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世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1938년 여름이 되자 長沙에도 일본군의 공습이 시작되어 金九는 臨時政府와 120여 명 대가족을 피란시켜야 했다. 在美同胞들과의 통신을 확보하기 위하여 廣東省으로 갔으나, 중요 항구가 日本軍에 점령되어 中國政府가 있는 重慶으로 가기로 했다. 대가족 일행은 廣東을 떠나 日本軍의 공습을 받으면서 기차로 이동했다가, 木船을 타고 40여 일 동안 강물을 거슬러 오르고, 1주일 넘게 자동차를 타고 하여 重慶 가까이의 江에 도착했다.
重慶에 온 金九는 獨立運動단체의 통합운동에 나섰다. 먼저 金元鳳과 함께 「同志同胞에게 보내는 公開信」을 발표하고, 外交宣傳의 필요성을 강조한 李承晩의 주장을 반박하는 편지를 써서 동지회 중앙부장 金利濟에게 보냈다.
1939년 4월에 워싱턴에 도착한 李承晩은 大韓國民委員部 사무소를 개설하고, 韓國親友會를 다시 조직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워싱턴에는 앞으로 그의 政敵이 될 韓吉洙가 와서 中韓民衆同盟團 대표 자격으로 별도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여름 동안 하와이로 돌아온 李承晩은 金九의 편지내용을 반박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학교와 교회와 동지회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감독할 「顧問部」를 구성하고 11월에 다시 워싱턴으로 갔다.
(1) 臨時政府 大家族의 「萬里長征」
중-일전쟁은 지구전으로 계속되었다. 일본은 중국주재 독일대사 트라우트만(Oskar Paul Trautmann)을 중개로 한 화평공작이 실패하자, 1938년 1월16일에 『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조기종전을 포기했고, 국민정부는 철저항전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일본은 1937년 말까지 16개 사단 50만 대군을 중국에 투입하고 있었으나, 워낙 넓은 대륙이었으므로 일본군의 점령구역은 天津과 北京 사이 및 양자강 하류의 3각지대를 중심으로 한 철도 연변의 대도시를 잇는 「점과 선」에 한정되었고, 그나마 이 연결선은 중국군과 중공군(8로군)의 유격작전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중국군에 유인되어 4월6일에 台兒莊(태아장)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전면적인 침공을 재개하여 4월19일에는 徐州를 함락하고, 8월에는 漢口공략작전을 감행했다.
長沙에도 일본군비행기의 공습이 심해졌다. 金九는 3당 간부들과 임시정부의 이동문제를 논의했다. 廣東省으로 가서 거기에서 다시 廣西省의 南寧이나 雲南省 방면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래야 재미동포들과의 연락망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장사에도 이미 피란민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서, 100여 명의 대가족과 산처럼 쌓인 짐을 가지고는 멀리는 고사하고 가까운 시골로 옮기기도 매우 힘든 형편이었다.
金九는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호남성 주석 張治中을 찾아갔다. 장치중은 廣州로 가는 기차 한 칸을 무료로 이용하도록 주선해 주고, 광동성 주석 吳鐵城에게 친필로 소개장도 써주었다.1) 金九는 대가족 일행보다 하루 먼저 장사를 출발하여 광주로 갔다. 李東寧과 李始榮을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과 100여 명의 대가족은 7월17일 이른 새벽에 광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임시정부 대가족은 흔들리는 좁은 기차를 타고 사흘 동안 가야 했다. 대가족의 피란 모습도 가지각색이었다. 한국국민당 감사 楊明鎭(楊宇朝)은 갓난아이를 광주리에 담아가지고 기차에 올랐다. 가다가 갑자기 일본 비행기의 공습을 받기도 했다. 그럴 때면 기차는 멈추고 사람들은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숨어야 했다. 숨을 죽이며 숨어 있다가 비행기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그렇게 가다가 섰다가 하면서 달렸다. 기차가 도시를 지날 때에는 가족별로 배급받은 돈을 가지고 내려서 먹을 것을 사왔다.2)
사흘 동안의 지루한 기차여행 끝에 7월20일 이른 아침에 임시정부 대가족은 광주의 황사정거장에 도착했다. 정거장에 막 도착했을 때에 또 한 번 일본기의 공습을 받았다. 중국군에 재직하고 있는 李俊植과 蔡元凱의 알선으로 東山栢園을 임시정부의 판공처로 정하고, 아세아여관을 정부와 의정원 및 3당 간부들과 그 가족들의 숙소로 정했다.3)
임시정부 대가족이 무사히 광주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金九는 바로 홍콩으로 갔다. 남경을 떠나올 때에 安恭根에게 시켰다가 실패했던 安重根 부인을 데려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홍콩에 도착한 金九는 안공근·안정근 형제를 비롯하여 비밀공작 임무를 띠고 상해로 가는 柳絮(유서)와 함께 안중근 부인 문제를 상의했다. 金九는 안중근 부인을 상해에서 데려와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으나, 세 사람은 난색을 표했다. 金九는 세 사람을 크게 꾸짖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상해가 완전히 일본군의 점령 아래 놓여 있어서 안중근 부인을 데려오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4)
國民會에 蔣介石에게 감사편지 보내라고 부탁
광주로 돌아온 金九는 곧바로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앞으로 임시정부의 이동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金九는 편지에서 임시정부와 대가족이 광주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보살펴 준 蔣介石 총재와 장치중 주석에게 대한인국민회가 감사편지를 보내 줄 것을 당부했다.
〈우리 임시정부는 장사 전쟁구역을 피해 나오기 위하야 국무기관과 및 난민 수백 명을 모지로 옮겨갈 때에 수십만 중국난민이 일시에 몰려가는 가운데 기차표를 사가졌어도 차를 탈 수가 없었으므로 구(九)가 병든 몸을 기동하야 호남성 정부 주석 장치중 장군을 가보고 그 사정을 말하고 원조를 청하였더니, 장치중 장군이 그 환란 중에서도 자못 친절히 대접하야 객차 1열을 무료로 공급하고 또 특히 운수사령으로 하여금 은밀 보호케 하였으므로 임시정부 위원과 및 난민 일행이 모두 무사히 옮겨감을 얻었으니, 바라건대 귀 국민회로서 장개석 총재와 장치중 주석에게 글을 보내어 그 후의를 감사하여 주시오.〉5)
중국국민당은 3월29일에 武漢[武昌과 漢口]에서 열린 임시대표대회에서 총재제를 채택하고 장개석을 초대총재로 선출했었다. 金九의 편지를 받은 대한인국민회는 9월14일에 중앙상무위원회를 열고 金九의 요구대로 장개석과 장치중에게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 김호」 명의로 감사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장개석에게 보낸 감사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최근 김구 동지의 내함을 받아본즉 말하기를, 한국 임시정부는 전쟁구역을 피해 나오기 위하야 국무기관과 및 난민 수백 명을 가져 장사로부터 모지로 옮겨 갈 때에 다행히 귀국정부의 보호를 입어 유리전패의 괴로움을 면케 하였고, 또 작년에 남경으로부터 장사로 옮겨갈 때에 또한 군대 가운데 호송하야 환란을 같이 한 것이 참 고마운 일이라 하얏더이다. 이 같은 우대를 우리 방국유민으로 받으매 느낌이 지극하야 반드시 보답하기를 맹세하옵고, 이제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결의하기를 미국, 멕시코 및 쿠바에 있는 동지를 통솔하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분투하기로 하얏사오며, 아울러 비나니 위좌(각하)는 중한(中韓) 민족의 자력갱생을 위하야 힘써 보중하소서.〉6)
金九는 대한인국민회 앞으로 보낸 편지와는 별도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洪焉(홍언)에게도 임시정부가 무사히 광주에 도착한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는 한국독립운동단체의 통일문제와 남목청사건에 대한 미주동포들의 여론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다고 적고 있어서 흥미롭다.7) 金九는 그만큼 재미동포들의 자신에 대한 평판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金九의 편지와는 별도로 임시정부 재무부에서도 임시정부의 이동사실을 알리고 미주동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대한인국민회 앞으로 보냈는데, 국민회 상무부는 9월15일에 750달러를 임시정부 재무부로 송금했다.8)
貴陽에서 본 苗族들의 행색
광주에도 일본군의 공습이 심해졌다. 金九는 광주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인 9월 하순에 대가족과 郭樂園 여사를 광주에서 서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佛山으로 옮기고, 임시정부 판공처는 南海縣城으로 옮겨서 사무원들만 근무하게 했다.9) 임시정부가 중국정부의 전시수도가 있는 重慶으로 가지 않고 남하하여 광동으로 온 것은 항구를 이용하여 미주동포들과의 통신을 유지하고, 최악의 경우에 하와이로 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중요 항구가 거의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나머지 항구마저 위험하여 통신마저 단절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중경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10) 金九는 장개석에게 임시정부도 중경으로 데려가 줄 것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고, 장개석도 중경으로 오라는 답전을 보내왔다.11) 金九는 9월30일에 曹成煥과 羅泰燮을 대동하고 다시 장사로 가서 장치중 주석을 면회하고 중경행의 편의를 부탁했다.12) 장치중은 중경행 차표 석 장과 貴州省 주석 吳鼎昌 앞으로 소개편지를 써주었다.13)
광주를 출발한 지 열흘 만에 金九 일행은 귀주성의 貴陽에 도착했다. 산중에 위치한 소도시 귀양은 돌이 많고 흙이 적은 척박한 고장이었다. 농가에서 흙을 져다가 바위 위에 깔고 씨를 뿌린 것을 보아도 흙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 수 있었다. 귀양시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었고 얼굴색도 굶주린 사람들처럼 누르스름했다. 그들은 귀주성을 비롯하여 중국 서남부 일대에 흩어져 사는 苗族(묘족)이었다. 金九는 묘족의 풍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한족보다 특히 묘족의 형색이 극히 궁핍하고 행동이 야만스러워 보였다. 중국말을 모르는 내가 언어로 한족과 묘족을 구별하기는 어려웠으나, 묘족 여자는 의복으로 구별하고, 묘족 남자는 야만스러운 눈빛으로 분별할 수 있었는데, 한족화한 묘족들도 많은 듯했다.
묘족은 4,000여 년 전 三苗씨의 자손이니, 삼묘 씨는 전생에 무슨 업보가 있기로 자손들이 누천년 역사상에 특출한 인물이 있다는 역사기록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는 삼묘 씨라는 것이 고대 명칭으로 잔존할 뿐 근대에는 없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묘족도 수십 수백 종별로 변화하여 호남, 광동, 광서, 운남, 귀주, 사천, 서강 등에 널리 퍼져 있다. 근대에 한족화한 묘족 중 영걸이 있다는데, 풍문에 의하면 광서성의 白崇禧 장군과 운남성의 주석 龍雲 등이 묘족이라 한다. 그러나 묘족의 선조를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풍문의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14)
靑年들은 대포 터지는 속을 뚫고 廣州 탈출
金九는 귀양에서 여드레 동안 머물렀다. 중경에 도착한 것은 광주를 떠난 지 26일째 되는 10월26일이었다.15) 임시정부 가족들이 불산으로 옮길 때에는 그곳에서 오래 머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10월 중순이 되자 일본군이 불산 근처까지 진격해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내를 빠져나가는 시민들로 시내는 온통 야단법석이었다. 불산이 위험해지자 임시정부는 광서성 당국과 임시정부 이동 문제를 상의했다. 광서성 당국에서는 광서성의 수부인 桂林이나 柳州 가운데 한 곳을 택하라고 해서 유주를 택했다. 중경과의 거리가 유주가 계림보다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16) 광주는 10월21일에 일본군에 함락되고, 이어 10월27일에는 무한이 함락되었다. 광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金九는 대가족의 안부가 몹시 궁금했다.
임시정부 대가족은 오철성의 호의로 三水까지 가는 기차 한 칸을 배정받았다. 대가족 일행은 짐을 줄일대로 줄여서 불산역으로 집결했다. 기차역은 피란민들로 붐볐다. 대가족 일행은 위수사령부의 허가서가 도착하지 않아서 출발을 못하다가 저녁 늦게야 嚴恒燮이 허가서를 받아가지고 와서 가까스로 기차에 올랐다. 멀리서 일본군의 기관총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17)
대가족 일행을 태운 기차는 새벽 4시30분에 불산역을 출발했다.18) 광주가 일본군에 함락되기 하루 전인 10월20일이었다. 이때에 미처 탈출하지 못했던 동포 청년 수십 명은 광주가 함락되던 날 대포가 터지는 것을 무릅쓰고 탈출했다.19) 임시정부는 대가족 일행이 피란하던 이야기를 미주동포에게 보낸 편지에 실감나게 적었다.
〈수십만 피란민이 저마다 살려고 쓸려 밀려 나오는 속에서 겨우 화차 한 량을 얻어 타고 오는 우리 일행은 사람은 200여 명이오 짐짝은 400여 건이다. 잠자리같이 날아오는 왜적 비행기 아래로 가는 화차는 기적소리도 내지 못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달아나는데, 월한선 중간에 와서는 왜적 비행기가 우리가 타고 가는 화차를 향하여 폭발탄을 떨어뜨렸다. 꽝 하는 소리가 진동할 때에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보다 30년간 환란 중에 끌고 다니던 임시정부의 기록 존안이 다 없어질 것을 위하여 정신이 아득하였다. 차는 그대로 가고 몸은 그대로 앉았기에 비로소 죽음을 면한 줄 알았다. 나중에 들으니 우리가 타고 가는 화차 전면 2리쯤 되는 곳에 멈추어 있던 화차와 또 후방 약 2리 가량에 있던 교량을 깨트렸다고 한다.
목적지에 이르고 보니 그 화려한 도시가 거의 타서 밭이 되었고, 무수한 인민의 사상은 너무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고 또 차마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시체 하나를 찾아 맞추다가 머리와 발과 손을 찾지 못함과 고기 한 점도 남지 아니하여 형적이 없는 주검도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왜적 비행기의 인도유린의 참상이다. 이 편지를 쓰는 때에도 왜적 비행기의 그 흉악한 소리를 듣고 앉았으매 아무리 진정한 대도 붓끝이 절로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우선 따라 다니는 노약이나 향촌으로 보내어 안돈을 시킨 후에 우리들은 전선에 있어 이왕 해 오던 일을 계속할 뿐이다.…〉20)
밧줄로 木船 끌고 江을 거슬러 올라
삼수는 광주와 연결되는 廣三철도의 서쪽 종착역이었다. 삼수에서 유주까지 가기 위해서는 중국의 4대 강의 하나인 珠江(주강)을 따라 배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중국정부 당국과 교섭하여 중국 제4로군 운수사령부의 삼수지부에서 대가족 일행의 모든 짐을 운반해 주기로 하고, 삼수현 정부에서는 큰 목선 한 척을 내어 주었다. 그 목선은 100여 명의 식구가 한꺼번에 타고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배 안에는 부엌·변소 등의 시설도 갖추어져 있고, 강물을 퍼올려 간단히 몸을 씻을 수 있는 목욕실도 있었다.21)
대가족 일행은 주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사나흘쯤 가다가 광서성 초입인 梧州에 도착하여 이틀 동안 머물었다. 광주에서 직접 떠난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오주에서부터는 물살이 세어서 목선 자체로는 강을 거슬러 오르기가 힘들기 때문에 기선이 끌고 가야 했다. 일행은 기선 한 척을 구해서 목선을 끌게 했다. 그런데 桂平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에 목선을 끌던 기선이 도망쳐 버렸다. 선금을 다 주고 윤선을 빌린 것이 화근이었다. 새로 기선을 구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계평에서부터는 龍江(용강)으로 접어들었는데, 용강은 주강보다 물살이 더욱 빨라서 기선도 더는 목선을 끌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청년들이 배에서 내려 밧줄을 배에 묶고 강변을 따라 목선을 끌고 올라갔다.22)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 대가족 일행은 삼수를 떠난 지 꼬박 40일을 배 위에서 보내고 나서 11월30에 유주에 도착했다.23)
中國政府가 지원해 준 차량 여섯 대로 大家族 옮겨와
金九는 임시정부 대가족 일행이 유주에 도착했다는 전보를 받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유주에 도착한 대가족 일행을 다시 중경으로 데려오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중경에서는 대가족이 집단적으로 거주할 집도 구하기 어려운데다가 일본군의 폭격도 위험했다. 그리하여 우선 중경에서 30리쯤 떨어져 있는 ?江(기강)으로 대가족과 짐을 임시로 옮기기로 했다.
유주에서 중경까지의 길은 광주에서 유주까지 오기보다 훨씬 어려웠다. 광주에서 유주까지는 40일 넘어 걸리기는 했으나 수로로 이동했기 때문에 수월했다. 그러나 유주에서 四川省까지는 수로와 철길이 통하지 않아서 자동차로 이동해야 했다. 자동차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피란민들이 밀려들어 당일 차표를 사도 서너 달 뒤에나 차를 탈 수 있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당 차비와 숙박비가 100원이나 되어 대가족 전체가 이동하기 위해서는 만원 돈이 필요했다.
金九가 무엇보다도 걱정한 것은 여든이 넘은 노모의 건강이었다. 고령의 노모가 험한 산길을 일주일 이상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임시정부 대가족 가운데 일흔 살 이상 된 사람이 여섯 명이나 있어서 비행기로 모셔올 생각도 해보았으나, 일인당 비행기 운임이 250원이나 되었으므로 그것 또한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24)
중국정부의 차량지원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정부도 차량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고 있었다. 군수품을 운반하는 데 1,000량의 차량도 부족한 형편인데 100량밖에 없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金九는 대가족 일행을 중경으로 옮기기 위해 중국정부의 교통부와 중국국민당 중앙당부에 교섭을 시작했다. 여러 차례 교섭한 끝에 자동차 여섯 대를 구하고 이사비용도 마련하여 유주로 내려 보내고, 기강에는 조성환을 보내어 대가족이 거처할 집과 가구 등을 준비하게 했다.25)
金九는 임시정부와 대가족 일행을 중경으로 옮기기 위하여 미주 동포들에게 긴급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金九의 편지를 받은 대한인국민회는 1939년 1월5일에 金九에게 500달러를 송금해 주었다.26)
이때에 金九는 미주 동포들의 답장을 받아보기 위해 날마다 우체국으로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유주에 있던 장남 仁이 갑자기 나타났다.
『유주에서 할머님이 병이 나셨는데, 빨리 중경에 가시겠다고 말씀하셔서 신이와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郭樂園 여사의 恨 많은 죽음
金九는 아들을 따라서 급히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갔다. 중경에 도착한 뒤에 金九는 儲奇門(저기문)거리 鴻賓여관 3층 25호에 묵고 있었는데,27) 곽낙원 여사는 金九가 묵는 여관 바로 맞은편에 와 있었다. 金九는 어머니를 모시고 홍빈여관으로 와서 하룻밤을 같이 지냈다.
다음날 金弘敍가 찾아와서 곽낙원 여사를 자기가 모시겠다고 자청하여 강 남쪽 아궁보 孫家花園에 있는 그의 집으로 옮겼다. 곽낙원 여사의 병은 광서지방의 풍토병인 인후증이었다. 병원에서는 나이가 많지 않으면 수술을 할 수도 있고 병이 초기이기만 해도 치료할 방법이 있겠으나, 그녀는 여든한 살의 고령이고 치료할 시기도 놓쳐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했다.
이때에 상해에 있을 때부터 金九를 따르던 劉振東 부부가 중경에 왔다. 상해 同濟大學을 졸업한 유진동은 ?嶺(고령)에서 폐병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일본군에 점령될 것을 예상하고 중경으로 온 것이었다. 유진동 부부는 모친을 잘 모시지 못하는 金九의 딱한 처지를 알고 곽낙원 여사를 자기네가 돌보겠다면서 金九더러는 마음 놓고 독립사업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그러나 유진동 부부가 도착했을 때에는 곽낙원 여사의 병세가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악화된 뒤였다.28) 그녀는 병이 깊어지자 자신도 마지막이라고 각오하고 金九에게 말했다.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에 나의 유골과 仁이 어미 유골도 가지고 돌아가서 고향에 묻어라』
그녀는 대가족 일행이 미처 기강에 다 도착하기 전인 4월26일 오전 10시50분에 恨 많은 생애를 마쳤다.29) 金九는 어머니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머님은 50여 년 고생하다가 자유 독립이 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극히 원통하게 돌아가셨다. 대한민국 21년(1939) 4월26일 손가화원 안에서 영영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셨다. 그곳에서 오리 가량 되는 和尙山 공동묘지에 석실을 만들어 어머님을 모셨다. 모친은 살아 생전에도 대가족 중 최고령인 관계로 존장 대접을 받으시더니, 돌아가신 뒤에도 매장지 부근에 현정경, 한일래 등 수십 명의 한인 연하자들의 「지하회장」인 듯싶다.〉30)
중국 교통부에서 제공해 준 차량 여섯 대에 나누어 탄 임시정부 대가족 120여 명은 1939년 4월6일에서 22일 사이에 유주를 출발하여 5월3일까지 모두 기강에 도착했다.31) 이들은 조성환이 얻어 놓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큰 집에 들었다. 그리고 시내와 가까운 강가에 따로 방 몇 개를 얻어서 임시정부 청사와 홀로 사는 국무위원들의 숙소로 썼다.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는 강소성을 출발하여 안휘성, 강서성, 호남성, 광동성, 광서성, 귀주성을 거쳐 사천성 기강에 이르는 장장 5000킬로미터의 피란길을 끝냈다. 그것은 중국공산당이 1934년에 국민정부군에 쫓기어 강서성 瑞金에서 陝西省(섬서성) 延安까지 이동한 1만2000킬로미터의 「장정」에 견줄 만한 대이동이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대가족 사이에서는 중국 대륙을 떠돈 피란길을 「만리장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32)
(2) 金元鳳과「同志同胞들에게 보내는 公開信」발표
중경에 도착한 金九는 임시정부 대가족을 중경으로 옮기는 일에 분주한 한편으로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운동을 다시 추진했다. 이때의 金九의 주장은 주의가 같은 단체끼리는 〈통합〉하고, 주의가 다른 단체와는 〈연합〉하자는 것이었다.33)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불신하여 그들과의 합작이나 통일전선을 거부해 온 金九가 이때에 이처럼 통합운동에 발벗고 나선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중-일전쟁에 따른 한국독립운동자들의 역량통합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그의 독립운동단체들에 대한 상황인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십년 염불에 도로아미타불격인데…』
〈우리 독립운동이 일어난 이래 각 단체가 우후죽순같이 만들어졌다가 거의 다 없어지고 내외지에 아직도 무력 유력은 별문제로 하고, 사회주의 방면에 한인공산당이 연해주 지방과 중국 관내외에 30여 개가 병립하여 암투하고, 민족운동단체는 국내는 헤아리지 않고 중국 관내외와 미주와 하와이를 합하면 근 20개가 되어 各立門戶하여 가지고, 明爭暗鬪 중에 동족애의 말살과 세인의 멸시 모두가 원치 않는 선물만 차지하게 되고, 어느 단체나 보암직한 단체는 한 개가 없으니 10년 염불에 도로아미타불 격인데, 객관적 주관적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改絃易轍(개현역철)을 않고서는 멸망도 우리로의 자멸도 못 되고 일본이 멸망하는 바람에 피멸의 지위밖에 튼튼히 내것 될 것이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34)
〈어찌하든지 현하 상태는 그대로 가지고 더 나가면 내적 외적으로 일호의 남은 희망이 없는데, 어찌하여 내적으로는 피차에 면상에 망국노 석 자를 각인하였으니, 누가 더 낫고 더 못하다는 것을 언급할 것 없으나, 지척에서 보는 중, 왜인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리까.…〉35)
이러한 통절한 상황인식은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자괴심과 책임감의 토로였다.
