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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 추적] 문화부는 왜「이달의 문화인물」에 프로 문학가 姜敬愛를 선정했나

『소설가 姜敬愛는 金佐鎭 장군 암살 敎唆犯(교사범)의 동거녀』(前 광복회장 李康勳옹의 生前 회고)

오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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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의 영웅 金장군(金斗漢의 아버지)은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됐고, 그 교사범 金奉煥은 독립군에 의해 처단됐다.

『「金佐鎭 암살 공범」이라는 객관적 자료가 나온다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문화관광부)
『선정사항을 번복할 수 없다』
1949년 노동신문사 출간「인간문제」단행본에 실린 姜敬愛(사진 출처:「강경애 전집」, 소명 출판 刊 ).
  문화관광부(이하 문화부)는 「2005년 이달의 문화인물」로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申東曄(신동엽), 소설가 姜敬愛(강경애ㆍ1906~1944) 등 12명을 선정했다.
 
  지난 1월4일 오후, 국가보훈처 국장을 지낸 A씨가 기자를 찾아왔다. A씨는 『문화부가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姜敬愛씨가 白冶 金佐鎭(백야 김좌진ㆍ1889~ 1930) 장군의 암살 교사 공범』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부 장관에게 지난해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姜敬愛에 대한 문화인물 지정 철회 민원을 제기했다』면서 문화부의 答信(답신) 두 장을 보여줬다.
 
  문화부는 A씨의 질의에 대해, 『2005년 문화인물은 각 市道 관련단체에서 추천을 받아 전문가 13人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에 넘겨서 선발을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관의 「親日행적」 조사 등 인물 검증을 거쳐 최종 선정한 것』이라면서 『소정의 절차를 거친 것이기 때문에 선정사항을 번복할 수 없다』고 답했다.
 
  문화부는 『귀하께서 제기하신 姜敬愛씨가 「金佐鎭 장군 암살 교사 공범」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문화인물로 선정됐다』고 했다.
 
  문화부의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취지에 대해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을 再조명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귀감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抗日 무장투쟁의 지휘관인 金佐鎭 장군을 암살하는 데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姜敬愛씨가 과연 청소년의 귀감이 될 인물이냐』는 것이 A씨의 주장이다.
 
  그는 『龍井(용정)의 비암산에 「姜敬愛 문학비」를 세운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문화인물로까지 선정했으니 대한민국에 이렇게 인물이 없는가』라며 한탄했다.
 
 
 
 李康勳옹의 증언
 
   姜敬愛가 金佐鎭 장군 암살 교사 음모에 간여했다고 주장하는 문건들로서는 「독립운동대사전」(광복회), 「한민족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李康勳 자서전-민족해방운동과 나」(제3기획), 「李康勳 역사증언록」(인물연구소), 「日帝下 36年-독립운동실록」(동도문화사), 「黑龍江省 海林市 金佐鎭 학술 토론회 자료-朴奇峰」(조선족민족사학회) 등이 있다.
 
  「日帝下 36年-독립운동실록」은 작가 李二寧(이이녕)씨가 金佐鎭 장군을 측근에서 보좌한 李康勳(이강훈), 鄭煥日(정환일), 林基松(임기송)씨 등을 인터뷰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자료다. 李씨는 姜敬愛와 金奉煥(김봉환, 일명 金一星) 두 사람이 하얼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마쓰시마(松島) 형사의 회유로 변절, 공산계 급진주의자인 朴尙實(박상실)을 사주해 1930년 1월24일 金佐鎭 장군을 암살한 것으로 적고 있다.
 
  姜敬愛가 金奉煥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金佐鎭 장군을 암살 교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광복회 회장을 지낸 靑雷 李康勳(청뢰 이강훈ㆍ1903~2003) 선생이다. 李선생은 강원도 金化 출생으로 만주에서 新民府(신민부)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1926년에는 金佐鎭 장군의 지시로 백두산 근방에서 新彰學校(신창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1929년에는 韓族總聯合會(한족총연합회)에 가입하여 東北滿(동북만)에서 활약했으며, 1933년 3월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돼 15년형을 받았다. 金佐鎭 장군이 암살당하자 그는 金佐鎭 장군 사회장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金奉煥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이제껏 알려진 姜敬愛의 이력은 「빈칸」이 많다. 특히 1924년 9월, 梁柱東(양주동)과 헤어지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간도로 갔던 1926년부터 張河一(장하일)과 결혼한 1931년까지의 시기는 정확한 사료가 없다.
 
