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世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1937년 7월7일의 蘆溝橋사건으로 8년에 걸친 대규모의 전면전인 中-日전쟁이 시작되었다. 중국에 있는 獨立運動者들은 드디어 祖國光復의 기회가 다가왔다고 흥분했다. 臨時政府는 軍務部 관할 아래 軍事委員會를 설치하여 抗戰計劃을 세우고, 1938년도 예산에서 군사비로 58만원을 책정했다.
中-日전쟁의 발발로 민족주의 3黨(韓國國民黨·韓國獨立黨·朝鮮革命黨)의 합동문제도 급속히 진전되어 7월 말에는 金九의 주도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약칭 光復陣線)가 결성되었다.
日本軍의 공습이 심해지자 金九는 100여 명의 臨時政府 대가족을 인솔하고 南京을 떠나서 揚子江을 따라 멀리 湖南省의 長沙로 피란했다. 金九는 3黨 통합문제를 논의하던 楠木廳에서 동포청년의 총을 맞고 失神했다.
3년 만에 하와이로 돌아온 李承晩은 韓人基督學院 기숙사에서 기거하면서 학교운영과 韓人基督敎會 신축에 전념했다. 景福宮의 정문인 光化門을 본떠 설계한 한인기독교회는 동포들과 美國人들이 희사한 4만820달러로 1938년 4월에 준공되었다. 교회당 건축을 끝낸 李承晩은 歐美委員部 활동을 재개하기 위하여 1939년 3월에 프란체스카와 함께 워싱턴으로 갔다.
(1) 中-日전쟁의 발발과 光復陣線 결성
1937년 7월7일 밤에 북경 교외 13km 지점에 위치한 蘆溝橋(노구교) 부근에서 무단으로 야간 전투연습을 하던 일본 군인들과 이곳을 경비하던 중국 제29군 부대 사이에 발생한 군사충돌은 치열한 전투 끝에 7월11일에 정전협정이 성립되었으나, 일본정부는 이 충돌을 구실로 곧 대규모의 전면전을 시작했다. 8년 동안 계속되는 中-日전쟁의 개막이었다.
노구교는 북경 서남쪽을 흐르는 永定河[옛 이름 蘆溝河]에 놓인 길이 235m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옛 석교이다. 1192년에 완성된 이 다리는 일찍이 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유명한 「東方見聞錄(동방견문록)」에서 다리의 조형기술과 장려한 조각에 매료되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淸朝의 乾隆帝(건륭제)가 「蘆溝曉月」(노구효월)이라는 휘호를 남겼을 만큼 경치도 아름다웠다. 영정하의 아침 안개가 다리 일대를 그림처럼 몽롱하게 만들고 거기에 새벽달이 걸리어 한결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 이제 세계의 역사에서 잊혀지지 않을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전적지가 되었다.1)
日本의 華北分離工作과 蔣介石의 「安內攘外」 정책
중국 제29군은 河北省의 유력 군벌인 宋哲元의 군대였다.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이른바 華北분리공작에 대응하여 완충기관으로 1935년 12월에 북경에 송철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冀察(기찰) 정무위원회[冀는 河北省, 察은 察哈爾(차하르)省의 뜻]를 성립시키고, 하북성과 차하르성을 통괄하게 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화북분리공작이란 화북5성[河北·차하르·山東·山西·綏遠(수원)]을 「北支自治運動」이라는 구실로 옛 군벌을 이용하여 중국 중앙정부로부터 분리시키는 공작이었다. 그리하여 1935년 11월에는 하북성 通州에 冀東防共자치정부라는 괴뢰정권을 발족시켰다. 기동자치정부는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육상과 해상으로 대규모의 밀수를 자행하여 국민정부의 중요한 재원인 세관수입을 격감시켰다.
일본군의 화북분리공작은 북경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중국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35년 12월9일 북경의 학생시위[12·9운동]를 시작으로 「일치항일 내전정지」를 외치는 시위운동이 천진·상해·광동 등지로 확산되어, 상해에서 전국구국연합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국민정부는 「安內攘外[내부를 안정시킨 다음 외적을 물리침]」의 기본방침에 따라 공산군토벌에 주력하고 있었다. 국민정부군의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 근거지인 武漢[武昌과 漢口]를 떠나서 1만2,000km의 「大長征」을 거쳐 1935년 말에 陝西省(섬서성) 延安(연안)에 근거지를 확보한 중국공산군은, 1936년에는 山西省으로 진격하여 한때 국민정부의 산서군을 압도하기도 했으나, 그해 3월에 蔣介石이 중앙군을 북상시키자 패퇴했다.
1936년 11월에 일어난 수원사건[綬遠抗戰]은 중국인들의 항일운동을 크게 고무시켰다. 일본 관동군과 관동군 휘하의 내몽고군이 수원성을 침략했다가 대패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일본군 개입사실을 부인했으나, 중국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중국인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또한 한 달 뒤인 12월12일에는 중공군 토벌작전을 독려하기 위하여 西安을 방문한 장개석이 휘하의 張學良에게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서안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정전교섭이 급속히 진전되어 1937년 초에는 제2차 國共合作이 사실상 성립되고 「일치항일 내전정지」가 중국 전체의 정치구호가 되었다.2) 이러한 항일의식은 노구교를 경비하는 제29군 병사들 사이에도 팽배해 있었다.
獨立戰爭 준비할 軍事委員會 설치
中_日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은 드디어 조국광복의 기회가 다가왔다고 흥분하면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임시정부는 7월15일에 국무회의를 열고 항전대책을 논의한 끝에 군무부 관할 아래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군사위원회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튿날 柳東說, 李靑天, 李復源, 玄益哲, 安敬根, 金學奎의 6명을 군사위원회 위원 겸 상무위원으로 선임했다.3) 이들은 만주에서 對日무력투쟁 경험이 있는 朝鮮革命黨 인사들이었다.
「규정」에 따르면 군사위원회는 독립전쟁에 대한 계획안을 연구 작성하고, 군사간부 인재를 양성하며, 군사상 필요한 서적을 연구 편찬하는 것이었다(제2조). 임시정부는 「긴박한 시국과 우리의 준비」라는 글을 통하여 군사위원회를 설치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제정세는 날로 험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목첩에 있으매 우리의 기대하던 기회도 눈앞에 박도하얏으므로, 우리 임시정부에 당국한 이들이 이 기회를 적당히 이용하기 위하야 밤낮으로 고심 탄력함은 일반이 주지하는 바이어니와 우리의 최후 목적을 완성함에는 한 큰 혈전에 의할 뿐이오, 이 대혈전을 하기 위하야는 군사준비를 급급히 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이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우리 군계 인물이 한데 집중돼야 군사상 제반 계획을 자세히 연구하고 세워 이를 우리 정부로 하여금 시행케 하여야 되겠으므로, 이제 임시정부에서 군사위원회를 급거히 설치하는 것도 그 용의가 여기 있는 것이라.…〉4)
임시정부는 또한 「엄중한 시기와 일반의 주의」라는 글을 통하여 〈독립전쟁을 개시해서 설분복국하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천명하고, 일반 동포들도 이에 적극 응하여 준비할 것을 촉구했다. 이 글은 또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서 동포들이 자칫하면 중국인들의 오해를 받아 신변에 위험이 닥치기 쉬우므로 각자의 행동을 조심할 필요가 있고, 또 혹시 불량배가 왜적의 사주를 받아 주구가 되어 우리의 군사행동을 불리하게 하는 괴악한 거동이 있다면 단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므로 단호하게 대처해야 된다고 주의시켰다.5)
日本 정보기관의 蔣-金회담 보고
中_日전쟁이 발발했을 때의 金九의 동정에 대한 일본 정보기관의 보고는 매우 흥미롭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여러 기관의 보고에서 金九가 장개석과 비밀리에 회동했다고 기술하고 있는 점이다. 내무성 경보국 보고는 金九가 노구교 사건이 발생하기 며칠 전인 7월3일쯤에 남경에서 은밀히 장개석의 초청을 받고 그를 만났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장개석은 金九에게 이번 화북사건은 극력 불확대 방침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주위의 상황이 어쩌면 확대할 수밖에 없게 될지도 모르며, 그럴 때에 한국인들의 활동에 크게 기대한다고 말하고, 다만 지금은 화평적 수단을 강구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처할 방안을 정리하여 제출해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金九 등은 며칠 뒤에 그 대책을 상세히 적어서 제출하고 경비 증액을 요구하여 채택되었다고 했다.6) 그러나 장개석은 6월3일에 강서성의 廬山(여산)으로 가서 군간부들과 각계 인사들의 정치와 군사문제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고 있었으므로 남경에 없었다.
또한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장개석이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7월10일에 金九와 민족혁명당의 金元鳳, 무정부주의단체인 한인청년동맹의 柳子明 세 사람을 여산으로 초청하여 韓_中 연합 항일전선을 구축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다액의 자금과 중요사명을 주어 분기를 촉구했고, 세 사람도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각각 간부회의를 열고 특무대를 소집하여 화북지방으로 보냈다고 기술했다.7) 그러나 이 시점은 장개석이 7월11일부터 열릴 국방회의 준비에 바쁜 때였으므로 金九 등을 여산까지 초청하여 韓_中 합작의 연합전선 구축 문제를 논의했을 개연성은 희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8) 이 국방회의에는 노구교 사건 발생 전에 여산에 다녀갔던 중국공산당 대표 周恩來도 다시 초청되었고, 7월15일에는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가 인정되었다. 그 결과 발표된 것이 7월17일의 장개석의 「여산담화」였다. 이 담화에서는 어떠한 해결도 중국의 완전한 주권과 영토를 침해할 수 없다는 등 네 가지 조건이 천명되었다.
한편 동경형사지방재판소 검사는 「金九가 7월20일에 남경에서 장개석과 면담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협의한 다음 원조금 증액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고 보고하고 있다.9) 장개석이 7월20일에 남경으로 돌아온 것은 사실이었으나,10) 7월21일에는 당·군·정부를 전시체제로 개편하기로 하는 등 중요한 일정 속에서 여산에서 돌아오던 날 바로 金九를 만났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나 검찰의 이러한 정보보고는 中_日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일본 관헌들이 지금까지보다 한결 더 金九의 동향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장개석과의 면담설뿐만이 아니었다. 일본 검찰의 정보보고는 8월29일에 안공근이 상해로 가서 중국신문 기자 여나믄 명을 만찬에 초대하고 金九그룹의 활동을 중국신문에 일제히 보도하게 했으며, 8월 말에는 金九 자신이 직접 嚴恒燮 등을 대동하고 상해의 프랑스조계에 나타나서 중국의 군과 정부 각 방면을 역방한 다음 프랑스공무국 정치부 차장 엠리아노프와 장시간 회담하고 돌아갔다고 기술하고 있다.11) 그러나 金九가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해에 잠입했다는 사실은 「백범일지」를 비롯한 다른 어떤 기록으로도 확인되지 않는다.
臨政豫算 226배로 늘려
군사위원회는 오래 기다렸던 항일전을 머릿속에 그리며 군사계획안을 작성하여 국무회의에 제출했고, 국무회의는 8월9일에 이를 접수하기로 결정했다. 국무회의는 군사위원회에서 작성한 특무사업, 군사시설, 군대편성, 장교양성에 관한 안건을 논의하고, 속성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초급장교를 1기에 약 200명씩 양성할 것과 독립전쟁의 기본군대로 우선 1개 연대를 편성할 것 등을 결정했다.12)
이러한 군사활동 방침은 임시정부의 1938년도 예산편성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938년도 군사관련 예산으로 군사비 30만원, 군사훈련비 7만원, 특무비 20만원을 포함하여 총 57만원의 예산을 책정했는데, 그것은 1938년도 전체 예산 57만8,867원 88전의 98%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예산규모는 1937년도 총지출 2,564원에 비하면 무려 226배나 되는 것이었다.13)
의욕적인 군사계획안을 마련한 임시정부는 사관학교를 설립할 장소까지 물색했으나 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中_日전쟁의 확대와 중국군의 퇴각에 따라 임시정부도 여러 번 이동하면서 군사계획에 쓰일 예산이 당장 급한 임시정부 대가족의 구급비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14)
항일전쟁 계획을 마련한 임시정부는 「공보」(63호)를 통하여 이를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에게 알렸다. 그것은 재미동포의 자금지원을 얻기 위해서였다.15) 실제로 임시정부가 계상한 방대한 1938년도 세입예산 가운데 중국정부의 지원금인 50만원의 「특종수입」을 제외하고 가장 큰 액수인 혈성금 7만원16)은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의 지원금에 대한 기대치를 반영한 것이었다.
中_日전쟁의 발발은 在美동포 사회에서 임시정부의 위상을 새로이 제고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北美 대한인국민회는 8월15일에 임시 중앙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임시정부 후원대책을 논의하고, 우선 경상비로 임시정부에 매달 100달러씩 보내기로 했다.17) 이어 9월5일에 열린 제4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임시정부의 지원방안으로, 1)임시정부 군사위원회를 후원하기 위하여 적립금 1000원을 임시정부에 보낼 것, 2)장기전에 대비하여 미주·하와이·쿠바 동포들에게 국민부담금을 모금할 것, 3)중국항일군을 위로하기 위하여 한인 명의로 의연금을 기부할 것을 결의했다.18)
3黨 합동으로 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 결성
中_日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단체의 합동문제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던 李靑天 등 조선혁명당계열의 인사들은 김원봉의 독주에 불만을 품고 1937년 4월에 민족혁명당을 탈퇴하고 조선혁명당을 다시 조직함으로써 민족혁명당에 대립하는 右派민족주의 단체는 金九를 이사장으로 하는 한국국민당과 趙素昻 등의 한국독립당과 함께 모두 세 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은 심각한 재정난에다 사람도 부족하여 운영난을 겪고 있었고, 한편 임시정부의 지주정당인 한국국민당으로서는 임시정부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있는 민족혁명당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독립당 및 조선혁명당과의 제휴가 필요했다. 3당이 합동을 함으로써 국민정부와 각계 중국인들의 집중적인 지원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金九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은 일본에 대한 항전을 개시하였다. 한인의 인심도 불안케 되었는데, 5당통일로 된 민족혁명당은 족족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또 한 개 생기고, 미주대한인독립단은 탈퇴하고,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같이 분열되는 내용은 겉으로는 민족운동을 표방하고 이면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한다는 것이었다. 시국은 점점 급박해져서 우리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과 미주와 하와이의 각 단체를 연결하여 민족진선을 결성하고, 임시정부를 옹호 지지하여, 정부는 점점 발전하게 되었다.〉19)
金九는 이청천이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나와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한 직후부터 독립운동단체들의 합동운동을 추진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단체들의 참여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하여 金九는 하와이에 있는 李承晩에게 합동선언문 초안을 보내면서 협조를 당부했다. 그러나 한인기독학원 운영과 특히 한인기독교회 신축에 전념하고 있던 李承晩은 金九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李承晩이 왜 답장을 쓰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시정부와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의 행태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동지회가 그들 단체와 합동하는 일을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3당 합동 논의는 7월 초순에 杭州에 있던 한국독립당의 洪震이 남경으로 가서 이청천과 한국국민당의 宋秉祚와 만남으로써 구체적으로 진전되었다. 세 사람은 1)3당 합동의 취지를 밝히기 위해 공동선언서를 발표하고, 2)합동단체는 협력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확대·강화하며, 3)각 단체는 대표 2명을 남경에 파견하여 공동사무를 처리한다는 데 합의했다.20) 7월7일에 노구교 사건이 터지자 金九를 비롯한 3당 관계자들은 합동선언을 서둘렀다. 3당은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5개 단체(북미 및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한인 동지회, 미주 대한인독립단, 대한인단합회, 부인구제회)의 연합 명의로 7월 하순에 남경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약칭 「광복진선」)를 결성했다. 그리고 8월1일에 「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을 발표했다.
「大黨은 政府의 뇌수요, 政府는 大黨의 身體」
「연합선언」은 광복진선을 〈당〉이라고 표현하면서 임시정부와의 관계가 다음과 같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민족전선의 핵심은 당연히 당에서 확립되며 당의 기능은 반드시 각종 부문의 단체 진행활동으로 말미암는다. 정부는 직접 국민의 전체성을 영도함으로써 3·1운동 이래부터 우리 정부의 허다한 공헌은 실로 여기에 있으며 금후의 활동도 또한 이로 말미암아 증진할 것이다. 당과 정부는 서로 표리가 되어 서로 버릴 수 없으며 장래 大黨은 필히 정부의 뇌수가 되고 정부는 대당의 신체가 될 것이다. 그런 후에 몸과 마음이 서로 의지하여 능히 민활하고 강건한 체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광복운동의 구체화를 도모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 대하여 협력 옹호하고 그 깃발 아래 국민의 총동원을 실행해야 한다. 왕왕 기관과 자연인을 분별하지 못하고 망령되이 정부의 공과 죄를 논단한다는 것은 어찌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21)
이러한 선언은 金九를 비롯한 광복진선 주동자들이 광복진선이 「以黨治國」을 하고 있는 중국국민당이나 임시약헌에 규정된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으로 발전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연합선언」을 발표한 이튿날 金九가 李承晩에게 쓴 편지에도 표명되어 있다. 金九는 자신의 편지에 답장도 보내지 않았던 李承晩에게 다시 편지를 쓴 것이었다.
李承晩에게 光復陣線 결성 알려
〈지난 달에 광복선언 기초를 항공우편으로 귀회 중앙부에 보내고 동의를 요구한 지 월여에 회답을 보아 발포코저 기대하던 중 華北戰爭이 폭발되어, 中韓兩民族이 절실히 聯合滅敵하자는 현하에 우리의 흩어진 모래알 같은 형세로 남과 교섭하는 데 위신이 없을 뿐 아니라, 그네들도 우리에게 불통일을 우려하게 되는 정세에 의하여 더 기다리지 못하고 반포하오니, 당돌을 용서하시고 중앙부에 명령하시와 인준의 회신을 보내실 뿐 아니라, 원동 각 단체와 정부사업에 대하와 항상 훈교를 주시오며, 금번 선언서에 원지에 계신 동지들로 의아케 된다면, 정부는 동체요 당은 뇌라는 구절과 광복진선이 통합의 초보공작이라 한데 고려될 듯하나, 의정원이 당금은 腦格을 가지나 約憲에 大黨이 성립되면 최고권이 당에 있다는 문구가 있으므로 명사를 그리 쓴 것이고, 통합은 원동은 별 문제가 없으나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는 자치성을 구비한 단체들인즉 打成一片하기 용이치 않고, 억지로 하는 통합은 폐해가 더욱 심할 것이므로, 실제로 공공사업을 합심합력하여 가는 데서 장래에 진정한 통일이 되리라는 것이 동방 각 동지들의 일치점입니다. 금번 화북전쟁에서 慘無人道에 일본의 일등국의 가치는 상실되고, 중국동포의 적개지심은 극단으로 발표되는 차제에 우리의 光復陣線 결성은 민족적으로 위신을 발양하면서 중국과 절실 합작하게 되오니, 이때에 聖敎를 주시와 대업을 완성하도록 하실 줄 믿고 事機進展되는 대로 자주 보고 드리기로 하고 다만 국가를 위해 건강하심 빌며〉22)
金九는 광복진선 선언을 동봉하고, 추신으로 〈동봉 선언은 귀회로서 각지 동지동포에게 印布하심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광복진선은 8월17일에는 「한국광복운동단체 중일전국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고, 〈중-일전쟁은 한국과 중국 양 민족의 생사존망의 최후의 결전〉이라고 말하고, 양 민족이 연합하여 항일구국전선에 참여해서 왜적을 섬멸할 것을 촉구했다.23)
『물질로 바치며, 기술로 바쳐라…』
광복진선의 「중일전국에 대한 선언」이 발포되고 사흘 뒤인 8월20일에 임시정부는 국무위원 일곱 사람의 연서로 「임시정부포고문」을 발표했다. 그것은 광복진선의 결성으로 기반을 강화한 임시정부가 국내외 동포들에게 모든 역량을 임시정부로 집중시킬 것을 촉구한 것이었다.
〈우리의 충애하는 동포들! 우리가 두고두고 기다리고 바라던 기회는 벌어졌다. 우리의 조국광복의 거룩한 임무를 다할 날은 이르렀다. 중일의 싸움은 폭발되었다. 그 영향은 지극히 크고 안 미치는 곳이 없다. 이번 이 싸움은 한번 눌린 자의 솟아날 길이오, 강포한 자의 거꾸러질 함정이다. 죄악만을 쌓기에 힘써 날뛰던 우리의 불공대천지수 왜적의 멸망이 시각을 다투어 나타나려 한다. 우리의 친구 중국은 그 이해와 흥망이 우리로 더불어 그 관계가 심히 크고 깊다. 중국이 죽음을 던져 살길을 바라는 이 싸움이 또한 우리의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고 자유 독립의 국가광복을 이루게 되는 그 고동이다.…〉
「포고문」은 이렇게 선언하고 나서, 모든 역량을 임시정부로 집결시킬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남의 힘이 아무리 클지라도 나의 힘에 비길 수 없으며, 그뿐(아니라) 나의 힘이 있어야 남의 힘이 크게 보충됨은 긴 말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응당 갑절이나 더 느끼어 이 시기를 잡아야 할 것이며 잘 잡음에는 모든 힘을 집중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본 정부는 전국 동포에게 고하노니, 가진 힘을 한데 바쳐 천재일시의 이 사명을 행하라. 체력이 있거든 체력을 바치며, 슬기가 있거든 슬기를 바치고, 물질로 바치며, 기술로 바쳐라. 아무리 왜적의 극단적 압박과 통제 아래서라도 사람의 뜻이 정하면 강철이 되나니 형세를 따라 공개로나 비밀로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본 정부 아래 모으라. 자기네의 단체가 있거든 각각 자기 소속 단체로 모으고, 소속 단체가 없는 개인은 각각 직접 정부로 바쳐라.…〉
「포고문」은 다음과 같은 절절한 호소로 마무리했다.
