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 줄거리]
금강산과 강원도, 그리고 함경도 일대를 돌며 어느덧 중년이 된 김삿갓은 마침내 마음속으로 그리던 서북지방(관서: 평안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홍경래난의 무대이고 할아버지 김익순이 대역죄를 범한 현장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는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심정으로 홍경래난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겠다는 속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안주에서는 홍경래軍에 가담했던 무염스님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다복동에서는 살아남아 숨어 살고 있는 반란군의 가족들을 만났다. 그러나 정주성에 들어갔을 때 김삿갓은 역적 김익순을 비방하는 수많은 글들이 과거시험에 대비하는 학동이나 선비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중 노진이라는 사람이 쓴 명문은 바로 지난날 영월 백일장에서 자신이 쓴 글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지금까지 기록해 두었던 홍경래난의 자료들을 찢어 청천강에 버리고 만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재기하려던 기도는 허무하게 좌절됐고, 이후 김삿갓은 그저 흐르는 물처럼 목적 없이 남은 세월을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림 : 이우범
금강산과 강원도, 그리고 함경도 일대를 돌며 어느덧 중년이 된 김삿갓은 마침내 마음속으로 그리던 서북지방(관서: 평안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홍경래난의 무대이고 할아버지 김익순이 대역죄를 범한 현장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는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심정으로 홍경래난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겠다는 속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안주에서는 홍경래軍에 가담했던 무염스님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다복동에서는 살아남아 숨어 살고 있는 반란군의 가족들을 만났다. 그러나 정주성에 들어갔을 때 김삿갓은 역적 김익순을 비방하는 수많은 글들이 과거시험에 대비하는 학동이나 선비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중 노진이라는 사람이 쓴 명문은 바로 지난날 영월 백일장에서 자신이 쓴 글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지금까지 기록해 두었던 홍경래난의 자료들을 찢어 청천강에 버리고 만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재기하려던 기도는 허무하게 좌절됐고, 이후 김삿갓은 그저 흐르는 물처럼 목적 없이 남은 세월을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림 : 이우범
헌종 13년(1847) 여름이었다. 영월 산골짜기 노루목 마을에 농사꾼 차림의 마흔 넘어 보이는 한 낯선 남자가 찾아왔다. 먼 고장에서 어렵게 찾아온 듯 지치고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남자는 김병연의 집을 찾았다. 병연의 처 황씨는 아침부터 뒷산의 옥수수밭에 김을 매러 나가고 없었다. 아들 익균이 마침 소 먹일 꼴을 한 짐 지고 돌아와 마당 오른쪽의 외양간에 부려 놓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땀을 가시다가 손님을 맞았다.
『도련님이 炳(병)자 淵(연)자 어른의 아드님이신 翼(익)자 均(균)자 도련님 맞으십니까?』
『저를 알고 계십니까?』
『처음 뵙습니다만, 얼굴을 뵈니 어르신의 모습과 방불합니다』
『어르신이라니, 제 아버님을 알고 계십니까? 댁은 뉘십니까?』
『저는 황해도 곡산에 살고 있는 金漢慶(김한경)이라 합니다. 제 아비는 成洙(성수)라 하옵고』
『김성수, 황해도 곡산이라 했습니까?』
익균은 김성수라는 이름과 곡산이라는 지명을 씹으면서 삼옥리의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순조 11년(1812) 봄에 증조할아버지 김익순이 대역죄로 처형됐다. 증조할머니는 廣州(광주) 관아의 노비로 전락했고, 할아버지 安根(안근)은 남해로 귀양 갔다. 남은 가족은 살길을 찾아야 했다. 할머니 이씨는 막내아들 병호를 안고 여주로 피난 갔고, 여덟 살의 첫째 아들 병하와 여섯 살의 둘째 아들 병연은 노비였던 김성수가 데리고 자신의 고향인 곡산으로 가서 숨었다. 김성수는 명색이 노비였으나 사실은 순조 초년에 나라에서 노비문서를 태우는 일대 혁신정책을 펼 때 노비에서 해방된 보통 사람의 신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인집을 떠나지 못하고 일꾼 노릇을 하다가 주인집에 횡액이 덮치자 위험을 무릅쓰고 두 아들을 하나는 걸리고 하나는 등에 업고 머나먼 황해도 곡산까지 가서 피신한 것이었다.
김성수에게는 병연과 나이가 같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漢慶이었다. 병하와 병연, 그리고 성수의 아들 한경, 셋이서 성수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틈틈이 글을 읽었다. 천자문을 제일 먼저 떼고 文理(문리)를 터득하기 시작한 것은 나이 많은 병하가 아니라 병연이었다. 주인의 아들인 한경은 어제 배운 것을 오늘 모조리 까먹을 정도로 글에는 무디었다.
두 해가 지난 순조 13년, 권세를 쥐고 있던 김조순의 안동 김씨 세력은 같은 문중인 김익순의 죄를 덜어 주기로 결정하고 대역죄인에게 내려지는 滅族(멸족)의 형을 廢族(폐족)으로 완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대역죄를 본인인 김익순에게만 적용하고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치로 남해로 귀양 갔던 안근이 돌아오고 광주 관비로 전락했던 증조할머니 전주 이씨가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양반 신분이 아니었고, 과거를 볼 수 없는 상민의 신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가족들은 가평에서 모여 살았다. 여주로 피신했던 할머니 함평 이씨도 돌아왔고, 곡산으로 피신했던 병하와 병연도 돌아왔다. 그러나 증조할머니 전주 이씨와 할아버지 안근은 노비생활과 귀양살이에서 얻은 화병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불귀의 객이 되었고, 막내 병호마저 여주 피신 중에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자 세 사람이 간신히 목숨은 구했으나 집안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쑥대밭이 된 뒤였다. 할아버지 안근이 죽자 할머니 함평 이씨는 남은 두 아들 병하와 병연을 데리고 더 이상 그들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 없는 강원도 영월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살았다.
초근목피로 살 망정 무상한 권력의 늪에서 헤어나겠다는 할머니의 뜻은 이루어질 뻔했다. 그러나 아버지 병연의 범상치 않은 文氣(문기)가 저만치 물러간 줄 알았던 불행을 집안으로 다시 끌어들인 꼴이 되었다. 영월 백일장에서 병연이 증조부 익순을 욕보이는 글로 장원을 한 후 집안은 홍경래난 직후보다 더 참혹한 천형을 감수해야 했다. 병하가 세상을 떠났고 병연이 집을 나서 행각을 시작한 지 벌써 20여 년이 흘렀으나 생사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익균은 요즘 들어 부쩍 하늘을 쳐다볼 때마다 입 밖으로 한숨을 토하듯 『아버지』를 불렀다. 어느 하늘 아래 살아만 있다면 만나 보고 싶었다. 그랬는데, 지금 지난날 집안의 일꾼이었던 김성수의 아들 한경이 아비의 소식을 들고 황해도 곡산 땅에서 영월 산골까지 찾아온 것이다.
『몇 해 전 가을 어느 날 어르신께서 서북에서 내려와 구월산을 유람하고 곡산땅을 찾아오셨습니다. 제 아비를 찾으셨는데, 아비가 10년 전에 옆구리에 덧난 종기가 깊어 끝내 세상을 하직했다고 하자 대성통곡을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행장을 찾아 떠나시려는 것을 소인이 붙잡았지요. 어르신은 본래의 함자보다 김삿갓이라는 별명으로 조선 땅 어디를 가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詩人(시인) 묵객이 돼 있었지요. 곡산에서도 글귀나 하는 사람들은 어르신의 詩 한두 수는 외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붙잡았습니다. 아래채를 고쳐서 서당을 차렸지요. 사방 20리 밖에서도 학동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때 저는 한달음에 달려 영월에 계신 분들에게 어르신의 소식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 어리석은 제 안사람이 「서당이 저리 잘 되니 결국 어르신이 곡산땅에 자리 잡을 터이고, 그렇게 된 후에 가족을 불러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 말을 좇아 밍기적거리고 있는데 제 집에 찾아오신 지 일년 남짓 되던 어느 날 아침에 문안을 드리려고 서당으로 갔더니 시렁 위에 걸려 있던 죽장과 삿갓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셨는지 짐작도 할 수 없어 결국 포기하고 어리석은 의견을 냈던 여편네나 두들겨 팼지요.
그 후 어르신 때문에 속앓이를 하면서도 별 뾰족한 수 없어 세월만 보내고 있는데 문득 한 달쯤 전 어느 과객한테서 김삿갓 어르신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양과 경기도 여러 고을을 돌면서 詩를 남기고, 술을 마시면 통곡하고 가슴을 쥐어뜯는다고 하니 영락없이 어르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허황한 소식이나마 전해 드리려고 달려왔지요. 서당만 뒤지고 다녀도 어르신의 죽장이 머문 곳을 찾기가 영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날 밤부터 장마가 시작됐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황씨와 익균은 밤새도록 한경이 전해 주는 김삿갓의 奇行(기행)을 무슨 이야기 책 읽는 것을 듣듯이 들었다. 이야기하는 한경이 무안해질 정도로 모자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침에 한경이 곡산으로 돌아가려고 짚신을 챙겨 신자 댓돌 앞에 익균이 먼저 행장을 차리고 서 있었다. 황씨는 찐 감자를 두 사람의 행랑 속에 나누어 넣어 주었다. 언제 마련했는지 한 되쯤 되는 볶은 보리도 나누어 주었다.
그로부터 보름쯤 후 두 사람은 장마로 물이 불어난 광나루를 어렵사리 건너 시구문을 지나 한양성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운종가에서 한경은 익균과 헤어져 무악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임진 나루를 건너 곡산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익균과 헤어지면서 한경이 자신의 봇짐 속에 그 때까지 조금 남아 있던 볶은 보리 한 줌과 행자 몇 냥을 익균의 봇짐 속에 억지로 밀어 넣어 주었다.
『어르신을 만나면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하러 찾으러 나섰겠습니까? 김서방은 또 무엇하러 기별을 가지고 그 어려운 발걸음을 하신 겁니까?』
『하긴 그렇군요. 그러나』
한경은 망설이다가 하던 말을 이었다.
『어르신을 한 해 남짓 모시다가 어느 날 구름처럼 떠나보낸 후에 문득 느낀 일입니다만, 어르신은 떠도는 일에 이력이 나 있는 듯했습니다. 억지로 모시고 갈 수는 있겠으나 오래 붙들어 두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하는 말입니다』
『언젠가는 모두 헤어지는 것이 살아 있는 자들의 도리이니 다시 떠나신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명줄을 놓았다면 모를까, 같은 하늘 아래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어찌 만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제삿날 혼백이라도 보고 싶었고, 그도 아니면 저승에라도 빨리 가서 만나고 싶었던 아버집니다. 그 뒤의 일은 그 뒤에 걱정하지요』
『어르신을 찾을 때까지 길동무를 하겠습니다』
익균은 한경을 한사코 말려 돌려세웠다. 한경이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떠나고 나자 익균은 종루 건너편에 있는 의금부로 찾아갔다. 의금부에서 정현덕의 집을 물었다. 처음에는 거지 같은 젊은이를 수상하게 보고 심문하려던 의금부 관리들은 강원도에서 왔다는 젊은이가 김삿갓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정현덕의 집을 아는 사람을 수소문하여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십 수 년 전 초시에 급제하여 잠시 외방에 나가 있었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고 있던 정현덕은 거지꼴의 젊은이를 보면서 당장 난고 김삿갓을 연상했다. 금강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젊은 난고가 지금 자기 눈앞에 서 있었다.
『자네가 난고의 아들이 분명하다면 너무 늦게 왔네』
익균은 머리가 핑 돌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난고에게 무슨 변이 생겼다는 것은 아니니 너무 놀라지는 말게. 내가 늦었다는 것은, 난고가 한양에 있지 않다는 뜻일세』
『어디로 가셨는지 방향만 알려 주시면 세상 끝까지 가더라도 반드시 찾겠습니다』
『이런 아들을 두고 저리 헤매다니 이 무슨 천형인가』
현덕은 혼자 탄식하고 나서 말했다.
『난고가 한양에 머물렀던 것은 사실일세. 머물렀다고 하는 말은 어폐가 있지. 잠시도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한양과 주변의 경기도 일대, 그리고 가끔 마음 내키면 강원도와 금강산을 오가면서 그야말로 구름처럼 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네. 듣자니 경상도 땅에서 훈장 노릇하며 잠시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자네가 찾아가면 이미 떠난 뒤일 거라는 말일세. 너무 늦었다고 하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세』
『경상도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안동에서 김삿갓에게 과체시를 사사했다는 사람을 만났어』
『그게 언제였는지요?』
『작년 봄이었으니까, 일년이 더 됐구먼. 난고가 일년 이상 훈장으로 머물렀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없으니 하마 구름처럼 물처럼 어느 산천에서 흐르고 있으려나』
돌아서서 떠나려는 익균을 현덕은 굳이 붙잡아 하루를 묵어 가게 했다.
『서둘 필요가 없네. 어차피 구름과 바람이 만나려면 인연이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현덕은 익균에게 새 옷을 내 주고 깨끗한 방에서 재웠다. 그날 밤 현덕은 사랑채에 술상을 차려 놓고 익균과 마주 앉았다.
『소인은 아직 술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현덕은 웃었다.
『겉모습은 영락없이 아비를 빼닮았는데 아비는 구름이고 아들은 산처럼 무거운 이유를 이제야 알겠구먼. 술을 마실 줄 알고 모르는 차이로세』
『죄송합니다』
『무슨 말인가』
혼자서 탁배기 한 잔을 가볍게 들이켜고 나서 현덕이 물었다.
『아비를 어떻게 생각하나?』
『예?』
『어려운 질문이 아닐세. 가정을 버리고 떠돌다니 무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노여워하지 않았는가?』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아비가 뿌리 뽑힌 나무처럼 바람에 흩날려 떠나간 까닭을 들었고, 그 후부터 원망하고 섭섭하고 그립고 사무칠 때마다 분노가 치밀었던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되고부터 분노는 사라지고 그리운 마음만 남더니 문득 이 세상에 살아계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달음에 길을 나섰습니다』
『그랬을 테지. 내가 묻는 것은 난고가 술을 마시고 떠돌면서도 보석 같은 詩를 생산하고 있는 것을 어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일세. 내 생각으로는 전란에 쫓기고 가난에 쫓기던 두보조차 난고의 처지에 비하면 호강스러웠다 할 것이고, 詩를 두고 말하자고 해도 두보와 백거이를 합쳐 놓아도 난고를 따르지 못할 거라 생각하네만, 그러나 한편으로 그 보석 같은 시편들이 난고의 처절한 신세에서 나온 것이니 모르는 사람들은 詩를 즐기겠으나 인간 김삿갓을 아는 동무의 입장에서 보면 詩가 나오지 않아도 좋으니 고생길 접고 사람답게 살도록 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니, 나도 모르겠네. 나도 모르는 것을 자네에게 물어 미안하이』
『소인은 아비의 詩를 알지 못합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새겨 보니 아비의 처지가 詩를 낳게 했으니 그것도 값있는 일이 아니겠느냐 하는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만, 자식된 입장에서는 그저 단 하루라도 좋으니 모친 곁에 모셔 놓고 따뜻한 진지라도 올리고 싶을 따름입니다』
『맞아, 詩가 다 무엇인가. 인간들은 詩를 찬탄하면서 은근히 詩人의 고생스러운 삶에서 위안과 즐거움을 얻는 모양인데 이 얼마나 가혹하고 비정한 일인가.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한양의 문사들이 난고의 詩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일세. 그들은 난고가 한양은 물론이고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를 돌면서 과장마다 출현하여 미리 지은 과시를 팔아 술을 마시는 꼴을 보고 과거제도의 폐단을 난고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지. 과거는 이미 효용도 수명도 다하여 난고는 오로지 죽은 과거제도의 무덤에 弔喪(조상)하러 나타난 묵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안타깝네. 아마 난고의 詩가 제 위치를 찾자면 백 년 또는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야 할 것이라 생각하네』
현덕은 종이를 펴고 詩 한 수를 적었다.
