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물 연구] 세계무대 데뷔 20주년 공연 가진 조수미

『불같은 성격이지만 氣가 세진 않아요. 무대 위에선 뭔가 씌워지나 봐요』

김태완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풍요로워질수록 사람들이 더 힘들어 해요. 그런 분들을 위로하고 싶어요』

曺秀美
1962년 서울 출생. 선화藝高 졸업. 서울大 음대 2년 중퇴. 이탈리아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졸업. 지오넬라 보렐리 교수와 유병무·이경숙 교수로부터 사사. 이탈리아 시칠리의 엔나 콩쿠르(1985), 스페인의 베로나 콩쿠르(1986) 등에서 1위 입상. Forli 황금 기러기상(1994), 대한민국 문화훈장(1995), KBS 해외동포상(1997) 등 수상.
158cm의 한국형 아담 사이즈
사진·조세현
  디바 曺秀美(조수미), 오페라 「토스카」에서 흐르는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처럼 한 시절을 풍미했다. 올해는 그녀가 세계무대에 데뷔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전쟁과 같은 열정적 공연을 거듭하며 동서 대륙을 오갔고, 굶주린 암사자처럼 관객과 비평가들을 덮쳤다.
 
  흔히 曺秀美 안에는 두 사람이 있다고들 한다. 「디바 曺秀美」와 「여자 曺秀美」. 세계무대 위에서는 여왕으로 군림하면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사랑을 꿈꾼다. 언젠가 그녀는 『나도 사랑을 하고 싶다. 결혼도 하고 싶고, 아이도 갖고 싶다』고 했다. 12년 전의 말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말이다.
 
  曺秀美는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요란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마리아 칼라스와도 스캔들 속에서 사랑에 굶주려 온 마를린 먼로와도 닮지 않았다. 통제되지 않은 폭포수 같은 소리를 지녔음에도 무대 밖의 그녀는 그저 담백할 뿐이다. 학창시절, 가버린 풋사랑 얘기를 하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는 더없이 애절하고 감동적이며 카리스마가 넘친다. 키 158cm의 한국형 아담 사이즈에서 어떻게 그런 세계적인 폭포수 같은 열정이 뿜어져 나오는지 의문이다. 모르긴 해도, 화려한 디바로 떠받들여진 열정 너머에 사랑의 열정이 숨쉬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를 만난 것은 지난 10월23일 오후 서울의 한 호텔이었다. 9월3일부터 이어진 데뷔 20주년 기념 전국 순회 독창회를 마친 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피날레 공연을 마친 직후였다. 공연은 일찌감치 매진돼 티켓을 구하려는 시민들의 요구가 빗발쳤다고 한다. 피곤함이 가시지 않은 듯 『얼굴에 부기가 덜 빠져 화장으로 조금 가렸다』고 했다. 어둑어둑한 늦가을 하늘이 차갑게 거리를 드리웠다.
 
  ―세계무대 데뷔 20주년 공연은 잘 끝마쳤습니까.
 
  『좋았고… 이제 시작이죠, 뭐. 당시 데뷔한다는 첫 느낌보다는 몇만 번 이상 그 무대에 서본 것처럼 굉장히 자연스러웠습니다. 마치 전생에 해본 공연처럼 분장하고 기다렸어요. 빨리 나가 노래했으면 하는 느낌이 많았습니다. 공연을 끝마친 뒤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꽃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당연히 해야 하고, 서야 할 곳에 섰다고 생각했어요. 생소하거나 떨리지 않았고, 어린 나이였지만 외국에서 태어난 적이 있는 것 같았어요』
 
  曺秀美가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은 1986년 10월26일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베르디 극장이었다. 23세 나이에 「리골레토」의 여주인공 질다役을 맡은 그녀는 이 무대에서 10여차례의 커튼콜을 끌어냈다. 이튿날 이탈리아 조간신문에는 그녀의 사진과 함께 공연평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데뷰하는 신인 소프라노라고는 믿을 수 없는 노련한 연기, 환상적인 콜로라투라…」
 
 
  『돈을 모르고 살았어요』
 
曺秀美 세계무대 데뷔 20주년 기념 콘서트. (사진·크레디아)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세월이 가르친 것은 무엇인가요.
 