〈아아! 우리의 충애 동포들! 우리가 우리 조상네의 물려주셨던 아름답고 거룩한 땅덩어리와 자랑거리를 다시 찾아 조상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던 부끄러움을 씻으려거든, 또 영원한 앞날에 나오는 자손들의 값없이 죽는 불쌍한 목숨을 건져 남과 같이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려거든, 우리의 가진 것을 무엇이나 아끼지 말며 계련치 말아라. 오늘에는 아무것도 없다. 죽지 않으면 살판이다. 죽음으로 이 삶을 구할 뿐이다. 살려고 애를 쓴다고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죽을 것을 각오할진대 잘 죽기를 찾을 것이니, 하물며 살길이 그 가운데 있음이랴. 어두운 지옥에 빠진 우리에게 광명한 빛이 큰 길로 인도한다.…〉24)
자다가 日本 비행기의 空襲받아
화북지방의 전선이 확대되는 한편으로 8월 말부터는 상해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른바 제2차 상해사변이 발발한 것이었다. 상해에 투입된 중국군은 장개석이 자랑하는 정예부대였다. 중국군은 크리크[작은 운하]와 토치카를 이용하여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하면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일진일퇴의 격전이 계속되는 동안 양쪽 모두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한국광복진선은 10월에 선전위원회를 결성하고 韓_中 양 민족의 연대의 필요성을 선전하는 한편 일본의 중요기관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했다. 광복진선의 활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향도 컸다. 9월3일자 중국신문들이 광복진선의 결성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데 이어 10월31일자 「申報」에는 한국광복진선 선전위원회가 10월30일에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열리는 9개국회의 의장 앞으로 전보를 보내어 극동을 침략하는 일본에 대한 실효성 있는 제재 조치를 취할 것을 청원한 사실이 보도되었다. 9개국회의는 일본의 전쟁도발을 중국정부가 국제연맹에 제소함에 따라 11월3일부터 열리게 된 것이었다. 중국정부는 한국광복진선 선전위원회에 준비금으로 1만원을 지급했고, 在美동포들로부터도 250달러가 송금되었다.25)
8월15일부터 일본군의 남경폭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金九가 공습을 당한 것은 8월26일 새벽이었다.26) 金九는 회청교의 집에서 초저녁에 일본군 비행기의 공습으로 곤란을 겪다가 경보가 해제된 뒤에야 깊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기관포 소리에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밖으로 나왔다. 그때에 「꽝」 하고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金九가 자던 방 천장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뒷방에서 자고 있는 朱愛寶를 황급히 불렀다. 주애보와 같은 방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도 흙먼지를 헤치고 나왔다. 뒷벽은 무너지고 그 바깥에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불빛이 하늘로 치솟아 하늘색은 마치 붉은 담요를 펼쳐 놓은 것과 같았다.
金九는 날이 밝자 馬路街에 있는 곽낙원 여사의 집을 찾아갔다. 폭격으로 죽은 사람과 다친 사람들이 길에 가득했다. 金九가 어머니 집 문을 두드리자 그녀가 직접 나와서 문을 열었다.
『너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
『놀라셨지요?』
『놀라긴 무엇을 놀라. 침대가 들썩들썩하기에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래 사람이 많이 죽었나?』
『예, 오면서 보니까 이 근처에서도 사람이 상하였던데요』
『우리 사람들은 상하지 않았나?』
『글쎄올시다. 지금 나가 보렵니다』
金九는 곽낙원 여사 집을 나와서 이청천의 집을 찾아갔다. 집이 흔들려서 놀라기는 했으나 무사했고, 남기가에 있는 대다수 학생들과 가족들도 무사했다.27) 金九는 재미동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른 임시정부 활동과 함께 이날의 일을, 어머니와의 대화내용까지 상세히 적었다.28) 그만큼 극적인 상황을 재미동포들에게 실감나게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南京을 떠나 長沙로 피란
11월5일에 일본군이 항주만에 상륙한 뒤에 중국군의 저항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퇴각하는 중국군을 추격하여 남경으로 진격했다. 국민정부는 11월16일에 마침내 四川省의 重慶으로 천도하기로 하고 각 기관을 옮기기 시작했다. 임시정부도 11월18일에 국무원 결의로 임시정부 판공처를 湖南省 長沙로 옮기기로 했다.29) 100여 명의 남녀노유와 청년들을 이끌고 사람과 땅이 낯선 장사로 피란 가기로 한 것은 그곳이 곡식값이 매우 쌌으므로 생활비를 줄이고, 또 장차 홍콩을 통하여 미국 동포들과 통신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세가 아주 불리해져서 중국 전토가 일본군에 점령당하는 경우에는 임시정부를 하와이로 옮길 것도 생각했었다.30)
金九는 상해와 항주를 비롯하여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에게 여비를 보내어 남경으로 집결하도록 연락했다. 金九는 梁起鐸과 安重根의 부인을 특별히 배려했다. 이 무렵 양기탁은 仙道를 연구하기 위해 陽(율양)의 古堂菴에서 중국도사 任漢廷에게 의탁하여 수도하고 있었고, 안중근의 부인은 상해에 있었다. 金九는 양기탁에게 여비를 보내면서, 남경으로 와서 같이 장사로 가자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기약한 날짜가 되어도 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그냥 떠나고 말았다. 그때 이후로 金九는 양기탁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31)
안중근의 부인에게는 安恭根을 보냈다. 金九는 안공근을 상해로 보내면서 자기의 가족과 함께 큰형수인 안중근의 부인을 꼭 모셔오도록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안공근은 자기의 가족들만 데려왔다. 金九는 안공근을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란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金九는 안공근에게 그의 가족들도 다른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본의에 합당하다면서 함께 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안공근은 자기 가족은 중경으로 보내겠다면서 임시정부 대가족과 함께 생활하기를 원하지 않았다.32)
朱愛寶에게 100원밖에 주지 못한 것 후회
남경을 떠나면서 金九는 주애보에게 여비 100원을 주어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일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金九는 뒷날 다음과 같이 자괴했다.
〈그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에 여비 100원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근 5년 동안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나를 위하였고,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부부 비슷하게 되었다.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33)
金九는 安徽省(안휘성)의 屯溪(둔계)중학에 재학 중인 둘째아들 信을 불러오고 곽낙원 여사를 모시고 안공근의 가족과 함께 영국 윤선을 타고 漢口를 향해 떠났다. 진강에 있던 임시정부의 내무장 趙琬九와 군무장 曺成煥은 임시정부의 문서와 장부를 가지고 11월20일에 윤선을 타고 출발했고, 남경에 있던 광복진선 3당 간부들과 임시정부 가족과 청년당원 등 100여 명은 중국군사위원회에서 주선해 준 큰 목선 한 척에 짐까지 가득 싣고 11월23일에 남경을 떠났다.34) 임시정부 대가족이 떠나고 3주일 뒤인 12월13일에 남경은 일본군에 점령되고, 일본군에 의한 대규모의 학살과 약탈이 잇따랐다. 그리고 12월14일에는 북경에 일본의 괴뢰정부로 中華民國臨時政府가 발족했다. 남경에도 이듬해 3월28일에 또하나의 괴뢰정부로 中華民國維新政府가 발족했다.
장사까지는 양자강 수로로 3000리 길이었다. 임시정부 대가족은 한구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갖은 고생 끝에 12월20일 오전에 장사에 도착했다. 남경을 출발한 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35) 金九는 임시정부 대가족보다 먼저 장사에 도착했고, 안공근의 가족은 한구에서 헤어져서 중경으로 갔다. 金九는 안공근의 이러한 처사가 몹시 거슬렸을 것이나, 안공근은 이제 金九로서도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 대가족은 12월4일에서 20일 사이에 모두 무사히 장사에 도착했다.36)
(2) 合黨 방해자의 총 맞고 한 달 동안 入院治療
호남성의 북단에 위치한 洞庭湖는 중국에서 가장 큰 호수로서, 「洞庭秋月」 등으로 알려진 풍광으로도 유명하다. 장사는 동정호에서 남쪽으로 약 200km 떨어져 있는 호남성의 주도이다. 경치도 좋고 기후도 따뜻할 뿐만 아니라 곡식도 풍부하고 물가도 싸서 임시정부 대가족이 생활하기에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37) 金九는 장사로 옮긴 직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장사에 선발대를 보내놓고 안심하지 못하였으나, 뒤미처 장사에 도착하자 천우신조로 이전부터 친한 張治中 장군이 호남성 주석으로 취임하여, 만사가 순탄하였고 신변도 잘 보호받았다. 우리의 선전 등 공작도 유력하게 진전되었고, 경제 방면으로는 이미 남경에서부터 중국 중앙에서 주는 매월 다소의 보조와, 그 밖에 미국 한인교포의 원조도 있었다. 또한 물가가 싼 탓으로 다수 식구의 생활이 고등난민의 자격을 보유케 되었다.〉38)
임시정부는 中_日전쟁을 계기로 중국정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中_日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은, 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각자 능력에 따라 생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서 생활비를 해결했고, 각자의 수입 중 일부를 임시정부에 헌납해서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왔다. 그러나 中_日전쟁이 발발하면서 생계수단을 잃게 되어 임시정부 가족들은 중국정부의 지원금과 몇십 가마씩의 쌀과 재미동포들의 성금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39)
임시정부 가족들은 공동생활을 할 줄 몰랐다. 그리하여 金九는 각자 방을 얻어 주어 생활하게 했다. 金九는 상해에 도착했을 때부터 동포를 만나도 초면에 인사할 때 말고는 변성명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장사에 도착한 뒤로는 거리낌없이 金九로 행세했다.40)
八旬잔치 비용을 拳銃 사라고 내놓아
장사에 머물던 1938년은 곽낙원 여사가 팔순이 되는 해였다. 그동안 생일상 한번 제대로 차려드리지 못했던 金九는 여간해서 맞기 어려운 어머니의 팔순 생일만은 꼭 챙기고 싶었다. 그리하여 청년단원들과 동지들과 상의하여 약간의 돈을 추렴하여 곽낙원 여사의 생일상을 차릴 준비를 했다. 이를 눈치 챈 곽낙원 여사가 아들을 불러서 말했다.
『나의 생일상을 위하여 무엇을 차릴 생각은 염두에도 두지 말고 돈이 있거든 차라리 그것을 나에게 주어. 내가 평일 식찬비를 절용하여 저축한 돈 약간과 합하여 청년에게 무기를 얼마 사주어 그것으로 왜적을 다만 몇 놈이라도 더 죽이게 하겠다』41)
결국 金九는 어머니 뜻에 따르기로 하고 그 돈으로 권총을 샀다. 호놀룰루의 「國民報」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곽낙원 여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이만한 아들이 있음은 이만한 그 자친이 있음이라고 세상이 칭송하기를 마지 않는다 한다. … 오늘은 아들이 자친의 만년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드리기 위하여 의식을 편하게 하여 드리려 하나, 그는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몸에 좋은 옷을 입지 않고 입에 좋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굳게 거절하신다 하며, 그는 언제든지 몸이 고국에 돌아가 묻히기만 소원하신다. 이 어른이 지금 팔십노인이지만 건강하시고 아직도 안경 없이 바늘귀를 꿰신다 한다.〉42)
이 기사는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韓民」에 실린 기사를 전재한 것이었는데, 이 기사를 보고 하와이의 부인들이 6달러를 곽낙원 여사에게 보내기도 했다.43)
「백범일지」는 이때의 일을 적으면서 그것이 남경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했으나,44) 그녀의 팔순 생일은 1938년 음력 2월26일이었으므로 장사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같은 目的 아래 共同鬪爭하면서 「陣線」이란 모순』
장사에 와서 金九가 가장 열성을 기울여 추진한 작업은 광복진선 3당의 통합이었다. 장사에 온 뒤로 3당은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고 있었으므로 내부적으로 통합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金九는 장사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3당통합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하여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는 세 정당을 다시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할 필요성과 정당성을 金九는 재미동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했다.
〈본래 무슨 진선이라는 것은 두 개 이상의 다른 주의와 단체들이 특정한 공통의 이익을 위하야 分工合作하는 기구인즉, 꼭같은 주의를 가지고 유일한 목적만을 위하야 공동분투하는 우리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서 진선을 형성한다는 것은 이론에 맞지 아니하는 일입니다. 비록 일시의 우리의 부득이한 사세로써 그리 된 것이나, 이 모순되는 현상을 그대로 오래 지지할 수 없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며, 겸하야 역사적 교훈과 민중의 요구가 통일을 절망할 뿐 아니라 광복진선 중 원동에 있는 3단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는 작년에 남경에서 함께 떠나서 장사까지 온 뒤에는 오늘까지 한솥의 밥을 먹고 지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오, 또 여러 가지 공공한 사업은 벌써부터 일치 합작하는 터인즉 한 지방에서 문호만 여럿을 벌여 놓을 필요가 없이 되었나이다.…〉45)
金九는 이론상 불합리한 광복진선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함으로써 피란정부를 이끌어 갈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을 자신의 주도로 조직하고자 한 것이었다.
세 시간 동안 金九의 숨 끊어지기 기다려
5월5일에 조선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 趙擎韓이 金九가 묵고 있는 西園北里를 찾아왔다. 金九는 조경한을 보고 말했다.
『숙제로 된 통합문제를 곧 완성하기 위하여 楠木廳(남목청)에서 하루 이틀 뒤에 3당 간부 몇 명이 모입시다. 그날 식사는 내 한턱 하리다』
金九는 10원을 조경한에게 주면서 그날 먹을 냉면값으로 써달라고 했다. 조경한은 돈 받기를 사양했으나, 金九가 강권하는 바람에 그대로 받아가지고 돌아가서 이청천 부인과 현익철 부인에게 그날의 식사준비를 부탁했다.46)
金九는 약속대로 5월7일 저녁에 조선혁명당 당사인 남목청을 찾아갔다. 이날 회의에는 한국국민당 대표로 金九와 조완구, 조선혁명당 대표로 이청천과 조경한과 현익철, 한국독립당 대표로 조소앙과 홍진이 참석하고 옵서버로 유동열, 이복원, 임의택이 참석했다. 회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조금 있다가 음식이 들어오고 술잔이 오고갔다. 조경한과 함께 애주가로 소문난 유동열이 조경한에게 핀잔을 주었다.
『술꾼이 술맛도 보지 않고 이런 술을 사오게 했는가?』
유동열은 조경한과 막역한 사이였다. 조경한은 중국인 사환에게 새로 술을 사오게 했으나 그 술도 맛이 시원치 않아서 자신이 직접 술을 사러 갔다. 조경한이 술 대여섯 병을 사 들고 남목청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막 오를 때에 회의장 안에서 서너 발의 총소리가 났다. 연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청년 하나가 회의장에 뛰어들어 권총을 난사한 것이었다. 총소리를 듣고 아래층에 있던 청년들이 달려가서 범인을 잡으려 했으나 범인은 잽싸게 2층 계단을 뛰어넘어 도망쳤다.47) 저녁 6시20분쯤이었다.48)
첫 발에 金九가 맞고, 두 번째로 현익철이, 세 번째로 유동열이, 네 번째로 이청천이 맞았다. 왼쪽 가슴에 총을 맞은 金九는 의식을 잃었다. 현익철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기자마자 절명했다. 유동열은 허리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고, 이청천은 손에 찰과상을 입었다.49) 이청천, 유동열, 현익철은 모두 조선혁명당의 간부이자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상무위원들이었다. 현익철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중 한국인 만주국 군관 洪아무개 중좌의 주선으로 한국독립운동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로 약속하고 가출옥하여 관동군으로부터 첩보비를 받고 남경에 왔었는데, 마음을 바꾸어 민족혁명당에 참가했고, 이청천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여 조선혁명당 결성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50)
金九와 유동열은 급히 가까이에 있는 湘雅醫院으로 옮겨졌다. 상아의원은 장사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는 병원이었다. 경상을 입은 이청천은 자기 집으로 가서 치료했다.
金九를 진단한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 金九는 입원수속도 하지 않고 문간에서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세 시간이 넘도록 金九의 숨이 붙어 있자 의사는 네 시간 동안까지만 생명이 연장되면 살 방도가 있을 것 같다고 하다가, 마침내 우등병실로 옮기고 치료를 시작했다.
가망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주위에서는 홍콩에 가 있던 안공근과 金仁에게 〈피살당했다〉는 전보를 쳤다. 안공근은 중경에 갔던 자기 가족과 廣西로 이주시킨 중형 安定根의 가족을 홍콩으로 옮기기 위해 그곳에 가 있었고, 김인은 상해로 공작을 가는 길에 그곳에 가 있었다. 두 사람은 며칠 뒤에 金九의 장례식에 참석할 요량으로 장사로 돌아왔다.51)
金九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집이 아니라 병원이었다. 그리고 몸이 몹시 불편했다.
『내가 어디를 왔느냐?』
남목청에서 술을 마시다가 졸도하여 입원했다고 했다. 의사가 자주 와서 가슴을 진찰했다. 金九는 가슴에 상흔이 있는 듯하여 의사에게 물었다.
『어찌된 까닭입니까?』
『졸도하실 때에 상 모서리에 엎어지셔서 약간 다치신 것 같습니다』
金九는 그 말을 곧이듣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金九가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것은 거의 달포나 지나서였다. 엄항섭이 진상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52)
朝鮮革命黨에서 제명된 李雲煥의 犯行
회의장에 뛰어들어 총을 난사한 범인은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이었다가 두 달 전에 당에서 제명된 李雲煥(일명 李雲漢)이었다. 이운환은 평북 의주군 출신으로서, 서른한 살이었다.53) 그는 남경에 있을 때에 상해로 특무공작을 하러 가겠다면서 金九에게서 자금을 얻어가기도 했었다.54) 이운환은 성격이 우직하여 사물에 대해 판별력이 부족하고, 오직 용협이 남달라서 모험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사건이 있기 전부터 이운환이 3당의 주요인물을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혁명당은 이운환을 제적하고 1년 동안 근신하도록 했는데, 이운환은 조선혁명당의 그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사건을 저질렀다고 했다.55)
그러나 이운환의 범행동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金九 자신은 이운환이 병인의용대원 姜昌濟와 朴昌世의 꼬임에 빠져서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했다. 金九는 이전부터 李裕弼의 지휘로 조직된 병인의용대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들이 일본 밀정을 총살하거나 직접 따르기도 하고, 금전을 가진 동포를 위협하여 강탈하기도 하여 동포들 사이에서 신용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반혁명자로 규정하기도 어려운 〈일종의 革命亂類〉라고 규정했다. 범행이 있기 얼마 전에 강창제가 金九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상해에서 박창세가 장사로 올 마음이 있으나 여비가 없어서 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비를 좀 보조해 주십시오』
金九는 상해기관에 말해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金九는 박창세의 맏아들 朴濟道가 일본영사관의 밀정이 된 것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박창세가 그 아들 집에 살고 있는 데에 특별히 주목하고 있었다. 그 얼마 뒤에 여비가 없어서 오지 못한다던 박창세가 장사에 나타나서 金九도 그를 한번 만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金九는 이운환이 〈강창제와 박창세의 악선전에 이용된 나머지 정치적 감정에 충동되어 남목청 사건의 주범이 된 것이었다〉 라고 술회했다. 金九는 그 근거로, 중국경비사령부의 조사에 따르면 박창세가 장사에 도착한 직후에 상해로부터 박창세에게 200원이 비밀리에 지원되었으나 이운환은 체포 당시에 돈을 18전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고, 범행을 저지른 뒤에 권총으로 최덕신을 위협하여 10원을 빼앗아 장사를 탈출한 사실을 들었다.56) 그러나 金九의 이러한 추측도 석연하지 않다.
日警은 金九가 朝鮮革命黨 그룹을 차별대우했기 때문이라고
한편 일본경찰의 정보문서는 이 사건이 金九의 조선혁명당 인사들에 대한 차별대우에 따른 알력에서 기인한 사건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한 이청천·강창제·박창세 등 열 몇 명에 대하여 金九가 처음에 절대로 차별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합동의 이름 아래 이들을 자기 휘하로 끌어들여 놓고는 그 뒤에 조선혁명당 그룹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차별대우를 했다는 것이었다.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지원되는 자금의 분배도 金九파의 당원과 가족에게는 매달 어른은 1인당 10원, 아이는 5원씩 지급하고 이청천파의 당원과 가족에게는 어른은 7원, 아이는 그 반액을 지급했다고 한다. 한달 전쯤부터 金九가 반대분자 이운환을 암살하려고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조선혁명당 일부는 극도로 분개했고, 강창제·박창세·이운환 등은 金九를 공공연히 공격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이청천·현익철·유동열 등 조선혁명당 간부들은 金九와 연합하여 그의 신뢰를 두터이 할 양으로 위의 세 사람을 당에서 제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명된 세 사람은 은밀히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에 이청천·현익철 등이 金九로부터 다액의 활동자금을 받고 그 사례로 金九초대연을 열었고, 金九 등 간부들이 모이자 이운환이 박창세로부터 빌린 권총을 휴대하고 잠입하여 金九 등을 저격했다는 것이었다.57) 그러나 金九와 대립관계에 있던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간부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金九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박창세와 강창제의 사주에 따라 이운환이 金九 등을 저격한 것은 겉으로는 거두들의 지위쟁탈에 기인하는 것 같아 보이나, 상해사변 중에 박창세가 자주 霞飛路를 태연히 걸어다니고 또 자기 집에도 잠복해 있는 점으로 보아 사전에 일본관헌과 金九를 죽이기로 한 묵계가 있어서 이번 기회에 부하 이운환을 시켜 결행한 것으로 짐작된다』58)
蔣介石은 치료비 3,000원 보내 위문
남목청의 저격사건으로 장사 시내는 발칵 뒤집혔다.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 경비사령부는 장사 일대에 임시계엄을 펴고, 보안대와 헌병대와 경찰이 총출동하여 장사를 출발하여 武昌으로 가던 기차를 장사로 되돌려 범인을 수색했다. 임시정부는 내무장 조완구의 책임 아래 위원회를 조직하고 호남성 당국과 협력하여 이운환과 그 공모 혐의자 姜昌濟, 朴昌世, 李昌基, 申基彦, 韓聖道, 宋旭東 등을 체포하여 중국당국에 넘겼다. 또한 범죄의 증거조사와 함께 부상자 구호 및 사망자의 장사에 힘을 기울였다. 임시정부 주동으로 현익철의 장례를 치르고 유해는 岳麓山(악록산)에 묻었다.59)
金九가 저격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정부는 특별한 배려를 해주었다. 陳果夫가 金九의 저격사실을 蔣介石에게 보고하자, 漢口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장개석은 곧바로 장치중에게 金九를 잘 보살피라는 전보를 쳤고, 장치중은 金九가 입원 중인 상아의원을 방문하여 위문하고, 병원에는 치료비는 얼마가 들든지 성 정부에서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金九가 퇴원한 뒤에 장개석은 羅霞天을 시켜 치료비 3,000원을 가지고 장사에 와서 위문하게 했다.60)
도주한 이운환은 장사의 중국기관에 근무하는 崔德新을 찾아가서 권총으로 협박하여 10원을 받아가지고 장사를 탈출하려다가 사건발생 6일 만에 장사에서 수십 리 떨어진 시골 기차역에서 중국 군경에게 체포되었다.61)
중국 법정은 이운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수감했으나, 공범으로 체포된 혐의자들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했다.62) 수감되었던 이운환도 장사가 위급해지고 장사에 있는 중국기관이 모두 중경으로 후퇴하는 틈을 타서 탈옥했다. 이 때문에 사건의 정확한 배후와 동기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뒷날 金九는 중경에서 당시 중국군에 복무하던 歐陽群[朴基星의 중국 이름]으로부터 귀주 방면에서 걸인행색으로 도망가는 이운환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63)
현익철의 사망과 유동열의 부상으로 임시정부는 7월1일에 두 사람을 대신하여 羅泰燮과 黃學秀를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했다.64)
『韓人에게 총 맞고 산 것은 日人의 총에 죽은 것만 못해』
金九는 상아의원에서 한 달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퇴원하는 길로 金九는 걸어서 곽낙원 여사를 찾아갔다. 그녀에게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가 金九가 퇴원할 무렵이 되어서야 金信이 사실대로 말했다. 곽낙원 여사는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자네 목숨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邪不犯正[사불범정: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함]이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이것이 죽었다 살아난 아들에게 한 말의 전부였다. 그리고는 손수 음식을 만들어 아들에게 권했다.65)
金九는 퇴원하고 나서 얼마 동안 엄항섭의 집에서 요양했다. 하루는 갑자기 신기가 불편하고 구역이 나고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다시 상아의원을 찾아갔다. X레이 촬영을 해보니까 심장 옆에 박혀 있던 탄환이 위치가 바뀌어 오른쪽 갈비뼈 옆으로 옮겨가 있었다. 진찰한 외과 주임이 말했다.