  1931년 8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혜성」誌에 「어머니와 딸」을 연재하는데, 이것이 姜敬愛의 실질적인 등단작이다. 姜敬愛의 모든 소설은 1931년부터 1938년까지 8년간 간도에서 씌어졌다.
 
  李康勳옹이 진술한 것은 姜敬愛가 張河一과 결혼하기 이태 전인 1929년의 일이다. 李옹은 자서전 「민족해방운동과 나」에서 「姜敬愛가 金奉煥과 함께 金佐鎭 암살 교사에 참여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1927년 봄, 金奉煥은 海林驛(해림역)에 도착해 그의 애인 姜敬愛라는 여류 문인과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밀양 출신 金奉煥이라는 자는 일찍이 동래 梵漁寺(범어사)의 승려였다. 그는 3·1 운동 당시 범어사 「학림 의거」에 앞장섰다가 체포돼 1년6개월형을 받고, 같이 승려생활을 하던 金星淑(김성숙)과 北京으로 오게 된다. 金星淑은 나중에는 臨政(임정)에 참가해 국무위원까지 지내다가 8·15 광복 후에 귀국하여 혁신정당의 최고 고문까지 지냈다.
 
  北京에 온 金奉煥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여 활동을 하다가, 金佐鎭 장군이 영도하는 독립운동 기관에 대한 공작책임을 지고 北滿으로 와서, 당시 독립운동가가 출입하는 요충지인 海林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金奉煥은 여류문인 姜敬愛와 만나 동거생활을 했다. 金奉煥ㆍ姜敬愛는 在滿 3大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 新民府의 기관지 「新民報」에 종종 투고하면서 수많은 민족진영 간부들과 접촉했고, 評(평)도 나쁘지 않았다.
 
  1926년 만주의 공산주의 운동에 처음으로 참여한 金奉煥은 1927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선전활동에 나선다. 金奉煥ㆍ姜敬愛가 新民報에 투고하는 글이 赤色(적색)경향을 띠자, 日帝 하얼빈 영사관은 이것을 트집 잡아 이들을 체포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일본경찰 마쓰시마의 美人計 책략
 
  어느 날 金奉煥이 하얼빈에 갔다가 일본 하얼빈영사관의 마쓰시마(松島) 경부 등에게 체포되었다. 마쓰시마 형사는 한국말에 능통한 독립운동가 취조 전담이었다. 영사관원들은 金奉煥이 혁명가 행세를 하기는 하나 妾(첩)까지 두고 이중생활을 하는 것을 약점으로 파악했다. 당시 영사관은 외교공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찰조직과 유치장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하얼빈영사관의 마쓰시마 경부는 駐日(주일) 조선총독부가 李光洙(이광수)의 애인 許英淑(허영숙)을 통해 上海 임시정부에 있는 李光洙를 꾀여 입국시켜 전향시켰던 美人計(미인계) 책략을 구사했다.
 
  마쓰시마는 역시 수배 중이던 姜敬愛를 꾀어내어 하얼빈영사관 유치장 면회실에서 두 사람을 취조했다. 이 과정에서 姜敬愛가 마쓰시마의 변절 요구를 수용했고, 그 결과로 金奉煥과 姜敬愛는 석방됐다. 당시 日帝의 형법대로 하자면, 몇 년의 옥고를 치러야 할 두 사람이 석방된 것이다. 지식인이었던 金奉煥은 양심적으로 고민이 됐다>
 
  1993년 흑룡강성 해림市에서 조선민족사학회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金佐鎭 피살설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 朴奇峰(박기봉)씨는 『金一星(金奉煥)이 일제 령사관에서 제기한 교환조건에 순종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체형도 받지 않고 쉽사리 석방될 리는 만무한 것이다. 金一星은 아성·해림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일제 할빈(하얼빈)령사관에 귀순한 변절자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李康勳 선생의 증언이다.
 