『난고가 삼 년 전 노들에서 즉흥으로 읊은 詩야. 품에 지니고 다니다가 살기가 어렵고 절망스러울 때 가끔 꺼내어 씹어 보게』
현덕이 적어 놓은 詩의 내용은 이랬다.
浮浮我笠登虛舟(부부아립등허주: 떠도는 나의 삿갓 빈 배와 같으니)
一着平生四十秋(일착평생사십추: 한 번 쓰니 사십 평생이라)
牧竪輕裝隨野犢(목수경장수야독: 목동이 송아지 몰 때 쓰고)
漁翁本色伴白鷗(어옹본색반백구: 어부가 흰 갈매기 벗삼아 쓰던 것)
醉來脫掛看花樹(취래탈괘간화수: 취하면 벗어 나무에 걸어 놓고)
興到携登翫月樓(흥도휴등완월루: 흥이 나면 벗어 들고 누대에 올라 달구경했노라)
俗子衣冠皆外飾(속자의관개외식: 세상 사람들 의관은 모두 겉치레지만)
滿天風雨獨無愁(만천풍우독무수: 풍우가 몰아쳐도 나는 걱정 없네)
『어떤가?』
현덕이 물었다. 익균은 한숨을 쉬었다.
『구름 같고 물 같고, 구름의 물 같아서 종잡을 수 없습니다』
『행여 난고를 만나거든 붙잡지는 말게나』
『무슨 뜻인지요?』
『자네 부친이긴 하나 이 수상한 세월의 아픔을 혼자 앓고 있는 거라네. 혼자는 아니지. 어떤 이는 천지개벽을 꿈꾸고 어떤 이는 천도를 말하고 또 어떤 이는 홍경래의 재현을 자임하네. 구질하게 목숨을 길게 늘여야 칠십인데 난고는 이미 한 세상을 다 살았어. 아주 멋지게 살았지』
익균은 알아듣지 못했다. 현덕도 부연하지 않았다. 다음날 익균이 떠날 때 현덕은 노자를 마련해 주었고, 『난고를 만나거든 내 이름으로 술 한잔 대접하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익균은 현덕이 챙겨준 노자를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갔던 길, 지금도 가고 있는 길을 그대로 따라서 가보리라 마음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익균은 아버지 병연이 지니고 있는 자산을 아무것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산골에 살면서도 일찌감치 천자문을 떼고 내친김에 아버지가 쓰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가슴속에 수많은 지식이 들어 있었으나 그것을 꿰어 자신의 문장으로 만드는 재주는 없었다. 뭔가 몸속에 가득한 운무를 연기처럼 토해 내고 싶었으나 토해 낼 방도를 몰랐다. 아비 병연을 그리워했던 이유 중에는 안개처럼 자욱한 가슴속의 운무를 토해 낼 방법을 아비로부터 가르침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지 행각 중에서 밥을 얻어먹는 일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열 집을 기웃거려 한 집에서는 먹다 남은 꽁보리밥 덩어리일망정 허기를 채울 요깃거리는 나왔다. 그러나 잠자리는 쉽게 내주지 않았다.
『아직 젊은 놈이 빌어먹기로 작정했구먼. 일을 할 텐가? 그러면 헛간에라도 재워 주지』
똥장군으로 백 짐이 넉넉하게 담길 성싶은 깊은 똥구덩이를 다 퍼내어 보리를 베어내고 채전을 일구기 위해 비어 있는 밭에 지고 나가 뿌려 주고는, 겨우 하룻밤 봉당 신세에 두 끼의 보리밥을 얻어먹은 날도 있었다. 밥을 빌다가 달려 나온 주인놈이 휘두르는 지게 작대기에 등줄을 맞아 눈물이 쏙 빠지고 며칠 동안 허리를 쓰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
장마가 끝난 뒤라 보름달이 유난히 밝았다. 단양 고을을 지나 소백산 자락에 숨어 있는 산골 마을의 당나무 아래에 몸을 붙이고, 사정없이 덤비는 모기떼와 싸우며 밤을 이겨 보려고 애를 쓰고 있던 익균은 문득 현덕이 적어 준 아비의 詩를 꺼내어 달빛에 읽어 보았다.
『빈 배를 저어 어디로 흘러가십니까, 아버지』
그 아버지 또한 경상도 어느 고을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달을 보고 있으려나. 그 생각을 하면서 익균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울음을 삼켰다.
익균이 김삿갓의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죽령을 넘어 풍기 고을에 들어섰을 때였다. 장날이었다. 장바닥에는 갓 쓰고 흰 두루마기 깃을 날리는 노인들이 많았다. 양반은 아니고 중인들 중에서 출입할 때 양반의 흉내를 내보는 사람들이었다. 쇠전 가까운 곳에 국수와 팥죽을 파는 노전이 몇 군데 있었다. 소를 팔러 나온 농민과 거간꾼들이 요기를 하거나 흥정을 하기 위해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중 한 노전에는 환갑이 넘은 노인 혼자서 국수를 먹고 있었다. 익균은 그 옆에 앉아 국수를 시켰다. 국수가 나오자 익균은 국물 한 모금을 마시다가 차마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바닥에 뱉은 후 그릇을 내려놓았다. 옆자리에 앉아 국수를 먹고 있던 노인이 그를 바라보았다.
『젊은 사람이 왜 그리 먹지 못하는가?』
『아비를 생각하니 차마 넘기지 못하겠습니다』
노인이 자신도 먹다 말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비가 어떻게 되었는가?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기라도 했는가?』
『유명을 달리했다면 제삿밥이라도 드리면 될 터인데, 제 아비는 살아 계시면서도 풍찬노숙으로 떠돌아 다니시니 자식된 도리로 찾아나서기는 했으나 종적을 알 길이 없어 가슴만 미어질 뿐입니다』
『딱하구나. 근자에 떠도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아비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것을 알아야 화적이 되었는지 거지가 되었는지 어느 집안에 들어가 더부살이를 하고 연명하는지, 아니면 삭발하고 釋氏(석씨) 문중에 들어가 안심입명의 도를 닦고 있는지 짐작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아비의 이름은 김, 병자 연자이옵고, 호는 난고, 별명은 김삿갓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그런가. 자네가 김삿갓의 아들인가?』
노인이 반겼다.
『혹시 제 아비의 이름을 들은 일이 있는지요?』
『있다마다. 만나서 詩를 짓고 술을 마신 적이 있다네. 자네가 경상도 땅으로 찾아온 것을 보니 김삿갓이 어디 있는지 소문을 듣기는 들었던 모양이군』
『안동에 가서 물어보면 행방을 알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무작정 죽령을 넘었습니다』
『그랬었지. 안동에 머물렀어. 정확하게 말하면 宜東(의동)의 도산서원 아래 마을에서 작은 서당을 열어 훈장을 했었지. 마을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요즘 같은 계절에는 천렵하여 술에 취하면 그냥 강물에 빠져죽고 싶은 유혹을 감당하기 어려운 곳이었네. 난고 선생도 몇 번이나 강물에 뛰어드는 것을 사람들이 간신히 붙잡아 명줄을 이었지. 그냥 두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승으로 곧장 갔을 것이네』
노인의 말에 익균은 맥이 풀렸다.
『지금은 그 마을을 떠나셨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네』
노인의 대답에 익균은 발 밑의 땅이 꺼지는 듯했다.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네, 이 사람아』
노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당은 작파하고 떠났으나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상주나 예천에서 김삿갓을 보았다고 하니 멀리 가지는 않은 듯하네』
어제 상주에 있었다면 오늘은 그곳에 있지 않을 터이니 노인의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뒤꿈치를 따라가자면 일단 상주나 예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익균은 노인에게 인사하고 서둘러 예천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러나 예천에도 상주에도 김삿갓은 없었다. 다만 풍기에서 만난 노인이 말했듯이 김삿갓의 흔적은 도처에 남아 있었다. 서당에도 남아 있었고 주막에도 남아 있었다. 산중의 암자에도 어김없이 떠돌이 詩人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방에 김삿갓이 숨 쉬고 있었다. 그의 詩를 줄줄 외는 학동들이 있었고, 신출귀몰하는 재주꾼인 양 과장된 일화도 귀에 담을 수 있었다. 그중에는 김삿갓이 죽은 아이를 살려 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나쁜 양반과 고을 사또를 혼구멍 냈다는 통쾌한 이야기도 있었다. 술에 취해 호랑이 배때기를 베고 잤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돌았다. 경상도 땅에서 김삿갓은 어느덧 전설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김삿갓 본인은 보이지 않았다. 숨바꼭질하듯 익균을 피해 다니는 것일까. 야박한 아비의 모습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김삿갓이 팔공산으로 간다더라』는 말을 들은 것은 의성의 한 주막에서였다.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말이었다. 익균은 의성에서 칠곡으로 방향을 잡았다. 팔공산의 동쪽 산자락은 급하지 않으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았다. 경주 토함산의 석굴 못지않은 신라대의 석굴이 있어 석굴암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퇴락한 절을 오른쪽으로 끼고 산길을 오르는데 누군가 뒷덜미를 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거기 가는 젊은이, 호환이 두렵지 않은가?』
익균은 걸음을 멈추었으나 돌아보지는 못했다.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먼 꿈속에서 듣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방금 지나온 길에서 사람은 보지 못했다. 산굽이를 돌 때 조금 높은 언덕이 있었는데 그 언덕 위의 찬나무 그늘에서 나는 소리였다. 목소리는 이어졌다.
『대낮에도 호랑이가 나온다고 하네. 아무리 하찮은 몸뚱이일지라도 호랑이 밥으로 공양하기는 싫으이. 나도 혼자 넘지 못하고 동무를 기다리던 참일세』
『어르신께서는 어디로 가시던 길인지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서서 물었다.
『산 너머 파계사 스님들의 인심을 알아보러 가는 길일세. 오라는 사람은 없어도 늘 이리 바쁘다네. 젊은이는 어디로 가는 길인가?』
익균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아 올라 왔으나 간신히 눌러 참았다.
『저도 제가 가는 곳이 어딘지 모릅니다』
『허어』
탄식이었다.
『요즘은 갈 곳을 모르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가』
익균은 돌아섰다. 찬나무 무성한 그늘 밑에 한 남자가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남자의 등 뒤 나뭇가지에는 낡아서 너덜거리는 삿갓이 걸려 있었다. 「떠도는 나의 삿갓 빈 배와 같으니…」 바로 그 빈 배가 나무 그늘에 정박해 있었다. 익균은 달려가 남자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익균입니다』
『익균? 네가 익균이라?』
공포에 질린 듯한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한참 후 흐느끼는 소리로 변했다. 병연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얼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던 둘째 아들 익균의 다 자란 모습을 처음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도 울었다. 울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눈물이 헤픈 사람이 어떻게 유랑 행각을 하는가? 또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모질게 세월을 이겨 내는가? 외로움을 어떻게 참아 냈는가?」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익균은 울었다. 아들의 우는 모습을 보면서 병연도 생각했다.
「젊은 놈이 울음이 헤퍼서 이 모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작정인가? 내가 길렀다면 이 모양은 아니었을 텐데…」
『아버지를 찾아 여기까지 왔으나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영월 산골에서 세상 소식을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 보니 아버지께서 살아 계신지 유명을 달리하셨는지도 모른 채 그저 그리운 마음만 지니고 20년을 살았습니다. 이제 집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러마』
병연은 순순히 대답했다.
『두 가지만 대답해 다오. 할머니는 건강하시냐?』
『아버님께서 집을 떠나신 후 이태 만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학균이는? 네 형은 건강하냐?』
『작년에 장가 가서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어머니는, 때로는 나무 같고 때로는 바람 같은 모습으로 산속에서 산이 되고 흙이 되어 살고 계십니다. 아버님 기다리는 마음을 저에게 내색한 일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그래』
또 탄식이었다.
『저물기 전에 산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일어나십시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오던 길을 되짚어 걸었다. 여기까지는 각각 혼자서 걸었으나 이제부터는 두 사람이 함께였다. 지금까지는 목적지가 없었으나 여기서부터는 목적지가 분명했고, 그 목적지로 가는 최단거리의 길이 어딘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팔공산 자락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곳에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 있었다. 익균은 자신의 짐 속에 있는 노자를 마음속으로 헤아리면서 주막을 찾았다. 여름 저녁의 해는 산을 넘기 싫어 한없이 뭉개다가 어쩔 수 없이 서쪽 산 봉우리를 타고 넘었다. 두 사람은 주막 평상에 앉아 국밥으로 요기를 하면서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주로 병연이 묻고 익균이 대답했다. 영월의 가족들 이야기가 전부였다. 익균은 아버지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궁금증을 이토록 애틋하게 담고 있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이런 사람이 이십 수년을 길에서 헤매다니. 마치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사람처럼.
다음날 한낮에 두 사람은 창평이라는 마을에 닿았다. 익균은 병연이 오른쪽 발을 조금 절고 있는 것이 마음 쓰이던 차에 마을이 나타났으므로 하루쯤 쉬어 갈 요량으로 주막을 찾아보았다. 주막은 없었다. 몇 집 기웃거려 보았으나 두 사람에게 잠자리를 내어 줄 만한 집은 없었다. 할 수 없이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등짐을 내려놓았다.
『여기가 괜찮구나』
병연이 나무 밑의 널찍한 땅바닥과 부드러운 흙을 만지면서 말했다.
『나는 여기서 좀 쉬어야겠다. 짚신이 잘못된 모양이다. 젊은 놈이 엮은 짚신은 언제나 살을 깎아먹는단 말이야. 요즘은 짚신을 제대로 엮을 줄 아는 놈들이 없어』
짚신을 두고 한없이 투덜거리던 병연이 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여기서 쉬고 있을 테니 너는 잰 걸음으로 심부름을 다녀오너라』
『무슨 심부름입니까?』
『여기서 인각사가 멀지 않다. 주지스님에게 말로 다 형용하기 어려운 신세를 졌다. 게다가 남쪽 절에서 다시 만날 약조까지 해두었다. 이제 내가 북쪽으로 돌아가니 전갈이라도 해두어야 그게 사람의 도리라는 생각이 든다. 수기를 써 줄 테니 인각사에 가서 주지스님에게 전해 주고 오너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병연은 지필묵을 꺼내어 간단한 편지를 썼다. 그것을 잘 접어 소매 속에 넣고 익균은 달렸다. 잠시라도 아버지를 홀로 버려 두는 것이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인각사는 가깝지 않았다. 주지스님에게 편지를 전하고 돌아오니 긴 여름해가 멀리 팔공산 봉우리를 타넘고 있었다.
