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光柱 인터넷 데일리NK 편집인
1957년 대구 출생. 고려大 불문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위원,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이념연구센터장 역임. 저서 「金正日 리포트」 외. 논문 「북한의 개혁개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외.
1957년 대구 출생. 고려大 불문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위원,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이념연구센터장 역임. 저서 「金正日 리포트」 외. 논문 「북한의 개혁개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외.
金日成의 抗日운동의 핵심은 동북항일연군에서의 무장투쟁이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의 抗日운동이지, 조선독립운동의 일부분이거나 조선민족의 抗日운동은 아니었다(黃長燁).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도 대부분 중국사람이었다.
[영원한 수령]
12년째 유훈통치
金日成은 1994년 7월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 사망 34시간이 지난 7월9일 오전, 북한 전역의 공공기관·학원·직장에 일제히 「정오의 TV에 중대발표가 있으니 모두 시청하라」고 통지됐다. 조선중앙방송의 남성 아나운서는 검은 옷을 입고 비통한 어조로 방송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신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께서 1994년 7월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쳐오시었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융성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나라의 통일과 세계의 자주화를 위하여 쉼 없이 정열적으로 활동하시던 우리의 경애하는 어버이 수령님께서 너무도 애석하게 우리 곁을 떠나시었다>
金日成의 死因(사인)은 심근경색이었다. 金日成 사망 전 사흘간의 행적을 밝힌 당시 주석부 책임서기(비서실장) 전하철은 마지막 부분에서 『비바람 치던 7월8일 새벽 2시, 경애하는 金日成 동지의 위대한 심장이 더는 과로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고동을 멈추시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확인됐다.
金日成 사망 후 북한당국은 「수령님은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계신다」며 북한주민들의 뇌리에서 金日成을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金日成 사망일이 되면 全주민이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된 그의 미라 앞에서, 북한 전역에 산재한 8만7000여 개의 우상화물 앞에서 그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金正日은 죽은 아버지의 힘을 빌어 12년째 유훈통치를 계속하고 있다.
그뿐인가. 남한에서도 金日成은 아직 죽지 않았다. 남북한 정권의 정통성 문제를 따지면 따질수록, 金日成의 「독립운동」 여부와 과거사 문제가 정치적으로 처리되면 될수록, 金日成은 살아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죽었으되, 정치적으로 오늘날 한반도에서 죽지 않았다.
인간으로 태어나 神으로 죽다
金日成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외에서 적잖게 연구되었다. 그럼에도 金日成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가짜 金日成 論부터 金日成 독살 說까지.
왜 그럴까? 우선 사실 확인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연구·취재환경 때문이다. 만약 북한에 자유롭게 오가며 문헌을 비롯한 각종 사료, 음성·영상자료, 주요인물과 주민들의 자유로운 증언과 사실관계 확인을 위한 현장접근 등이 가능해진다면 좀더 정확한 연구가 가능해질 것이다.
金日成에 대해 문헌연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헌중심의 「내재적 비판적 접근」이라는 연구가 등장하게 되고, 그것이 마치 대단한 연구방법론이나 되는 것처럼 오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북한 선전기관이 출판한 문헌 자체를 그대로 믿기 어렵다. 『金日成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조차 2차 작업에서는 사실보다 창작이 많았다』는 것이 黃長燁(황장엽) 前 노동당 사상담당 비서의 증언이다. 북한의 공식적인 「통치사료」만으로 어떻게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구축할 수 있겠는가?
金日成은 북한이라는 작은 땅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神으로 죽었다.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같은 절대권력을 구축하게 되었을까?
[출생과 성장]
할아버지는 산당지기
金日成은 1912년 4월15일 태어났다. 본명은 金成柱(김성주), 출생지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다. 대동강변의 풍광이 좋은 이곳은 대지주 李평택의 소유였고, 그의 祖父 金膺禹(김응우)가 李씨 선대묘의 산당지기(묘지기)로 이곳에 살았다. 그의 출생지는 혁명의 聖地(성지)로 조성되어 북한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참배토록 하고 있다.
金日成의 아버지는 金亨稷(김형직), 어머니는 康盤石(강반석)이다. 강반석은 이웃 동네인 칠골리의 초등학교 교장의 딸이었고 기독교 집안이었다. 「반석」이라는 이름은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라는 뜻을 갖고 있다. 金亨稷은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숭실학교에 다녔다.
金亨稷은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한의사를 했다. 金日成은 만주와 평양을 오가며 소학교를 세 번 옮겨 다니다 만주의 撫松(무송)소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14세 때인 1926년 부친이 사망했다.
이후 金日成은 만주 화전현 화성의숙을 거쳐 吉林(길림·지린)의 毓文(육문·위원)중학 2학년까지 다녔다. 金日成은 중학교 시절 抗日운동에 참가했다가 1929년 5월, 17세 때 체포되어 옥살이를 경험했다. 金日成이 중학 시절에 抗日정신을 키운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1970년대 이후 金正日이 후계자가 되면서부터 「중학생 金日成」의 행적에 대해 과장·날조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북한당국은 「金日成이 14세 때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여 조선노동당의 뿌리를 만들었으며, 18세 때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조선혁명의 나아갈 길을 밝혔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金日成이 20세가 되던 해인 1932년 모친 강반석이 사망했다. 金日成은 두 동생 哲柱(철주)·英柱(영주)를 데리고 만주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抗日투쟁의 진실]
金日成의 抗日은 국제공산주의 운동
金日成의 抗日투쟁은 중국인민혁명군에서 시작됐다. 1930년대 초 중국 공산당원 楊靖宇(양정우·양징위)가 만주 일대의 유격군을 모아 중국인민혁명군을 발족시켰다.
1936년 이를 바탕으로 「동북抗日연군」이 조직되었다. 동북抗日연군의 제1로군, 제2로군의 활동지역인 남만주에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조선족이 많이 참여하게 됐다. 金日成도 그 일원이었다. 동북抗日연군은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공산군이었고, 소련이 주도한 국제공산당(코민테른)과 연계를 맺고 활동했다(서대숙).
金日成의 抗日운동의 핵심은 동북抗日연군에서의 무장투쟁이다. 동북抗日연군은 중국 공산당의 抗日운동이지, 조선독립운동의 일부분이거나 조선민족의 抗日운동은 아니었다(黃長燁).
동북抗日연군의 지도자는 대부분 중국사람이었다. 그러나 북한당국은 金日成이 동북抗日연군 소속이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抗日무장군대를 조직하여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런 이름의 抗日무장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金日成은 대략 1934~1940년까지 약 6년간 만주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당시 그의 지위는 동북抗日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師長(사장)이었다.
金日成의 무장투쟁 중 대표적인 사건이 1937년 6월에 있었던 보천보 전투다. 金日成은 1937년 6월4일 제6사 소속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朝-滿 국경을 넘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現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의 일본경찰 주재소를 습격했다.
당시 보천보 전투의 戰果(전과)에 대해서는 「국경 수비대 일경 7명을 사살하고 7명에 중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는 주장이 있고, 「일경 1명을 사살하고 소총 수십 자루를 노획했다」(방송작가 출신 탈북자)는 주장도 있다.
북한당국은 『金주석 휘하의 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경찰 주재소를 기습해 죄 없이 갇혀 있던 주민들을 구하고, 경기관총·소총·권총 등 무기와 수많은 탄약을 노획하고 면사무소·우편국·소방서 등을 불질렀으며, 거리에 격문과 전단을 뿌리며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다』고 선전하고 있다.
日本경찰 한 명을 죽였든, 7명을 죽였든 보천보 전투를 金日成이 주도했고, 그가 抗日 무장투쟁을 한 것은 史實(사실)이다. 金日成 자신도 『우리가 무장투쟁을 크게 한 것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한 것이 안 한 것보다는 나을 터인데, 왜 그것을 자꾸 깎아내리려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黃長燁).
문제는 「金日成의 조선인민혁명군이 抗日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조선을 해방했다」며 사실을 날조하고, 金日成·金貞淑 (김정숙)·金正日을 묶어 「백두산 3大 장군」으로 선전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金日成 家系(가계)가 日帝下 민족해방운동의 유일한 嫡統(적통)이라고 주장해 온 데 있다. 金日成의 抗日투쟁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스탈린 지시로 북한해방작전에 참가 못해
1940년 말 日帝의 大공세로 동북抗日연군 조직이 와해되면서, 이들은 소련 극동 하바로프스크 근교 브야츠크로 근거지를 옮겼다. 金日成은 소련 극동군 88특별교도여단에 배속되어 소련군 대위(제1영장)로 활동하다가 1945년 9월 귀국했다. 얄타·포츠담 회담의 결과에 따라 「북조선 관할권」을 가졌던 소련은 스탈린의 지시로 88특별교도여단에 배속된 조선 출신 빨치산들을 한 명도 북한해방작전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평양에 돌아온 金日成은 1945년 10월24일 「金日成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소련은 북한에 軍政(군정)을 실시했고, 북한 정권의 주요 부문은 모두 소련 고문들이 장악했다. 1948년 말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할 때까지 黨·국가기관 등의 요직은 소련에서 파견한 소련 국적 조선인들이 차지하도록 하여 모든 사업을 스탈린의 의도대로 집행했다. 가장 중요한 黨 사업은 소련에서 구역당 비서 경력을 가진 「허가이」가 주관했다.