『심장 옆에 박혔던 탄환이 대혈관을 통하여 오른쪽 갈비뼈 있는 데로 옮겨갔습니다. 불편하시면 수술도 쉬우나 그대로 두어도 생명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것은 탄환이 대혈관을 압박하기 때문인데, 소혈관들이 확대되면서 괜찮아질 것입니다』66)
國務委員들과 金九가 在美同胞들에게 事件 알려
金九를 제외한 국무위원 여섯 사람은 6월15일에 연서로 재미동포들에게 남목청 사건의 경과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주목되는 것은 불상사가 일본인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겠기에 중국신문에도 일절 보도를 하지 못하게 했다면서 미주에서도 내외국 신문에 발표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고 있는 점이다.67)
金九도 6월20일에 재미동포들에게 남목청 사건의 경과와 자신의 심정을 밝히는 긴 편지를 썼다.
〈그동안 병원에 몸져누워 생사를 천명에 맡기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던 제가 달포 만에 퇴원하야 여러 동지께 소회를 사뢰고저 하오니 무슨 말씀을 먼저 시작해야 될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나이다. 지금 형편으로 보면 비록 건강이 쾌복은 되었지만 원래 중상을 당하였던 관계로 아직 어떠한 운동이든지 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어서, 여러분과 서신을 왕래하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남의 손을 빌어서 저의 심중을 고하게 되나이다. 제가 비록 단문이오나 여러분의 애호하시던 성의의 만일이라도 보답하려는 미충으로써 종래의 일체 서신은 반드시 자필로 쓰던 것이온대 이번에는 할 수 없이 서명만 자필로 쓰오니 넓게 용서하시기 바라나이다. 그러나 미구에 내 손으로 붓을 잡게 되면 내 상머리에 산같이 쌓인 동지 여러분의 혜찰을 일일이 친필로써 봉답하겠나이다.…〉
在美同胞들의 편지가 상머리에 쌓여
이처럼 金九는 이무렵 재미동포들이 보낸 편지가 상머리에 쌓일 만큼 그들과 빈번히 편지교환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金九는 이어 남목청 사건의 경과를 간단히 설명하고 나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동지여러분은 이 흉보를 접하실 때에 국사를 위하야 놀라시며 저를 위하야 걱정하실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옛말에도 다난흥방(多難興邦)이라 하였으니 우리가 풍파를 겪을수록 우리의 사업은 더욱 공고하게 진전될 것입니다. 이러한 실례는 지금 중국의 항일운동에서도 목도하는 바이지만, 과연 원동의 우리 사회는 이번의 변을 치른 뒤에 더욱 굳게 단결되며 어느 동지든지 일호도 회심치 아니하고 더욱 건전히 분투하나이다. 지어 저 개인하야는 애국운동을 시작하던 그날부터 구구한 일신의 생명은 심중에 두지 아니하였던 것이니, 어느 날에든지 이러한 죽음이 있을 것을 미리부터 각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분한 것도 없고 낙심되는 것도 없습니다. 저는 오직 최후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야 앞으로 더욱 분투노력하고저 하는 것뿐입니다. 이 결심은 이번에 처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십 년 전에 인천감옥을 탈주한 사형수 김창수 시절부터 벌써 한 것입니다. 이만한 것을 평소부터 알아 주시는 동지여러분께서는 저를 위하야 큰 걱정은 아니하시리라고 믿는 바이지만, 더구나 지금은 퇴원까지 하였사오니 크게 안심하실 줄 생각하나이다.…〉
『왜놈의 개질하는 놈도 나를 해치지 못해』
이어 金九는 자신이 저격을 당하게 된 이유는 평소에 동포를 너무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저는 일생에 충과 의를 지키기에 힘을 써 왔으며 또 성질이 소탈하므로 심중이 항상 담백하야 두려울 것이 없었읍니다. 그러므로 내외국동지들이 저의 일신의 보호를 위하야 염려할 때에는 언제나 일소에 붙이고 어디든지 단신으로 다니던 것입니다. 더구나 제가 사십 년 전에 인천서 탈옥한 사실은 거의 무인부지로되 왜놈만은 제가 상해로 나온 뒤에야 이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또 연전에 제가 상해에 있을 때에는 왜 영사관의 사촉을 받아가지고 저를 죽이려고 권총을 휴대하고 암암리에 저를 따라다니던 박모가 급기 저를 맞대해서는 도리어 사실을 고백하고 청죄를 한 일까지 있었던 고로, 우직한 저의 생각에는 단군 한배의 피를 가진 놈이면 왜적의 개질을 하는 놈이라도 나를 해하지 못하리라고 믿었습니다. 제가 이러한 자신을 너무 강하게 가졌던 까닭에 이번에 변을 당한 것이라고 비평할 사람이 없지도 아니할 듯하나, 그렇다고 해서 저는 과거의 신념을 착오라고 뉘우치지도 아니하며 더구나 앞으로 그것을 고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러한 말에서 우리는 金九의 동족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신뢰감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金九는 마지막으로 앞으로 통일운동의 방향에 대한 자신의 각오를 다짐하면서 재미동포들의 협력을 거듭 요청했다.
〈저는 가신 동지를 위로하기 위하야, 광복대업을 완성하기 위하야, 먼저 원동의 삼당 통일을 실현하기에 배전 노력하겠고, 이것을 완성한 뒤에는 첫째 광복진선의 통일, 둘째 해외 한인 전체의 통일, 셋째 한걸음 더 나가서 전 민족적 대동단결을 완성하기에 잔명을 바치려 하오니, 저를 애호하시고 이해하시는 동지 여러분께서도 각각 그 지방에서 통일을 완성하시고, 그 다음에 전 민족적 대동단결을 실현하야 천재일시의 좋은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도록 힘쓰시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68)
이 편지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상무부 총무 최진하 앞으로 발송된 것인데, 편지내용은 「新韓民報」에 공개되었다. 「신한민보」는 사건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이운환에 대해서 〈만일 리모가 적의 주구로 이런 일을 감행하였으면 이는 천참만륙하여도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요, 만일 광복운동자로 주장이 서로 달라서 이런 불상사를 일으켰다 하더라도 광명정대한 정치적 우정을 버리고 비열하고 음흉한 암살의 수단을 취하는 것은 혁명당의 기율상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69)
(3) 韓人基督敎會를 새로 建築
3년 남짓 동안 떠나 있던 李承晩이 1935년 1월24일에 하와이로 돌아옴으로써 그동안 침체해 있던 대한인동지회와 부인구제회 등 李承晩 지지자들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李承晩 내외는 한인기독학원의 기숙사에 거처를 잡고, 李承晩은 교장직을 맡고 프란체스카는 사감직을 맡아서 김노디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3월20일에 호놀룰루 선교기념관에서 열린 동지회 주최의 특별강연회에는 300여 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李承晩은 유럽을 여행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청년의 장래 문제에 대해 영어로 긴 연설을 했다.70)
목수일과 석공일하면서 基督學院 운영
그러나 李承晩에 대한 하와이 동포사회의 신망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국권회복을 기대하면서 李承晩의 외교활동을 지원했는데도 아무런 가시적 성과가 없는데다, 특히 동지식산회사 사업의 실패와 그에 따른 막대한 소송비용의 낭비 등이 큰 원인이었다. 게다가 이미 동포인구의 절반이 훨씬 넘은 2세들은 거의가 한국어나 한국문화 또는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관심보다도 미국시민으로 교육받고 미국시민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李承晩 내외는 학생들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학원 일에 열성을 쏟았다. 이 무렵에 李承晩이 학생들을 보살피는 데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는가를 말해 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은 방과 후에는 기숙사나 학교 밖으로 나가서 일을 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백인집에 가서 가정부 일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릴리하 스트리트 끝에 있는 백인집에 가정부로 일하러 다니는 한 4학년 반 여학생이 어느 날 오후 늦게 일을 마치고 학원으로 돌아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소녀는 가까스로 버스정류장까지 가서 폭풍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나 사납고 버스도 오지 않아서 캄캄한 정류장에서 겁에 질린 채 오도 가도 못 하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 그때에 멀리서부터 李承晩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나타났다. 소녀는 이때에 李承晩의 목소리가 〈천사의 부름〉으로 들렸다고 한다. 李承晩은 저녁 식사를 할 때에 그 학생이 보이지 않자 여기저기로 연락하여 그녀의 행방을 알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폭풍우를 무릅쓰고 6.5km나 되는 버스길을 따라 소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 나선 것이었다. 뒷날 이 여성은 이 무렵의 李承晩은 학생들을 아주 따뜻하고 세심하게 돌보아 주었다고 회상했다.71) 한인기독학원은 1939년 현재 기숙사에 들어 있는 학생수가 남학생 20명, 여학생 17명이었고, 시내에서 통학하는 학생들도 있었다.72)
李承晩은 수업시간이 끝난 뒤에는 직접 목수가 되고 석공이 되어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를 중수했다. 그리고 돌과 시멘트로 정원에 도로 공사도 새로 했다. 그리하여 1939년부터는 9반과정을 복설하게 되었다.73)
梁裕燦에게 敎會建築基金委員長 맡겨
李承晩이 하와이에 돌아와서 가장 힘들여 추진한 사업은 한인기독교회를 새로 건축하는 일이었다. 하와이 동포사회의 분열의 여파로 두 파로 갈라진 한인기독교회는 3년이 넘도록 담임 목회자도 없이 지내왔다. 예배는 교회부설의 신흥국어학교에서 보고 있었다. 그동안은 감리교회에서 퇴직한 김이재 목사를 비롯하여 여러 평신도 지도자들이 예배를 인도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36년 6월에 한국에서 김혁식(Herbert S. Kim) 목사가 부인과 세 자녀들과 함께 부임해 간 뒤로 웬만큼 정돈이 되고 있었다.
尹致昊가 운영하는 개성의 송도 韓英書院(Anglo-Korean Academy)을 1911년에 졸업한 김혁식은 1922년에 고베(神戶)의 간사이 가쿠인(關西學院) 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서 1925년에 켄터키 웨슬리언 대학(Kentucky Wesleyan College)에서 학사, 테네시주의 스카리트 대학(Scarritt College for Christian Worker)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감리교회 목사로 사역하다가 하와이로 간 것이다. 김혁식이 하와이로 간 것은 한인기독교회의 초대 목사였던 閔燦鎬와 하와이 한인감리교회 목사의 주선에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왜나하면 李承晩이 장기간 하와이를 떠나 있는 동안 한인기독교회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목회자들은 감리교 목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감리교회 목사들이 한인기독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등으로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목회자도 소개했다.74)
李承晩은 1931년 11월에 미국 본토로 떠나기에 앞서 자신을 포함하여 정인수(회장), 최백렬(서기), 김윤배(재무) 등으로 예배당건축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다가 김혁식 목사가 부임한 뒤에 교회대지 재판문제도 원만히 해결됨에 따라 안현경·이원순·김노디·김영기·김학성 등이 위원으로 선정되어 건축기금 모금운동을 다시 벌이게 되었다.
李承晩은 1935년 가을에 한인기독교회의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건축기금위원회(building fund commitee)를 조직하고, 유망한 청년지도자 梁裕燦을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그리고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할 때에 그랬듯이 백인 유지를 위원회에 끌어들이기로 하고, 호놀룰루 중앙연합교회(Central Union Church)의 부목사 던스턴(J. Leslie Dunstan)을 건축기금위원으로 위촉하고, 하와이 사회에 잘 알려진 재력가 리빙스턴(Chester Livingston)을 김윤배와 함께 건축기금의 공동이사로 위촉했다.75) 그때까지 동포들로부터는 교회신축기금으로 모두 3,700달러가 모금되어 있었다.76) 백인사회에 기부금을 모금한 결과 1936년 1월까지 저술가이자 사회활동가인 웨스터벨트(William D. Westervelt)가 5,000달러, 트러스트(Juliette H. Atherton Trust)가 1,000달러, 호놀룰루의 재벌 캐슬(George P. Castle)의 부인이 1,500달러, 카우아이 섬의 사탕수수 농장주 윌콕스(George N. Wilcox)의 딸 엘시 윌콕스(Elsie N. Wilcox)가 100달러를 기부했다.77) 이러한 백인들의 기부금은 동포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 2월12일에는 릴리하 스트리트(Liliha Street)에 1.5에이커[60.7km2 1,800평]의 대지를 1만2,750달러에 구입할 수 있었다.
靑年들 예배시간에 英語로 說敎
이때부터 호놀룰루의 영자신문 종교란의 한인기독교회에 관한 보도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교회 내분과 관련된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던 것이 예배시간, 설교자의 이름, 청소년들의 활동상황 등을 알림으로써 안정되어 가는 교회 상황을 하와이 사회에 알리게 된 것이었다. 李承晩이 설교한다는 예고기사도 실렸다. 이무렵부터 한인기독교회의 주일예배는 오전 10시30분에 영어로 진행되는 청년들 위주의 예배와 오전 11시15분에 일반 장년들을 위한 한국어 예배가 따로 열렸는데, 영어 예배 시간에는 李承晩이 설교를 했고, 한국어 예배 시간에는 김혁식 목사가 설교를 했다. 그리고 대부분 노인들이 참석하는 저녁 예배 시간에는 李承晩이 한국어로 설교를 했다.
청년들은 또 주일마다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What I, as a Christian endeavouer, shoul do?)」, 「삶을 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What makes life worthwhile?)」 등의 주제를 놓고 토론회를 열었다.78) 그것은 李承晩이 배재학당 시절의 협성회 토론회를 생각하면서 청년들에게 권장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교회부설 신흥국어학교도 계속해서 잘 운영되고 있어서 1937년 6월에는 10명이 졸업했다.
그러나 그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거의 다 가도록 예배당 신축 공사는 착공도 하지 못했다. 李承晩은 각 섬을 순회하면서 동지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한인교회 신축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79) 동지회도 모든 사업을 제쳐 두고 기독교회 건축을 위한 모금운동에 전력했다. 교인들의 헌신도 눈물겨웠다. 육칠십 된 노부인들은 떡장사와 묵장사를 하여 푼푼이 기금을 모아들였고, 중년부인들은 부대에서 연극을 하고, 청년 남녀들은 음악회로 모금운동을 벌였다. 심지어 어린 학생들까지 나서서 아이스크림, 소다수, 피넛 등을 팔아서 예배당 건축비로 내어 놓았다.80) 또 놀려 두고 있는 대지에 잡초가 무성히 자라자 1937년 6월에는 여러 날에 걸쳐 교인들이 가서 잡초를 뽑았다.
光化門 본떠 敎會堂 설계
마침내 1937년 10월3일에 「시티 밀(City Mill)」 회사가 새 교회당 건축을 시작했다. 기공식을 10월3일에 거행한 것은 개천절에 맞춘 것이다.
이때에 건축된 한인기독교회의 외형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본떠서 설계한 것이다. 설계한 사람은 한인중앙학원의 첫 졸업생인 한국인 최초의 건축사이며 토목기사 김찬재였다. 그는 형님 김이재를 따라 1903년의 이민 첫 배로 하와이에 이민 왔는데, 그때에 그는 여덟 살이었다. 그러므로 김찬재는 광화문에 대한 기억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광화문의 사진을 보고 교회당 외형을 설계했다.81) 광화문은 조선왕조의 왕실과 국가의 권위의 상징적 건물이었다. 그러한 광화문 모습으로 교회당을 짓는 구상을 누가 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李承晩의 구상이었다고 전해진다. 李承晩은 어려서부터 광화문을 보면서 자랐고,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운동 때에는 광화문 앞에서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李承晩이 1910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판한 정치평론집 「독립정신」에도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광화문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다. 그러한 李承晩이었으므로 1927년에 일본인들이 경복궁의 여러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에 동쪽의 건춘문 쪽으로 옮겨진 광화문만큼 한국의 주권을 상징하는 건물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건축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교회에서는 다시 이종관을 각 섬들을 순방하면서 교회건축 상황을 설명하고 추가 성금을 독려하게 했다.82) 웨스터벨트는 1938년 들어 또다시 1,000달러를 희사하여 교인들을 감동시켰다.83)
반 년 동안의 공사 끝에 1938년 4월24일 오후 3시에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처음에는 예수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던 4월10일 주일에 맞추어 헌당식을 거행할 예정이었으나,84) 준비부족으로 부활절 주일로 맞춘 것이다. 헌당식에는 아이들까지 합하여 1,500명의 인파가 모였다.85)
敎會堂 신축비용은 4만 822달러 들어
이날의 주인공은 말할 나위도 없이 「선교부장」 李承晩이었다. 「호항한인기독교회 례배당봉헌식 기념」 책자에는 李承晩의 사진과 함께 영문과 국문으로 다음과 같은 「봉정(Dedication)」이 실렸다.
〈우리의 경애하는 리승만 박사께 이 작은 책을 드리나이다.
선생은 우리 전 민족의 인도자이시요,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창설자이시다. 그의 개척정신은 우리들로 하여금 아름답고 고귀한 사업을 할 수 있게 하며, 그의 지도적 감화는 하와이 남녀 청년들의 앞길에 광명을 비춰 준다.〉86)
그리고 목사실에는 李承晩의 사진이 걸렸다. 이 사진 거는 비용은 소년회가 부담했다.
봉헌식의 개회기도는 초대 담임목사였다가 교회를 떠나 있는 민찬호 목사가 했고, 마무리 기도는 상해에서 李承晩의 비밀통신원 역할을 했다가 하와이에 와서 한인기독교회의 지교회인 힐로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장붕 목사가 했다. 설교는 중앙연합교회 목사 레빗(Horace H. Leavitt) 목사가 했고, 李承晩은 봉헌식의 의의를 설명하는 강연을 했다. 양유찬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재정보고를 했다.
이날 배포된 「봉헌식 기념」 책자에는 한인기독교회의 존재 의의와 현황을 다음과 같이 자부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먼저 한인기독교회의 민족교회로서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세계 각 인종이 섞여 사는 이 시대에 우리도 남과 같이 살려면 남들이 하는 일을 해야 될 것인데, 남들이 하는 일을 보면 보통 중요히 여기는 몇 가지 사업 중에 종교사업이 한 가지다. 모든 민족이 각각 저의 믿는 바 종교를 숭상하야 저의 신앙적 복락과 덕의상 발전을 구하나니, 이것이 다 까닭없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우리 한인은 정치상이나 경제상이나 덕의상이나 여지없이 타락된 중에서 생맥이 나게 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를 내어 놓고 어디서 구하리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회를 세운 목적이 다만 우리 장래 영생의 복을 얻는 것으로만 방한한 것이 아니다.
남들은 각각 저의 일을 다하야 저의 사는 세상을 거의 천국같이 만들어 놓아 자유행복을 누리며, 따라서 다른 인종을 구원하고 선교사업까지 힘쓰는데, 우리는 이 처지에서 이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생명길로 아는 종교사업을 남에게 의뢰하야 남이 잘해 주면 고맙다 하고 잘못해 주면 원망이나 하며 가만히 앉았으리오.…〉
『우리의 생명길을 남에게 맡길 수 없어』
〈우리의 생명길〉인 종교사업을 외국인들에게 의존할 수 없어서 한인기독교회를 창시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한인기독교회의 재산과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러므로 하와이의 영성 소수인 가난한 남녀 교우들의 신심과 성심으로 모든 반대와 비평과 장애를 불계하며 여러번 풍파를 치르고 여전히 쌓아 놓은 결과로, 호놀룰루에 대지와 건물이 수만여 원 가격에 달하며 수만원 경비로 회당을 건축하며, 힐로와 와히아와에 각각 대지와 회당이 성립되어 물질로도 우리의 소유가 적지 않게 되었고, 또한 본국에 선교구역을 정하야 기독교회의 정신을 선전한 지 십 년이 된지라. 그러므로 이왕에 의심하며 반대하던 백인친구들도 지금은 성심껏 도우며 두호하나니, 이 어찌 우연히 됨이리오.…〉
그러면서 한인기독교회의 교세를 숫자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1918년 12월23일에 설립된 이래로 현재는 호놀룰루의 본 교회를 비롯하여 와히아와, 힐로, 파이아 및 미주 로스앤젤레스까지 분교회가 설립되어 있는데, 이 다섯 교회의 세례교우가 1,263명이고, 유년주일학생이 573명이며, 면려청년회원이 145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호놀룰루 본교회에서는 1년 전부터 청년영어예배까지 보게 되었는데, 평균 출석이 100여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끝으로 한인기독학원까지도 이 교회 교우들의 힘으로 발전하고 있다면서, 하와이의 동포들도 죄악의 멍에를 벗고 천국백성이 되도록 힘쓰라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부인보조회, 국어학교, 여자소년군 등 각 기관이 이 교회에 직속하여 있을 뿐 아니라 멀리 본국에 있는 장로교 구역 하나를 담당하야 과거 십 년 동안을 후원하였고, 갈리히 산곡에 위치한 기독학원도 이 교회 교우들의 성력으로 발전하고 있는 터이다. 하와이 각 지방 형제자매들은 끝까지 더욱 더 성심성의로 남과 같이 잘 살기를 도모하는 동시에 죄악의 멍에를 벗고 천국백성이 되도록 힘쓰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87)
이러한 한인기독교회의 교세와 그것을 대표하는 새 예배당의 건축은 李承晩이 고독한 1930년대에 이룩한 가장 큰 성취였다.