또한 金九가 통합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 데에는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통합된 역량을 對日항전에 이용하고자 한 중국정부의 강력한 요청도 작용했다. 조선혁명당의 간부였던 金學奎는 이때에 金九의 주동으로 추진된 통일운동은 〈중국정부의 발동〉에 의한 것이 되었다고 회고했다.36)
일본경찰의 정보보고는 金九가 金元鳳과 함께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 장개석의 직접적인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金九가 중경에 도착하고 한 달 뒤인 1938년 11월 말에 장개석이 金九를 만나서 김원봉과의 대동단결을 종용하고, 1940년 1월에는 계림에 있는 김원봉에게 전보를 쳐서 중경으로 오게 했다는 것이었다. 김원봉은 1월6일에 중경으로 와서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장 陣誠으로부터 장개석의 뜻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37) 그러나 이러한 기술을 확인할만한 다른 자료는 알려진 것이 없다.
또한 楠木廳 사건 뒤의 陳果夫의 태도변화도 金九로 하여금 통합운동에 열성을 쏟게 하는 자극제로 작용했던 것 같다. 중국국민당의 실권자로서 金九를 적극 지원해 왔던 陳果夫는 남목청 사건이 한국독립운동자들 사이의 내분이라는 데 대해 크게 실망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업무를 군사위원회로 이관시키기로 하고 자신을 보좌하여 실무를 담당하던 簫錚(소쟁)에게도 임시정부 지원업무에서 손을 떼도록 지시하고, 그 사실을 장개석에게 보고했다. 장개석은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하여 임시정부 지원업무를 군사위원회로 이관시키지 않고 중앙당부 비서처로 이관시키게 했다. 金九는 진과부가 임시정부 지원업무를 계속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38) 진과부는 단호했다. 그러자 金九는 장개석에게 진과부가 계속해서 임시정부 지원업무를 맡게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39)
朝鮮民族戰線聯盟과 朝鮮義勇隊
金九는 김원봉과의 합작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의 간부들이 탈퇴함으로써 민족혁명당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떨어져 나온 두 그룹과 함께 金九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를 결성하자, 김원봉은 공산주의 단체인 金星淑 등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무정부의 단체인 柳子明 등의 조선혁명자연맹과 연대하여 1937년 12월에 남경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약칭 민족전선)을 창설했었다.
그리고 이듬해 9월에는 민족혁명당을 탈당했던 崔昌益 등이 조직한 공산주의단체인 조선청년전위동맹도 조선민족전선연맹에 참가했다. 민족전선은 창립선언에서 연맹의 성격을 「계급전선」이나 「인민전선」이 아닌 「민족전선」이라고 천명하고, 그것은 또한 프랑스와 스페인 등의 국민전선과도 엄격히 구별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40) 조선민족전선연맹은 7개항의 기본강령과 20개항의 투쟁강령을 발표했는데, 투쟁강령에서 주목되는 것은 〈국내외 각지의 민족무장부대를 연합하여 통일된 민족혁명군대를 조직하여 민족해방투쟁을 실행한다〉고 하여 무장부대의 조직을 천명한 것이었다.41) 그리하여 1938년 10월10일에 漢口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는데, 그것은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인무장부대였다.
조선의용대는 이무렵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일본인 反戰主義者 아오야마 카즈오(靑山和夫)가 국민정부에 제안한 국제의용군 편성안과도 관련이 있었다. 아오야마는 국제의용군 계획을 제기하면서 중국에 있는 우수한 한인 약 70명으로 의용대를 편성하여 무한에 배치시킬 것을 건의했고, 국민당 정부는 아오야마의 안을 받아들여 무한에 있는 조선인 독립운동자들의 상황을 상세히 조사한 뒤에 민족전선 소속 청년 100여 명으로 의용대를 만들었던 것이다.42) 그리하여 조선의용대원들은 중국정부로부터 매달 30원(식비 20원, 공작비 10원)씩의 활동비를 지급받았다.43)
창설 당시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을 총대장으로 하는 총대부와 2개 區隊로 편성되었는데, 제1구대는 전원을 민족혁명당 당원들로, 제2구대는 조선청년전위동맹원들과 다른 단체 소속원들로 구성되었다. 100여 명이었던 조선의용대는 대원수가 점차 늘어나서 1939년 말에는 제3구대를 새로 편성했고, 1940년 2월에는 창설 당시보다 세 배가 늘어난 314명이 되었다.44) 창립 초기에 조선의용대는 중국 각 전쟁구역에 배치되어 반전 선전, 전투, 정보 수집, 포로 신문 및 적후 공작 등의 활동을 벌였다.45) 이러한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으로 의욕적인 무장부대조직을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결실을 보지 못했던 임시정부로서는 부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金九가 김원봉과 합작을 통하여 조선의용대를 임시정부 산하의 군대로 흡수하고자 기대했을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在美同胞들은 金元鳳과의 合作반대
金九는 통합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민족전선 가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남안의 아궁보 손가화원을 찾아갔다.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지 보름 만인 1938년 10월25일에 무한이 함락되자 김원봉은 민족전선 간부들과 그 가족들을 손가화원으로 옮기고 자신은 조선의용군 본대를 이끌고 桂林으로 가서 그곳에 의용대 본부를 두고 중경을 오가고 있었다.46)
金九가 찾아갔을 때에도 김원봉은 없었다. 金枓奉, 김성숙, 尹琦燮, 成周寔, 김홍서, 朴建雄, 尹世? 등 민족전선 간부들은 金九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환영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金九는 지금은 주의를 논의할 때가 아니며, 민족적으로 조국을 광복한 뒤에 각각의 주의대로 당적 결합을 하기로 하고, 지금은 단일적으로 각 단체를 합동 통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金九의 의견에 찬성했다.
이때에 광복진선 3당의 주요 간부들은 아직 유주에 있었다. 그리하여 金九는 그들에게 지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는 한편, 임시정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재미동포들에게도 지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金九의 편지를 받은 한국국민당 간부들은 중경에 가서 토론하여 결정하자는 회답을 보내왔다. 미주와 하와이의 동포들은 〈통일은 찬성하나, 김약산(김원봉)은 공산주의자요. 선생이 공산당과 합작하여 통일하는 날, 우리 미국 교포와는 인연이 끊어지는 줄 알고 통일운동을 하시오〉 하는 회답을 보내왔다.47) 이때의 재미동포들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는 대한인 국민회의 다음과 같은 반응이 여실히 말해 준다.
〈우리 국민회는 본디 민족주의 목표하에 있고 또 체류국의 정치 법률과 및 질서를 존중하는 입장상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와 조직을 같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30년 이래 고통을 느끼던 분열을 뉘우쳐 깨닫고 능히 통일합작한다면 우리는 민족적 공의상 응당 경의를 표하겠고, 또 그들을 원조하는 도리는 이왕과 같이 임시정부를 후원하야 우리의 원조가 간접으로 그들에게 미치게 하는 것뿐이다.〉48)
單一黨 방식이냐 聯盟 방식이냐
金九는 재미동포들의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39년 3월에 김원봉이 중경에 도착하고,49) 뒤이어 4월에는 광복진선 세 정당의 주요 간부들이 중경에 도착하자 통일논의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50) 金九는 조완구, 엄항섭 등 한국국민당 주요 간부들과 통일문제를 논의했다. 그들은 金九의 단일당 조직을 반대했다. 그들 뿐만 아니라 한국국민당 당원들과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도 단일당 결성을 반대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념의 차이였다. 그들은 주의가 다른 단체와의 단일당 결성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51) 그들은 통합단일당보다는 연합체 구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金九는 그들을 설득했다. 각 단체가 자기 본체를 그대로 두고 연합체를 만든다면 통일기구 안에서 각기 자기 단체의 발전을 도모할 것이므로 도리어 마찰이 더 심할 것이고, 또 이전에는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운동을 반대하였으나 지금은 그들이 사회운동은 독립이 완성된 뒤에 본국에 가서 하고 당면해서는 순전히 민족적으로 국권의 완전 회복에만 전력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단일조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국민당 간부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사장 의견이 그러시다면 기강에 같이 가셔서 우리 국민당 전체 당원들과 두 우당 당원들의 의사가 일치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유주에서는 국민당은 물론이고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당원들까지도 연합론이 강합니다』52)
이 무렵 金九는 어머니 장례를 치르느라 건강이 나빠져서 쉬고 있었다. 통합작업이 쉽게 진척되지 않자 기강으로 가서 반대파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그러나 자기가 이끄는 국민당 간부들과 당원들을 설득하는 데에도 여드레 동안이나 회의를 열어야 했다. 다시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간부들을 만나서는 근 한 달 만에야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53)
한편 민족전선 내부에서도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민족전선은 산하의 각 단체와 동포들을 망라하여 매주 한 차례씩 좌담회를 열어 토론하기로 결정하고, 2월 중순부터 좌담회를 열었다. 전후 네댓 차례 토론이 진행되어 통일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나, 결성방법을 두고는 의견이 두 가지로 갈렸다. 민족혁명당은 단일당 방식의 통일을 주장했으나, 두 공산주의 단체는 연맹방식의 통일을 주장했다.54) 무정부주의 단체인 조선혁명자연맹은 민족혁명당의 단일당 방식의 통합을 지지했다.55)
獨立運動이 失敗한 原因을 심각하게 反省
이 무렵 金九는 朴贊翊과 함께 기거하면서 기강을 왕래했다. 김원봉도 아궁보의 손가화원으로 가지 않고 金九가 묵고 있는 홍빈여관에 따로 방을 잡아서 묵었다. 金九와 김원봉은 통일문제에 대해 수시로 협의했다.56) 그 결과 두 사람은 5월10일에 공동명의로 16쪽에 이르는 장문의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公開信」을 발표했다.57)
「공개신」은 먼저 두 사람이 연명선언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최근 우리 양인은 각지의 동지 동포 제군으로부터 우리 양인의 상호관계 및 단결여하와 현 단계 조선혁명의 정치 주장 및 목전 해외운동 통일문제에 관한 의견에 대하야 질문의 서신을 많이 접수하였다. 이에 우리 양인은 이 공개신으로서 이를 답복하려 한다.…〉
「공개신」은 먼저 과거의 독립운동이 실패한 원인을 심각하게 반성했다.
〈우리 양인은 3·1 운동 이후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향하야 계속 분투하였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한 개의 강적에 대한 투쟁을 통일적으로 강하고 유력하게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군중을 떠난 우리 양인의 특수환경의 영향도 없지 않았으나, 주로는 우리가 민족적 경각성이 부족하였던 것이며 민족혁명의 전략적 임무를 정확히 파악 실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거 수십 년간 우리 민족운동사상의 파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과 목전 중국민족의 최후의 필승을 향하야 매진하고 있는 민족적 총단결의 교훈에서 이전 종종의 착오를 통감하고, 우리 양인은 금후 신성한 조선민족 해방의 대업을 위하야 동심협력할 것을 동지 동포 앞에 고백하는 동시에 목전의 내외 정세와 현 단계의 우리 정치 주장을 이하에 진술하려 한다.…〉
이어 「공개신」은 특히 중-일전쟁 이후의 국제정세와 중국인들의 항일운동을 언급하고 나서, 중-일전쟁 발발 이후로 일본의 폭압적인 각종 수탈정책에 시달리는 국내동포의 비참한 상황을 상세히 언급했다. 그러면서 「공개신」은 한-중연대를 통한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관내에 현존하는 일체의 독립운동 단체를 해체하고 공동의 정강 아래 재편할 것을 제창했다.
『全민족적 역량을 集中運轉하는 統一的組織 건립해야』
〈관내운동의 이와 같은 사명을 이행하기 위하야 무엇보다 먼저 관내에 현존하는 각 혁명단체는 일률적으로 해소하고 현 단계의 공동한 정강하에서 재편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현존 각 단체의 할거적 현상과 파쟁적 마찰을 정지하고 단결 제일의 목표 밑에서 일체의 역량과 행동을 통일하야 우리 투쟁을 적극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각 단체의 표방하는 주의는 같지 않다 할지라도 현단계 조선혁명에 대한 정치강령과 투쟁대상은 일치한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4인1당, 6인1당의 각 단체가 구성 분립되고 있는 것은 투쟁역량의 분산과 호상알력을 필연적으로 초래하야, 적을 향한 힘있는 투쟁을 전개할 수 없을뿐더러 더욱 민족적 체통의 손상은 감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각 소단체를 본위로서 연맹식 방법에 의하야 관내운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이론도 있으나 이것은 결코 재래의 무원칙적 파쟁과 상호마찰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관내통일운동의 연맹식 방법론은 관내의 현존하는 불통일한 현상을 연장하는 방법이며, 무원칙적 파쟁의 합리화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에게 함축되고 있는 위대한 혁명역량은 이 위대한 시기에 있어서 반드시 최후의 결전을 전개할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이 결전을 승리로 전취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과거의 실패의 경험에 비추어 전 민족적 역량을 집중운전하는 통일적 조직이 건립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 통일적 조직은 전 민족의 의사와 요구에 의한 혁명적 강령에서 건립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 민족적 통일조직의 문제와 정치강령의 문제는 당면해서 가장 긴급한 문제이며 중심의 문제이다.…〉
그러면서도 「공개신」이 전 민족적 통일기구 구성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이다.
〈전 민족적 통일기구의 구체적 조직방식에 대하야 우리는 아직 국내의 제동지와 좀더 충분한 토의의 여유를 두면서, 지금은 이에 대한 우리 의견의 언급을 보류한다.…〉
이러한 주장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면서 참여를 거부해 온 김원봉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土地는 農民에게, 大企業은 國有로
「공개신」은 이어 〈현 단계의 정치강령의 대강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10개 항의 정치강령을 제시했다.
1)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여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함.
2)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세력을 숙청하고 민주공화제를 건립함.
3) 국내에 있는 일본제국주의자의 公私財産 및 매국적 친일파의 일체 재산을 몰수함.
4) 공업·운수·은행과 기타 산업부문에서 국가적 의의가 있는 대기업을 국유로 함.
5) 토지는 농민에 분급하되, 토지의 매매를 금지함(조선 농민의 대부분은 소작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자의 토지와 친일적 대지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는바, 그 토지는 국가에서 몰수하야 그대로 농민에게 주되 매매를 금지함이니, 이는 가혹한 착취관계에서 해방한 농민이 과거 상태로 재진입하는 것을 방지함이다).
6) 노동시간을 감소하며 노동에 관한 각종 사회보험사업을 실시함.
7) 부녀의 정치·경제·사회상의 권리 및 지위를 남자와 평등으로 함.
8) 국민은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 자유가 있음.
9) 국민의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을 국가의 경비로 실시함.
10) 자유·평등·相助의 원칙에 기초하야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촉진함.
토지와 기간산업의 국유화는 金九의 한국국민당도 표방하고 있는 것이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이 10개 항의 내용도 김원봉의 주장이 많이 반영된 것이었다.
「공개신」은 〈끝으로 목전의 중국 관내운동에 대한 우리 양인의 공통한 의견을 발표하고자 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자신에 찬 말로써 마무리했다.
〈우리는 다같이 동일한 운명에서 동일한 목표를 항하야 투쟁하는 동지며 동포들이다. 우리는 이미 각 소단체의 분립적 투쟁으로 인한 민족적 손해를 경험하고 통일단결에 의한 광명을 발견한 이상, 우리가 통쾌히 한 덩어리에 단합되지 못할 또 무슨 구구한 조건이 없을 줄 믿는다. 우리 양인은 개인의 의견으로서가 아니라 영용히 투쟁하고 있는 다수 동지의 일치한 의지 위에서 해외 다수 동지 동포와 함께 먼저 관내운동 조직의 획기적 변혁과 광명한 신국면의 창조를 향하야 자신과 용기를 가지고 전진하려고 한다. 제동지의 건투를 빌며 아울러 혁명경례를 드린다.〉58)
(3) 워싱턴에 가서 歐美委員部 활동재개
1939년 3월30일에 호놀룰루를 떠난 李承晩은 시애틀과 몬태나 주의 뷰트(Butte)를 거쳐서 4월13일에 워싱턴에 도착했다.59) 李承晩은 결혼한 뒤에 처음으로 떨어져 있는 프란체스카에게 마음이 쓰였다. 뷰트에서 편지를 보내고 워싱턴에 도착해서는 다시 〈별일 없는지 궁금하오. 전보하오〉라는 전보를 쳤다. 프란체스카는 〈뷰트에서 주신 편지 고마워요. 기분 아주 좋아요. 사랑〉이라는 애정어린 답전을 보내왔다.60)
「워싱턴 메리고라운드」가 李承晩의 사무소 개설 소식 알려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李承晩은 뉴욕의 중국인들로부터 그곳에서 열리는 중국 후원을 위한 집회에 참석해 달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뉴욕으로 가서 비슷한 성격의 세 집회에 참석했다. 한 집회에서는 최근에 중국을 방문하고 온 연사가 남경침공 때에 일본군 비행기가 투하한 폭탄 가운데 폭발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펜실베이니아의 폭탄제조창에서 만든 것임이 판명되었다면서 미국의 對日무기판매를 규탄하자, 수천 명의 군중이 흥분하여 어쩔 줄 모르는 광경을 보았다.
한편 일본정부의 역선전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이 선전하는 말은, 중-일전쟁에서 만일 중국이 승리하게 되면 중국 전체가 공산화할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경우 외국인들이 중국에서 취할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중국에 이해관계가 있는 미국 사업가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李承晩은 이러한 분위기를 보면서 중국 지원을 위한 선전의 필요성을 다시금 절감했다.61)
李承晩은 5월7일에 인민생명보험회사 빌딩(Peoples Life Insurance Bld.) 204호에 사무소를 개설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언론인들은 李承晩에 대하여 호의적이었다. 일찍이 프란체스카를 미국에 오게 하는 일을 도와주었던 피어슨(Drew Pearson)과 알렌(Robert S. Allen)은 이때에도 그들의 유명한 신디케이트 칼럼 「워싱턴 메리고라운드(Washington Merry-Go-Round) 5월9일자에 李承晩의 사무소 개설 사실을 소개했다. 이 칼럼 기사를 두고 「新韓民報」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세계 논조가 험악하고 국내외 경제가 핍박할 뿐 아니라 불뚝불뚝하는 한국 민심에 초민(焦悶)되는 왜적은 요새 새 걱정거리가 또 한가지 생겼으니, 5월9일에 미국 48개 주, 30개 도시 각 신문지상에 널리 전파된 기사를 보면, 왜적들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근심이 얼마큼 크며 저들의 신경이 얼마나 번민함을 가히 짐작할 것이다.
위에 말한 신문기사는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기자(칼럼니스트) 피어슨과 알렌이 전국 각 신문에 발표한 글이오 대지는 아래와 같다.〉
그러면서 「新韓民報」는 「워싱턴 메리고라운드」가 소개한 李承晩의 사무소 개설에 관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재했다.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李承晩이 사무소를 개설한 이튿날 마흔 살쯤 된 미국인 한 사람이 李承晩을 찾아왔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그에게 李承晩이 찾아온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서 워싱턴에 무슨 사무를 띠고 오셨는지 알고 싶어서 일본대사관에서 저를 보내어 왔습니다』
李承晩은 그 미국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하던 사업을 계속하는 사람이오. 나의 목적은 일본이 압박하고 학대하는 2,300만 나의 동족들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는 데 헌신하는 바이니, 얼른 말하면 즉 일본을 반박하는 일이오』
그러자 일본대사관에서 온 미국인은 李承晩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고 물러갔다.
