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잡은 호랑이만 30마리』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동남쪽으로 250km 떨어진 블라디미르市.
전설적인 「한국 호랑이 사냥꾼」 발레리 얀코프스키(95)씨는 키 190cm의 거구였다. 젊었을 때는 기골이 더욱 장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젊은 시절 沿海州(연해주)·만주·한반도에서 호랑이와 곰 등 맹수를 사냥하면서 이름을 떨쳤다.
그의 家族史(가족사)는 1945년 10월호 「내셔널지오그래픽」誌에 「한반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냥꾼」이라는 특집 기사로 실린 적이 있다.
100세가 가까운 그는 기억력이 대단했다. 어떤 사건을 기억할 때 「몇 년, 몇 월, 며칠」을 얘기했다.
그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한반도에서 펼쳐졌던 一家(일가)의 사냥 이야기를 4시간여 쏟아 냈다. 그의 아파트 거실 사방에는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대부분 사냥에 관한 책들이었다.
『우리 가족의 별명은 「네눈이」(러시아語로 「체트레 글라자」)였어요. 눈이 머리 앞뒤에 두 개씩 달린 천부적인 사냥꾼이라는 뜻이었지요.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미하일 얀코프스키) 때부터 아버지(유리 얀코프스키), 저(발레리 얀코프스키)까지 3代 동안 極東(극동)·만주·한반도의 사냥꾼 집안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소문이 미국과 일본·유럽까지 퍼져 각국의 사냥꾼들이 우리 가족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으니까요』
발레리氏는 『할아버지 때부터 한반도에서 잡은 호랑이만 30마리, 범과 곰 등 무려 100여 마리의 맹수를 잡았다』고 기억했다.
블라디미르市 외곽의 허름한 아파트 2층에 살고 있는 발레리 부부는 기자를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전설의 「호랑이 사냥꾼」 얀코프스키 一家의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다. 꼭 한번 취재하고 싶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모스크바 특파원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귀국해야 할 시간이 됐다. 서둘러 발레리氏를 수배했고, 발레리氏는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발레리는 폴란드계 러시아인이었다. 러시아가 폴란드를 지배하던 1863년 폴란드 사람들은, 제정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차례 봉기를 시도했다.
그 당시 모스크바 근처 스몰렌스크에서 대학을 다녔던 할아버지 미하일 얀코프스키는 폴란드 독립투쟁에 가담했다가 8년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미하일은 걸어서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를 지나 카잔, 타볼스크, 이르쿠츠크, 치타 등 시베리아를 전전해야 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1868년 아들을 얻은 것을 기념해 많은 죄인들을 사면했다. 사면을 받은 미하일은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다.
「율 브리너」와 함께 성장
미하일은 러시아와 중국 국경을 가르는 아무르江을 오르내리며 국경무역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말 사육으로 큰돈을 벌었다. 미하일의 손자 발레리 얀코프스키는 1911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발레리는 이곳에서 유명한 영화배우 「율 브리너」와 어린시절을 함께했다.
『브리너의 아버지(보리스 브리너)가 내 할머니(올가)의 언니 나탈리야 크루쿠토바와 결혼했지요.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영화배우 율 브리너지요. 율 브리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가족과 같이 지냈어요. 아주 친하게 지냈어요. 똑똑한 친구였지요』
율 브리너의 집안은 러시아에서 유명한 배우 집안이었다. 일찌감치 하르빈 등 러시아 국경 근처에 위치한 중국 도시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아직도 브리너家의 선산이 남아 있다.
미하일 얀코프스키는 대규모 말 목장을 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자주 기습해 와 도적질과 약탈을 자행하는 만주의 비적들이 제일 큰 골칫거리였다. 러시아인들은 노략질을 일삼는 중국인과 비슷한 외모여서 한국인들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두 딸과 네 명의 아들이 있었지요. 아버지(유리)는 둘째 아들이었고, 1889년에 미국에 유학을 한 적이 있어요. 말 목축과 농장 운영법 등을 공부하기 위해서였지요. 3년 동안 텍사스에서 공부하며 제대로 된 카우보이가 돼 돌아왔어요. 한마디로 말에 대한 전부를 배워 온 것이지요. 그리고 샌프란시코에서 4마리의 명마를 산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데려왔지요』
얀코프스키 말 목장은 말 사육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1920년대에는 말이 600마리로 증가했다. 사슴 사육을 시작해 녹용을 채취했다. 사슴은 2000여 마리로 늘어났다.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인삼을 자주 찾자 인삼 재배까지 했다. 그의 가족은 러시아에서 최초로 녹용을 채취하고, 인삼을 재배한 것으로 기록됐다.