  『돈도 모르고 그저 노래만 불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저를 진보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음악과 예술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보다 제가 태어난 나라, 제가 위치한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이젠 테크닉적인 아름다운 목소리를 보여 주는 것을 떠나, 같은 자리에 서면서도 어떤 식으로 주위에 도움이 될까, 생각하게 됐어요. 생각이 이기적인 데서 많이 바뀐 셈이에요』
 
  曺秀美는 외교통상부 문화홍보대사(2002~), 세계박람회유치위원회 홍보대사(2002~), 인천국제공항 명예홍보대사(2002~), 월드컵 문화대사(2002), 유네스코 평화예술인(2003~), 서울시 홍보대사(2003. 5~), 광주국제영화제 명예홍보대사(2005~), 2014년 평창 동계올림픽 명예홍보대사(2005~) 등 한국의 문화·예술적 위상을 높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만 아니라 무대 밖에서 머리띠를 졸라맨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정치를 한번 해보고 싶어요. 오늘 디디고 선 이 세상이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깨쳐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음악가의 입장에서 하려니 굉장히 힘들어요.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공인으로서 명분에 맞게 나서서 공연하고 그 수익금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일 역시 쉬운 일이 아닌데요.
 
  『그렇죠, 그것도 예전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열심히 하려 합니다. 제가 한 번 무대에 안 서는 한이 있더라도요. 여자가 칼을 뺐으면 해야죠(웃음). 하지만 사회적으로 아직 미숙한 게 많아요. 우체국에 가서 어떻게 편지를 보내야 할지, 은행에서 돈을 이체하거나 송금하는 방식도 모르고, 그런 면에서 사회적으로 무능합니다』
 
  曺秀美는 데뷔 20주년 독창회를 위해 오랜만에 전국 투어를 가졌다. 부산·대구·대전·광주·포항·춘천·수원·안산·거제까지 구석구석을 누빈 것이다. 그녀는 『더 부담이 되더라』고 했다.
 
  『대도시와 지방도시의 문화시설 차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방에 계시는 분들이 문화적인 혜택을 받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연주자(그녀는 자신을 가수가 아닌 「연주자」로 일컬었다) 입장에서 보면 준비하는 분들의 열정은 굉장히 큰데,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잘해 주고는 싶은데 마음만 이만한 거죠. 그런 것을 보면 안타깝고… 미약한 환경에서도 더 다가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느껴져요.
 
  사실 대도시 팬들은 와서 고급스럽게 볼 것만 딱 보고, 어떻게 보면 조금… 따지시잖아요. 그러나 지방팬들은, 「여기까지 와준 것만 해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셔요. 그러니 더 부담되고 더 잘해 주고 싶어요』
 
 
  『분위기를 타는 편이에요』
 
사진·조세현
  그녀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 조용조용하게 말해서 간혹 말끝이 잘 들리지 않았다. 속삭이는 것 같았다. 무대 위 프리마돈나의 모습이 왠지 낯설어 보였다. 「목소리가 차분하고 조용해서 놀랍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날씨를 타나 봐요』
 
  그러고 보니, 거리는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제법 쌀쌀한 바람까지 불었다. 시간이 어느덧 2006년의 끝자락에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다른 여자도 그렇겠지만 분위기를 타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음악을 하니까 감정의 표현이 강한 것 같아요. 여기까지 차를 타고 오면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났어요. 서울이라는 데가 확실히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학창시절을 이곳에서 보냈잖아요. 게다가 날씨가 이런 날은….
 
  무대 안과 밖의 제 모습은 달라요. 氣(기)가 별로 세지 않고요, 무대 위에선 뭔가 씌워지는 것인지 모르지만 밖에선 꼼짝 못 해요(웃음). 어수룩하고 순진하고… 보통 예술가들 중에선 그런 사람이 꽤 있어요. 좋게 보면 순수한 거고, 나쁘게 보면 바보 같고…』
 
  문득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으로 扮(분)한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얼굴에 온통 화려한 금박을 뒤집어쓰고 키의 두 배나 되는 날개옷을 입은, 曺秀美를 디바로 만든 것이 바로 「밤의 여왕」이었다. 고난도 테크닉에다 저음에서 고음까지 현란한 기교가 필요하기에 가수들 사이에선 「밤의 여왕役은 잘해야 본전」이라고 할 정도다. 자칫 목을 다쳐 다시는 무대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용하신 분이 「밤의 여왕」에선 어떻게 달라질 수 있나요.
 
