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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의문사委의 간첩 전력 조사관 김삼석의 軍 장성 수사 內幕

임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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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 간첩 사건」으로 4년간 복역한 김삼석이 李俊 前 국방장관, 呂運虔 前 합동참모본부 작전국장 등을 조사. 현역 기무사령관에게 다섯 차례 출석요구서 보내
● 大法院은 김삼석의 간첩죄를 유죄 확정, 김삼석은 「안기부의 조작」이라고 주장
● 베를린에서 「남매 간첩 사건」 조작을 주장한 안기부 정보원 백흥용은 북한으로 탈출
의문사委 조사관 김삼석, 朴槿惠 대표·김대중 이사기자 고소
의문사委 前 조사관 김삼석씨.
  간첩·빨치산을 민주화 인사로 인정하는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기간이 지난 7월로 공식 종료했지만, 그 후유증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간첩 전력 조사관」으로서 軍 사령관, 국방장관을 지낸 예비역장성을 조사하고, 기무사령관에게 소환장을 발부해 물의를 일으켰던 前 의문사委 조사관 김삼석(40)씨가 朴槿惠(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조선일보사, 조선일보 金大中 이사기자 등을 고소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金씨는 1993년 발생한 「남매 간첩 사건」의 당사자로 4년간 실형을 살았다.
 
  그러나 金씨는 『국가안전기획부의 공작으로 간첩사건에 연루된 자신을 간첩으로 표현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지난 8월10일 한나라당 朴槿惠 대표와 조선일보 金大中 이사기자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그는 또 명예훼손 혐의로 朴대표와 金이사기자, 조선일보사를 상대로 총 9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金씨는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사실은 있지만, 안기부 프락치였던 백흥용씨의 양심선언으로 그 사건이 조작됐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金씨는 또 같은 이유로 일간지 등에 「지금 총성 없는 적색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다」는 광고를 실은 예비역대령연합회장 서정갑(64)씨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고 5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남매 간첩 사건」의 전모
 
  1993년 9월8일 「반핵평화운동연합」 정책위원 김삼석(당시 28세·외국어大 용인분교 露語科 졸업)씨와 金씨의 여동생 은주(당시 24세·백화점 점원)씨가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연행됐다. 같은 해 9월24일 안기부는 金씨가 1992년 1월 동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在日간첩에게 포섭돼 국내에서 수집한 군사기밀 자료인 「청년과 군대」, 「반핵평화」 등의 문건을 넘겨주는 등 간첩활동을 벌이고 공작금 60만 엔을 받아 귀국했다고 발표했다.
 
  金씨의 여동생 은주씨는 在日간첩에 포섭된 뒤 1992년 5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사상교양과 함께 공작금 20만 엔을 받은 뒤 일본인 연락원의 국내 안내역을 수행하고, 국내 연락공작원으로부터 金日成의 「10대강령」 등 북한의 선전 문건을 넘겨받아 한총련에 전달했다는 혐의였다.
 
  서울지검은 1993년 10월23일 두 사람을 국가보안법 제4조 1항(목적수행 국가기밀탐지 등), 제5조 2항(금품수수), 제7조 1항(찬양·고무), 제8조 1항(회합·통신), 제9조 1항(편의제공) 위반 등의 혐의로 서울형사지법에 기소했다. 공소사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김삼석 남매의 변소 요지다).
 
  (1)김삼석은 일본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 금품을 수수했다(김삼석은 북한 공작원을 만난 일이 없는데 안기부가 고문을 해 북한 공작원을 만난 것으로 조작했다).
 
  (2)김삼석은 북한 공작원의 지시에 따라 국가기밀을 탐지·수집했다(김삼석은 군사문제연구가로서 각종 신문과 잡지 등에 나온 군사관련 기사를 스크랩해 1990년쯤 「청년과 군대」라는 책을 저술한 적이 있으나, 누구의 지시를 받아 자료를 수집한 것도 아니고 수집한 자료가 국가기밀이 아니다).
 
  (3)김은주는 일본에서 한통련 관계자를 만나 금품을 수수했다(김은주는 일본에서 어학연수 중 평소 알고 지내던 가족교포회 회장 권용부 등으로부터 몇만 엔씩 몇 차례 용돈을 받아 쓴 일이 있을 뿐이고, 권용부는 한통련 관계자가 아니다).
 
  (4)김은주는 「말」誌, 한겨레신문 등을 구입해 국가기밀을 탐지해 권용부에게 전달했다(이 부분은 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옴).
 