스탈린은 金日成을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1948년 9월 정부수립 時 내각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같은 소련의 고문정치는 6·25 전쟁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피의 숙청으로 독재체제 수립]
한국전쟁中 1차 대숙청
6·25 전쟁은 金日成의 권력장악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당시 金日成파의 빨치산 출신들은 대부분 軍에 배속되어 있었고, 金日成은 이를 기반으로 하여 6·25전쟁을 통해 소련의 간섭으로부터 차츰 벗어나기 시작했다.
전쟁을 일으킨 金日成은 최고사령관으로서 軍權을 장악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을 강화했다. 전쟁 中 중국의 참전을 계기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자 金日成은 소련을 견제하면서 정치 기반을 확대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戰線(전선)이 장기간 교착상태에 들어가자 정권 내부로 관심을 돌린 金日成은 권력을 재편하기 위해 제1차 대숙청을 감행했다. 먼저 소련파로서 黨 사업을 주관하던 허가이를 숙청하면서 소련파로부터 黨權(당권)을 접수했다. 이어 朴憲永(박헌영)을 美帝(미제)의 간첩으로 몰아 남로당 계열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다.
1953년 시작된 朴憲永·李承燁(이승엽) 등 남로당에 대한 숙청작업은 1956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남반부 출신」들은 간첩 혐의가 씌워져 대거 처형되거나 통제구역에서 사망했다.
金日成의 제2차 대숙청은 1956년 8월 黨 전원회의에서 발생한 이른바 「8월 宗派(종파)사건」이 계기가 됐다. 「8월 宗派사건」이란 黨內 소련파·연안파(중국파)가 연합전선을 구축해 金日成을 실각시키려 한 사건을 말한다. 1958년까지 계속된 2년간의 대숙청을 통해 金日成은 소련파·연안파를 제거하고 독재기반을 구축했다.
中國의 개인숭배 지지
1953년 「수령」 스탈린이 사망하자 국제공산주의 흐름에 변화가 생겼다. 특히 스탈린 사망 후 3년간의 권력 투쟁끝에 정권을 잡은 흐루시초프는 개인숭배를 반대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대대적인 격하운동을 전개했다.
스탈린 격하운동은 단순히 특정 정치인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공산주의 이론은 철학·경제학은 물론 생물학 등 자연과학에까지 스탈린의 영향이 지대했다. 공산주의 이론과 직접 상관없는 생물학 관련 서적에도 「스탈린의 불멸의 업적」을 언급하면서 저자 서문에 「스탈린 대원수 만세」라는 문구까지 들어갈 정도로 개인숭배가 극심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공산국가들에 대한 소련공산당의 지배적 지위를 弱化(약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각국 공산당은 소련공산당으로부터 정치적·사상적 독립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같은 변화의 흐름을 타고 金日成은 6·25 전쟁을 계기로 소련의 종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재체계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스탈린 사망 후 소련·중국 간 이데올로기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中·蘇 이데올로기 논쟁의 핵심은 공산주의 사회로 가는 데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어느 단계까지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싼 이른바 「과도기 논쟁」과 「개인숭배 인정 여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물밑에는 공산권 전체에 대한 주도권을 둘러싼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힘겨루기가 놓여 있었다.
스탈린 생존 때까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宗主國(종주국)은 단연 소련이었지만 스탈린 사망 후 소련과 중국 사이에 균열현상이 나타났다.
毛澤東(모택동·마오쩌둥)은 헝가리에서 폭동이 일어난 이유가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弱化시키는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 노선 때문이라고 비판하면서 反수정주의 노선을 강화했다.
金日成은 中·蘇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개인숭배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중국의 입장을 지지했다. 金日成으로서는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독재체제에 漏水(누수)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主體사상의 싹, 「1955년 12월 연설」
이 무렵 등장한 金日成의 연설이 主體사상의 싹이 되는 「1955년 12월 연설」이다. 소련에서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 움직임이 진행되는 가운데 金日成은 1955년 12월28일 黨 선전부 간부들 앞에서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主體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하게 된다. 다음은 연설의 요지다.
<우리 당 사상사업에서 主體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떤 다른 나라의 혁명도 아닌 바로 조선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선혁명이야말로 우리 당 사상사업의 主體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사업을 반드시 조선혁명의 이익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소련공산당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반적 원리를 연구하는 것이나 다 우리 혁명을 옳게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金日成 저작집 제9권)
이 연설은 한마디로 「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보지 말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의 실정에 맞게 구현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곧 국내 정치적으로는 「金日成식대로」, 즉 金日成의 개인권력 강화를 의미한 것이었다.
金日成은 스탈린의 사망과 中·蘇 이념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소련·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권력도 강화하는 방법으로 「主體」를 내걸었던 것이다. 실로 절묘한 선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金日成은 「8월 宗派사건」을 계기로 소련파·중국파를 쳐낸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가 공개적으로 비판되자 이 물결이 곧바로 조선노동당으로 넘어왔다. 당시 조선노동당의 파벌은 크게 세 부류였다.
첫째 부류는 「소련파」다. 이들은 소련공산당의 지원으로 당내에서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둘째 부류는 중국파, 즉 「延安派(연안파)」로서 광복 前 중국공산당과 손잡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一群(일군)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한글학자로도 명성이 높았던 金枓奉(김두봉)과 조선의용군의 金元鳳(김원봉)을 비롯한 武亭(무정), 崔昌益(최창익) 등이 활약했는데, 金枓奉이 연안파의 선봉이었다. 셋째 부류는 金日成과 동북抗日연군에서 같이 활동한 「빨치산파」들이었다.
소련파의 朴昌玉(박창옥)은 소련공산당의 개인숭배 비판을 배경으로 金日成의 독재를 비판하면서 연안파의 崔昌益과 연합전선을 폈다. 이러한 움직임이 사전에 포착되었고, 소련을 방문 중이던 金日成은 1956년 8월 黨 전원회의 개최 전에 부랴부랴 귀국했다.
1958년 개인독재체제 완성
黨 전원회의에서 소련파의 朴昌玉과 연안파의 崔昌益은 소련공산당의 20차 黨대회에서 결정된 바처럼 「개인독재를 버리고 모든 黨 기관을 집체적 지도체제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집체적 지도체제를 내각과 軍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에도 적용해야 한다며 金日成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아울러 金日成의 빨치산 투쟁만이 조선독립의 유일한 전통이 아니며 만주 외 여러 곳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집체적 지도체제를 세우면 金日成의 1人 권력기반이 약화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主體를 세우자」는 깃발을 든 金日成은 이들을 집중공략했다. 金日成은 6·25 전쟁 과정을 통해 軍權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金日成이 이끈 빨치산파를 「군부파」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金日成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소련파와 연안파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결국 이들의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연안파들은 중국으로, 소련파들은 소련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8월 黨 전원회의가 끝난 후 북한 전역에 살벌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연안파의 상업상 윤공흠, 직업동맹위원장 서휘, 김일성종합대학 대학당위원회 홍락용 등이 중국으로 도망갔다. 金日成은 1956~1957년 이태에 걸쳐 소련파와 연안파 등 黨內 「宗派」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것이 「8월 종파사건」이다.
金日成의 권력장악 과정은 6·25 전쟁→스탈린의 사망과 소련공산당의 국제적 지위 약화→중소 이데올로기 논쟁 등 국제관계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파-소련파-연안파를 차례로 제거하면서 1958년 말까지 개인독재체체를 거의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기형적인 공산독재 국가로 변질]
대숙청 후 천리마 운동
金日成은 1958년까지의 대숙청 후 「천리마 운동」을 전개했다. 천리마 운동이 전개되던 1950년대 말부터 1967년까지 북한은 계급독재下에서도 그나마 살 만한 시기였던 것으로 주민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현대사 60년 동안 주민들이 살 만했던 시기는 10년을 채 넘기지 못한다.
1966년 10월 제2차 노동당대표자회의를 기점으로 북한사회는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특이하게 기형화된 사회로 변질된다. 이 시기 「唯一(유일)사상체계」라는 金日成 절대권력의 밑그림이 그려진다. 金日成의 「국방·경제 竝進(병진)노선」이 채택되면서 오늘날 북한사회의 두 가지 큰 특징인 수령절대주의와 軍國主義에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경제·국방 병진노선 채택
이 시기 북한사회를 특이한 형태로 바꾼 주요 대내외적 요인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金日成의 동생 金英柱와 金日成의 장남 金正日 간의 권력투쟁이다. 숙질 간의 이 권력투쟁은 1964년 대학을 졸업한 金正日이 黨 사업을 시작하면서 점화되어 1974년 2월 후계자로 지명되는 시점까지 계속되었다.