마을 앞 느티나무 아래까지 왔으나 아버지 병연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살펴보고 불러 보았으나 종적이 없었고, 대답도 없었다. 문득 머리 위를 보니 나뭇가지에 자신의 등짐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짊어지고 익균은 달렸다. 먼저 팔공산 방향으로 달렸다. 한참을 가다가 아버지가 이 길을 도로 간다면 굳이 혼자 내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꾸로 의성 쪽으로 달리다가 이번에는 인각사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렇게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다가 마침내 창평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아래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버지』
하늘에서는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풀벌레들이 무심하게 울어댔다.
『행여 난고를 만나거든 붙잡지는 말게나』 하던 정현덕의 말이 떠올랐다.
철종 2년(1850) 정월 보름날이었다. 和順(화순) 同福(동복)의 선비 丁時龍(정시룡)은 조계산 송광사의 법회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뒤숭숭한 세상만큼이나 날씨까지 변덕스러워서 지난밤에는 때 아닌 겨울비가 흩뿌리더니 아침부터 북풍이 진눈깨비를 몰고 하늘을 휘감아 부는 바람에 얼굴을 곧추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龜巖(구암) 마을 가까이 와서는 당나귀도 헉헉거렸고, 당나귀 고삐를 잡고 끌던 노복 이서방도 지쳐 발을 헛디디고 비칠거렸다. 그러다가 이서방이 갑자기 무엇에 걸린듯 쓰러졌다. 이서방은 무언가 길고 물컹거리는 물건 위에 쓰러졌는데 일어나며 보니 그것이 사람이었다.
정시룡은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은 터라 맥을 짚을 줄 알았다. 쓰러져 있는 사람의 맥을 짚어 보니 가늘게나마 뛰고 있었고 코 밑에 손을 대 보니 숨을 쉬고 있다는 신호가 있었다.
두 사람은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당나귀에 태웠다. 쓰러진 사람은 가진 것이 없는 간단한 행장이었으나, 길 위에는 낡은 삿갓 하나가 저만치 나뒹굴고 있었고 죽장도 하나 있었다. 이서방은 삿갓과 죽장을 챙겼다.
집으로 돌아온 정시룡은 사랑채에 군불을 때고 길에서 업어 온 나그네를 눕히고 이서방으로 하여금 나그네의 얼어 버린 몸을 주무르게 했다. 그 정성이 사무친 탓이었을까. 반쯤 죽었던 나그네는 한밤중에 눈을 떴다.
이서방으로부터 손님이 눈을 떴다는 전갈을 받은 정시룡이 사랑채로 건너왔다. 병연은 워낙 지친 몸이라 몸속에 기운이 남아 있지 않은 듯 주인이 와도 일어날 수 없었다. 그저 멀거니 눈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일어났군요. 염라왕이 모시고 가는 것을 저희들이 말렸습니다』
정시룡은 30代 초반의 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환갑을 넘긴 노인처럼 사람을 압도하는 기품이 있었다.
『그런데 뉘십니까? 어쩌다가 이 추운 날 고갯마루에 쓰러지신 겁니까?』
『변변치 못한 이 사람의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은 김삿갓이라 부릅니다』
그러자 정시룡은 갑자기 옷깃을 여몄다.
『고매한 이름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남도에 내려오시면 반드시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모시게 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쓰러지신 이유는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갑니다. 의학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이대로 길을 다니시다가는 큰 변고가 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집을 고향집인 양 생각하시고, 이 사람을 아우인 양 생각하셔서 싫증이 날 때까지 머물러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병연은 정시룡의 말이 입에 발린 인사치례가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느껴 알았다. 거친 바다를 나뭇잎처럼 떠돌던 조각배가 갑자기 항구에 닿은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었다. 적어도 정시룡이 병연으로 하여금 닻을 내린 배처럼 편한 기분이 들도록 만들어 주었다.
정시룡은 김삿갓을 위해 중뿔난 대접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오랜 세월 한집에서 살아온 동기간처럼 스스럼없이 대우하고 보살폈을 뿐이었다. 사흘이 지나자 병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구례 화엄사를 돌아보고 부안 채석강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고개를 넘는데 바람이 거세어서 자꾸 뒤로 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삿갓이 바람에 날려서 그것을 잡으려고 몸을 돌리는데 누군가 발목을 걸어 넘어뜨려요. 그리고 곧 편안한 느낌이 들어 「에라, 여기가 내 고향 안방이로구나」 하는 생각으로 누워 있었는데 그 다음은 눈을 뜨니 정말 따뜻한 방에 누워 있더군요.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입니다. 더럽고 무서워도 이 세상은 멋진 곳입니다』
『멋진 곳이지요? 그러니 오래 머무십시오. 난고 선생님의 문장은 이미 전설이 되어 있습니다. 모쪼록 이곳에서 보배 같은 시편을 많이 생산하십시오. 두보가 成都(성도)의 초막에 머물면서 보배 같은 작품을 남겼듯이 말입니다』
『제 詩는 길이 만든 것입니다. 머물면서 쓴 詩는 거의 없습니다』
『머무는 것도 길게 보면 흐르는 것이지요. 정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긴』
병연은 젊은 주인의 마음공부가 깊은 데에 놀랐다.
다시 하루가 지나자 병연의 몸은 제법 회복됐다. 눈을 들어 살펴보니 사랑채의 서가에는 몇 권의 책이 꽂혀 있었고, 윗목의 서안에는 지필묵이 제 자리에 놓여 있었다. 병연은 오랜만에 붓을 들었다.
半?書架數卷冊(반휴서가수권책: 반쯤 찌그러진 서가에 책 몇 권 꽂혀 있고)
世世傳傳一個硯(세세전전일개연: 대대로 전해 오는 벼루 한 개 있어)
墨香深醉心自閑(묵향심취심자한: 묵향에 취하여 마음은 스스로 한가하니)
微軀此外何所求(미구차외하소구: 미약한 이 몸 더 무엇을 바랄소냐)
주인 정시룡이 그것을 가져가더니 금방 표구하여 대청에 걸었다.
병연이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는 칼날을 세웠던 모진 바람은 없어지고 남쪽 기슭을 타고 넘어오는 훈풍이 대지를 녹이고 있었다. 마을은 따뜻했다. 뒤로 거북의 등 같은 산이 좌우로 흘러 마을을 감싸고 있었고, 마을 앞으로는 맑은 물이 마르지 않는 개천이 휘감아 흘러 가고 있었다. 마을 오른쪽으로 뻗어 가던 야산이 혈맥을 맺으면서 멈춘 곳에 작은 동산이 있었고, 동산에는 누각이 있어 마을 어른들이 봄이 올 때까지 참지 못하고 나와 詩를 읊고 막걸리를 돌렸다.
정시룡이 병연을 그 자리에 안내하자 촌로들은 다투어 술을 권하고 운을 불렀다. 그러나 병연은 술은 사양하지 않았으나 詩를 짓는 것은 사양했다. 이상하게도 몸이 편안해지니 詩가 술술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완연한 봄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나가 화전놀이를 벌였다. 화전놀이라면 집구석에 처박혀 살던 아낙들이 딱 하루 기를 펴고 술도 마시고 춤도 추면서 몸속에 쌓인 찌꺼기를 태워 없애는 날인데, 이 마을의 화전놀이는 아낙들의 놀이가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 참여하여 봄이 실어오는 생명의 약동을 발산하는, 그야말로 동네 잔치였다.
이 해의 화전놀이에는 귀한 손님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손님을 주인처럼 받들면서 놀았다. 김삿갓, 병연이 그 사람이었다.
병연은 종일 마시고 춤도 추었다. 술에 대취했으나 통곡하지 않았다. 춤을 추었으나 쓰러지지도 않았다. 저녁 무렵 정시룡이 취하여 냇가의 차일 밑에서 잠이 들자 그 모습을 보던 병연이 스스로 붓을 들었다.
藥經深紅蘚(약경심홍선: 약 캐러 가는 길엔 붉은 이끼가 깊고)
山?滿翠微(산창만취미: 산쪽 창에는 푸르름이 가득한데)
善君花下醉(선군화하취: 그대 꽃 아래 취하여 누웠으니)
胡蝶夢中飛(호접몽중비: 나비는 꿈속에서 날겠지)
여름이 깊어 가던 유월 어느 날 병연은 삿갓을 찾아들고 죽장을 짚었다. 주인은 말리지 않았다.
『조선 팔도 삼천리가 모두 선생님의 집이니 누구라 감히 머물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몸속이 허하여 자칫하면 쓰러지고, 쓰러지면 일어나기 어려우니 이 일을 항상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상한 기분이 들면 지체 없이 동복을 생각하시고 구암에 누울 자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소서. 이 사랑채는 언제나 비워 놓겠습니다』
구암 마을을 떠날 때 병연은 마을 어귀에서 돌아서서 오래 오래 마을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마을을 온전하게 담아 두려는 것처럼.
철종 7년(1855)이었다. 가끔 귀동냥으로 남쪽에서 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민란이 일어났다는 흉흉한 소식들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익균은 어제 먹었던 밥알이 목구멍으로 되돌아 나올 것 같아 구역질을 했다. 민란과 아버지가 무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떠돌다가 공연한 일에 휘말려 화를 당하지나 않을지 꿈자리가 늘 뒤숭숭했다.
경상도 팔공산 자락에서 다시 아버지를 잃고 혼자 돌아온 그 다음해에 익균도 장가를 들었다. 장가든 지 이태 만에 첫아들을 낳았고 다시 올해 둘째 아들을 낳았다. 둘째가 고물거리는 손으로 어미의 젖을 움켜쥐는 모습을 보다가 익균은 아비를 뒤숭숭한 남쪽 땅에 버려 둔 불효를 생각했다.
어머니 황씨에게 『남쪽으로 떠나려 하니 염치없이 세 식솔을 부탁드립니다』고 하자 황씨는 삼베 치마의 끈을 조여매고 뒷산으로 올라가 버렸다. 전에는 몰랐으나 지금 익균은 황씨가 아무 내색 없이 산으로 올라가 버릴 때마다 산속에서 혼자 피를 토하듯 울 것이라고 잠작하고 있었다. 어머니 옆에 반드시 아버지를 모셔다 놓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먼 길을 나서기에는 그래도 여름이 나았다. 마침 시절은 늦봄이었다. 익균은 행장이랄 것도 없는 행장을 차리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서당과 암자와 글을 하는 선비들의 사랑채를 기웃거리며 김삿갓의 행방을 수소문하느라 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김삿갓이 경상도와 전라도에 머물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한양과 금강산을 향해 북쪽으로 올라왔던 흔적이 있을 때는 당황했으나 다행히 김삿갓은 한양이나 금강산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곧 남쪽으로 다시 내려가곤 했음을 알았다. 근거가 되는 것은 지리산이었다. 젊어서는 금강산과 관북·관서를 헤매더니 이제 신물이 났던 것일까. 그쪽으로는 발길을 끊고 간간이 금강산이나 찾으면서 지리산에 파묻혀 있었다. 그 덕택에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서당이나 마을 정자에서 떠돌고 있는 김삿갓에 얽힌 전설은 풍성했다.
추풍령 아래 옥천에서는 거지를 가장한 도둑으로 몰려 사흘을 뇌옥에 갇혀 곤장을 맞은 일도 있었고, 선산에서는 나룻배 사공이 지난밤 도망간 마누라를 생각하다가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배를 뒤집는 바람에 물귀신이 될 뻔한 일도 있었다.
소문을 좇아 남해 섬까지 내려온 익균은 거기서 망망한 바다와 마주쳤다. 김삿갓이 배를 얻어 타고 제주도로 떠나는 것을 보았다는 바닷가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사실이었다. 익균은 낙망했다. 물길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배를 얻어 탈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비린내 나는 어촌에서 거지처럼 한 끼 밥과 잠자리를 구걸하고 다니다가 익균은 믿을 수 없는 소식 하나를 들었다.
『진주에서 민란이 벌어졌는데 민란을 일으킨 괴수 중에 김삿갓이 있다더라』는 소문이었다. 그 말을 전한 사람은 얼마 전까지 공조판서를 지내다가 남해로 귀양살이 온 사람의 수발을 위해 내려와 있는 家奴(가노)였다. 어찌 되었건 김삿갓이 제주도에서 육지로 되돌아온 것은 분명했다. 익균은 남해에서 진주로 서둘러 걸었다.
진주에 가까이 가자 민심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말대꾸하는 사람도 없었고, 식은 밥 한 덩어리 던져 주는 아낙도 없었다. 사람들의 표정만 보아서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종잡을 수 없어 공포스러웠다. 익균은 여러 날을 굶고, 여러 밤을 이슬에 젖은 채 나무 밑이나 바위 틈에서 잤기 때문에 체력이 거의 소진되어 있었다. 진주성이 가깝다는 것, 어쩌면 아버지를 만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탈진한 몸뚱이를 간신히 끌고 갈 뿐이었다.
이 지역의 민심이 어찌하여 그토록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는지 진주성에 닿고 보니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성 안으로 들어서니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죽은 사람 여섯 명이 저잣거리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일어난 민란의 주동자들을 처형하여 머리를 장대 끝에 매달아 놓았는데 그들이 한스러운 눈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자연 산 사람들은 거리에 나오기를 꺼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 민란의 규모가 커서 한양에서 관군이 토벌군을 편성하여 내려 보내고서야 진압이 되었지만, 워낙 가담한 민초들이 많아 사후의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조정에서도 아직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진주를 둘러싼 영남과 가까운 호남 일대에서도 조정의 처리 방향을 살펴보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늘 그랬듯이 민란의 단초를 제공한 관리들의 학정과 무능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민란을 일으킨 민초들만 닦달을 한다면 제2, 제3의 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 때문에 조정도 일벌백계의 칼을 휘두르지 못하고 민심의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죄상이 명백한 주동자들만 괴수라는 이름으로 효수해 놓고 있었다.
익균은 여섯 명의 괴수들 목이 걸린 장대 밑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매달린 머리들은 소금을 뿌려 놓았으나 벌써 썩어 가고 있어 누구의 머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만 머리 밑에 천을 매달고 거기 이름을 써놓았는데 여섯 사람을 다 확인했으나 김병연과 삿갓의 이름은 없었다. 걱정을 내려놓고 긴장이 풀려 긴 한숨을 쉬는데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돌아보니 포졸이었다.
『뭐하는 놈이냐. 이 중에 가족이라도 있는 게냐?』
『없습니다』
『그런 왜 여기서 얼쩡거리며 괴수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이름을 확인한 것이냐?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으니 바른 대로 말해 보아라』
『사실은 집 떠난 아비를 찾고 있던 중이라 혹시나 하고 기웃거리던 중이었습니다』
『집 떠난 놈들이 어디 한 둘이냐. 민란통에 지아비 잃은 계집이 길에 널려 있으니 과부 사태가 날 지경이다. 나도 이제 장가나 갈까 한다』
포졸은 본분을 잃고 낄낄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험한 인상으로 돌아왔다.