사슴과 말을 키우는 얀코프스키 농장에서 한인들이 많이 일했다. 그 덕에 얀코프스키家 사람들은 한국어를 구사했다. 발레리는 함경도 사투리로 『한국 사람 좋아요. 한국에 가고 싶어요』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연해주 일대에서 무역을 하던 미하일 슈빌료프라는 러시아 大商(대상)의 장녀 마르가리타 슈빌료프와 결혼했다. 아버지는 딸 둘(무자·빅토리야), 아들 셋(발레리·아르세니·유리)을 두었다.
『할아버지는 1894년 아버지를 데리고 조선의 원산에 갔습니다. 황제가 할아버지에게 「한반도에서 서식하는 나비를 채집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발견한 나비 중 국제나비학회에 보고된 것만 20종이나 됩니다. 「얀코프스키 나비」도 있을 정도니까요』
러시아 혁명(1917년) 무렵 얀코프스키 一家의 재산은 요즈음 가격으로 2000만 달러(200억원) 정도였다. 이 사냥꾼 가족은 사회주의 혁명 이후 펼쳐지는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浮沈(부침)을 겪었다.
1922년 청진으로 이주, 「다차」 운영
1917년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세력들은 점차 극동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자본가 세력」으로 낙인 찍힌 얀코프스키 一家는 1922년 60명의 가족과 친척, 농장 일꾼들과 함께 한국으로 망명했다. 죽기를 무릅쓰고 야반도주해서 찾아간 곳이 청진이었다. 발레리氏가 11세 때의 일이었다.
농장에 있던 말 700마리 가운데 겨우 60마리를 끌고 갔지만 토양이 다르고 사료가 나빠서인지 하나둘 죽어 가더니 모두 죽어 버렸다. 얀코프스키 一家는 맨손으로 다시 시작했다.
그의 가족은 연해주 한인들과 함경도 사람들에게 유명했다. 조선 사람들은 그의 할아버지를 앞뒤에 눈이 달렸다며 「네눈이」라고 불렀다. 그가 항상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던 것도 한 이유였다. 발레리는 어렸을 적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사냥을 배웠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벌로 통했던 우리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됐지요. 하지만 낙담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당시 하르빈으로 망명해 자리를 잡은 러시아 출신 자본가들을 찾아가 신용 대출을 요청했어요. 그들이 흔쾌하게 대출해 줘 그 돈으로 청진에서 기반을 잡았습니다』
얀코프스키 가족은 1928년 동해안의 주을온천으로 이사 갔다. 그의 아버지는 주을온천 주변에 큰 별장을 지었다. 청진에서 남쪽 50km 떨어진 해안가였다. 이곳에 온 가족이 살 수 있는 별장과 성당 등 부대시설을 만들었다.
『청진은 당시 「새신」으로 불렸고, 주을온천은 「엄포」로 불렸지요. 이곳에서 우리는 「다차촌」을 만들었어요. 정교회 성당, 극장, 가든, 과일·벌꿀 농장을 만들었지요. 다차 이름은 「노비나」였고, 「노비나」는 폴란드 국가 휘장에서 따온 이름이었어요』
代를 잇는 사냥꾼
이곳 휴양지에 대한 뉴스가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널리 퍼졌다. 중국·일본·한국 등에 사는 외국인들이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았다. 그의 아버지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사파리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당시 스페인·중국·미국·일본 등에서 사냥꾼들이 몰려왔다.
얀코프스키 가족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잘 구사해 외국인들과 의사 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한국인들과 어울려 자주 사냥에 나섰다.
『청진의 다차촌은 참 좋은 곳이에요. 북한에 가본 적이 있나요? 가게 되면 꼭 한번 찾아가세요. 우리 가족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는 할아버지·아버지의 代를 잇는 사냥꾼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부산과 제물포, 서울을 수시로 들락거렸습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1934년 시보레를 샀지요. 1929년産이었는데 원산으로 가져오는 데 3박4일이 걸렸습니다. 나는 제물포, 상하이, 시모노세키, 나가사키 등을 거치면서 무역을 하고 사냥꾼을 유치했지요.
다차에서 우리는 러시아에서 받았던 것처럼 모든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 全과목 가정교사를 두었고, 다양한 스포츠를 배웠지요. 기반이 차츰 잡혀 간 것이지요』
그는 아버지와 함께 한반도와 만주·소련 국경지대에 출몰하던 호랑이 등을 집중 포획했다. 지금은 호랑이 사냥이 금지됐지만 당시는 워낙 위험한 야생동물로 취급돼 사냥이 자유로웠다. 사냥을 나갈 때마다 많은 맹수를 잡았다. 그는 『멧돼지에게 물린 적이 여러 번 있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은 맹수를 잡으면 기념사진을 찍었다. 얀코프스키의 서재에는 호랑이와 곰, 범을 잡고 난 뒤 이를 기념해 찍은 사진이 많이 걸려 있었다.