권력투쟁의 내용은 누가 더 金日成을 절대화·신격화하느냐가 핵심이었고, 이들은 金日成의 신임획득 경쟁을 벌여 2인자의 지위를 차지하려고 했다. 이 권력투쟁의 결과 북한에는 金日成 개인을 유일한 「사회역사발전의 동력」으로 하는 수령절대주의 체계가 성립되고, 이 시기에 북한에서 超헌법적 지위를 가지면서 북한주민의 실질적인 법률이 되는 「黨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이 거의 완성되었다.
둘째, 1966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혁명이다. 중국의 문화혁명은 북한에서 金日成의 개인독재를 더욱 강화해 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이 시기 북한사회 전반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수령독재의 極左的(극좌적)인 바람이 불어닥친다.
셋째, 1966년 10월 제2차 노동당대표자회의에서 金日成이 천명한 국방·경제 병진노선이다. 국방·경제 병진노선으로 인해 북한군 내부에서 「남조선 해방」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極左모험주의가 횡행하게 된다.
넷째, 1967년 3월 비밀리에 열린 黨중앙위원회 제4기 5차 전원회의를 통해 金日成의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비판한 朴金喆(박금철), 李孝淳(이효순), 김도만 등 이른바 「甲山派」(갑산파: 日帝下 抗日조직으로 분류된 「갑산공작위원회」 출신)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전개되었다.
다섯째, 1966년 10월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를 다룬 黃長燁 김일성大 총장(당시)의 논문 「사회발전동력」이 비판되면서 1967년 金日成의 「5·25교시」를 계기로 인텔리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전개되었다.
위의 다섯 가지 주요 요인들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면서 북한사회는 기형화된 독재체제로 줄달음치게 되며, 1960년대 중반까지의 主體사상은 「金日成 유일사상체계」로 변질되어 북한에 정착된다. 이 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金日成 唯一사상체계의 등장
1966년 중국에서 시작된 문화혁명의 영향이 북한에도 넘어왔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金日成을 수정주의자로 비판했다. 金日成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른바 소련의 「현대 수정주의」와 중국의 「좌경 교조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노동당의 「主體的 노선」(=金日成 노선)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또한 金日成은 이해 10월 黨중앙위원회 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黨중앙지도기관의 직제개편을 단행했다. 종전의 黨중앙위원회 위원장이 「총비서」로 개칭되면서 金日成이 총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黨중앙위원회 부위원장제가 폐지되고 비서국이 새로 설치되면서 담당비서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비서국」 조직비서와 조직지도부장 자리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는 정치국의 지도 역할이 인정되면서도 정치국·비서국의 관계에서 비서국의 실질적 권한이 강화된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黨 직제개편 과정에서 黨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朴金喆 등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金英柱가 정치국 후보위원과 黨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됐다. 朴金喆은 당시 黨內 「갑산파」의 리더였다.
朴金喆 등은 金英柱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金日成에게 반발했다. 당시 朴金喆은 金日成, 崔庸健(최용건), 金一에 이어 黨 서열 4位였다.
이 무렵 朴金喆을 선전하는 「일편단심」이라는 영화가 제작됐다. 갑산파는 이 영화를 통해 抗日투쟁 당시 갑산공작위원회의 업적을 선전하면서 주인공 朴金喆과 그의 妻의 역할을 과대선전했다. 당시 金日成을 제외한 개인숭배는 묵과할 수 없는 금기사항이었다.
金正日, 갑산파 공격하면서 金英柱 견제
1967년 3월 黨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가 비밀리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金日成은 군부파의 지지를 받아, 갑산파를 숙청하기로 결정했다. 黨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는 金日成의 唯一체제로 가는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이 회의에서 「唯一사상체계」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 시기를 기록해 놓은 「金日成 저작집」 (제21권)에 따르면 『黨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것은 黨 건설에서 나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黨 안에 유일적인 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우지 않고서는 도대체 사상의지의 통일을 보장할 수 없고 黨을 전투적 조직으로 만들 수 없으며 따라서 혁명과 건설을 성과적으로 영도해 나갈 수 없다』고 나와 있다.
唯一사상체계란 金日成의 교시와 지시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자강도와 평안북도 같은 데서는 어느 부수상의 지시를 학습하고 있다고 하며, 또 어떤 데서는 중앙당 어느 부장의 「교시」라는 말까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 黨의 유일사상체계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옳지 않은 현상들입니다』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어느 부수상」이란 朴金喆, 「어느 중앙당 부장」은 갑산파의 李孝淳(대남비서)과 이에 동조한 김도만(선전비서 겸 부장)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1967년 3월부터 시작된 갑산파 숙청은 지방말단까지 파급되었다. 1968년 중순경에는 중견 지방간부직의 약 3분 의 2가 공석으로 있었을 정도로 그 숙청의 규모가 어머어마했다.
갑산파에 대한 숙청은, 외형적으로는 갑산파가 金日成이 내놓은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반대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金日成의 국방·경제 병진노선은 중공업 우선노선에 기초하여 생산력을 높이면서 군수산업과 경제를 병행 발전시켜야 한다는 정책이다. 여기에는 국방력을 키운 다음 「남조선을 빨리 해방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이 때문에 1967년 삼척·울산 무장침투사건, 1968년 청와대 습격기도 등 左傾(좌경)모험주의가 횡행하게 된다.
갑산파는 金日成의 중공업 우선정책을 반대했다. 이들은 과도한 국방비 지출을 줄이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원조를 인민들의 실생활 수준을 높이는 데 쓰도록 하는 인민경제 우선정책을 요구했다. 아울러 경제사업은 경제·과학기술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黨의 간섭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공장·기업소 관리에서 지배인의 역할을 높이고 黨 일꾼의 역할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이는 黨 우선의 경제관리방법론인 金日成의 「대안의 사업체계」와 「청산리 방법」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렇게 될 경우 黨 독재가 약화될 수 있었다.
한편 갑산파 숙청의 배경에는 金英柱·金正日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金正日이 金英柱와 가까운 인물들을 쳐내는 복선도 깔려 있었던 것 같다.
「黃長燁 회고록」에 따르면 갑산파의 선전비서 김도만과 국제비서 박용국은 金英柱의 좌우 양 날개였다고 한다. 金英柱는 소련 모스크바종합大 법학부 출신이고, 김도만과 박용국 역시 소련 유학생 출신이었다.
金正日은 갑산파 숙청 과정에서 박용국·김도만 등을 공격했다. 金英柱는 김도만·박용국 등이 축출되자 黨內 기반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즉 金正日은 金日成을 반대하는 갑산파를 공격하면서 金英柱도 동시에 견제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갑산파 숙청은 중국 문화혁명의 영향 및 당내 빨치산파와 갑산파 간의 지위 다툼, 국방 우선과 인민경제 우선 노선의 갈등, 金英柱·金正日의 권력투쟁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결부되어 진행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북한판 文化혁명]
黃長燁 논문이 촉발
이 시기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 1967년 金日成의 「5·25 교시」다. 「5·25 교시」를 계기로 북한사회는 極左的(극좌적)인 분위기에 휩싸이며 북한판 「작은 문화혁명」이 전개됐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海瑞罷官(해서파관)」이라는 한 편의 연극이 도화선이 됐다면 「5·25 교시」는 한 편의 논문으로 촉발됐다.
당시 黃長燁 김일성大 총장은 1966년 10월 김일성종합大 창립 20주년 기념논문집에 「사회발전동력」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은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 그리고 인텔리 역할론을 언급한 것이었다.
논문이 발표되자 金英柱와 金日成의 고종사촌 매부 梁亨燮(양형섭·당시 중앙당학교 교장)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金日成에게 黃長燁의 논문이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약화시키는 反黨 수정주의 글이라고 보고했다.
이론투쟁 전개
金英柱는 당시 사실상의 제2인자였고, 중앙당학교는 김일성大와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金英柱는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黃長燁의 논문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金日成의 독재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金英柱와 양형섭을 필두로 한 중앙당학교 이론가들은 黃長燁의 논문을 비판했다. 총장의 논문이 비판당하자 김일성대학이 술렁거렸다. 이로 인해 이론투쟁이 전개되었다.
「과도기 문제」에 대한 논쟁은 현상적으로는 이론투쟁으로 볼 수 있었지만 이미 「8월 宗派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특히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고있던 시기였기에 누구든 「목숨 걸고」 논쟁에 뛰어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金日成은 黃長燁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진행시켰다. 金日成은 당 간부들이 참석한 각종 모임에서 黃長燁을 비판했다. 金日成은 金英柱·黃長燁의 대립된 두 이론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1967년 5월25일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右傾(우경)기회주의」와 「左傾기회주의」를 둘 다 비판하고 主體노선의 관점에서 과도기 문제를 올바르게 풀어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이 「5·25 교시」 사건의 얼개다.
「5·25 교시」에 대한 黃長燁의 회고
다음은 「5·25 교시」에 대한 黃長燁 前 노동당 비서의 회고다.
<표면화된 것은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이론투쟁이었는데, 그 밑바닥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었다.