  『그런 역할을 하면 마음가짐이나 표정이 혹독하게 변하죠(웃음)』
 
  ―무대 위 모습은 평소와 다른가요.
 
  『그렇죠, 프로이니까. 저는 그래요, 직업과 생활은 다르다고 봐요. 저는 굉장히 구별하는 편인데, 1960년대 마리아 칼라스나 마릴린 먼로처럼 사생활까지 요란한 사람이 절대 아니에요. 화려한 화장이 문제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굉장히 달라요.
 
  예를 들면, 슈퍼마켓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공연이 없을 때는 꾸미고 다니지 않아요.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고 차도 지프를 몰고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다니는 걸 좋아해요. 옷장을 보면 드레스, 아웃피셜한 정장, 캐주얼한 정장으로 나뉘지요. 드레스를 입다가 캐주얼을 입으면 나이가 10년이나 어려 보인다는 말을 들어요. 꾸미거나 차려입으면 노숙해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려 보이니, 장점이죠』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리시나요.
 
  『흥얼거리는 것은 없어요. (연습을)하면 확실히 하고, 안 하면 안 하고. 누굴 좋아하면 확실히 좋아하고, 안 좋으면 확실히 안 좋아하고. 요즘 들어선 느슨해지려고 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중년이라고 봐요. 균형을 맞춰서 뭐든지 조화가 잘 이뤄지면 행복할 것 같아요. 너무 좋아하지 않고… 다 감싸는 것이 필요하기는 한데, 때론 성격이 불같아서 힘들긴 하네요』
 
 
  神이 내린 목소리
 
소프라노 曺秀美씨가「책읽는 사회 만들기 운동본부」의 홍보 포스터 모델로 나섰다.
  曺秀美가 세계적인 디바가 된 것은 거장 지휘자 카라얀의 천거를 받은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화다. 카라얀은 그녀가 부른 「리골레토」에 나오는 질다의 아리아 「그리운 이름」을 듣고, 그녀에게 『神(신)이 내린 목소리야. 그동안 어디 숨어 있었지』 했다고 한다.
 
  ―「神이 내린 목소리」로 불리는데, 실제로 神을 믿나요.
 
  『천주교 신자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정신없이 살아온 것 같아요. 얼떨결에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하지만 정말 많은 일을 한 것 같아요. 대륙을 바꿔 가면서 안 서본 극장이 없을 정도입니다』
 
  ―또 세월이 흘러 10년 뒤엔 어떤 모습일 것 같나요.
 
  『모르죠, 30년은…. 제가 하기 나름이겠지만 神이 다 정하시는 것 같아요. 그분이 정해 준 길이 있기에 제가 싫어도 그냥 그 길로 가는 것 같아요』
 
  ―지금의 모습이 神의 계획에 의해 이뤄졌다는 말이군요.
 
  『네, 그것이 하느님이 됐든, 부처님이든, 알라든 분명히 뭔가가 있어요. 복종은 아니지만, 감지를 하며 해주시는 대로 저는 따라갈 뿐이에요』
 
 
  킥복서?
 
  ―성당엔 자주 가시는 편인가요.
 
  『솔직히 성당엔 자주 못 가요. 기도는 많이 하는 편이고 묵주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명상에 잘 잠기는 편이지요. 평소엔 팬들, 주위 사람과 어울리지만 혼자 연습해야 하는 시간이 많으니 혼자 많이 생각하게 되고… 또 시간을 남에게 뺏기는 것을 싫어하고 제 시간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공연이 끝나면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분장 지우고 샤워하고, 콘서트가 끝난 뒤에는 흥분된 상태가 많으니까 금방 잠을 못 자니 책도 읽고 국제전화나 메일도 합니다』
 
  그녀는 운동을 좋아한다. 특히 킥복싱으로 몸을 단련한다고 했다.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샌드백을 치는 曺秀美를 상상하니 조금 재미있어졌다.
 
  『뛰고 땀 내는 것을 좋아해요. 3년간 계속 킥복싱을 해왔습니다. 정신건강도 운동을 함으로써 강해지고, 육체적으로도 뛰고 나면 에너지가 더 강해져요. 에너지 하면 저 아니겠어요?(웃음)』
 
 
  유학 첫날부터 일기 계속 써
 
오페라「리골레토」(질다役) 무대의 한 장면.
  그녀는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 1983년 3월28일부터 지금까지 매일 일기를 써왔다. 유학 첫날 일기장에 「어떤 고난이 닥쳐도 꿋꿋이 이겨 내며 약해지거나 울지 않을 것, 외로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늘 도도하고 자신만만할 것, 어학과 노래에 온통 치중할 것」이라 썼다고 한다.
 