美國人 저명인사들의 2世同胞 졸업축하 연설
李承晩은 반대파들의 자신에 대한 비판을 무시한 채 동포 2세들의 성장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인기독교회의 새 예배당 헌당식이 있고 한 달 뒤인 5월28일 저녁에는 동지회·독립단·기독학생회·기독교·감독교의 연합주최로 이 해의 대학 및 중학 졸업생을 위한 만찬회가 맥켄리 중학교에서 열렸는데, 李承晩은 이 자리에 참석하여 그 특유의 능란한 행동으로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1938년에는 동포자녀들 가운데에서 하와이 대학 졸업생 12명을 비롯하여 323명의 각급 학교 졸업생을 배출했다. 하와이 대학 졸업생이 12명이나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적으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2세들도 있었다. 호놀룰루 상업회의소와 우체국과 하와이 비행회사가 공동 주최로 하와이 각 예비중학생과 중학생들을 상대로 실시한 작문 경시에서는 한인 남녀 학생이 1, 2등을 차지했다.
300명가량이 모인 이날 저녁 만찬회는 양유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학생대표들의 연설과 노래 등의 순서가 있고 난 다음 양유찬은 하와이 대학 학장 클로포드에게 연설을 청했다. 클로포드는 「세계가 학식 발달로 경쟁하므로 한인 학생들도 학술을 연마하고 각국인과 동화하며 각국인 중에서 고상한 문화를 취택하라」고 말했다. 요컨대 훌륭한 미국시민으로서 전문지식을 함양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서 양유찬은 李承晩의 경력을 길게 소개하고 나서 그에게 연설을 청했다. 李承晩은 연설을 시작하다 말고, 지난 5월22일의 韓_美 수호조약 기념일에 슬라덴 박사가 라디오 방송 연설을 하는 것을 재미있게 들었다면서, 자신의 남은 연설시간을 슬라덴 박사에게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슬라덴은 호눌룰루 석간신문의 정치주필이었다. 슬라덴은 활발하게 일어나서 학생들에게 「나는 클로포드 박사의 말에 반대한다. 한인학생들은 미국시민이기는 하나 한국의 역사와 한국말을 뇌수에 기억하라. 역사와 언어는 영혼이다. 사람이 영혼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다」 하고 역설했다. 李承晩은 슬라덴의 이런 말을 유도하기 위하여 그에게 발언기회를 주었던 것 같다. 李承晩은 다시 일어나서 두 사람의 연설요지를 설명하고 나서, 클로포드 학장에게 하와이 대학에 한인교수를 초빙하여 한국의 역사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라고 권고했다.88)
臨時政府와 同志會 일에 관여하지 않아
한인기독교회 신축사업에 몰두하는 동안 李承晩은 임시정부와 동지회의 활동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李承晩은 이때의 자신의 그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1935년에 구미를 달하여 호놀룰루로 온 후로 교회나 사회의 내막을 완화주의로 교정하기를 바라고 1년 반을 두고 힘써 오다가, 필경 또 싸우지 않고는 되지 못할 것을 간파하고, 그때부터 사회나 교회 간에 도무지 간섭을 끊고 상관않기를 결심하여 글과 말로 여러 번 선언하였으나, 40여 년 적공하여 오던 우리 민족운동을 어찌 졸지에 거절하고 말고자 함이었으리오. 다만 여러 번 풍파를 지낸 결과로 새로이 깨달은 바, 내가 혼자 인도자 책임을 가지고 동포의 재정을 모손(耗損)하며 독립은 회복하지 못하고 보니 자연 내게 대한 악감이 심해서, 내 신분에만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의 하고자 하는 일을 해갈 수 없을 만치 되고 보니, 차라리 내가 물러앉아서 다른 이들이 해도 될 기회도 있고 재정도 거두어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가하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한 것이니, 독립은 못할지언정 동족 간에 싸우지는 말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얻게 된 까닭이다….〉89)
그리하여 中_日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도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鎭江에 있던 임시정부는 1936년 7월6일의 국무회의에서 2년 전에 駐美外務行署를 설치하면서 외무위원으로 임명했던 李承晩을 〈사정에 인하여 그 직을 해임〉하기로 결의했다.90) 그리고 넉 달 뒤인 11월3일에는 하와이 군도에 宣諭委員(선유위원) 한 사람을 두기로 하고, 11월19일에 李承晩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카우아이 섬의 玄楯(현순) 목사를 선유위원으로 임명했다.91) 임시정부는 하와이의 재무행서 재무위원도 李承晩의 측근인 李元淳에서 文寅華로 바꾸었다.92)
李承晩과 임시정부의 관계가 호전되는 것은 金九가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면서부터였다. 金九를 주축으로 한 새 내각이 구성되자 동지회는 정무원 文仁會 명의로 임시정부 재무장 宋秉祚에게 동지회는 임시정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앞으로는 인구세를 적극적으로 수합하여 보내겠다고 통보했고, 한국국민당 기관지 「韓民」이 발행되자 동지회간부들은 축하문을 보냈다.93) 金九가 1937년 8월에 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면서 李承晩과 주고 받은 편지는 두 사람 사이의 신뢰관계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앞에서 본 대로, 金九는 중국에 있는 세 독립운동단체의 합동은 자기가 책임지고 추진하겠다면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한인단체들의 합동은 李承晩이 나서서 해 줄 것을 당부했던 것이다.
同志會와 國民會 하와이總會의 合同論議
中_日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임시정부에 대한 후원을 단합해서 추진할 필요성이 절감되면서 동지회와 국민회 하와이총회의 합동논의가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1937년 10월10일에는 두 단체 교섭위원회가 합동결의안까지 작성했다. 결의안의 골자는 두 단체는 각각 지방의원의 동의를 얻어서 두 단체의 사단법인 관허장을 취소하고 합동한다는 것이었다.94) 그러나 국민회 하와이총회가 법인 관허장 취소와 관련한 조항을 수정할 것을 제의하고 동지회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합동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한인단체의 합동문제에 대한 李承晩의 입장은 1938년의 3·1절 기념연설에 표명되어 있다.
『한인들이 합동을 부르는 이때에 내가 참여하면 합동이 못된 후에는 허물을 나에게로 돌릴 터인즉, 나는 한인들의 합동이 잘되어 대사업이 성공하기를 희망하는 것이외다. 그러나 합동이 되고라도 일은 아니하고 거저 붙잡고 앉았기만 하면, 나는 일 아니하는 백만동지를 못 얻을지라도 일하고자 하는 한두 사람이라도 붙들고 나가려 합니다』95)
合同運動은 실패로 끝나
이러한 주장은 합동문제에 대하여 李承晩이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때까지도 李承晩은 「國民報」의 주필이면서 국민회 쪽 교섭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金鉉九 등 국민회 간부들에 대한 괘씸한 생각을 좀처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합동문제는 협의가 계속되어 마침내 9월8일에는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루어졌다.
〈양 회의 법인 관허장은 그대로 두고 합동하되, 단체 이름은 합동된 단체가 정하고, 규칙을 수정하며, 임원을 공선하고, 회원의 권리와 의무를 꼭같이 한다. 앞으로 어느 단체의 법인 관허장을 취소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인관허장을 없앨 단체의 1938년도 임원의 동의아래 진행한다.〉96)
이러한 합동방안을 가지고 국민회 하와이총회와 동지회는 연합의회를 소집했다. 11월18일부터 시작된 연합의회는 그러나 이내 난관에 부딪혔다. 먼저 회의 참가자의 자격문제를 두고 의견이 대립된 데 이어 국민회와 동지회의 재산보고 문제와 그와 관련되어 제기된 합동 단체의 지도자 선임방식 문제를 놓고 대립이 첨예해졌다. 그것은 결국 새 단체의 주도권 다툼이었다. 국민회 하와이총회는 회비를 납부한 순수회원들만으로 선거할 것을 주장했고, 동지회는 회원과 비회원을 가리지 말고 중립적 인사들을 포함한 모든 하와이 한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대립은 국민회 하와이총회의 회원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국민회 하와이총회 쪽에서는 자신들의 회원수가 463명인 데 비하여 동지회 회원수는 80명에 불과하다고 보았다.97) 그러나 국민회 하와이총회의 이러한 주장은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동지회원 수는 300명가량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동지회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불리한 회원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지회는 합동논의를 시작한 때부터 하와이 한인사회단체의 대동단결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고,98) 그러한 노력은 연합의회의 제2차 회의 때부터 가와이 단합회와 대조선독립단의 대표참가를 권유하고 있는 것으로도 표명되었다. 그러므로 동지회가 투표자격을 모든 동포들에게 주자고 한 것은 하와이 한인사회의 합동이라는 대의명분에 입각한 일관된 주장이었다.99)
이렇게 하여 하와이 한인단체의 합동운동은 12월7일의 제13차 회의를 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歐美委員部를 다시 열어
동지회는 하와이 동포사회의 합동운동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李承晩의 외교활동 재개를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그것은 李承晩이 하와이에 온 뒤로 문을 닫고 있는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워싱턴을 떠나올 때에 스태거스(John W. Staggers) 변호사 소유의 콜럼비아 빌딩(Columbia Building) 312호의 구미위원부 사무실 집세 120달러를 지불하지 못하고 왔었는데, 이 돈을 1937년 10월21일에 몬태나 지방의 동지들이 보내와서 동지회 상무원 김광재 이름으로 스태거스에게 부쳤다. 11월6일부로 보내온 스태거스의 다음과 같은 편지는 동지회 인사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경애하는 김선생.
이 편지는 우편으로 부송하신 120달러 금액을 접수하여 한인위원부 사무실세를 전부 청장한 영수증입니다. 내가 선생에게 감사하는 동시에 권고하는 것은 트렁크들과 문건들을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박사께서 언제든지 쓰시기에 편리합니다.
이박사 부인께 문안하여 주십시오. 나 개인으로 선생께 부탁하는 것은 극동 정세는 한인들이 희망하고 기다리던 바 대로입니다.〉100)
한인기독교회 예배당 건축이 끝나자 구미위원부 사무실 운영 재개 문제가 동지회 사업으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오랫동안 동지회 중앙부장으로 동지회를 주관해 온 이원순은 자신이 설득하여 李承晩 내외를 워싱턴으로 보냈다고 적고 있다. 이원순은 동지회 간부들과 함께 李承晩이 워싱턴에 가서 조용히 독립운동에 관한 책을 집필하도록 하자고 합의하고, 李承晩을 찾아가서 동지회의 의견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글쎄 말이야. 그건 나도 원하는 바였어』
李承晩은 이렇게 말하면서 쾌히 승낙했다고 한다.101)
동지회 간부들 사이에서는 구미위원부가 임시의정원에 의하여 폐쇄령이 내려졌던 사실을 들어 임시정부와의 마찰을 염려하면서 구미위원부 문을 다시 여는 데 반대하는 의견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동지회 중앙부장 김이제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그러한 사실을 반증해 준다.
〈거듭 말씀코저함은 기왕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성임시정부 조직될 때에 외교 선전의 사명을 외양에 있는 우리에게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대통령이신 리승만 박사의 주선으로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여러 가지로 활동한 결과 우리 광복사업에 대한 많은 정치적 계획의 동정을 연학하여 놓았었다.…〉102)
김이재는 구미위원부가 상해임시정부에 의해서 설치된 것이 아니라 3·1운동 직후에 서울에서 선포된 漢城政府의 約法에 따라 임시대통령 李承晩이 설치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한성정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李承晩 자신은 워싱턴으로 가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렇게 침묵하고 앉은 이 사람의 속이 탈 동시에 여러 동포들의 관찰이 또한 나와 같아서, 필경은 참다 못하여 나에게 대한 원망과 질문이 들어와서, 리박사가 아니하면 누구더러 하라고 그저 앉았느냐 하는지라. 그런즉 이런 좋은 기회를 가지고 세계를 대하야 한마디 못 하고 앉아서 내게 돌아오는 원망과 죄책은 면할 수 없이 되나니, 내가 차라리 나의 힘대로 직책이나 행하며 시비를 듣는 것이 도리어 낫겠다는 각오를 가지게 된 고로 수차 공동회를 불러서 토의하게 된 결과가 나에게 책임을 지우기에 이르렀나니, 나는 이때부터 다시 결심하고 불시로 짐을 묶어서 미주로 건너갑니다.…〉103)
李承晩 내외는 1939년 3월30일에 호놀룰루항을 떠났다. 한인기독학원 일은 이원순의 부인 매리에게 맡겼다.104) 처음에는 3월31일에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를 탈 계획이었으나, 샌프란시스코와 인근의 선원들의 파업이 계속되고 있어서 하루를 앞당겨 시애틀로 가는 영국기선을 탄 것이었다.105)●
1) 王池豊, 「抗日戰爭の起點―蘆溝橋事變」, 井上淸·衛藤瀋吉編著, 「日中戰爭と日中關係」, 1988, 原書房, 55~75쪽 참조.
2) 日本國際政治學會編, 「太平洋戰爭への道(3) 日中戰爭(上)」, 1987, 朝日新聞社, 298~341쪽 참조. 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196쪽. 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196쪽 ; 「新韓民報」 1937년 8월26일자, 「임시정부공보(제62호)」. 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197쪽.
6) 內務省警報局, 「昭和12年(1937)ニ於ケル社會運動ノ狀況」,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1967, 原書房, 596쪽. 7) 朝鮮總督府警務局,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昭和13年(1938)」, 1966, 巖南堂書店, 270쪽. 8) 韓相禱는 조선총독부 경찰의 이 기술을 사실이었던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국제환경」, 2000, 한울, 244쪽). 9) 「支那事變勃發以後南京陷落?の中南支在住不逞鮮人の動靜」, 社會問題資料硏究會編, 「思想情勢視察報告集(5)」, 1977, 東洋文化社, 73쪽. 10)サンケイ新聞社, 「蔣介石秘錄(12)」, 1976, サンケイ出版, 33쪽. 11) 「思想情勢視察報告集(5)」, 74쪽. 1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200쪽;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5쪽. 1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7쪽. 1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5쪽. 15)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595쪽. 1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6쪽.
17) 「新韓民報」 1937년 8월19일자, 「시국문제를 협의코저 김위원장 입상」. 18) 「新韓民報」 1937년 9월9일자, 「원동풍운속에 열린 제4차 중앙집행위원회」. 19)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360쪽. 20)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598~599쪽. 21)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선언」, 姜萬吉編, 「趙素昻」, 1982, 한길사, 91~92쪽.
22) 「金九가 李承晩에게 보낸 1937년 8월2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六) 簡札1」, 1998, 延世大現代韓國學硏究所, 324~325쪽. 23) 尹炳奭, 「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趙素昻篇(4)」, 199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8쪽.
24) 「新韓民報」 1937년 10월7일자, 「임시정부포고문」. 25)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599쪽. 26) 「新韓民報」 1937년 10월14일자,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은 적극 진행」. 27) 「백범일지」, 360~361쪽. 28) 「新韓民報」 1937년 10월14일자,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은 적극 진행」.
29)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08쪽. 30) 「백범일지」, 368쪽; 趙擎韓 증언. 31) 「백범일지」, 374쪽. 32) 「백범일지」, 362쪽. 33) 「백범일지」, 362쪽. 3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임시의정원Ⅰ」, 302쪽; 趙擎韓,, 「白岡回顧錄」, 1979, 韓國宗敎協議會, 227쪽. 35) 趙擎韓, 앞의 책, 227~263쪽. 36) 「백범일지」, 362쪽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2쪽. 37)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제시의 일기」, 1999, 혜윰, 31쪽.
38) 「백범일지」, 368쪽. 39)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34쪽. 40) 「백범일지」, 368쪽. 41) 「백범일지」, 367쪽 ; 「國民報」 1938년 5월4일자, 「김구선생 대부인」. 42) 「國民報」 1938년 10월20일자, 「김구선생 대부인」. 43) 「國民報」 1938년 5월18일자, 「임시정부 상납금액」. 44) 「백범일지」, 367쪽.
45) 金九, 「여러분 선생께」(1938년 6월20일), 「白凡金九全集(4)」, 502~503쪽. 46) 趙擎韓, 앞의 책, 266쪽. 47) 같은 책, 266~267쪽. 48) 「新韓民報」1938년 7월14일자, 「김구선생의 편지」. 49) 「백범일지」, 369쪽; 「임시정부 국무위원 6인 보고서(백범총살 사실 기록)」(1938년 6월15일), 「白凡金九全集(4)」, 498쪽. 50)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899쪽. 51) 「백범일지」, 370쪽.
52) 「백범일지」, 368~369쪽. 53) 「思想情勢視察報告集(6)」, 86쪽. 54) 「백범일지」, 369쪽. 55) 「임시정부 국무위원 6인보고서(백범총살 사실 기록)」(1938년 6월15일), 「白凡金九全集(4)」, 499쪽; 趙擎韓, 앞의 책, 265~266쪽. 56) 「백범일지」, 369~370쪽.
57)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613쪽. 58) 위와 같음. 59)「임시정부 국무위원 6인보고서(백범총살사실 기록)」(1938년 6월15일), 「白凡金九全集(4)」, 498쪽 ; 지복영,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_항일 무장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 장군」, 1995, 문학과 지성사, 338쪽. ; 「백범일지」, 370~371쪽. 60) 「백범일지」, 371쪽 ; 蕭錚, 「中國國民黨과 金九」,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1983, 博英社, 155~156쪽. 61) 「여러분 선생께」(1938년 6월20일), 「白凡金九全集(4), 501쪽 ; 「백범일지」, 370쪽 ; 「金勝坤志士證言」, 「韓國獨立運動證言資料集, 1986, 韓國精神文化硏究院, 45쪽. 6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3쪽. 63) 「백범일지」, 370쪽. 6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08쪽. 65) 「백범일지」, 371쪽.
66) 「백범일지」, 371~372쪽. 67) 「임시정부 국무위원 6인보고서(백범총살 사실 기록)」(1938년 6월15일), 「白凡金九全集(4)」, 498~499쪽.
68) 「여러분 선생께」(1938년 6월20일), 「白凡金九全集(4)」, 500~503쪽. 69) 「新韓民報」 1938년 7월14일자, 「김구선생의 편지」. 70) 「新韓民報」1935년 4월11일자, 「하와이: 리박사 강연회」. 71) Yong-ho Ch’oe, “Syngman Rhee in Hawaii : His Activities in Early Years, 1912-1915”(Unpublished), pp.33~34. 72) 「太平洋週報」 1939년 4월1일호, 「기독학원 기숙하는 남녀학생」, 12쪽. 73) 「太平洋週報」 1938년 5월14일호, 「기독학원 확장」, 14~15쪽.
74) 이덕희,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사」(미간행), 「제5장 치유와 안정의 목회」. 75) 「예배당 건축연혁에 대하야」, 「호항한인기독교회 례배당봉헌식 기념」, 1938, 호항한인기독교회, 4쪽. 76) Y. C. Yang, “The building of the Korean Christian Church”, 「호항한인기독교회 례배당봉헌식 기념」, 2쪽. 77) 이덕희, 앞의 글. 78) Star Bulelin, February 8, 1936, June 19, 1937, 이덕희, 앞의 글. 79)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ith, Dodd Mead and Company, 1960, p166. 80) 김혁식, 「예배당 건축에 대하야」, 「太平洋週報」 1938년 1월22일호, 15쪽.
81) 이덕희, 앞의 글. 82) 김혁식, 「공고」, 「太平洋週報」 1938년 1월15일호, 15쪽. 83) 「太平洋週報」 1938년 2월12일호, 「왜스터벨트의 감사한 일」, 16쪽. 84) 김형식, 「호항한인기독교회소식」, 「太平洋週報」 1938년 5월19일호, 15쪽. 85) 「太平洋週報」 1938년 5월7일호, 「기독교회 예배당봉헌식 후문」, 10쪽. 86) 「호항한인기독교회 례배당봉헌식 기념」, 1쪽.
87) 한인기독교회, 「호항한인기독교회 례배당봉헌식 기념」, 3쪽.
88) 「太平洋週報」 1938년 6월4일호, 「한인학생계의 영광」, 1~4쪽. 89)「太平洋週報」 1939년 4월8일호, 「리박사려행담」, 1~2쪽. 9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헌법·공보」, 193쪽. 91) 위와 같음. 9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헌법·공보」, 194쪽. 93) 社會問題資料硏究會編,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88쪽, 390쪽.
94) 「國民報」 1937년 10월13일자, 「국민회-동지회 양 단체 대표 결의안」. 95) 「太平洋週報」 1938년 3월5일호, 「三·一절 경축성황」, 12쪽. 96) 「國民報」 1938년 9월14일자, 「제5차 회의 공함」; 「太平洋週報」 1938년 9월24일호, 「합동에 대한 공함」, 9쪽. 97) 「國民報」 1938년 12월14일자, 「사설: 연합의회 정회」 ; 「太平洋週報」 1938년 12월17일호, 「동지와 동포전에」, 4~5쪽. 98) 「太平洋週報」 1938년 11월26일호, 「임시대표회 순서와 결의사항」, 3~5쪽. 99) 洪善杓, 「在美韓族聯合委員會硏究(1941~1945)」, 2002, 漢陽大學校博士學位論文, 25쪽. 100) 「太平洋週報」 1938년 2월 5일호, 「감사장」.
