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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취재]「언론과의 전쟁」전위대로 나선 趙己淑씨 祖父의 일제下 행적

趙己淑 前 홍보수석의 祖父인 岡熙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京城日報·每日申報에서 기자로 근무
親日 신문 東光新聞에서는 주필 겸 편집국장 지내

김남성    sulsu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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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城日報와 每日申報는「제2의 조선총독부」』(鄭晉錫 외대 명예교수)
『캬, 조교수님 토론 한번 하고 싶죠』
  趙己淑(조기숙) 前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이 돌아왔다. 그녀는 정부 부처 기자실 폐쇄 등을 앞세워 다시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한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의 前衛隊(전위대)를 자임하고 나섰다.
 
  그동안 「언론개혁」을 앞장서 주장해 왔던 이른바 進步(진보)성향의 시민단체, 언론관련 단체들까지 한 목소리로 盧대통령의 조치를 비판했다. 하지만 趙己淑 前 수석은 방송 인터뷰, 인터넷 매체 기고 등을 통해 『언론 자유 외치는 언론은 생뚱하다』면서 盧대통령을 옹호했다.
 
  <왜 네티즌은 압도적으로 정부의 제안을 찬성하는지, 「월스트리트」지에서 이번 조치가 소비자에게 천편일률적인 정보가 아니라 언론사 간 자유 경쟁을 촉진할 것이라고 평가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는지요?
 
  위와 같은 정보를 접하지 못하셨다 하더라도 우리 언론사들이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것이 좀 엉뚱하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는지요? 군사독재의 보도지침을 따랐던 우리 언론사 중 몇 회사가 뼈저린 자기반성을 했나요?> (지난 6월1일 오마이뉴스)
 
  다시 「盧武鉉 지킴이」를 자처하고 나선 趙己淑 前 수석에 대해 盧武鉉 대통령은 상응하는 관심표명으로 화답했다.
 
  지난 6월2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참여정부 평가포럼」 月例(월례) 강연회장에서 4시간에 걸쳐 한나라당 大選(대선)주자 후보들과 기자들에 대한 毒舌(독설)을 뿜어내던 盧武鉉 대통령은 이 자리에 참석한 趙己淑 前 수석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캬, 趙교수님 토론 한번 하고 싶죠? 나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놈의 헌법이 못 하게 하니까, 단념해야죠』
 
  「조병갑의 증손녀」라는 月刊朝鮮(2006년 11월호) 보도 이후 趙 前 수석은 잠시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그녀는 곧 한나라당의 유력한 大選주자인 朴槿惠(박근혜) 前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비판에 나섰다.
 
  지난 2월3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장성민입니다」에 출연한 趙 前 수석은 『朴槿惠 前 한나라당 대표는 어머니(故 陸英修 여사)와 아버지(故 朴正熙 대통령)를 팔아서 정치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산을 물려받지 않은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연좌제라고 보며, 그것은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하지만 자산을 물려받았다면, 아버지의 과오에 대해서도 당연히 책임의식을 함께 져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또 『지금 全국민이 역사 바로세우기를 하고 있는데 朴槿惠 前 대표는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자기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참 신기하다』고 했다.
 
趙岡熙가 다닌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는 총독부의 기관지로,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한 후 침략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06년 창간했다. 이 때문에 두 신문은「제2의 조선총독부」로 불렸다.
 
  趙己淑의 변명
 
탐관오리 고부군수 趙秉甲은 瓚熙·岡熙 두 아들을 두었다. 趙秉甲의 손자代부터는 족보에 이름이 올라와 있지 않다. 趙己淑 前 청와대 홍보수석의 할아버지가 岡熙다.
  趙己淑 前 홍보수석은 月刊朝鮮 2006년 11월호를 통해 자신이 동학혁명을 유발한 탐관오리 趙秉甲의 증손녀라는 것이 알려진 후, 『신문도 장사지만 최소한의 상도의는 지켜야 한다』며 月刊朝鮮과 朝鮮日報를 비난했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이메일을 知人(지인)과 일부 정치부 기자들에게 보냈다. 다음은 그가 보낸 이메일의 주요 내용이다.
 
  <모 신문과 그 자매지가 지난해에도 저에 대해 터무니 날조를 하더니 올해도 또 특집을 했네요. 지난번 특집은 완전 작문이라 대응할 가치도 없었지만 여전히 작문이 곳곳에서 발견되긴 해도 이번 특집은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것이라 그냥 침묵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을 것 같아 지인들께 몇 자 띄웁니다.
 