「워싱턴 메리고라운드」는 이러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한국은 1910년에 일본이 병탄하였으나 한국 인민들은 영원히 일본에 반항하며, 李承晩 박사의 인도를 따르고 있다.〉62)
위의 이야기는 워싱턴의 또 한 사람의 저명한 기자 힐(Edwin C. Hill)에 의해서도 소개되었다. 힐의 피처기사는 5월17일자로 킹스 피처스 회사(Kings Features Inc.)의 공급으로 전국의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다. 힐은 기사의 마지막을 〈李承晩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하여 45년 동안 투쟁했고, 이제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고 적었다.63)
「워싱턴 메리고라운드」에 관한 「新韓民報」의 기사는 「太平洋週報」에 그대로 전재되어,64) 李承晩의 사무소 재개에 관한 뉴스는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에게 함께 전해졌다. 호놀룰루에서 발행되는 「스타 블리턴(The Star Bulletin)」지는 워싱턴 특파원 기사로 李承晩이 미국대통령에게 對日 무기수출을 금지할 권한을 주자는 운동을 후원한다고 보도했다.65) 또한 李承晩의 활동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에드워드 베네스(Edvard Benes∨) 前 대통령의 그것과 비견되는 것으로 소개하는 신문도 있었다.66)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세네터(The Senator)」 5월20일자는 李承晩의 젊어서 「매일신문」을 발행하던 때부터의 경력을 길게 소개하는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67) 「太平洋週報」는 미국신문들의 이러한 보도를 낱낱이 소개하면서, 〈리박사의 독립운동 소식이 각 신문에 전파된 것만 하여도 그 가치를 재정으로는 비교할 수 없다〉면서 동포들의 자금 지원을 독려했다.68)
韓吉洙도 中韓民衆同盟團 대표로 사무소 차려
그러나 이제 워싱턴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지기는 李承晩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1937년 10월에 호놀룰루에서 열린 하와이의 州昇格 문제에 대한 연방의회 상하 양원 합동위원회의 공청회에 출석하여 증언했던 일을 계기로 갑자기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수수께끼의 인물 韓吉洙가 상원의원 질레트(Guy Gillette)의 도움으로 1938년 12월에 미국 본토로 건너와서 中韓民衆同盟團 워싱턴 대표라는 직함으로 미국인들을 상대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길수는 워싱턴에 사무소를 두고 정력적으로 강연여행을 하고 다녔고, 「중한동맹단선전문」이라는 등사판 기관지도 발행하고 있었다. 그는 1941년 4월까지 35개 주의 90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167회의 강연과 7회의 라디오 강연을 했다고 했다. 강연을 통하여 그는 일본의 중국침략을 비판하고, 석유와 군수물자의 對日 수출금지와 일본의 파나마 운하 사용금지 등을 미국정부에 촉구하고, 미국시민들에게는 중국에 대한 지원과 동시에 한국독립의 지원을 호소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국무부의 권유로 중한민중동맹단의 워싱턴 외국인 로비스트로 등록했다.69)
李承晩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에 한길수는 미국 의회 외무위원회에 출석하여 토머스 의원의 괌섬 무장방비안에 대한 찬성증언을 하고 있었다.70)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한길수의 李承晩에 대한 태도는 정중했다. 그러한 사정은 동지회 뉴욕지부 기관지의 다음과 같은 기사로도 짐작할 수 있다.
〈전간 워싱턴에 한중연맹 사무소를 두고 각 방면으로 활동하는 한길수씨는 리승만 박사를 협조함이 많고, 또한 어떠한 방면으로는 적지 않은 편의도 많다고.〉71)
이 기사에서 말한 〈어떠한 방면〉의 편의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딱히 짐작할 수 없다.
체코人들의 國民外交部 본떠 大韓民國委員部로
李承晩은 워싱턴에 사무소를 다시 열면서, 미국인들의 권유대로 체코인들의 국민외교부를 본떠서 대한국민위원부(Korean Nationalist Mission)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72) 일반적으로는 그냥 한국위원부(Korean Mission)로 알려졌다.73) 처음에는 대한독립위원부(Korean Independence Mission)라는 명칭이 어떨까 하고 호놀룰루의 동지회 본부와 동지회 로스앤젤레스 지부로 전보로 상의하기도 했다가,74) 대한국민위원부로 결정한 것이었다. 구미위원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은 임시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호놀룰루를 떠나 올 때만 해도 구미위원부의 명칭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워싱턴으로 오는 동안 동포들과 미국인 친구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바꾸기로 한 것 같다. 그리고 체코인들의 국민외교부를 본뜨려고 한 것은 1939년 3월에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군에게 점령된 뒤에 미국에 거류하는 체코인들의 독립운동 열의가 고조되어 국민외교부를 조직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韓國親友會를 다시 조직하기로
대한국민위원부 사무소를 개설한 李承晩이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1919년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한 뒤에 미국 전역에 걸쳐서 미국인들로 조직했던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부활시키는 일이었다. 한국친우회를 부활시키는 목적은, 첫째로 일본의 선전에 대항하여 한국과 극동에 관한 진정한 사실을 전파하고, 둘째로 한국 안에 있는 기독교인의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며, 셋째로 태평양 연안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동양에 민본주의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75) 그러나 李承晩에게는 이러한 사업보다도 더 절실한 목표가 있었다. 8월에 하와이로 가서 동지들에게 한 보고연설에서 李承晩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가서 지나간 몇 달 동안에 한 일은 이전에 있던 한국친우회를 복설한 일이외다. 구미위원부의 문을 닫고 소위 짐짝은 다 몰아다가 남의 곳간에 쌓아 두었다가 이제 다시 끌어내다가 먼지를 털어 가며 사무실이라고 차리고 보니, 이전에 하던 일을 모두 되풀이하게 되었소.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은 시카고를 중심으로 150만 명이나 살고 보니 세력이 굉장하지마는 우리의 세력이야 말할 것 무엇 있소. 이 운동을 계속해 가야만 할 터인데, 우리의 재력만 의지할 수 없어서 친우회를 복설한 것이외다. 회원 1만 명만 얻고 회원마다 1년에 1달러씩만 준다면 1만 달러는 될 터이니, 1만 달러 돈만 가지게 되면 문 닫힐 일은 없지 않습니까.…』76)
이처럼 李承晩이 한국친우회를 부활시키는 일에 주력한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에 의한 활동자금의 확보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臨時政府는 歐美委員部 부활 인정 안 해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임시정부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높아지면서 재미동포들은 인구세·애국금·특연금 등 각종 성금 모금에 호응함으로써 조국광복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표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李承晩도 동지회 이외의 일반 동포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의 관계정상화가 필요했다. 그는 하와이의 동지회 중앙부장 金利濟를 통하여 金九에게 구미위원부의 활동 재개를 통보하고 구미위원부의 부활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를 승인하지 않고 李承晩의 활동을 〈민간외교〉로 규정했다.77) 10월에 기강에서 열린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정무위원 겸 국무원 비서장 車利錫이 제출한 「정무보고」는 〈李承晩씨도 외교의 필요를 느끼고 워싱턴에 가서 각 요로 인사와 교제하면서 본 정부에 향하야 구미위원부의 부활을 요구하였으나, 구미위원부는 이미 의회에서 그의 폐지를 결정한 것이므로 오늘 갑자기 부활시킬 수 없다는 취지로 회답하였음〉78)이라고 했다.
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의 부활을 승인하지 않은 것은 李承晩의 지론인 외교 선전론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때문이었으나, 그 밖에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한길수 문제였다.
임시정부가 기강에 정착하고 난 뒤인 6월25일에 金九가 동지회 중앙부장 김이제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는 그동안의 李承晩과 임시정부 사이의 연락상황과 이 무렵 임시정부가 李承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우리 광복운동이 千載一時(천재일시)인 이때에 주신 전보와 편지를 받아보고 이제야 붓을 들게 되어 송구하오며, 어저께 워싱턴 李박사의 전보도 받자왔습니다. 현하 모든 힘과 책략을 집중하여 중국 항전의 절호한 시기를 이용하여 왜구를 打滅(타멸)할 차제에, 李박사와 같은 민족적으로 명망이 중하고 국제적으로 성가가 높은 인격으로 선전이나 외교 방면에서 艱苦(간고)를 자임하심이 극히 감사한 일인 것은 우리 일반 동포가 공인할 것은 물론의 일이오나, 외교와 선전은 사실을 배경으로 할 것인데, 우리는 오늘날 무슨 사실을 가지고 선전할 것인가. 왜구가 악독하다 야만이다함은 세상이 다 아니, 우리가 자체의 사실을 가지고 선전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데, 무슨 사실로 할까.…〉
金九는 李承晩의 非暴力主義 비판
이렇게 전제한 다음 金九는 李承晩의 지론인 비폭력주의는 현 시점에서 선전할 것이 못 된다고 잘라 말했다.
〈己未宣言을 근거하여 비폭력으로 정신운동만을 선전하여 세인에게 정신적 원조를 구할까요. 아니오이다. 원동 각 단체는 임시정부까지, 3·1절 기념식에 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폐지한 지 10여 년입니다. 公約三章이 우리 전 민의에 위배되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인도 어떤 곳이나 필리핀 루송의 운동인 것이고, 대유혈을 목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혈운동으로야 우방의 도움도 얻을 수 있으나, 정신운동으로는 자체로 진행키 불능하고 다른 사람의 원조도 소망이 없습니다. 지금 화북에 유격대, 화남에 의용대가 세인의 예찬을 받는바, 화북에는 장차 한국독립운동을 조직코저 노력 중인데, 외교나 선전하는 인사들은 비무장·비폭력운동을 절규한다면 자체모순만 노출함이니, 크게 신중할 바이오며, 선전기관은 무엇이 적당할까. 저의 생각은 임시정부나 폐지된 지 오래된 구미위원부 모두가 부적당하고, 제일 좋은 것은 해외 각 단체가 통일된 기관 명의로 우리의 군사운동을 전력 선전하는 것이 급선무일까 하나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 무렵 金九는 구미위원부는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 임시정부보다도 그가 추진하고 있는 통합 단일당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동지회도 통합 단일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李承晩의 선전활동도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극동지역에서 추진되고 있는 통일운동에는 두 가지 방안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 원동 각 단체가 규합하는 통일은 두 가지가 있으니, 저와 김원봉과 일반 민족운동자는 단일을 주장하고 각 파 공산주의자들은 연합을 주장하는데, 단일당을 찬성하는 단체가 대다수이니 단일이 성공될 듯합니다. 귀 동지회의 제위도 차제에 희생적 정신으로 遠東遠西에 각 단체가 打成一片하는 데 같이 노력하심이 급선무임을 양찰하시오며, 이번에 애국단, 국민회 양 단체가 국민당에 합동하는데 그 합동하는 일은 찬성이고, 국민당의 명의는 본당에서 벌써 희생을 작정한 것인즉, 장래에 대당이 성립되는 대로 하나의 명의가 산출될 것입니다. 우견에는 李박사께서 선전이나 외교를 이상의 목표로 가지시고 하셔 주셨으면, 또는 무조건으로 통일에 참가하시며 그것으로 선전의 자료를 위하심이 여하하올지.…〉
이처럼 이제 金九는 李承晩에게 지금까지보다 달라진 자세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면서 李承晩이 자신의 의견에 따라 줄 것을 요청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李承晩이 다음 사항을 외교와 선전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로 중국 동북부(만주)에 독립군을 편성할 자금을 미 군사당국에 교섭할 것(화남의 의용대는 중국의 원조로 진행하고 있으나 동북에는 재력 부족으로 아직 착수하지 못하고 있음).
둘째로 북미 및 하와이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기술을 가르칠 것.
셋째로 특히 필리핀에서 원동 방면의 한인 청년을 모집하여 항공요원을 양성하는 데 편의를 제공할 것.
넷째로 상해·천진·북경·홍콩·국내·일본의 모모 지점에 정보망을 비밀히 설치할 것.
그러면서 金九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상 몇 건으로 외교의 목표로 하시고, 또는 한길수 군도 기위 등장을 한 이상에는 상호모순이 없어야 할 터인데, 이상 나열한 조건을 가지고 협의 진행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저는 모친상에 뒤이어서 자리에 눕게 되어 아직 기동을 못합니다. 미처 답함을 못 한 것 미안하여 몇 자 적어 보내 드리오니, 李박사께 ?呈하시와 참고케 하시면 감사합니다.
李박사에게 중경 우체함 95를 통지하여 주오.〉79)
金九의 이러한 주장은 바로 임시정부의 외교에 대한 인식과 방침을 그대로 표명한 것이었다. 위에서 본 1939년의 임시의정원 회의 때의 임시정부의 「정무보고」는 외교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우리가 어떠한 구체적 조건을 가지고 외교 교섭을 개시하는 데에는 우리의 실력을 다소라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있은 후가 아니면 아무 실효가 없으리라고 보는 점에서, 우리는 먼저 미약하나마 우리의 자력에 의한 활동, 즉 다시 말하면 세인이 눈을 뜨고 주시할 만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야 할 것을 선결조건으로 인식하야, 이것이 다소라도 실현되기 전에는 예비적 외교가 있을 뿐으로서 직접으로 정면에 서서 조건적 외교는 아직 개시하지 않으려 함.〉80)
임시정부의 이러한 정책인식은 아무리 전쟁 분위기에 따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韓吉洙의 活動도 적당치 않아…』
金九가 이 편지에서 언급한 李承晩의 전보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 李承晩은 대한국민위원부 사무소를 개설한 뒤에 워싱턴 주재 중국대사 胡適(호적)을 만났다. 중국의 저명한 학자이자 교육가인 호적은 1938년에 워싱턴 주재 중국대사로 부임해 있었다. 李承晩은 호적을 만나서도 중국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선전활동을 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호적은 『미국 친구들이 선전을 많이 해주고 있으니까 우리가 더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李承晩은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비행기 700만 달러어치를 사간다는 말을 듣고는 호적에게 비행기 구입하는 데는 600만 달러만 쓰고 100만 달러는 떼어서 선전비로 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81) 이 자리에서 李承晩은 호적에게 金九의 근황을 좀 알아보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82) 호적은 본국정부에 金九의 근황을 물으면서 어쩌면 李承晩이 金九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함께 보냈는지 알 수 없다.
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 부활을 거부한 것은 한길수의 요구에 대한 조치와의 형평성도 고려한 것이었다. 한길수는 임시정부에 대해 중한동맹단의 존재와 그것을 대표한 자신의 외교사업을 인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임시정부는 한길수의 요구도 거부했었다.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임시정부의 「정무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와이에 있는 모인사들은 중한동맹단을 조직하고 한길수씨를 대표로 미국에 파견하야 시카고와 워싱턴 등 각지에서 맹렬히 활동하야 미국 각계 인사의 열렬한 환영도 받으면서 본 정부에 향하야 그 단체의 존재와 외교사업을 인준하여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그들의 외교목표와 선전 주지가 적당치 못하기 때문에 본 정부에서도 그들의 부적당한 점을 적발하야 그의 시정을 지시하였으며…〉83)
한길수가 미국 각계 인사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한중동맹단의 외교 목표와 선전 주지가 적당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러한 평가는 金九가 李承晩에게 자신이 나열한 조건을 가지고 한길수와 협의 진행하라고 한 것과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어서 주목된다.
(4) 李承晩은 金九에게 반박 편지 보내
李承晩은 한인기독학원의 여름방학 동안 프란체스카를 워싱턴에 와 있게 했다. 그것은 이래저래 동포들의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으나, 그로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그러한 사정을 「太平洋週報」는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총재께서 외교사업을 다시 신설케 되시므로 지금에는 얼마간 조력하는 사무원이 있는 것이 필요하며, 경비도 객지에서 독신 생활비에 얼마를 더 요구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한다. 그래서 미주 대륙에 계신 동지들이 리박사 부인께서 워싱턴에 가시는 여행비를 판비하야 리박사 부인께서 이달 2일 선편에 발정케 되었으니, 외교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리박사께서는 한국친우회를 다시 복설키에 분망중인즉, 부인의 금번 여행은 큰 도움이 많을 바이며, 리박사 부인께서는 개학 전에 속히 8월2일에 회환하신다더라.〉84)
귀국한 매큔에게 시카고親友會 조직 부탁
프란체스카가 워싱턴에 온다는 소식은 미주의 동포들에게도 곧 알려졌다.85) 프란체스카는 6월2일에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1주일 뒤인 9일에 시카고에 도착했다. 李承晩은 한국친우회 회원모집을 위하여 하루 전에 그곳에 와 있었다. 李承晩은 동지회 시카고 지부 사람들을 중심으로 여러 동포들을 만나서 한국친우회 복설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고, 10일에는 한국에서 귀국한 매큔(George S. McCune: 한국이름 尹山溫)을 오찬에 초청하여 시카고에 한국친우회를 설립하는 일을 주동해 줄 것을 부탁했다. 매큔은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직을 맡아서 활동하다가 1936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귀국해 있었다. 매큔은 李承晩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86) 李承晩은 11일에는 한인교회에 가서 동포들을 상대로 광복운동에 관한 연설을 했다.87) 李承晩 내외는 이튿날 디트로이트에 들러서 동포들을 만나 보고, 곧바로 워싱턴으로 갔다.
한국친우회를 다시 조직하는 일은 기대했던 것만큼 잘 진척되지 않았다. 휴가철이 되어 미국 국회도 폐회되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려워졌다. 경비만 허비하면서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것은 어렵게 경비지원을 하고 있는 동포들에게도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호놀룰루의 동지회 중앙부는 5월10일에 400달러를 보낸 데 이어,88) 프란체스카 편에도 200달러를 보내왔다.89) 그렇기 때문에 李承晩은 하와이를 떠나오기 전에도 여름 동안 워싱턴 등지에서 유력한 백인친구들을 만나기가 어렵게 되면 하와이로 돌아왔다가 가겠다는 말을 했었다. 李承晩은 프란체스카와 함께 하와이로 돌아가서 한인기독학원의 개학준비도 보아 주고, 또 신축한 한인기독교회의 운영과 동지회의 활동방향에 관해서도 확실한 대책을 강구해 놓고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는 뉴욕에 갔다가 로스앤젤레스의 동지회 지부와 호놀룰루의 동지회로 그 사실을 통보했다.90)
李承晩 내외는 대한국민위원부의 일을 張基永에게 맡기고 워싱턴을 떠나서 7월22일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로스앤젤레스의 동포들은 李承晩 내외를 열렬히 환영했다. 동지회 로스앤젤레스 지부 주최로 7월25일 저녁에 신축한 한인장로교회 예배당에서 열린 환영회에는 150여 명의 동포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李承晩은 3·1정신을 강조하고, 동양의 장래와 在美한인의 장래문제에 대하여 연설했다. 이튿날 저녁에는 국민회 중앙상무위원회가 李承晩을 초대하여 만찬회를 열었다.91)
『불행히 리박사가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이 무렵 동지회 로스앤젤레스 지부는 현순의 아들인 현 피터(Peter Hyun)가 회장을 맡아서 활동하고 있었다. 李承晩 내외는 7월27일에 로스앤젤레스를 떠나서 8월2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하는 「맷소니아」호를 탈 예정이었으나 프란체스카가 병이 나서 연기되었다. 이때에 李承晩 내외에게 〈안전하고 행복한 항해가 되시기를 충심으로 빕니다〉라는 한길수의 전보가 전해졌다.92) 이 무렵까지는 한길수의 태도가 이처럼 정중했으므로 동지회에서는 한길수에게 동지회에 입회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동지회의 손창희에게 보낸 한길수의 편지는 이때의 李承晩과 동지회에 대한 한길수의 태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불행히 리박사가 오늘 오후 5시에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물론 리박사의 회정이 상당한 이유가 있는 줄 믿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선생과 동지회에서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사하셔서 속히 이곳으로 오시도록 하야 주시오. 원동시세가 우리 기회를 주는 첫걸음입니다. 그런 고로 리박사가 워싱턴에 있어서 같이 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길수의 이러한 말은 李承晩이 하와이로 돌아간 이유가 단순히 여름휴가철이어서 미국인들을 만나기가 어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길수는 동지회에 가입하라는 권유에 대해서는, 자신은 한중민중동맹단의 워싱턴 대표로 일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그러나 만일 나 같은 못생긴 놈이 동지회원이 되는데 양 단체가 서로 양해로 한국을 위하야 일을 전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면, 우리 단체 간부와 공의하야 동지회원이 되겠습니다〉라면서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太平洋週報」가 자신의 활동을 전혀 보도하고 있지 않는 사실을 은근히 비판했다.
〈이곳의 일본놈들을 위하야 일하여 주는 어떠한 백인들은 「太平洋週報」와 「國民報」를 가지고 다니면서 말하기를 한국사람 단체들은 민족적 일이 아니라 몇 사람들이 자기네 밥벌이 하기 위하야 한국 사람을 충동하여 말로 독립운동한다고 하며, 보아라 리박사의 말이 미국 신문과 잡지상에 났지마는 저희 「國民報」에서는 소문도 아니낸다고 비평합니다. 또한 「태평양주보」에서는 한길수가 무엇을 하든지 소문도 아니낸다 하며 비평하고, 재미있게 떠들며 … 또한 리박사와 한길수가 몇 날이 못 되어서 싸운다고 하였습니다.…〉93)
李承晩 내외는 8월10일에야 로스앤젤레스를 떠났다.
美國人들이 과거를 뉘우치고 있다고 報告
李承晩 내외를 태운 「맷소니아」호가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것은 8월16일 아침 7시30분이었다.94) 18일 저녁에 킹스트리트의 동양청찬관에서 열린 환영만찬회에서 李承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워싱턴으로 갈 때에 선편의 사정으로 시애틀로 직행하야 시카고를 들러서 워싱턴으로 향하는 연도에서 다수 동포들을 만나 보았소이다. 워싱턴에 있는 동안 모모 백인 친구들이며 정객들과 교제하여 보았는데, 여러 친구들의 말이 1919년에 당신이 조선문제를 일으킬 때에 우리들은 친구된 의리로 동정하면서도 이것은 과거에 장사한 죽은 문제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느니라는 의심을 가졌었는데, 그러나 오늘날 와서 지나간 일을 회고하니 당신의 각오가 과연 정당한 것을 깨달았소이다 하는 동시에, 정객들은 미국이나 영국이나를 물론하고 우리가 과거에 한국에 대한 모든 태도를 이제 뉘우치노라 합디다. 그렇게 완강하던 중국사람들도 제 설움에 못 이겨서 한국과 중국은 죽든지 살든지 다 한길로 서십시다 합디다.