『자네의 아비라면 하마 늙은이에 속할 터인즉 무슨 기운으로 민란에 끼겠느냐. 대체 아비의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은 있으나 사람들이 잘 모르고, 그저 편하게 김삿갓으로 부릅니다』
『김삿갓? 그 사람이 분명 자네 아비냐?』
사라지려고 하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일고 있었다.
『김삿갓을 아십니까? 혹시 이곳 진주 땅에서 보신 일이 있습니까?』
『보았지』
『가르쳐 주십시오』
『장터 뒤편에 작은 골목이 있다네. 그 골목 어디쯤 술청을 뒤져 보게. 삿갓을 팽개치고 술에 얼어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익균이 휑하니 뛰려는데 포졸의 말이 덜미를 잡았다.
『서둘 것 없네. 그 사람은 고주망태가 되어 적어도 사흘 안으로는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아들이 분명하다면 내 한 가지 일러둘 게 있네. 김삿갓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고 자네 또한 순박한 사람 같아서 충고하는 것이니 잘 듣고 이행하게』
『말씀하십시오』
마음은 골목 저쪽으로 달려가고 있었으나 공손하게 경청하는 태도를 지었다.
『이번 민란이 아주 나쁘고 골치 아픈 것은 저놈들이 진주 사람들도 아니고 진주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 외지 사람들이라는 것이야.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나라 안에 민란을 일으키려 곳곳을 들쑤시며 다니는 패거리들이 있다는 증좌이고 이는 필시 조정 안의 불순한 세력들이 사주하고 있다는 뜻이지. 그래서 골치 아픈 거야. 일이 단순하지 않아. 자네 아비 김삿갓도 한때는 의심의 대상이었지. 민란의 주동자들 중 우두머리인 徐奉漢(서봉한), 저기 맨 왼편에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저 대가리가 그놈일세. 저놈하고 김삿갓이 민란이 일기 전에 진주성 안의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담론하는 광경을 본 사람들이 여럿이야. 그리고 반도들이 곳곳에 붙여 놓은 榜文(방문)의 내용이 너무나 명문장이라는 점이야. 글을 아는 사람들은 孔明(공명)의 出師表(출사표) 이후 최고의 문장이라고들 하더군. 어쨌든 그 명문장이 어디서 나왔느냐. 「이는 필시 김삿갓의 작품이다」 하고 의심을 했지. 그런데 바로 그 김삿갓이 겁도 없이 민란이 가라앉은 후에도 진주 안에서 헤매고 다니다가 붙잡히고 만 거야. 고생 좀 했을 거야. 다행히 취조 끝에 죄상을 찾지 못하고 방면하기는 했지만 관에서는 의심을 말끔하게 없앤 것은 아니니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내가 아들이라면 업어서라도 한시 바삐 진주를 떠나겠네. 지금처럼 옛 친구 서봉한의 썩어 가는 대가리 옆에서 술을 마시고 울고불고 하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그 양반의 재주가 아까워서 하는 말이네』
『고맙습니다. 이 은혜 백골난망이올시다』
포졸이 일러 준 대로 저잣거리 뒤편의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주막 몇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중 한 집의 마당에 김삿갓, 병연이 길게 누워 있었다. 잠이 들었는가 가만히 지켜보니 입 속으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니 회심곡 비슷한 곡조였다. 주모가 앞치마를 걷어붙이며 달려 나왔다.
『혹시 이 분을 아시우?』
『가족입니다』
『잘 오셨수. 빨리 모시고 가시우. 저대로 두었다가는 염라왕이 잡아가든 포졸이 잡아가든 결판이 나게 생겼수』
익균은 주모에게 탁배기 한 잔을 시켰다.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술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 빈 속에 탁배기 한 잔을 부어 넣으니 대번에 취기가 올랐다. 그 기운으로 익균은 아버지를 들쳐 업었다. 아버지의 몸은 고양이 한 마리 무게만큼이나 가벼웠다. 익균은 뛰었다. 진주성을 벗어난 후에도 걸을 수 있는 한 걸었다. 해가 빠진 후에야 아버지를 등에서 내려 길 옆 어느 문중의 퇴락한 제실 처마 밑에 눕혔다. 그러자 병연은 몸을 가누고 일어나 앉았다.
『네 등짝이 말랐구나』
『아버지, 이번에는 소자를 버리지 마십시오』
익균이 먼저 다짐부터 했다.
『달아나지 않겠다』
병연이 약속했다. 아들이 믿지 않는 표정이어서 병연은 덧붙였다.
『이제 지쳤다. 걸을 힘도 술 마실 힘도 없어졌다. 세상은 갈수록 멋지게 변하는데 나는 할 일이 없구나』
『큰일을 하셨습니다. 오면서 들어보니 아버님께서는 신선처럼 괴력을 부리는 인물로 회자되고 있었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은 영웅이 없으면 지어서라도 영웅을 만드느니라. 그 이름이 김삿갓이면 어떻고 이삿갓이면 어떠냐』
『그러다가 관에서 죄를 뒤집어씌울까 그것이 걱정이지요』
『서봉한을 보았느냐? 평생 역적질을 한 사람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용케도 모가지를 붙이고 살았는데, 댕겅 떨어진 꼴이 너무 우습지 않더냐. 서봉한이라는 사람은 젊을 적에 금강산을 처음 찾았을 때 만난 사람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속이 꽉 찬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반드시 큰일을 했을 아까운 인물이었다. 그 사람을 경상도에서 다시 만났다. 내가 제주에서 돌아오자 뱃머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민란을 일으키는 데 사용할 격문을 부탁했다』
익균은 사방을 돌아본 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써 주셨습니까?』
『썼지』
『아』
아들은 신음을 뱉았으나 정작 병연은 태연했다.
『서봉한의 얼굴을 보았느냐? 목이 잘리면서도 격문을 누가 썼는지 불지 않았다. 자신이 썼다고 우기고 갔다. 다른 두목들도 모두 서봉한이 쓴 줄로 알고 있기 때문에 서봉한의 목이 잘렸으니 누구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내가 무사한 것이다. 그러나 몸은 풀렸으나 내 혼백은 무덤 속에 가 있다. 서봉한의 떨어진 목을 보면서 지은 詩가 하나 있으니 보여 주마』
병연은 짐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런 詩가 적혀 있었다.
歸何處 歸何處(귀하처 귀하처: 어디로 갔소, 어디로 갔소)
三生瑟 五采衣(삼생슬 오채의: 처자식 부귀영화)
都棄了 歸何處(도기료 귀하처: 다 버리고 어디로 갔소)
有誰知 有誰知(유수지 유수지: 누가 알리오, 누가 알리오)
黑漆漆 長夜中(흑칠칠 장야중: 칠흑같이 어둡고 긴 밤에)
獨?? 有誰知(독추추 유수지: 홀로 우는 마음 누가 알리오)
何時來 何時來(하시래 하시래: 언제 오시겠소, 언제 오시겠소)
千疊山 萬重水(천첩산 만중수: 산첩첩 만리 물길)
此一去 何時來(차일거 하시래: 이제 가면 언제 오시겠소)
익균이 초저녁 어스름에 글자를 짚어 가며 다 읽고 나자 병연이 말했다.
『진주 관아에서 어떤 무식한 자가 이 詩를 문제 삼더구나. 누구를 조상하는 글이냐, 혹시 서봉한을 사모하는 내용이 아니냐 하고 추국을 당했어. 내가 웃었지. 제주도에서 한 마을을 지나다가 고기잡이 나갔다 불귀의 객이 된 지아비를 생각하며 서럽게 우는 아낙을 보고 읊은 詩라고 둘러댔지. 속아 넘어가더군. 영락없이 그런 정황을 읊은 詩니까. 그러나 너만은 알고 있거라. 이 詩가 민초들의 가슴을 적시면 그때는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익균은 위험한 독뱀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詩가 적힌 종이를 접어 자신의 등짐 속에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연이 내친김에 한마디 더 했다.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너는 발길 닿는 대로 다니다가 내 詩를 발견하거든 발견하는 족족 수거하여 불에 태워 버려라』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별 이유 없다. 내가 詩를 쓴 것은 몸속의 피고름을 쏟아 낸 것이다. 그뿐이었다. 고름이 세상에 회자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고달프겠느냐. 그러니 태워 버려라. 가능하면 전부 다. 그러나 그것도 억지로는 안 되겠지』
『주막을 찾아보겠습니다』
익균이 몸을 일으켰다. 병연이 아들의 손을 그러잡았다.
『아서라. 이 마을을 내가 안다. 여기서 자자』
아버지와의 첫날을 그렇게 퇴락한 제실의 처마 밑에서 보냈다. 다음날 해가 뜨기 전에 익균은 마을로 들어가 밥 한 덩어리를 구해 와 아버지에게 권했다. 그러나 병연은 속이 쓰리다며 밥 덩어리를 밀쳐 버렸다.
『이대로가 편하다』
두 사람은 걸었다. 병연은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앞장서서 북쪽으로 가는 지름길을 잡았다. 관가에 잡혀 가서 매를 맞은 탓인지 병연은 가끔 주저앉았다. 그럴 때마다 익균이 등을 들이댔다. 아비는 말없이 아들의 등에 업혀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았다. 먼 옛날 어릴 적 원인도 모르고 김성수의 등에 업혀 곡산으로 피신하던 그 때가 떠오르는지 아들의 등에 업힌 채 가끔 몸부림을 쳤다.
이런 걸음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이정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바쁠 것도 없었다. 父子는 그 오랜 세월의 그리움과 미움을 모두 털고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배 고프고 잠자리가 불편한 것쯤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나흘째 되던 날 그들은 靈山縣(영산현)을 지나고 있었다. 길 옆으로 나지막한 야산이 펼쳐져 있고 야산 너머로 다시 큰 봉우리가 이어져 있었다. 구름 몇 조각이 봉우리 위에 오가지도 못하고 걸려 있었다. 갑자기 병연이 배를 움켜잡았다.
『아침에 먹은 밥이 조금 쉰 듯하더니 탈이 나는구나. 전에는 썩은 것도 잘 소화시켰는데 이제는 음식이 조금만 이상해도 탈이 나니 내 위장이 나를 배반하는 것이 슬프다. 너는 잠깐 여기 기다리고 있거라』
병연은 망개 잎이 무성한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좀 멀리 들어간다 싶더니 일 보기 좋은 자리를 골랐는지 삿갓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쪼그리고 앉았다.
배탈이 심한지 병연은 좀처럼 일을 끝내지 못했다. 익균은 아버지의 배탈이 걱정스러웠다. 너무 긴 시간이었다.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팔공산의 일이 떠올랐다.
『아버지』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익균은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삿갓만 덩그라니 걸려 있었다. 삿갓 아래 땅을 살펴보았으나 뒤를 본 흔적이 없었다. 사방을 돌아보니 울창한 숲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익균은 찾기를 포기했다. 요 며칠 동안 아비와 함께 걷고 바람 속에서 잠을 자고 쉰밥을 나눠 먹으며 그 가벼운 몸을 등에 업고 걸으면서 체온을 주고 받은 것으로 충분했다. 어머니에게 모시고 가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으나 어머니는 스스로 속눈물을 삼키리라.
푸드득 하고 새 한 마리가 나뭇잎을 차고 오르더니 멀리 하늘로 비상했다.
『아버지, 이제 가십시오』
익균은 새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철종 14년, 고종 1년(1863) 2월 끝 무렵이었다. 전라남도 화순의 동복 구암리 마을 어귀에 나그네 한 사람이 지는 해를 등에 업고 찾아왔다. 나그네는 병이 깊은지 몹시 야위고 힘이 없어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동복에 갔다가 돌아오던 마을 사람 하나가 나그네의 얼굴을 잠시 살펴보고는 나는 듯이 달려가 정시룡에게 알렸다. 정시룡이 논길에서 나그네와 만났을 때는 이미 병연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정시룡이 부축하자 병연은 있는 힘을 다하여 홀로 서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어찌하여 쓰러질 때만 여길 찾아오게 되는지 참으로 면목이 없소이다.
『그때 약조를 했지 않습니까. 사랑채를 비워 두겠다고. 지금도 그 방은 비워 두고 있습니다』
『고맙소』
지난 날 약 반 년 동안 머물렀던 정기룡의 사랑채에서 김병연은 누워 버렸다. 동복에서 의원이 왔다. 의원은 진맥을 한 후 돌아가면서 정시룡에게만 낮은 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몸이 저렇게 되도록 함부로 굴렸습니까? 남아 있는 기력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습니다. 살아나려면 무슨 건덕지가 있어야 하는데 저 사람의 몸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혼백만 붙어 있는데 사람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의원으로 30년을 살아왔지만 저런 환자는 처음 봅니다』
『처음이니 잘 봐 두십시오. 혹시 살아날지도 모르니 그 때는 어찌 하시겠소?』
『내 손에 장을 지지지요』
『그래도 한번 해봅시다. 보통 사람이 아니니 스스로 용을 쓰고 일어설지도 모르지 않소』
의원은 손을 저었다.
『내가 할 일은 없습니다』
정시룡이 방에 들어가자 병연은 가늘게 웃고 있었다.
『방금 의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내 알아맞혀 볼까요?』
『그걸 아신다면 일어날 방도도 궁리해 보십시오. 이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병연은 또 웃었다. 태어난 이후 이처럼 편안하게 누워 본 적이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또 일어나야 하나, 그런 표정이었다.
그렇게 누운 지 한 달이 지난 삼월 스무아흐레 날이었다. 구암 마을 사람들은 며칠 뒤에 있을 화전놀이에 김삿갓이 참여할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했다. 마을 사람 몇이 문병 겸 찾아오자 병연은 밝은 얼굴로 일어나 앉았다.
『화전놀이에 가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했다. 마을 사람들은 『삿갓 어른께서 반드시 오셔서 좋은 詩 한 수 남겨 주셔야 합니다』 하고 덕담을 하고 돌아갔으나 각자의 집에 돌아가서는 『삿갓 어른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고 어떤 사람은 『한두 해는 살다 갈 것』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상관없이 그날 병연은 집주인 정시룡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본 세상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세상은 눈부시게 바뀌고 있다는 것, 앞으로 100년 이내에 천지개벽이 이루어질 것이며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시룡이 물었다.
『백성은 주인의 자리에 앉지 못합니다. 사기꾼들이 백성을 등치고 간을 빼겠지요. 결국 다시 순환하겠지요』
『그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정시룡은 궁금한 것이 많았다.
『지리산을 맴돌았지요. 암자에도 빌붙었고, 사냥꾼의 초막에도 신세를 졌습니다. 약초 캐는 사람들과 함께 살기도 했고, 짐승들과 같은 굴 속에 살기도 했소. 하늘이 내게 준 것을 다 태우고 있었던 것이지 별다른 뜻이야 뭐가 있었겠소』
『글을 쓰고 싶으십니까?』
정시룡의 암시에 병연은 웃으면서 붓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 같은 짧은 글 하나를 쓰고는 다시 누워 버렸다.