  저는 저의 조상에 대해 감출 것도 없고 감춘 적도 없습니다. 조상의 과거가 저의 공직수행과 관련이 있다면 당연히 공개적으로 밝혀야겠지요. 하지만 저는 조상의 이름을 팔아 명예나 권력을 누리지도 않았고 그 재산을 물려받아 호의호식하지도 않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나 저는 모두 자력으로 공부했습니다.
 
  게다가 그 기사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미 학계에서는 저희 증조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오류일 수도 있다는 학자들의 논문이 발표된 바 있습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은 한 개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때 역사학도가 되어 억울한 가족사를 바로잡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그 희생양이 된다면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의 恨이 풀릴 때까지 108배 계속할 것』
 
작년 12월9일 충남 공주유스호스텔에서 열린「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행사에서 趙己淑 前 청와대 홍보수석이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趙己淑 前 수석의 이메일 내용이 알려지자, 朝·中·東(조·중·동) 등 주요 언론사뿐만 아니라 「진보」 언론사와 「진보」 인사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참여연대 회원 박상표(39)씨는 참여연대의 기관지 「참여사회」 11월호에 「탐관오리 趙秉甲의 증손녀, 역사를 얕잡아 보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趙 前 수석의 해명 이메일 가운데 「趙秉甲 군수가 재판을 받고 귀양을 간 것이 아니라,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부분을 문제 삼았다.
 
  『趙 前 수석의 변명은 역사를 왜곡한 것으로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 남아 있는 과거사 청산 대상자 후손의 논리와 너무 똑같다. 趙 前 수석의 변명은 역사를 얕잡아 봐도 한참 얕잡아 본 것이다』
 
  趙己淑 前 수석은 이후 한동안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지난해 12월9일 충남 공주유스호스텔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 행사에 돌연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군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 등 300여 명이 참여한 행사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의 영혼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최근 몇 달 동안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있다』며 『여러분의 恨(한)이 풀릴 때까지 108배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연합뉴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月刊朝鮮의 보도 이후, 정신이 없었고 정리가 잘 안 돼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해 일부 내용이 잘못 전달됐다』고 했다.
 
  이후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잠잠했던 趙 前 수석은 금년 2월 들어서부터 정치·언론·역사 바로 세우기 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月刊朝鮮에는 趙秉甲의 두 아들에 대한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趙 前 수석의 祖父이자, 趙秉甲의 둘째 아들 岡熙(강희)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趙己淑씨의 祖父인 岡熙는 평생 총독부 기관지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대표적인 親日 인사이다. 趙岡熙씨의 손녀 趙己淑씨가 親日派를 비판하고 역사와 언론 바로 세우기에 앞장섰다는 건 희대의 코미디다. 조선 末부터 친일파로 호의호식했던 이들의 후손이 조상 덕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趙秉甲의 큰아들 瓚熙(찬희)씨는 일제 때 면장·군수 생활을 오래 했다. 지금 정권 사람들 기준대로라면 명백한 親日 인사다』라는 내용이었다.
 
  趙己淑 前 수석이 자신의 조부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알고 싶어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 봤다. 趙 前 수석은 지난해 12월9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는 日帝 때 親日派였으나, 해방 후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無爲徒食(무위도식)했다. 저는 조상으로부터 한 푼도 물려받은 자산이 없다. 그래서인지 負債(부채)의식이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좌파 인터넷 매체에 실린 趙 前 수석 관련 기사에 趙 前 수석의 조부에 대한 얘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국에서 전화를 걸어 온 제보자들 가운데 趙岡熙의 「全北日報(전북일보)」 후배 기자라고 밝힌 李모(75)씨를 만났다. 그는 『趙岡熙씨와 함께 기자 생활을 한 적은 없지만, 趙岡熙씨의 기자 생활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다』고 했다. 전북 정읍에 살고 있는 李씨를 만났다.
 
  李씨는 「대한신문연감」(1956년 발행판)에서 趙岡熙씨에 대한 기록을 찾아 200자 원고지 석 장에 적어 왔다. 그가 적어 온 趙岡熙의 약력이다.
 