  <金奉煥은 은혜를 갚을 요량으로 마침 일본 경찰도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金佐鎭이요,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중에서도 최대의 기피인물인 金佐鎭을 없애는 것이 日帝 무리에 報恩(보은)도 되고 자기 동료들에 대해 환심을 살 뿐만 아니라 애인과의 달콤한 생활이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金佐鎭 장군을 암살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日帝는 金佐鎭 장군을 생포하길 원했고, 당시 공산계 독립운동가 계열은 그를 없애길 원했다. 고민한 끝에 金奉煥은 자신이 믿는 공산청년회 당원 朴尙實에게 총을 전달하며 암살을 부탁했다.
 
  金佐鎭 장군이 사는 중국 흑룡강성 山市(산시: 러시아말로 빨니강) 정거장 부근 개천에는 족제비가 우글거려 겨울이면 족제비 사냥꾼이 득실거렸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朴尙實은 山市에 머물면서 족제비 사냥꾼으로 눌러 있으면서, 金장군을 경호하는 청년들도 사귀어 경계심을 풀게 했다.
 
  1930년 1월24일 오후 3시, 朴尙實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金장군을 모시고 있던 청년들이 高崗山(고강산) 경호대장과 함께 철둑 너머 술집으로 모두 쏠려간 것이다. 朴尙實 혼자만 金佐鎭 장군과 남게 됐고,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人跡(인적)이 한산했다. 金佐鎭 장군은 「한족총연합회」에서 경영하는 精米所(정미소)를 둘러보기 위해 그곳으로 가려할 때, 朴尙實이 그 뒤를 밟았다.
 
 
 
 독립운동가들, 곧바로 金奉煥 총살
 
   金장군의 자택에서 3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까지 따라간 그는 金장군이 정미 기계를 둘러보기 위해 자세를 낮추는 순간, 『빵! 빵!』 총을 두 발이나 발사했다. 悲報(비보)가 전해지자 내외 각지에서는 弔問(조문)이 속속 이어졌다. 東亞日報 사장 宋鎭禹(송진우) 선생은 長春지국장을 통해 거액의 부의금과 정중하고 애처로운 輓章(만장)을 보내왔다. 사회장으로 奉葬(봉장)할 새 北滿 거류동포로 人山人海를 이루었고, 중국인도 많이 참가하여 『커우리 왕즈 쓸라(조선의 왕이 죽었다)』를 외치면서 슬퍼했다.
 
  凶漢(흉한)이 일을 저지른 시간은 오후 5시경으로, 중국 軍警(군경)과 우리 청년대원들이 총소리를 듣고 흉한을 추격하니, 벌써 黃昏(황혼)이라 놓치고 말았으며, 배후 지시자 金奉煥을 곧 체포하여 독립운동 기관의 결의로 총살하였다>
 
  朴奇峰씨의 논문, 「金佐鎭의 피살설에 대한 연구」를 보면, 만주공산주의 단체의 기관지인 「赤旗(적기)」誌 1930년 3월호에 金奉煥의 죽음을 추도하는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당시 北滿에 있는 공산주의 단체에서는 대종교적 민족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을 근간으로 결성된 金佐鎭 장군의 「한족총연합회」를 싫어하였고, 최고 책임자인 金佐鎭을 몹시 혐오했던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金佐鎭 암살에 功(공)을 세운 金奉煥의 죽음을 추도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폭로되지 않은 金奉煥의 변절행위에 대해선 전혀 주목을 돌리지 못했다.
 