萬事皆有定(만사개유정: 세상만사 모두 운명이 정해져 있거늘)
浮生空自忙(부생공자망: 허공에 뜬 인생들 공연히 헤매누나)
그날 저녁 미음을 먹은 다음 병연은 단정하게 옷을 갈아 입고 누웠다. 정시룡이 방에 들어와 촛불을 켰다. 그러자 병연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을 꺼 주시오. 어두울 때는 어두워야지』
정시룡은 불을 껐다. 그러자 기척이 없었다. 잠이 들었나 하다가 이상해서 입가에 귀를 대보니 숨이 멎어 있었다.
사흘 뒤 구암 마을에는 장례식이 열렸다. 상주도 없는 장례식이었다. 마을 사람 모두 상주였다. 김병연, 김삿갓의 시신은 마을 뒤편 동뫼(東山)에 묻혔다. 영월에 있는 가족들에게 알리기 전에 初葬(초장)을 치른 것이다.
아무 기별도 하지 않았는데 3년 뒤 아들 익균이 구암 마을로 찾아왔다. 묘를 파니 몇 개의 뼈 조각이 하얗게 웃고 있었다. 그것을 곱게 싸서 등에 지고 익균은 영월로 돌아갔다. 지난 번 등에 업었을 때보다 더 가벼워진 아버지였다.●
『도련님이 炳(병)자 淵(연)자 어른의 아드님이신 翼(익)자 均(균)자 도련님 맞으십니까?』
『저를 알고 계십니까?』
『처음 뵙습니다만, 얼굴을 뵈니 어르신의 모습과 방불합니다』
『어르신이라니, 제 아버님을 알고 계십니까? 댁은 뉘십니까?』
『저는 황해도 곡산에 살고 있는 金漢慶(김한경)이라 합니다. 제 아비는 成洙(성수)라 하옵고』
『김성수, 황해도 곡산이라 했습니까?』
익균은 김성수라는 이름과 곡산이라는 지명을 씹으면서 삼옥리의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순조 11년(1812) 봄에 증조할아버지 김익순이 대역죄로 처형됐다. 증조할머니는 廣州(광주) 관아의 노비로 전락했고, 할아버지 安根(안근)은 남해로 귀양 갔다. 남은 가족은 살길을 찾아야 했다. 할머니 이씨는 막내아들 병호를 안고 여주로 피난 갔고, 여덟 살의 첫째 아들 병하와 여섯 살의 둘째 아들 병연은 노비였던 김성수가 데리고 자신의 고향인 곡산으로 가서 숨었다. 김성수는 명색이 노비였으나 사실은 순조 초년에 나라에서 노비문서를 태우는 일대 혁신정책을 펼 때 노비에서 해방된 보통 사람의 신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인집을 떠나지 못하고 일꾼 노릇을 하다가 주인집에 횡액이 덮치자 위험을 무릅쓰고 두 아들을 하나는 걸리고 하나는 등에 업고 머나먼 황해도 곡산까지 가서 피신한 것이었다.
김성수에게는 병연과 나이가 같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漢慶이었다. 병하와 병연, 그리고 성수의 아들 한경, 셋이서 성수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틈틈이 글을 읽었다. 천자문을 제일 먼저 떼고 文理(문리)를 터득하기 시작한 것은 나이 많은 병하가 아니라 병연이었다. 주인의 아들인 한경은 어제 배운 것을 오늘 모조리 까먹을 정도로 글에는 무디었다.
두 해가 지난 순조 13년, 권세를 쥐고 있던 김조순의 안동 김씨 세력은 같은 문중인 김익순의 죄를 덜어 주기로 결정하고 대역죄인에게 내려지는 滅族(멸족)의 형을 廢族(폐족)으로 완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대역죄를 본인인 김익순에게만 적용하고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치로 남해로 귀양 갔던 안근이 돌아오고 광주 관비로 전락했던 증조할머니 전주 이씨가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양반 신분이 아니었고, 과거를 볼 수 없는 상민의 신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가족들은 가평에서 모여 살았다. 여주로 피신했던 할머니 함평 이씨도 돌아왔고, 곡산으로 피신했던 병하와 병연도 돌아왔다. 그러나 증조할머니 전주 이씨와 할아버지 안근은 노비생활과 귀양살이에서 얻은 화병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불귀의 객이 되었고, 막내 병호마저 여주 피신 중에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자 세 사람이 간신히 목숨은 구했으나 집안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쑥대밭이 된 뒤였다. 할아버지 안근이 죽자 할머니 함평 이씨는 남은 두 아들 병하와 병연을 데리고 더 이상 그들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 없는 강원도 영월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살았다.
초근목피로 살 망정 무상한 권력의 늪에서 헤어나겠다는 할머니의 뜻은 이루어질 뻔했다. 그러나 아버지 병연의 범상치 않은 文氣(문기)가 저만치 물러간 줄 알았던 불행을 집안으로 다시 끌어들인 꼴이 되었다. 영월 백일장에서 병연이 증조부 익순을 욕보이는 글로 장원을 한 후 집안은 홍경래난 직후보다 더 참혹한 천형을 감수해야 했다. 병하가 세상을 떠났고 병연이 집을 나서 행각을 시작한 지 벌써 20여 년이 흘렀으나 생사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익균은 요즘 들어 부쩍 하늘을 쳐다볼 때마다 입 밖으로 한숨을 토하듯 『아버지』를 불렀다. 어느 하늘 아래 살아만 있다면 만나 보고 싶었다. 그랬는데, 지금 지난날 집안의 일꾼이었던 김성수의 아들 한경이 아비의 소식을 들고 황해도 곡산 땅에서 영월 산골까지 찾아온 것이다.
『몇 해 전 가을 어느 날 어르신께서 서북에서 내려와 구월산을 유람하고 곡산땅을 찾아오셨습니다. 제 아비를 찾으셨는데, 아비가 10년 전에 옆구리에 덧난 종기가 깊어 끝내 세상을 하직했다고 하자 대성통곡을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행장을 찾아 떠나시려는 것을 소인이 붙잡았지요. 어르신은 본래의 함자보다 김삿갓이라는 별명으로 조선 땅 어디를 가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詩人(시인) 묵객이 돼 있었지요. 곡산에서도 글귀나 하는 사람들은 어르신의 詩 한두 수는 외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붙잡았습니다. 아래채를 고쳐서 서당을 차렸지요. 사방 20리 밖에서도 학동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때 저는 한달음에 달려 영월에 계신 분들에게 어르신의 소식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 어리석은 제 안사람이 「서당이 저리 잘 되니 결국 어르신이 곡산땅에 자리 잡을 터이고, 그렇게 된 후에 가족을 불러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 말을 좇아 밍기적거리고 있는데 제 집에 찾아오신 지 일년 남짓 되던 어느 날 아침에 문안을 드리려고 서당으로 갔더니 시렁 위에 걸려 있던 죽장과 삿갓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셨는지 짐작도 할 수 없어 결국 포기하고 어리석은 의견을 냈던 여편네나 두들겨 팼지요.
그 후 어르신 때문에 속앓이를 하면서도 별 뾰족한 수 없어 세월만 보내고 있는데 문득 한 달쯤 전 어느 과객한테서 김삿갓 어르신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양과 경기도 여러 고을을 돌면서 詩를 남기고, 술을 마시면 통곡하고 가슴을 쥐어뜯는다고 하니 영락없이 어르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허황한 소식이나마 전해 드리려고 달려왔지요. 서당만 뒤지고 다녀도 어르신의 죽장이 머문 곳을 찾기가 영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날 밤부터 장마가 시작됐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황씨와 익균은 밤새도록 한경이 전해 주는 김삿갓의 奇行(기행)을 무슨 이야기 책 읽는 것을 듣듯이 들었다. 이야기하는 한경이 무안해질 정도로 모자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침에 한경이 곡산으로 돌아가려고 짚신을 챙겨 신자 댓돌 앞에 익균이 먼저 행장을 차리고 서 있었다. 황씨는 찐 감자를 두 사람의 행랑 속에 나누어 넣어 주었다. 언제 마련했는지 한 되쯤 되는 볶은 보리도 나누어 주었다.
그로부터 보름쯤 후 두 사람은 장마로 물이 불어난 광나루를 어렵사리 건너 시구문을 지나 한양성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운종가에서 한경은 익균과 헤어져 무악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임진 나루를 건너 곡산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익균과 헤어지면서 한경이 자신의 봇짐 속에 그 때까지 조금 남아 있던 볶은 보리 한 줌과 행자 몇 냥을 익균의 봇짐 속에 억지로 밀어 넣어 주었다.
『어르신을 만나면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하러 찾으러 나섰겠습니까? 김서방은 또 무엇하러 기별을 가지고 그 어려운 발걸음을 하신 겁니까?』
『하긴 그렇군요. 그러나』
한경은 망설이다가 하던 말을 이었다.
『어르신을 한 해 남짓 모시다가 어느 날 구름처럼 떠나보낸 후에 문득 느낀 일입니다만, 어르신은 떠도는 일에 이력이 나 있는 듯했습니다. 억지로 모시고 갈 수는 있겠으나 오래 붙들어 두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하는 말입니다』
『언젠가는 모두 헤어지는 것이 살아 있는 자들의 도리이니 다시 떠나신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명줄을 놓았다면 모를까, 같은 하늘 아래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어찌 만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제삿날 혼백이라도 보고 싶었고, 그도 아니면 저승에라도 빨리 가서 만나고 싶었던 아버집니다. 그 뒤의 일은 그 뒤에 걱정하지요』
『어르신을 찾을 때까지 길동무를 하겠습니다』
익균은 한경을 한사코 말려 돌려세웠다. 한경이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떠나고 나자 익균은 종루 건너편에 있는 의금부로 찾아갔다. 의금부에서 정현덕의 집을 물었다. 처음에는 거지 같은 젊은이를 수상하게 보고 심문하려던 의금부 관리들은 강원도에서 왔다는 젊은이가 김삿갓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정현덕의 집을 아는 사람을 수소문하여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십 수 년 전 초시에 급제하여 잠시 외방에 나가 있었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고 있던 정현덕은 거지꼴의 젊은이를 보면서 당장 난고 김삿갓을 연상했다. 금강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젊은 난고가 지금 자기 눈앞에 서 있었다.
『자네가 난고의 아들이 분명하다면 너무 늦게 왔네』
익균은 머리가 핑 돌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난고에게 무슨 변이 생겼다는 것은 아니니 너무 놀라지는 말게. 내가 늦었다는 것은, 난고가 한양에 있지 않다는 뜻일세』
『어디로 가셨는지 방향만 알려 주시면 세상 끝까지 가더라도 반드시 찾겠습니다』
『이런 아들을 두고 저리 헤매다니 이 무슨 천형인가』
현덕은 혼자 탄식하고 나서 말했다.
『난고가 한양에 머물렀던 것은 사실일세. 머물렀다고 하는 말은 어폐가 있지. 잠시도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한양과 주변의 경기도 일대, 그리고 가끔 마음 내키면 강원도와 금강산을 오가면서 그야말로 구름처럼 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네. 듣자니 경상도 땅에서 훈장 노릇하며 잠시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자네가 찾아가면 이미 떠난 뒤일 거라는 말일세. 너무 늦었다고 하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세』
『경상도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안동에서 김삿갓에게 과체시를 사사했다는 사람을 만났어』
『그게 언제였는지요?』
『작년 봄이었으니까, 일년이 더 됐구먼. 난고가 일년 이상 훈장으로 머물렀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없으니 하마 구름처럼 물처럼 어느 산천에서 흐르고 있으려나』
돌아서서 떠나려는 익균을 현덕은 굳이 붙잡아 하루를 묵어 가게 했다.
『서둘 필요가 없네. 어차피 구름과 바람이 만나려면 인연이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현덕은 익균에게 새 옷을 내 주고 깨끗한 방에서 재웠다. 그날 밤 현덕은 사랑채에 술상을 차려 놓고 익균과 마주 앉았다.
『소인은 아직 술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현덕은 웃었다.
『겉모습은 영락없이 아비를 빼닮았는데 아비는 구름이고 아들은 산처럼 무거운 이유를 이제야 알겠구먼. 술을 마실 줄 알고 모르는 차이로세』
『죄송합니다』
『무슨 말인가』
혼자서 탁배기 한 잔을 가볍게 들이켜고 나서 현덕이 물었다.
『아비를 어떻게 생각하나?』
『예?』
『어려운 질문이 아닐세. 가정을 버리고 떠돌다니 무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노여워하지 않았는가?』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아비가 뿌리 뽑힌 나무처럼 바람에 흩날려 떠나간 까닭을 들었고, 그 후부터 원망하고 섭섭하고 그립고 사무칠 때마다 분노가 치밀었던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되고부터 분노는 사라지고 그리운 마음만 남더니 문득 이 세상에 살아계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달음에 길을 나섰습니다』
『그랬을 테지. 내가 묻는 것은 난고가 술을 마시고 떠돌면서도 보석 같은 詩를 생산하고 있는 것을 어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일세. 내 생각으로는 전란에 쫓기고 가난에 쫓기던 두보조차 난고의 처지에 비하면 호강스러웠다 할 것이고, 詩를 두고 말하자고 해도 두보와 백거이를 합쳐 놓아도 난고를 따르지 못할 거라 생각하네만, 그러나 한편으로 그 보석 같은 시편들이 난고의 처절한 신세에서 나온 것이니 모르는 사람들은 詩를 즐기겠으나 인간 김삿갓을 아는 동무의 입장에서 보면 詩가 나오지 않아도 좋으니 고생길 접고 사람답게 살도록 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니, 나도 모르겠네. 나도 모르는 것을 자네에게 물어 미안하이』
『소인은 아비의 詩를 알지 못합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새겨 보니 아비의 처지가 詩를 낳게 했으니 그것도 값있는 일이 아니겠느냐 하는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만, 자식된 입장에서는 그저 단 하루라도 좋으니 모친 곁에 모셔 놓고 따뜻한 진지라도 올리고 싶을 따름입니다』
『맞아, 詩가 다 무엇인가. 인간들은 詩를 찬탄하면서 은근히 詩人의 고생스러운 삶에서 위안과 즐거움을 얻는 모양인데 이 얼마나 가혹하고 비정한 일인가.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한양의 문사들이 난고의 詩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일세. 그들은 난고가 한양은 물론이고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를 돌면서 과장마다 출현하여 미리 지은 과시를 팔아 술을 마시는 꼴을 보고 과거제도의 폐단을 난고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지. 과거는 이미 효용도 수명도 다하여 난고는 오로지 죽은 과거제도의 무덤에 弔喪(조상)하러 나타난 묵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안타깝네. 아마 난고의 詩가 제 위치를 찾자면 백 년 또는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야 할 것이라 생각하네』
현덕은 종이를 펴고 詩 한 수를 적었다.
『난고가 삼 년 전 노들에서 즉흥으로 읊은 詩야. 품에 지니고 다니다가 살기가 어렵고 절망스러울 때 가끔 꺼내어 씹어 보게』
현덕이 적어 놓은 詩의 내용은 이랬다.