  <趙岡熙(1889. 4. 8~1966). 서울 출생. 선린상업 졸업. 京城日報·每日申報(1938년 京城日報에서 분리하면서 「每日新報」로 개칭) 기자를 지냈음. 東亞日報 기자, 時代日報 정치부장·사회부장, 東光新聞 주필 겸 편집국장, 每日申報 참사·충남지사장, 全北日報 편집고문, 中央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자유신문 편집부국장 역임>
 
  양주趙氏 족보에 따르면 趙秉甲의 큰아들 瓚熙는 1880년生, 둘째 아들 岡熙는 1889년生이었다. 李씨가 가져온, 趙岡熙라는 인물의 출생연도 역시 1889년生이었다. 「趙岡熙가 언론인」이라는 것은 다른 제보자들의 이야기·기록과 일치했다.
 
 
  『東光신문사는 유명한 親日언론사』
 
  ─선생님은 趙岡熙씨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모시던 全北日報 前 편집국장께서 「탐관오리 趙秉甲의 아들이 趙岡熙인데 全北日報에 있었다」는 얘기를 여러 번 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양반이 올해 연세가 아흔이 넘으셨는데, 「趙岡熙씨와 기자 생활을 함께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趙岡熙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는데 마침 月刊朝鮮에서 지난해 11월호에 趙秉甲 기사를 썼더군요. 거기에 趙岡熙 이름이 나와서 제가 신문연감을 찾아봤습니다』
 
  ─趙岡熙씨와 함께 일한 적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워낙 나이 차이가 나서. 趙岡熙씨가 全北日報의 편집고문을 했는데, 광복 전이었어요. 그때 저는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죠』
 
  ─趙岡熙는 어떤 인물이라고 하던가요.
 
  『사람이 참 온화하고 착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만을 봐서는 탐관오리 趙秉甲의 아들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인물도 좋았답니다. 그런데 그 양반이 다니던 東光新聞은 우리 지역에서 유명한 親日 신문사였어요』
 
  ─京城日報나 每日申報, 時代日報는 성격이 어땠나요.
 
  『다른 신문사는 정확히 잘 모릅니다. 하지만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는 총독부에서 운영했던 신문이라고 하지요? 아마 그럴 겁니다』
 
  趙岡熙와 함께 일한 全北日報 前 편집국장을 만나서 生前(생전)의 趙岡熙에 대해서 듣고 싶었지만, 워낙 高齡(고령)이라 인터뷰가 불가능했다.
 
  李씨가 전해 준 메모를 토대로 趙岡熙의 행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서울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대한신문연감」을 찾아봤다. 신문연감의 광복 前 언론인 명단에서 趙岡熙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東亞日報 기자 생활

 
趙岡熙의 약력을 적어 온 全北日報 후배기자 李씨의 제보.
  趙岡熙에 대한 설명은 李씨가 가져온 약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보자들의 말처럼 趙秉甲의 둘째 아들 趙岡熙는 日帝시대 「언론인 趙岡熙」와 동일인물인 것이 확실해 보였다. 국립도서관 자료 조회 사이트에서 趙岡熙가 다녔던 「京城日報·每日申報·東亞日報·時代日報·東光新聞·全北日報·中央日報」를 찾아봤다. 이 신문들의 기사 검색창에 「趙岡熙」라는 이름을 넣자 20여 건의 자료가 검색됐다.
 
  가장 먼저 나온 자료는 東亞日報 社史(사사)였다.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를 언제 다녔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었다.
 
  東亞日報 社史에 따르면 趙岡熙는 1925년 2~3월까지 東亞日報 사회부 기자를 지냈다. 따라서 趙岡熙가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를 다녔다면, 그 시기는 선린상업을 졸업한 1917년이나 1918년(趙岡熙는 1889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18세나 19세에 졸업했다고 추정함)부터 1925년 1월까지 7~8년 정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東亞日報를 퇴사한 趙岡熙는 時代日報(1925년 4월 추정~1926년 7월9일), 東光新聞(1928년 9월14일 입사~ 퇴사 일자 不明)을 거쳐 1954년 4월3일 中央日報(현 중앙일보와는 다른 신문사임) 교정부장, 1954년 6월3일 논설위원을 지낸 것으로 나와 있다. 제보자 李모씨가 말했던 趙岡熙 약력에 나와 있는 每日申報 충남지사장, 全北日報 편집고문 등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趙岡熙가 다녔던 京城日報와 每日申報가 총독부 기관지였다는 제보자 李씨의 말이 떠올라, 京城日報와 每日申報에 대한 자료를 검색했다. 많은 자료 가운데, 한국외국어大 鄭晉錫(정진석·67) 명예교수의 저서 「언론조선총독부」가 이 신문들을 자세하게 분석해 놓았다. 「언론조선총독부」에 따르면,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는 총독부의 기관지였으며, 그 가운데 중심 역할을 맡은 것은 京城日報였다. 이 신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으로 부임한 후 침략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06년 9월1일 통감부 기관지로 창간했다.
 