金日成의 「5·25 교시」는 북한 사회를 특이한 형태의 極左로 몰고 가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더욱 계급주의적인 입장에서 독재를 강화하고 金日成에 대한 개인숭배를 심화시키려는 통치집단의 요구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약화시키고 민주주의를 확대할 것을 갈망하는 인텔리층 사이의 대립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金日成은 소련의 右傾수정주의와 중국의 左傾모험주의를 모두 반대하며 중간 입장을 취한다고 했지만, 실제는 민주주의적 인텔리를 반대하고 독재를 강화하려는 데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모방했다. 당시 북한의 민주주의 역량은 정말 보잘것 없었기 때문에 정치투쟁으로까지 번지지 않았으나, 이 일을 계기로 金日成에 대한 우상화가 더욱 강화되고 「인텔리 혁명화」의 구호 아래 인텔리에 대한 압박이 더욱 심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黃長燁 회고록)
특히 黃長燁의 회고록 중 『논문사건은 이론문제인 만큼 나와 金英柱의 이론대립을 이용하여 우리 두 사람을 동시에 흔들어서 金日成의 이론적 권위를 높이려 한 데 초점을 맞춘 것 같다』는 대목은, 「5·25 교시」 사건의 배경에 金英柱와 金正日의 권력투쟁이 놓여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즉, 金正日은 金英柱·黃長燁의 이론대립이 불거지자 두 대립된 이론을 金日成으로 하여금 확실히 「정리」하도록 함으로써 아버지의 권위를 높여 주고 아버지의 신임을 얻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5·25 교시」 사건은 한 편의 논문이 계기가 되었지만 중국의 문화혁명 물결을 이용하여 자신의 독재를 더욱 강화하려는 金日成의 욕망과, 金日成의 독재를 강화해 주고 후계자 지위를 굳히려는 金英柱의 욕망, 그리고 이 틈새를 파고들면서 아버지의 신임을 얻으려는 金正日의 욕망이 어우러진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판 焚書坑儒-도서정리사업
「5·25 교시」 이후 북한의 인텔리들은 심한 고초를 겪었다. 「작은 문화혁명」이 북한 전역을 휩쓸었다.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화, 수령 우상화의 심화, 인텔리 혁명화가 몰아쳤고 북한사회 전반을 極左的인 분위기로 몰아갔다. 성혜랑은 수기 「등나무집」에서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북조선 역사사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가 빠져 있다. 이것은 1967년 「5·25 교시」가 나온 전원회의다. 그 회의가 사전에조차 올리지 않은 비밀회의였다는 것을 나는 오래도록 모르고 있었다. 당시 비당원이던 나에게 5·25 교시는 갑산파의 숙청과 중앙당 엘리트의 숙청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정도의 상식뿐이었다. 「5·25 교시」는 누가 숙청되었다는 것보다 反수정주의 투쟁이라는 대선풍 아래 대대적인 인텔리 제거, 그들의 창조물인 문화에 대한 총공격, 좌경극단주의에 의한 反문화 혁명으로 기억한다.
북조선 사람들은 모두가 「1960년대까지는 살기 좋았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5·25 교시」 전까지 북조선은 그래도 사회주의 인민의 나라였다. 그러나 「5·25 교시」를 계기로 수령 우상화와 사회 전반에 極左的인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 무렵 북한주민들은 소장하고 있던 모든 개인 서적들을 불태우거나 도서관에 기증하도록 강요받는다. 셰익스피어·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고리키 등 문학 서적들은 물론이고, 그리스철학·중국철학·독일 고전철학 등의 서적들이 이 시기에 모두 불태워졌다.
「마르크스」도 대략 이 무렵부터 도서관에 들어가게 된다. 마르크스 서적은 도서관에서만 열람할 수 있게 되었고, 열람을 원하는 학자들은 왜 마르크스를 공부하려고 하는지 「사유서」를 쓰고 책을 빌려 보아야 했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유물변증법이 대략 이 무렵부터 사라지고 그 자리에 金日成 유일사상이 들어선다.
경제·과학도 유일사상에 희생돼
대대적인 인텔리 제거 작업과 이른바 「도서정리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문화혁명」은 金正日이 공식 후계자로 선포되는 1974년 무렵까지 진행되었다. 당시 黨에서 내려온 「도서정리사업」은 문제가 될 만한 글의 내용과 어투, 인명을 삭제하는 작업이 핵심이었다.
성혜랑에 따르면 「도서정리사업」은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모두 검열할 정도로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전국의 모든 가정, 모든 직장의 책 한 페이지마다 일일이 검열되었다.
삭제의 대상은 수령 우상화, 抗日무장투쟁의 절대화, 계급혁명, 反부르주아 사상 등에 저촉되는 모든 문구들이었다. 거기에 저촉되는 내용은 먹으로 칠하거나 페이지를 뜯어내거나 종이딱지를 붙이라는 黨의 지시가 내려졌다. 남은 책은 체제와 수령찬양의 정치 서적, 수령님의 「노작」(논문), 교시집뿐이었다.
북한의 교과서에서는 이순신·을지문덕·세종대왕 등과 같은 역사의 인물들이 사라지거나 역사 서적에 남아 있다 해도 「金日成보다 못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위대한 역사 인물의 자리에 金日成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북한판 문화혁명」은 문학·철학뿐 아니라 음악·미술·과학기술에까지 파급되었다. 외국 음악은 소련 노래까지 금지됐고, 古典(고전) 악보는 모두 불태워졌다. 미술관의 석고상은 비너스건 베토벤이건 모두 몽둥이에 의해 부숴졌다. 서양화들은 모두 찢겨지고, 서양화를 그리던 화가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농사꾼이 되었다.
反수정주의 狂風은 과학기술 분야에도 불어닥쳤다. 외국기술의 도입은 수정주의가 되고 선진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조차 비판을 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풍조는 후일 북한의 경제발전에 큰 장애가 되었다. 예컨대 리승기 박사의 비날론 생산과 같이 「金日成의 위대성」을 찬양할 수 있는 분야에만 지원이 집중되었고, 과학기술의 실제적 발전보다는 어떻게 하면 金日成을 찬양할 수 있는가 하는 「형식」이 지배했다. 唯一사상이 경제를 집어먹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부터 북한의 주민들은 「黨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大 원칙」을 외워야 했다.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면 「조회하듯」 10대 원칙을 외운 다음 업무를 시작했고, 金日成의 초상휘장(배지)을 가슴에 「모시고」 친위대·결사대 구호를 부르며 각종 우상화 예식을 가지게 된다.
후계자 金正日, 「金日成 주의」 정식 선포
金日成에 대한 「절대화·신격화·무조건성」에 대한 超헌법적 지위를 가진 「10大 원칙」은 1974년 2월 金正日이 후계자로 선포된 후 발표되었다고 외부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상은 1966년 제2차 노동당대표자회의 시기에 즈음하여 金英柱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金正日이 金英柱를 완전히 몰아낸 후 북한의 실권자로 등장하면서 자신의 후계 체제를 구축하는 데 유리하게 改作한 것이다.
즉 金英柱·金正日의 권력투쟁에서 누가 더 金日成을 절대화하느냐 하는 경쟁의 결과 10大 원칙이 나오게 되었으며, 金正日은 金英柱가 만들어 놓은 10大 원칙에 후계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부를 改作하여 후계자 공인 이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10大 원칙」이 완성됨으로써 金日成의 절대권력도 완전히 구축되었다.
10대 원칙 중 마지막 제10조는 金正日만이 유일한 金日成의 후계자로서 혁명위업을 이어 간다는 의미로서, 金正日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후 金英柱가 작성한 10대 원칙에 추가한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金正日은 제10조의 각 세부지침을 통해 金日成의 유일사상체계는 오로지 「당중앙(金正日)의 유일적 지도」에 의하여 구현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못 박아 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金日成·金正日의 지도체제만이 북한의 유일체제임을 확실히 해둔 것이다.
1974년 2월13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金正日을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출했고, 그는 對外的으로 「黨과 인민의 지도자」로 발표되었다. 이로써 金正日은 金日成의 후계자가 되었고, 이 시기부터 金正日은 「黨중앙」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후계자로 공인된 후 金正日이 벌인 첫 사업은 1974년 2월19일 主體사상을 「金日成主義」로 정식 선포한 일이었다. 金正日은 金日成주의를 「主體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사상·이론·방법의 全一的 체계」로 정식화했다. 말하자면 「지금부터 북한을 지배하는 사상은 金日成主義」라는 사실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었다.
金正日은 선전·선동 부문 책임일꾼들을 소집하여 대규모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黨 선전선동부 지도원급 이상 과장·副부장·부장·비서들까지 몽땅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20일 동안 진행되었다. 북한의 노동당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회의에서 金正日은 「온 사회를 金日成主義化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主體사상을 「金日成主義」로 정식화한다.