浮浮我笠登虛舟(부부아립등허주: 떠도는 나의 삿갓 빈 배와 같으니)
一着平生四十秋(일착평생사십추: 한 번 쓰니 사십 평생이라)
牧竪輕裝隨野犢(목수경장수야독: 목동이 송아지 몰 때 쓰고)
漁翁本色伴白鷗(어옹본색반백구: 어부가 흰 갈매기 벗삼아 쓰던 것)
醉來脫掛看花樹(취래탈괘간화수: 취하면 벗어 나무에 걸어 놓고)
興到携登翫月樓(흥도휴등완월루: 흥이 나면 벗어 들고 누대에 올라 달구경했노라)
俗子衣冠皆外飾(속자의관개외식: 세상 사람들 의관은 모두 겉치레지만)
滿天風雨獨無愁(만천풍우독무수: 풍우가 몰아쳐도 나는 걱정 없네)
『어떤가?』
현덕이 물었다. 익균은 한숨을 쉬었다.
『구름 같고 물 같고, 구름의 물 같아서 종잡을 수 없습니다』
『행여 난고를 만나거든 붙잡지는 말게나』
『무슨 뜻인지요?』
『자네 부친이긴 하나 이 수상한 세월의 아픔을 혼자 앓고 있는 거라네. 혼자는 아니지. 어떤 이는 천지개벽을 꿈꾸고 어떤 이는 천도를 말하고 또 어떤 이는 홍경래의 재현을 자임하네. 구질하게 목숨을 길게 늘여야 칠십인데 난고는 이미 한 세상을 다 살았어. 아주 멋지게 살았지』
익균은 알아듣지 못했다. 현덕도 부연하지 않았다. 다음날 익균이 떠날 때 현덕은 노자를 마련해 주었고, 『난고를 만나거든 내 이름으로 술 한잔 대접하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익균은 현덕이 챙겨준 노자를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갔던 길, 지금도 가고 있는 길을 그대로 따라서 가보리라 마음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익균은 아버지 병연이 지니고 있는 자산을 아무것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산골에 살면서도 일찌감치 천자문을 떼고 내친김에 아버지가 쓰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가슴속에 수많은 지식이 들어 있었으나 그것을 꿰어 자신의 문장으로 만드는 재주는 없었다. 뭔가 몸속에 가득한 운무를 연기처럼 토해 내고 싶었으나 토해 낼 방도를 몰랐다. 아비 병연을 그리워했던 이유 중에는 안개처럼 자욱한 가슴속의 운무를 토해 낼 방법을 아비로부터 가르침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지 행각 중에서 밥을 얻어먹는 일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열 집을 기웃거려 한 집에서는 먹다 남은 꽁보리밥 덩어리일망정 허기를 채울 요깃거리는 나왔다. 그러나 잠자리는 쉽게 내주지 않았다.
『아직 젊은 놈이 빌어먹기로 작정했구먼. 일을 할 텐가? 그러면 헛간에라도 재워 주지』
똥장군으로 백 짐이 넉넉하게 담길 성싶은 깊은 똥구덩이를 다 퍼내어 보리를 베어내고 채전을 일구기 위해 비어 있는 밭에 지고 나가 뿌려 주고는, 겨우 하룻밤 봉당 신세에 두 끼의 보리밥을 얻어먹은 날도 있었다. 밥을 빌다가 달려 나온 주인놈이 휘두르는 지게 작대기에 등줄을 맞아 눈물이 쏙 빠지고 며칠 동안 허리를 쓰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
장마가 끝난 뒤라 보름달이 유난히 밝았다. 단양 고을을 지나 소백산 자락에 숨어 있는 산골 마을의 당나무 아래에 몸을 붙이고, 사정없이 덤비는 모기떼와 싸우며 밤을 이겨 보려고 애를 쓰고 있던 익균은 문득 현덕이 적어 준 아비의 詩를 꺼내어 달빛에 읽어 보았다.
『빈 배를 저어 어디로 흘러가십니까, 아버지』
그 아버지 또한 경상도 어느 고을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달을 보고 있으려나. 그 생각을 하면서 익균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울음을 삼켰다.
익균이 김삿갓의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죽령을 넘어 풍기 고을에 들어섰을 때였다. 장날이었다. 장바닥에는 갓 쓰고 흰 두루마기 깃을 날리는 노인들이 많았다. 양반은 아니고 중인들 중에서 출입할 때 양반의 흉내를 내보는 사람들이었다. 쇠전 가까운 곳에 국수와 팥죽을 파는 노전이 몇 군데 있었다. 소를 팔러 나온 농민과 거간꾼들이 요기를 하거나 흥정을 하기 위해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중 한 노전에는 환갑이 넘은 노인 혼자서 국수를 먹고 있었다. 익균은 그 옆에 앉아 국수를 시켰다. 국수가 나오자 익균은 국물 한 모금을 마시다가 차마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바닥에 뱉은 후 그릇을 내려놓았다. 옆자리에 앉아 국수를 먹고 있던 노인이 그를 바라보았다.
『젊은 사람이 왜 그리 먹지 못하는가?』
『아비를 생각하니 차마 넘기지 못하겠습니다』
노인이 자신도 먹다 말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비가 어떻게 되었는가?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기라도 했는가?』
『유명을 달리했다면 제삿밥이라도 드리면 될 터인데, 제 아비는 살아 계시면서도 풍찬노숙으로 떠돌아 다니시니 자식된 도리로 찾아나서기는 했으나 종적을 알 길이 없어 가슴만 미어질 뿐입니다』
『딱하구나. 근자에 떠도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아비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것을 알아야 화적이 되었는지 거지가 되었는지 어느 집안에 들어가 더부살이를 하고 연명하는지, 아니면 삭발하고 釋氏(석씨) 문중에 들어가 안심입명의 도를 닦고 있는지 짐작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아비의 이름은 김, 병자 연자이옵고, 호는 난고, 별명은 김삿갓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그런가. 자네가 김삿갓의 아들인가?』
노인이 반겼다.
『혹시 제 아비의 이름을 들은 일이 있는지요?』
『있다마다. 만나서 詩를 짓고 술을 마신 적이 있다네. 자네가 경상도 땅으로 찾아온 것을 보니 김삿갓이 어디 있는지 소문을 듣기는 들었던 모양이군』
『안동에 가서 물어보면 행방을 알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무작정 죽령을 넘었습니다』
『그랬었지. 안동에 머물렀어. 정확하게 말하면 宜東(의동)의 도산서원 아래 마을에서 작은 서당을 열어 훈장을 했었지. 마을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요즘 같은 계절에는 천렵하여 술에 취하면 그냥 강물에 빠져죽고 싶은 유혹을 감당하기 어려운 곳이었네. 난고 선생도 몇 번이나 강물에 뛰어드는 것을 사람들이 간신히 붙잡아 명줄을 이었지. 그냥 두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승으로 곧장 갔을 것이네』
노인의 말에 익균은 맥이 풀렸다.
『지금은 그 마을을 떠나셨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네』
노인의 대답에 익균은 발 밑의 땅이 꺼지는 듯했다.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네, 이 사람아』
노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당은 작파하고 떠났으나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상주나 예천에서 김삿갓을 보았다고 하니 멀리 가지는 않은 듯하네』
어제 상주에 있었다면 오늘은 그곳에 있지 않을 터이니 노인의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뒤꿈치를 따라가자면 일단 상주나 예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익균은 노인에게 인사하고 서둘러 예천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러나 예천에도 상주에도 김삿갓은 없었다. 다만 풍기에서 만난 노인이 말했듯이 김삿갓의 흔적은 도처에 남아 있었다. 서당에도 남아 있었고 주막에도 남아 있었다. 산중의 암자에도 어김없이 떠돌이 詩人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방에 김삿갓이 숨 쉬고 있었다. 그의 詩를 줄줄 외는 학동들이 있었고, 신출귀몰하는 재주꾼인 양 과장된 일화도 귀에 담을 수 있었다. 그중에는 김삿갓이 죽은 아이를 살려 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나쁜 양반과 고을 사또를 혼구멍 냈다는 통쾌한 이야기도 있었다. 술에 취해 호랑이 배때기를 베고 잤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돌았다. 경상도 땅에서 김삿갓은 어느덧 전설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김삿갓 본인은 보이지 않았다. 숨바꼭질하듯 익균을 피해 다니는 것일까. 야박한 아비의 모습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김삿갓이 팔공산으로 간다더라』는 말을 들은 것은 의성의 한 주막에서였다.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말이었다. 익균은 의성에서 칠곡으로 방향을 잡았다. 팔공산의 동쪽 산자락은 급하지 않으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았다. 경주 토함산의 석굴 못지않은 신라대의 석굴이 있어 석굴암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퇴락한 절을 오른쪽으로 끼고 산길을 오르는데 누군가 뒷덜미를 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거기 가는 젊은이, 호환이 두렵지 않은가?』
익균은 걸음을 멈추었으나 돌아보지는 못했다.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먼 꿈속에서 듣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방금 지나온 길에서 사람은 보지 못했다. 산굽이를 돌 때 조금 높은 언덕이 있었는데 그 언덕 위의 찬나무 그늘에서 나는 소리였다. 목소리는 이어졌다.
『대낮에도 호랑이가 나온다고 하네. 아무리 하찮은 몸뚱이일지라도 호랑이 밥으로 공양하기는 싫으이. 나도 혼자 넘지 못하고 동무를 기다리던 참일세』
『어르신께서는 어디로 가시던 길인지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서서 물었다.
『산 너머 파계사 스님들의 인심을 알아보러 가는 길일세. 오라는 사람은 없어도 늘 이리 바쁘다네. 젊은이는 어디로 가는 길인가?』
익균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아 올라 왔으나 간신히 눌러 참았다.
『저도 제가 가는 곳이 어딘지 모릅니다』
『허어』
탄식이었다.
『요즘은 갈 곳을 모르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가』
익균은 돌아섰다. 찬나무 무성한 그늘 밑에 한 남자가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남자의 등 뒤 나뭇가지에는 낡아서 너덜거리는 삿갓이 걸려 있었다. 「떠도는 나의 삿갓 빈 배와 같으니…」 바로 그 빈 배가 나무 그늘에 정박해 있었다. 익균은 달려가 남자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익균입니다』
『익균? 네가 익균이라?』
공포에 질린 듯한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한참 후 흐느끼는 소리로 변했다. 병연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얼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던 둘째 아들 익균의 다 자란 모습을 처음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도 울었다. 울면서 생각했다.「이렇게 눈물이 헤픈 사람이 어떻게 유랑 행각을 하는가? 또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모질게 세월을 이겨 내는가? 외로움을 어떻게 참아 냈는가?」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익균은 울었다. 아들의 우는 모습을 보면서 병연도 생각했다.
「젊은 놈이 울음이 헤퍼서 이 모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작정인가? 내가 길렀다면 이 모양은 아니었을 텐데…」
『아버지를 찾아 여기까지 왔으나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영월 산골에서 세상 소식을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 보니 아버지께서 살아 계신지 유명을 달리하셨는지도 모른 채 그저 그리운 마음만 지니고 20년을 살았습니다. 이제 집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러마』
병연은 순순히 대답했다.
『두 가지만 대답해 다오. 할머니는 건강하시냐?』
『아버님께서 집을 떠나신 후 이태 만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학균이는? 네 형은 건강하냐?』
『작년에 장가 가서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어머니는, 때로는 나무 같고 때로는 바람 같은 모습으로 산속에서 산이 되고 흙이 되어 살고 계십니다. 아버님 기다리는 마음을 저에게 내색한 일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그래』
또 탄식이었다.
『저물기 전에 산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일어나십시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오던 길을 되짚어 걸었다. 여기까지는 각각 혼자서 걸었으나 이제부터는 두 사람이 함께였다. 지금까지는 목적지가 없었으나 여기서부터는 목적지가 분명했고, 그 목적지로 가는 최단거리의 길이 어딘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팔공산 자락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곳에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 있었다. 익균은 자신의 짐 속에 있는 노자를 마음속으로 헤아리면서 주막을 찾았다. 여름 저녁의 해는 산을 넘기 싫어 한없이 뭉개다가 어쩔 수 없이 서쪽 산 봉우리를 타고 넘었다. 두 사람은 주막 평상에 앉아 국밥으로 요기를 하면서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주로 병연이 묻고 익균이 대답했다. 영월의 가족들 이야기가 전부였다. 익균은 아버지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궁금증을 이토록 애틋하게 담고 있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이런 사람이 이십 수년을 길에서 헤매다니. 마치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사람처럼.
다음날 한낮에 두 사람은 창평이라는 마을에 닿았다. 익균은 병연이 오른쪽 발을 조금 절고 있는 것이 마음 쓰이던 차에 마을이 나타났으므로 하루쯤 쉬어 갈 요량으로 주막을 찾아보았다. 주막은 없었다. 몇 집 기웃거려 보았으나 두 사람에게 잠자리를 내어 줄 만한 집은 없었다. 할 수 없이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등짐을 내려놓았다.
『여기가 괜찮구나』
병연이 나무 밑의 널찍한 땅바닥과 부드러운 흙을 만지면서 말했다.
『나는 여기서 좀 쉬어야겠다. 짚신이 잘못된 모양이다. 젊은 놈이 엮은 짚신은 언제나 살을 깎아먹는단 말이야. 요즘은 짚신을 제대로 엮을 줄 아는 놈들이 없어』
짚신을 두고 한없이 투덜거리던 병연이 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여기서 쉬고 있을 테니 너는 잰 걸음으로 심부름을 다녀오너라』
『무슨 심부름입니까?』
『여기서 인각사가 멀지 않다. 주지스님에게 말로 다 형용하기 어려운 신세를 졌다. 게다가 남쪽 절에서 다시 만날 약조까지 해두었다. 이제 내가 북쪽으로 돌아가니 전갈이라도 해두어야 그게 사람의 도리라는 생각이 든다. 수기를 써 줄 테니 인각사에 가서 주지스님에게 전해 주고 오너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병연은 지필묵을 꺼내어 간단한 편지를 썼다. 그것을 잘 접어 소매 속에 넣고 익균은 달렸다. 잠시라도 아버지를 홀로 버려 두는 것이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인각사는 가깝지 않았다. 주지스님에게 편지를 전하고 돌아오니 긴 여름해가 멀리 팔공산 봉우리를 타넘고 있었다.
마을 앞 느티나무 아래까지 왔으나 아버지 병연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살펴보고 불러 보았으나 종적이 없었고, 대답도 없었다. 문득 머리 위를 보니 나뭇가지에 자신의 등짐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짊어지고 익균은 달렸다. 먼저 팔공산 방향으로 달렸다. 한참을 가다가 아버지가 이 길을 도로 간다면 굳이 혼자 내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꾸로 의성 쪽으로 달리다가 이번에는 인각사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렇게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다가 마침내 창평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아래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버지』
하늘에서는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풀벌레들이 무심하게 울어댔다.
『행여 난고를 만나거든 붙잡지는 말게나』 하던 정현덕의 말이 떠올랐다.