  일본은 해외 식민지에서 기관신문을 발행했는데 조선 京城日報를 비롯해 대만의 「臺灣日日新報」, 만주의 「滿洲日日新聞」, 사할린의 「樺太日日新聞」이 있다.
 
 
  『언론인 趙岡熙가 趙秉甲 아들』
 
  책을 보고 난 후, 鄭晉錫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鄭晉錫 교수는 「언론인 趙岡熙」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었다.
 
  趙岡熙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鄭晉錫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鄭교수는 제보자 李씨와 마찬가지로 여러 문헌에서 趙岡熙씨에 대한 자료를 뽑아 놓았다. 鄭교수는 두 시간에 걸쳐 일제 강점기의 親日신문 역사에 대해서 설명했다.
 
  ─月刊朝鮮에 들어온 제보와 여러 자료를 비교해 보니, 언론인 趙岡熙가 趙秉甲의 아들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제가 평생 동안 신문을 연구해 왔기 때문에, 언론인 趙岡熙씨는 알았지만 그가 趙秉甲의 아들인지, 趙己淑 前 홍보수석의 祖父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月刊朝鮮 11월호를 보고 난 후에 「동일인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를 안다는 제보자들의 말과 「대한신문연감」에 나오는 그의 약력이 일치하는 것을 볼 때, 동일인물이 확실하겠네요』
 
  ─지난해 11월호에 나오는 趙秉甲 기사를 보셨군요.
 
  『그럼요. 趙己淑 前 수석과 趙秉甲의 관계를 밝힌 그 기사 잘 봤어요. 月刊朝鮮에서 드라이하게 팩트만을 다루려고 애썼더군요. 趙秉甲이 아무리 惡人(악인)이라고 해도 그런 先祖를 뒀다는 이유만으로 매도해서는 안 됩니다. 흥분하지 말고 있는 사실만을 다루는 모습이 언론의 바람직한 모습이에요』
 
  ─趙己淑 前 홍보수석과 일부 左派(좌파) 언론·지식인들은 月刊朝鮮 기사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좌파들이 啓礎 方應謨(계초 방응모)나 여러 우익 인사들이 일제下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행한 일부 親日 행적을 문제 삼아 벌떼처럼 공격해 왔습니다. 당시 상황과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죠. 月刊朝鮮이 언론으로서 당연히 보도해야 할 사안을 신중히 보도했다고 봅니다』
 
  ─趙岡熙는 학교를 졸업하고 京城日報와 每日申報 기자를 지냈더군요. 두 신문사는 어떤 신문사입니까.
 
  『두 신문은 日帝시대 총독부 기관지였습니다.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후 총독부는 3개 언어로 기관지를 발행했습니다. 日語 「京城日報」, 한국어 「每日申報」, 영어 「서울 프레스」가 그것입니다.
 
  이 3개 기관지는 韓日합방 이전에는 각기 별개의 신문사로 창간되었으나 합방 후에는 통합과 분리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의 한국침략을 선전·홍보하고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논조를 폈습니다. 趙岡熙씨는 대표적인 총독부 기관지 두 곳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이죠』
 
 
 
『京城日報·每日申報는 「제2의 조선총독부」』

 
趙岡熙가 時代日報 정치부장 당시 썼던 기사. 한국인이 이름을 짓는 방법에 대해서 日語로 설명했다.
  ─일본이 총독부 기관지를 3개나 만들 정도로 신문에 功(공)을 들였나 봅니다.
 
  『일본은 한국침략과 통치의 수단으로 언론의 역할을 매우 중요시 여겼습니다. 통감부와 총독부는 한국에서 언론사를 직접 경영하거나 親日 언론을 육성해 여론을 조작하고 침략을 정당화했습니다. 반면 朝鮮日報와 東亞日報 같은 항일 언론은 탄압했습니다. 日帝 침략 초기부터 패망할 때까지 시대에 따라 전략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基調(기조)는 같았어요』
 
  ─京城日報의 당시 위세가 대단했겠습니다.
 