首領論
여기에서 主體사상의 철학적 원리, 사회역사 원리 그리고 「혁명적 수령관」을 골간으로 하는 지도적 원칙(영도체계론) 등 現 북한 主體사상의 뼈대가 대체로 완성되었다. 이후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主體사상에는 수령절대주의적 논리들이 추가되어 간다.
金正日은 黃長燁의 인간중심철학 중 「생명관」에 해당하는 부분을 왜곡하여 수령은 「뇌수」, 黨은 「심장」, 인민은 「팔다리」를 의미한다는 사회유기체說로 바꾸었다. 즉 인간의 생명에는 「육체적 생명」과 「사회정치적 생명」의 두 가지가 있는데, 「육체적 생명」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수령이 준다는 논리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라 인민의 생명의 어버이인 수령은 인민대중에 의해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하여 인민대중의 추대를 받게 되는 超인간적인 절대적 존재가 된다. 수령의 출현은 한 번뿐이고, 그 다음부터는 수령에게 가장 충직한 사람이 수령의 지위를 물려받게 된다.
수령에 대한 충성은 후계자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래야 수령에 대한 충성이 영원한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 위에서 金日成은 「인민의 어버이」가 되는 것이며, 金正日의 출생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수령의 후계자로 점지된 「광명성 탄생」이 되는 것이다.●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도 대부분 중국사람이었다.
[영원한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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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日成 동상에 참배하는 북한주민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신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께서 1994년 7월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쳐오시었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융성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나라의 통일과 세계의 자주화를 위하여 쉼 없이 정열적으로 활동하시던 우리의 경애하는 어버이 수령님께서 너무도 애석하게 우리 곁을 떠나시었다>
金日成의 死因(사인)은 심근경색이었다. 金日成 사망 전 사흘간의 행적을 밝힌 당시 주석부 책임서기(비서실장) 전하철은 마지막 부분에서 『비바람 치던 7월8일 새벽 2시, 경애하는 金日成 동지의 위대한 심장이 더는 과로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고동을 멈추시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확인됐다.
金日成 사망 후 북한당국은 「수령님은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계신다」며 북한주민들의 뇌리에서 金日成을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金日成 사망일이 되면 全주민이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된 그의 미라 앞에서, 북한 전역에 산재한 8만7000여 개의 우상화물 앞에서 그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金正日은 죽은 아버지의 힘을 빌어 12년째 유훈통치를 계속하고 있다.
그뿐인가. 남한에서도 金日成은 아직 죽지 않았다. 남북한 정권의 정통성 문제를 따지면 따질수록, 金日成의 「독립운동」 여부와 과거사 문제가 정치적으로 처리되면 될수록, 金日成은 살아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죽었으되, 정치적으로 오늘날 한반도에서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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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황해제철소를 시찰하는 金日成(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아들 金正日(왼쪽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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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88여단 시절 金日成(왼쪽 끝). 후일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崔賢(왼쪽에서 세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
왜 그럴까? 우선 사실 확인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연구·취재환경 때문이다. 만약 북한에 자유롭게 오가며 문헌을 비롯한 각종 사료, 음성·영상자료, 주요인물과 주민들의 자유로운 증언과 사실관계 확인을 위한 현장접근 등이 가능해진다면 좀더 정확한 연구가 가능해질 것이다.
金日成에 대해 문헌연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헌중심의 「내재적 비판적 접근」이라는 연구가 등장하게 되고, 그것이 마치 대단한 연구방법론이나 되는 것처럼 오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북한 선전기관이 출판한 문헌 자체를 그대로 믿기 어렵다. 『金日成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조차 2차 작업에서는 사실보다 창작이 많았다』는 것이 黃長燁(황장엽) 前 노동당 사상담당 비서의 증언이다. 북한의 공식적인 「통치사료」만으로 어떻게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구축할 수 있겠는가?
金日成은 북한이라는 작은 땅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神으로 죽었다.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같은 절대권력을 구축하게 되었을까?

金日成은 1912년 4월15일 태어났다. 본명은 金成柱(김성주), 출생지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다. 대동강변의 풍광이 좋은 이곳은 대지주 李평택의 소유였고, 그의 祖父 金膺禹(김응우)가 李씨 선대묘의 산당지기(묘지기)로 이곳에 살았다. 그의 출생지는 혁명의 聖地(성지)로 조성되어 북한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참배토록 하고 있다.
金日成의 아버지는 金亨稷(김형직), 어머니는 康盤石(강반석)이다. 강반석은 이웃 동네인 칠골리의 초등학교 교장의 딸이었고 기독교 집안이었다. 「반석」이라는 이름은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라는 뜻을 갖고 있다. 金亨稷은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숭실학교에 다녔다.
金亨稷은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한의사를 했다. 金日成은 만주와 평양을 오가며 소학교를 세 번 옮겨 다니다 만주의 撫松(무송)소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14세 때인 1926년 부친이 사망했다.
이후 金日成은 만주 화전현 화성의숙을 거쳐 吉林(길림·지린)의 毓文(육문·위원)중학 2학년까지 다녔다. 金日成은 중학교 시절 抗日운동에 참가했다가 1929년 5월, 17세 때 체포되어 옥살이를 경험했다. 金日成이 중학 시절에 抗日정신을 키운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1970년대 이후 金正日이 후계자가 되면서부터 「중학생 金日成」의 행적에 대해 과장·날조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북한당국은 「金日成이 14세 때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여 조선노동당의 뿌리를 만들었으며, 18세 때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조선혁명의 나아갈 길을 밝혔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金日成이 20세가 되던 해인 1932년 모친 강반석이 사망했다. 金日成은 두 동생 哲柱(철주)·英柱(영주)를 데리고 만주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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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평양운동장에 모습을 나타낸 金日成. |
1936년 이를 바탕으로 「동북抗日연군」이 조직되었다. 동북抗日연군의 제1로군, 제2로군의 활동지역인 남만주에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조선족이 많이 참여하게 됐다. 金日成도 그 일원이었다. 동북抗日연군은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공산군이었고, 소련이 주도한 국제공산당(코민테른)과 연계를 맺고 활동했다(서대숙).
金日成의 抗日운동의 핵심은 동북抗日연군에서의 무장투쟁이다. 동북抗日연군은 중국 공산당의 抗日운동이지, 조선독립운동의 일부분이거나 조선민족의 抗日운동은 아니었다(黃長燁).
동북抗日연군의 지도자는 대부분 중국사람이었다. 그러나 북한당국은 金日成이 동북抗日연군 소속이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抗日무장군대를 조직하여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런 이름의 抗日무장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金日成은 대략 1934~1940년까지 약 6년간 만주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당시 그의 지위는 동북抗日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師長(사장)이었다.
金日成의 무장투쟁 중 대표적인 사건이 1937년 6월에 있었던 보천보 전투다. 金日成은 1937년 6월4일 제6사 소속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朝-滿 국경을 넘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現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의 일본경찰 주재소를 습격했다.
당시 보천보 전투의 戰果(전과)에 대해서는 「국경 수비대 일경 7명을 사살하고 7명에 중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는 주장이 있고, 「일경 1명을 사살하고 소총 수십 자루를 노획했다」(방송작가 출신 탈북자)는 주장도 있다.
북한당국은 『金주석 휘하의 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경찰 주재소를 기습해 죄 없이 갇혀 있던 주민들을 구하고, 경기관총·소총·권총 등 무기와 수많은 탄약을 노획하고 면사무소·우편국·소방서 등을 불질렀으며, 거리에 격문과 전단을 뿌리며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다』고 선전하고 있다.
日本경찰 한 명을 죽였든, 7명을 죽였든 보천보 전투를 金日成이 주도했고, 그가 抗日 무장투쟁을 한 것은 史實(사실)이다. 金日成 자신도 『우리가 무장투쟁을 크게 한 것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한 것이 안 한 것보다는 나을 터인데, 왜 그것을 자꾸 깎아내리려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黃長燁).
문제는 「金日成의 조선인민혁명군이 抗日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조선을 해방했다」며 사실을 날조하고, 金日成·金貞淑 (김정숙)·金正日을 묶어 「백두산 3大 장군」으로 선전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金日成 家系(가계)가 日帝下 민족해방운동의 유일한 嫡統(적통)이라고 주장해 온 데 있다. 金日成의 抗日투쟁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940년 말 日帝의 大공세로 동북抗日연군 조직이 와해되면서, 이들은 소련 극동 하바로프스크 근교 브야츠크로 근거지를 옮겼다. 金日成은 소련 극동군 88특별교도여단에 배속되어 소련군 대위(제1영장)로 활동하다가 1945년 9월 귀국했다. 얄타·포츠담 회담의 결과에 따라 「북조선 관할권」을 가졌던 소련은 스탈린의 지시로 88특별교도여단에 배속된 조선 출신 빨치산들을 한 명도 북한해방작전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평양에 돌아온 金日成은 1945년 10월24일 「金日成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소련은 북한에 軍政(군정)을 실시했고, 북한 정권의 주요 부문은 모두 소련 고문들이 장악했다. 1948년 말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할 때까지 黨·국가기관 등의 요직은 소련에서 파견한 소련 국적 조선인들이 차지하도록 하여 모든 사업을 스탈린의 의도대로 집행했다. 가장 중요한 黨 사업은 소련에서 구역당 비서 경력을 가진 「허가이」가 주관했다.