101) 李元淳, 「世紀를 넘어서―海史 李元淳自傳」, 1989, 新太陽社, 209~210쪽. 102) 「太平洋週報」 1939년 2월4일호, 김이제, 「위원부 문을 개방하자」, 1쪽. 103) 「太平洋週報」 1939년 4월8일호, 「리박사려행담」, 2쪽. 104) 李元淳, 앞의 책, 194쪽. 105) 「太平洋週報」 1939년 4월1일호, 「리박사전별회」.
中-日전쟁의 발발로 민족주의 3黨(韓國國民黨·韓國獨立黨·朝鮮革命黨)의 합동문제도 급속히 진전되어 7월 말에는 金九의 주도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약칭 光復陣線)가 결성되었다.
日本軍의 공습이 심해지자 金九는 100여 명의 臨時政府 대가족을 인솔하고 南京을 떠나서 揚子江을 따라 멀리 湖南省의 長沙로 피란했다. 金九는 3黨 통합문제를 논의하던 楠木廳에서 동포청년의 총을 맞고 失神했다.
3년 만에 하와이로 돌아온 李承晩은 韓人基督學院 기숙사에서 기거하면서 학교운영과 韓人基督敎會 신축에 전념했다. 景福宮의 정문인 光化門을 본떠 설계한 한인기독교회는 동포들과 美國人들이 희사한 4만820달러로 1938년 4월에 준공되었다. 교회당 건축을 끝낸 李承晩은 歐美委員部 활동을 재개하기 위하여 1939년 3월에 프란체스카와 함께 워싱턴으로 갔다.
(1) 中-日전쟁의 발발과 光復陣線 결성
1937년 7월7일 밤에 북경 교외 13km 지점에 위치한 蘆溝橋(노구교) 부근에서 무단으로 야간 전투연습을 하던 일본 군인들과 이곳을 경비하던 중국 제29군 부대 사이에 발생한 군사충돌은 치열한 전투 끝에 7월11일에 정전협정이 성립되었으나, 일본정부는 이 충돌을 구실로 곧 대규모의 전면전을 시작했다. 8년 동안 계속되는 中-日전쟁의 개막이었다.
노구교는 북경 서남쪽을 흐르는 永定河[옛 이름 蘆溝河]에 놓인 길이 235m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옛 석교이다. 1192년에 완성된 이 다리는 일찍이 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유명한 「東方見聞錄(동방견문록)」에서 다리의 조형기술과 장려한 조각에 매료되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淸朝의 乾隆帝(건륭제)가 「蘆溝曉月」(노구효월)이라는 휘호를 남겼을 만큼 경치도 아름다웠다. 영정하의 아침 안개가 다리 일대를 그림처럼 몽롱하게 만들고 거기에 새벽달이 걸리어 한결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 이제 세계의 역사에서 잊혀지지 않을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전적지가 되었다.1)
日本의 華北分離工作과 蔣介石의 「安內攘外」 정책

일본군의 화북분리공작은 북경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중국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35년 12월9일 북경의 학생시위[12·9운동]를 시작으로 「일치항일 내전정지」를 외치는 시위운동이 천진·상해·광동 등지로 확산되어, 상해에서 전국구국연합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국민정부는 「安內攘外[내부를 안정시킨 다음 외적을 물리침]」의 기본방침에 따라 공산군토벌에 주력하고 있었다. 국민정부군의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 근거지인 武漢[武昌과 漢口]를 떠나서 1만2,000km의 「大長征」을 거쳐 1935년 말에 陝西省(섬서성) 延安(연안)에 근거지를 확보한 중국공산군은, 1936년에는 山西省으로 진격하여 한때 국민정부의 산서군을 압도하기도 했으나, 그해 3월에 蔣介石이 중앙군을 북상시키자 패퇴했다.
1936년 11월에 일어난 수원사건[綬遠抗戰]은 중국인들의 항일운동을 크게 고무시켰다. 일본 관동군과 관동군 휘하의 내몽고군이 수원성을 침략했다가 대패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일본군 개입사실을 부인했으나, 중국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중국인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또한 한 달 뒤인 12월12일에는 중공군 토벌작전을 독려하기 위하여 西安을 방문한 장개석이 휘하의 張學良에게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서안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정전교섭이 급속히 진전되어 1937년 초에는 제2차 國共合作이 사실상 성립되고 「일치항일 내전정지」가 중국 전체의 정치구호가 되었다.2) 이러한 항일의식은 노구교를 경비하는 제29군 병사들 사이에도 팽배해 있었다.
獨立戰爭 준비할 軍事委員會 설치
中_日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은 드디어 조국광복의 기회가 다가왔다고 흥분하면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임시정부는 7월15일에 국무회의를 열고 항전대책을 논의한 끝에 군무부 관할 아래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군사위원회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튿날 柳東說, 李靑天, 李復源, 玄益哲, 安敬根, 金學奎의 6명을 군사위원회 위원 겸 상무위원으로 선임했다.3) 이들은 만주에서 對日무력투쟁 경험이 있는 朝鮮革命黨 인사들이었다.
「규정」에 따르면 군사위원회는 독립전쟁에 대한 계획안을 연구 작성하고, 군사간부 인재를 양성하며, 군사상 필요한 서적을 연구 편찬하는 것이었다(제2조). 임시정부는 「긴박한 시국과 우리의 준비」라는 글을 통하여 군사위원회를 설치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제정세는 날로 험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목첩에 있으매 우리의 기대하던 기회도 눈앞에 박도하얏으므로, 우리 임시정부에 당국한 이들이 이 기회를 적당히 이용하기 위하야 밤낮으로 고심 탄력함은 일반이 주지하는 바이어니와 우리의 최후 목적을 완성함에는 한 큰 혈전에 의할 뿐이오, 이 대혈전을 하기 위하야는 군사준비를 급급히 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이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우리 군계 인물이 한데 집중돼야 군사상 제반 계획을 자세히 연구하고 세워 이를 우리 정부로 하여금 시행케 하여야 되겠으므로, 이제 임시정부에서 군사위원회를 급거히 설치하는 것도 그 용의가 여기 있는 것이라.…〉4)
임시정부는 또한 「엄중한 시기와 일반의 주의」라는 글을 통하여 〈독립전쟁을 개시해서 설분복국하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천명하고, 일반 동포들도 이에 적극 응하여 준비할 것을 촉구했다. 이 글은 또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서 동포들이 자칫하면 중국인들의 오해를 받아 신변에 위험이 닥치기 쉬우므로 각자의 행동을 조심할 필요가 있고, 또 혹시 불량배가 왜적의 사주를 받아 주구가 되어 우리의 군사행동을 불리하게 하는 괴악한 거동이 있다면 단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므로 단호하게 대처해야 된다고 주의시켰다.5)
中_日전쟁이 발발했을 때의 金九의 동정에 대한 일본 정보기관의 보고는 매우 흥미롭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여러 기관의 보고에서 金九가 장개석과 비밀리에 회동했다고 기술하고 있는 점이다. 내무성 경보국 보고는 金九가 노구교 사건이 발생하기 며칠 전인 7월3일쯤에 남경에서 은밀히 장개석의 초청을 받고 그를 만났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장개석은 金九에게 이번 화북사건은 극력 불확대 방침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주위의 상황이 어쩌면 확대할 수밖에 없게 될지도 모르며, 그럴 때에 한국인들의 활동에 크게 기대한다고 말하고, 다만 지금은 화평적 수단을 강구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처할 방안을 정리하여 제출해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金九 등은 며칠 뒤에 그 대책을 상세히 적어서 제출하고 경비 증액을 요구하여 채택되었다고 했다.6) 그러나 장개석은 6월3일에 강서성의 廬山(여산)으로 가서 군간부들과 각계 인사들의 정치와 군사문제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고 있었으므로 남경에 없었다.
또한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장개석이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7월10일에 金九와 민족혁명당의 金元鳳, 무정부주의단체인 한인청년동맹의 柳子明 세 사람을 여산으로 초청하여 韓_中 연합 항일전선을 구축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다액의 자금과 중요사명을 주어 분기를 촉구했고, 세 사람도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각각 간부회의를 열고 특무대를 소집하여 화북지방으로 보냈다고 기술했다.7) 그러나 이 시점은 장개석이 7월11일부터 열릴 국방회의 준비에 바쁜 때였으므로 金九 등을 여산까지 초청하여 韓_中 합작의 연합전선 구축 문제를 논의했을 개연성은 희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8) 이 국방회의에는 노구교 사건 발생 전에 여산에 다녀갔던 중국공산당 대표 周恩來도 다시 초청되었고, 7월15일에는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가 인정되었다. 그 결과 발표된 것이 7월17일의 장개석의 「여산담화」였다. 이 담화에서는 어떠한 해결도 중국의 완전한 주권과 영토를 침해할 수 없다는 등 네 가지 조건이 천명되었다.
한편 동경형사지방재판소 검사는 「金九가 7월20일에 남경에서 장개석과 면담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협의한 다음 원조금 증액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고 보고하고 있다.9) 장개석이 7월20일에 남경으로 돌아온 것은 사실이었으나,10) 7월21일에는 당·군·정부를 전시체제로 개편하기로 하는 등 중요한 일정 속에서 여산에서 돌아오던 날 바로 金九를 만났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나 검찰의 이러한 정보보고는 中_日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일본 관헌들이 지금까지보다 한결 더 金九의 동향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장개석과의 면담설뿐만이 아니었다. 일본 검찰의 정보보고는 8월29일에 안공근이 상해로 가서 중국신문 기자 여나믄 명을 만찬에 초대하고 金九그룹의 활동을 중국신문에 일제히 보도하게 했으며, 8월 말에는 金九 자신이 직접 嚴恒燮 등을 대동하고 상해의 프랑스조계에 나타나서 중국의 군과 정부 각 방면을 역방한 다음 프랑스공무국 정치부 차장 엠리아노프와 장시간 회담하고 돌아갔다고 기술하고 있다.11) 그러나 金九가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해에 잠입했다는 사실은 「백범일지」를 비롯한 다른 어떤 기록으로도 확인되지 않는다.
臨政豫算 226배로 늘려
군사위원회는 오래 기다렸던 항일전을 머릿속에 그리며 군사계획안을 작성하여 국무회의에 제출했고, 국무회의는 8월9일에 이를 접수하기로 결정했다. 국무회의는 군사위원회에서 작성한 특무사업, 군사시설, 군대편성, 장교양성에 관한 안건을 논의하고, 속성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초급장교를 1기에 약 200명씩 양성할 것과 독립전쟁의 기본군대로 우선 1개 연대를 편성할 것 등을 결정했다.12)
이러한 군사활동 방침은 임시정부의 1938년도 예산편성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938년도 군사관련 예산으로 군사비 30만원, 군사훈련비 7만원, 특무비 20만원을 포함하여 총 57만원의 예산을 책정했는데, 그것은 1938년도 전체 예산 57만8,867원 88전의 98%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예산규모는 1937년도 총지출 2,564원에 비하면 무려 226배나 되는 것이었다.13)
의욕적인 군사계획안을 마련한 임시정부는 사관학교를 설립할 장소까지 물색했으나 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中_日전쟁의 확대와 중국군의 퇴각에 따라 임시정부도 여러 번 이동하면서 군사계획에 쓰일 예산이 당장 급한 임시정부 대가족의 구급비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14)
항일전쟁 계획을 마련한 임시정부는 「공보」(63호)를 통하여 이를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에게 알렸다. 그것은 재미동포의 자금지원을 얻기 위해서였다.15) 실제로 임시정부가 계상한 방대한 1938년도 세입예산 가운데 중국정부의 지원금인 50만원의 「특종수입」을 제외하고 가장 큰 액수인 혈성금 7만원16)은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의 지원금에 대한 기대치를 반영한 것이었다.
中_日전쟁의 발발은 在美동포 사회에서 임시정부의 위상을 새로이 제고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北美 대한인국민회는 8월15일에 임시 중앙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임시정부 후원대책을 논의하고, 우선 경상비로 임시정부에 매달 100달러씩 보내기로 했다.17) 이어 9월5일에 열린 제4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임시정부의 지원방안으로, 1)임시정부 군사위원회를 후원하기 위하여 적립금 1000원을 임시정부에 보낼 것, 2)장기전에 대비하여 미주·하와이·쿠바 동포들에게 국민부담금을 모금할 것, 3)중국항일군을 위로하기 위하여 한인 명의로 의연금을 기부할 것을 결의했다.18)
中_日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단체의 합동문제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던 李靑天 등 조선혁명당계열의 인사들은 김원봉의 독주에 불만을 품고 1937년 4월에 민족혁명당을 탈퇴하고 조선혁명당을 다시 조직함으로써 민족혁명당에 대립하는 右派민족주의 단체는 金九를 이사장으로 하는 한국국민당과 趙素昻 등의 한국독립당과 함께 모두 세 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은 심각한 재정난에다 사람도 부족하여 운영난을 겪고 있었고, 한편 임시정부의 지주정당인 한국국민당으로서는 임시정부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있는 민족혁명당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독립당 및 조선혁명당과의 제휴가 필요했다. 3당이 합동을 함으로써 국민정부와 각계 중국인들의 집중적인 지원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金九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은 일본에 대한 항전을 개시하였다. 한인의 인심도 불안케 되었는데, 5당통일로 된 민족혁명당은 족족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또 한 개 생기고, 미주대한인독립단은 탈퇴하고,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같이 분열되는 내용은 겉으로는 민족운동을 표방하고 이면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한다는 것이었다. 시국은 점점 급박해져서 우리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과 미주와 하와이의 각 단체를 연결하여 민족진선을 결성하고, 임시정부를 옹호 지지하여, 정부는 점점 발전하게 되었다.〉19)
金九는 이청천이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나와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한 직후부터 독립운동단체들의 합동운동을 추진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단체들의 참여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하여 金九는 하와이에 있는 李承晩에게 합동선언문 초안을 보내면서 협조를 당부했다. 그러나 한인기독학원 운영과 특히 한인기독교회 신축에 전념하고 있던 李承晩은 金九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李承晩이 왜 답장을 쓰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시정부와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의 행태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동지회가 그들 단체와 합동하는 일을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3당 합동 논의는 7월 초순에 杭州에 있던 한국독립당의 洪震이 남경으로 가서 이청천과 한국국민당의 宋秉祚와 만남으로써 구체적으로 진전되었다. 세 사람은 1)3당 합동의 취지를 밝히기 위해 공동선언서를 발표하고, 2)합동단체는 협력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확대·강화하며, 3)각 단체는 대표 2명을 남경에 파견하여 공동사무를 처리한다는 데 합의했다.20) 7월7일에 노구교 사건이 터지자 金九를 비롯한 3당 관계자들은 합동선언을 서둘렀다. 3당은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5개 단체(북미 및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한인 동지회, 미주 대한인독립단, 대한인단합회, 부인구제회)의 연합 명의로 7월 하순에 남경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약칭 「광복진선」)를 결성했다. 그리고 8월1일에 「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을 발표했다.
「大黨은 政府의 뇌수요, 政府는 大黨의 身體」
「연합선언」은 광복진선을 〈당〉이라고 표현하면서 임시정부와의 관계가 다음과 같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민족전선의 핵심은 당연히 당에서 확립되며 당의 기능은 반드시 각종 부문의 단체 진행활동으로 말미암는다. 정부는 직접 국민의 전체성을 영도함으로써 3·1운동 이래부터 우리 정부의 허다한 공헌은 실로 여기에 있으며 금후의 활동도 또한 이로 말미암아 증진할 것이다. 당과 정부는 서로 표리가 되어 서로 버릴 수 없으며 장래 大黨은 필히 정부의 뇌수가 되고 정부는 대당의 신체가 될 것이다. 그런 후에 몸과 마음이 서로 의지하여 능히 민활하고 강건한 체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광복운동의 구체화를 도모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 대하여 협력 옹호하고 그 깃발 아래 국민의 총동원을 실행해야 한다. 왕왕 기관과 자연인을 분별하지 못하고 망령되이 정부의 공과 죄를 논단한다는 것은 어찌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21)
이러한 선언은 金九를 비롯한 광복진선 주동자들이 광복진선이 「以黨治國」을 하고 있는 중국국민당이나 임시약헌에 규정된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으로 발전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연합선언」을 발표한 이튿날 金九가 李承晩에게 쓴 편지에도 표명되어 있다. 金九는 자신의 편지에 답장도 보내지 않았던 李承晩에게 다시 편지를 쓴 것이었다.
李承晩에게 光復陣線 결성 알려
〈지난 달에 광복선언 기초를 항공우편으로 귀회 중앙부에 보내고 동의를 요구한 지 월여에 회답을 보아 발포코저 기대하던 중 華北戰爭이 폭발되어, 中韓兩民族이 절실히 聯合滅敵하자는 현하에 우리의 흩어진 모래알 같은 형세로 남과 교섭하는 데 위신이 없을 뿐 아니라, 그네들도 우리에게 불통일을 우려하게 되는 정세에 의하여 더 기다리지 못하고 반포하오니, 당돌을 용서하시고 중앙부에 명령하시와 인준의 회신을 보내실 뿐 아니라, 원동 각 단체와 정부사업에 대하와 항상 훈교를 주시오며, 금번 선언서에 원지에 계신 동지들로 의아케 된다면, 정부는 동체요 당은 뇌라는 구절과 광복진선이 통합의 초보공작이라 한데 고려될 듯하나, 의정원이 당금은 腦格을 가지나 約憲에 大黨이 성립되면 최고권이 당에 있다는 문구가 있으므로 명사를 그리 쓴 것이고, 통합은 원동은 별 문제가 없으나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는 자치성을 구비한 단체들인즉 打成一片하기 용이치 않고, 억지로 하는 통합은 폐해가 더욱 심할 것이므로, 실제로 공공사업을 합심합력하여 가는 데서 장래에 진정한 통일이 되리라는 것이 동방 각 동지들의 일치점입니다. 금번 화북전쟁에서 慘無人道에 일본의 일등국의 가치는 상실되고, 중국동포의 적개지심은 극단으로 발표되는 차제에 우리의 光復陣線 결성은 민족적으로 위신을 발양하면서 중국과 절실 합작하게 되오니, 이때에 聖敎를 주시와 대업을 완성하도록 하실 줄 믿고 事機進展되는 대로 자주 보고 드리기로 하고 다만 국가를 위해 건강하심 빌며〉22)
金九는 광복진선 선언을 동봉하고, 추신으로 〈동봉 선언은 귀회로서 각지 동지동포에게 印布하심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광복진선은 8월17일에는 「한국광복운동단체 중일전국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고, 〈중-일전쟁은 한국과 중국 양 민족의 생사존망의 최후의 결전〉이라고 말하고, 양 민족이 연합하여 항일구국전선에 참여해서 왜적을 섬멸할 것을 촉구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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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가 李承晩에게 光復陣線 결성 사실을 알리면서 협조를 부탁한 1937년 8월2일자 편지. |
『물질로 바치며, 기술로 바쳐라…』
광복진선의 「중일전국에 대한 선언」이 발포되고 사흘 뒤인 8월20일에 임시정부는 국무위원 일곱 사람의 연서로 「임시정부포고문」을 발표했다. 그것은 광복진선의 결성으로 기반을 강화한 임시정부가 국내외 동포들에게 모든 역량을 임시정부로 집중시킬 것을 촉구한 것이었다.
〈우리의 충애하는 동포들! 우리가 두고두고 기다리고 바라던 기회는 벌어졌다. 우리의 조국광복의 거룩한 임무를 다할 날은 이르렀다. 중일의 싸움은 폭발되었다. 그 영향은 지극히 크고 안 미치는 곳이 없다. 이번 이 싸움은 한번 눌린 자의 솟아날 길이오, 강포한 자의 거꾸러질 함정이다. 죄악만을 쌓기에 힘써 날뛰던 우리의 불공대천지수 왜적의 멸망이 시각을 다투어 나타나려 한다. 우리의 친구 중국은 그 이해와 흥망이 우리로 더불어 그 관계가 심히 크고 깊다. 중국이 죽음을 던져 살길을 바라는 이 싸움이 또한 우리의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고 자유 독립의 국가광복을 이루게 되는 그 고동이다.…〉
「포고문」은 이렇게 선언하고 나서, 모든 역량을 임시정부로 집결시킬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남의 힘이 아무리 클지라도 나의 힘에 비길 수 없으며, 그뿐(아니라) 나의 힘이 있어야 남의 힘이 크게 보충됨은 긴 말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응당 갑절이나 더 느끼어 이 시기를 잡아야 할 것이며 잘 잡음에는 모든 힘을 집중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본 정부는 전국 동포에게 고하노니, 가진 힘을 한데 바쳐 천재일시의 이 사명을 행하라. 체력이 있거든 체력을 바치며, 슬기가 있거든 슬기를 바치고, 물질로 바치며, 기술로 바쳐라. 아무리 왜적의 극단적 압박과 통제 아래서라도 사람의 뜻이 정하면 강철이 되나니 형세를 따라 공개로나 비밀로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본 정부 아래 모으라. 자기네의 단체가 있거든 각각 자기 소속 단체로 모으고, 소속 단체가 없는 개인은 각각 직접 정부로 바쳐라.…〉
「포고문」은 다음과 같은 절절한 호소로 마무리했다.