  『그렇지요. 1920년대 이후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대사 등 화려한 경력을 지닌 직업 외교관, 귀족원 의원, 縣(현)의 지사급 등 거물급이 임명될 정도로 京城日報의 정치적 비중이 컸으며, 총독부 「관보」에 버금가는 권위를 부여했어요. 京城日報는 총독과 정무총감 등 총독부 최고위 통치자에게 機密費(기밀비·특별판공비)를 전달하고 총독이 교체될 때는 기밀비가 인계되는 관행까지 있어 이 신문은 「제2의 조선총독부」라 할 수도 있을 정도였어요』
 
  日帝 치하 한국 언론계에서 京城日報가 차지하는 위상은 막강했다. 京城日報는 韓日합방 후 韓末 최대의 민족지였던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를 통합하여 직접 경영했다.
 
  鄭교수는 『朝鮮日報·東亞日報·時代日報(후에 中外日報·中央日報)의 3개 신문을 민간지로 불렀던 것은 京城日報·每日申報라는 총독부의 기관지와 대비되는 용어였다』고 했다.
 
  ─每日申報와 京城日報는 같은 회사라고 보면 되겠네요.
 
  『네, 1938년 4월19일 每日申報가 京城日報로부터 독립된 법인으로 분리될 때까지는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는 하나의 신문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京城日報 사장을 비롯해 일본인 임원진이 每日申報 임원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東亞日報 社史에 보면, 趙岡熙는 東亞日報 기자를 짧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東亞日報 社史 425페이지를 보면 趙岡熙씨는 1925년 2월부터 3월까지 2개월 동안 東亞日報 기자를 한 것으로 나옵니다. 趙岡熙씨가 東亞日報에 왜 그렇게 잠깐 머물렀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東亞日報는 당시 경영이 잘돼서 기자들에 대한 대우가 무척 좋았습니다. 당시 3大 민간지였던 朝鮮日報·時代日報보다 기자들 보수가 훨씬 좋았어요.
 
  그런데 趙岡熙씨가 이후 다녔던 신문사들은 東亞日報보다 못하거나, 전형적인 親日 신문사거든요. 그 양반이 왜 東亞日報에서 2개월을 못 채우고 떠났는지 궁금합니다』
 
 
  「鐵筆俱樂部 사건」 주동
 
  趙岡熙는 東亞日報 퇴직 후인 1925년 5월 「언문신문사건」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鐵筆俱樂部(철필구락부) 사건」의 중심에서 활동하게 된다.
 
  鐵筆俱樂部는 1924년 11월19일 사회부 기자들이 결성한 단체이다. 이보다 앞서 汎언론인 단체로는 「無名會(무명회)」가 있었으나 당시 사회부 기자들은 「기자 중의 기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無名會 외에 그들만의 독자적인 단체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총독부의 강압적인 통치로 정치가 실종됐던 당시로서는 정치부·경제부 기자보다 사건을 좇는 사회부 기자가 더 활기 있고 기자로서의 사명을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었다.
 
  鐵筆俱樂部는 이듬해인 1925년 5월20일 임시 총회를 열고 회원들의 급료 인상을 각 신문사에 요구하기로 결의했다. 우리나라 언론 사상 최초로 기자단체가 급료인상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1931년 5월에 발행된 잡지 「삼천리」에는 鐵筆俱樂部가 정한 급료 인상의 액수가 최저 80원이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의 신문사 상황에서는 터무니없이 높은 액수였다. 鄭晉錫 교수의 저서 「역사와 언론인」에 따르면, 1932년 東亞日報의 급료수준은 편집국 부장 월급이 80~85원 선이었다. 사장인 송진우가 250원, 영업국장 겸 「新東亞」 발행인 양원모 170원, 편집국장 이광수 150원, 국장대리 설의식 100원이었다. 당시 80원의 월급은 군수와 비슷했고, 총독부 관리와 비교해도 못하지 않았다.
 
 
  기자들, 趙岡熙 집에서 파업 대책 논의
 
  1925년에 「최저 80원」을 요구한 鐵筆俱樂部의 요구에 3大 민간지 경영자들은 난색을 표했다. 그 가운데 東亞日報 社主 仁村 金性洙(인촌 김성수)는 즉석에서 이 요구를 거절했다. 鐵筆俱樂部 측은 東亞日報의 태도가 무성의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東亞日報 사회부 기자 전원이 5월22일 즉시 파업에 돌입했다.
 