스탈린은 金日成을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1948년 9월 정부수립 時 내각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같은 소련의 고문정치는 6·25 전쟁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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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中 중공군 사령부를 방문한 金日成(오른쪽에서 세 번째). 오른쪽이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 |
[피의 숙청으로 독재체제 수립]

6·25 전쟁은 金日成의 권력장악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당시 金日成파의 빨치산 출신들은 대부분 軍에 배속되어 있었고, 金日成은 이를 기반으로 하여 6·25전쟁을 통해 소련의 간섭으로부터 차츰 벗어나기 시작했다.
전쟁을 일으킨 金日成은 최고사령관으로서 軍權을 장악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을 강화했다. 전쟁 中 중국의 참전을 계기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자 金日成은 소련을 견제하면서 정치 기반을 확대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戰線(전선)이 장기간 교착상태에 들어가자 정권 내부로 관심을 돌린 金日成은 권력을 재편하기 위해 제1차 대숙청을 감행했다. 먼저 소련파로서 黨 사업을 주관하던 허가이를 숙청하면서 소련파로부터 黨權(당권)을 접수했다. 이어 朴憲永(박헌영)을 美帝(미제)의 간첩으로 몰아 남로당 계열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다.
1953년 시작된 朴憲永·李承燁(이승엽) 등 남로당에 대한 숙청작업은 1956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남반부 출신」들은 간첩 혐의가 씌워져 대거 처형되거나 통제구역에서 사망했다.
金日成의 제2차 대숙청은 1956년 8월 黨 전원회의에서 발생한 이른바 「8월 宗派(종파)사건」이 계기가 됐다. 「8월 宗派사건」이란 黨內 소련파·연안파(중국파)가 연합전선을 구축해 金日成을 실각시키려 한 사건을 말한다. 1958년까지 계속된 2년간의 대숙청을 통해 金日成은 소련파·연안파를 제거하고 독재기반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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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日成 대숙청의 희생자들. 왼쪽부터 朴憲永·金枓奉·崔昌益·武亭·허가이. |

1953년 「수령」 스탈린이 사망하자 국제공산주의 흐름에 변화가 생겼다. 특히 스탈린 사망 후 3년간의 권력 투쟁끝에 정권을 잡은 흐루시초프는 개인숭배를 반대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대대적인 격하운동을 전개했다.
스탈린 격하운동은 단순히 특정 정치인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공산주의 이론은 철학·경제학은 물론 생물학 등 자연과학에까지 스탈린의 영향이 지대했다. 공산주의 이론과 직접 상관없는 생물학 관련 서적에도 「스탈린의 불멸의 업적」을 언급하면서 저자 서문에 「스탈린 대원수 만세」라는 문구까지 들어갈 정도로 개인숭배가 극심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공산국가들에 대한 소련공산당의 지배적 지위를 弱化(약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각국 공산당은 소련공산당으로부터 정치적·사상적 독립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같은 변화의 흐름을 타고 金日成은 6·25 전쟁을 계기로 소련의 종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재체계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스탈린 사망 후 소련·중국 간 이데올로기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中·蘇 이데올로기 논쟁의 핵심은 공산주의 사회로 가는 데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어느 단계까지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싼 이른바 「과도기 논쟁」과 「개인숭배 인정 여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물밑에는 공산권 전체에 대한 주도권을 둘러싼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힘겨루기가 놓여 있었다.
스탈린 생존 때까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宗主國(종주국)은 단연 소련이었지만 스탈린 사망 후 소련과 중국 사이에 균열현상이 나타났다.
毛澤東(모택동·마오쩌둥)은 헝가리에서 폭동이 일어난 이유가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弱化시키는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 노선 때문이라고 비판하면서 反수정주의 노선을 강화했다.
金日成은 中·蘇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개인숭배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중국의 입장을 지지했다. 金日成으로서는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독재체제에 漏水(누수)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등장한 金日成의 연설이 主體사상의 싹이 되는 「1955년 12월 연설」이다. 소련에서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 움직임이 진행되는 가운데 金日成은 1955년 12월28일 黨 선전부 간부들 앞에서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主體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하게 된다. 다음은 연설의 요지다.
<우리 당 사상사업에서 主體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떤 다른 나라의 혁명도 아닌 바로 조선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선혁명이야말로 우리 당 사상사업의 主體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사업을 반드시 조선혁명의 이익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소련공산당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반적 원리를 연구하는 것이나 다 우리 혁명을 옳게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金日成 저작집 제9권)
이 연설은 한마디로 「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보지 말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의 실정에 맞게 구현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곧 국내 정치적으로는 「金日成식대로」, 즉 金日成의 개인권력 강화를 의미한 것이었다.
金日成은 스탈린의 사망과 中·蘇 이념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소련·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권력도 강화하는 방법으로 「主體」를 내걸었던 것이다. 실로 절묘한 선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金日成은 「8월 宗派사건」을 계기로 소련파·중국파를 쳐낸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가 공개적으로 비판되자 이 물결이 곧바로 조선노동당으로 넘어왔다. 당시 조선노동당의 파벌은 크게 세 부류였다.
첫째 부류는 「소련파」다. 이들은 소련공산당의 지원으로 당내에서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둘째 부류는 중국파, 즉 「延安派(연안파)」로서 광복 前 중국공산당과 손잡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一群(일군)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한글학자로도 명성이 높았던 金枓奉(김두봉)과 조선의용군의 金元鳳(김원봉)을 비롯한 武亭(무정), 崔昌益(최창익) 등이 활약했는데, 金枓奉이 연안파의 선봉이었다. 셋째 부류는 金日成과 동북抗日연군에서 같이 활동한 「빨치산파」들이었다.
소련파의 朴昌玉(박창옥)은 소련공산당의 개인숭배 비판을 배경으로 金日成의 독재를 비판하면서 연안파의 崔昌益과 연합전선을 폈다. 이러한 움직임이 사전에 포착되었고, 소련을 방문 중이던 金日成은 1956년 8월 黨 전원회의 개최 전에 부랴부랴 귀국했다.

黨 전원회의에서 소련파의 朴昌玉과 연안파의 崔昌益은 소련공산당의 20차 黨대회에서 결정된 바처럼 「개인독재를 버리고 모든 黨 기관을 집체적 지도체제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집체적 지도체제를 내각과 軍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에도 적용해야 한다며 金日成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아울러 金日成의 빨치산 투쟁만이 조선독립의 유일한 전통이 아니며 만주 외 여러 곳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집체적 지도체제를 세우면 金日成의 1人 권력기반이 약화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主體를 세우자」는 깃발을 든 金日成은 이들을 집중공략했다. 金日成은 6·25 전쟁 과정을 통해 軍權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金日成이 이끈 빨치산파를 「군부파」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金日成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소련파와 연안파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결국 이들의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연안파들은 중국으로, 소련파들은 소련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8월 黨 전원회의가 끝난 후 북한 전역에 살벌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연안파의 상업상 윤공흠, 직업동맹위원장 서휘, 김일성종합대학 대학당위원회 홍락용 등이 중국으로 도망갔다. 金日成은 1956~1957년 이태에 걸쳐 소련파와 연안파 등 黨內 「宗派」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것이 「8월 종파사건」이다.
金日成의 권력장악 과정은 6·25 전쟁→스탈린의 사망과 소련공산당의 국제적 지위 약화→중소 이데올로기 논쟁 등 국제관계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파-소련파-연안파를 차례로 제거하면서 1958년 말까지 개인독재체체를 거의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기형적인 공산독재 국가로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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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청산리협동농장에서 현지지도를 하고 있는 金日成. |
1966년 10월 제2차 노동당대표자회의를 기점으로 북한사회는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특이하게 기형화된 사회로 변질된다. 이 시기 「唯一(유일)사상체계」라는 金日成 절대권력의 밑그림이 그려진다. 金日成의 「국방·경제 竝進(병진)노선」이 채택되면서 오늘날 북한사회의 두 가지 큰 특징인 수령절대주의와 軍國主義에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 북한사회를 특이한 형태로 바꾼 주요 대내외적 요인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金日成의 동생 金英柱와 金日成의 장남 金正日 간의 권력투쟁이다. 숙질 간의 이 권력투쟁은 1964년 대학을 졸업한 金正日이 黨 사업을 시작하면서 점화되어 1974년 2월 후계자로 지명되는 시점까지 계속되었다.
권력투쟁의 내용은 누가 더 金日成을 절대화·신격화하느냐가 핵심이었고, 이들은 金日成의 신임획득 경쟁을 벌여 2인자의 지위를 차지하려고 했다. 이 권력투쟁의 결과 북한에는 金日成 개인을 유일한 「사회역사발전의 동력」으로 하는 수령절대주의 체계가 성립되고, 이 시기에 북한에서 超헌법적 지위를 가지면서 북한주민의 실질적인 법률이 되는 「黨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이 거의 완성되었다.