  그날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공항에 도착하니, 뒷바라지를 부탁했던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용감하게 택시를 불러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스페인 광장 옆에 있는 호텔로 가자고 했다. 「로마의 휴일」에서 온갖 꽃들로 장식된 그 광장이 아름다웠다는 기억이 스쳤던 것이다.
 
  밤 10시가 넘은 광장은 한적했다. 가로등 불빛에 가는 빗줄기가 뽀얗게 드러났다. 영화에서 보았던 꽃은 피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밤비에 젖고 있는 스페인 광장은 아름다웠다.
 
  그녀가 쓴 수필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에는 당시의 기억을 이렇게 더듬고 있다.
 
  <(스페인) 광장을 벗어나 이름 모를 거리를 이리저리 고아처럼 쏘다녔다. 가는 빗줄기가 내 몸을 촉촉이 적셔 왔다. 나는 가뭄에 시들었던 꽃처럼 로마의 비를 빨아들이며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새로움만큼 자극적인 게 또 있을까. 나는 낯설음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유학하는 그날부터 일기를 썼어요. 1983년 3월28일부터 지금까지 썼네요. 어떤 때는 졸리고 피곤해서 몇 자 안 쓸 때도 있지만 어느 날은 길게 써요. 예전에는 1인칭으로 시작하는 글을 많이 썼지만 언제부턴가 주위 사람 이야기를 많이 쓰는 게 달라진 점이랄까요? 저보다 주위에 있는 사람, 가까운 사람의 모습을 그리며 일기를 씁니다』
 
  ―지금 쓰고 있는 일기장은 무슨 색깔입니까.
 
  『보라색입니다. 저는 보라색狂(광)이에요. 보라색이 저하고 잘 맞아요. 강렬한 빨간색과 이지적이고 차가운 파란색이 잘 섞인 신비한 색입니다. 제 성격이 약간 그런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강렬하지만 차가운 느낌도 들어요. 예술가로서 제 자신에게 혹독합니다. 쥐뿔도 없으면서 자신감이 생겨나진 않잖아요. 많은 연습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보라색은 제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드레스도 보라색 풍이 많나요.
 
  『좋아하는 편이에요. 이탈리아에서는 보라색을 불운의 색이라고 해서 안 입어요. 하지만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프랑스는 초록을 불운의 색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미신일 뿐이죠. 제가 어딜 가든 자신 있으면 상관하지 않게 되는 거죠. 좀더 그릇이 커졌죠. 자질구레한 것을 보지 않고 크게 보고… 나잇값을 해야죠』
 
 
  『저는 한국인이니까요』
 
사진·조세현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물론, 한국 사람으로서 외국에서 명성을 떨칠 때가 가장 자랑스럽죠. 어려서부터 한국을 떠나와서인지 우리나라가 잘돼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요. 그런 면에서 굉장히 예민해요. 한국에서 안 좋은 소리 들리면 힘이 없고, 잘되면 덩달아 신이 나고….
 
  사실 한국 국적 갖고서 여행하기 힘들잖아요. 미국 국적으로 바꿀 수도 있었고, 쉽게 다른 나라 국적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 싫더라고요. 얼굴이 한국인이고 제 혼이 한국인인데, 여행 좀 잘하겠다고 국적을 바꾸기는 싫었습니다. 저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국 사람이니까요』
 
  오페라는 화려한 무대와 정열적인 가수, 그리고 스토리가 이뤄 내는 종합예술이다. 격이 높은 아리아를 부르는 오페라 가수가 대중음악을 알까? 웬걸, 그녀는 즐겨 듣는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대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음악을 자주 듣는 편인데, 연주여행을 가면서 클래식 소품을 주로 듣지만 최신 유행음악도 들어요. 요즘 어떤 종류의 음악이 주목을 받는지 알아야 될 것 같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요즘 우리 가요를 어떻게 보세요.
 
  『멜로디나 편곡, 화성 면에서 굉장히 좋아요. 예전엔 일본 음악이 좋다고 느꼈는데 요즘은 일본 못지않다고 느껴요. 창법도 좋고, 노래 잘 하시는 분도 많아요. 확실히 우리나라 아티스트들은 동양에서 리더가 될 소질이 너무 많아요』
 
 
  최신곡을 좋아하지만 트로트는 글쎄?
 