  회사는 5월24일 오전 10시까지 출근하지 않은 기자를 해임했는데, 김동환·임원근·유완희·안석주·심대섭 등 다섯 명이었다. 이에 따라 鐵筆俱樂部 회원들은 그날 밤 즉시 대책회의를 갖는데, 대책회의 장소가 종로의 趙岡熙씨 집이었다. 기자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찾아낸 1925년 5월25일 경성 종로경찰서장의 정보보고 문건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日語와 한자로 쓰여 있는 해당 문건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25년 5월24일 밤 9시 趙岡熙의 집에 朝鮮日報 기자 이석 이하 鐵筆俱樂部 소속기자 15명이 모여서 언문신문사건 동맹파업에 관해서 논의했다. 이들은 파업을 위한 실행위원 7명을 뽑고, 향후 활동 방향과 대책에 대해서 논했다. 실행위원─朝鮮日報: 김단야·김달진·이석, 東亞日報: 임원근·유완희, 時代日報: 강호·조이환>
 
京城日報와 每日申報의 역대 일본인 사장들. 이들은 식민지 조선의 `언론 총독들이었다. 趙岡熙는 京城日報와 每日申報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고, 每日申報 충남지사장을 지냈다.
 
  時代日報 발행 중단 한 달 前 퇴사
 
  ─趙岡熙가 東亞日報에서 1925년 3월에 퇴사했는데, 여전히 鐵筆俱樂部 회원으로 활동한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趙岡熙가 정확히 언제 時代日報에 들어갔는지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東亞日報에서 퇴사한 후 바로 時代日報에 들어가 사회부장을 했습니다. 時代日報는 1924년 六堂 崔南善(육당 최남선)이 창간한 신문으로 趙岡熙씨가 東亞日報에서 時代日報로 들어간 1925년에는 사장이 碧初 洪命熹(벽초 홍명희)였어요. 鐵筆俱樂部 사건으로 東亞日報에서 퇴사한 詩人 김동환이 그해 趙岡熙씨가 부장으로 있던 사회부에 입사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확인한 잡지 「개벽」 제63호(1925년 11월1일 발행)의 在京言論機關一覽(재경언론기관일람)에 따르면, 趙岡熙는 1925년에 時代日報 정치부장으로 일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때 時代日報 편집국장이 홍명희, 사회부장이 소설가 현진건, 문예부 기자에 김기진 등으로 돼 있다.
 
  같은 기사에 朝鮮日報는 ▲社長 李商在(이상재) ▲常務理事 申錫禹(신석우), 曺?鉉(조설현), 白寬洙(백관수), 安在鴻(안재홍), 崔益善(최익선) ▲主筆 安在鴻 ▲營業局長 崔益善 ▲編輯局長 金東成, 同顧問 閔秦瑗 등으로 나와 있다.
 
  東亞日報를 떠나 時代日報에 둥지를 틀었던 趙岡熙는 약 1년 4개월 만인 1926년 7월9일 時代日報에 다음과 같은 퇴사의 변을 남기고 퇴사한다.
 
  <眷愛(권애)를 偏蒙(편몽)하였슴을 退社(퇴사)에 際(제)하야 깁히 感謝(감사)드리오며 今後(금후)에도 倍前愛護(배전애호)하심을 바랍니다>
 
趙岡熙는 詩人 김동환(왼쪽), 사회주의자인 김단야(오른쪽)와 함께 한국 최초의 기자 파업 사건이었던 「철필구락부 사건」을 주동했다.
  ─東亞日報와 마찬가지로 時代日報에서도 금방 퇴사했군요.
 
  『경영 상태가 좋았던 東亞日報에서 금방 나온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時代日報는 당시 경영이 어려워서 기자들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재직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趙岡熙씨가 그만둔 지 한 달 후 時代日報는 발행을 중단했습니다. 추측컨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 時代日報가 다른 신문사로 변경하면서, 당시 기자들은 그대로 時代日報에 있었는데. 趙岡熙씨는 특이하게 그만둔 것으로 나오지요』
 
  「언론조선총독부」의 時代日報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時代日報」는 1926년 8월 중순 이후에는 발행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이상협이 9월18일자로 총독부로부터 「中外日報」라는 제호의 발행 허가를 얻어 11월15일부터 새 신문을 창간했다. 그러나 「時代日報」 사원들은 거의 그대로 유임하여 金東煥(김동환·시인)은 「中外日報」에 근무하게 되었다>
 
  時代日報 기자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았던 것에 비해, 趙岡熙는 신문사 발행 중단 한 달 전에 時代日報를 떠났다. 반면 함께 東亞日報에서 나왔던 시인 金東煥은 時代日報의 후신인 中外日報에서 월급도 받지 못하고 다른 직원들과 함께 고생한 것에 대비되는 대목이다. 이후 趙岡熙는 광복 전까지 親日언론과 親日신문에서 승승장구한다.
 