둘째, 1966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혁명이다. 중국의 문화혁명은 북한에서 金日成의 개인독재를 더욱 강화해 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이 시기 북한사회 전반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수령독재의 極左的(극좌적)인 바람이 불어닥친다.
셋째, 1966년 10월 제2차 노동당대표자회의에서 金日成이 천명한 국방·경제 병진노선이다. 국방·경제 병진노선으로 인해 북한군 내부에서 「남조선 해방」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極左모험주의가 횡행하게 된다.
넷째, 1967년 3월 비밀리에 열린 黨중앙위원회 제4기 5차 전원회의를 통해 金日成의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비판한 朴金喆(박금철), 李孝淳(이효순), 김도만 등 이른바 「甲山派」(갑산파: 日帝下 抗日조직으로 분류된 「갑산공작위원회」 출신)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전개되었다.
다섯째, 1966년 10월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를 다룬 黃長燁 김일성大 총장(당시)의 논문 「사회발전동력」이 비판되면서 1967년 金日成의 「5·25교시」를 계기로 인텔리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전개되었다.
위의 다섯 가지 주요 요인들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면서 북한사회는 기형화된 독재체제로 줄달음치게 되며, 1960년대 중반까지의 主體사상은 「金日成 유일사상체계」로 변질되어 북한에 정착된다. 이 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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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大 총장 시절 논문「사회발전동력」으로 북한판 문화혁명을 촉발시킨 黃長燁 前 북한노동당 비서. |
또한 金日成은 이해 10월 黨중앙위원회 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黨중앙지도기관의 직제개편을 단행했다. 종전의 黨중앙위원회 위원장이 「총비서」로 개칭되면서 金日成이 총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黨중앙위원회 부위원장제가 폐지되고 비서국이 새로 설치되면서 담당비서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비서국」 조직비서와 조직지도부장 자리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는 정치국의 지도 역할이 인정되면서도 정치국·비서국의 관계에서 비서국의 실질적 권한이 강화된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黨 직제개편 과정에서 黨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朴金喆 등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金英柱가 정치국 후보위원과 黨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됐다. 朴金喆은 당시 黨內 「갑산파」의 리더였다.
朴金喆 등은 金英柱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金日成에게 반발했다. 당시 朴金喆은 金日成, 崔庸健(최용건), 金一에 이어 黨 서열 4位였다.
이 무렵 朴金喆을 선전하는 「일편단심」이라는 영화가 제작됐다. 갑산파는 이 영화를 통해 抗日투쟁 당시 갑산공작위원회의 업적을 선전하면서 주인공 朴金喆과 그의 妻의 역할을 과대선전했다. 당시 金日成을 제외한 개인숭배는 묵과할 수 없는 금기사항이었다.

1967년 3월 黨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가 비밀리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金日成은 군부파의 지지를 받아, 갑산파를 숙청하기로 결정했다. 黨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는 金日成의 唯一체제로 가는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이 회의에서 「唯一사상체계」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 시기를 기록해 놓은 「金日成 저작집」 (제21권)에 따르면 『黨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것은 黨 건설에서 나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黨 안에 유일적인 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우지 않고서는 도대체 사상의지의 통일을 보장할 수 없고 黨을 전투적 조직으로 만들 수 없으며 따라서 혁명과 건설을 성과적으로 영도해 나갈 수 없다』고 나와 있다.
唯一사상체계란 金日成의 교시와 지시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자강도와 평안북도 같은 데서는 어느 부수상의 지시를 학습하고 있다고 하며, 또 어떤 데서는 중앙당 어느 부장의 「교시」라는 말까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 黨의 유일사상체계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옳지 않은 현상들입니다』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어느 부수상」이란 朴金喆, 「어느 중앙당 부장」은 갑산파의 李孝淳(대남비서)과 이에 동조한 김도만(선전비서 겸 부장)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1967년 3월부터 시작된 갑산파 숙청은 지방말단까지 파급되었다. 1968년 중순경에는 중견 지방간부직의 약 3분 의 2가 공석으로 있었을 정도로 그 숙청의 규모가 어머어마했다.
갑산파에 대한 숙청은, 외형적으로는 갑산파가 金日成이 내놓은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반대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金日成의 국방·경제 병진노선은 중공업 우선노선에 기초하여 생산력을 높이면서 군수산업과 경제를 병행 발전시켜야 한다는 정책이다. 여기에는 국방력을 키운 다음 「남조선을 빨리 해방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이 때문에 1967년 삼척·울산 무장침투사건, 1968년 청와대 습격기도 등 左傾(좌경)모험주의가 횡행하게 된다.
갑산파는 金日成의 중공업 우선정책을 반대했다. 이들은 과도한 국방비 지출을 줄이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원조를 인민들의 실생활 수준을 높이는 데 쓰도록 하는 인민경제 우선정책을 요구했다. 아울러 경제사업은 경제·과학기술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黨의 간섭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공장·기업소 관리에서 지배인의 역할을 높이고 黨 일꾼의 역할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이는 黨 우선의 경제관리방법론인 金日成의 「대안의 사업체계」와 「청산리 방법」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렇게 될 경우 黨 독재가 약화될 수 있었다.
한편 갑산파 숙청의 배경에는 金英柱·金正日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金正日이 金英柱와 가까운 인물들을 쳐내는 복선도 깔려 있었던 것 같다.
「黃長燁 회고록」에 따르면 갑산파의 선전비서 김도만과 국제비서 박용국은 金英柱의 좌우 양 날개였다고 한다. 金英柱는 소련 모스크바종합大 법학부 출신이고, 김도만과 박용국 역시 소련 유학생 출신이었다.
金正日은 갑산파 숙청 과정에서 박용국·김도만 등을 공격했다. 金英柱는 김도만·박용국 등이 축출되자 黨內 기반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즉 金正日은 金日成을 반대하는 갑산파를 공격하면서 金英柱도 동시에 견제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갑산파 숙청은 중국 문화혁명의 영향 및 당내 빨치산파와 갑산파 간의 지위 다툼, 국방 우선과 인민경제 우선 노선의 갈등, 金英柱·金正日의 권력투쟁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결부되어 진행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북한판 文化혁명]

이 시기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 1967년 金日成의 「5·25 교시」다. 「5·25 교시」를 계기로 북한사회는 極左的(극좌적)인 분위기에 휩싸이며 북한판 「작은 문화혁명」이 전개됐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海瑞罷官(해서파관)」이라는 한 편의 연극이 도화선이 됐다면 「5·25 교시」는 한 편의 논문으로 촉발됐다.
당시 黃長燁 김일성大 총장은 1966년 10월 김일성종합大 창립 20주년 기념논문집에 「사회발전동력」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은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 그리고 인텔리 역할론을 언급한 것이었다.
논문이 발표되자 金英柱와 金日成의 고종사촌 매부 梁亨燮(양형섭·당시 중앙당학교 교장)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金日成에게 黃長燁의 논문이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약화시키는 反黨 수정주의 글이라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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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역사연구실에서 金日成 유일사상을 학습하고 있는 북한 청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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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日成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金正日과 경쟁했던 金日成의 동생 金英柱. |
金英柱와 양형섭을 필두로 한 중앙당학교 이론가들은 黃長燁의 논문을 비판했다. 총장의 논문이 비판당하자 김일성대학이 술렁거렸다. 이로 인해 이론투쟁이 전개되었다.
「과도기 문제」에 대한 논쟁은 현상적으로는 이론투쟁으로 볼 수 있었지만 이미 「8월 宗派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특히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고있던 시기였기에 누구든 「목숨 걸고」 논쟁에 뛰어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金日成은 黃長燁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진행시켰다. 金日成은 당 간부들이 참석한 각종 모임에서 黃長燁을 비판했다. 金日成은 金英柱·黃長燁의 대립된 두 이론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1967년 5월25일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右傾(우경)기회주의」와 「左傾기회주의」를 둘 다 비판하고 主體노선의 관점에서 과도기 문제를 올바르게 풀어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이 「5·25 교시」 사건의 얼개다.

다음은 「5·25 교시」에 대한 黃長燁 前 노동당 비서의 회고다.
<표면화된 것은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이론투쟁이었는데, 그 밑바닥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었다.