『함경도 주변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에서 호랑이가 출몰하면 농민들이 연락해 와 「제발 우리를 살려 달라」고 했지요. 우리 가족은 1932년 함경북도 불용군에서 야생 사슴 4마리를 잡았지요. 한국에서 사냥한 포획물들은 주로 만주에 내다 팔았어요. 호랑이와 곰·멧돼지·노루·사슴 등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야생동물을 잡았지요.
사슴은 10년 만인 1942년 100마리로 늘었어요. 아버지의 미국 유학 비용이 됐지요. 한국 사람들은 우리 사슴농장에서 사슴 피와 녹용을 사갔어요. 나도 사슴 피를 자주 즐겨 마셨어요. 자 보세요. 제가 이렇게 건강하게 사는 비결은 뭔지 아세요. 사슴 피 덕분입니다』
「김일성 사냥」을 요청한 일본 경찰
그는 두 팔을 머리 위로 번쩍 올리며 근육을 내보였다.
기자가 『인삼을 많이 드셔서 이렇게 건강한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손을 내저으며, 『사슴 피예요. 인삼보다 사슴 피가 100세에 가깝도록 체력을 유지하는 비결인 것 같다』고 다시 강조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1936년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가 떠난 뒤에도 그의 가족은 사냥꾼의 명성을 유지했다.
사냥을 하면서 겪은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많았다. 그의 기억력은 놀랄 만했다.
『1940년의 일이지요. 사냥허가를 받기 위해 우리는 규칙적으로 일본 행정부 만주지사를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날 카키색 옷차림에다 금빛 경장이 달린 일본 경찰은 나에게 백두산 지역 사냥 허가증을 주었어요. 큼지막한 붉은 도장이 찍힌 허가증을 받으면서 나는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지요.
그 순간 일본 경찰관은 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당신이 그 유명한 호랑이 사냥꾼인가. 호랑이를 잡아 팔면 얼마나 받는가?」고 묻더군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큰 수컷 호랑이는 300원을 받습죠」라고 대답했어요. 경찰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상서랍을 열고 크지 않은 사진 1장을 내놓았습니다. 「자, 이 호랑이를 잡으면 내가 1만원을 주겠소」 하더군요. 일본군 장교는 「이자는 킨 이치 세이(金日成)」라고 또박또박 말했어요. 눈썹이 까맣고 의지가 강한 아주 젊은 사람 얼굴사진이었지요. 교복 차림이었어요. 하지만 나는 외교관과 같은 대답을 했지요.
「부장 각하, 나는 네 발 달린 맹수만 사냥합니다」
일본 경찰관은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더군요. 그로부터 몇 년 뒤 내가 그 사진에 담긴 金日成을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소련軍 북한 진주로 다시 受難
1945년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얀코프스키 一家의 비극은 다시 시작됐다.
『소련군이 한반도에 1945년 8월에 진주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나와 형제들은 소련 군대에 자원 입대해 통역원이 되었지요. 아버지는 집에 남고 나(발레리)와 아르세니, 유리 등 세 형제는 만주의 소련군에 배속됐습니다. 나는 한반도에 주둔한 제25군 스메르시 특수부대에서 근무했어요. 스메르시는 「간첩을 죽이자」라는 러시아語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만주와 평양을 오가며 6개월 동안(1946년 1월까지) 소련군 소속으로 활동을 했지요.
평양에서 우리는 1946년 1월까지 근무했습니다. 특수부 사업 일과는 오후 5시부터 새벽까지였고, 스탈린이 도입한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체포한 일본 경찰·관리·헌병을 심문할 때 통역을 했고, 재판할 때도 통역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그해 10월이었지요. 평양 상공에 비행기가 선회하면서 삐라(전단)를 마구 뿌렸습니다. 시민들은 삐라를 주어 읽느라 정신이 없었고, 일부 소년들은 도로에서 삐라를 줍다가 승용차에 깔리는 등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삐라 내용은 1945년 10월14일 평양의 모란봉 경기장에서 민족영웅 金日成과의 첫 만남이 있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지요』
체포 그리고 유형
발레리는 「청중 들 속에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주석단 바로 아래서 이날 행사를 지켜봤다.
『주석단에는 쟁쟁한 사람들이 다 모였지요.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육군 대장과 군사이사회 회원 레베데프 육군 중장 등이 앉아 있었지요. 이상하게도 하나의 빈 자리가 남아 있었지요. 주석단 주위에 지휘관·통역원 등이 줄줄이 서 있었고, 나는 주석단 바로 앞에 서 있었어요. 경기장은 초만원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서 복역했던 러시아 출신 박정애 여사가 연사로 등장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행사가 오랫동안 진행됐지만 정작 金日成이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계속됐지요.