1983년 3월 曺秀美씨가 로마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 앞줄 아버지 조언호(작고), 어머니 김말순씨. 뒷줄 왼쪽부터 曺秀美, 동생 영준·영구.
  ―트로트는?
 
  『트로트는… 노래방에 가서 들어주기는 하는데(웃음), 그런 장르는 제가 소화하기에는 좀… 공연이 끝나면 스태프들끼리 쫑파티하러 노래방엘 가는데, 소위 세계적인 성악가 앞이라고 해도 하나도 겁내지 않고 다들 잘 부르니까…』
 
  ―멜로 드라마를 보고 울기도 하나요.
 
  『저를 울리게 하는 드라마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소문난 칠공주」라는 주말 드라마에 제 노래가 들어가는데, 제가 불렀지만 정말 노래와 잘 맞는 것 같아요(웃음). 「주몽」은 아직 못 봤어요』
 
  앞서 「명성황후」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앨범에 실린 「나 가거든」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曺秀美의 노래가 담긴 명성황후 OST는 발매한 지 한 달여 만에 25만 장이 팔렸다. 그녀가 처음 보여 준 높고 여린 창법은 국내에서 들을 수 없었던 매혹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명성황후」 뮤직 비디오는 교육방송(EBS) 국사 교재로 쓰이기도 했다.
 
  『가장 큰 히트곡은 「나 가거든」입니다. 뮤직 비디오를 아주 잘 만들었어요. 성악가이지만 드라마나 크로스오버 앨범을 통해 대중과 가까워져서 기쁩니다. 어려운 오페라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제 음악을 들어줬으면 해요.
 
  실은 높은 무대에서 한걸음 내려와 다가가는 식으로 크로스오버한 곡을 불렀어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해 못 하고 힘들어 했지만 저는 굉장히 자유로워요. 제 재능이나 목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바로 제게 있기 때문이지요. 팬들이 평가하겠지만, 저는 하나의 「바캉스」라고 생각해요. 매번 사람이 심각하게 살 순 없잖아요.
 
  두드려 본 적 없는 문을 열어 보고, 다른 곳에 눈길을 두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센스가 필요하다고 봐요. 크로스오버한 곡들을 여러 번 부른 것 같은데 23년 동안 딱 2개 음반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20代부터 40代 중반까지를 겨냥한, 수준은 있지만 너무 어렵지 않은 곡들을 많이 부르고 싶어요』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지 않았나요.
 
  『몇 % 더 팔린다고 해서 제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어서, 실제 판매량에 관심이 없어요. 팔렸다는 것보다는 많이 들어 줬으면 해요. 사실 커피 한잔 하면서 여유 있게 듣는 음악이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 같아요. 오늘 날씨처럼 가을빛이 완연한 날에 아리아를 듣는 것은, 솔직히 저도 말리고 싶거든요(웃음)』
 
 
  아, 아버지
 
  지난 4월4일 프랑스 파리 샤틀레 극장. 曺秀美는 이날 레퍼토리를 모두 소화한 뒤 네 번째 앙코르 곡으로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택했다. 곡을 부르기 직전 그녀는 비로소 입을 뗐다.
 
  『지금 먼 이역만리 한국에선 아버지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순간 객석에서는 탄식과 함께 격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목이 메였으나 울지 않았다.
 
  이틀 뒤인 4월6일 부랴부랴 귀국한 曺秀美는 서울 흑석동 성당 납골당으로 아버지 曺彦鎬(조언호)씨의 유골을 찾은 뒤에야 억눌렀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제 일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죠. 아버지의 임종도 못 지키고,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예정된 음악 스케줄을 소화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만인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음악가가 팬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귀국을 말리셨죠』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저는 아버지와 똑같이 생겼고, 불같으시면서도 자상하신 점을 빼닮았습니다. 서구적이면서도 유교적 사고가 굉장히 강했어요. 제겐 참 힘든 분이었어요. 하나밖에 없는 딸에 대한 재능, 보통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셨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셨어요. 경상도 사나이라 마음속 표현을 못 하셨습니다. 못해 드린 게 많아요. 연주한다는 핑계로 한국을 떠난 뒤 23년간 생일상 한 번 못 차려 드렸는데도 아버지는 이해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결혼해서 아기를 낳는 게 어떻겠냐」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지금도 안 늦으신 것 같은데….
 