  金佐鎭 장군 암살 사주자는 金奉煥이었고, 하수자는 朴尙實이었으며, 막후조종자는 日帝 할빈영사관 경찰이었다. 金奉煥은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결정에 의해 東北 3성에서 해산된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이었으며, 日帝 할빈영사관에 변절한 親日 走狗輩(주구배)였다>
 
  문화부 내부 문건인 「2005년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과정」을 살펴보면, 한국학ㆍ문학ㆍ문화ㆍ어문ㆍ미술 등 분야에서 17명을 선정했다. 親日행적과 관련된 검증은 민족문제연구소ㆍ국사편찬위원에서, 親北ㆍ容共행적 관련한 검증은 국가정보원에서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문건에 따르면, 당초 문학부문에서는 馬海松(마해송)ㆍ申東曄(신동엽)ㆍ李奎報(이규보) 등이 정 후보로, 姜敬愛가 예비후보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馬海松이 親日행적으로 빠지는 바람에 예비후보였던 姜敬愛가 최종 선정됐다.
 
  姜敬愛씨를 문화인물로 추천한 사람은 「한국여성문학학회」 회장이며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인 李相瓊(이상경ㆍ44)씨다. 李교수는 서울大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同대학원에서 「姜敬愛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姜敬愛 연구 전문가다.
 
 
 
 『暗殺에 가담한 사실을 몰랐다』
 
   지난 1월12일 문화부 鄭東采(정동채) 장관 앞으로 공식질의서를 보냈다. 이 질의에 대한 문화부의 답변이다.
 
  ─姜敬愛씨가 金奉煥씨와 함께 金佐鎭 장군 암살에 가담한 사실을 알았나.
 
  『알았다면 더 신중을 기했을 것이다. 姜敬愛씨의 문화인물 선정은 선정기준에 따라 외부전문가 13명으로 구성된 선정자문委의 심사를 통해 결정된 것이다. 작년 9월17일 선정자문委가 열렸을 때, 추천 인물들에 대한 토론과정에서 親日행적 인사는 제외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姜敬愛씨에 대한 과거 행적 문제를 제기한 위원은 없었다』
 
  ─문화인물 선정 후보자에 대한 親日여부 검증 단계에서 왜 이 문제를 밝히지 못했나.
 
  『선정자문委에서 제출된 자료와 외부의 검토자료를 바탕으로 인물을 검증했으나 姜敬愛씨에 대한 「親日행적」 또는 「金佐鎭 장군 암살」과 관련된 객관적 검증자료가 없어 반영하지 않았다』
 
  ─姜敬愛씨는 마르크시즘을 수용하고 프로문학 계열의 소설을 많이 집필한 작가다. 혹 姜敬愛씨의 선정에 대해 최근 죄익운동가의 명예회복과 관련한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받은 것은 아닌가.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선정한 것은 아니다. 姜敬愛씨는 대전市가 추천한 것이다』
 
  ─문화인물 선정 후보자의 親日 여부 검증을 시민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 의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좀더 공정성을 기하려면 시민단체보다는 전문성 있는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나 교육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에 일임하는 것이 균형 있고, 공신력 있는 것 아닌가.
 
  『선정당시 후보자 검증을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와 「독립기념관」에도 인물에 대한 자료검토를 의뢰했으나, 독립기념관에서는 姜敬愛씨에 대한 별도의 자료를 찾지 못했다』
 
  ─姜敬愛가 金佐鎭 장군을 암살한 배후로 논란이 일고 있는 마당에, 향후 문화부에서는 어떤 조치를 취할 예정인가.
 
  『姜敬愛씨에 대한 「親日행적 또는 金佐鎭 장군 암살 배후」 등의 구체적 입증자료가 제출돼, 姜敬愛씨에 대한 문화인물 선정의 再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언론에 별도의 홍보자료를 배포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하겠다』
 
 
 
 龍井에서 姜敬愛의 평가
 
   1999년 8월8일, 중국 연변의 용정시 비암산 중턱에 「녀성작가 姜敬愛 문학비」가 세워졌다. 그 비석 뒷면에는 간단한 약력과 함께 「姜敬愛는…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日帝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용정 3·13기념사업연구회」 金根化(김근화ㆍ78) 고문은 『용정에서 姜敬愛에 대한 평가는 대단하다』면서 『그런 그녀가 金佐鎭 장군 암살에 간여했다면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이라고 했다.
 