그런데 갑자기 소련 군복을 입은 李모라는 사람이 주석단에 나와 마이크를 들더니 「이제부터 한국 민족의 영웅인 金日成이 여러분들 앞에서 발언할 것」이라고 러시아語로 수차례, 또 한국말로 반복하더군요. 그 순간 소련 장군 발 아래에 커다란 뚜껑이 열리더니 밤색 양복차림에다 「붉은 별」 소련훈장을 단 젊은 남자가 뛰어 나왔지요. 나는 그를 금방 알아봤지요. 백두산 사냥 허가서를 받기 위해 만주에 갔을 때 일본 경찰이 보여 주었던 사진 속의 그였어요』
발레리氏는 1946년 1월 「일본군을 도운 국제 자본가의 앞잡이」, 「일본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동생과 아버지도 체포돼 함흥과 평양의 감옥으로 보내졌다. 일본어를 잘하고 일본을 자주 왕래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1946년 다시 극동의 추코트카로 유형 갔지요. 막내 동생 아르세니는 가족들이 체포됐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서울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미군에 합류했지요』
그의 동생 아르세니는 서울에서 몇 년 동안 지내다 도쿄로 가 미쯔비시에 入社, 얼마 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1997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발레리氏는 추코트카를 시작으로 극동 오지에서 유형생활을 했고, 동생 유리는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으로 보내졌다.
『나는 처음에 6년형을 받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재판이 계속될수록 형량이 늘더니 마지막 재판에서는 25년형을 받았습니다. 유형지에서 탈출하기로 맘먹었어요. 어디론가 도망갈 궁리를 한 것이지요. 1947년 7년 유형생활을 마치고 마가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때 지금의 처(82세)를 만나 결혼했어요. 처는 중학교 3학년 때 禁書(금서)였던 에세닌의 詩를 읽었다는 죄목으로 불가江 인근 사라토프에서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졌어요. 1941년 전쟁 당시였고, 6년 동안 유형생활을 했지만 그녀 역시 정치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마가단으로 보내진 것이지요. 이곳에서 둘은 연민의 정을 느껴 1955년 결혼했습니다』
40년 만에 만난 첫부인과 아들
발레리氏는 1944년 이르마 아에르라는 독일 여성과 첫 결혼을 했다.
첫아들 세르게이를 낳자마자 부부는 생이별을 했다. 발레리氏가 소련군에 입대하고, 그 후 유형을 당해 소식이 두절되자 첫부인은 독일사람과 재혼한 뒤 독일에서 살다가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발레리氏는 1986년 캐나다로 첫부인을 찾아가서 40년 만에 처와 아들을 만났다.
10년형을 선고받았던 그의 아버지는 유형 중이던 1946년 세상을 떠났고, 동생 유리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전전하다 1987년에, 아르세니는 199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유일하게 발레리 얀코프스키만 생존해 있다. 그는 스탈린 사망 이후 복권돼 현재 살고 있는 블라디미르市로 옮겨 와 이곳에 정착한 지 근 50년이 지났다.
『지금 나는 산책을 즐기며 삽니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딸을 찾아가 손주들과 노는 것이 제일 큰 기쁨이에요. 내가 예전의 용맹했던 호랑이 사냥꾼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하지만 아직 꿈이 많아요. 사냥꾼 얀코프스키에 대한 책을 몇 권 더 내는 것이지요. 이미 한국 사냥 생활에 얽힌 일화를 중심으로 10권의 책을 냈습니다. 죽기 전에 총정리하는 책을 낼 생각이에요. 개인적인 욕심이라면 누군가가 우리 가족의 일생을 영화나 다큐멘터리로 제작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국은 제2의 조국
발레리 얀코프스키는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청진 근처에 있는 어머니 묘지를 방문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측에 수차례 편지를 보내 「북한을 방문하고 싶다」고 전했으나 북한대사관에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그는 『답답하다』고 했다.
『아직도 한반도에서 사냥하는 꿈을 자주 꿉니다. 눈을 뜨면 러시아 땅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서글퍼집니다. 한국의 山河가 그리워요. 언젠가는 한번 다시 찾아가고 싶습니다. 생전에 내가 사냥을 하며 활보했던 백두산과 태백산 등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발레리氏는 「한반도의 호랑이 멸종이 그의 가족 때문이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 손을 내저었다.