  『결혼이 좋은 건지…. 사랑하는 사람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결혼은) 해도, 안 해도 후회한다지만 한 남자에게 소속되는 것은 싫어요. 마음은 소속되고 싶지만 文書로 누구누구의 아내로 등재되는 것은 아직 거부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연애는…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연애 중이신가요.
 
  『아뇨, 아니에요』
 
  ―사랑에 대해 아직도 꿈꾸시죠.
 
  『포기는 안 하죠』
 
  ―이런 사랑이었으면 하는 게 있나요.
 
  『구체적으로 남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없지만 저와 같이 있으려면 인내심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제 생활 자체가 바쁘고 여행이 많아서 남자를 남편으로서 챙겨 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쪽에서 챙겨줘야 해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인내심이 필요할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시간이 나면 하겠지만 제 생활에 흡입이 돼서 맞춰 주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이야기가 다시 오페라로 이어졌다. 오페라는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삼각관계에서부터 배신·이별·질투·재회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구성돼 있다. 「사랑」이란 테마로 그려지는 고대 비극은 좁게는 서구의, 넓게는 현대의 교양 있는 인류가 공유하는 문학적 유산들이다.
 
  그녀는 지금껏 「리골레토」에서 질다,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 「루치아」에서 루치아, 「햄릿」에서 오필리아, 「세빌랴의 이발사」에서 로지나, 「돈 파스콸레」에서 노리나, 「사랑의 묘약」에서 아디나,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에서 체르비네타, 「로센카발리어」에서 소피, 「라크메」에서 라크메, 「피가로의 결혼」에서 수잔나, 「플로메의 용서」에서 디노라,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올림피아, 「몽유병의 여인」에서 아미나 役으로 扮(분)했다. 대부분 상처를 입거나 죽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다.
 
 
  커튼콜
 
사진·이태훈
  『죽는 역을 많이 맡았어요. 질다, 루치아, 오필리아도 극중에서 죽고… 개인적으로 불만이 많아요. 그 시대 여자들은 왜 그렇게 하나같이 바보일까요? 답답해요. 사랑도 제대로 못 하고 집안의 희생양이 됐어요. 선택할 것도 없었고 뭐랄까, 당시 시대적 상황이 컸겠죠. 개인적으로 그런 역을 잘한다고들 해요.
 
  그러나 비련의 여주인공보다는 재미있고 재치 있는 극중인물에 마음이 끌려요. 이를테면 「사랑의 묘약」에서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새침데기처럼 구는 역할 말이에요. 사실 제가 의외로 사람들을 잘 웃겨요. 피에로처럼 학창 시절에 친구들을 많이 웃겼습니다』
 
  그녀는 해피엔딩 스토리를 좋아한다고 했다.
 
  『슬프게 끝나는 것에 좀 지쳤습니다. 공감은 가지만 솔직히 좀 바보스럽다는 느낌이 들어요』
 
  ―커튼콜을 하고 나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허탈한가요, 아니면 뿌듯한가요.
 
  『생각지도 않았던 반응이 있을 땐 뿌듯하죠. 그러나 공연에서 아주 잘했다는 느낌은 없었던 것 같아요. 노래를 잘했다, 못했다고 평가받는 단계는 지났죠. 대신 전체적인 호흡이랄까, 관객의 반응을 보면서 오신 분들을 가득 채워 보냈는지, 제대로 대접은 한 건지, 그분들의 시간과 기대를 충족시켰는지 걱정이 돼요.
 
  그런 생각이 한국에 오면 더 들어요. 외국에선 그런 생각이 잘 안 나요. 외국에선 굉장히 잘나게 했고 「나 노래 잘해」라는 식이죠. 하지만 한국에선 강렬하게 공연을 끝내고 프라이드를 가질 만한데도 뭔가 더 드려야 할 것 같고, 뭔가 모자란 것 같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거기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성악가들은 대부분 체구가 큰데 날씬하네요.
 
  『고음을 내는 악기가 대개 아담하더라고요. 제가 맡은 역은 소녀이거나 사랑에 빠지는 여인입니다. 「리골레토」에는 질다를 큰 부대자루에 넣고 들고 가는 장면이 있는데 뚱뚱하면 못 들잖아요. 그런 면에서 뚱뚱하지 않아 다행이고 다른 배우들도 「가벼워서 좋다」고 해요(웃음)』
 
  ―북한에 가실 계획은 없나요.
 