철종 2년(1850) 정월 보름날이었다. 和順(화순) 同福(동복)의 선비 丁時龍(정시룡)은 조계산 송광사의 법회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뒤숭숭한 세상만큼이나 날씨까지 변덕스러워서 지난밤에는 때 아닌 겨울비가 흩뿌리더니 아침부터 북풍이 진눈깨비를 몰고 하늘을 휘감아 부는 바람에 얼굴을 곧추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龜巖(구암) 마을 가까이 와서는 당나귀도 헉헉거렸고, 당나귀 고삐를 잡고 끌던 노복 이서방도 지쳐 발을 헛디디고 비칠거렸다. 그러다가 이서방이 갑자기 무엇에 걸린듯 쓰러졌다. 이서방은 무언가 길고 물컹거리는 물건 위에 쓰러졌는데 일어나며 보니 그것이 사람이었다.
정시룡은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은 터라 맥을 짚을 줄 알았다. 쓰러져 있는 사람의 맥을 짚어 보니 가늘게나마 뛰고 있었고 코 밑에 손을 대 보니 숨을 쉬고 있다는 신호가 있었다.
두 사람은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당나귀에 태웠다. 쓰러진 사람은 가진 것이 없는 간단한 행장이었으나, 길 위에는 낡은 삿갓 하나가 저만치 나뒹굴고 있었고 죽장도 하나 있었다. 이서방은 삿갓과 죽장을 챙겼다.
집으로 돌아온 정시룡은 사랑채에 군불을 때고 길에서 업어 온 나그네를 눕히고 이서방으로 하여금 나그네의 얼어 버린 몸을 주무르게 했다. 그 정성이 사무친 탓이었을까. 반쯤 죽었던 나그네는 한밤중에 눈을 떴다.
이서방으로부터 손님이 눈을 떴다는 전갈을 받은 정시룡이 사랑채로 건너왔다. 병연은 워낙 지친 몸이라 몸속에 기운이 남아 있지 않은 듯 주인이 와도 일어날 수 없었다. 그저 멀거니 눈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일어났군요. 염라왕이 모시고 가는 것을 저희들이 말렸습니다』
정시룡은 30代 초반의 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환갑을 넘긴 노인처럼 사람을 압도하는 기품이 있었다.
『그런데 뉘십니까? 어쩌다가 이 추운 날 고갯마루에 쓰러지신 겁니까?』
『변변치 못한 이 사람의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은 김삿갓이라 부릅니다』
그러자 정시룡은 갑자기 옷깃을 여몄다.
『고매한 이름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남도에 내려오시면 반드시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모시게 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쓰러지신 이유는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갑니다. 의학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이대로 길을 다니시다가는 큰 변고가 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집을 고향집인 양 생각하시고, 이 사람을 아우인 양 생각하셔서 싫증이 날 때까지 머물러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병연은 정시룡의 말이 입에 발린 인사치례가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느껴 알았다. 거친 바다를 나뭇잎처럼 떠돌던 조각배가 갑자기 항구에 닿은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었다. 적어도 정시룡이 병연으로 하여금 닻을 내린 배처럼 편한 기분이 들도록 만들어 주었다.
정시룡은 김삿갓을 위해 중뿔난 대접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오랜 세월 한집에서 살아온 동기간처럼 스스럼없이 대우하고 보살폈을 뿐이었다. 사흘이 지나자 병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구례 화엄사를 돌아보고 부안 채석강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고개를 넘는데 바람이 거세어서 자꾸 뒤로 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삿갓이 바람에 날려서 그것을 잡으려고 몸을 돌리는데 누군가 발목을 걸어 넘어뜨려요. 그리고 곧 편안한 느낌이 들어 「에라, 여기가 내 고향 안방이로구나」 하는 생각으로 누워 있었는데 그 다음은 눈을 뜨니 정말 따뜻한 방에 누워 있더군요.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입니다. 더럽고 무서워도 이 세상은 멋진 곳입니다』
『멋진 곳이지요? 그러니 오래 머무십시오. 난고 선생님의 문장은 이미 전설이 되어 있습니다. 모쪼록 이곳에서 보배 같은 시편을 많이 생산하십시오. 두보가 成都(성도)의 초막에 머물면서 보배 같은 작품을 남겼듯이 말입니다』
『제 詩는 길이 만든 것입니다. 머물면서 쓴 詩는 거의 없습니다』
『머무는 것도 길게 보면 흐르는 것이지요. 정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긴』
병연은 젊은 주인의 마음공부가 깊은 데에 놀랐다.
다시 하루가 지나자 병연의 몸은 제법 회복됐다. 눈을 들어 살펴보니 사랑채의 서가에는 몇 권의 책이 꽂혀 있었고, 윗목의 서안에는 지필묵이 제 자리에 놓여 있었다. 병연은 오랜만에 붓을 들었다.
半?書架數卷冊(반휴서가수권책: 반쯤 찌그러진 서가에 책 몇 권 꽂혀 있고)
世世傳傳一個硯(세세전전일개연: 대대로 전해 오는 벼루 한 개 있어)
墨香深醉心自閑(묵향심취심자한: 묵향에 취하여 마음은 스스로 한가하니)
微軀此外何所求(미구차외하소구: 미약한 이 몸 더 무엇을 바랄소냐)
주인 정시룡이 그것을 가져가더니 금방 표구하여 대청에 걸었다.
병연이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는 칼날을 세웠던 모진 바람은 없어지고 남쪽 기슭을 타고 넘어오는 훈풍이 대지를 녹이고 있었다. 마을은 따뜻했다. 뒤로 거북의 등 같은 산이 좌우로 흘러 마을을 감싸고 있었고, 마을 앞으로는 맑은 물이 마르지 않는 개천이 휘감아 흘러 가고 있었다. 마을 오른쪽으로 뻗어 가던 야산이 혈맥을 맺으면서 멈춘 곳에 작은 동산이 있었고, 동산에는 누각이 있어 마을 어른들이 봄이 올 때까지 참지 못하고 나와 詩를 읊고 막걸리를 돌렸다.
정시룡이 병연을 그 자리에 안내하자 촌로들은 다투어 술을 권하고 운을 불렀다. 그러나 병연은 술은 사양하지 않았으나 詩를 짓는 것은 사양했다. 이상하게도 몸이 편안해지니 詩가 술술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완연한 봄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나가 화전놀이를 벌였다. 화전놀이라면 집구석에 처박혀 살던 아낙들이 딱 하루 기를 펴고 술도 마시고 춤도 추면서 몸속에 쌓인 찌꺼기를 태워 없애는 날인데, 이 마을의 화전놀이는 아낙들의 놀이가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 참여하여 봄이 실어오는 생명의 약동을 발산하는, 그야말로 동네 잔치였다.
이 해의 화전놀이에는 귀한 손님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손님을 주인처럼 받들면서 놀았다. 김삿갓, 병연이 그 사람이었다.
병연은 종일 마시고 춤도 추었다. 술에 대취했으나 통곡하지 않았다. 춤을 추었으나 쓰러지지도 않았다. 저녁 무렵 정시룡이 취하여 냇가의 차일 밑에서 잠이 들자 그 모습을 보던 병연이 스스로 붓을 들었다.
藥經深紅蘚(약경심홍선: 약 캐러 가는 길엔 붉은 이끼가 깊고)
山?滿翠微(산창만취미: 산쪽 창에는 푸르름이 가득한데)
善君花下醉(선군화하취: 그대 꽃 아래 취하여 누웠으니)
胡蝶夢中飛(호접몽중비: 나비는 꿈속에서 날겠지)
여름이 깊어 가던 유월 어느 날 병연은 삿갓을 찾아들고 죽장을 짚었다. 주인은 말리지 않았다.
『조선 팔도 삼천리가 모두 선생님의 집이니 누구라 감히 머물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몸속이 허하여 자칫하면 쓰러지고, 쓰러지면 일어나기 어려우니 이 일을 항상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상한 기분이 들면 지체 없이 동복을 생각하시고 구암에 누울 자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소서. 이 사랑채는 언제나 비워 놓겠습니다』
구암 마을을 떠날 때 병연은 마을 어귀에서 돌아서서 오래 오래 마을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마을을 온전하게 담아 두려는 것처럼.
철종 7년(1855)이었다. 가끔 귀동냥으로 남쪽에서 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민란이 일어났다는 흉흉한 소식들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익균은 어제 먹었던 밥알이 목구멍으로 되돌아 나올 것 같아 구역질을 했다. 민란과 아버지가 무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떠돌다가 공연한 일에 휘말려 화를 당하지나 않을지 꿈자리가 늘 뒤숭숭했다.
경상도 팔공산 자락에서 다시 아버지를 잃고 혼자 돌아온 그 다음해에 익균도 장가를 들었다. 장가든 지 이태 만에 첫아들을 낳았고 다시 올해 둘째 아들을 낳았다. 둘째가 고물거리는 손으로 어미의 젖을 움켜쥐는 모습을 보다가 익균은 아비를 뒤숭숭한 남쪽 땅에 버려 둔 불효를 생각했다.
어머니 황씨에게 『남쪽으로 떠나려 하니 염치없이 세 식솔을 부탁드립니다』고 하자 황씨는 삼베 치마의 끈을 조여매고 뒷산으로 올라가 버렸다. 전에는 몰랐으나 지금 익균은 황씨가 아무 내색 없이 산으로 올라가 버릴 때마다 산속에서 혼자 피를 토하듯 울 것이라고 잠작하고 있었다. 어머니 옆에 반드시 아버지를 모셔다 놓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먼 길을 나서기에는 그래도 여름이 나았다. 마침 시절은 늦봄이었다. 익균은 행장이랄 것도 없는 행장을 차리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서당과 암자와 글을 하는 선비들의 사랑채를 기웃거리며 김삿갓의 행방을 수소문하느라 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김삿갓이 경상도와 전라도에 머물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한양과 금강산을 향해 북쪽으로 올라왔던 흔적이 있을 때는 당황했으나 다행히 김삿갓은 한양이나 금강산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곧 남쪽으로 다시 내려가곤 했음을 알았다. 근거가 되는 것은 지리산이었다. 젊어서는 금강산과 관북·관서를 헤매더니 이제 신물이 났던 것일까. 그쪽으로는 발길을 끊고 간간이 금강산이나 찾으면서 지리산에 파묻혀 있었다. 그 덕택에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서당이나 마을 정자에서 떠돌고 있는 김삿갓에 얽힌 전설은 풍성했다.
추풍령 아래 옥천에서는 거지를 가장한 도둑으로 몰려 사흘을 뇌옥에 갇혀 곤장을 맞은 일도 있었고, 선산에서는 나룻배 사공이 지난밤 도망간 마누라를 생각하다가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배를 뒤집는 바람에 물귀신이 될 뻔한 일도 있었다.
소문을 좇아 남해 섬까지 내려온 익균은 거기서 망망한 바다와 마주쳤다. 김삿갓이 배를 얻어 타고 제주도로 떠나는 것을 보았다는 바닷가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사실이었다. 익균은 낙망했다. 물길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배를 얻어 탈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비린내 나는 어촌에서 거지처럼 한 끼 밥과 잠자리를 구걸하고 다니다가 익균은 믿을 수 없는 소식 하나를 들었다.
『진주에서 민란이 벌어졌는데 민란을 일으킨 괴수 중에 김삿갓이 있다더라』는 소문이었다. 그 말을 전한 사람은 얼마 전까지 공조판서를 지내다가 남해로 귀양살이 온 사람의 수발을 위해 내려와 있는 家奴(가노)였다. 어찌 되었건 김삿갓이 제주도에서 육지로 되돌아온 것은 분명했다. 익균은 남해에서 진주로 서둘러 걸었다.
진주에 가까이 가자 민심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말대꾸하는 사람도 없었고, 식은 밥 한 덩어리 던져 주는 아낙도 없었다. 사람들의 표정만 보아서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종잡을 수 없어 공포스러웠다. 익균은 여러 날을 굶고, 여러 밤을 이슬에 젖은 채 나무 밑이나 바위 틈에서 잤기 때문에 체력이 거의 소진되어 있었다. 진주성이 가깝다는 것, 어쩌면 아버지를 만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탈진한 몸뚱이를 간신히 끌고 갈 뿐이었다.
이 지역의 민심이 어찌하여 그토록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는지 진주성에 닿고 보니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성 안으로 들어서니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죽은 사람 여섯 명이 저잣거리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일어난 민란의 주동자들을 처형하여 머리를 장대 끝에 매달아 놓았는데 그들이 한스러운 눈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자연 산 사람들은 거리에 나오기를 꺼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 민란의 규모가 커서 한양에서 관군이 토벌군을 편성하여 내려 보내고서야 진압이 되었지만, 워낙 가담한 민초들이 많아 사후의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조정에서도 아직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진주를 둘러싼 영남과 가까운 호남 일대에서도 조정의 처리 방향을 살펴보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늘 그랬듯이 민란의 단초를 제공한 관리들의 학정과 무능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민란을 일으킨 민초들만 닦달을 한다면 제2, 제3의 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 때문에 조정도 일벌백계의 칼을 휘두르지 못하고 민심의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죄상이 명백한 주동자들만 괴수라는 이름으로 효수해 놓고 있었다.
익균은 여섯 명의 괴수들 목이 걸린 장대 밑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매달린 머리들은 소금을 뿌려 놓았으나 벌써 썩어 가고 있어 누구의 머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만 머리 밑에 천을 매달고 거기 이름을 써놓았는데 여섯 사람을 다 확인했으나 김병연과 삿갓의 이름은 없었다. 걱정을 내려놓고 긴장이 풀려 긴 한숨을 쉬는데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돌아보니 포졸이었다.
『뭐하는 놈이냐. 이 중에 가족이라도 있는 게냐?』
『없습니다』
『그런 왜 여기서 얼쩡거리며 괴수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이름을 확인한 것이냐?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으니 바른 대로 말해 보아라』
『사실은 집 떠난 아비를 찾고 있던 중이라 혹시나 하고 기웃거리던 중이었습니다』
『집 떠난 놈들이 어디 한 둘이냐. 민란통에 지아비 잃은 계집이 길에 널려 있으니 과부 사태가 날 지경이다. 나도 이제 장가나 갈까 한다』
포졸은 본분을 잃고 낄낄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험한 인상으로 돌아왔다.
『자네의 아비라면 하마 늙은이에 속할 터인즉 무슨 기운으로 민란에 끼겠느냐. 대체 아비의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은 있으나 사람들이 잘 모르고, 그저 편하게 김삿갓으로 부릅니다』
『김삿갓? 그 사람이 분명 자네 아비냐?』
사라지려고 하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일고 있었다.
『김삿갓을 아십니까? 혹시 이곳 진주 땅에서 보신 일이 있습니까?』
『보았지』
『가르쳐 주십시오』
『장터 뒤편에 작은 골목이 있다네. 그 골목 어디쯤 술청을 뒤져 보게. 삿갓을 팽개치고 술에 얼어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익균이 휑하니 뛰려는데 포졸의 말이 덜미를 잡았다.
『서둘 것 없네. 그 사람은 고주망태가 되어 적어도 사흘 안으로는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아들이 분명하다면 내 한 가지 일러둘 게 있네. 김삿갓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고 자네 또한 순박한 사람 같아서 충고하는 것이니 잘 듣고 이행하게』
『말씀하십시오』
마음은 골목 저쪽으로 달려가고 있었으나 공손하게 경청하는 태도를 지었다.