시카고에서 두 분 청년의 의향을 들어본 일도 있거니와 어디를 가든지 동포들의 일반심리가 지방별이니, 당파심이니, 나니 너니 하던 것은 다 떨어버리고, 민족의 원대한 목적을 위하야는 공동 일치하게 서자는 것이 1919년 이후에 처음 되는 현실임을 깨달았소이다. 일본이 동양이나 세계를 다 삼키지 못할 것이 명백한 대세인 동시에 조선의 친구들이 늘어가는 터이니 우리의 희망은 과연 많소이다. 여러분께서는 사사 감정이나 의견의 충돌을 피하고 다 하나이 되어서 동지회의 정신대로 민족운동을 계속합시다.…』95)
이어 19일 저녁에 한인기독교회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넓은 장내가 빽빽이 차도록 동포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李承晩은 워싱턴에 가서 한국친우회를 다시 조직하는 일에 주력했던 일을 보고했다. 그는 연설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대세가 이만한 형편이나, 무슨 일이든지 인력으로 다 되는 법은 없고, 하나님의 경륜이 계신 줄 분명히 믿을 수밖에 없소이다. 우리 사람은 본래 총명한 민족인즉, 그저 남에게 매여서만 살게 될 줄을 나는 믿지 않소이다』96)
『韓人과 中國人은 어찌 이처럼 몽매합니까』
金九가 김이제에게 쓴 6월25일자 편지는 李承晩이 호놀룰루에 돌아온 뒤에야 전달되었다. 金九의 편지를 보고 李承晩은 몹시 화가 났다. 그는 8월30일에 金九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저번에 워싱턴에서 중국공사 胡適 박사에게 金九선생의 활동을 좀 알면 선전하겠다 하였더니, 전보로 물은 모양이외다. 한인과 중국인은 세계대세에 대하야 어찌 이처럼 몽매합니까.
(1)선전 한 가지를 논하더라도 日人은 30년 전부터 1년에 100만 달러를 미국에만 소비하고, 이번 중-일전쟁 이래로 350만 달러 이상을 소비하야 미국인의 동정을 100분의 1을 가지고도 물자상 필요는 다 얻어 가는데, 중국인은 99분을 가지고도 군수물자를 얻지 못하니, 다름이 아니라 선전이 부족한 연고입니다. 미국은 민중이 전쟁이냐 화평이냐를 결정하노니, 몇백만 달러를 들여 각 신문상에 날마다 일본인의 만행을 알려 주면 정부와 국회를 억지로라도 시켜 정책을 변경케 할 터인데, 아직도 망연히 알지 못하니 어찌하리오. 중국인이 아무리 혈전분투할지라도 제3국의 원조가 아니면 중국은 제2조선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유력한 선전가로 전국의 연락을 맡겨서 효력 있는 선전을 하는 것이니, 장개석씨에게 권고해 보시오.
(2)외교선전보다 용전이 우선이니 군수물자를 얻어 보내라는 것은 이곳 형편을 전혀 모르시는 것입니다. 선전으로 우리의 하는 것을 알려 주어야 도움을 얻지, 도무지 한인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외다.
(3)동지회 주장하는 것을 각 단체가 부인이라 하심은 불가하외다. 우리 사람의 경우에 혁명대운동의 한 방식이니, 이 방식으로 상당한 정도에 도달한 뒤에야 무엇인들 못하리오마는 폭력으로만 주장해야 된다 하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하겠습니다.
폐일언하고, 이번에 워싱턴과 뉴욕에서 군기창에 혹 구식이라 폐기한 군수물자라도 좀 얻으려고 해보았으나 원동에서 한인들이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합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에서든지 들을 만한 사실이 있거든 진상을 적어 보내시오. 이곳에서 선전한다는 것이 미주에 있는 우리 사람 한두 개인의 소관인 줄로 아실 것이 아니외다.〉97)
이 편지에는 임시정부 인사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독립운동자들이 무력항쟁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선전과 외교가 먼저라고 주장하는 李承晩의 논리가 설득력 있게 표명되어 있다.
세 기관 財産運用 감독할「顧問部」구성
한인기독학원 기숙사에는 방학 동안에도 35명의 남녀 학생들이 기숙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카가 없는 동안 국어교사 이춘만이 학교사무를 맡아 보았고, 백인 남자선생 한 사람과 백인 여자선생 두 사람이 기숙사에서 기거하면서 학생들을 감독했다.98)
李承晩은 9월5일에 한인기독학원이 개학한 뒤에도 호놀룰루를 떠나지 못했다. 이번에는 프란체스카와 함께 떠나기로 했기 때문에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학교와 교회와 동지회의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을 세워놓기 위해서였다. 그는 李容稷 목사와 金鉉九의 배신 때문에 빚어졌던 교민단과 교회 분규의 쓰라린 경험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용직은 1935년에 귀국하고 없었으나, 김현구는 여전히 「國民報」의 주필로 있으면서 李承晩의 활동상황은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궁리해 낸 것이 세 기관의 재산 일을 공동으로 책임질 「顧問部」라는 별도의 기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 기관의 운영에 직접 개입하거나 간섭하지는 않으나 기관의 명칭이나 목적이나 사업의 성격을 변경시키거나 재산소유권이나 사무처리 권한의 변동 등의 일이 발생할 때에는 고문부의 동의를 얻어야 되도록 한 것이었다. 고문부의 부원으로는 양유찬(회장)·이원순(부회장) 등 李承晩이 신임하는 청년 사업가 12명이 선정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김노디 등 세 사람의 여성도 포함되었다.99) 이들은 앞으로 20년 동안 세 기관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책임질 것이었다.
동지회 연례 대표회도 李承晩의 일정에 맞추어 두 달이나 앞당겨 10월16일부터 사흘 동안 호놀룰루에서 개최되었다. 동지회 대표회에서는 워싱턴의 외교부를 계속할 것과 임시정부를 극력 봉대할 것 등과 함께, 李承晩이 워싱턴에 가서 집필할 독립운동사 편찬비로 500달러를 지출할 것도 결의했다.100)
10월22일 오후 2시에 한인기독교회에서 새로 구성된 고문부원 취임식이 거행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李承晩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나는 25년 전에 이곳에 와서 여러분과 같이 기독학원·기독교회·동지회를 설립하였는바, 오해하는 분들은 리박사의 사업이라고 하오만 나의 사업은 여러분의 사업이오. 지금 우리 중에 명망 있는 청년들로 고문부를 조직하고 우리의 사업을 전수하는 바는 우리들도 외국인들과 같이 공동언론이나 공동의결을 채용하도록 각 단체를 대표하는 인물을 집중함인즉, 고문부 위원으로 선택된 제씨는 물질로나 성력으로 세 단체에 중대한 사건이 있는 때에는 고문부 제씨는 여러분과 협의할 바이오, 직접 고문위원부에서 세 단체의 행정상에는 간섭이 없소이다.
나는 여러분께서 워싱턴에 가서 외교활동하기를 원한즉 내월 10일간에 발정키로 행장을 수습하는 중이나, 내가 출타하면 기독학원을 누가 주관할까 염려하는 중에 이원순씨의 부인 매리 여사가 홈장으로 허락하되, 이후에 리박사께서 돌아오시면 기독학원을 다시 관리케하고 대리감독으로 사무케 되면 힘써 시무하겠다고 하야, 기독학원에 대한 일도 잘 준비되었소이다』101)
基督學院 운영은 李元淳 부인 매리가 맡아
이처럼 李承晩 내외가 떠난 뒤의 한인기독학원의 운영은 이원순의 부인 매리가 맡았다.
취임식에서는 고문부 부원으로 선임된 사람들이 공동으로 「서약서」에 서명하는 특별한 순서가 있었다. 「서약서」의 형식도 독특했다. 李承晩은 모인 사람들에게 고문부 설치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한 뒤에 「서약서」를 낭독한 부회장 이원순에게 발언하게 했다. 이원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박사께서 우리 동포들의 청함을 받아 하와이에 오신 지가 26년이 됩니다. 그동안 남다르게 풍파를 당하여 가시면서도 우리 민족의 장래 발전과 민족운동을 계속적으로 분투 노력하셔서 오늘날 기독교회·기독학원·동지회 세 기관을 만들어 놓으셨고, 그 기관들을 계속하여 가시느라고 무수한 곤란을 많이 당하여 오셨습니다. 박사님께서는 백수가 흩날리시는 이때에도 사양치 않으시고 외교장에 다시 나가시기를 허락하셨으며, 시간 있는 대로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편찬하시기로 작정이 있어서, 머지 않아 하와이를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장래를 걱정하시는 박사님께서는 우리의 세 단체를 영구히 보전하도록 하시려고 근일에 다수 인사들을 모아 가지고 많은 토의가 있은 후 고문부라는 기관을 세웠습니다. 이 고문부는 세 단체 위에 있어 총괄하라는 것도 아니요, 내정간섭을 하라는 것도 아니요, 다만 이 세 단체의 명칭이나 목적이나 사업성질을 바꾸거나 재산 소유권을 옮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고문부원 전수의 3분지 2 이상의 동의가 없이는 절대적으로 실행치 못하게 한 것이 올시다. 다시 말하자면, 리박사님께서 고문부에 부탁하셔서 우리의 세 단체를 오늘날 모습과 같이 유지하라고 우리들에게 맡기는 것이외다.
이 사람도 부탁을 받은 한 사람으로 한편으로는 감격한 마음을 금치 아니하는 동시에 어려운 짐을 졌습니다. 이 앞으로는 노성하신 동지들의 지도를 받아 진행하려 합니다. 여러분 동지들과 우리 위원들이 함께 리박사의 부탁하시는 바를 저버리지 않기로 맹세합시다』102)
이원순의 말에서 보듯이, 李承晩이 워싱턴에 가서 하기로 약속한 일의 하나는 독립운동사에 관한 책을 저술하는 것이었다. 동지대표회는 그것을 위한 비용으로 500달러를 따로 책정했던 것이다.
기약 없는 이별에 눈물 못 거두는 늙은 同胞들
李承晩 내외는 11월10일 정오에 「맷소니아」호 편으로 호놀룰루를 떠났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출항이었다. 한인기독교회 목사 김형식의 다음과 같은 이별기는 이때에 李承晩을 보내는 하와이 동포들의 감회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지난 3월에도 선생을 전송한 적이 있었고, 이번에 또다시 그를 보내건마는 우리의 섭섭한 회포는 전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저번에는 선생께서 동포들에게 선언하신 말씀도 계셨거니와 모든 것이 일시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문부 설치사건이나 기독학원을 위임처리하게 한 일만 가지고 생각하더라도 선생의 이번 길은 잠시가 아니고 기약 없는 길이다.
이 기약 없는 길을 떠나시는 선생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뵙지나 않는가 싶어서 눈물을 거두지 못하는 이는 거의 다 연세 많은 노인들이시오,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씻어 내다가도 빙그레하면서 웃음을 띄우는 이는 비교적 젊으신 이들이다. 울다가도 웃는 일은 웬일인가?
아마도 동양의 풍운이 잦아진 뒤로 중국의 승리냐, 일본의 패망이냐 하야 세계의 이목이 총 집중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양문제에 대하야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미국이 일본과의 통상조약 폐지를 선언하고 또다시 일본이 중국에 대한 정책을 변경하기 전까지는 통상조약을 다시 체결할 수 없다는 강경론을 주장하는 이때에 선생의 길은 의미 있는 길이요, 따라서 젊은 우리로서는 우리 민족의 목적을 관철하고 개선가를 부르는 영수를 불원한 장래에 환영하리라는 희망을 가짐인가 한다.…〉103)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국제주의와 고립주의의 뿌리 깊은 대립 속에서 도의와 중립만을 표방하면서 불 속에서 밤을 줍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해 온 미국정부는 비등하는 일본 제재 여론을 배경으로 드디어 1939년 7월26일에 미-일통상조약의 폐기를 일본정부에 통고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 9월1일에는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李承晩은 이때 이후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하와이 땅을 밟지 못했다. 아내가 한인기독학원의 운영을 맡게 된 이원순의 가족은 11월17일에 아예 기독학원으로 이사했다.104) 李承晩 내외는 11월15일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여 며칠 동안 동포들을 만나 보고, 그곳을 떠나서, 크리스마스가 지난 12월27일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고침]
月刊朝鮮 2006년 12월호「李承晩과 金九」(57회)에서, 李承晩이 1939년 3월에 워싱턴으로 갈 때에 프란체스카와 동행했다고 한 것은 착오였으므로 바로잡습니다.
1)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373쪽.
2)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제시의 일기」, 1999, 혜윰, 33쪽. 3) 같은 책, 34쪽; 「백범일지」, 373쪽. 4) 「백범일지」, 374쪽. 5) 「新韓民報」 1938년 9월29일자, 「장개석 총재와 장치중 주석에게 보낸 국민회공문」.
6) 위와 같음. 7) 「金九가 洪焉에게 보낸 1938년 9월14일자 편지」, 「白凡金九先生의 편지」, 2005, 나남출판, 46쪽. 8) 「新韓民報」 1938년 9월22일자, 「임정에 송금」. 9) 「백범일지」, 374쪽. 10) 「新韓民報」 1939년 3월30일자, 「임시정부의 공문」. 11) 「백범일지」, 374쪽. 12) 「金九가 宋憲澍에게 보낸 1939년 1월3일자 편지」,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編, 「白凡金九全集(7)」, 1999, 대한매일신보사, 29쪽. 13) 「백범일지」, 374~375쪽. 14) 「백범일지」, 375쪽. 15) 「金九가 宋憲澍에게 보낸 1939년 1월3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29쪽. 16) 趙擎韓, 「白岡回顧錄」, 1979, 韓國宗敎協議會, 273쪽.
17) 정정화, 「녹두꽃」, 1987, 未完, 121~122쪽. 18)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42쪽. 19) 「新韓民報」 1939년 3월30일자, 「임시정부의 공문」. 20) 「新韓民報」 1938년 10월13일자, 「임정과 피난동포 이전의 상황」. 21)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43쪽; 정정화, 앞의 책, 122~123쪽. 22) 정정화, 앞의 책, 123~125쪽. 2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2~303쪽.
24) 「金九가 宋鍾翊에게 보낸 1939년 1월4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31~32쪽 ; 「新韓民報」 1939년 3월30일자, 「임시정부의 공문」. 25) 「백범일지」, 376쪽, 393쪽. 26) 「新韓民報」 1939년 1월12일자, 「재차 이전한 임정소식」. 27) 「金九가 仙 朱家?에게 보낸 1940년 1월2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34쪽. 28) 「백범일지」, 376~377쪽. 29) 「新韓民報」 1939년 5월26일자, 「김구 선생 자친의 서세」.
30) 「백범일지」, 379쪽. 3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3쪽. 32) 정정화, 앞의 책, 130쪽. 33) 「金九가 宋憲澍에게 보낸 1939년 1월3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30쪽 ; 「金九가 宋鍾翊에게 보낸 1939년 1월4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32쪽. 34) 「金九가 宋憲澍에게 보낸 1939년 1월3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29~30쪽. 35) 「金九가 宋鍾翊에게 보낸 1939년 1월4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32쪽.
36) 金學奎, 「白波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597쪽. 37) 內務省警報局保安課 「特高月報」 1939년 2월, 120쪽. 38) 蕭錚, 「中國國民黨과 金九」,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博英社, 1983, 156~157쪽. 39) 「金九가 蔣介石에게 보낸 1940년의 편지」, 「白凡金九全集(7)」, 47~48쪽. 40)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1972, 延世大出版部, 254쪽. 41) 같은 책, 256~257쪽. 42) 張世胤, 「조선의용대의 조직편성과 구성원」,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1집, 1999, 한울, 40~41쪽 ; 김영범,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한·중연대」,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1집, 1999, 한울, 150~165쪽 참조. 43)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1967, 原書房, 679쪽. 44)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685~688쪽. 45) 金榮範, 「朝鮮義勇隊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469~514쪽 참조.
46) 유자명, 「한 혁명자의 회억록」, 199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25쪽, 233쪽 ;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678~679쪽. 47) 「백범일지」, 378쪽, 392쪽. 48) 「新韓民報」 1939년 7월6일자, 「원동한인 각 당파의 통일운동」. 49) 유자명, 앞의 책, 233쪽. 50)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編, 「民國政府與韓國獨立運動史料」, 1988, 18쪽. 51) 「백범일지」, 379쪽 ; 趙擎韓, 앞의 책, 281~282쪽.
52) 「백범일지」, 379~380쪽. 53) 「백범일지」, 380쪽. 54) 「新韓民報」 1939년 6월15일자, 「중경에 있는 각 혁명단체의 통일운동」. 55)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78쪽. 56)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6)」, 1975, 독립유공자 사업기금운용위원회, 644~645쪽 ; 南坡朴贊翊傳記編纂委員會, 1989, 「南坡朴贊翊」, 244쪽. 57) 「白凡金九全集(6)」, 1999, 대한매일신보사, 25~40쪽.
58) 「白凡金九全集(6)」, 25~40쪽. 59) 「太平洋週報」 1939년 5월6일호, 「리박사 문안」, 13쪽. 60) Syngman Rhee to Mrs. Syngman Rhee, April 17, 1939 and Mrs. Syngman Rhee to Koric, April 19, 1939, The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ed.,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Kukhak Charyowon, 2001, pp. 560~561.
61) 「太平洋週報」 1939년 9월2일호, 김형식, 「리박사 환영기」, 14~15쪽. 62) 「新韓民報」 1939년 5월18일자, 「일본대사의 새 걱정거리」. 63) Robert T. Oliver, Syngman Rhee――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ed and Company, 1960, p.166. 64) 「太平洋週報」 1939년 6월10일호, 「일본대사의 새 걱정거리」, 3~4쪽. 65) 「太平洋週報」 1939년 5월27일호, 「상등인물들과 무엇하는 것」, 4~5쪽. 66) 같은 글, 4쪽. 67) 「太平洋週報」 1939년 6월3일호, 「동양: 리박사 자유를 위하야 싸움」, 3~5쪽. 68) 「太平洋週報」 1939년 6월3일호, 「리박사 외교소식」, 14쪽.
69) 稻葉 强, 「太平洋戰爭中の在米朝鮮人運動――特に韓吉洙の活動を中心に」, 「朝鮮民族運動史硏究」 7호, 1991, 不二出版, 39~88쪽 및 방선주, 「한길수와 이승만」, 유영익 편, 「이승만연구――독립운동과 대한민국건국」, 2000, 연세대출판부, 323~357쪽 참조. 70) 「중한동맹단선전문」(제10호) 1939년 5월8일자, 1쪽. 71)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二) 하와이·美洲僑民團體 關聯文書」, 1998, 延世大 現代 韓國學硏究所, 560쪽. 72) 「太平洋週報」 1939년 6월3일호, 「리박사외교소식」, 14쪽 ;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二) 하와이·美洲僑民團體 關聯文書」, 560쪽. 73) Robert T. Oliver, op. cit., p.167. 74) Syngman Rhee to Dongjihoi, May 4, 1939 and Syngman Rhee to Peter Hyun, May 5, 1939,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p.562~563. 75)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二) 하와이·美洲僑民團體 關聯文書」, 559쪽.
76) 「太平洋週報」 1939년 9월2일호, 김형식, 「리박사환영기」, 15~16쪽. 7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2005, 국사편찬위원회, 246~247쪽. 7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4쪽.
79) 「金九가 金利濟에게 보낸 1939년 6월25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八) 簡札 3」, 356~357쪽. 8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5쪽. 81) 「太平洋週報」 1939년 9월2일호, 김형식, 「리박사 환영기」, 15쪽. 82) 「李承晩이 金九에게 보낸 1939년 8월30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六) 簡札 1」, 11쪽. 8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4쪽.
84) 「太平洋週報」 1939년 6월3일호, 「리박사부인여행」, 13~14쪽. 85)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二) 하와이·美洲僑民團體 關聯文書」, 559쪽. 86) 「太平洋週報」 1939년 6월24일호, 「리박사부인안착」, 14쪽 ; 김승태-박혜진 엮음, 「내한선교사총람」, 199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365쪽. 87) 「太平洋週報」 1939년 7월1일호, 「리박사외교소식」, 1쪽. 88) Changsoo Kim to Syngman Rhee, May 10, 1939,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567. 89) Syngman Rhee to Dongjihoi, June 10, 1939,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586. 90) 「太平洋週報」 1939년 7월22일호, 「통신래착」, 17쪽. 91) 「新韓民報」 1939년 8월3일자, 「잡보: 리승만박사의 환영회」; 「太平洋週報」 1939년 9월2일호, 「라성통신: 리박사심방여록」, 6쪽. 92) Kilsoo Hahn to Dr. and Mrs. Rhee, July 26, 1939,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591.
93) 「중한동맹단선전문」(제22호) 1939년 8월18일자. 94) 「太平洋週報」 1939년 8월19일호, 「광고」, 1쪽. 95) 「太平洋週報」 1939년 8월26일호, 김형식, 「리승만박사 환영기(기一)」, 10쪽.
96) 「太平洋週報」 1939년 9월2일호, 김형식, 「리박사환영기」, 16쪽. 97)「李承晩이 金九에게 보낸 1939년 8월30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六) 簡札 1」, 11~12쪽. 98) 「太平洋週報」 1939년 6월3일호, 「기독학원 처리순서」, 15쪽.
99) 「太平洋週報」 1939년 10월28일호, 「고문부원취임식」, 10쪽. 100) 「太平洋週報」 1939년 10월28일호, 「동지회연례대표회록」, 14쪽. 101) 「太平洋週報」 1939년 10월28일호, 「고문부원취임식」, 9~10쪽. 102) 「太平洋週報」 1939년 10월28일호, 「고문부원취임식」, 11쪽.