『저희 가족 때문에 한반도에 호랑이가 멸종됐다는 말은 근거 없는 것입니다. 저희는 민간에 해를 끼치는 호랑이를 잡았지 막무가내로 포획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떠나온 지 정확히 60년. 그는 『아직도 한국의 들판이 눈에 선하다』며 『한국은 제2의 조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가 선물로 가지고 간 소주를 마시며 한국의 맛을 음미했다. 한 잔은 사냥꾼 가족을 위해, 한 잔은 남북통일을 기원한다며, 또 한 잔은 죽기 전에 남한이든 북한이든 한국 땅을 밟았으면 하는 소망을 위한다며 자꾸 잔을 비웠다.●
전설적인 「한국 호랑이 사냥꾼」 발레리 얀코프스키(95)씨는 키 190cm의 거구였다. 젊었을 때는 기골이 더욱 장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젊은 시절 沿海州(연해주)·만주·한반도에서 호랑이와 곰 등 맹수를 사냥하면서 이름을 떨쳤다.
그의 家族史(가족사)는 1945년 10월호 「내셔널지오그래픽」誌에 「한반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냥꾼」이라는 특집 기사로 실린 적이 있다.
100세가 가까운 그는 기억력이 대단했다. 어떤 사건을 기억할 때 「몇 년, 몇 월, 며칠」을 얘기했다.
그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한반도에서 펼쳐졌던 一家(일가)의 사냥 이야기를 4시간여 쏟아 냈다. 그의 아파트 거실 사방에는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대부분 사냥에 관한 책들이었다.
『우리 가족의 별명은 「네눈이」(러시아語로 「체트레 글라자」)였어요. 눈이 머리 앞뒤에 두 개씩 달린 천부적인 사냥꾼이라는 뜻이었지요.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미하일 얀코프스키) 때부터 아버지(유리 얀코프스키), 저(발레리 얀코프스키)까지 3代 동안 極東(극동)·만주·한반도의 사냥꾼 집안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소문이 미국과 일본·유럽까지 퍼져 각국의 사냥꾼들이 우리 가족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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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사냥을 한 뒤 동생 유리(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1930년대 백두산 인근으로 추정된다. |
블라디미르市 외곽의 허름한 아파트 2층에 살고 있는 발레리 부부는 기자를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전설의 「호랑이 사냥꾼」 얀코프스키 一家의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다. 꼭 한번 취재하고 싶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모스크바 특파원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귀국해야 할 시간이 됐다. 서둘러 발레리氏를 수배했고, 발레리氏는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발레리는 폴란드계 러시아인이었다. 러시아가 폴란드를 지배하던 1863년 폴란드 사람들은, 제정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차례 봉기를 시도했다.
그 당시 모스크바 근처 스몰렌스크에서 대학을 다녔던 할아버지 미하일 얀코프스키는 폴란드 독립투쟁에 가담했다가 8년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미하일은 걸어서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를 지나 카잔, 타볼스크, 이르쿠츠크, 치타 등 시베리아를 전전해야 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1868년 아들을 얻은 것을 기념해 많은 죄인들을 사면했다. 사면을 받은 미하일은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다.
「율 브리너」와 함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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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포즈를 취한 발레리 얀코프스키. |
발레리는 이곳에서 유명한 영화배우 「율 브리너」와 어린시절을 함께했다.
『브리너의 아버지(보리스 브리너)가 내 할머니(올가)의 언니 나탈리야 크루쿠토바와 결혼했지요.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영화배우 율 브리너지요. 율 브리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가족과 같이 지냈어요. 아주 친하게 지냈어요. 똑똑한 친구였지요』
율 브리너의 집안은 러시아에서 유명한 배우 집안이었다. 일찌감치 하르빈 등 러시아 국경 근처에 위치한 중국 도시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아직도 브리너家의 선산이 남아 있다.
미하일 얀코프스키는 대규모 말 목장을 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자주 기습해 와 도적질과 약탈을 자행하는 만주의 비적들이 제일 큰 골칫거리였다. 러시아인들은 노략질을 일삼는 중국인과 비슷한 외모여서 한국인들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두 딸과 네 명의 아들이 있었지요. 아버지(유리)는 둘째 아들이었고, 1889년에 미국에 유학을 한 적이 있어요. 말 목축과 농장 운영법 등을 공부하기 위해서였지요. 3년 동안 텍사스에서 공부하며 제대로 된 카우보이가 돼 돌아왔어요. 한마디로 말에 대한 전부를 배워 온 것이지요. 그리고 샌프란시코에서 4마리의 명마를 산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데려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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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 얀코프스키가 자신이 사냥을 했던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가리키고 있다. |
1920년대에는 말이 600마리로 증가했다. 사슴 사육을 시작해 녹용을 채취했다. 사슴은 2000여 마리로 늘어났다.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인삼을 자주 찾자 인삼 재배까지 했다. 그의 가족은 러시아에서 최초로 녹용을 채취하고, 인삼을 재배한 것으로 기록됐다.