  『언젠가 KBS홀에서 「북조선 교향악단」과 함께 공연한 적이 있어요. 예술가에게 표현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죠. 자유가 없는 환경에서 어떻게 예술이 나올 수 있는지, 거기서 연주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예전엔 음악이 지닌 메시지가 강렬해서 누구나 의사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약간 흔들립니다. 지금 북쪽에서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북한 주민들이 불쌍할 뿐이죠. 현재로선 북한에 갈 의향이 없습니다』
 
 
  스승이자 비판자인 어머니
 
  디바 曺秀美가 오늘에 있기까지 어머니 김말순 여사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음악적 감수성을 길러 준 스승이자 날카로운 비평가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네가 동양인다운 겸손함을 가진 가수면 좋겠다. 어떤 사람을 보든 그 사람의 미덕을 먼저 볼 줄 알고 고개 숙일 줄 아는 가수라면 얼마나 보기 좋겠니?』
 
  그녀가 유학을 떠난 1983년 가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한 일본인 친구를 사귀었다. 그 친구는 일본 도쿄예술대학에서 성악공부를 했는데 이탈리아 성악가로부터 직접 수업을 들어 도통 모르는 노래가 없었다. 曺秀美는 그녀를 친구로 느끼기보다 경쟁자로 생각했고, 그녀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에서 불덩이가 치솟는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를 어머니께 편지로 썼더니 한참 후에 답장이 왔다고 한다.
 
  〈노래란 아름다운 거 아니니? 상처받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쓰다듬는 게 바로 노랜데, 노래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움과 질투가 가득하다면 그 노래는 결국 거짓일 거야. 엄마는 수미 네가 항상 아름다운 마음으로 노래하길 바랐어. 어떤 사람이든 그의 상처를 이해하고 받아 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가수라면 일등이 아니어도 좋고, 세계 정상이 아니어도 좋다고 말이야…〉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中에서)
 
  ―어머니는 딸의 공연에 자주 오시나요.
 
  『자주 오셨어요. 사실 어머니가 두려워요. 음악을 잘 아시니까. 전문적으로 하시진 않았지만 많이 들으셔서 공연이 끝난 뒤 어떤 말을 하실지가 제일 두려워요. 그래서 먼저 묻진 않아요.
 
  어머니는 클래식만 좋아하셔서 크로스오버한 음악은 이해를 못 하셔요. 같은 음악인데도 제가 할 음악은 아니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어제 가졌던 앙코르 공연에서 클래식도 있었고, 영화음악·가곡도 있었는데 어떻게 반응하실까 두려워 얼굴을 안 마주치려고 했습니다. 모른 척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참 좋았다」고 하셨어요. 그 말 한마디가 어찌나 좋던지요. 항상 「좋았다」는 얘긴 안 하셔요. 터놓고 있는 그대로 말씀하시니 차라리 편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것과 똑같으시니까. 저로서는 제일 무서운 분이시죠』
 
  그녀는 사흘 뒤 한국을 떠난다고 했다. 지난 9월3일부터 세계무대 데뷔 20주년 투어를 했으니 근래에 가장 오래 한국에 머문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1월1일 독일 베를린으로 날아가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과 함께 듀오 콘서트를 가진 뒤 11월13일부터 12월4일까지 호주 투어에 나선다. 또 12월12일에는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12월14일에는 런던 카도곤 홀에서 공연이 예정돼 있다고 한다.
 
  『변화가 있긴 하지만 일정이 2~3년간 짜여 있죠. 이젠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단계가 돼서 그 면에선 편해요. 처음 데뷔할 때는 매니저가 시키는 대로 했지만 지금은 선택을 하는 편이죠』
 
 
  『공부하는 데 굶주려 있어요』
 
  ―앞으로 삶의 계획이 있다면 들려 주세요.
 
