내려 하는데 들 수가 없더군요. 친구들이 꾸르륵 꾸르륵 물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어요. 결국 두 친구는 죽고 말았습니다. 적 후방에 침투하는 작전에서도 살아남았던 친구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어요.”
 
  친구 두 명을 잃었지만 이들은 ‘무조건 대구까지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대구에서 민 중사가 첩보부대 첩보처장 강창남 중령을 만나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광섭씨 등은 “우리는 고향이 평양이니 서해안 쪽으로 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북진(北進)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고향으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 어렸고, 무서운 게 없었어요.”
 
  첩보부대에서는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좀 쉬라”면서 첩보부대가 관리하고 있던 양조장으로 보냈다. 이때가 6월 말이었다. 김광 대위는 대구로 소환되어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8월이 되자 김광 대위가 나타났다. 돈을 써서 사건을 무마시킨 것이다. 이들을 찾아온 김 대위는 “잘못했다. 그동안 반성 많이 했다”며 사과했다. 그러면서 그는 “양구에 있는 첩보부대 7사단 파견대(7지대)로 가게 됐는데 함께 가자”고 권했다. 처음에는 “안 가겠다”며 거절했지만, 김 대위가 손까지 내밀면서 권하는 바람에 따라나섰다.
 
  “양구는 동해안과는 다르더군요. 전방 파견대에 나가 봤더니, 골짜기에 중무장한 양측 군대가 호(壕)를 차고 대치하고 있어서, 은밀히 적 후방으로 침투하기가 어려웠어요. 낙하산을 타고 적 후방으로 침투하는 방안도 궁리해 봤는데, 결국 안됐어요.”
 
  ‘공작원 이광섭’의 전쟁은 1951년 8월, 강원도 양구로 가면서 사실상 끝났다. 휴전이 될 때까지 근 2년을 그는 7지대 본부 행정계에서 현역병들을 보조하면서 보냈다.
 
  1952년 11월, 그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김광 대위가 동해안지대 시절의 공로를 기억해 훈장을 상신(上申)했던 것이다. 전쟁으로 경황이 없던 시절이라 훈장 대신 훈장증만 받았다.
 
 
  새사람 되려고 이름과 생년월일 바꿔
 
제5전차대대 시절 부대 막사 앞에서 전우들과 함께(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광섭씨).
  1953년 7월 휴전(休戰)이 됐다. 육군에서는 공작원들에게 현역병으로 현지입대를 하든지, 제대를 하든지 선택하라고 했다. 친구들과 의논 끝에 “제대를 해서 고학(苦學)을 하면서라도 공부를 더 하자”고 뜻을 모았다. 제대하면서 그는 이름과 나이를 바꾸었다.
 
  “남들 얘기가 첩보 일을 했던 사람은 나가면서 이름을 바꾸는 거라고 하더군요. 구체적인 이유는 잘 몰랐지만, 첩보 일 했던 것을 내세울 만한 경력으로 생각지 않았던 것 같아요. 북(北)에 남은 가족에게 혹시라도 해가 될까 봐 그랬을 수도 있고….
 
  ‘이 기회에 이름을 바꾸고 새사람이 되는 것도 괜찮겠다’ 싶더군요. 이광섭이라는 이름은 그때부터 썼어요. 원래 이름은 이면섭(李冕燮)이었어요.
 
  이름을 바꾸는 김에 생년월일도 바꿨어요. 나이는 낮추는 게 좋다고 해서 두 살을 낮춰 1935년생으로, 생일은 평양을 떠나온 날인 12월 5일로 했어요.”
 
  그는 7사단에서 발행한 ‘HID제대귀가증’을 손에 쥐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자취하던 학교 동창을 만났다. 친구의 집을 주소지로 해 가호적(假戶籍)을 만들었다.
 
  대학입시를 보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했다. 마침 서울 왕십리 한영고 야간부에서 6개월분 공납금만 내면 졸업장을 준다고 했다. 그렇게 고교를 졸업(?)한 그는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목표로 대입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 우연히 서울사대에 다니던 평고(평양 제1 고급중) 시절 친구 민영기를 만났다. 민영기는 서울사대 시험을 권하면서 원서를 구해다 줬다. 그는 서울사대 지리과에 응시, 합격했다.
 