사슴과 말을 키우는 얀코프스키 농장에서 한인들이 많이 일했다. 그 덕에 얀코프스키家 사람들은 한국어를 구사했다. 발레리는 함경도 사투리로 『한국 사람 좋아요. 한국에 가고 싶어요』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연해주 일대에서 무역을 하던 미하일 슈빌료프라는 러시아 大商(대상)의 장녀 마르가리타 슈빌료프와 결혼했다. 아버지는 딸 둘(무자·빅토리야), 아들 셋(발레리·아르세니·유리)을 두었다.
『할아버지는 1894년 아버지를 데리고 조선의 원산에 갔습니다. 황제가 할아버지에게 「한반도에서 서식하는 나비를 채집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발견한 나비 중 국제나비학회에 보고된 것만 20종이나 됩니다. 「얀코프스키 나비」도 있을 정도니까요』
러시아 혁명(1917년) 무렵 얀코프스키 一家의 재산은 요즈음 가격으로 2000만 달러(200억원) 정도였다. 이 사냥꾼 가족은 사회주의 혁명 이후 펼쳐지는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浮沈(부침)을 겪었다.
1922년 청진으로 이주, 「다차」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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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氏가 자신의 사냥 경험을 담은 책에 사인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부인 올가. |
농장에 있던 말 700마리 가운데 겨우 60마리를 끌고 갔지만 토양이 다르고 사료가 나빠서인지 하나둘 죽어 가더니 모두 죽어 버렸다. 얀코프스키 一家는 맨손으로 다시 시작했다.
그의 가족은 연해주 한인들과 함경도 사람들에게 유명했다. 조선 사람들은 그의 할아버지를 앞뒤에 눈이 달렸다며 「네눈이」라고 불렀다. 그가 항상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던 것도 한 이유였다. 발레리는 어렸을 적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사냥을 배웠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벌로 통했던 우리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됐지요. 하지만 낙담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당시 하르빈으로 망명해 자리를 잡은 러시아 출신 자본가들을 찾아가 신용 대출을 요청했어요. 그들이 흔쾌하게 대출해 줘 그 돈으로 청진에서 기반을 잡았습니다』
얀코프스키 가족은 1928년 동해안의 주을온천으로 이사 갔다. 그의 아버지는 주을온천 주변에 큰 별장을 지었다. 청진에서 남쪽 50km 떨어진 해안가였다. 이곳에 온 가족이 살 수 있는 별장과 성당 등 부대시설을 만들었다.
『청진은 당시 「새신」으로 불렸고, 주을온천은 「엄포」로 불렸지요. 이곳에서 우리는 「다차촌」을 만들었어요. 정교회 성당, 극장, 가든, 과일·벌꿀 농장을 만들었지요. 다차 이름은 「노비나」였고, 「노비나」는 폴란드 국가 휘장에서 따온 이름이었어요』
代를 잇는 사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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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일대를 누비며 호랑이 사냥을 하던 발레리 얀코프스키. |
얀코프스키 가족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잘 구사해 외국인들과 의사 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한국인들과 어울려 자주 사냥에 나섰다.
『청진의 다차촌은 참 좋은 곳이에요. 북한에 가본 적이 있나요? 가게 되면 꼭 한번 찾아가세요. 우리 가족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는 할아버지·아버지의 代를 잇는 사냥꾼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부산과 제물포, 서울을 수시로 들락거렸습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1934년 시보레를 샀지요. 1929년産이었는데 원산으로 가져오는 데 3박4일이 걸렸습니다. 나는 제물포, 상하이, 시모노세키, 나가사키 등을 거치면서 무역을 하고 사냥꾼을 유치했지요.
다차에서 우리는 러시아에서 받았던 것처럼 모든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 全과목 가정교사를 두었고, 다양한 스포츠를 배웠지요. 기반이 차츰 잡혀 간 것이지요』
그는 아버지와 함께 한반도와 만주·소련 국경지대에 출몰하던 호랑이 등을 집중 포획했다. 지금은 호랑이 사냥이 금지됐지만 당시는 워낙 위험한 야생동물로 취급돼 사냥이 자유로웠다. 사냥을 나갈 때마다 많은 맹수를 잡았다. 그는 『멧돼지에게 물린 적이 여러 번 있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은 맹수를 잡으면 기념사진을 찍었다. 얀코프스키의 서재에는 호랑이와 곰, 범을 잡고 난 뒤 이를 기념해 찍은 사진이 많이 걸려 있었다.