103) 「太平洋週報」 1939년 11월18일호, 김형식, 「영수를 봉송하면서」, 5쪽. 104) 「太平洋週報」 1939년 11월18일호, 「리원순씨 반이」, 18쪽.
重慶에 온 金九는 獨立運動단체의 통합운동에 나섰다. 먼저 金元鳳과 함께 「同志同胞에게 보내는 公開信」을 발표하고, 外交宣傳의 필요성을 강조한 李承晩의 주장을 반박하는 편지를 써서 동지회 중앙부장 金利濟에게 보냈다.
1939년 4월에 워싱턴에 도착한 李承晩은 大韓國民委員部 사무소를 개설하고, 韓國親友會를 다시 조직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워싱턴에는 앞으로 그의 政敵이 될 韓吉洙가 와서 中韓民衆同盟團 대표 자격으로 별도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여름 동안 하와이로 돌아온 李承晩은 金九의 편지내용을 반박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학교와 교회와 동지회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감독할 「顧問部」를 구성하고 11월에 다시 워싱턴으로 갔다.
(1) 臨時政府 大家族의 「萬里長征」

長沙에도 일본군비행기의 공습이 심해졌다. 金九는 3당 간부들과 임시정부의 이동문제를 논의했다. 廣東省으로 가서 거기에서 다시 廣西省의 南寧이나 雲南省 방면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래야 재미동포들과의 연락망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장사에도 이미 피란민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서, 100여 명의 대가족과 산처럼 쌓인 짐을 가지고는 멀리는 고사하고 가까운 시골로 옮기기도 매우 힘든 형편이었다.
金九는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호남성 주석 張治中을 찾아갔다. 장치중은 廣州로 가는 기차 한 칸을 무료로 이용하도록 주선해 주고, 광동성 주석 吳鐵城에게 친필로 소개장도 써주었다.1) 金九는 대가족 일행보다 하루 먼저 장사를 출발하여 광주로 갔다. 李東寧과 李始榮을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과 100여 명의 대가족은 7월17일 이른 새벽에 광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임시정부 대가족은 흔들리는 좁은 기차를 타고 사흘 동안 가야 했다. 대가족의 피란 모습도 가지각색이었다. 한국국민당 감사 楊明鎭(楊宇朝)은 갓난아이를 광주리에 담아가지고 기차에 올랐다. 가다가 갑자기 일본 비행기의 공습을 받기도 했다. 그럴 때면 기차는 멈추고 사람들은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숨어야 했다. 숨을 죽이며 숨어 있다가 비행기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그렇게 가다가 섰다가 하면서 달렸다. 기차가 도시를 지날 때에는 가족별로 배급받은 돈을 가지고 내려서 먹을 것을 사왔다.2)
사흘 동안의 지루한 기차여행 끝에 7월20일 이른 아침에 임시정부 대가족은 광주의 황사정거장에 도착했다. 정거장에 막 도착했을 때에 또 한 번 일본기의 공습을 받았다. 중국군에 재직하고 있는 李俊植과 蔡元凱의 알선으로 東山栢園을 임시정부의 판공처로 정하고, 아세아여관을 정부와 의정원 및 3당 간부들과 그 가족들의 숙소로 정했다.3)
임시정부 대가족이 무사히 광주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金九는 바로 홍콩으로 갔다. 남경을 떠나올 때에 安恭根에게 시켰다가 실패했던 安重根 부인을 데려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홍콩에 도착한 金九는 안공근·안정근 형제를 비롯하여 비밀공작 임무를 띠고 상해로 가는 柳絮(유서)와 함께 안중근 부인 문제를 상의했다. 金九는 안중근 부인을 상해에서 데려와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으나, 세 사람은 난색을 표했다. 金九는 세 사람을 크게 꾸짖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상해가 완전히 일본군의 점령 아래 놓여 있어서 안중근 부인을 데려오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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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時政府 대가족 120여 명이 진강을 떠날 때에 이용했던 피란선〔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4)」(1972)에서〕. |
國民會에 蔣介石에게 감사편지 보내라고 부탁
광주로 돌아온 金九는 곧바로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앞으로 임시정부의 이동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金九는 편지에서 임시정부와 대가족이 광주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보살펴 준 蔣介石 총재와 장치중 주석에게 대한인국민회가 감사편지를 보내 줄 것을 당부했다.
〈우리 임시정부는 장사 전쟁구역을 피해 나오기 위하야 국무기관과 및 난민 수백 명을 모지로 옮겨갈 때에 수십만 중국난민이 일시에 몰려가는 가운데 기차표를 사가졌어도 차를 탈 수가 없었으므로 구(九)가 병든 몸을 기동하야 호남성 정부 주석 장치중 장군을 가보고 그 사정을 말하고 원조를 청하였더니, 장치중 장군이 그 환란 중에서도 자못 친절히 대접하야 객차 1열을 무료로 공급하고 또 특히 운수사령으로 하여금 은밀 보호케 하였으므로 임시정부 위원과 및 난민 일행이 모두 무사히 옮겨감을 얻었으니, 바라건대 귀 국민회로서 장개석 총재와 장치중 주석에게 글을 보내어 그 후의를 감사하여 주시오.〉5)
중국국민당은 3월29일에 武漢[武昌과 漢口]에서 열린 임시대표대회에서 총재제를 채택하고 장개석을 초대총재로 선출했었다. 金九의 편지를 받은 대한인국민회는 9월14일에 중앙상무위원회를 열고 金九의 요구대로 장개석과 장치중에게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 김호」 명의로 감사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장개석에게 보낸 감사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최근 김구 동지의 내함을 받아본즉 말하기를, 한국 임시정부는 전쟁구역을 피해 나오기 위하야 국무기관과 및 난민 수백 명을 가져 장사로부터 모지로 옮겨 갈 때에 다행히 귀국정부의 보호를 입어 유리전패의 괴로움을 면케 하였고, 또 작년에 남경으로부터 장사로 옮겨갈 때에 또한 군대 가운데 호송하야 환란을 같이 한 것이 참 고마운 일이라 하얏더이다. 이 같은 우대를 우리 방국유민으로 받으매 느낌이 지극하야 반드시 보답하기를 맹세하옵고, 이제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결의하기를 미국, 멕시코 및 쿠바에 있는 동지를 통솔하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분투하기로 하얏사오며, 아울러 비나니 위좌(각하)는 중한(中韓) 민족의 자력갱생을 위하야 힘써 보중하소서.〉6)
金九는 대한인국민회 앞으로 보낸 편지와는 별도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洪焉(홍언)에게도 임시정부가 무사히 광주에 도착한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는 한국독립운동단체의 통일문제와 남목청사건에 대한 미주동포들의 여론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다고 적고 있어서 흥미롭다.7) 金九는 그만큼 재미동포들의 자신에 대한 평판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金九의 편지와는 별도로 임시정부 재무부에서도 임시정부의 이동사실을 알리고 미주동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대한인국민회 앞으로 보냈는데, 국민회 상무부는 9월15일에 750달러를 임시정부 재무부로 송금했다.8)
貴陽에서 본 苗族들의 행색
광주에도 일본군의 공습이 심해졌다. 金九는 광주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인 9월 하순에 대가족과 郭樂園 여사를 광주에서 서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佛山으로 옮기고, 임시정부 판공처는 南海縣城으로 옮겨서 사무원들만 근무하게 했다.9) 임시정부가 중국정부의 전시수도가 있는 重慶으로 가지 않고 남하하여 광동으로 온 것은 항구를 이용하여 미주동포들과의 통신을 유지하고, 최악의 경우에 하와이로 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중요 항구가 거의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나머지 항구마저 위험하여 통신마저 단절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중경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10) 金九는 장개석에게 임시정부도 중경으로 데려가 줄 것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고, 장개석도 중경으로 오라는 답전을 보내왔다.11) 金九는 9월30일에 曹成煥과 羅泰燮을 대동하고 다시 장사로 가서 장치중 주석을 면회하고 중경행의 편의를 부탁했다.12) 장치중은 중경행 차표 석 장과 貴州省 주석 吳鼎昌 앞으로 소개편지를 써주었다.13)
광주를 출발한 지 열흘 만에 金九 일행은 귀주성의 貴陽에 도착했다. 산중에 위치한 소도시 귀양은 돌이 많고 흙이 적은 척박한 고장이었다. 농가에서 흙을 져다가 바위 위에 깔고 씨를 뿌린 것을 보아도 흙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 수 있었다. 귀양시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었고 얼굴색도 굶주린 사람들처럼 누르스름했다. 그들은 귀주성을 비롯하여 중국 서남부 일대에 흩어져 사는 苗族(묘족)이었다. 金九는 묘족의 풍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한족보다 특히 묘족의 형색이 극히 궁핍하고 행동이 야만스러워 보였다. 중국말을 모르는 내가 언어로 한족과 묘족을 구별하기는 어려웠으나, 묘족 여자는 의복으로 구별하고, 묘족 남자는 야만스러운 눈빛으로 분별할 수 있었는데, 한족화한 묘족들도 많은 듯했다.
묘족은 4,000여 년 전 三苗씨의 자손이니, 삼묘 씨는 전생에 무슨 업보가 있기로 자손들이 누천년 역사상에 특출한 인물이 있다는 역사기록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는 삼묘 씨라는 것이 고대 명칭으로 잔존할 뿐 근대에는 없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묘족도 수십 수백 종별로 변화하여 호남, 광동, 광서, 운남, 귀주, 사천, 서강 등에 널리 퍼져 있다. 근대에 한족화한 묘족 중 영걸이 있다는데, 풍문에 의하면 광서성의 白崇禧 장군과 운남성의 주석 龍雲 등이 묘족이라 한다. 그러나 묘족의 선조를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풍문의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14)
金九는 귀양에서 여드레 동안 머물렀다. 중경에 도착한 것은 광주를 떠난 지 26일째 되는 10월26일이었다.15) 임시정부 가족들이 불산으로 옮길 때에는 그곳에서 오래 머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10월 중순이 되자 일본군이 불산 근처까지 진격해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내를 빠져나가는 시민들로 시내는 온통 야단법석이었다. 불산이 위험해지자 임시정부는 광서성 당국과 임시정부 이동 문제를 상의했다. 광서성 당국에서는 광서성의 수부인 桂林이나 柳州 가운데 한 곳을 택하라고 해서 유주를 택했다. 중경과의 거리가 유주가 계림보다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16) 광주는 10월21일에 일본군에 함락되고, 이어 10월27일에는 무한이 함락되었다. 광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金九는 대가족의 안부가 몹시 궁금했다.
임시정부 대가족은 오철성의 호의로 三水까지 가는 기차 한 칸을 배정받았다. 대가족 일행은 짐을 줄일대로 줄여서 불산역으로 집결했다. 기차역은 피란민들로 붐볐다. 대가족 일행은 위수사령부의 허가서가 도착하지 않아서 출발을 못하다가 저녁 늦게야 嚴恒燮이 허가서를 받아가지고 와서 가까스로 기차에 올랐다. 멀리서 일본군의 기관총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17)
대가족 일행을 태운 기차는 새벽 4시30분에 불산역을 출발했다.18) 광주가 일본군에 함락되기 하루 전인 10월20일이었다. 이때에 미처 탈출하지 못했던 동포 청년 수십 명은 광주가 함락되던 날 대포가 터지는 것을 무릅쓰고 탈출했다.19) 임시정부는 대가족 일행이 피란하던 이야기를 미주동포에게 보낸 편지에 실감나게 적었다.
〈수십만 피란민이 저마다 살려고 쓸려 밀려 나오는 속에서 겨우 화차 한 량을 얻어 타고 오는 우리 일행은 사람은 200여 명이오 짐짝은 400여 건이다. 잠자리같이 날아오는 왜적 비행기 아래로 가는 화차는 기적소리도 내지 못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달아나는데, 월한선 중간에 와서는 왜적 비행기가 우리가 타고 가는 화차를 향하여 폭발탄을 떨어뜨렸다. 꽝 하는 소리가 진동할 때에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보다 30년간 환란 중에 끌고 다니던 임시정부의 기록 존안이 다 없어질 것을 위하여 정신이 아득하였다. 차는 그대로 가고 몸은 그대로 앉았기에 비로소 죽음을 면한 줄 알았다. 나중에 들으니 우리가 타고 가는 화차 전면 2리쯤 되는 곳에 멈추어 있던 화차와 또 후방 약 2리 가량에 있던 교량을 깨트렸다고 한다.
목적지에 이르고 보니 그 화려한 도시가 거의 타서 밭이 되었고, 무수한 인민의 사상은 너무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고 또 차마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시체 하나를 찾아 맞추다가 머리와 발과 손을 찾지 못함과 고기 한 점도 남지 아니하여 형적이 없는 주검도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왜적 비행기의 인도유린의 참상이다. 이 편지를 쓰는 때에도 왜적 비행기의 그 흉악한 소리를 듣고 앉았으매 아무리 진정한 대도 붓끝이 절로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우선 따라 다니는 노약이나 향촌으로 보내어 안돈을 시킨 후에 우리들은 전선에 있어 이왕 해 오던 일을 계속할 뿐이다.…〉20)
밧줄로 木船 끌고 江을 거슬러 올라
삼수는 광주와 연결되는 廣三철도의 서쪽 종착역이었다. 삼수에서 유주까지 가기 위해서는 중국의 4대 강의 하나인 珠江(주강)을 따라 배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중국정부 당국과 교섭하여 중국 제4로군 운수사령부의 삼수지부에서 대가족 일행의 모든 짐을 운반해 주기로 하고, 삼수현 정부에서는 큰 목선 한 척을 내어 주었다. 그 목선은 100여 명의 식구가 한꺼번에 타고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배 안에는 부엌·변소 등의 시설도 갖추어져 있고, 강물을 퍼올려 간단히 몸을 씻을 수 있는 목욕실도 있었다.21)
대가족 일행은 주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사나흘쯤 가다가 광서성 초입인 梧州에 도착하여 이틀 동안 머물었다. 광주에서 직접 떠난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오주에서부터는 물살이 세어서 목선 자체로는 강을 거슬러 오르기가 힘들기 때문에 기선이 끌고 가야 했다. 일행은 기선 한 척을 구해서 목선을 끌게 했다. 그런데 桂平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에 목선을 끌던 기선이 도망쳐 버렸다. 선금을 다 주고 윤선을 빌린 것이 화근이었다. 새로 기선을 구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계평에서부터는 龍江(용강)으로 접어들었는데, 용강은 주강보다 물살이 더욱 빨라서 기선도 더는 목선을 끌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청년들이 배에서 내려 밧줄을 배에 묶고 강변을 따라 목선을 끌고 올라갔다.22)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 대가족 일행은 삼수를 떠난 지 꼬박 40일을 배 위에서 보내고 나서 11월30에 유주에 도착했다.23)
金九는 임시정부 대가족 일행이 유주에 도착했다는 전보를 받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유주에 도착한 대가족 일행을 다시 중경으로 데려오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중경에서는 대가족이 집단적으로 거주할 집도 구하기 어려운데다가 일본군의 폭격도 위험했다. 그리하여 우선 중경에서 30리쯤 떨어져 있는 ?江(기강)으로 대가족과 짐을 임시로 옮기기로 했다.
유주에서 중경까지의 길은 광주에서 유주까지 오기보다 훨씬 어려웠다. 광주에서 유주까지는 40일 넘어 걸리기는 했으나 수로로 이동했기 때문에 수월했다. 그러나 유주에서 四川省까지는 수로와 철길이 통하지 않아서 자동차로 이동해야 했다. 자동차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피란민들이 밀려들어 당일 차표를 사도 서너 달 뒤에나 차를 탈 수 있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당 차비와 숙박비가 100원이나 되어 대가족 전체가 이동하기 위해서는 만원 돈이 필요했다.
金九가 무엇보다도 걱정한 것은 여든이 넘은 노모의 건강이었다. 고령의 노모가 험한 산길을 일주일 이상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임시정부 대가족 가운데 일흔 살 이상 된 사람이 여섯 명이나 있어서 비행기로 모셔올 생각도 해보았으나, 일인당 비행기 운임이 250원이나 되었으므로 그것 또한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24)
중국정부의 차량지원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정부도 차량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고 있었다. 군수품을 운반하는 데 1,000량의 차량도 부족한 형편인데 100량밖에 없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金九는 대가족 일행을 중경으로 옮기기 위해 중국정부의 교통부와 중국국민당 중앙당부에 교섭을 시작했다. 여러 차례 교섭한 끝에 자동차 여섯 대를 구하고 이사비용도 마련하여 유주로 내려 보내고, 기강에는 조성환을 보내어 대가족이 거처할 집과 가구 등을 준비하게 했다.25)
金九는 임시정부와 대가족 일행을 중경으로 옮기기 위하여 미주 동포들에게 긴급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金九의 편지를 받은 대한인국민회는 1939년 1월5일에 金九에게 500달러를 송금해 주었다.26)
이때에 金九는 미주 동포들의 답장을 받아보기 위해 날마다 우체국으로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유주에 있던 장남 仁이 갑자기 나타났다.
『유주에서 할머님이 병이 나셨는데, 빨리 중경에 가시겠다고 말씀하셔서 신이와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郭樂園 여사의 恨 많은 죽음
金九는 아들을 따라서 급히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갔다. 중경에 도착한 뒤에 金九는 儲奇門(저기문)거리 鴻賓여관 3층 25호에 묵고 있었는데,27) 곽낙원 여사는 金九가 묵는 여관 바로 맞은편에 와 있었다. 金九는 어머니를 모시고 홍빈여관으로 와서 하룻밤을 같이 지냈다.
다음날 金弘敍가 찾아와서 곽낙원 여사를 자기가 모시겠다고 자청하여 강 남쪽 아궁보 孫家花園에 있는 그의 집으로 옮겼다. 곽낙원 여사의 병은 광서지방의 풍토병인 인후증이었다. 병원에서는 나이가 많지 않으면 수술을 할 수도 있고 병이 초기이기만 해도 치료할 방법이 있겠으나, 그녀는 여든한 살의 고령이고 치료할 시기도 놓쳐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했다.
이때에 상해에 있을 때부터 金九를 따르던 劉振東 부부가 중경에 왔다. 상해 同濟大學을 졸업한 유진동은 ?嶺(고령)에서 폐병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일본군에 점령될 것을 예상하고 중경으로 온 것이었다. 유진동 부부는 모친을 잘 모시지 못하는 金九의 딱한 처지를 알고 곽낙원 여사를 자기네가 돌보겠다면서 金九더러는 마음 놓고 독립사업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그러나 유진동 부부가 도착했을 때에는 곽낙원 여사의 병세가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악화된 뒤였다.28) 그녀는 병이 깊어지자 자신도 마지막이라고 각오하고 金九에게 말했다.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에 나의 유골과 仁이 어미 유골도 가지고 돌아가서 고향에 묻어라』
그녀는 대가족 일행이 미처 기강에 다 도착하기 전인 4월26일 오전 10시50분에 恨 많은 생애를 마쳤다.29) 金九는 어머니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머님은 50여 년 고생하다가 자유 독립이 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극히 원통하게 돌아가셨다. 대한민국 21년(1939) 4월26일 손가화원 안에서 영영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셨다. 그곳에서 오리 가량 되는 和尙山 공동묘지에 석실을 만들어 어머님을 모셨다. 모친은 살아 생전에도 대가족 중 최고령인 관계로 존장 대접을 받으시더니, 돌아가신 뒤에도 매장지 부근에 현정경, 한일래 등 수십 명의 한인 연하자들의 「지하회장」인 듯싶다.〉30)
중국 교통부에서 제공해 준 차량 여섯 대에 나누어 탄 임시정부 대가족 120여 명은 1939년 4월6일에서 22일 사이에 유주를 출발하여 5월3일까지 모두 기강에 도착했다.31) 이들은 조성환이 얻어 놓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큰 집에 들었다. 그리고 시내와 가까운 강가에 따로 방 몇 개를 얻어서 임시정부 청사와 홀로 사는 국무위원들의 숙소로 썼다.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는 강소성을 출발하여 안휘성, 강서성, 호남성, 광동성, 광서성, 귀주성을 거쳐 사천성 기강에 이르는 장장 5000킬로미터의 피란길을 끝냈다. 그것은 중국공산당이 1934년에 국민정부군에 쫓기어 강서성 瑞金에서 陝西省(섬서성) 延安까지 이동한 1만2000킬로미터의 「장정」에 견줄 만한 대이동이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대가족 사이에서는 중국 대륙을 떠돈 피란길을 「만리장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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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 어머니의 장례식 모습. 왼쪽부터 金信, 金仁, 金九, 金弘敍(白凡紀念館 제공). |
(2) 金元鳳과「同志同胞들에게 보내는 公開信」발표
중경에 도착한 金九는 임시정부 대가족을 중경으로 옮기는 일에 분주한 한편으로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운동을 다시 추진했다. 이때의 金九의 주장은 주의가 같은 단체끼리는 〈통합〉하고, 주의가 다른 단체와는 〈연합〉하자는 것이었다.33)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불신하여 그들과의 합작이나 통일전선을 거부해 온 金九가 이때에 이처럼 통합운동에 발벗고 나선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중-일전쟁에 따른 한국독립운동자들의 역량통합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그의 독립운동단체들에 대한 상황인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십년 염불에 도로아미타불격인데…』
〈우리 독립운동이 일어난 이래 각 단체가 우후죽순같이 만들어졌다가 거의 다 없어지고 내외지에 아직도 무력 유력은 별문제로 하고, 사회주의 방면에 한인공산당이 연해주 지방과 중국 관내외에 30여 개가 병립하여 암투하고, 민족운동단체는 국내는 헤아리지 않고 중국 관내외와 미주와 하와이를 합하면 근 20개가 되어 各立門戶하여 가지고, 明爭暗鬪 중에 동족애의 말살과 세인의 멸시 모두가 원치 않는 선물만 차지하게 되고, 어느 단체나 보암직한 단체는 한 개가 없으니 10년 염불에 도로아미타불 격인데, 객관적 주관적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改絃易轍(개현역철)을 않고서는 멸망도 우리로의 자멸도 못 되고 일본이 멸망하는 바람에 피멸의 지위밖에 튼튼히 내것 될 것이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34)
〈어찌하든지 현하 상태는 그대로 가지고 더 나가면 내적 외적으로 일호의 남은 희망이 없는데, 어찌하여 내적으로는 피차에 면상에 망국노 석 자를 각인하였으니, 누가 더 낫고 더 못하다는 것을 언급할 것 없으나, 지척에서 보는 중, 왜인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리까.…〉35)
이러한 통절한 상황인식은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자괴심과 책임감의 토로였다.