  『저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싶어요. 아직까지 배울 것이 정말 많아요. 이 세상에서 제가 하는 음악은 천만 분의 일밖에 안 돼요. 러시아·스페인 음악도 하고 싶어요. 공부하는 데 굶주려 있어요.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가 빨리 선진국에 들었으면 해요. 경제적으로는 풍요롭게 사는 것 같은데, 삭막해지고 힘들어하는 느낌이 듭니다. 서로 편하게 위로하는 사회가 됐으면 해요. 그러면 제가 노래하기에도 편하잖아요. 저 역시 열심히 할 테니 지켜봐 주세요』●
 
  〈진행·이상희 月刊朝鮮 조사담당〉
 
 

  ▣ 曺秀美를 세계적인 가수로 키워낸 어머니 金末順씨
 
  『수미가 부른 노래 중에서「루치아」와「청교도」를 제일 좋아합니다』
 
   曺秀美의 어머니 金末順(김말순·70) 여사는 『어린 시절부터 딸의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고 했다. 『노래를 시키면 아이답지 않게 소리가 쭉쭉 뻗어나가더라』는 것이다.
 
  『수미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타고났어요. 그 양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거든요. 회사 야유회에서 「번지 없는 주막」을 불러 자전거를 타오기도 했습니다. 성격도, 생긴 것도 아버지를 빼다 박았어요. 코흘리개 시절부터 혼자 웅얼거렸어요.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노래였습니다. 유치원 시절에 이미 동요란 동요는 다 꿰고 있었어요』
 
  영자신문 「코리아 헤럴드」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했던 金여사는 자신이 좋아했던 마리아 칼라스나 레나타 테발디 등 당대 프리마돈나의 음반을 들려 주거나 오페라 아리아를 화제 삼아 딸에게 얘기해 주었다고 한다.
 
  여섯 살 무렵부터는 曺秀美의 손을 잡고 세종문화회관이나 이화女大 대강당 등 오페라 공연장을 찾았다. 일찌감치 딸이 자신의 재능에 눈뜰 수 있게 매니저 겸 후원자로 나선 것이다. 그녀는 2003년 문화관광부가 제정한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다.
 
  『여섯 살부터 「동당동당」 피아노를 쳤는데 음감이 빨라 한 번 들은 곡은 여지없이 외워 쳤어요. 그걸 절대음감이라고 하나요? 서울 면목동에서 살 때였는데, 옆집 담 너머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한 소절도 빠뜨리지 않고 피아노로 옮겨 치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언젠가 유명 오페라 공연장에 데려간 일이 있었는데, 한참 듣더니 「이 부분은 이렇게 불러야 하는데 틀렸다」고 지적해요』
 
  金여사는 딸이 1983년 이탈리아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으로 유학 가자 거의 매일 편지를 썼고, 오페라 음반이나 악보를 구하거나 국내 유명 오페라 공연이 있으면 녹음해 두었다가 로마로 보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심지어 딸이 깻잎 냄새가 가득 밴 신림동 시장의 순대가 먹고 싶다면 순대를 밀봉해 보내 주었다.
 
  딸이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너무 바쁘니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언젠가는 신랑감을 데려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사실 결혼시켜야겠다는 뜻이 강했는데 너무 바빠요. 간혹 좋은 분을 소개받아도 몇 달씩 대륙을 오가며 연주 여행을 떠나니 대화가 오래가지 않는 눈치입니다. 글쎄, 세계에서 제일 바쁜데 어쩌겠어요』
 
  金여사는 딸의 공연장을 자주 찾는 편이다. 『고음 F를 소화할 수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콜로라투라(꾸밈음이나 스릴이 넘치는 화려한 악구가 기악적으로 펼쳐지는 선율 양식)」이니 흠잡을 데가 없다』고 대견스러워하면서도 『레퍼토리로 더 좋은 곡을 선택하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曺秀美가 공연을 마친 뒤 어머니의 눈빛을 마주치는 것이 제일 두렵다고 말할 정도다.
 
  「태몽이 뭐냐」고 묻자, 한참을 웃더니 『수미를 낳기 전 단칸방에 살 때였는데 수세미 넝쿨 같은 것이 온 집안을 휘감더라』고 했고, 딸이 서울大 음대에 입학할 때는 『작은 어항에 큼지막한 금붕어가 있는 꿈을 꾸고 화들짝 놀라 깬 적이 있다』고 했다.
 
  멀리 떨어져 사는 딸을 그리며 金여사는 매일 그녀가 부른 아리아를 듣는다.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항상 딸의 음성과 함께 한다. 『수미가 부른 노래는 다 좋아하지만 그중에서 「루치아」와 「청교도」를 제일 좋아한다』며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전율하고 또 전율한다』고 했다.
조회 : 9698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903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