『함경도 주변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에서 호랑이가 출몰하면 농민들이 연락해 와 「제발 우리를 살려 달라」고 했지요. 우리 가족은 1932년 함경북도 불용군에서 야생 사슴 4마리를 잡았지요. 한국에서 사냥한 포획물들은 주로 만주에 내다 팔았어요. 호랑이와 곰·멧돼지·노루·사슴 등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야생동물을 잡았지요.
사슴은 10년 만인 1942년 100마리로 늘었어요. 아버지의 미국 유학 비용이 됐지요. 한국 사람들은 우리 사슴농장에서 사슴 피와 녹용을 사갔어요. 나도 사슴 피를 자주 즐겨 마셨어요. 자 보세요. 제가 이렇게 건강하게 사는 비결은 뭔지 아세요. 사슴 피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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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氏가 시라소니를 잡은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
기자가 『인삼을 많이 드셔서 이렇게 건강한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손을 내저으며, 『사슴 피예요. 인삼보다 사슴 피가 100세에 가깝도록 체력을 유지하는 비결인 것 같다』고 다시 강조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1936년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가 떠난 뒤에도 그의 가족은 사냥꾼의 명성을 유지했다.
사냥을 하면서 겪은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많았다. 그의 기억력은 놀랄 만했다.
『1940년의 일이지요. 사냥허가를 받기 위해 우리는 규칙적으로 일본 행정부 만주지사를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날 카키색 옷차림에다 금빛 경장이 달린 일본 경찰은 나에게 백두산 지역 사냥 허가증을 주었어요. 큼지막한 붉은 도장이 찍힌 허가증을 받으면서 나는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지요.
그 순간 일본 경찰관은 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당신이 그 유명한 호랑이 사냥꾼인가. 호랑이를 잡아 팔면 얼마나 받는가?」고 묻더군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큰 수컷 호랑이는 300원을 받습죠」라고 대답했어요. 경찰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상서랍을 열고 크지 않은 사진 1장을 내놓았습니다. 「자, 이 호랑이를 잡으면 내가 1만원을 주겠소」 하더군요. 일본군 장교는 「이자는 킨 이치 세이(金日成)」라고 또박또박 말했어요. 눈썹이 까맣고 의지가 강한 아주 젊은 사람 얼굴사진이었지요. 교복 차림이었어요. 하지만 나는 외교관과 같은 대답을 했지요.
「부장 각하, 나는 네 발 달린 맹수만 사냥합니다」
일본 경찰관은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더군요. 그로부터 몇 년 뒤 내가 그 사진에 담긴 金日成을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소련軍 북한 진주로 다시 受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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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사슴을 잡은 후. |
『소련군이 한반도에 1945년 8월에 진주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나와 형제들은 소련 군대에 자원 입대해 통역원이 되었지요. 아버지는 집에 남고 나(발레리)와 아르세니, 유리 등 세 형제는 만주의 소련군에 배속됐습니다. 나는 한반도에 주둔한 제25군 스메르시 특수부대에서 근무했어요. 스메르시는 「간첩을 죽이자」라는 러시아語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만주와 평양을 오가며 6개월 동안(1946년 1월까지) 소련군 소속으로 활동을 했지요.
평양에서 우리는 1946년 1월까지 근무했습니다. 특수부 사업 일과는 오후 5시부터 새벽까지였고, 스탈린이 도입한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체포한 일본 경찰·관리·헌병을 심문할 때 통역을 했고, 재판할 때도 통역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그해 10월이었지요. 평양 상공에 비행기가 선회하면서 삐라(전단)를 마구 뿌렸습니다. 시민들은 삐라를 주어 읽느라 정신이 없었고, 일부 소년들은 도로에서 삐라를 줍다가 승용차에 깔리는 등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삐라 내용은 1945년 10월14일 평양의 모란봉 경기장에서 민족영웅 金日成과의 첫 만남이 있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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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슬라반스카야 반도에 세워진 할아버지 동상 앞에서. |
『주석단에는 쟁쟁한 사람들이 다 모였지요.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육군 대장과 군사이사회 회원 레베데프 육군 중장 등이 앉아 있었지요. 이상하게도 하나의 빈 자리가 남아 있었지요. 주석단 주위에 지휘관·통역원 등이 줄줄이 서 있었고, 나는 주석단 바로 앞에 서 있었어요. 경기장은 초만원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서 복역했던 러시아 출신 박정애 여사가 연사로 등장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행사가 오랫동안 진행됐지만 정작 金日成이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계속됐지요.