  龍井을 찾는 관광객들은 비암산 一松亭(일송정)으로 올라가는 길에 서 있는 「姜敬愛 문학비」를 보게 된다. 문학평론가들은 『姜敬愛는 식민지시대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사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입을 모은다. 이는 姜敬愛가 여성작가라는 점과 하층민들의 삶을 소설화했음에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울大 愼鏞廈(신용하ㆍ67) 명예교수는 『姜敬愛가 日帝의 사주를 받아 金佐鎭 장군 암살에 개입했다는 것은 정확한 사료를 가지고 충분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면서 『金佐鎭 장군은 日帝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간도지방에 지부를 두고 있는 赤旗團(적기단)이 감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직접적인 암살자는 朴尙實이 확실하지만 배후는 더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愼교수는 「논란이 있는 인물을 문화인물로 선정하는 것에 무리가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답변할 수 없다』면서, 『그녀가 남편(동거남 金奉煥)을 구하기 위해 위장전향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姜敬愛를 反민족적 인사로 단정하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고 했다.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성신여대 李炫熙(이현희ㆍ67) 명예교수는 『소설가 姜敬愛씨가 민족지도자인 金佐鎭 장군을 죽인 사람이라는 말을 李康勳 선생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다』면서 『광복군 출신인 故 朴英俊(박영준) 한전 사장도 「臨政(임정) 인사들은 姜敬愛가 金장군 암살에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그는 『문화관광부가 역사적 사료나 증언에 근거하지 않고 姜敬愛를 문화인물로 선정했다면, 이제라도 선정 자체를 보류하고 진실규명을 한 연후에 문화인물로 지정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문화부는 「姜敬愛가 이달의 문화인물에서 취소 내지 보류하기 위해서는 姜敬愛씨에 대한 구체적 親日 입증자료가 제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1927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으로 활약한 金佐鎭 장군을 2005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는 金佐鎭 장군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문화부는 金장군 암살 사주犯의 동거녀를 「3월의 문화인물」로 기리는 일이 벌어졌다. 시행착오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사실의 충돌이 정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
 
 

  [인터뷰] 金佐鎭 장군 손녀 金乙東씨
 
  『光復會와「金佐鎭장군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대응해 문화인물 철회를 관철시킬 것』
 
 
 
 語不成說
 
   「장군의 손녀」인 탤런트 金乙東(김을동·58)씨는 白冶 金佐鎭 장군 기념사업회 상임이사다.
 
  서울 여의도 맨하탄호텔에서 만난 그녀는 『문화부가 3월의 문화인물로 金佐鎭 장군 암살에 간여한 것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姜敬愛를 선정한 것에 섭섭하고 분노한다』면서 『이런 부당한 처사에 공분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게 서글프다』고 했다.
 
  ─李康勳 前 광복회장이 살아계실 때, 祖父 암살에 대해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까.
 
  『소설가 姜敬愛씨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못 들었습니다』
 
  ─姜敬愛씨가 문화인물에 선정됐다는 사실은 언제 들으셨나요.
 
  『작년 11월 초니까 선정된 직후인 것 같아요. 기념사업회에 간여하시는 李○○ 이사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그때 이미 각계 전문가들이 결정한 사항이라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그분에게서 들었습니다』
 
  ─문화부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했습니까.
 
  『안 했어요. 저희 집안 개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先烈(선열)들의 명예회복 차원에서, 가급적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구체적 자료를 갖고 광복회와 金佐鎭장군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대처할 생각입니다』
 
  金乙東 이사는 『굳이 이런 분을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할 까닭이 없고, 학술 토론을 통해 충분한 검증을 거친 뒤 선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작년 8월, 盧武鉉 대통령이 앞으로 좌익 운동가들의 사료도 발굴해서 독립운동가 지정과 함께 물질적 보상 문제도 언급했습니다.
 