또한 金九가 통합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 데에는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통합된 역량을 對日항전에 이용하고자 한 중국정부의 강력한 요청도 작용했다. 조선혁명당의 간부였던 金學奎는 이때에 金九의 주동으로 추진된 통일운동은 〈중국정부의 발동〉에 의한 것이 되었다고 회고했다.36)
일본경찰의 정보보고는 金九가 金元鳳과 함께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 장개석의 직접적인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金九가 중경에 도착하고 한 달 뒤인 1938년 11월 말에 장개석이 金九를 만나서 김원봉과의 대동단결을 종용하고, 1940년 1월에는 계림에 있는 김원봉에게 전보를 쳐서 중경으로 오게 했다는 것이었다. 김원봉은 1월6일에 중경으로 와서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장 陣誠으로부터 장개석의 뜻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37) 그러나 이러한 기술을 확인할만한 다른 자료는 알려진 것이 없다.
또한 楠木廳 사건 뒤의 陳果夫의 태도변화도 金九로 하여금 통합운동에 열성을 쏟게 하는 자극제로 작용했던 것 같다. 중국국민당의 실권자로서 金九를 적극 지원해 왔던 陳果夫는 남목청 사건이 한국독립운동자들 사이의 내분이라는 데 대해 크게 실망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업무를 군사위원회로 이관시키기로 하고 자신을 보좌하여 실무를 담당하던 簫錚(소쟁)에게도 임시정부 지원업무에서 손을 떼도록 지시하고, 그 사실을 장개석에게 보고했다. 장개석은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하여 임시정부 지원업무를 군사위원회로 이관시키지 않고 중앙당부 비서처로 이관시키게 했다. 金九는 진과부가 임시정부 지원업무를 계속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38) 진과부는 단호했다. 그러자 金九는 장개석에게 진과부가 계속해서 임시정부 지원업무를 맡게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39)
朝鮮民族戰線聯盟과 朝鮮義勇隊
金九는 김원봉과의 합작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의 간부들이 탈퇴함으로써 민족혁명당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떨어져 나온 두 그룹과 함께 金九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를 결성하자, 김원봉은 공산주의 단체인 金星淑 등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무정부의 단체인 柳子明 등의 조선혁명자연맹과 연대하여 1937년 12월에 남경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약칭 민족전선)을 창설했었다.
그리고 이듬해 9월에는 민족혁명당을 탈당했던 崔昌益 등이 조직한 공산주의단체인 조선청년전위동맹도 조선민족전선연맹에 참가했다. 민족전선은 창립선언에서 연맹의 성격을 「계급전선」이나 「인민전선」이 아닌 「민족전선」이라고 천명하고, 그것은 또한 프랑스와 스페인 등의 국민전선과도 엄격히 구별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40) 조선민족전선연맹은 7개항의 기본강령과 20개항의 투쟁강령을 발표했는데, 투쟁강령에서 주목되는 것은 〈국내외 각지의 민족무장부대를 연합하여 통일된 민족혁명군대를 조직하여 민족해방투쟁을 실행한다〉고 하여 무장부대의 조직을 천명한 것이었다.41) 그리하여 1938년 10월10일에 漢口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는데, 그것은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인무장부대였다.
조선의용대는 이무렵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일본인 反戰主義者 아오야마 카즈오(靑山和夫)가 국민정부에 제안한 국제의용군 편성안과도 관련이 있었다. 아오야마는 국제의용군 계획을 제기하면서 중국에 있는 우수한 한인 약 70명으로 의용대를 편성하여 무한에 배치시킬 것을 건의했고, 국민당 정부는 아오야마의 안을 받아들여 무한에 있는 조선인 독립운동자들의 상황을 상세히 조사한 뒤에 민족전선 소속 청년 100여 명으로 의용대를 만들었던 것이다.42) 그리하여 조선의용대원들은 중국정부로부터 매달 30원(식비 20원, 공작비 10원)씩의 활동비를 지급받았다.43)
창설 당시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을 총대장으로 하는 총대부와 2개 區隊로 편성되었는데, 제1구대는 전원을 민족혁명당 당원들로, 제2구대는 조선청년전위동맹원들과 다른 단체 소속원들로 구성되었다. 100여 명이었던 조선의용대는 대원수가 점차 늘어나서 1939년 말에는 제3구대를 새로 편성했고, 1940년 2월에는 창설 당시보다 세 배가 늘어난 314명이 되었다.44) 창립 초기에 조선의용대는 중국 각 전쟁구역에 배치되어 반전 선전, 전투, 정보 수집, 포로 신문 및 적후 공작 등의 활동을 벌였다.45) 이러한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으로 의욕적인 무장부대조직을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결실을 보지 못했던 임시정부로서는 부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金九가 김원봉과 합작을 통하여 조선의용대를 임시정부 산하의 군대로 흡수하고자 기대했을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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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民族戰線聯盟 인사들이 모여 생활했던 孫家花園. 金九 어머니도 이곳 金弘敍의 집에 머물렀다(白凡紀念館 제공). |
在美同胞들은 金元鳳과의 合作반대
金九는 통합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민족전선 가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남안의 아궁보 손가화원을 찾아갔다.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지 보름 만인 1938년 10월25일에 무한이 함락되자 김원봉은 민족전선 간부들과 그 가족들을 손가화원으로 옮기고 자신은 조선의용군 본대를 이끌고 桂林으로 가서 그곳에 의용대 본부를 두고 중경을 오가고 있었다.46)
金九가 찾아갔을 때에도 김원봉은 없었다. 金枓奉, 김성숙, 尹琦燮, 成周寔, 김홍서, 朴建雄, 尹世? 등 민족전선 간부들은 金九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환영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金九는 지금은 주의를 논의할 때가 아니며, 민족적으로 조국을 광복한 뒤에 각각의 주의대로 당적 결합을 하기로 하고, 지금은 단일적으로 각 단체를 합동 통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金九의 의견에 찬성했다.
이때에 광복진선 3당의 주요 간부들은 아직 유주에 있었다. 그리하여 金九는 그들에게 지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는 한편, 임시정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재미동포들에게도 지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金九의 편지를 받은 한국국민당 간부들은 중경에 가서 토론하여 결정하자는 회답을 보내왔다. 미주와 하와이의 동포들은 〈통일은 찬성하나, 김약산(김원봉)은 공산주의자요. 선생이 공산당과 합작하여 통일하는 날, 우리 미국 교포와는 인연이 끊어지는 줄 알고 통일운동을 하시오〉 하는 회답을 보내왔다.47) 이때의 재미동포들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는 대한인 국민회의 다음과 같은 반응이 여실히 말해 준다.
〈우리 국민회는 본디 민족주의 목표하에 있고 또 체류국의 정치 법률과 및 질서를 존중하는 입장상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와 조직을 같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30년 이래 고통을 느끼던 분열을 뉘우쳐 깨닫고 능히 통일합작한다면 우리는 민족적 공의상 응당 경의를 표하겠고, 또 그들을 원조하는 도리는 이왕과 같이 임시정부를 후원하야 우리의 원조가 간접으로 그들에게 미치게 하는 것뿐이다.〉48)
單一黨 방식이냐 聯盟 방식이냐
金九는 재미동포들의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39년 3월에 김원봉이 중경에 도착하고,49) 뒤이어 4월에는 광복진선 세 정당의 주요 간부들이 중경에 도착하자 통일논의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50) 金九는 조완구, 엄항섭 등 한국국민당 주요 간부들과 통일문제를 논의했다. 그들은 金九의 단일당 조직을 반대했다. 그들 뿐만 아니라 한국국민당 당원들과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도 단일당 결성을 반대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념의 차이였다. 그들은 주의가 다른 단체와의 단일당 결성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51) 그들은 통합단일당보다는 연합체 구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金九는 그들을 설득했다. 각 단체가 자기 본체를 그대로 두고 연합체를 만든다면 통일기구 안에서 각기 자기 단체의 발전을 도모할 것이므로 도리어 마찰이 더 심할 것이고, 또 이전에는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운동을 반대하였으나 지금은 그들이 사회운동은 독립이 완성된 뒤에 본국에 가서 하고 당면해서는 순전히 민족적으로 국권의 완전 회복에만 전력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단일조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국민당 간부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사장 의견이 그러시다면 기강에 같이 가셔서 우리 국민당 전체 당원들과 두 우당 당원들의 의사가 일치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유주에서는 국민당은 물론이고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당원들까지도 연합론이 강합니다』52)
이 무렵 金九는 어머니 장례를 치르느라 건강이 나빠져서 쉬고 있었다. 통합작업이 쉽게 진척되지 않자 기강으로 가서 반대파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그러나 자기가 이끄는 국민당 간부들과 당원들을 설득하는 데에도 여드레 동안이나 회의를 열어야 했다. 다시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간부들을 만나서는 근 한 달 만에야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53)
한편 민족전선 내부에서도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민족전선은 산하의 각 단체와 동포들을 망라하여 매주 한 차례씩 좌담회를 열어 토론하기로 결정하고, 2월 중순부터 좌담회를 열었다. 전후 네댓 차례 토론이 진행되어 통일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나, 결성방법을 두고는 의견이 두 가지로 갈렸다. 민족혁명당은 단일당 방식의 통일을 주장했으나, 두 공산주의 단체는 연맹방식의 통일을 주장했다.54) 무정부주의 단체인 조선혁명자연맹은 민족혁명당의 단일당 방식의 통합을 지지했다.55)
獨立運動이 失敗한 原因을 심각하게 反省
이 무렵 金九는 朴贊翊과 함께 기거하면서 기강을 왕래했다. 김원봉도 아궁보의 손가화원으로 가지 않고 金九가 묵고 있는 홍빈여관에 따로 방을 잡아서 묵었다. 金九와 김원봉은 통일문제에 대해 수시로 협의했다.56) 그 결과 두 사람은 5월10일에 공동명의로 16쪽에 이르는 장문의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公開信」을 발표했다.57)
「공개신」은 먼저 두 사람이 연명선언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최근 우리 양인은 각지의 동지 동포 제군으로부터 우리 양인의 상호관계 및 단결여하와 현 단계 조선혁명의 정치 주장 및 목전 해외운동 통일문제에 관한 의견에 대하야 질문의 서신을 많이 접수하였다. 이에 우리 양인은 이 공개신으로서 이를 답복하려 한다.…〉
「공개신」은 먼저 과거의 독립운동이 실패한 원인을 심각하게 반성했다.
〈우리 양인은 3·1 운동 이후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향하야 계속 분투하였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한 개의 강적에 대한 투쟁을 통일적으로 강하고 유력하게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군중을 떠난 우리 양인의 특수환경의 영향도 없지 않았으나, 주로는 우리가 민족적 경각성이 부족하였던 것이며 민족혁명의 전략적 임무를 정확히 파악 실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거 수십 년간 우리 민족운동사상의 파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과 목전 중국민족의 최후의 필승을 향하야 매진하고 있는 민족적 총단결의 교훈에서 이전 종종의 착오를 통감하고, 우리 양인은 금후 신성한 조선민족 해방의 대업을 위하야 동심협력할 것을 동지 동포 앞에 고백하는 동시에 목전의 내외 정세와 현 단계의 우리 정치 주장을 이하에 진술하려 한다.…〉
이어 「공개신」은 특히 중-일전쟁 이후의 국제정세와 중국인들의 항일운동을 언급하고 나서, 중-일전쟁 발발 이후로 일본의 폭압적인 각종 수탈정책에 시달리는 국내동포의 비참한 상황을 상세히 언급했다. 그러면서 「공개신」은 한-중연대를 통한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관내에 현존하는 일체의 독립운동 단체를 해체하고 공동의 정강 아래 재편할 것을 제창했다.
『全민족적 역량을 集中運轉하는 統一的組織 건립해야』
〈관내운동의 이와 같은 사명을 이행하기 위하야 무엇보다 먼저 관내에 현존하는 각 혁명단체는 일률적으로 해소하고 현 단계의 공동한 정강하에서 재편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현존 각 단체의 할거적 현상과 파쟁적 마찰을 정지하고 단결 제일의 목표 밑에서 일체의 역량과 행동을 통일하야 우리 투쟁을 적극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각 단체의 표방하는 주의는 같지 않다 할지라도 현단계 조선혁명에 대한 정치강령과 투쟁대상은 일치한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4인1당, 6인1당의 각 단체가 구성 분립되고 있는 것은 투쟁역량의 분산과 호상알력을 필연적으로 초래하야, 적을 향한 힘있는 투쟁을 전개할 수 없을뿐더러 더욱 민족적 체통의 손상은 감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각 소단체를 본위로서 연맹식 방법에 의하야 관내운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이론도 있으나 이것은 결코 재래의 무원칙적 파쟁과 상호마찰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관내통일운동의 연맹식 방법론은 관내의 현존하는 불통일한 현상을 연장하는 방법이며, 무원칙적 파쟁의 합리화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에게 함축되고 있는 위대한 혁명역량은 이 위대한 시기에 있어서 반드시 최후의 결전을 전개할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이 결전을 승리로 전취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과거의 실패의 경험에 비추어 전 민족적 역량을 집중운전하는 통일적 조직이 건립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 통일적 조직은 전 민족의 의사와 요구에 의한 혁명적 강령에서 건립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 민족적 통일조직의 문제와 정치강령의 문제는 당면해서 가장 긴급한 문제이며 중심의 문제이다.…〉
그러면서도 「공개신」이 전 민족적 통일기구 구성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이다.
〈전 민족적 통일기구의 구체적 조직방식에 대하야 우리는 아직 국내의 제동지와 좀더 충분한 토의의 여유를 두면서, 지금은 이에 대한 우리 의견의 언급을 보류한다.…〉
이러한 주장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면서 참여를 거부해 온 김원봉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土地는 農民에게, 大企業은 國有로
「공개신」은 이어 〈현 단계의 정치강령의 대강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10개 항의 정치강령을 제시했다.
1)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여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함.
2)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세력을 숙청하고 민주공화제를 건립함.
3) 국내에 있는 일본제국주의자의 公私財産 및 매국적 친일파의 일체 재산을 몰수함.
4) 공업·운수·은행과 기타 산업부문에서 국가적 의의가 있는 대기업을 국유로 함.
5) 토지는 농민에 분급하되, 토지의 매매를 금지함(조선 농민의 대부분은 소작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자의 토지와 친일적 대지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는바, 그 토지는 국가에서 몰수하야 그대로 농민에게 주되 매매를 금지함이니, 이는 가혹한 착취관계에서 해방한 농민이 과거 상태로 재진입하는 것을 방지함이다).
6) 노동시간을 감소하며 노동에 관한 각종 사회보험사업을 실시함.
7) 부녀의 정치·경제·사회상의 권리 및 지위를 남자와 평등으로 함.
8) 국민은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 자유가 있음.
9) 국민의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을 국가의 경비로 실시함.
10) 자유·평등·相助의 원칙에 기초하야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촉진함.
토지와 기간산업의 국유화는 金九의 한국국민당도 표방하고 있는 것이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이 10개 항의 내용도 김원봉의 주장이 많이 반영된 것이었다.
「공개신」은 〈끝으로 목전의 중국 관내운동에 대한 우리 양인의 공통한 의견을 발표하고자 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자신에 찬 말로써 마무리했다.
〈우리는 다같이 동일한 운명에서 동일한 목표를 항하야 투쟁하는 동지며 동포들이다. 우리는 이미 각 소단체의 분립적 투쟁으로 인한 민족적 손해를 경험하고 통일단결에 의한 광명을 발견한 이상, 우리가 통쾌히 한 덩어리에 단합되지 못할 또 무슨 구구한 조건이 없을 줄 믿는다. 우리 양인은 개인의 의견으로서가 아니라 영용히 투쟁하고 있는 다수 동지의 일치한 의지 위에서 해외 다수 동지 동포와 함께 먼저 관내운동 조직의 획기적 변혁과 광명한 신국면의 창조를 향하야 자신과 용기를 가지고 전진하려고 한다. 제동지의 건투를 빌며 아울러 혁명경례를 드린다.〉58)
(3) 워싱턴에 가서 歐美委員部 활동재개
1939년 3월30일에 호놀룰루를 떠난 李承晩은 시애틀과 몬태나 주의 뷰트(Butte)를 거쳐서 4월13일에 워싱턴에 도착했다.59) 李承晩은 결혼한 뒤에 처음으로 떨어져 있는 프란체스카에게 마음이 쓰였다. 뷰트에서 편지를 보내고 워싱턴에 도착해서는 다시 〈별일 없는지 궁금하오. 전보하오〉라는 전보를 쳤다. 프란체스카는 〈뷰트에서 주신 편지 고마워요. 기분 아주 좋아요. 사랑〉이라는 애정어린 답전을 보내왔다.60)
「워싱턴 메리고라운드」가 李承晩의 사무소 개설 소식 알려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李承晩은 뉴욕의 중국인들로부터 그곳에서 열리는 중국 후원을 위한 집회에 참석해 달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뉴욕으로 가서 비슷한 성격의 세 집회에 참석했다. 한 집회에서는 최근에 중국을 방문하고 온 연사가 남경침공 때에 일본군 비행기가 투하한 폭탄 가운데 폭발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펜실베이니아의 폭탄제조창에서 만든 것임이 판명되었다면서 미국의 對日무기판매를 규탄하자, 수천 명의 군중이 흥분하여 어쩔 줄 모르는 광경을 보았다.
한편 일본정부의 역선전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이 선전하는 말은, 중-일전쟁에서 만일 중국이 승리하게 되면 중국 전체가 공산화할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경우 외국인들이 중국에서 취할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중국에 이해관계가 있는 미국 사업가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李承晩은 이러한 분위기를 보면서 중국 지원을 위한 선전의 필요성을 다시금 절감했다.61)
李承晩은 5월7일에 인민생명보험회사 빌딩(Peoples Life Insurance Bld.) 204호에 사무소를 개설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언론인들은 李承晩에 대하여 호의적이었다. 일찍이 프란체스카를 미국에 오게 하는 일을 도와주었던 피어슨(Drew Pearson)과 알렌(Robert S. Allen)은 이때에도 그들의 유명한 신디케이트 칼럼 「워싱턴 메리고라운드(Washington Merry-Go-Round) 5월9일자에 李承晩의 사무소 개설 사실을 소개했다. 이 칼럼 기사를 두고 「新韓民報」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세계 논조가 험악하고 국내외 경제가 핍박할 뿐 아니라 불뚝불뚝하는 한국 민심에 초민(焦悶)되는 왜적은 요새 새 걱정거리가 또 한가지 생겼으니, 5월9일에 미국 48개 주, 30개 도시 각 신문지상에 널리 전파된 기사를 보면, 왜적들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근심이 얼마큼 크며 저들의 신경이 얼마나 번민함을 가히 짐작할 것이다.
위에 말한 신문기사는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기자(칼럼니스트) 피어슨과 알렌이 전국 각 신문에 발표한 글이오 대지는 아래와 같다.〉
그러면서 「新韓民報」는 「워싱턴 메리고라운드」가 소개한 李承晩의 사무소 개설에 관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재했다.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李承晩이 사무소를 개설한 이튿날 마흔 살쯤 된 미국인 한 사람이 李承晩을 찾아왔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그에게 李承晩이 찾아온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서 워싱턴에 무슨 사무를 띠고 오셨는지 알고 싶어서 일본대사관에서 저를 보내어 왔습니다』
李承晩은 그 미국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하던 사업을 계속하는 사람이오. 나의 목적은 일본이 압박하고 학대하는 2,300만 나의 동족들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는 데 헌신하는 바이니, 얼른 말하면 즉 일본을 반박하는 일이오』
그러자 일본대사관에서 온 미국인은 李承晩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고 물러갔다.