 
  親日언론 동광신문사 편집국장 등 역임
 
「철필구락부 사건」에 대한 경성 종로경찰서장의 정보보고 문건.
  ─교수님이 준비하신 자료를 보면, 趙岡熙는 時代日報를 나와서 「조선사상통신사」라는 곳에 들어갑니다. 조선사상통신사는 어떤 회사입니까.
 
  『일본인이 경영하던 통신사였으며, 한국어로 발행되는 신문·잡지·저술 등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연구자료로 제공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습니다. 당연히 親日 언론사라고 할 수 있지요. 趙岡熙씨는 여기서도 잠깐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28년 9월14일 또 다른 親日 신문인 東光新聞社에 입사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냅니다』
 
  전북 전주에서 발행된 東光新聞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全北日報의 자매지 형식으로 1920년 11월18일에 창간되어 한국어로 발행된 일간지였다. 사장은 全北日報 사장인 일본인이 겸했고, 편집국장 또는 주필은 한국인이 맡았다. 東光新聞은 창간 후 母紙인 全北日報에 부속되어 명맥을 이어 오다가 1928년 9월20일 續刊(속간)된다. 趙岡熙가 9월14일 입사한 것은 續刊을 위한 경력기자 스카우트 형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每日申報 충남지사장 지내
 
  東光新聞에 편집국장 겸 주필로 입사한 趙岡熙는 이후 여러 신문사를 轉轉(전전)한다. 그는 기자 생활을 시작한 每日申報에 다시 입사해, 참사·충남지사장을 지내다가 東光新聞의 母회사인 全北日報에서 편집고문으로 일하다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인 1945년 10월 趙岡熙는 「자유신문」이라는 곳의 편집부국장을 역임했으며, 時代日報의 후신인 中央日報에서 1954년 교정부장·논설위원을 끝으로 언론계에서 은퇴했다. 趙岡熙가 신문사를 은퇴한 이후의 행적을 찾아봤지만, 그의 아버지 趙秉甲처럼 죽기 전 10여 년의 행적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한국잡지협회의 자료에서 趙岡熙가 은퇴한 이후, 자신의 기자 생활을 정리한 글을 잡지에 실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잡지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趙岡熙는 1954년 「實話(실화)」라는 잡지의 8월 납량특대호에 「新聞生活三十年記(신문생활삼십년기) 人生流轉半生(인생유전반생)의 交響曲(교향곡)」이라는 글을 실었다. 趙岡熙의 글을 실은 해당 잡지의 광고가 東亞日報, 京鄕新聞, 平和新聞 1954년 7월22일자, 7월25일자, 8월26일자에 실렸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었다.
 
  趙岡熙의 글이 실린 잡지 「實話」의 1954년 8월版(판)은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었다.
 
 
  日帝의 비행기 헌납 운동에 협조
 
  기자는 趙岡熙가 또 다른 親日단체인 「大同社」의 비행기 헌납 운동에 참여해 비행기 헌납 모금 운동을 도왔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문서의 제목은 「치안상황(昭和 12년) 제26~43보」(1937년 10월8일)로 「특수단체동향」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앞서 봤던 경성 종로경찰서장의 정보보고 문건과 비슷한 일본경찰 내부 문건으로 추측된다.
 
  日語로 돼 있는 문건의 여섯 페이지 가운데 趙岡熙와 관련된 한 장 반 분량을 요약, 소개하기로 한다.
 
  <1. 大同社의 비행기 헌납운동
 
  충청남도 대전府 소재 大同社 총본부에서는 사변 발발 이래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하기 위해 「大同號」 헌납기성회를 조직했다. 동회 간부 충남 張志鄕(장지향) 등은 사업실현을 위해 (…) (치안상황 제20보) 9월30일 마감까지 각지로부터 신청액을 받았으나 의외로 가까스로 3810원을 넘긴 것으로 나타나는 등 각 지부의 반응은 지극히 냉담했다. 이러한 가운데 경남과 같은 지역에 대해 구체적 활동을 하기 위해 만일 본 계획이 용두사미로 끝난다면 동사의 大恥辱(대치욕)일 것이므로 경남 진주 간부 강상호는 크게 낭패감이 들어 수일 전부터 경남도 각지를 순회 독려하였다.
 