〈아아! 우리의 충애 동포들! 우리가 우리 조상네의 물려주셨던 아름답고 거룩한 땅덩어리와 자랑거리를 다시 찾아 조상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던 부끄러움을 씻으려거든, 또 영원한 앞날에 나오는 자손들의 값없이 죽는 불쌍한 목숨을 건져 남과 같이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려거든, 우리의 가진 것을 무엇이나 아끼지 말며 계련치 말아라. 오늘에는 아무것도 없다. 죽지 않으면 살판이다. 죽음으로 이 삶을 구할 뿐이다. 살려고 애를 쓴다고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죽을 것을 각오할진대 잘 죽기를 찾을 것이니, 하물며 살길이 그 가운데 있음이랴. 어두운 지옥에 빠진 우리에게 광명한 빛이 큰 길로 인도한다.…〉24)
자다가 日本 비행기의 空襲받아
화북지방의 전선이 확대되는 한편으로 8월 말부터는 상해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른바 제2차 상해사변이 발발한 것이었다. 상해에 투입된 중국군은 장개석이 자랑하는 정예부대였다. 중국군은 크리크[작은 운하]와 토치카를 이용하여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하면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일진일퇴의 격전이 계속되는 동안 양쪽 모두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한국광복진선은 10월에 선전위원회를 결성하고 韓_中 양 민족의 연대의 필요성을 선전하는 한편 일본의 중요기관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했다. 광복진선의 활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향도 컸다. 9월3일자 중국신문들이 광복진선의 결성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데 이어 10월31일자 「申報」에는 한국광복진선 선전위원회가 10월30일에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열리는 9개국회의 의장 앞으로 전보를 보내어 극동을 침략하는 일본에 대한 실효성 있는 제재 조치를 취할 것을 청원한 사실이 보도되었다. 9개국회의는 일본의 전쟁도발을 중국정부가 국제연맹에 제소함에 따라 11월3일부터 열리게 된 것이었다. 중국정부는 한국광복진선 선전위원회에 준비금으로 1만원을 지급했고, 在美동포들로부터도 250달러가 송금되었다.25)
8월15일부터 일본군의 남경폭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金九가 공습을 당한 것은 8월26일 새벽이었다.26) 金九는 회청교의 집에서 초저녁에 일본군 비행기의 공습으로 곤란을 겪다가 경보가 해제된 뒤에야 깊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기관포 소리에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밖으로 나왔다. 그때에 「꽝」 하고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金九가 자던 방 천장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뒷방에서 자고 있는 朱愛寶를 황급히 불렀다. 주애보와 같은 방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도 흙먼지를 헤치고 나왔다. 뒷벽은 무너지고 그 바깥에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불빛이 하늘로 치솟아 하늘색은 마치 붉은 담요를 펼쳐 놓은 것과 같았다.
金九는 날이 밝자 馬路街에 있는 곽낙원 여사의 집을 찾아갔다. 폭격으로 죽은 사람과 다친 사람들이 길에 가득했다. 金九가 어머니 집 문을 두드리자 그녀가 직접 나와서 문을 열었다.
『너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
『놀라셨지요?』
『놀라긴 무엇을 놀라. 침대가 들썩들썩하기에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래 사람이 많이 죽었나?』
『예, 오면서 보니까 이 근처에서도 사람이 상하였던데요』
『우리 사람들은 상하지 않았나?』
『글쎄올시다. 지금 나가 보렵니다』
金九는 곽낙원 여사 집을 나와서 이청천의 집을 찾아갔다. 집이 흔들려서 놀라기는 했으나 무사했고, 남기가에 있는 대다수 학생들과 가족들도 무사했다.27) 金九는 재미동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른 임시정부 활동과 함께 이날의 일을, 어머니와의 대화내용까지 상세히 적었다.28) 그만큼 극적인 상황을 재미동포들에게 실감나게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南京을 떠나 長沙로 피란
11월5일에 일본군이 항주만에 상륙한 뒤에 중국군의 저항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퇴각하는 중국군을 추격하여 남경으로 진격했다. 국민정부는 11월16일에 마침내 四川省의 重慶으로 천도하기로 하고 각 기관을 옮기기 시작했다. 임시정부도 11월18일에 국무원 결의로 임시정부 판공처를 湖南省 長沙로 옮기기로 했다.29) 100여 명의 남녀노유와 청년들을 이끌고 사람과 땅이 낯선 장사로 피란 가기로 한 것은 그곳이 곡식값이 매우 쌌으므로 생활비를 줄이고, 또 장차 홍콩을 통하여 미국 동포들과 통신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세가 아주 불리해져서 중국 전토가 일본군에 점령당하는 경우에는 임시정부를 하와이로 옮길 것도 생각했었다.30)
金九는 상해와 항주를 비롯하여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에게 여비를 보내어 남경으로 집결하도록 연락했다. 金九는 梁起鐸과 安重根의 부인을 특별히 배려했다. 이 무렵 양기탁은 仙道를 연구하기 위해 陽(율양)의 古堂菴에서 중국도사 任漢廷에게 의탁하여 수도하고 있었고, 안중근의 부인은 상해에 있었다. 金九는 양기탁에게 여비를 보내면서, 남경으로 와서 같이 장사로 가자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기약한 날짜가 되어도 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그냥 떠나고 말았다. 그때 이후로 金九는 양기탁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31)
안중근의 부인에게는 安恭根을 보냈다. 金九는 안공근을 상해로 보내면서 자기의 가족과 함께 큰형수인 안중근의 부인을 꼭 모셔오도록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안공근은 자기의 가족들만 데려왔다. 金九는 안공근을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란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金九는 안공근에게 그의 가족들도 다른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본의에 합당하다면서 함께 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안공근은 자기 가족은 중경으로 보내겠다면서 임시정부 대가족과 함께 생활하기를 원하지 않았다.32)
朱愛寶에게 100원밖에 주지 못한 것 후회
남경을 떠나면서 金九는 주애보에게 여비 100원을 주어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일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金九는 뒷날 다음과 같이 자괴했다.
〈그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에 여비 100원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근 5년 동안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나를 위하였고,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부부 비슷하게 되었다.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33)
金九는 安徽省(안휘성)의 屯溪(둔계)중학에 재학 중인 둘째아들 信을 불러오고 곽낙원 여사를 모시고 안공근의 가족과 함께 영국 윤선을 타고 漢口를 향해 떠났다. 진강에 있던 임시정부의 내무장 趙琬九와 군무장 曺成煥은 임시정부의 문서와 장부를 가지고 11월20일에 윤선을 타고 출발했고, 남경에 있던 광복진선 3당 간부들과 임시정부 가족과 청년당원 등 100여 명은 중국군사위원회에서 주선해 준 큰 목선 한 척에 짐까지 가득 싣고 11월23일에 남경을 떠났다.34) 임시정부 대가족이 떠나고 3주일 뒤인 12월13일에 남경은 일본군에 점령되고, 일본군에 의한 대규모의 학살과 약탈이 잇따랐다. 그리고 12월14일에는 북경에 일본의 괴뢰정부로 中華民國臨時政府가 발족했다. 남경에도 이듬해 3월28일에 또하나의 괴뢰정부로 中華民國維新政府가 발족했다.
장사까지는 양자강 수로로 3000리 길이었다. 임시정부 대가족은 한구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갖은 고생 끝에 12월20일 오전에 장사에 도착했다. 남경을 출발한 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35) 金九는 임시정부 대가족보다 먼저 장사에 도착했고, 안공근의 가족은 한구에서 헤어져서 중경으로 갔다. 金九는 안공근의 이러한 처사가 몹시 거슬렸을 것이나, 안공근은 이제 金九로서도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 대가족은 12월4일에서 20일 사이에 모두 무사히 장사에 도착했다.36)
(2) 合黨 방해자의 총 맞고 한 달 동안 入院治療
호남성의 북단에 위치한 洞庭湖는 중국에서 가장 큰 호수로서, 「洞庭秋月」 등으로 알려진 풍광으로도 유명하다. 장사는 동정호에서 남쪽으로 약 200km 떨어져 있는 호남성의 주도이다. 경치도 좋고 기후도 따뜻할 뿐만 아니라 곡식도 풍부하고 물가도 싸서 임시정부 대가족이 생활하기에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37) 金九는 장사로 옮긴 직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장사에 선발대를 보내놓고 안심하지 못하였으나, 뒤미처 장사에 도착하자 천우신조로 이전부터 친한 張治中 장군이 호남성 주석으로 취임하여, 만사가 순탄하였고 신변도 잘 보호받았다. 우리의 선전 등 공작도 유력하게 진전되었고, 경제 방면으로는 이미 남경에서부터 중국 중앙에서 주는 매월 다소의 보조와, 그 밖에 미국 한인교포의 원조도 있었다. 또한 물가가 싼 탓으로 다수 식구의 생활이 고등난민의 자격을 보유케 되었다.〉38)
임시정부는 中_日전쟁을 계기로 중국정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中_日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은, 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각자 능력에 따라 생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서 생활비를 해결했고, 각자의 수입 중 일부를 임시정부에 헌납해서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왔다. 그러나 中_日전쟁이 발발하면서 생계수단을 잃게 되어 임시정부 가족들은 중국정부의 지원금과 몇십 가마씩의 쌀과 재미동포들의 성금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39)
임시정부 가족들은 공동생활을 할 줄 몰랐다. 그리하여 金九는 각자 방을 얻어 주어 생활하게 했다. 金九는 상해에 도착했을 때부터 동포를 만나도 초면에 인사할 때 말고는 변성명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장사에 도착한 뒤로는 거리낌없이 金九로 행세했다.40)
八旬잔치 비용을 拳銃 사라고 내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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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가 3黨통합을 논의하다가 저격당한 楠木廳 9호의 조선혁명당 黨舍. 현주소는 楠木廳 4호로 바뀌었다. 지금은 헐리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나의 생일상을 위하여 무엇을 차릴 생각은 염두에도 두지 말고 돈이 있거든 차라리 그것을 나에게 주어. 내가 평일 식찬비를 절용하여 저축한 돈 약간과 합하여 청년에게 무기를 얼마 사주어 그것으로 왜적을 다만 몇 놈이라도 더 죽이게 하겠다』41)
결국 金九는 어머니 뜻에 따르기로 하고 그 돈으로 권총을 샀다. 호놀룰루의 「國民報」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곽낙원 여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이만한 아들이 있음은 이만한 그 자친이 있음이라고 세상이 칭송하기를 마지 않는다 한다. … 오늘은 아들이 자친의 만년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드리기 위하여 의식을 편하게 하여 드리려 하나, 그는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몸에 좋은 옷을 입지 않고 입에 좋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굳게 거절하신다 하며, 그는 언제든지 몸이 고국에 돌아가 묻히기만 소원하신다. 이 어른이 지금 팔십노인이지만 건강하시고 아직도 안경 없이 바늘귀를 꿰신다 한다.〉42)
이 기사는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韓民」에 실린 기사를 전재한 것이었는데, 이 기사를 보고 하와이의 부인들이 6달러를 곽낙원 여사에게 보내기도 했다.43)
「백범일지」는 이때의 일을 적으면서 그것이 남경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했으나,44) 그녀의 팔순 생일은 1938년 음력 2월26일이었으므로 장사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같은 目的 아래 共同鬪爭하면서 「陣線」이란 모순』
장사에 와서 金九가 가장 열성을 기울여 추진한 작업은 광복진선 3당의 통합이었다. 장사에 온 뒤로 3당은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고 있었으므로 내부적으로 통합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金九는 장사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3당통합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하여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는 세 정당을 다시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할 필요성과 정당성을 金九는 재미동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했다.
〈본래 무슨 진선이라는 것은 두 개 이상의 다른 주의와 단체들이 특정한 공통의 이익을 위하야 分工合作하는 기구인즉, 꼭같은 주의를 가지고 유일한 목적만을 위하야 공동분투하는 우리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서 진선을 형성한다는 것은 이론에 맞지 아니하는 일입니다. 비록 일시의 우리의 부득이한 사세로써 그리 된 것이나, 이 모순되는 현상을 그대로 오래 지지할 수 없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며, 겸하야 역사적 교훈과 민중의 요구가 통일을 절망할 뿐 아니라 광복진선 중 원동에 있는 3단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는 작년에 남경에서 함께 떠나서 장사까지 온 뒤에는 오늘까지 한솥의 밥을 먹고 지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오, 또 여러 가지 공공한 사업은 벌써부터 일치 합작하는 터인즉 한 지방에서 문호만 여럿을 벌여 놓을 필요가 없이 되었나이다.…〉45)
金九는 이론상 불합리한 광복진선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함으로써 피란정부를 이끌어 갈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을 자신의 주도로 조직하고자 한 것이었다.
세 시간 동안 金九의 숨 끊어지기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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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가 楠木廳 저격사건으로 한 달 동안 입원했던 湘雅醫院. 지금은 中南大學校 부속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다(白凡記念館 제공). |
『숙제로 된 통합문제를 곧 완성하기 위하여 楠木廳(남목청)에서 하루 이틀 뒤에 3당 간부 몇 명이 모입시다. 그날 식사는 내 한턱 하리다』
金九는 10원을 조경한에게 주면서 그날 먹을 냉면값으로 써달라고 했다. 조경한은 돈 받기를 사양했으나, 金九가 강권하는 바람에 그대로 받아가지고 돌아가서 이청천 부인과 현익철 부인에게 그날의 식사준비를 부탁했다.46)
金九는 약속대로 5월7일 저녁에 조선혁명당 당사인 남목청을 찾아갔다. 이날 회의에는 한국국민당 대표로 金九와 조완구, 조선혁명당 대표로 이청천과 조경한과 현익철, 한국독립당 대표로 조소앙과 홍진이 참석하고 옵서버로 유동열, 이복원, 임의택이 참석했다. 회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조금 있다가 음식이 들어오고 술잔이 오고갔다. 조경한과 함께 애주가로 소문난 유동열이 조경한에게 핀잔을 주었다.
『술꾼이 술맛도 보지 않고 이런 술을 사오게 했는가?』
유동열은 조경한과 막역한 사이였다. 조경한은 중국인 사환에게 새로 술을 사오게 했으나 그 술도 맛이 시원치 않아서 자신이 직접 술을 사러 갔다. 조경한이 술 대여섯 병을 사 들고 남목청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막 오를 때에 회의장 안에서 서너 발의 총소리가 났다. 연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청년 하나가 회의장에 뛰어들어 권총을 난사한 것이었다. 총소리를 듣고 아래층에 있던 청년들이 달려가서 범인을 잡으려 했으나 범인은 잽싸게 2층 계단을 뛰어넘어 도망쳤다.47) 저녁 6시20분쯤이었다.48)
첫 발에 金九가 맞고, 두 번째로 현익철이, 세 번째로 유동열이, 네 번째로 이청천이 맞았다. 왼쪽 가슴에 총을 맞은 金九는 의식을 잃었다. 현익철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기자마자 절명했다. 유동열은 허리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고, 이청천은 손에 찰과상을 입었다.49) 이청천, 유동열, 현익철은 모두 조선혁명당의 간부이자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상무위원들이었다. 현익철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중 한국인 만주국 군관 洪아무개 중좌의 주선으로 한국독립운동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로 약속하고 가출옥하여 관동군으로부터 첩보비를 받고 남경에 왔었는데, 마음을 바꾸어 민족혁명당에 참가했고, 이청천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여 조선혁명당 결성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50)
金九와 유동열은 급히 가까이에 있는 湘雅醫院으로 옮겨졌다. 상아의원은 장사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는 병원이었다. 경상을 입은 이청천은 자기 집으로 가서 치료했다.
金九를 진단한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 金九는 입원수속도 하지 않고 문간에서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세 시간이 넘도록 金九의 숨이 붙어 있자 의사는 네 시간 동안까지만 생명이 연장되면 살 방도가 있을 것 같다고 하다가, 마침내 우등병실로 옮기고 치료를 시작했다.
가망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주위에서는 홍콩에 가 있던 안공근과 金仁에게 〈피살당했다〉는 전보를 쳤다. 안공근은 중경에 갔던 자기 가족과 廣西로 이주시킨 중형 安定根의 가족을 홍콩으로 옮기기 위해 그곳에 가 있었고, 김인은 상해로 공작을 가는 길에 그곳에 가 있었다. 두 사람은 며칠 뒤에 金九의 장례식에 참석할 요량으로 장사로 돌아왔다.51)
金九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집이 아니라 병원이었다. 그리고 몸이 몹시 불편했다.
『내가 어디를 왔느냐?』
남목청에서 술을 마시다가 졸도하여 입원했다고 했다. 의사가 자주 와서 가슴을 진찰했다. 金九는 가슴에 상흔이 있는 듯하여 의사에게 물었다.
『어찌된 까닭입니까?』
『졸도하실 때에 상 모서리에 엎어지셔서 약간 다치신 것 같습니다』
金九는 그 말을 곧이듣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金九가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것은 거의 달포나 지나서였다. 엄항섭이 진상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52)
朝鮮革命黨에서 제명된 李雲煥의 犯行
회의장에 뛰어들어 총을 난사한 범인은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이었다가 두 달 전에 당에서 제명된 李雲煥(일명 李雲漢)이었다. 이운환은 평북 의주군 출신으로서, 서른한 살이었다.53) 그는 남경에 있을 때에 상해로 특무공작을 하러 가겠다면서 金九에게서 자금을 얻어가기도 했었다.54) 이운환은 성격이 우직하여 사물에 대해 판별력이 부족하고, 오직 용협이 남달라서 모험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사건이 있기 전부터 이운환이 3당의 주요인물을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혁명당은 이운환을 제적하고 1년 동안 근신하도록 했는데, 이운환은 조선혁명당의 그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사건을 저질렀다고 했다.55)
그러나 이운환의 범행동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金九 자신은 이운환이 병인의용대원 姜昌濟와 朴昌世의 꼬임에 빠져서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했다. 金九는 이전부터 李裕弼의 지휘로 조직된 병인의용대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들이 일본 밀정을 총살하거나 직접 따르기도 하고, 금전을 가진 동포를 위협하여 강탈하기도 하여 동포들 사이에서 신용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반혁명자로 규정하기도 어려운 〈일종의 革命亂類〉라고 규정했다. 범행이 있기 얼마 전에 강창제가 金九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상해에서 박창세가 장사로 올 마음이 있으나 여비가 없어서 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비를 좀 보조해 주십시오』
金九는 상해기관에 말해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金九는 박창세의 맏아들 朴濟道가 일본영사관의 밀정이 된 것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박창세가 그 아들 집에 살고 있는 데에 특별히 주목하고 있었다. 그 얼마 뒤에 여비가 없어서 오지 못한다던 박창세가 장사에 나타나서 金九도 그를 한번 만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金九는 이운환이 〈강창제와 박창세의 악선전에 이용된 나머지 정치적 감정에 충동되어 남목청 사건의 주범이 된 것이었다〉 라고 술회했다. 金九는 그 근거로, 중국경비사령부의 조사에 따르면 박창세가 장사에 도착한 직후에 상해로부터 박창세에게 200원이 비밀리에 지원되었으나 이운환은 체포 당시에 돈을 18전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고, 범행을 저지른 뒤에 권총으로 최덕신을 위협하여 10원을 빼앗아 장사를 탈출한 사실을 들었다.56) 그러나 金九의 이러한 추측도 석연하지 않다.
日警은 金九가 朝鮮革命黨 그룹을 차별대우했기 때문이라고
한편 일본경찰의 정보문서는 이 사건이 金九의 조선혁명당 인사들에 대한 차별대우에 따른 알력에서 기인한 사건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한 이청천·강창제·박창세 등 열 몇 명에 대하여 金九가 처음에 절대로 차별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합동의 이름 아래 이들을 자기 휘하로 끌어들여 놓고는 그 뒤에 조선혁명당 그룹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차별대우를 했다는 것이었다.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지원되는 자금의 분배도 金九파의 당원과 가족에게는 매달 어른은 1인당 10원, 아이는 5원씩 지급하고 이청천파의 당원과 가족에게는 어른은 7원, 아이는 그 반액을 지급했다고 한다. 한달 전쯤부터 金九가 반대분자 이운환을 암살하려고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조선혁명당 일부는 극도로 분개했고, 강창제·박창세·이운환 등은 金九를 공공연히 공격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이청천·현익철·유동열 등 조선혁명당 간부들은 金九와 연합하여 그의 신뢰를 두터이 할 양으로 위의 세 사람을 당에서 제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명된 세 사람은 은밀히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에 이청천·현익철 등이 金九로부터 다액의 활동자금을 받고 그 사례로 金九초대연을 열었고, 金九 등 간부들이 모이자 이운환이 박창세로부터 빌린 권총을 휴대하고 잠입하여 金九 등을 저격했다는 것이었다.57) 그러나 金九와 대립관계에 있던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간부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金九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박창세와 강창제의 사주에 따라 이운환이 金九 등을 저격한 것은 겉으로는 거두들의 지위쟁탈에 기인하는 것 같아 보이나, 상해사변 중에 박창세가 자주 霞飛路를 태연히 걸어다니고 또 자기 집에도 잠복해 있는 점으로 보아 사전에 일본관헌과 金九를 죽이기로 한 묵계가 있어서 이번 기회에 부하 이운환을 시켜 결행한 것으로 짐작된다』58)
蔣介石은 치료비 3,000원 보내 위문
남목청의 저격사건으로 장사 시내는 발칵 뒤집혔다.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 경비사령부는 장사 일대에 임시계엄을 펴고, 보안대와 헌병대와 경찰이 총출동하여 장사를 출발하여 武昌으로 가던 기차를 장사로 되돌려 범인을 수색했다. 임시정부는 내무장 조완구의 책임 아래 위원회를 조직하고 호남성 당국과 협력하여 이운환과 그 공모 혐의자 姜昌濟, 朴昌世, 李昌基, 申基彦, 韓聖道, 宋旭東 등을 체포하여 중국당국에 넘겼다. 또한 범죄의 증거조사와 함께 부상자 구호 및 사망자의 장사에 힘을 기울였다. 임시정부 주동으로 현익철의 장례를 치르고 유해는 岳麓山(악록산)에 묻었다.59)
金九가 저격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정부는 특별한 배려를 해주었다. 陳果夫가 金九의 저격사실을 蔣介石에게 보고하자, 漢口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장개석은 곧바로 장치중에게 金九를 잘 보살피라는 전보를 쳤고, 장치중은 金九가 입원 중인 상아의원을 방문하여 위문하고, 병원에는 치료비는 얼마가 들든지 성 정부에서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金九가 퇴원한 뒤에 장개석은 羅霞天을 시켜 치료비 3,000원을 가지고 장사에 와서 위문하게 했다.60)
도주한 이운환은 장사의 중국기관에 근무하는 崔德新을 찾아가서 권총으로 협박하여 10원을 받아가지고 장사를 탈출하려다가 사건발생 6일 만에 장사에서 수십 리 떨어진 시골 기차역에서 중국 군경에게 체포되었다.61)
중국 법정은 이운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수감했으나, 공범으로 체포된 혐의자들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했다.62) 수감되었던 이운환도 장사가 위급해지고 장사에 있는 중국기관이 모두 중경으로 후퇴하는 틈을 타서 탈옥했다. 이 때문에 사건의 정확한 배후와 동기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뒷날 金九는 중경에서 당시 중국군에 복무하던 歐陽群[朴基星의 중국 이름]으로부터 귀주 방면에서 걸인행색으로 도망가는 이운환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63)
현익철의 사망과 유동열의 부상으로 임시정부는 7월1일에 두 사람을 대신하여 羅泰燮과 黃學秀를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했다.64)
『韓人에게 총 맞고 산 것은 日人의 총에 죽은 것만 못해』
金九는 상아의원에서 한 달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퇴원하는 길로 金九는 걸어서 곽낙원 여사를 찾아갔다. 그녀에게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가 金九가 퇴원할 무렵이 되어서야 金信이 사실대로 말했다. 곽낙원 여사는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자네 목숨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邪不犯正[사불범정: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함]이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이것이 죽었다 살아난 아들에게 한 말의 전부였다. 그리고는 손수 음식을 만들어 아들에게 권했다.65)
金九는 퇴원하고 나서 얼마 동안 엄항섭의 집에서 요양했다. 하루는 갑자기 신기가 불편하고 구역이 나고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다시 상아의원을 찾아갔다. X레이 촬영을 해보니까 심장 옆에 박혀 있던 탄환이 위치가 바뀌어 오른쪽 갈비뼈 옆으로 옮겨가 있었다. 진찰한 외과 주임이 말했다.
