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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호

위대한 세대의 증언 (7) - 새나라자동차·워커힐 호텔·합판산업 일으킨 艾壽根의 1960년대

『나는 당신들이 싫어하는 군사독재下에서, 밀림의 원목을 자르고 전쟁터를 누비며 달러를 벌었다』

李根美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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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 대통령이 워커힐 호텔에 놀러가기 편하라고 삼일고가도로를 닦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외국 관광객 유치하려고 길을 닦았다』
● 인도네시아 정글에서 원목을 채취, 세계 최고 합판생산국의 길을 열었다.
●『베트남에서 한국경제가 일어섰다』 그곳에서 만난 鄭世永·鄭仁永·趙重勳 이야기


艾 壽 根
1926년 경기도 용인 출생. 연세大 경영학과·샌프란시스코大 경제학과 졸업. 6·25 참전용사. 美 7사단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 중앙정보부 경제개발팀 기획관리과장, 美 산호세 텔레비디오 사장, 美 코암투자회사 사장, 日 마르베니 종합상사 고문, 홍콩 코암투자회사 대표이사, 아시아 태평양연구소 고문, 한국선물주식회사 회장, 한국선물협의회 회장 역임. KBS 「경제전망대」에서 5년간 국제금융해설.
즉흥적이었지만 순수했다

  여의도 63빌딩 59층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경이롭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층빌딩과 낙엽지는 숲이 잘 어우러져 몹시 풍요로워 보인다. 艾壽根(애수근·78)씨는 『5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며 『여의도의 오늘에는 나의 땀방울도 보태졌다』며 감회에 젖었다.
 
  艾壽根씨는 『개발연대에 많은 일들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해관계 없이 순수하게 진행됐다』고 했다.
 
  무역회사 부장이었던 艾壽根씨는 1958년 무렵부터 영관장교였던 石正善(석정선)씨와 친분을 맺어 왔다. 艾씨는 1961년 7월, 중앙정보부에 몸담은 石正善씨의 요청으로 국가재건 최고회의 경제개발팀 기획관리과장을 맡았다.
 
  국내에서는 새나라자동차 설립, 워커힐 건설 등의 일에 참여했다.
 
  해외에서는 인도네시아 원목 채취에 이어, 베트남 해외개발공사 동남아지국장을 맡아 국내 기술요원 송출 사업에 나섰다. 196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금융업에 종사했고, 그후 캘리포니아州의 실리콘밸리에 있는 텔레비디오 회사 사장을 지냈다.
 
  1989년에 귀국해 한국선물거래주식회사와 선물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건강이 나빠져 1996년에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2003년 3월에 영구 귀국했다.
 
  그는 개발연대의 문을 열었다는 데 자부심이 대단했다.
 
  『피터 드러커가 「산업혁명 후 가장 짧은 기간에 발전한 건 한국」이라고 했어요. 한국이 朴正熙 대통령 집권 18년 만에 근대화를 달성했는데, 그 18년은 다른 나라와 다릅니다. 다른 나라는 지식기반이 나름대로 있었지만, 日帝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국은 지식 기반이 빈약했어요. 18년 동안 한편으로는 교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발전했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시작한 겁니다』
 
 
 
 GNP 80달러에서 시작한 자동차 산업
 
   민간인이었던 艾壽根씨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발탁한 石正善씨는 李承晩 정부 때 整軍(정군)운동으로 전역했다가, 5·16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일했다. 艾씨와 비슷한 시기인 1969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서 사업을 하다가 은퇴했다. 1년에 한두 번 고국을 찾는데 그때마다 艾壽根씨와 만나 회포를 푼다고 한다.
 
  金鍾泌씨와 石正善씨는 육사 8기 동기생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石正善씨는 5·16에 참여하지 않았다. 거사에 성공하자 金鍾泌씨가 바로 石正善씨를 영입했다.
 
  5·16 이후 朴正熙 대통령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자동차 사업이었다고 한다.
 
  자동차 산업의 파급효과를 알고, 미국·일본·독일의 자동차 회사를 찾아가 기술 이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韓日회담을 할 때 우리 정부가 일본에 기술이전을 부탁하자, 일본에서 「내수용을 만들 거냐, 수출용을 만들 거냐」, 「버스를 만들 거냐, 승용차를 만들 거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우리 협상대표단이 「지프차나 스리 쿼터 같은 걸 만들어서 군대에서 쓰려고 한다」고 했어요. 괜히 승용차를 만들어서 해외에 판다고 하면 기술이전을 안 해 줄 것 같아서였죠. 일본이 기술을 이전해 줬어요. GNP 80달러밖에 안 되는 나라니 가르쳐 줘도 별 상관없을 거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자동차 산업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국내에 참여하려는 기업이 없었다. 在日교포 박노정씨가 초창기에 참여했으나 자금부족으로 도중하차했다. 정부가 직접 한일은행의 자금을 빌려 「새나라자동차」 공장을 지었다.
 
  육군 병기감 출신 소병기 장군이 사장, 在日교포 안석규씨가 전무로 취임하고 艾壽根씨는 정부에서 파견 나가 기획과 구매책임을 맡았다.
 
 
 
 「시발 자동차」 망한다고 자동차 산업 반대
 
  『국내에서도 안 될 거라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당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드럼통을 두들겨서 고물 엔진을 단 「시발」이라는 자동차가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자동차 산업을 시작하면 시발차가 망하게 된다고 반발이 많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얘기죠』
 
  당시 우리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7만 대. 군대 트럭까지 다 합친 수였다.
 
  군사혁명정부는 1961년 8월15일까지 자동차를 만들어 내기로 결정했다.
 
  『金鍾泌씨가 상공부 관계자를 불러서 자동차를 만들라고 하면 「예, 예」 하고 대답하고 돌아가서는 아무 소식이 없어요. 신문에서는 「돈이 어디서 나와서 자동차를 만드느냐」고 야단이었어요. 어쨌든 8월15일에 자동차가 나왔어요. 일본에서 부속을 수입해서 조립만 한 거죠. 그렇게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자동차 산업을 시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일제 부속품을 조립한 자동차이기는 하지만 「새나라자동차」라는 이름의 국산 자동차가 탄생했다. 당시 한국은 가구 하나 변변히 생산하지 못할 때였다. 艾씨는 『5·16 전에 우리나라가 가진 기술은 리어카 만들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드럼통을 두들겨서 고물 엔진을 단 시발택시와 버스를 만드는 정도였다』고 했다. 새나라자동차에 들어간 국산품 가운데 품질기준을 통과한 것은 한국타이어가 유일했다고 한다.
 
  급하게 만든 만큼 「새나라자동차」는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택시 운전사들은 『국산 시트의 스프링이 전부 끊어져서, 손님들의 엉덩이를 찌른다』고 항의를 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국산 자동차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艾씨는 『국산 자동차를 생산했기 때문에 朴正熙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결심을 했다』며 『중화학공업도 자동차 산업이 출발했기 때문에 꿈꾸게 된 것』이라고 했다.
 
  새나라자동차는 3년 후 신진자동차 김창환 사장에게 넘어갔고, 정부는 한일은행의 빚을 다 갚았다. 신진자동차가 나중에 대우자동차가 되었고, 현재의 GM대우로 이어지고 있다.
 
 
 
 달러 벌기 위해 워커힐 호텔 건축
 
   자동차 산업과 함께 혁명정부가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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