  張志鄕은 10월1일 헌금독려 통지서를 각지의 大同社 지부에 발송했고 每日申報 대전지국장 趙岡熙를 방문, 신문을 통해 (大同社의) 일반사원도 참여하도록(?) 하는 등 노력하고 있다.
 
  목하의 정황에 대해서는 예정한(목표로 한) 5만3300원의 모금은 대단히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趙秉甲의 큰아들은 日帝 때 면장 지내
 
1937년 中日전쟁 당시 親日단체 大同社는 충청도에서 비행기를 헌납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했다. 문건에는「당시 매일신보 충남지사장 趙岡熙에게 모금독려를 위한 기사 게재를 요청했다」고 적혀 있다.
  趙秉甲의 큰아들인 趙瓚熙(조찬희)는 어떻게 살았을까. 제보자들은 그가 日帝시대 때 면장과 군수를 지냈다고 했다. 하지만 趙瓚熙가 면장과 군수를 했다는 증거 자료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자는 국사편찬위원회·독립기념관·민족문제연구소·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서 趙瓚熙에 대한 행적을 찾아봤다.
 
  국사편찬위원회에 있는 기록에 의하면 趙瓚熙는 1920년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장을 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趙瓚熙의 출생연도가 1880년이므로 그의 나이 40세였다. 나이 「불혹」에 면장을 했으면, 당시 기준으로 봐도 출세가도를 달리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동생 趙岡熙는 京城日報나 每日申報 기자를 하고 있었다. 탐관오리 趙秉甲의 두 아들은, 1920년 각각 日帝의 공무원과 총독부 기관지 기자였던 것이다.
 
  제보자들이 「趙瓚熙가 면장과 군수를 했다」고 한 것은 여기서 나온 듯하다. 하지만 그 이전과 이후에 趙瓚熙가 어떤 관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비봉면사무소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비봉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충남도령 제3호) 서상·서하면 일원과 홍주군 얼방면 일부를 합병」해 이루어졌다. 趙瓚熙가 면장을 하던 1920년의 규모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2001년 12월 말 기준으로 인구 2870명(1059가구)의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다.
 
  혹시 비봉면사무소에 역대 면장들에 대한 기록이 있지 않을까 해서 연락해 봤지만, 『日帝시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서 趙瓚熙가 1909년 5월22일자 「皇城新聞(황성신문)」에 자신의 부친 趙秉甲을 변호하는 광고를 실은 사실을 발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양군 거주하는 명의주라는 사람이 광고하기를 학교에 반대하고 무고하게 이것은 밝은 안목으로서 한번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趙선비秉甲씨가 이 일에 대해서 서울에 와서 주선했다고 하는 것은 趙秉甲은 저의 父親인데 병이 들어서 금년 2월 초에 병 치료차 서울에 상경했지만, 학교의 일은 父親이 서울에 와서 치료하기보다 앞으로 일어날 때의 것이니 어찌 미리 알고서 주선하겠느냐.
 
  이것은 본인의 교임을 미워하거나 싫어해서 아무 관계없는 老親(노친)을 감정적으로 대하거나, 모욕을 주는 것이니, 세상에 아버지 없는 사람이 없거늘 그 자식에게 유감이 있어서 그 아버지를 무고하는 것은 사람의 자식이 된 도리로서 어찌 차마 그렇게 하는가. 세상 사람들아 널리 알고 알아라.
 
  충청남도 청양군에 사는 趙瓚熙>
 
 
  趙瓚熙, 皇城新聞에 부친 趙秉甲 변호 광고 실어
 
  趙瓚熙가 광고에서 말한 사건은 어떤 것인지 전후 사정이 나와 있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사의 내용을 보면 趙瓚熙의 교직임명을 반대하는 이들이 부친 趙秉甲까지 끌어대 비판하자 趙瓚熙가 부친 趙秉甲을 변호하는 광고를 낸 것으로 보인다. 1899년 「승정원일기」를 끝으로 각종 자료에서 사라졌던 趙秉甲의 이름이 10년 만에 다시 기록에 나타난 것이다.
 
  이 광고대로라면 趙秉甲은 1909년에 臥病(와병)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취재한 자료를 종합해 보면 趙秉甲은 1912년에 사망했고 아들 두 명에 딸 한 명을 뒀다. 그의 둘째 아들 趙岡熙는 1966년에 사망했고 1男1女를 뒀다. 趙岡熙의 외아들 重完(중완)씨는 趙己淑 前 홍보수석의 아버지다. 하지만 趙秉甲의 큰아들 趙瓚熙는 언제 사망했는지, 자녀가 몇 명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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