그런데 갑자기 소련 군복을 입은 李모라는 사람이 주석단에 나와 마이크를 들더니 「이제부터 한국 민족의 영웅인 金日成이 여러분들 앞에서 발언할 것」이라고 러시아語로 수차례, 또 한국말로 반복하더군요. 그 순간 소련 장군 발 아래에 커다란 뚜껑이 열리더니 밤색 양복차림에다 「붉은 별」 소련훈장을 단 젊은 남자가 뛰어 나왔지요. 나는 그를 금방 알아봤지요. 백두산 사냥 허가서를 받기 위해 만주에 갔을 때 일본 경찰이 보여 주었던 사진 속의 그였어요』
발레리氏는 1946년 1월 「일본군을 도운 국제 자본가의 앞잡이」, 「일본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동생과 아버지도 체포돼 함흥과 평양의 감옥으로 보내졌다. 일본어를 잘하고 일본을 자주 왕래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1946년 다시 극동의 추코트카로 유형 갔지요. 막내 동생 아르세니는 가족들이 체포됐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서울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미군에 합류했지요』
그의 동생 아르세니는 서울에서 몇 년 동안 지내다 도쿄로 가 미쯔비시에 入社, 얼마 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1997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발레리氏는 추코트카를 시작으로 극동 오지에서 유형생활을 했고, 동생 유리는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으로 보내졌다.
『나는 처음에 6년형을 받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재판이 계속될수록 형량이 늘더니 마지막 재판에서는 25년형을 받았습니다. 유형지에서 탈출하기로 맘먹었어요. 어디론가 도망갈 궁리를 한 것이지요. 1947년 7년 유형생활을 마치고 마가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때 지금의 처(82세)를 만나 결혼했어요. 처는 중학교 3학년 때 禁書(금서)였던 에세닌의 詩를 읽었다는 죄목으로 불가江 인근 사라토프에서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졌어요. 1941년 전쟁 당시였고, 6년 동안 유형생활을 했지만 그녀 역시 정치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마가단으로 보내진 것이지요. 이곳에서 둘은 연민의 정을 느껴 1955년 결혼했습니다』
40년 만에 만난 첫부인과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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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 얀코프스키가 부인과 함께 한국산 소주로 건배하고 있다. |
첫아들 세르게이를 낳자마자 부부는 생이별을 했다. 발레리氏가 소련군에 입대하고, 그 후 유형을 당해 소식이 두절되자 첫부인은 독일사람과 재혼한 뒤 독일에서 살다가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발레리氏는 1986년 캐나다로 첫부인을 찾아가서 40년 만에 처와 아들을 만났다.
10년형을 선고받았던 그의 아버지는 유형 중이던 1946년 세상을 떠났고, 동생 유리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전전하다 1987년에, 아르세니는 199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유일하게 발레리 얀코프스키만 생존해 있다. 그는 스탈린 사망 이후 복권돼 현재 살고 있는 블라디미르市로 옮겨 와 이곳에 정착한 지 근 50년이 지났다.
『지금 나는 산책을 즐기며 삽니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딸을 찾아가 손주들과 노는 것이 제일 큰 기쁨이에요. 내가 예전의 용맹했던 호랑이 사냥꾼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하지만 아직 꿈이 많아요. 사냥꾼 얀코프스키에 대한 책을 몇 권 더 내는 것이지요. 이미 한국 사냥 생활에 얽힌 일화를 중심으로 10권의 책을 냈습니다. 죽기 전에 총정리하는 책을 낼 생각이에요. 개인적인 욕심이라면 누군가가 우리 가족의 일생을 영화나 다큐멘터리로 제작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국은 제2의 조국
발레리 얀코프스키는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청진 근처에 있는 어머니 묘지를 방문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측에 수차례 편지를 보내 「북한을 방문하고 싶다」고 전했으나 북한대사관에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그는 『답답하다』고 했다.
『아직도 한반도에서 사냥하는 꿈을 자주 꿉니다. 눈을 뜨면 러시아 땅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서글퍼집니다. 한국의 山河가 그리워요. 언젠가는 한번 다시 찾아가고 싶습니다. 생전에 내가 사냥을 하며 활보했던 백두산과 태백산 등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발레리氏는 「한반도의 호랑이 멸종이 그의 가족 때문이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 손을 내저었다.
『저희 가족 때문에 한반도에 호랑이가 멸종됐다는 말은 근거 없는 것입니다. 저희는 민간에 해를 끼치는 호랑이를 잡았지 막무가내로 포획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떠나온 지 정확히 60년. 그는 『아직도 한국의 들판이 눈에 선하다』며 『한국은 제2의 조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가 선물로 가지고 간 소주를 마시며 한국의 맛을 음미했다. 한 잔은 사냥꾼 가족을 위해, 한 잔은 남북통일을 기원한다며, 또 한 잔은 죽기 전에 남한이든 북한이든 한국 땅을 밟았으면 하는 소망을 위한다며 자꾸 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