  “왜 지리과냐고? 민영기에게 어느 과가 쉬우냐고 물었더니 역사과하고 지리과라고 하더군. 군대 있을 때 독도법(讀圖法)을 배운 후 지도 읽는 게 재미있었던 것이 기억나 지리과를 택했지.”
 
  대학을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평고 5년 선배인 외사촌형(이민영)이 학교로 그를 찾아왔다. 외사촌형은 동대문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고향 사람으로부터 그가 서울사대에 다니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서울 아현동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외사촌형은 그에게 자기 가게로 와서 지내라고 했다. 그는 아현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1954년 가을이었다.
 
이광섭씨가 받은 국가유공자증서(왼쪽), 훈장증(가운데), 무공훈장(오른쪽).
 
  3번째 입대
 
  인천에서 고추 도매상을 하는 당숙(5촌 아저씨)도 찾았다. 1956년 구정, 그는 인천에 있는 당숙 집에서 잤다. 그날 아현동시장에서 큰 불이 났다. 그가 살던 외사촌형의 가게도 불에 탔다. 제대증, 훈장증, 사진 등도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맨주먹이 됐다고 생각하니까 살 의욕이 없어지더군요. 그래서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세 번째 입대였다. 이때가 1957년 4월이었다. 다행히 이번 군생활은 수월했다. 논산훈련소와 기갑학교를 거쳐 철원에 있는 제5전차대대에서 군복무를 했다. 그의 내력을 알게 된 부대원들은 그에게 잘해 줬다.
 
  1년6개월이 지났을 때 귀휴(歸休)명령이 떨어졌다. 대학생이 나라의 귀한 인재이던 시절, 대학생들은 1년6개월간 단기(短期)복무를 하고 나면 귀휴명령을 받아 사실상 제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복학등록을 하면 정식으로 제대명령이 내려왔다. 그의 정식 제대일은 1959년 6월, 단기 복무였기 때문에 계급은 일등병이었다.
 
  1960년 9월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후 인천고, 서울 배명고를 거쳐 보성고에서 26년간 교단에 섰다. 교사 시절 그는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동료 교사들과 함께 도산사상실천교육회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도산 사상을 전파(傳播)하는 데 앞장섰다. 박계동(朴啓東) 국회 사무총장 등이 그의 제자다.
 
  그 밖에 그가 관심을 쏟은 것은 고향 관련 일이었다. 그는 평양시민회, 평양청년회, 평남청년연합회 등에 열심히 참여했다.
 
 
  56년 만에 받은 훈장
 
첩보부대 시절의 동료들이 작성한 인우보증서를 살펴보고 있는 이광섭씨.
  1993년 이광섭씨는 33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그해에 두 아들도 결혼을 시켰다. 이광섭씨 부부는 전원생활을 결심하고 강원도 강릉으로 내려갔다.
 
  2005년 초 어느 날, 신문을 보던 이광섭씨는 눈이 번쩍 뜨였다. 정부에서 특수임무수행자(북파공작원)에 대한 보상을 시행한다는 기사였다. 그해 2월 1일, 이광섭씨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 심의위에 서류를 접수시켰다.
 
  “그러고 나니 오래전에 받은 훈장이 생각나더군요.”
 
  육본에 문의했지만 “이면섭이라는 이름의 수훈자는 없다”는 회신이 돌아왔다. 국가보훈처에서 일하는 지인(知人)으로부터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상훈과에 문의하면 훈장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행자부를 찾아갔다. 행자부에서는 2006년 그가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사실을 확인해 줬다. 2008년에는 국방부 장관 명의로 화랑무공훈장과 훈장증이 수여됐다.
 
  하지만 이광섭씨는 북파공작원으로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보상심의위에서 7사단 시절 동료들을 상대로 내가 공작원 활동을 했는지를 조사했어요. 당연히 그들은 그런 일 없다고 하죠. 내가 언제 7사단에서 공작원 했다고 했나? 수도사단(첩보부대 동해안지대)에서 했다고 했지…. 그래서 수도사단 시절 함께 복무했던 친구들로부터 인우(隣友)보증서를 받아 재심신청을 내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그게 내 인생의 마지막 할 일이에요. 그것마저 해결되고 나면 심심해지는 거지, 뭐. 하하하.”⊙
 
  사진 : 구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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