『심장 옆에 박혔던 탄환이 대혈관을 통하여 오른쪽 갈비뼈 있는 데로 옮겨갔습니다. 불편하시면 수술도 쉬우나 그대로 두어도 생명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것은 탄환이 대혈관을 압박하기 때문인데, 소혈관들이 확대되면서 괜찮아질 것입니다』66)
國務委員들과 金九가 在美同胞들에게 事件 알려
金九를 제외한 국무위원 여섯 사람은 6월15일에 연서로 재미동포들에게 남목청 사건의 경과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주목되는 것은 불상사가 일본인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겠기에 중국신문에도 일절 보도를 하지 못하게 했다면서 미주에서도 내외국 신문에 발표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고 있는 점이다.67)
金九도 6월20일에 재미동포들에게 남목청 사건의 경과와 자신의 심정을 밝히는 긴 편지를 썼다.
〈그동안 병원에 몸져누워 생사를 천명에 맡기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던 제가 달포 만에 퇴원하야 여러 동지께 소회를 사뢰고저 하오니 무슨 말씀을 먼저 시작해야 될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나이다. 지금 형편으로 보면 비록 건강이 쾌복은 되었지만 원래 중상을 당하였던 관계로 아직 어떠한 운동이든지 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어서, 여러분과 서신을 왕래하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남의 손을 빌어서 저의 심중을 고하게 되나이다. 제가 비록 단문이오나 여러분의 애호하시던 성의의 만일이라도 보답하려는 미충으로써 종래의 일체 서신은 반드시 자필로 쓰던 것이온대 이번에는 할 수 없이 서명만 자필로 쓰오니 넓게 용서하시기 바라나이다. 그러나 미구에 내 손으로 붓을 잡게 되면 내 상머리에 산같이 쌓인 동지 여러분의 혜찰을 일일이 친필로써 봉답하겠나이다.…〉
在美同胞들의 편지가 상머리에 쌓여
이처럼 金九는 이무렵 재미동포들이 보낸 편지가 상머리에 쌓일 만큼 그들과 빈번히 편지교환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金九는 이어 남목청 사건의 경과를 간단히 설명하고 나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동지여러분은 이 흉보를 접하실 때에 국사를 위하야 놀라시며 저를 위하야 걱정하실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옛말에도 다난흥방(多難興邦)이라 하였으니 우리가 풍파를 겪을수록 우리의 사업은 더욱 공고하게 진전될 것입니다. 이러한 실례는 지금 중국의 항일운동에서도 목도하는 바이지만, 과연 원동의 우리 사회는 이번의 변을 치른 뒤에 더욱 굳게 단결되며 어느 동지든지 일호도 회심치 아니하고 더욱 건전히 분투하나이다. 지어 저 개인하야는 애국운동을 시작하던 그날부터 구구한 일신의 생명은 심중에 두지 아니하였던 것이니, 어느 날에든지 이러한 죽음이 있을 것을 미리부터 각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분한 것도 없고 낙심되는 것도 없습니다. 저는 오직 최후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야 앞으로 더욱 분투노력하고저 하는 것뿐입니다. 이 결심은 이번에 처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십 년 전에 인천감옥을 탈주한 사형수 김창수 시절부터 벌써 한 것입니다. 이만한 것을 평소부터 알아 주시는 동지여러분께서는 저를 위하야 큰 걱정은 아니하시리라고 믿는 바이지만, 더구나 지금은 퇴원까지 하였사오니 크게 안심하실 줄 생각하나이다.…〉
『왜놈의 개질하는 놈도 나를 해치지 못해』
이어 金九는 자신이 저격을 당하게 된 이유는 평소에 동포를 너무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저는 일생에 충과 의를 지키기에 힘을 써 왔으며 또 성질이 소탈하므로 심중이 항상 담백하야 두려울 것이 없었읍니다. 그러므로 내외국동지들이 저의 일신의 보호를 위하야 염려할 때에는 언제나 일소에 붙이고 어디든지 단신으로 다니던 것입니다. 더구나 제가 사십 년 전에 인천서 탈옥한 사실은 거의 무인부지로되 왜놈만은 제가 상해로 나온 뒤에야 이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또 연전에 제가 상해에 있을 때에는 왜 영사관의 사촉을 받아가지고 저를 죽이려고 권총을 휴대하고 암암리에 저를 따라다니던 박모가 급기 저를 맞대해서는 도리어 사실을 고백하고 청죄를 한 일까지 있었던 고로, 우직한 저의 생각에는 단군 한배의 피를 가진 놈이면 왜적의 개질을 하는 놈이라도 나를 해하지 못하리라고 믿었습니다. 제가 이러한 자신을 너무 강하게 가졌던 까닭에 이번에 변을 당한 것이라고 비평할 사람이 없지도 아니할 듯하나, 그렇다고 해서 저는 과거의 신념을 착오라고 뉘우치지도 아니하며 더구나 앞으로 그것을 고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러한 말에서 우리는 金九의 동족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신뢰감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金九는 마지막으로 앞으로 통일운동의 방향에 대한 자신의 각오를 다짐하면서 재미동포들의 협력을 거듭 요청했다.
〈저는 가신 동지를 위로하기 위하야, 광복대업을 완성하기 위하야, 먼저 원동의 삼당 통일을 실현하기에 배전 노력하겠고, 이것을 완성한 뒤에는 첫째 광복진선의 통일, 둘째 해외 한인 전체의 통일, 셋째 한걸음 더 나가서 전 민족적 대동단결을 완성하기에 잔명을 바치려 하오니, 저를 애호하시고 이해하시는 동지 여러분께서도 각각 그 지방에서 통일을 완성하시고, 그 다음에 전 민족적 대동단결을 실현하야 천재일시의 좋은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도록 힘쓰시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68)
이 편지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상무부 총무 최진하 앞으로 발송된 것인데, 편지내용은 「新韓民報」에 공개되었다. 「신한민보」는 사건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이운환에 대해서 〈만일 리모가 적의 주구로 이런 일을 감행하였으면 이는 천참만륙하여도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요, 만일 광복운동자로 주장이 서로 달라서 이런 불상사를 일으켰다 하더라도 광명정대한 정치적 우정을 버리고 비열하고 음흉한 암살의 수단을 취하는 것은 혁명당의 기율상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69)
(3) 韓人基督敎會를 새로 建築
3년 남짓 동안 떠나 있던 李承晩이 1935년 1월24일에 하와이로 돌아옴으로써 그동안 침체해 있던 대한인동지회와 부인구제회 등 李承晩 지지자들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李承晩 내외는 한인기독학원의 기숙사에 거처를 잡고, 李承晩은 교장직을 맡고 프란체스카는 사감직을 맡아서 김노디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3월20일에 호놀룰루 선교기념관에서 열린 동지회 주최의 특별강연회에는 300여 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李承晩은 유럽을 여행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청년의 장래 문제에 대해 영어로 긴 연설을 했다.70)
목수일과 석공일하면서 基督學院 운영
그러나 李承晩에 대한 하와이 동포사회의 신망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국권회복을 기대하면서 李承晩의 외교활동을 지원했는데도 아무런 가시적 성과가 없는데다, 특히 동지식산회사 사업의 실패와 그에 따른 막대한 소송비용의 낭비 등이 큰 원인이었다. 게다가 이미 동포인구의 절반이 훨씬 넘은 2세들은 거의가 한국어나 한국문화 또는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관심보다도 미국시민으로 교육받고 미국시민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李承晩 내외는 학생들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학원 일에 열성을 쏟았다. 이 무렵에 李承晩이 학생들을 보살피는 데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는가를 말해 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은 방과 후에는 기숙사나 학교 밖으로 나가서 일을 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백인집에 가서 가정부 일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릴리하 스트리트 끝에 있는 백인집에 가정부로 일하러 다니는 한 4학년 반 여학생이 어느 날 오후 늦게 일을 마치고 학원으로 돌아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소녀는 가까스로 버스정류장까지 가서 폭풍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나 사납고 버스도 오지 않아서 캄캄한 정류장에서 겁에 질린 채 오도 가도 못 하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 그때에 멀리서부터 李承晩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나타났다. 소녀는 이때에 李承晩의 목소리가 〈천사의 부름〉으로 들렸다고 한다. 李承晩은 저녁 식사를 할 때에 그 학생이 보이지 않자 여기저기로 연락하여 그녀의 행방을 알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폭풍우를 무릅쓰고 6.5km나 되는 버스길을 따라 소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 나선 것이었다. 뒷날 이 여성은 이 무렵의 李承晩은 학생들을 아주 따뜻하고 세심하게 돌보아 주었다고 회상했다.71) 한인기독학원은 1939년 현재 기숙사에 들어 있는 학생수가 남학생 20명, 여학생 17명이었고, 시내에서 통학하는 학생들도 있었다.72)
李承晩은 수업시간이 끝난 뒤에는 직접 목수가 되고 석공이 되어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를 중수했다. 그리고 돌과 시멘트로 정원에 도로 공사도 새로 했다. 그리하여 1939년부터는 9반과정을 복설하게 되었다.73)
梁裕燦에게 敎會建築基金委員長 맡겨
李承晩이 하와이에 돌아와서 가장 힘들여 추진한 사업은 한인기독교회를 새로 건축하는 일이었다. 하와이 동포사회의 분열의 여파로 두 파로 갈라진 한인기독교회는 3년이 넘도록 담임 목회자도 없이 지내왔다. 예배는 교회부설의 신흥국어학교에서 보고 있었다. 그동안은 감리교회에서 퇴직한 김이재 목사를 비롯하여 여러 평신도 지도자들이 예배를 인도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36년 6월에 한국에서 김혁식(Herbert S. Kim) 목사가 부인과 세 자녀들과 함께 부임해 간 뒤로 웬만큼 정돈이 되고 있었다.
尹致昊가 운영하는 개성의 송도 韓英書院(Anglo-Korean Academy)을 1911년에 졸업한 김혁식은 1922년에 고베(神戶)의 간사이 가쿠인(關西學院) 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서 1925년에 켄터키 웨슬리언 대학(Kentucky Wesleyan College)에서 학사, 테네시주의 스카리트 대학(Scarritt College for Christian Worker)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감리교회 목사로 사역하다가 하와이로 간 것이다. 김혁식이 하와이로 간 것은 한인기독교회의 초대 목사였던 閔燦鎬와 하와이 한인감리교회 목사의 주선에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왜나하면 李承晩이 장기간 하와이를 떠나 있는 동안 한인기독교회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목회자들은 감리교 목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감리교회 목사들이 한인기독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등으로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목회자도 소개했다.74)
李承晩은 1931년 11월에 미국 본토로 떠나기에 앞서 자신을 포함하여 정인수(회장), 최백렬(서기), 김윤배(재무) 등으로 예배당건축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다가 김혁식 목사가 부임한 뒤에 교회대지 재판문제도 원만히 해결됨에 따라 안현경·이원순·김노디·김영기·김학성 등이 위원으로 선정되어 건축기금 모금운동을 다시 벌이게 되었다.
李承晩은 1935년 가을에 한인기독교회의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건축기금위원회(building fund commitee)를 조직하고, 유망한 청년지도자 梁裕燦을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그리고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할 때에 그랬듯이 백인 유지를 위원회에 끌어들이기로 하고, 호놀룰루 중앙연합교회(Central Union Church)의 부목사 던스턴(J. Leslie Dunstan)을 건축기금위원으로 위촉하고, 하와이 사회에 잘 알려진 재력가 리빙스턴(Chester Livingston)을 김윤배와 함께 건축기금의 공동이사로 위촉했다.75) 그때까지 동포들로부터는 교회신축기금으로 모두 3,700달러가 모금되어 있었다.76) 백인사회에 기부금을 모금한 결과 1936년 1월까지 저술가이자 사회활동가인 웨스터벨트(William D. Westervelt)가 5,000달러, 트러스트(Juliette H. Atherton Trust)가 1,000달러, 호놀룰루의 재벌 캐슬(George P. Castle)의 부인이 1,500달러, 카우아이 섬의 사탕수수 농장주 윌콕스(George N. Wilcox)의 딸 엘시 윌콕스(Elsie N. Wilcox)가 100달러를 기부했다.77) 이러한 백인들의 기부금은 동포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 2월12일에는 릴리하 스트리트(Liliha Street)에 1.5에이커[60.7km2 1,800평]의 대지를 1만2,750달러에 구입할 수 있었다.
靑年들 예배시간에 英語로 說敎
이때부터 호놀룰루의 영자신문 종교란의 한인기독교회에 관한 보도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교회 내분과 관련된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던 것이 예배시간, 설교자의 이름, 청소년들의 활동상황 등을 알림으로써 안정되어 가는 교회 상황을 하와이 사회에 알리게 된 것이었다. 李承晩이 설교한다는 예고기사도 실렸다. 이무렵부터 한인기독교회의 주일예배는 오전 10시30분에 영어로 진행되는 청년들 위주의 예배와 오전 11시15분에 일반 장년들을 위한 한국어 예배가 따로 열렸는데, 영어 예배 시간에는 李承晩이 설교를 했고, 한국어 예배 시간에는 김혁식 목사가 설교를 했다. 그리고 대부분 노인들이 참석하는 저녁 예배 시간에는 李承晩이 한국어로 설교를 했다.
청년들은 또 주일마다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What I, as a Christian endeavouer, shoul do?)」, 「삶을 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What makes life worthwhile?)」 등의 주제를 놓고 토론회를 열었다.78) 그것은 李承晩이 배재학당 시절의 협성회 토론회를 생각하면서 청년들에게 권장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교회부설 신흥국어학교도 계속해서 잘 운영되고 있어서 1937년 6월에는 10명이 졸업했다.
그러나 그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거의 다 가도록 예배당 신축 공사는 착공도 하지 못했다. 李承晩은 각 섬을 순회하면서 동지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한인교회 신축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79) 동지회도 모든 사업을 제쳐 두고 기독교회 건축을 위한 모금운동에 전력했다. 교인들의 헌신도 눈물겨웠다. 육칠십 된 노부인들은 떡장사와 묵장사를 하여 푼푼이 기금을 모아들였고, 중년부인들은 부대에서 연극을 하고, 청년 남녀들은 음악회로 모금운동을 벌였다. 심지어 어린 학생들까지 나서서 아이스크림, 소다수, 피넛 등을 팔아서 예배당 건축비로 내어 놓았다.80) 또 놀려 두고 있는 대지에 잡초가 무성히 자라자 1937년 6월에는 여러 날에 걸쳐 교인들이 가서 잡초를 뽑았다.
光化門 본떠 敎會堂 설계
마침내 1937년 10월3일에 「시티 밀(City Mill)」 회사가 새 교회당 건축을 시작했다. 기공식을 10월3일에 거행한 것은 개천절에 맞춘 것이다.
이때에 건축된 한인기독교회의 외형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본떠서 설계한 것이다. 설계한 사람은 한인중앙학원의 첫 졸업생인 한국인 최초의 건축사이며 토목기사 김찬재였다. 그는 형님 김이재를 따라 1903년의 이민 첫 배로 하와이에 이민 왔는데, 그때에 그는 여덟 살이었다. 그러므로 김찬재는 광화문에 대한 기억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광화문의 사진을 보고 교회당 외형을 설계했다.81) 광화문은 조선왕조의 왕실과 국가의 권위의 상징적 건물이었다. 그러한 광화문 모습으로 교회당을 짓는 구상을 누가 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李承晩의 구상이었다고 전해진다. 李承晩은 어려서부터 광화문을 보면서 자랐고,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운동 때에는 광화문 앞에서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李承晩이 1910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판한 정치평론집 「독립정신」에도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광화문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다. 그러한 李承晩이었으므로 1927년에 일본인들이 경복궁의 여러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에 동쪽의 건춘문 쪽으로 옮겨진 광화문만큼 한국의 주권을 상징하는 건물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건축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교회에서는 다시 이종관을 각 섬들을 순방하면서 교회건축 상황을 설명하고 추가 성금을 독려하게 했다.82) 웨스터벨트는 1938년 들어 또다시 1,000달러를 희사하여 교인들을 감동시켰다.83)
반 년 동안의 공사 끝에 1938년 4월24일 오후 3시에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처음에는 예수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던 4월10일 주일에 맞추어 헌당식을 거행할 예정이었으나,84) 준비부족으로 부활절 주일로 맞춘 것이다. 헌당식에는 아이들까지 합하여 1,500명의 인파가 모였다.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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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4월에 준공된 릴리하 스트리트의 韓人基督敎會 예배당. 景福宮의 정문인 光化門을 본떠서 설계했다〔Robert Chand, The Koreans in Hawaii(2003)에서〕. |
敎會堂 신축비용은 4만 822달러 들어
이날의 주인공은 말할 나위도 없이 「선교부장」 李承晩이었다. 「호항한인기독교회 례배당봉헌식 기념」 책자에는 李承晩의 사진과 함께 영문과 국문으로 다음과 같은 「봉정(Dedication)」이 실렸다.
〈우리의 경애하는 리승만 박사께 이 작은 책을 드리나이다.
선생은 우리 전 민족의 인도자이시요,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창설자이시다. 그의 개척정신은 우리들로 하여금 아름답고 고귀한 사업을 할 수 있게 하며, 그의 지도적 감화는 하와이 남녀 청년들의 앞길에 광명을 비춰 준다.〉86)
그리고 목사실에는 李承晩의 사진이 걸렸다. 이 사진 거는 비용은 소년회가 부담했다.
봉헌식의 개회기도는 초대 담임목사였다가 교회를 떠나 있는 민찬호 목사가 했고, 마무리 기도는 상해에서 李承晩의 비밀통신원 역할을 했다가 하와이에 와서 한인기독교회의 지교회인 힐로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장붕 목사가 했다. 설교는 중앙연합교회 목사 레빗(Horace H. Leavitt) 목사가 했고, 李承晩은 봉헌식의 의의를 설명하는 강연을 했다. 양유찬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재정보고를 했다.

〈세계 각 인종이 섞여 사는 이 시대에 우리도 남과 같이 살려면 남들이 하는 일을 해야 될 것인데, 남들이 하는 일을 보면 보통 중요히 여기는 몇 가지 사업 중에 종교사업이 한 가지다. 모든 민족이 각각 저의 믿는 바 종교를 숭상하야 저의 신앙적 복락과 덕의상 발전을 구하나니, 이것이 다 까닭없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우리 한인은 정치상이나 경제상이나 덕의상이나 여지없이 타락된 중에서 생맥이 나게 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를 내어 놓고 어디서 구하리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회를 세운 목적이 다만 우리 장래 영생의 복을 얻는 것으로만 방한한 것이 아니다.
남들은 각각 저의 일을 다하야 저의 사는 세상을 거의 천국같이 만들어 놓아 자유행복을 누리며, 따라서 다른 인종을 구원하고 선교사업까지 힘쓰는데, 우리는 이 처지에서 이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생명길로 아는 종교사업을 남에게 의뢰하야 남이 잘해 주면 고맙다 하고 잘못해 주면 원망이나 하며 가만히 앉았으리오.…〉
『우리의 생명길을 남에게 맡길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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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人基督敎會의 신축을 기념하여 발행된「호항한인 기독교회 례배당봉헌식 기념」의 표지. |
〈그러므로 하와이의 영성 소수인 가난한 남녀 교우들의 신심과 성심으로 모든 반대와 비평과 장애를 불계하며 여러번 풍파를 치르고 여전히 쌓아 놓은 결과로, 호놀룰루에 대지와 건물이 수만여 원 가격에 달하며 수만원 경비로 회당을 건축하며, 힐로와 와히아와에 각각 대지와 회당이 성립되어 물질로도 우리의 소유가 적지 않게 되었고, 또한 본국에 선교구역을 정하야 기독교회의 정신을 선전한 지 십 년이 된지라. 그러므로 이왕에 의심하며 반대하던 백인친구들도 지금은 성심껏 도우며 두호하나니, 이 어찌 우연히 됨이리오.…〉
그러면서 한인기독교회의 교세를 숫자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1918년 12월23일에 설립된 이래로 현재는 호놀룰루의 본 교회를 비롯하여 와히아와, 힐로, 파이아 및 미주 로스앤젤레스까지 분교회가 설립되어 있는데, 이 다섯 교회의 세례교우가 1,263명이고, 유년주일학생이 573명이며, 면려청년회원이 145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호놀룰루 본교회에서는 1년 전부터 청년영어예배까지 보게 되었는데, 평균 출석이 100여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끝으로 한인기독학원까지도 이 교회 교우들의 힘으로 발전하고 있다면서, 하와이의 동포들도 죄악의 멍에를 벗고 천국백성이 되도록 힘쓰라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부인보조회, 국어학교, 여자소년군 등 각 기관이 이 교회에 직속하여 있을 뿐 아니라 멀리 본국에 있는 장로교 구역 하나를 담당하야 과거 십 년 동안을 후원하였고, 갈리히 산곡에 위치한 기독학원도 이 교회 교우들의 성력으로 발전하고 있는 터이다. 하와이 각 지방 형제자매들은 끝까지 더욱 더 성심성의로 남과 같이 잘 살기를 도모하는 동시에 죄악의 멍에를 벗고 천국백성이 되도록 힘쓰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87)
이러한 한인기독교회의 교세와 그것을 대표하는 새 예배당의 건축은 李承晩이 고독한 1930년대에 이룩한 가장 큰 성취였다.