『이번 민란이 아주 나쁘고 골치 아픈 것은 저놈들이 진주 사람들도 아니고 진주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 외지 사람들이라는 것이야.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나라 안에 민란을 일으키려 곳곳을 들쑤시며 다니는 패거리들이 있다는 증좌이고 이는 필시 조정 안의 불순한 세력들이 사주하고 있다는 뜻이지. 그래서 골치 아픈 거야. 일이 단순하지 않아. 자네 아비 김삿갓도 한때는 의심의 대상이었지. 민란의 주동자들 중 우두머리인 徐奉漢(서봉한), 저기 맨 왼편에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저 대가리가 그놈일세. 저놈하고 김삿갓이 민란이 일기 전에 진주성 안의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담론하는 광경을 본 사람들이 여럿이야. 그리고 반도들이 곳곳에 붙여 놓은 榜文(방문)의 내용이 너무나 명문장이라는 점이야. 글을 아는 사람들은 孔明(공명)의 出師表(출사표) 이후 최고의 문장이라고들 하더군. 어쨌든 그 명문장이 어디서 나왔느냐. 「이는 필시 김삿갓의 작품이다」 하고 의심을 했지. 그런데 바로 그 김삿갓이 겁도 없이 민란이 가라앉은 후에도 진주 안에서 헤매고 다니다가 붙잡히고 만 거야. 고생 좀 했을 거야. 다행히 취조 끝에 죄상을 찾지 못하고 방면하기는 했지만 관에서는 의심을 말끔하게 없앤 것은 아니니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내가 아들이라면 업어서라도 한시 바삐 진주를 떠나겠네. 지금처럼 옛 친구 서봉한의 썩어 가는 대가리 옆에서 술을 마시고 울고불고 하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그 양반의 재주가 아까워서 하는 말이네』
『고맙습니다. 이 은혜 백골난망이올시다』
포졸이 일러 준 대로 저잣거리 뒤편의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주막 몇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중 한 집의 마당에 김삿갓, 병연이 길게 누워 있었다. 잠이 들었는가 가만히 지켜보니 입 속으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니 회심곡 비슷한 곡조였다. 주모가 앞치마를 걷어붙이며 달려 나왔다.
『혹시 이 분을 아시우?』
『가족입니다』
『잘 오셨수. 빨리 모시고 가시우. 저대로 두었다가는 염라왕이 잡아가든 포졸이 잡아가든 결판이 나게 생겼수』
익균은 주모에게 탁배기 한 잔을 시켰다.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술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 빈 속에 탁배기 한 잔을 부어 넣으니 대번에 취기가 올랐다. 그 기운으로 익균은 아버지를 들쳐 업었다. 아버지의 몸은 고양이 한 마리 무게만큼이나 가벼웠다. 익균은 뛰었다. 진주성을 벗어난 후에도 걸을 수 있는 한 걸었다. 해가 빠진 후에야 아버지를 등에서 내려 길 옆 어느 문중의 퇴락한 제실 처마 밑에 눕혔다. 그러자 병연은 몸을 가누고 일어나 앉았다.
『네 등짝이 말랐구나』
『아버지, 이번에는 소자를 버리지 마십시오』
익균이 먼저 다짐부터 했다.
『달아나지 않겠다』
병연이 약속했다. 아들이 믿지 않는 표정이어서 병연은 덧붙였다.
『이제 지쳤다. 걸을 힘도 술 마실 힘도 없어졌다. 세상은 갈수록 멋지게 변하는데 나는 할 일이 없구나』
『큰일을 하셨습니다. 오면서 들어보니 아버님께서는 신선처럼 괴력을 부리는 인물로 회자되고 있었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은 영웅이 없으면 지어서라도 영웅을 만드느니라. 그 이름이 김삿갓이면 어떻고 이삿갓이면 어떠냐』
『그러다가 관에서 죄를 뒤집어씌울까 그것이 걱정이지요』
『서봉한을 보았느냐? 평생 역적질을 한 사람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용케도 모가지를 붙이고 살았는데, 댕겅 떨어진 꼴이 너무 우습지 않더냐. 서봉한이라는 사람은 젊을 적에 금강산을 처음 찾았을 때 만난 사람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속이 꽉 찬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반드시 큰일을 했을 아까운 인물이었다. 그 사람을 경상도에서 다시 만났다. 내가 제주에서 돌아오자 뱃머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민란을 일으키는 데 사용할 격문을 부탁했다』
익균은 사방을 돌아본 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써 주셨습니까?』
『썼지』
『아』
아들은 신음을 뱉았으나 정작 병연은 태연했다.
『서봉한의 얼굴을 보았느냐? 목이 잘리면서도 격문을 누가 썼는지 불지 않았다. 자신이 썼다고 우기고 갔다. 다른 두목들도 모두 서봉한이 쓴 줄로 알고 있기 때문에 서봉한의 목이 잘렸으니 누구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내가 무사한 것이다. 그러나 몸은 풀렸으나 내 혼백은 무덤 속에 가 있다. 서봉한의 떨어진 목을 보면서 지은 詩가 하나 있으니 보여 주마』
병연은 짐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런 詩가 적혀 있었다.
歸何處 歸何處(귀하처 귀하처: 어디로 갔소, 어디로 갔소)
三生瑟 五采衣(삼생슬 오채의: 처자식 부귀영화)
都棄了 歸何處(도기료 귀하처: 다 버리고 어디로 갔소)
有誰知 有誰知(유수지 유수지: 누가 알리오, 누가 알리오)
黑漆漆 長夜中(흑칠칠 장야중: 칠흑같이 어둡고 긴 밤에)
獨?? 有誰知(독추추 유수지: 홀로 우는 마음 누가 알리오)
何時來 何時來(하시래 하시래: 언제 오시겠소, 언제 오시겠소)
千疊山 萬重水(천첩산 만중수: 산첩첩 만리 물길)
此一去 何時來(차일거 하시래: 이제 가면 언제 오시겠소)
익균이 초저녁 어스름에 글자를 짚어 가며 다 읽고 나자 병연이 말했다.
『진주 관아에서 어떤 무식한 자가 이 詩를 문제 삼더구나. 누구를 조상하는 글이냐, 혹시 서봉한을 사모하는 내용이 아니냐 하고 추국을 당했어. 내가 웃었지. 제주도에서 한 마을을 지나다가 고기잡이 나갔다 불귀의 객이 된 지아비를 생각하며 서럽게 우는 아낙을 보고 읊은 詩라고 둘러댔지. 속아 넘어가더군. 영락없이 그런 정황을 읊은 詩니까. 그러나 너만은 알고 있거라. 이 詩가 민초들의 가슴을 적시면 그때는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익균은 위험한 독뱀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詩가 적힌 종이를 접어 자신의 등짐 속에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연이 내친김에 한마디 더 했다.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너는 발길 닿는 대로 다니다가 내 詩를 발견하거든 발견하는 족족 수거하여 불에 태워 버려라』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별 이유 없다. 내가 詩를 쓴 것은 몸속의 피고름을 쏟아 낸 것이다. 그뿐이었다. 고름이 세상에 회자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고달프겠느냐. 그러니 태워 버려라. 가능하면 전부 다. 그러나 그것도 억지로는 안 되겠지』
『주막을 찾아보겠습니다』
익균이 몸을 일으켰다. 병연이 아들의 손을 그러잡았다.
『아서라. 이 마을을 내가 안다. 여기서 자자』
아버지와의 첫날을 그렇게 퇴락한 제실의 처마 밑에서 보냈다. 다음날 해가 뜨기 전에 익균은 마을로 들어가 밥 한 덩어리를 구해 와 아버지에게 권했다. 그러나 병연은 속이 쓰리다며 밥 덩어리를 밀쳐 버렸다.
『이대로가 편하다』
두 사람은 걸었다. 병연은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앞장서서 북쪽으로 가는 지름길을 잡았다. 관가에 잡혀 가서 매를 맞은 탓인지 병연은 가끔 주저앉았다. 그럴 때마다 익균이 등을 들이댔다. 아비는 말없이 아들의 등에 업혀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았다. 먼 옛날 어릴 적 원인도 모르고 김성수의 등에 업혀 곡산으로 피신하던 그 때가 떠오르는지 아들의 등에 업힌 채 가끔 몸부림을 쳤다. 이런 걸음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이정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바쁠 것도 없었다. 父子는 그 오랜 세월의 그리움과 미움을 모두 털고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배 고프고 잠자리가 불편한 것쯤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나흘째 되던 날 그들은 靈山縣(영산현)을 지나고 있었다. 길 옆으로 나지막한 야산이 펼쳐져 있고 야산 너머로 다시 큰 봉우리가 이어져 있었다. 구름 몇 조각이 봉우리 위에 오가지도 못하고 걸려 있었다. 갑자기 병연이 배를 움켜잡았다.
『아침에 먹은 밥이 조금 쉰 듯하더니 탈이 나는구나. 전에는 썩은 것도 잘 소화시켰는데 이제는 음식이 조금만 이상해도 탈이 나니 내 위장이 나를 배반하는 것이 슬프다. 너는 잠깐 여기 기다리고 있거라』
병연은 망개 잎이 무성한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좀 멀리 들어간다 싶더니 일 보기 좋은 자리를 골랐는지 삿갓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쪼그리고 앉았다.
배탈이 심한지 병연은 좀처럼 일을 끝내지 못했다. 익균은 아버지의 배탈이 걱정스러웠다. 너무 긴 시간이었다.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팔공산의 일이 떠올랐다.
『아버지』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익균은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삿갓만 덩그라니 걸려 있었다. 삿갓 아래 땅을 살펴보았으나 뒤를 본 흔적이 없었다. 사방을 돌아보니 울창한 숲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익균은 찾기를 포기했다. 요 며칠 동안 아비와 함께 걷고 바람 속에서 잠을 자고 쉰밥을 나눠 먹으며 그 가벼운 몸을 등에 업고 걸으면서 체온을 주고 받은 것으로 충분했다. 어머니에게 모시고 가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으나 어머니는 스스로 속눈물을 삼키리라.
푸드득 하고 새 한 마리가 나뭇잎을 차고 오르더니 멀리 하늘로 비상했다.
『아버지, 이제 가십시오』
익균은 새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철종 14년, 고종 1년(1863) 2월 끝 무렵이었다. 전라남도 화순의 동복 구암리 마을 어귀에 나그네 한 사람이 지는 해를 등에 업고 찾아왔다. 나그네는 병이 깊은지 몹시 야위고 힘이 없어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동복에 갔다가 돌아오던 마을 사람 하나가 나그네의 얼굴을 잠시 살펴보고는 나는 듯이 달려가 정시룡에게 알렸다. 정시룡이 논길에서 나그네와 만났을 때는 이미 병연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정시룡이 부축하자 병연은 있는 힘을 다하여 홀로 서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어찌하여 쓰러질 때만 여길 찾아오게 되는지 참으로 면목이 없소이다.
『그때 약조를 했지 않습니까. 사랑채를 비워 두겠다고. 지금도 그 방은 비워 두고 있습니다』
『고맙소』
지난 날 약 반 년 동안 머물렀던 정기룡의 사랑채에서 김병연은 누워 버렸다. 동복에서 의원이 왔다. 의원은 진맥을 한 후 돌아가면서 정시룡에게만 낮은 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몸이 저렇게 되도록 함부로 굴렸습니까? 남아 있는 기력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습니다. 살아나려면 무슨 건덕지가 있어야 하는데 저 사람의 몸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혼백만 붙어 있는데 사람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의원으로 30년을 살아왔지만 저런 환자는 처음 봅니다』
『처음이니 잘 봐 두십시오. 혹시 살아날지도 모르니 그 때는 어찌 하시겠소?』
『내 손에 장을 지지지요』
『그래도 한번 해봅시다. 보통 사람이 아니니 스스로 용을 쓰고 일어설지도 모르지 않소』
의원은 손을 저었다.
『내가 할 일은 없습니다』
정시룡이 방에 들어가자 병연은 가늘게 웃고 있었다.
『방금 의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내 알아맞혀 볼까요?』
『그걸 아신다면 일어날 방도도 궁리해 보십시오. 이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병연은 또 웃었다. 태어난 이후 이처럼 편안하게 누워 본 적이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또 일어나야 하나, 그런 표정이었다.
그렇게 누운 지 한 달이 지난 삼월 스무아흐레 날이었다. 구암 마을 사람들은 며칠 뒤에 있을 화전놀이에 김삿갓이 참여할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했다. 마을 사람 몇이 문병 겸 찾아오자 병연은 밝은 얼굴로 일어나 앉았다.
『화전놀이에 가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했다. 마을 사람들은 『삿갓 어른께서 반드시 오셔서 좋은 詩 한 수 남겨 주셔야 합니다』 하고 덕담을 하고 돌아갔으나 각자의 집에 돌아가서는 『삿갓 어른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고 어떤 사람은 『한두 해는 살다 갈 것』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상관없이 그날 병연은 집주인 정시룡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본 세상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세상은 눈부시게 바뀌고 있다는 것, 앞으로 100년 이내에 천지개벽이 이루어질 것이며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시룡이 물었다.
『백성은 주인의 자리에 앉지 못합니다. 사기꾼들이 백성을 등치고 간을 빼겠지요. 결국 다시 순환하겠지요』
『그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정시룡은 궁금한 것이 많았다.
『지리산을 맴돌았지요. 암자에도 빌붙었고, 사냥꾼의 초막에도 신세를 졌습니다. 약초 캐는 사람들과 함께 살기도 했고, 짐승들과 같은 굴 속에 살기도 했소. 하늘이 내게 준 것을 다 태우고 있었던 것이지 별다른 뜻이야 뭐가 있었겠소』
『글을 쓰고 싶으십니까?』
정시룡의 암시에 병연은 웃으면서 붓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 같은 짧은 글 하나를 쓰고는 다시 누워 버렸다.
萬事皆有定(만사개유정: 세상만사 모두 운명이 정해져 있거늘)
浮生空自忙(부생공자망: 허공에 뜬 인생들 공연히 헤매누나)
그날 저녁 미음을 먹은 다음 병연은 단정하게 옷을 갈아 입고 누웠다. 정시룡이 방에 들어와 촛불을 켰다. 그러자 병연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을 꺼 주시오. 어두울 때는 어두워야지』
정시룡은 불을 껐다. 그러자 기척이 없었다. 잠이 들었나 하다가 이상해서 입가에 귀를 대보니 숨이 멎어 있었다.
사흘 뒤 구암 마을에는 장례식이 열렸다. 상주도 없는 장례식이었다. 마을 사람 모두 상주였다. 김병연, 김삿갓의 시신은 마을 뒤편 동뫼(東山)에 묻혔다. 영월에 있는 가족들에게 알리기 전에 初葬(초장)을 치른 것이다.
아무 기별도 하지 않았는데 3년 뒤 아들 익균이 구암 마을로 찾아왔다. 묘를 파니 몇 개의 뼈 조각이 하얗게 웃고 있었다. 그것을 곱게 싸서 등에 지고 익균은 영월로 돌아갔다. 지난 번 등에 업었을 때보다 더 가벼워진 아버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