「워싱턴 메리고라운드」는 이러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한국은 1910년에 일본이 병탄하였으나 한국 인민들은 영원히 일본에 반항하며, 李承晩 박사의 인도를 따르고 있다.〉62)
위의 이야기는 워싱턴의 또 한 사람의 저명한 기자 힐(Edwin C. Hill)에 의해서도 소개되었다. 힐의 피처기사는 5월17일자로 킹스 피처스 회사(Kings Features Inc.)의 공급으로 전국의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다. 힐은 기사의 마지막을 〈李承晩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하여 45년 동안 투쟁했고, 이제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고 적었다.63)
「워싱턴 메리고라운드」에 관한 「新韓民報」의 기사는 「太平洋週報」에 그대로 전재되어,64) 李承晩의 사무소 재개에 관한 뉴스는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에게 함께 전해졌다. 호놀룰루에서 발행되는 「스타 블리턴(The Star Bulletin)」지는 워싱턴 특파원 기사로 李承晩이 미국대통령에게 對日 무기수출을 금지할 권한을 주자는 운동을 후원한다고 보도했다.65) 또한 李承晩의 활동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에드워드 베네스(Edvard Benes∨) 前 대통령의 그것과 비견되는 것으로 소개하는 신문도 있었다.66)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세네터(The Senator)」 5월20일자는 李承晩의 젊어서 「매일신문」을 발행하던 때부터의 경력을 길게 소개하는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67) 「太平洋週報」는 미국신문들의 이러한 보도를 낱낱이 소개하면서, 〈리박사의 독립운동 소식이 각 신문에 전파된 것만 하여도 그 가치를 재정으로는 비교할 수 없다〉면서 동포들의 자금 지원을 독려했다.68)
韓吉洙도 中韓民衆同盟團 대표로 사무소 차려
그러나 이제 워싱턴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지기는 李承晩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1937년 10월에 호놀룰루에서 열린 하와이의 州昇格 문제에 대한 연방의회 상하 양원 합동위원회의 공청회에 출석하여 증언했던 일을 계기로 갑자기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수수께끼의 인물 韓吉洙가 상원의원 질레트(Guy Gillette)의 도움으로 1938년 12월에 미국 본토로 건너와서 中韓民衆同盟團 워싱턴 대표라는 직함으로 미국인들을 상대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길수는 워싱턴에 사무소를 두고 정력적으로 강연여행을 하고 다녔고, 「중한동맹단선전문」이라는 등사판 기관지도 발행하고 있었다. 그는 1941년 4월까지 35개 주의 90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167회의 강연과 7회의 라디오 강연을 했다고 했다. 강연을 통하여 그는 일본의 중국침략을 비판하고, 석유와 군수물자의 對日 수출금지와 일본의 파나마 운하 사용금지 등을 미국정부에 촉구하고, 미국시민들에게는 중국에 대한 지원과 동시에 한국독립의 지원을 호소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국무부의 권유로 중한민중동맹단의 워싱턴 외국인 로비스트로 등록했다.69)
李承晩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에 한길수는 미국 의회 외무위원회에 출석하여 토머스 의원의 괌섬 무장방비안에 대한 찬성증언을 하고 있었다.70)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한길수의 李承晩에 대한 태도는 정중했다. 그러한 사정은 동지회 뉴욕지부 기관지의 다음과 같은 기사로도 짐작할 수 있다.
〈전간 워싱턴에 한중연맹 사무소를 두고 각 방면으로 활동하는 한길수씨는 리승만 박사를 협조함이 많고, 또한 어떠한 방면으로는 적지 않은 편의도 많다고.〉71)
이 기사에서 말한 〈어떠한 방면〉의 편의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딱히 짐작할 수 없다.
체코人들의 國民外交部 본떠 大韓民國委員部로
李承晩은 워싱턴에 사무소를 다시 열면서, 미국인들의 권유대로 체코인들의 국민외교부를 본떠서 대한국민위원부(Korean Nationalist Mission)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72) 일반적으로는 그냥 한국위원부(Korean Mission)로 알려졌다.73) 처음에는 대한독립위원부(Korean Independence Mission)라는 명칭이 어떨까 하고 호놀룰루의 동지회 본부와 동지회 로스앤젤레스 지부로 전보로 상의하기도 했다가,74) 대한국민위원부로 결정한 것이었다. 구미위원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은 임시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호놀룰루를 떠나 올 때만 해도 구미위원부의 명칭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워싱턴으로 오는 동안 동포들과 미국인 친구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바꾸기로 한 것 같다. 그리고 체코인들의 국민외교부를 본뜨려고 한 것은 1939년 3월에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군에게 점령된 뒤에 미국에 거류하는 체코인들의 독립운동 열의가 고조되어 국민외교부를 조직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韓國親友會를 다시 조직하기로
대한국민위원부 사무소를 개설한 李承晩이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1919년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한 뒤에 미국 전역에 걸쳐서 미국인들로 조직했던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부활시키는 일이었다. 한국친우회를 부활시키는 목적은, 첫째로 일본의 선전에 대항하여 한국과 극동에 관한 진정한 사실을 전파하고, 둘째로 한국 안에 있는 기독교인의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며, 셋째로 태평양 연안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동양에 민본주의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75) 그러나 李承晩에게는 이러한 사업보다도 더 절실한 목표가 있었다. 8월에 하와이로 가서 동지들에게 한 보고연설에서 李承晩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가서 지나간 몇 달 동안에 한 일은 이전에 있던 한국친우회를 복설한 일이외다. 구미위원부의 문을 닫고 소위 짐짝은 다 몰아다가 남의 곳간에 쌓아 두었다가 이제 다시 끌어내다가 먼지를 털어 가며 사무실이라고 차리고 보니, 이전에 하던 일을 모두 되풀이하게 되었소.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은 시카고를 중심으로 150만 명이나 살고 보니 세력이 굉장하지마는 우리의 세력이야 말할 것 무엇 있소. 이 운동을 계속해 가야만 할 터인데, 우리의 재력만 의지할 수 없어서 친우회를 복설한 것이외다. 회원 1만 명만 얻고 회원마다 1년에 1달러씩만 준다면 1만 달러는 될 터이니, 1만 달러 돈만 가지게 되면 문 닫힐 일은 없지 않습니까.…』76)
이처럼 李承晩이 한국친우회를 부활시키는 일에 주력한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에 의한 활동자금의 확보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臨時政府는 歐美委員部 부활 인정 안 해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임시정부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높아지면서 재미동포들은 인구세·애국금·특연금 등 각종 성금 모금에 호응함으로써 조국광복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표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李承晩도 동지회 이외의 일반 동포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의 관계정상화가 필요했다. 그는 하와이의 동지회 중앙부장 金利濟를 통하여 金九에게 구미위원부의 활동 재개를 통보하고 구미위원부의 부활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를 승인하지 않고 李承晩의 활동을 〈민간외교〉로 규정했다.77) 10월에 기강에서 열린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정무위원 겸 국무원 비서장 車利錫이 제출한 「정무보고」는 〈李承晩씨도 외교의 필요를 느끼고 워싱턴에 가서 각 요로 인사와 교제하면서 본 정부에 향하야 구미위원부의 부활을 요구하였으나, 구미위원부는 이미 의회에서 그의 폐지를 결정한 것이므로 오늘 갑자기 부활시킬 수 없다는 취지로 회답하였음〉78)이라고 했다.
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의 부활을 승인하지 않은 것은 李承晩의 지론인 외교 선전론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때문이었으나, 그 밖에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한길수 문제였다.
임시정부가 기강에 정착하고 난 뒤인 6월25일에 金九가 동지회 중앙부장 김이제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는 그동안의 李承晩과 임시정부 사이의 연락상황과 이 무렵 임시정부가 李承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우리 광복운동이 千載一時(천재일시)인 이때에 주신 전보와 편지를 받아보고 이제야 붓을 들게 되어 송구하오며, 어저께 워싱턴 李박사의 전보도 받자왔습니다. 현하 모든 힘과 책략을 집중하여 중국 항전의 절호한 시기를 이용하여 왜구를 打滅(타멸)할 차제에, 李박사와 같은 민족적으로 명망이 중하고 국제적으로 성가가 높은 인격으로 선전이나 외교 방면에서 艱苦(간고)를 자임하심이 극히 감사한 일인 것은 우리 일반 동포가 공인할 것은 물론의 일이오나, 외교와 선전은 사실을 배경으로 할 것인데, 우리는 오늘날 무슨 사실을 가지고 선전할 것인가. 왜구가 악독하다 야만이다함은 세상이 다 아니, 우리가 자체의 사실을 가지고 선전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데, 무슨 사실로 할까.…〉
金九는 李承晩의 非暴力主義 비판
이렇게 전제한 다음 金九는 李承晩의 지론인 비폭력주의는 현 시점에서 선전할 것이 못 된다고 잘라 말했다.
〈己未宣言을 근거하여 비폭력으로 정신운동만을 선전하여 세인에게 정신적 원조를 구할까요. 아니오이다. 원동 각 단체는 임시정부까지, 3·1절 기념식에 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폐지한 지 10여 년입니다. 公約三章이 우리 전 민의에 위배되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인도 어떤 곳이나 필리핀 루송의 운동인 것이고, 대유혈을 목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혈운동으로야 우방의 도움도 얻을 수 있으나, 정신운동으로는 자체로 진행키 불능하고 다른 사람의 원조도 소망이 없습니다. 지금 화북에 유격대, 화남에 의용대가 세인의 예찬을 받는바, 화북에는 장차 한국독립운동을 조직코저 노력 중인데, 외교나 선전하는 인사들은 비무장·비폭력운동을 절규한다면 자체모순만 노출함이니, 크게 신중할 바이오며, 선전기관은 무엇이 적당할까. 저의 생각은 임시정부나 폐지된 지 오래된 구미위원부 모두가 부적당하고, 제일 좋은 것은 해외 각 단체가 통일된 기관 명의로 우리의 군사운동을 전력 선전하는 것이 급선무일까 하나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 무렵 金九는 구미위원부는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 임시정부보다도 그가 추진하고 있는 통합 단일당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동지회도 통합 단일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李承晩의 선전활동도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극동지역에서 추진되고 있는 통일운동에는 두 가지 방안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 원동 각 단체가 규합하는 통일은 두 가지가 있으니, 저와 김원봉과 일반 민족운동자는 단일을 주장하고 각 파 공산주의자들은 연합을 주장하는데, 단일당을 찬성하는 단체가 대다수이니 단일이 성공될 듯합니다. 귀 동지회의 제위도 차제에 희생적 정신으로 遠東遠西에 각 단체가 打成一片하는 데 같이 노력하심이 급선무임을 양찰하시오며, 이번에 애국단, 국민회 양 단체가 국민당에 합동하는데 그 합동하는 일은 찬성이고, 국민당의 명의는 본당에서 벌써 희생을 작정한 것인즉, 장래에 대당이 성립되는 대로 하나의 명의가 산출될 것입니다. 우견에는 李박사께서 선전이나 외교를 이상의 목표로 가지시고 하셔 주셨으면, 또는 무조건으로 통일에 참가하시며 그것으로 선전의 자료를 위하심이 여하하올지.…〉
이처럼 이제 金九는 李承晩에게 지금까지보다 달라진 자세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면서 李承晩이 자신의 의견에 따라 줄 것을 요청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李承晩이 다음 사항을 외교와 선전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로 중국 동북부(만주)에 독립군을 편성할 자금을 미 군사당국에 교섭할 것(화남의 의용대는 중국의 원조로 진행하고 있으나 동북에는 재력 부족으로 아직 착수하지 못하고 있음).
둘째로 북미 및 하와이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기술을 가르칠 것.
셋째로 특히 필리핀에서 원동 방면의 한인 청년을 모집하여 항공요원을 양성하는 데 편의를 제공할 것.
넷째로 상해·천진·북경·홍콩·국내·일본의 모모 지점에 정보망을 비밀히 설치할 것.
그러면서 金九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상 몇 건으로 외교의 목표로 하시고, 또는 한길수 군도 기위 등장을 한 이상에는 상호모순이 없어야 할 터인데, 이상 나열한 조건을 가지고 협의 진행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저는 모친상에 뒤이어서 자리에 눕게 되어 아직 기동을 못합니다. 미처 답함을 못 한 것 미안하여 몇 자 적어 보내 드리오니, 李박사께 ?呈하시와 참고케 하시면 감사합니다.
李박사에게 중경 우체함 95를 통지하여 주오.〉79)
金九의 이러한 주장은 바로 임시정부의 외교에 대한 인식과 방침을 그대로 표명한 것이었다. 위에서 본 1939년의 임시의정원 회의 때의 임시정부의 「정무보고」는 외교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우리가 어떠한 구체적 조건을 가지고 외교 교섭을 개시하는 데에는 우리의 실력을 다소라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있은 후가 아니면 아무 실효가 없으리라고 보는 점에서, 우리는 먼저 미약하나마 우리의 자력에 의한 활동, 즉 다시 말하면 세인이 눈을 뜨고 주시할 만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야 할 것을 선결조건으로 인식하야, 이것이 다소라도 실현되기 전에는 예비적 외교가 있을 뿐으로서 직접으로 정면에 서서 조건적 외교는 아직 개시하지 않으려 함.〉80)
임시정부의 이러한 정책인식은 아무리 전쟁 분위기에 따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韓吉洙의 活動도 적당치 않아…』
金九가 이 편지에서 언급한 李承晩의 전보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 李承晩은 대한국민위원부 사무소를 개설한 뒤에 워싱턴 주재 중국대사 胡適(호적)을 만났다. 중국의 저명한 학자이자 교육가인 호적은 1938년에 워싱턴 주재 중국대사로 부임해 있었다. 李承晩은 호적을 만나서도 중국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선전활동을 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호적은 『미국 친구들이 선전을 많이 해주고 있으니까 우리가 더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李承晩은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비행기 700만 달러어치를 사간다는 말을 듣고는 호적에게 비행기 구입하는 데는 600만 달러만 쓰고 100만 달러는 떼어서 선전비로 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81) 이 자리에서 李承晩은 호적에게 金九의 근황을 좀 알아보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82) 호적은 본국정부에 金九의 근황을 물으면서 어쩌면 李承晩이 金九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함께 보냈는지 알 수 없다.
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 부활을 거부한 것은 한길수의 요구에 대한 조치와의 형평성도 고려한 것이었다. 한길수는 임시정부에 대해 중한동맹단의 존재와 그것을 대표한 자신의 외교사업을 인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임시정부는 한길수의 요구도 거부했었다.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임시정부의 「정무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와이에 있는 모인사들은 중한동맹단을 조직하고 한길수씨를 대표로 미국에 파견하야 시카고와 워싱턴 등 각지에서 맹렬히 활동하야 미국 각계 인사의 열렬한 환영도 받으면서 본 정부에 향하야 그 단체의 존재와 외교사업을 인준하여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그들의 외교목표와 선전 주지가 적당치 못하기 때문에 본 정부에서도 그들의 부적당한 점을 적발하야 그의 시정을 지시하였으며…〉83)
한길수가 미국 각계 인사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한중동맹단의 외교 목표와 선전 주지가 적당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러한 평가는 金九가 李承晩에게 자신이 나열한 조건을 가지고 한길수와 협의 진행하라고 한 것과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어서 주목된다.
(4) 李承晩은 金九에게 반박 편지 보내
李承晩은 한인기독학원의 여름방학 동안 프란체스카를 워싱턴에 와 있게 했다. 그것은 이래저래 동포들의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으나, 그로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그러한 사정을 「太平洋週報」는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총재께서 외교사업을 다시 신설케 되시므로 지금에는 얼마간 조력하는 사무원이 있는 것이 필요하며, 경비도 객지에서 독신 생활비에 얼마를 더 요구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한다. 그래서 미주 대륙에 계신 동지들이 리박사 부인께서 워싱턴에 가시는 여행비를 판비하야 리박사 부인께서 이달 2일 선편에 발정케 되었으니, 외교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리박사께서는 한국친우회를 다시 복설키에 분망중인즉, 부인의 금번 여행은 큰 도움이 많을 바이며, 리박사 부인께서는 개학 전에 속히 8월2일에 회환하신다더라.〉84)
귀국한 매큔에게 시카고親友會 조직 부탁
프란체스카가 워싱턴에 온다는 소식은 미주의 동포들에게도 곧 알려졌다.85) 프란체스카는 6월2일에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1주일 뒤인 9일에 시카고에 도착했다. 李承晩은 한국친우회 회원모집을 위하여 하루 전에 그곳에 와 있었다. 李承晩은 동지회 시카고 지부 사람들을 중심으로 여러 동포들을 만나서 한국친우회 복설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고, 10일에는 한국에서 귀국한 매큔(George S. McCune: 한국이름 尹山溫)을 오찬에 초청하여 시카고에 한국친우회를 설립하는 일을 주동해 줄 것을 부탁했다. 매큔은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직을 맡아서 활동하다가 1936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귀국해 있었다. 매큔은 李承晩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86) 李承晩은 11일에는 한인교회에 가서 동포들을 상대로 광복운동에 관한 연설을 했다.87) 李承晩 내외는 이튿날 디트로이트에 들러서 동포들을 만나 보고, 곧바로 워싱턴으로 갔다.
한국친우회를 다시 조직하는 일은 기대했던 것만큼 잘 진척되지 않았다. 휴가철이 되어 미국 국회도 폐회되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려워졌다. 경비만 허비하면서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것은 어렵게 경비지원을 하고 있는 동포들에게도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호놀룰루의 동지회 중앙부는 5월10일에 400달러를 보낸 데 이어,88) 프란체스카 편에도 200달러를 보내왔다.89) 그렇기 때문에 李承晩은 하와이를 떠나오기 전에도 여름 동안 워싱턴 등지에서 유력한 백인친구들을 만나기가 어렵게 되면 하와이로 돌아왔다가 가겠다는 말을 했었다. 李承晩은 프란체스카와 함께 하와이로 돌아가서 한인기독학원의 개학준비도 보아 주고, 또 신축한 한인기독교회의 운영과 동지회의 활동방향에 관해서도 확실한 대책을 강구해 놓고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는 뉴욕에 갔다가 로스앤젤레스의 동지회 지부와 호놀룰루의 동지회로 그 사실을 통보했다.90)
李承晩 내외는 대한국민위원부의 일을 張基永에게 맡기고 워싱턴을 떠나서 7월22일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로스앤젤레스의 동포들은 李承晩 내외를 열렬히 환영했다. 동지회 로스앤젤레스 지부 주최로 7월25일 저녁에 신축한 한인장로교회 예배당에서 열린 환영회에는 150여 명의 동포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李承晩은 3·1정신을 강조하고, 동양의 장래와 在美한인의 장래문제에 대하여 연설했다. 이튿날 저녁에는 국민회 중앙상무위원회가 李承晩을 초대하여 만찬회를 열었다.91)
『불행히 리박사가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이 무렵 동지회 로스앤젤레스 지부는 현순의 아들인 현 피터(Peter Hyun)가 회장을 맡아서 활동하고 있었다. 李承晩 내외는 7월27일에 로스앤젤레스를 떠나서 8월2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하는 「맷소니아」호를 탈 예정이었으나 프란체스카가 병이 나서 연기되었다. 이때에 李承晩 내외에게 〈안전하고 행복한 항해가 되시기를 충심으로 빕니다〉라는 한길수의 전보가 전해졌다.92) 이 무렵까지는 한길수의 태도가 이처럼 정중했으므로 동지회에서는 한길수에게 동지회에 입회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동지회의 손창희에게 보낸 한길수의 편지는 이때의 李承晩과 동지회에 대한 한길수의 태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불행히 리박사가 오늘 오후 5시에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물론 리박사의 회정이 상당한 이유가 있는 줄 믿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선생과 동지회에서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사하셔서 속히 이곳으로 오시도록 하야 주시오. 원동시세가 우리 기회를 주는 첫걸음입니다. 그런 고로 리박사가 워싱턴에 있어서 같이 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길수의 이러한 말은 李承晩이 하와이로 돌아간 이유가 단순히 여름휴가철이어서 미국인들을 만나기가 어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길수는 동지회에 가입하라는 권유에 대해서는, 자신은 한중민중동맹단의 워싱턴 대표로 일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그러나 만일 나 같은 못생긴 놈이 동지회원이 되는데 양 단체가 서로 양해로 한국을 위하야 일을 전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면, 우리 단체 간부와 공의하야 동지회원이 되겠습니다〉라면서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太平洋週報」가 자신의 활동을 전혀 보도하고 있지 않는 사실을 은근히 비판했다.
〈이곳의 일본놈들을 위하야 일하여 주는 어떠한 백인들은 「太平洋週報」와 「國民報」를 가지고 다니면서 말하기를 한국사람 단체들은 민족적 일이 아니라 몇 사람들이 자기네 밥벌이 하기 위하야 한국 사람을 충동하여 말로 독립운동한다고 하며, 보아라 리박사의 말이 미국 신문과 잡지상에 났지마는 저희 「國民報」에서는 소문도 아니낸다고 비평합니다. 또한 「태평양주보」에서는 한길수가 무엇을 하든지 소문도 아니낸다 하며 비평하고, 재미있게 떠들며 … 또한 리박사와 한길수가 몇 날이 못 되어서 싸운다고 하였습니다.…〉93)
李承晩 내외는 8월10일에야 로스앤젤레스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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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내외가 하와이로 떠나기 전날 동지회 로스앤젤레스 지부에서 마련한 송별회. 뒷줄 오른쪽으로부터 네 번째가 林炳稷, 열 번째가 李承晩, 열한 번째가 金龍中,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영기이다〔유영익,「이승만의 삶과 꿈」(1996)에서〕. |
美國人들이 과거를 뉘우치고 있다고 報告
李承晩 내외를 태운 「맷소니아」호가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것은 8월16일 아침 7시30분이었다.94) 18일 저녁에 킹스트리트의 동양청찬관에서 열린 환영만찬회에서 李承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워싱턴으로 갈 때에 선편의 사정으로 시애틀로 직행하야 시카고를 들러서 워싱턴으로 향하는 연도에서 다수 동포들을 만나 보았소이다. 워싱턴에 있는 동안 모모 백인 친구들이며 정객들과 교제하여 보았는데, 여러 친구들의 말이 1919년에 당신이 조선문제를 일으킬 때에 우리들은 친구된 의리로 동정하면서도 이것은 과거에 장사한 죽은 문제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느니라는 의심을 가졌었는데, 그러나 오늘날 와서 지나간 일을 회고하니 당신의 각오가 과연 정당한 것을 깨달았소이다 하는 동시에, 정객들은 미국이나 영국이나를 물론하고 우리가 과거에 한국에 대한 모든 태도를 이제 뉘우치노라 합디다. 그렇게 완강하던 중국사람들도 제 설움에 못 이겨서 한국과 중국은 죽든지 살든지 다 한길로 서십시다 합디다.