美國人 저명인사들의 2世同胞 졸업축하 연설
李承晩은 반대파들의 자신에 대한 비판을 무시한 채 동포 2세들의 성장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인기독교회의 새 예배당 헌당식이 있고 한 달 뒤인 5월28일 저녁에는 동지회·독립단·기독학생회·기독교·감독교의 연합주최로 이 해의 대학 및 중학 졸업생을 위한 만찬회가 맥켄리 중학교에서 열렸는데, 李承晩은 이 자리에 참석하여 그 특유의 능란한 행동으로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1938년에는 동포자녀들 가운데에서 하와이 대학 졸업생 12명을 비롯하여 323명의 각급 학교 졸업생을 배출했다. 하와이 대학 졸업생이 12명이나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적으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2세들도 있었다. 호놀룰루 상업회의소와 우체국과 하와이 비행회사가 공동 주최로 하와이 각 예비중학생과 중학생들을 상대로 실시한 작문 경시에서는 한인 남녀 학생이 1, 2등을 차지했다.
300명가량이 모인 이날 저녁 만찬회는 양유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학생대표들의 연설과 노래 등의 순서가 있고 난 다음 양유찬은 하와이 대학 학장 클로포드에게 연설을 청했다. 클로포드는 「세계가 학식 발달로 경쟁하므로 한인 학생들도 학술을 연마하고 각국인과 동화하며 각국인 중에서 고상한 문화를 취택하라」고 말했다. 요컨대 훌륭한 미국시민으로서 전문지식을 함양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서 양유찬은 李承晩의 경력을 길게 소개하고 나서 그에게 연설을 청했다. 李承晩은 연설을 시작하다 말고, 지난 5월22일의 韓_美 수호조약 기념일에 슬라덴 박사가 라디오 방송 연설을 하는 것을 재미있게 들었다면서, 자신의 남은 연설시간을 슬라덴 박사에게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슬라덴은 호눌룰루 석간신문의 정치주필이었다. 슬라덴은 활발하게 일어나서 학생들에게 「나는 클로포드 박사의 말에 반대한다. 한인학생들은 미국시민이기는 하나 한국의 역사와 한국말을 뇌수에 기억하라. 역사와 언어는 영혼이다. 사람이 영혼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다」 하고 역설했다. 李承晩은 슬라덴의 이런 말을 유도하기 위하여 그에게 발언기회를 주었던 것 같다. 李承晩은 다시 일어나서 두 사람의 연설요지를 설명하고 나서, 클로포드 학장에게 하와이 대학에 한인교수를 초빙하여 한국의 역사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라고 권고했다.88)
臨時政府와 同志會 일에 관여하지 않아
한인기독교회 신축사업에 몰두하는 동안 李承晩은 임시정부와 동지회의 활동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李承晩은 이때의 자신의 그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1935년에 구미를 달하여 호놀룰루로 온 후로 교회나 사회의 내막을 완화주의로 교정하기를 바라고 1년 반을 두고 힘써 오다가, 필경 또 싸우지 않고는 되지 못할 것을 간파하고, 그때부터 사회나 교회 간에 도무지 간섭을 끊고 상관않기를 결심하여 글과 말로 여러 번 선언하였으나, 40여 년 적공하여 오던 우리 민족운동을 어찌 졸지에 거절하고 말고자 함이었으리오. 다만 여러 번 풍파를 지낸 결과로 새로이 깨달은 바, 내가 혼자 인도자 책임을 가지고 동포의 재정을 모손(耗損)하며 독립은 회복하지 못하고 보니 자연 내게 대한 악감이 심해서, 내 신분에만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의 하고자 하는 일을 해갈 수 없을 만치 되고 보니, 차라리 내가 물러앉아서 다른 이들이 해도 될 기회도 있고 재정도 거두어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가하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한 것이니, 독립은 못할지언정 동족 간에 싸우지는 말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얻게 된 까닭이다….〉89)
그리하여 中_日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도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鎭江에 있던 임시정부는 1936년 7월6일의 국무회의에서 2년 전에 駐美外務行署를 설치하면서 외무위원으로 임명했던 李承晩을 〈사정에 인하여 그 직을 해임〉하기로 결의했다.90) 그리고 넉 달 뒤인 11월3일에는 하와이 군도에 宣諭委員(선유위원) 한 사람을 두기로 하고, 11월19일에 李承晩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카우아이 섬의 玄楯(현순) 목사를 선유위원으로 임명했다.91) 임시정부는 하와이의 재무행서 재무위원도 李承晩의 측근인 李元淳에서 文寅華로 바꾸었다.92)
李承晩과 임시정부의 관계가 호전되는 것은 金九가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면서부터였다. 金九를 주축으로 한 새 내각이 구성되자 동지회는 정무원 文仁會 명의로 임시정부 재무장 宋秉祚에게 동지회는 임시정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앞으로는 인구세를 적극적으로 수합하여 보내겠다고 통보했고, 한국국민당 기관지 「韓民」이 발행되자 동지회간부들은 축하문을 보냈다.93) 金九가 1937년 8월에 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면서 李承晩과 주고 받은 편지는 두 사람 사이의 신뢰관계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앞에서 본 대로, 金九는 중국에 있는 세 독립운동단체의 합동은 자기가 책임지고 추진하겠다면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한인단체들의 합동은 李承晩이 나서서 해 줄 것을 당부했던 것이다.
同志會와 國民會 하와이總會의 合同論議
中_日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임시정부에 대한 후원을 단합해서 추진할 필요성이 절감되면서 동지회와 국민회 하와이총회의 합동논의가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1937년 10월10일에는 두 단체 교섭위원회가 합동결의안까지 작성했다. 결의안의 골자는 두 단체는 각각 지방의원의 동의를 얻어서 두 단체의 사단법인 관허장을 취소하고 합동한다는 것이었다.94) 그러나 국민회 하와이총회가 법인 관허장 취소와 관련한 조항을 수정할 것을 제의하고 동지회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합동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한인단체의 합동문제에 대한 李承晩의 입장은 1938년의 3·1절 기념연설에 표명되어 있다.
『한인들이 합동을 부르는 이때에 내가 참여하면 합동이 못된 후에는 허물을 나에게로 돌릴 터인즉, 나는 한인들의 합동이 잘되어 대사업이 성공하기를 희망하는 것이외다. 그러나 합동이 되고라도 일은 아니하고 거저 붙잡고 앉았기만 하면, 나는 일 아니하는 백만동지를 못 얻을지라도 일하고자 하는 한두 사람이라도 붙들고 나가려 합니다』95)
合同運動은 실패로 끝나
이러한 주장은 합동문제에 대하여 李承晩이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때까지도 李承晩은 「國民報」의 주필이면서 국민회 쪽 교섭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金鉉九 등 국민회 간부들에 대한 괘씸한 생각을 좀처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합동문제는 협의가 계속되어 마침내 9월8일에는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루어졌다.
〈양 회의 법인 관허장은 그대로 두고 합동하되, 단체 이름은 합동된 단체가 정하고, 규칙을 수정하며, 임원을 공선하고, 회원의 권리와 의무를 꼭같이 한다. 앞으로 어느 단체의 법인 관허장을 취소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인관허장을 없앨 단체의 1938년도 임원의 동의아래 진행한다.〉96)
이러한 합동방안을 가지고 국민회 하와이총회와 동지회는 연합의회를 소집했다. 11월18일부터 시작된 연합의회는 그러나 이내 난관에 부딪혔다. 먼저 회의 참가자의 자격문제를 두고 의견이 대립된 데 이어 국민회와 동지회의 재산보고 문제와 그와 관련되어 제기된 합동 단체의 지도자 선임방식 문제를 놓고 대립이 첨예해졌다. 그것은 결국 새 단체의 주도권 다툼이었다. 국민회 하와이총회는 회비를 납부한 순수회원들만으로 선거할 것을 주장했고, 동지회는 회원과 비회원을 가리지 말고 중립적 인사들을 포함한 모든 하와이 한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대립은 국민회 하와이총회의 회원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국민회 하와이총회 쪽에서는 자신들의 회원수가 463명인 데 비하여 동지회 회원수는 80명에 불과하다고 보았다.97) 그러나 국민회 하와이총회의 이러한 주장은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동지회원 수는 300명가량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동지회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불리한 회원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지회는 합동논의를 시작한 때부터 하와이 한인사회단체의 대동단결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고,98) 그러한 노력은 연합의회의 제2차 회의 때부터 가와이 단합회와 대조선독립단의 대표참가를 권유하고 있는 것으로도 표명되었다. 그러므로 동지회가 투표자격을 모든 동포들에게 주자고 한 것은 하와이 한인사회의 합동이라는 대의명분에 입각한 일관된 주장이었다.99)
이렇게 하여 하와이 한인단체의 합동운동은 12월7일의 제13차 회의를 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歐美委員部를 다시 열어
동지회는 하와이 동포사회의 합동운동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李承晩의 외교활동 재개를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그것은 李承晩이 하와이에 온 뒤로 문을 닫고 있는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워싱턴을 떠나올 때에 스태거스(John W. Staggers) 변호사 소유의 콜럼비아 빌딩(Columbia Building) 312호의 구미위원부 사무실 집세 120달러를 지불하지 못하고 왔었는데, 이 돈을 1937년 10월21일에 몬태나 지방의 동지들이 보내와서 동지회 상무원 김광재 이름으로 스태거스에게 부쳤다. 11월6일부로 보내온 스태거스의 다음과 같은 편지는 동지회 인사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경애하는 김선생.
이 편지는 우편으로 부송하신 120달러 금액을 접수하여 한인위원부 사무실세를 전부 청장한 영수증입니다. 내가 선생에게 감사하는 동시에 권고하는 것은 트렁크들과 문건들을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박사께서 언제든지 쓰시기에 편리합니다.
이박사 부인께 문안하여 주십시오. 나 개인으로 선생께 부탁하는 것은 극동 정세는 한인들이 희망하고 기다리던 바 대로입니다.〉100)
한인기독교회 예배당 건축이 끝나자 구미위원부 사무실 운영 재개 문제가 동지회 사업으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오랫동안 동지회 중앙부장으로 동지회를 주관해 온 이원순은 자신이 설득하여 李承晩 내외를 워싱턴으로 보냈다고 적고 있다. 이원순은 동지회 간부들과 함께 李承晩이 워싱턴에 가서 조용히 독립운동에 관한 책을 집필하도록 하자고 합의하고, 李承晩을 찾아가서 동지회의 의견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글쎄 말이야. 그건 나도 원하는 바였어』
李承晩은 이렇게 말하면서 쾌히 승낙했다고 한다.101)
동지회 간부들 사이에서는 구미위원부가 임시의정원에 의하여 폐쇄령이 내려졌던 사실을 들어 임시정부와의 마찰을 염려하면서 구미위원부 문을 다시 여는 데 반대하는 의견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동지회 중앙부장 김이제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그러한 사실을 반증해 준다.
〈거듭 말씀코저함은 기왕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성임시정부 조직될 때에 외교 선전의 사명을 외양에 있는 우리에게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대통령이신 리승만 박사의 주선으로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여러 가지로 활동한 결과 우리 광복사업에 대한 많은 정치적 계획의 동정을 연학하여 놓았었다.…〉102)
김이재는 구미위원부가 상해임시정부에 의해서 설치된 것이 아니라 3·1운동 직후에 서울에서 선포된 漢城政府의 約法에 따라 임시대통령 李承晩이 설치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한성정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李承晩 자신은 워싱턴으로 가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렇게 침묵하고 앉은 이 사람의 속이 탈 동시에 여러 동포들의 관찰이 또한 나와 같아서, 필경은 참다 못하여 나에게 대한 원망과 질문이 들어와서, 리박사가 아니하면 누구더러 하라고 그저 앉았느냐 하는지라. 그런즉 이런 좋은 기회를 가지고 세계를 대하야 한마디 못 하고 앉아서 내게 돌아오는 원망과 죄책은 면할 수 없이 되나니, 내가 차라리 나의 힘대로 직책이나 행하며 시비를 듣는 것이 도리어 낫겠다는 각오를 가지게 된 고로 수차 공동회를 불러서 토의하게 된 결과가 나에게 책임을 지우기에 이르렀나니, 나는 이때부터 다시 결심하고 불시로 짐을 묶어서 미주로 건너갑니다.…〉103)
李承晩 내외는 1939년 3월30일에 호놀룰루항을 떠났다. 한인기독학원 일은 이원순의 부인 매리에게 맡겼다.104) 처음에는 3월31일에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를 탈 계획이었으나, 샌프란시스코와 인근의 선원들의 파업이 계속되고 있어서 하루를 앞당겨 시애틀로 가는 영국기선을 탄 것이었다.105)●
1) 王池豊, 「抗日戰爭の起點―蘆溝橋事變」, 井上淸·衛藤瀋吉編著, 「日中戰爭と日中關係」, 1988, 原書房, 55~75쪽 참조.
2) 日本國際政治學會編, 「太平洋戰爭への道(3) 日中戰爭(上)」, 1987, 朝日新聞社, 298~341쪽 참조. 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196쪽. 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196쪽 ; 「新韓民報」 1937년 8월26일자, 「임시정부공보(제62호)」. 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197쪽.
6) 內務省警報局, 「昭和12年(1937)ニ於ケル社會運動ノ狀況」,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1967, 原書房, 596쪽. 7) 朝鮮總督府警務局,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昭和13年(1938)」, 1966, 巖南堂書店, 270쪽. 8) 韓相禱는 조선총독부 경찰의 이 기술을 사실이었던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국제환경」, 2000, 한울, 244쪽). 9) 「支那事變勃發以後南京陷落?の中南支在住不逞鮮人の動靜」, 社會問題資料硏究會編, 「思想情勢視察報告集(5)」, 1977, 東洋文化社, 73쪽. 10)サンケイ新聞社, 「蔣介石秘錄(12)」, 1976, サンケイ出版, 33쪽. 11) 「思想情勢視察報告集(5)」, 74쪽. 1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200쪽;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5쪽. 1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7쪽. 1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5쪽. 15)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595쪽. 1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6쪽.
17) 「新韓民報」 1937년 8월19일자, 「시국문제를 협의코저 김위원장 입상」. 18) 「新韓民報」 1937년 9월9일자, 「원동풍운속에 열린 제4차 중앙집행위원회」. 19)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360쪽. 20)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598~599쪽. 21)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선언」, 姜萬吉編, 「趙素昻」, 1982, 한길사, 91~92쪽.
22) 「金九가 李承晩에게 보낸 1937년 8월2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六) 簡札1」, 1998, 延世大現代韓國學硏究所, 324~325쪽. 23) 尹炳奭, 「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趙素昻篇(4)」, 199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8쪽.
24) 「新韓民報」 1937년 10월7일자, 「임시정부포고문」. 25)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599쪽. 26) 「新韓民報」 1937년 10월14일자,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은 적극 진행」. 27) 「백범일지」, 360~361쪽. 28) 「新韓民報」 1937년 10월14일자,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은 적극 진행」.
29)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08쪽. 30) 「백범일지」, 368쪽; 趙擎韓 증언. 31) 「백범일지」, 374쪽. 32) 「백범일지」, 362쪽. 33) 「백범일지」, 362쪽. 3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임시의정원Ⅰ」, 302쪽; 趙擎韓,, 「白岡回顧錄」, 1979, 韓國宗敎協議會, 227쪽. 35) 趙擎韓, 앞의 책, 227~263쪽. 36) 「백범일지」, 362쪽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2쪽. 37)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제시의 일기」, 1999, 혜윰, 31쪽.
38) 「백범일지」, 368쪽. 39)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앞의 책, 34쪽. 40) 「백범일지」, 368쪽. 41) 「백범일지」, 367쪽 ; 「國民報」 1938년 5월4일자, 「김구선생 대부인」. 42) 「國民報」 1938년 10월20일자, 「김구선생 대부인」. 43) 「國民報」 1938년 5월18일자, 「임시정부 상납금액」. 44) 「백범일지」, 367쪽.
45) 金九, 「여러분 선생께」(1938년 6월20일), 「白凡金九全集(4)」, 502~503쪽. 46) 趙擎韓, 앞의 책, 266쪽. 47) 같은 책, 266~267쪽. 48) 「新韓民報」1938년 7월14일자, 「김구선생의 편지」. 49) 「백범일지」, 369쪽; 「임시정부 국무위원 6인 보고서(백범총살 사실 기록)」(1938년 6월15일), 「白凡金九全集(4)」, 498쪽. 50)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899쪽. 51) 「백범일지」, 370쪽.
52) 「백범일지」, 368~369쪽. 53) 「思想情勢視察報告集(6)」, 86쪽. 54) 「백범일지」, 369쪽. 55) 「임시정부 국무위원 6인보고서(백범총살 사실 기록)」(1938년 6월15일), 「白凡金九全集(4)」, 499쪽; 趙擎韓, 앞의 책, 265~266쪽. 56) 「백범일지」, 369~370쪽.
57)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613쪽. 58) 위와 같음. 59)「임시정부 국무위원 6인보고서(백범총살사실 기록)」(1938년 6월15일), 「白凡金九全集(4)」, 498쪽 ; 지복영,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_항일 무장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 장군」, 1995, 문학과 지성사, 338쪽. ; 「백범일지」, 370~371쪽. 60) 「백범일지」, 371쪽 ; 蕭錚, 「中國國民黨과 金九」,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1983, 博英社, 155~156쪽. 61) 「여러분 선생께」(1938년 6월20일), 「白凡金九全集(4), 501쪽 ; 「백범일지」, 370쪽 ; 「金勝坤志士證言」, 「韓國獨立運動證言資料集, 1986, 韓國精神文化硏究院, 45쪽. 6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303쪽. 63) 「백범일지」, 370쪽. 6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08쪽. 65) 「백범일지」, 371쪽.
66) 「백범일지」, 371~372쪽. 67) 「임시정부 국무위원 6인보고서(백범총살 사실 기록)」(1938년 6월15일), 「白凡金九全集(4)」, 498~499쪽.
68) 「여러분 선생께」(1938년 6월20일), 「白凡金九全集(4)」, 500~503쪽. 69) 「新韓民報」 1938년 7월14일자, 「김구선생의 편지」. 70) 「新韓民報」1935년 4월11일자, 「하와이: 리박사 강연회」. 71) Yong-ho Ch’oe, “Syngman Rhee in Hawaii : His Activities in Early Years, 1912-1915”(Unpublished), pp.33~34. 72) 「太平洋週報」 1939년 4월1일호, 「기독학원 기숙하는 남녀학생」, 12쪽. 73) 「太平洋週報」 1938년 5월14일호, 「기독학원 확장」, 14~15쪽.
74) 이덕희,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사」(미간행), 「제5장 치유와 안정의 목회」. 75) 「예배당 건축연혁에 대하야」, 「호항한인기독교회 례배당봉헌식 기념」, 1938, 호항한인기독교회, 4쪽. 76) Y. C. Yang, “The building of the Korean Christian Church”, 「호항한인기독교회 례배당봉헌식 기념」, 2쪽. 77) 이덕희, 앞의 글. 78) Star Bulelin, February 8, 1936, June 19, 1937, 이덕희, 앞의 글. 79)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ith, Dodd Mead and Company, 1960, p166. 80) 김혁식, 「예배당 건축에 대하야」, 「太平洋週報」 1938년 1월22일호, 15쪽.
81) 이덕희, 앞의 글. 82) 김혁식, 「공고」, 「太平洋週報」 1938년 1월15일호, 15쪽. 83) 「太平洋週報」 1938년 2월12일호, 「왜스터벨트의 감사한 일」, 16쪽. 84) 김형식, 「호항한인기독교회소식」, 「太平洋週報」 1938년 5월19일호, 15쪽. 85) 「太平洋週報」 1938년 5월7일호, 「기독교회 예배당봉헌식 후문」, 10쪽. 86) 「호항한인기독교회 례배당봉헌식 기념」, 1쪽.
87) 한인기독교회, 「호항한인기독교회 례배당봉헌식 기념」, 3쪽.
88) 「太平洋週報」 1938년 6월4일호, 「한인학생계의 영광」, 1~4쪽. 89)「太平洋週報」 1939년 4월8일호, 「리박사려행담」, 1~2쪽. 9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헌법·공보」, 193쪽. 91) 위와 같음. 9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헌법·공보」, 194쪽. 93) 社會問題資料硏究會編, 「思想情勢視察報告集(2)」, 388쪽, 390쪽.
94) 「國民報」 1937년 10월13일자, 「국민회-동지회 양 단체 대표 결의안」. 95) 「太平洋週報」 1938년 3월5일호, 「三·一절 경축성황」, 12쪽. 96) 「國民報」 1938년 9월14일자, 「제5차 회의 공함」; 「太平洋週報」 1938년 9월24일호, 「합동에 대한 공함」, 9쪽. 97) 「國民報」 1938년 12월14일자, 「사설: 연합의회 정회」 ; 「太平洋週報」 1938년 12월17일호, 「동지와 동포전에」, 4~5쪽. 98) 「太平洋週報」 1938년 11월26일호, 「임시대표회 순서와 결의사항」, 3~5쪽. 99) 洪善杓, 「在美韓族聯合委員會硏究(1941~1945)」, 2002, 漢陽大學校博士學位論文, 25쪽. 100) 「太平洋週報」 1938년 2월 5일호, 「감사장」.
101) 李元淳, 「世紀를 넘어서―海史 李元淳自傳」, 1989, 新太陽社, 209~210쪽. 102) 「太平洋週報」 1939년 2월4일호, 김이제, 「위원부 문을 개방하자」, 1쪽. 103) 「太平洋週報」 1939년 4월8일호, 「리박사려행담」, 2쪽. 104) 李元淳, 앞의 책, 194쪽. 105) 「太平洋週報」 1939년 4월1일호, 「리박사전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