金日成의 「5·25 교시」는 북한 사회를 특이한 형태의 極左로 몰고 가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더욱 계급주의적인 입장에서 독재를 강화하고 金日成에 대한 개인숭배를 심화시키려는 통치집단의 요구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약화시키고 민주주의를 확대할 것을 갈망하는 인텔리층 사이의 대립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金日成은 소련의 右傾수정주의와 중국의 左傾모험주의를 모두 반대하며 중간 입장을 취한다고 했지만, 실제는 민주주의적 인텔리를 반대하고 독재를 강화하려는 데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모방했다. 당시 북한의 민주주의 역량은 정말 보잘것 없었기 때문에 정치투쟁으로까지 번지지 않았으나, 이 일을 계기로 金日成에 대한 우상화가 더욱 강화되고 「인텔리 혁명화」의 구호 아래 인텔리에 대한 압박이 더욱 심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黃長燁 회고록)
특히 黃長燁의 회고록 중 『논문사건은 이론문제인 만큼 나와 金英柱의 이론대립을 이용하여 우리 두 사람을 동시에 흔들어서 金日成의 이론적 권위를 높이려 한 데 초점을 맞춘 것 같다』는 대목은, 「5·25 교시」 사건의 배경에 金英柱와 金正日의 권력투쟁이 놓여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즉, 金正日은 金英柱·黃長燁의 이론대립이 불거지자 두 대립된 이론을 金日成으로 하여금 확실히 「정리」하도록 함으로써 아버지의 권위를 높여 주고 아버지의 신임을 얻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5·25 교시」 사건은 한 편의 논문이 계기가 되었지만 중국의 문화혁명 물결을 이용하여 자신의 독재를 더욱 강화하려는 金日成의 욕망과, 金日成의 독재를 강화해 주고 후계자 지위를 굳히려는 金英柱의 욕망, 그리고 이 틈새를 파고들면서 아버지의 신임을 얻으려는 金正日의 욕망이 어우러진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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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金日成-金貞淑-金正日을「백두산 3대 장군」이라고 우상화하고 있다. |
<북조선 역사사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가 빠져 있다. 이것은 1967년 「5·25 교시」가 나온 전원회의다. 그 회의가 사전에조차 올리지 않은 비밀회의였다는 것을 나는 오래도록 모르고 있었다. 당시 비당원이던 나에게 5·25 교시는 갑산파의 숙청과 중앙당 엘리트의 숙청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정도의 상식뿐이었다. 「5·25 교시」는 누가 숙청되었다는 것보다 反수정주의 투쟁이라는 대선풍 아래 대대적인 인텔리 제거, 그들의 창조물인 문화에 대한 총공격, 좌경극단주의에 의한 反문화 혁명으로 기억한다.
북조선 사람들은 모두가 「1960년대까지는 살기 좋았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5·25 교시」 전까지 북조선은 그래도 사회주의 인민의 나라였다. 그러나 「5·25 교시」를 계기로 수령 우상화와 사회 전반에 極左的인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 무렵 북한주민들은 소장하고 있던 모든 개인 서적들을 불태우거나 도서관에 기증하도록 강요받는다. 셰익스피어·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고리키 등 문학 서적들은 물론이고, 그리스철학·중국철학·독일 고전철학 등의 서적들이 이 시기에 모두 불태워졌다.
「마르크스」도 대략 이 무렵부터 도서관에 들어가게 된다. 마르크스 서적은 도서관에서만 열람할 수 있게 되었고, 열람을 원하는 학자들은 왜 마르크스를 공부하려고 하는지 「사유서」를 쓰고 책을 빌려 보아야 했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유물변증법이 대략 이 무렵부터 사라지고 그 자리에 金日成 유일사상이 들어선다.

대대적인 인텔리 제거 작업과 이른바 「도서정리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문화혁명」은 金正日이 공식 후계자로 선포되는 1974년 무렵까지 진행되었다. 당시 黨에서 내려온 「도서정리사업」은 문제가 될 만한 글의 내용과 어투, 인명을 삭제하는 작업이 핵심이었다.
성혜랑에 따르면 「도서정리사업」은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모두 검열할 정도로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전국의 모든 가정, 모든 직장의 책 한 페이지마다 일일이 검열되었다.
삭제의 대상은 수령 우상화, 抗日무장투쟁의 절대화, 계급혁명, 反부르주아 사상 등에 저촉되는 모든 문구들이었다. 거기에 저촉되는 내용은 먹으로 칠하거나 페이지를 뜯어내거나 종이딱지를 붙이라는 黨의 지시가 내려졌다. 남은 책은 체제와 수령찬양의 정치 서적, 수령님의 「노작」(논문), 교시집뿐이었다.
북한의 교과서에서는 이순신·을지문덕·세종대왕 등과 같은 역사의 인물들이 사라지거나 역사 서적에 남아 있다 해도 「金日成보다 못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위대한 역사 인물의 자리에 金日成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북한판 문화혁명」은 문학·철학뿐 아니라 음악·미술·과학기술에까지 파급되었다. 외국 음악은 소련 노래까지 금지됐고, 古典(고전) 악보는 모두 불태워졌다. 미술관의 석고상은 비너스건 베토벤이건 모두 몽둥이에 의해 부숴졌다. 서양화들은 모두 찢겨지고, 서양화를 그리던 화가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농사꾼이 되었다.
反수정주의 狂風은 과학기술 분야에도 불어닥쳤다. 외국기술의 도입은 수정주의가 되고 선진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조차 비판을 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풍조는 후일 북한의 경제발전에 큰 장애가 되었다. 예컨대 리승기 박사의 비날론 생산과 같이 「金日成의 위대성」을 찬양할 수 있는 분야에만 지원이 집중되었고, 과학기술의 실제적 발전보다는 어떻게 하면 金日成을 찬양할 수 있는가 하는 「형식」이 지배했다. 唯一사상이 경제를 집어먹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부터 북한의 주민들은 「黨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大 원칙」을 외워야 했다.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면 「조회하듯」 10대 원칙을 외운 다음 업무를 시작했고, 金日成의 초상휘장(배지)을 가슴에 「모시고」 친위대·결사대 구호를 부르며 각종 우상화 예식을 가지게 된다.

金日成에 대한 「절대화·신격화·무조건성」에 대한 超헌법적 지위를 가진 「10大 원칙」은 1974년 2월 金正日이 후계자로 선포된 후 발표되었다고 외부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상은 1966년 제2차 노동당대표자회의 시기에 즈음하여 金英柱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金正日이 金英柱를 완전히 몰아낸 후 북한의 실권자로 등장하면서 자신의 후계 체제를 구축하는 데 유리하게 改作한 것이다.
즉 金英柱·金正日의 권력투쟁에서 누가 더 金日成을 절대화하느냐 하는 경쟁의 결과 10大 원칙이 나오게 되었으며, 金正日은 金英柱가 만들어 놓은 10大 원칙에 후계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부를 改作하여 후계자 공인 이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10大 원칙」이 완성됨으로써 金日成의 절대권력도 완전히 구축되었다.
10대 원칙 중 마지막 제10조는 金正日만이 유일한 金日成의 후계자로서 혁명위업을 이어 간다는 의미로서, 金正日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후 金英柱가 작성한 10대 원칙에 추가한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金正日은 제10조의 각 세부지침을 통해 金日成의 유일사상체계는 오로지 「당중앙(金正日)의 유일적 지도」에 의하여 구현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못 박아 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金日成·金正日의 지도체제만이 북한의 유일체제임을 확실히 해둔 것이다.
1974년 2월13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金正日을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출했고, 그는 對外的으로 「黨과 인민의 지도자」로 발표되었다. 이로써 金正日은 金日成의 후계자가 되었고, 이 시기부터 金正日은 「黨중앙」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후계자로 공인된 후 金正日이 벌인 첫 사업은 1974년 2월19일 主體사상을 「金日成主義」로 정식 선포한 일이었다. 金正日은 金日成주의를 「主體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사상·이론·방법의 全一的 체계」로 정식화했다. 말하자면 「지금부터 북한을 지배하는 사상은 金日成主義」라는 사실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었다.
金正日은 선전·선동 부문 책임일꾼들을 소집하여 대규모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黨 선전선동부 지도원급 이상 과장·副부장·부장·비서들까지 몽땅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20일 동안 진행되었다. 북한의 노동당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회의에서 金正日은 「온 사회를 金日成主義化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主體사상을 「金日成主義」로 정식화한다.

여기에서 主體사상의 철학적 원리, 사회역사 원리 그리고 「혁명적 수령관」을 골간으로 하는 지도적 원칙(영도체계론) 등 現 북한 主體사상의 뼈대가 대체로 완성되었다. 이후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主體사상에는 수령절대주의적 논리들이 추가되어 간다.
金正日은 黃長燁의 인간중심철학 중 「생명관」에 해당하는 부분을 왜곡하여 수령은 「뇌수」, 黨은 「심장」, 인민은 「팔다리」를 의미한다는 사회유기체說로 바꾸었다. 즉 인간의 생명에는 「육체적 생명」과 「사회정치적 생명」의 두 가지가 있는데, 「육체적 생명」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수령이 준다는 논리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라 인민의 생명의 어버이인 수령은 인민대중에 의해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하여 인민대중의 추대를 받게 되는 超인간적인 절대적 존재가 된다. 수령의 출현은 한 번뿐이고, 그 다음부터는 수령에게 가장 충직한 사람이 수령의 지위를 물려받게 된다.
수령에 대한 충성은 후계자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래야 수령에 대한 충성이 영원한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 위에서 金日成은 「인민의 어버이」가 되는 것이며, 金正日의 출생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수령의 후계자로 점지된 「광명성 탄생」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