시카고에서 두 분 청년의 의향을 들어본 일도 있거니와 어디를 가든지 동포들의 일반심리가 지방별이니, 당파심이니, 나니 너니 하던 것은 다 떨어버리고, 민족의 원대한 목적을 위하야는 공동 일치하게 서자는 것이 1919년 이후에 처음 되는 현실임을 깨달았소이다. 일본이 동양이나 세계를 다 삼키지 못할 것이 명백한 대세인 동시에 조선의 친구들이 늘어가는 터이니 우리의 희망은 과연 많소이다. 여러분께서는 사사 감정이나 의견의 충돌을 피하고 다 하나이 되어서 동지회의 정신대로 민족운동을 계속합시다.…』95)
이어 19일 저녁에 한인기독교회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넓은 장내가 빽빽이 차도록 동포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李承晩은 워싱턴에 가서 한국친우회를 다시 조직하는 일에 주력했던 일을 보고했다. 그는 연설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대세가 이만한 형편이나, 무슨 일이든지 인력으로 다 되는 법은 없고, 하나님의 경륜이 계신 줄 분명히 믿을 수밖에 없소이다. 우리 사람은 본래 총명한 민족인즉, 그저 남에게 매여서만 살게 될 줄을 나는 믿지 않소이다』96)
『韓人과 中國人은 어찌 이처럼 몽매합니까』
金九가 김이제에게 쓴 6월25일자 편지는 李承晩이 호놀룰루에 돌아온 뒤에야 전달되었다. 金九의 편지를 보고 李承晩은 몹시 화가 났다. 그는 8월30일에 金九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저번에 워싱턴에서 중국공사 胡適 박사에게 金九선생의 활동을 좀 알면 선전하겠다 하였더니, 전보로 물은 모양이외다. 한인과 중국인은 세계대세에 대하야 어찌 이처럼 몽매합니까.
(1)선전 한 가지를 논하더라도 日人은 30년 전부터 1년에 100만 달러를 미국에만 소비하고, 이번 중-일전쟁 이래로 350만 달러 이상을 소비하야 미국인의 동정을 100분의 1을 가지고도 물자상 필요는 다 얻어 가는데, 중국인은 99분을 가지고도 군수물자를 얻지 못하니, 다름이 아니라 선전이 부족한 연고입니다. 미국은 민중이 전쟁이냐 화평이냐를 결정하노니, 몇백만 달러를 들여 각 신문상에 날마다 일본인의 만행을 알려 주면 정부와 국회를 억지로라도 시켜 정책을 변경케 할 터인데, 아직도 망연히 알지 못하니 어찌하리오. 중국인이 아무리 혈전분투할지라도 제3국의 원조가 아니면 중국은 제2조선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유력한 선전가로 전국의 연락을 맡겨서 효력 있는 선전을 하는 것이니, 장개석씨에게 권고해 보시오.
(2)외교선전보다 용전이 우선이니 군수물자를 얻어 보내라는 것은 이곳 형편을 전혀 모르시는 것입니다. 선전으로 우리의 하는 것을 알려 주어야 도움을 얻지, 도무지 한인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외다.
(3)동지회 주장하는 것을 각 단체가 부인이라 하심은 불가하외다. 우리 사람의 경우에 혁명대운동의 한 방식이니, 이 방식으로 상당한 정도에 도달한 뒤에야 무엇인들 못하리오마는 폭력으로만 주장해야 된다 하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하겠습니다.
폐일언하고, 이번에 워싱턴과 뉴욕에서 군기창에 혹 구식이라 폐기한 군수물자라도 좀 얻으려고 해보았으나 원동에서 한인들이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합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에서든지 들을 만한 사실이 있거든 진상을 적어 보내시오. 이곳에서 선전한다는 것이 미주에 있는 우리 사람 한두 개인의 소관인 줄로 아실 것이 아니외다.〉97)
이 편지에는 임시정부 인사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독립운동자들이 무력항쟁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선전과 외교가 먼저라고 주장하는 李承晩의 논리가 설득력 있게 표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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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이 金九에게 보낸 1939년 8월30일자 편지. |
세 기관 財産運用 감독할「顧問部」구성
한인기독학원 기숙사에는 방학 동안에도 35명의 남녀 학생들이 기숙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카가 없는 동안 국어교사 이춘만이 학교사무를 맡아 보았고, 백인 남자선생 한 사람과 백인 여자선생 두 사람이 기숙사에서 기거하면서 학생들을 감독했다.98)
李承晩은 9월5일에 한인기독학원이 개학한 뒤에도 호놀룰루를 떠나지 못했다. 이번에는 프란체스카와 함께 떠나기로 했기 때문에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학교와 교회와 동지회의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을 세워놓기 위해서였다. 그는 李容稷 목사와 金鉉九의 배신 때문에 빚어졌던 교민단과 교회 분규의 쓰라린 경험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용직은 1935년에 귀국하고 없었으나, 김현구는 여전히 「國民報」의 주필로 있으면서 李承晩의 활동상황은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궁리해 낸 것이 세 기관의 재산 일을 공동으로 책임질 「顧問部」라는 별도의 기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 기관의 운영에 직접 개입하거나 간섭하지는 않으나 기관의 명칭이나 목적이나 사업의 성격을 변경시키거나 재산소유권이나 사무처리 권한의 변동 등의 일이 발생할 때에는 고문부의 동의를 얻어야 되도록 한 것이었다. 고문부의 부원으로는 양유찬(회장)·이원순(부회장) 등 李承晩이 신임하는 청년 사업가 12명이 선정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김노디 등 세 사람의 여성도 포함되었다.99) 이들은 앞으로 20년 동안 세 기관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책임질 것이었다.
동지회 연례 대표회도 李承晩의 일정에 맞추어 두 달이나 앞당겨 10월16일부터 사흘 동안 호놀룰루에서 개최되었다. 동지회 대표회에서는 워싱턴의 외교부를 계속할 것과 임시정부를 극력 봉대할 것 등과 함께, 李承晩이 워싱턴에 가서 집필할 독립운동사 편찬비로 500달러를 지출할 것도 결의했다.100)
10월22일 오후 2시에 한인기독교회에서 새로 구성된 고문부원 취임식이 거행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李承晩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나는 25년 전에 이곳에 와서 여러분과 같이 기독학원·기독교회·동지회를 설립하였는바, 오해하는 분들은 리박사의 사업이라고 하오만 나의 사업은 여러분의 사업이오. 지금 우리 중에 명망 있는 청년들로 고문부를 조직하고 우리의 사업을 전수하는 바는 우리들도 외국인들과 같이 공동언론이나 공동의결을 채용하도록 각 단체를 대표하는 인물을 집중함인즉, 고문부 위원으로 선택된 제씨는 물질로나 성력으로 세 단체에 중대한 사건이 있는 때에는 고문부 제씨는 여러분과 협의할 바이오, 직접 고문위원부에서 세 단체의 행정상에는 간섭이 없소이다.
나는 여러분께서 워싱턴에 가서 외교활동하기를 원한즉 내월 10일간에 발정키로 행장을 수습하는 중이나, 내가 출타하면 기독학원을 누가 주관할까 염려하는 중에 이원순씨의 부인 매리 여사가 홈장으로 허락하되, 이후에 리박사께서 돌아오시면 기독학원을 다시 관리케하고 대리감독으로 사무케 되면 힘써 시무하겠다고 하야, 기독학원에 대한 일도 잘 준비되었소이다』101)
基督學院 운영은 李元淳 부인 매리가 맡아
이처럼 李承晩 내외가 떠난 뒤의 한인기독학원의 운영은 이원순의 부인 매리가 맡았다.
취임식에서는 고문부 부원으로 선임된 사람들이 공동으로 「서약서」에 서명하는 특별한 순서가 있었다. 「서약서」의 형식도 독특했다. 李承晩은 모인 사람들에게 고문부 설치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한 뒤에 「서약서」를 낭독한 부회장 이원순에게 발언하게 했다. 이원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박사께서 우리 동포들의 청함을 받아 하와이에 오신 지가 26년이 됩니다. 그동안 남다르게 풍파를 당하여 가시면서도 우리 민족의 장래 발전과 민족운동을 계속적으로 분투 노력하셔서 오늘날 기독교회·기독학원·동지회 세 기관을 만들어 놓으셨고, 그 기관들을 계속하여 가시느라고 무수한 곤란을 많이 당하여 오셨습니다. 박사님께서는 백수가 흩날리시는 이때에도 사양치 않으시고 외교장에 다시 나가시기를 허락하셨으며, 시간 있는 대로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편찬하시기로 작정이 있어서, 머지 않아 하와이를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장래를 걱정하시는 박사님께서는 우리의 세 단체를 영구히 보전하도록 하시려고 근일에 다수 인사들을 모아 가지고 많은 토의가 있은 후 고문부라는 기관을 세웠습니다. 이 고문부는 세 단체 위에 있어 총괄하라는 것도 아니요, 내정간섭을 하라는 것도 아니요, 다만 이 세 단체의 명칭이나 목적이나 사업성질을 바꾸거나 재산 소유권을 옮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고문부원 전수의 3분지 2 이상의 동의가 없이는 절대적으로 실행치 못하게 한 것이 올시다. 다시 말하자면, 리박사님께서 고문부에 부탁하셔서 우리의 세 단체를 오늘날 모습과 같이 유지하라고 우리들에게 맡기는 것이외다.
이 사람도 부탁을 받은 한 사람으로 한편으로는 감격한 마음을 금치 아니하는 동시에 어려운 짐을 졌습니다. 이 앞으로는 노성하신 동지들의 지도를 받아 진행하려 합니다. 여러분 동지들과 우리 위원들이 함께 리박사의 부탁하시는 바를 저버리지 않기로 맹세합시다』102)
이원순의 말에서 보듯이, 李承晩이 워싱턴에 가서 하기로 약속한 일의 하나는 독립운동사에 관한 책을 저술하는 것이었다. 동지대표회는 그것을 위한 비용으로 500달러를 따로 책정했던 것이다.
기약 없는 이별에 눈물 못 거두는 늙은 同胞들
李承晩 내외는 11월10일 정오에 「맷소니아」호 편으로 호놀룰루를 떠났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출항이었다. 한인기독교회 목사 김형식의 다음과 같은 이별기는 이때에 李承晩을 보내는 하와이 동포들의 감회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지난 3월에도 선생을 전송한 적이 있었고, 이번에 또다시 그를 보내건마는 우리의 섭섭한 회포는 전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저번에는 선생께서 동포들에게 선언하신 말씀도 계셨거니와 모든 것이 일시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문부 설치사건이나 기독학원을 위임처리하게 한 일만 가지고 생각하더라도 선생의 이번 길은 잠시가 아니고 기약 없는 길이다.
이 기약 없는 길을 떠나시는 선생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뵙지나 않는가 싶어서 눈물을 거두지 못하는 이는 거의 다 연세 많은 노인들이시오,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씻어 내다가도 빙그레하면서 웃음을 띄우는 이는 비교적 젊으신 이들이다. 울다가도 웃는 일은 웬일인가?
아마도 동양의 풍운이 잦아진 뒤로 중국의 승리냐, 일본의 패망이냐 하야 세계의 이목이 총 집중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양문제에 대하야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미국이 일본과의 통상조약 폐지를 선언하고 또다시 일본이 중국에 대한 정책을 변경하기 전까지는 통상조약을 다시 체결할 수 없다는 강경론을 주장하는 이때에 선생의 길은 의미 있는 길이요, 따라서 젊은 우리로서는 우리 민족의 목적을 관철하고 개선가를 부르는 영수를 불원한 장래에 환영하리라는 희망을 가짐인가 한다.…〉103)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국제주의와 고립주의의 뿌리 깊은 대립 속에서 도의와 중립만을 표방하면서 불 속에서 밤을 줍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해 온 미국정부는 비등하는 일본 제재 여론을 배경으로 드디어 1939년 7월26일에 미-일통상조약의 폐기를 일본정부에 통고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 9월1일에는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李承晩은 이때 이후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하와이 땅을 밟지 못했다. 아내가 한인기독학원의 운영을 맡게 된 이원순의 가족은 11월17일에 아예 기독학원으로 이사했다.104) 李承晩 내외는 11월15일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여 며칠 동안 동포들을 만나 보고, 그곳을 떠나서, 크리스마스가 지난 12월27일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고침]
月刊朝鮮 2006년 12월호「李承晩과 金九」(57회)에서, 李承晩이 1939년 3월에 워싱턴으로 갈 때에 프란체스카와 동행했다고 한 것은 착오였으므로 바로잡습니다.
1)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373쪽.
2)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제시의 일기」, 1999, 혜윰, 33쪽. 3) 같은 책, 34쪽; 「백범일지」, 373쪽. 4) 「백범일지」, 374쪽. 5) 「新韓民報」 1938년 9월29일자, 「장개석 총재와 장치중 주석에게 보낸 국민회공문」.
6) 위와 같음. 7) 「金九가 洪焉에게 보낸 1938년 9월14일자 편지」, 「白凡金九先生의 편지」, 2005, 나남출판, 46쪽. 8) 「新韓民報」 1938년 9월22일자, 「임정에 송금」. 9) 「백범일지」, 374쪽. 10) 「新韓民報」 1939년 3월30일자, 「임시정부의 공문」. 11) 「백범일지」, 374쪽. 12) 「金九가 宋憲澍에게 보낸 1939년 1월3일자 편지」,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編, 「白凡金九全集(7)」, 1999, 대한매일신보사, 29쪽. 13) 「백범일지」, 374~375쪽. 14) 「백범일지」, 375쪽. 15) 「金九가 宋憲澍에게 보낸 1939년 1월3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29쪽. 16) 趙擎韓, 「白岡回顧錄」, 1979, 韓國宗敎協議會, 273쪽.
17) 정정화, 「녹두꽃」, 1987, 未完, 121~122쪽. 18)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42쪽. 19) 「新韓民報」 1939년 3월30일자, 「임시정부의 공문」. 20) 「新韓民報」 1938년 10월13일자, 「임정과 피난동포 이전의 상황」. 21)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43쪽; 정정화, 앞의 책, 122~123쪽. 22) 정정화, 앞의 책, 123~125쪽. 2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2~303쪽.
24) 「金九가 宋鍾翊에게 보낸 1939년 1월4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31~32쪽 ; 「新韓民報」 1939년 3월30일자, 「임시정부의 공문」. 25) 「백범일지」, 376쪽, 393쪽. 26) 「新韓民報」 1939년 1월12일자, 「재차 이전한 임정소식」. 27) 「金九가 仙 朱家?에게 보낸 1940년 1월2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34쪽. 28) 「백범일지」, 376~377쪽. 29) 「新韓民報」 1939년 5월26일자, 「김구 선생 자친의 서세」.
30) 「백범일지」, 379쪽. 3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3쪽. 32) 정정화, 앞의 책, 130쪽. 33) 「金九가 宋憲澍에게 보낸 1939년 1월3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30쪽 ; 「金九가 宋鍾翊에게 보낸 1939년 1월4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32쪽. 34) 「金九가 宋憲澍에게 보낸 1939년 1월3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29~30쪽. 35) 「金九가 宋鍾翊에게 보낸 1939년 1월4일자 편지」, 「白凡金九全集(7)」, 32쪽.
36) 金學奎, 「白波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597쪽. 37) 內務省警報局保安課 「特高月報」 1939년 2월, 120쪽. 38) 蕭錚, 「中國國民黨과 金九」,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博英社, 1983, 156~157쪽. 39) 「金九가 蔣介石에게 보낸 1940년의 편지」, 「白凡金九全集(7)」, 47~48쪽. 40)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1972, 延世大出版部, 254쪽. 41) 같은 책, 256~257쪽. 42) 張世胤, 「조선의용대의 조직편성과 구성원」,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1집, 1999, 한울, 40~41쪽 ; 김영범,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한·중연대」,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1집, 1999, 한울, 150~165쪽 참조. 43)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1967, 原書房, 679쪽. 44)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685~688쪽. 45) 金榮範, 「朝鮮義勇隊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469~514쪽 참조.
46) 유자명, 「한 혁명자의 회억록」, 199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25쪽, 233쪽 ;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678~679쪽. 47) 「백범일지」, 378쪽, 392쪽. 48) 「新韓民報」 1939년 7월6일자, 「원동한인 각 당파의 통일운동」. 49) 유자명, 앞의 책, 233쪽. 50)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編, 「民國政府與韓國獨立運動史料」, 1988, 18쪽. 51) 「백범일지」, 379쪽 ; 趙擎韓, 앞의 책, 281~282쪽.
52) 「백범일지」, 379~380쪽. 53) 「백범일지」, 380쪽. 54) 「新韓民報」 1939년 6월15일자, 「중경에 있는 각 혁명단체의 통일운동」. 55)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78쪽. 56)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6)」, 1975, 독립유공자 사업기금운용위원회, 644~645쪽 ; 南坡朴贊翊傳記編纂委員會, 1989, 「南坡朴贊翊」, 244쪽. 57) 「白凡金九全集(6)」, 1999, 대한매일신보사, 25~40쪽.
58) 「白凡金九全集(6)」, 25~40쪽. 59) 「太平洋週報」 1939년 5월6일호, 「리박사 문안」, 13쪽. 60) Syngman Rhee to Mrs. Syngman Rhee, April 17, 1939 and Mrs. Syngman Rhee to Koric, April 19, 1939, The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ed.,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Kukhak Charyowon, 2001, pp. 560~561.
61) 「太平洋週報」 1939년 9월2일호, 김형식, 「리박사 환영기」, 14~15쪽. 62) 「新韓民報」 1939년 5월18일자, 「일본대사의 새 걱정거리」. 63) Robert T. Oliver, Syngman Rhee――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ed and Company, 1960, p.166. 64) 「太平洋週報」 1939년 6월10일호, 「일본대사의 새 걱정거리」, 3~4쪽. 65) 「太平洋週報」 1939년 5월27일호, 「상등인물들과 무엇하는 것」, 4~5쪽. 66) 같은 글, 4쪽. 67) 「太平洋週報」 1939년 6월3일호, 「동양: 리박사 자유를 위하야 싸움」, 3~5쪽. 68) 「太平洋週報」 1939년 6월3일호, 「리박사 외교소식」, 14쪽.
69) 稻葉 强, 「太平洋戰爭中の在米朝鮮人運動――特に韓吉洙の活動を中心に」, 「朝鮮民族運動史硏究」 7호, 1991, 不二出版, 39~88쪽 및 방선주, 「한길수와 이승만」, 유영익 편, 「이승만연구――독립운동과 대한민국건국」, 2000, 연세대출판부, 323~357쪽 참조. 70) 「중한동맹단선전문」(제10호) 1939년 5월8일자, 1쪽. 71)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二) 하와이·美洲僑民團體 關聯文書」, 1998, 延世大 現代 韓國學硏究所, 560쪽. 72) 「太平洋週報」 1939년 6월3일호, 「리박사외교소식」, 14쪽 ;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二) 하와이·美洲僑民團體 關聯文書」, 560쪽. 73) Robert T. Oliver, op. cit., p.167. 74) Syngman Rhee to Dongjihoi, May 4, 1939 and Syngman Rhee to Peter Hyun, May 5, 1939,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p.562~563. 75)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二) 하와이·美洲僑民團體 關聯文書」, 559쪽.
76) 「太平洋週報」 1939년 9월2일호, 김형식, 「리박사환영기」, 15~16쪽. 7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2005, 국사편찬위원회, 246~247쪽. 7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4쪽.
79) 「金九가 金利濟에게 보낸 1939년 6월25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八) 簡札 3」, 356~357쪽. 8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5쪽. 81) 「太平洋週報」 1939년 9월2일호, 김형식, 「리박사 환영기」, 15쪽. 82) 「李承晩이 金九에게 보낸 1939년 8월30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六) 簡札 1」, 11쪽. 8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4쪽.
84) 「太平洋週報」 1939년 6월3일호, 「리박사부인여행」, 13~14쪽. 85)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二) 하와이·美洲僑民團體 關聯文書」, 559쪽. 86) 「太平洋週報」 1939년 6월24일호, 「리박사부인안착」, 14쪽 ; 김승태-박혜진 엮음, 「내한선교사총람」, 199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365쪽. 87) 「太平洋週報」 1939년 7월1일호, 「리박사외교소식」, 1쪽. 88) Changsoo Kim to Syngman Rhee, May 10, 1939,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567. 89) Syngman Rhee to Dongjihoi, June 10, 1939,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586. 90) 「太平洋週報」 1939년 7월22일호, 「통신래착」, 17쪽. 91) 「新韓民報」 1939년 8월3일자, 「잡보: 리승만박사의 환영회」; 「太平洋週報」 1939년 9월2일호, 「라성통신: 리박사심방여록」, 6쪽. 92) Kilsoo Hahn to Dr. and Mrs. Rhee, July 26, 1939,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591.
93) 「중한동맹단선전문」(제22호) 1939년 8월18일자. 94) 「太平洋週報」 1939년 8월19일호, 「광고」, 1쪽. 95) 「太平洋週報」 1939년 8월26일호, 김형식, 「리승만박사 환영기(기一)」, 10쪽.
96) 「太平洋週報」 1939년 9월2일호, 김형식, 「리박사환영기」, 16쪽. 97)「李承晩이 金九에게 보낸 1939년 8월30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六) 簡札 1」, 11~12쪽. 98) 「太平洋週報」 1939년 6월3일호, 「기독학원 처리순서」, 15쪽.
99) 「太平洋週報」 1939년 10월28일호, 「고문부원취임식」, 10쪽. 100) 「太平洋週報」 1939년 10월28일호, 「동지회연례대표회록」, 14쪽. 101) 「太平洋週報」 1939년 10월28일호, 「고문부원취임식」, 9~10쪽. 102) 「太平洋週報」 1939년 10월28일호, 「고문부원취임식」, 11쪽.
103) 「太平洋週報」 1939년 11월18일호, 김형식, 「영수를 봉송하면서」, 5쪽. 104) 「太平洋週報」 1939년 11월18일호, 「리원순씨 반이」, 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