  『원칙적으로 독립운동 과정에서 左右 구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독립운동 와중에서 좌우익 간의 대결로 불거진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功過(공과) 판단은 분명히 해야 한다고 봅니다』
 
  ─바람직한 親日 청산은 어떤 것이라고 보십니까.
 
  『얼마 전 통과된 「친일진상규명법」처럼 획일적으로 親日을 단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치적 의도를 갖고 하니까 부메랑이 돼 정부 여당이 줄줄이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1930년 할아버지(金佐鎭 장군) 장례를 치르고 할머니 吳淑根(오숙근) 여사가 귀국하자, 東亞日報 기자들이 돈을 모아서 예전에 살던 삼청동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朝鮮日報도 할아버지가 암살당했을 때 紙面(지면)을 도배하다시피 보도해서 民族魂(민족혼)을 일깨워 주었지요』
 
  ─1997년 동대문구 市의원 선거에 출마해 「장군의 손녀」라고 하시니까 효과가 있었습니까.
 
  『전국 최다득표를 했습니다. 아직도 독립운동가들을 예우하는 풍습이 살아 있다는 게 다행스럽습니다』
 
  金乙東 이사는 祖母인 吳淑根 여사 슬하에서 자라났다고 한다.
 
  『삼청동 집에서 증조할머니, 할머니 밑에서 살다 보니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았지요. 할머니 吳淑根 여사는 제가 중학교 2학년때 돌아가셨는데, 매일 四書三經(사서삼경)을 가르치고, 안동김씨 선원공파 28세손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어찌나 엄하셨던지 어릴 때는 미워했지만, 돌아가시고 나니까 생각이 많이 납니다』
 
 
 
 이불 보따리에 金佐鎭 장군 유해를 담다
 
   金이사는 金佐鎭 장군의 부인 吳淑根 여사가 흑룡강성 해룡현 山市에 매장돼 있던 金佐鎭 장군의 유해를 국내에 모셔온 일화를 소개했다.
 
  『1935년경, 할머니가 가매장된 할아버지 유해를 파서 이불 보따리에 쌌답니다. 뼈 위치가 바뀔까봐 창호지에 뼈 이름을 다 적어가면서 차곡차곡 쌌는데, 할아버지가 6척 장신에 통뼈였기 때문에 할머니가 무거워서 혼이 났답니다.
 
  丹東驛(단동역) 근방에서 열차가 짐조사를 받을 때였답니다. 日警(일경)이 다가오니까 식은땀이 흘렀답니다. 기적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는데 日警이 담배 밀수범과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할머니는 짐검사를 받지 않고 驛(역)을 출발할 수 있었답니다. 할머니는 어찌나 긴장했는지, 열차가 떠나자 맥이 풀려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답니다.
 
  할머니가 유해를 발굴해 충남 保寧(보령)에 있는 한산 李씨 宗山(종산)에 모시는 바람에 다른 독립운동가와는 달리 할아버지의 유해가 고국에 있는 겁니다. 山市 현지의 가매장지에는 묘지 터를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해림市에 韓中 우의공원 건립 중
 
  ─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청산리구국대장정을 올해로 4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사스(SARS) 때문에 한 해 쉬었지요. 전국 대학생 100여 명을 선발해 대련, 용정, 산시, 목단강 등을 10박11일로 순례합니다. 1억원 정도 예산이 들어가는데 적자지요.(웃음)
 
  山市에 있는 옛 자택에 私財(사재) 3억원을 털어서 할아버지 흉상도 세우고,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모자라는 돈은 아들(탤런트 송일국씨)이 代를 이어 사업을 잇고 있습니다. 海林에 「韓中 우의공원 건립」에 정부에서 20억원을 지원받아 올해 완공단계에 있습니다. 현재 실내 인테리어 작업만 마무리되면 이 사업도 일단락될 것 같습니다』
 
  ─청산리구국대장정 코스 중에 비암산 一松亭 등반코스가 있던데, 姜敬愛 문학비를 보셨습니까.
 
  『일정 때문에 「姜敬愛 문학비」에 들르지는 못했지만, 동행한 교수 한 분이 할아버지 암살 연루설을 이야기해 주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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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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