  (5)김은주는 배인오의 부탁으로 일본에 가서 그가 맡긴 물건을 한통련 간부에게 전달하고, 한총련 출범식 비디오 테이프를 일본에 가는 백흥용을 통해 在日 한국인 정치범을 구원하는 가족교포회에 전달하고, 백흥용으로부터 받은 북한 원전을 한총련에 전달했다(안기부가 공작원 백흥용을 이용해 만들어 낸 사실이다).
 
  서울형사지법은 1994년 2월28일 선고공판에서 김은주씨에 대한 공소사실 중 「말」誌 구입을 국가기밀 탐지로 기소한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외에 나머지 공소사실을 전부 유죄로 인정했다. 김삼석에게 징역 7년, 김은주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됐다.
 
  서울고등법원은 1994년 7월7일 김삼석에게 징역 4년, 김은주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고, 1994년 10월25일 대법원은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백흥용의 「양심선언」
 
  그러나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한 지 4일만에 이들과 일본에서부터 관련을 맺어온 백흥용이 독일 베를린에서 자신이 안기부 프락치라는 내용의 이른바 「양심선언」을 해 이 사건은 조작說에 휘말리게 된다.
 
  다음은 백흥용이 1994년 10월29일 독일 녹색당 주최로 베를린 市의회 청사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1966년생인 백씨는 1990년 초부터 소위 진보적 영화운동단체인 「남누리영상」의 대표로 일하다가 1992년 5월 자신이 제작한 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의 상영을 위해 미국에 다녀온 뒤 안기부에 연행됐다. 이때 백씨는 안기부 직원들의 협박으로 안기부에 협조하기로 하고 지시에 따라 일본을 방문해 조총련과 한통련 간부들을 접촉하고 정보를 수집·보고했다.
 
  ▲백씨는 1993년 5월 안기부로부터 『한총련과 조총련의 연관성을 입증해야 하니 조총련으로부터 북한영화를 입수해 그것을 김은주를 통해 한총련에게 전달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후 백씨는 조총련계 영화사인 「시네카롱」이 자신에게 보낸 북한영화를 받는 장소에 김은주씨를 대동했고 金씨를 통해 이를 김삼석씨에게 전달했다. 백씨는 그 후 1993년 9월에도 같은 방법으로 「金日成 10대강령」 등 북한관련 책자를 김은주씨가 소지하게 했다.
 
  ▲백씨는 프락치 의혹이 짙어지자 1994년 9월1일 안기부가 새로 만들어 준 여권과 여행경비 300만원을 받아 김포공항을 통해 베를린으로 갔다.
 
  안기부는 백흥용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안기부는 1994년 11월 『백흥용의 양심선언은 조작된 것으로 전혀 사실과 다른 허위주장』이라고 전면 부인했다.
 
  당시 안기부장이던 권영해씨는 1995년 1월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백흥용이 안기부 정보원으로 일한 사실이 있으나 이는 본인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한 것이며, 이미 사건 전인 1993년 2월 안기부에서 해고당했다. 또 김삼석, 김은주는 경중의 차이는 있으나 간첩인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했다.
 
  백흥용은 1996년 12월 베를린에서 부인과 함께 북한 측으로 탈출했다.
 
  김삼석은 4년간 복역한 뒤 1997년 9월 30일 만기 출소했다. 金씨는 출소 직후인 1998년 2월 金大中(김대중) 대통령 취임 특사로 사면·복권된 뒤 2003년 7월 2기 의문사委 출범 때 민간 조사관으로 들어갔다.
 
  金씨는 軍 관련 사건을 다루는 조사3과에 근무하며 1983년 15사단 전방 연대인 39연대 3대대에서 특수 학번자 선도대책과 관련해 발생한 「최온순 사망 사건」 조사를 담당했다.
 
  金씨는 이 과정에서 사건 당시 대대장(중령)급 이상 지휘관 11명에게 출석을 요구, 9명을 소환 조사했다. 이들 중에는 李俊(이준) 前 국방장관, 呂運虔(여운건) 전 합동참모본부 작전국장, 朴世煥(박세환) 前 국회의원(국방위원) 등이 포함돼 있다.
 
  당시 중대원·간부 등을 포함하면 金씨가 조사한 현역·예비역 군인은 35명에 달한다.
 
  특히 金씨는 송영근 現 기무사령관에게 지난 3월9일부터 5월25일 사이에 다섯 차례에 걸쳐 출석요구서를 보냈다가, 기무사의 공식 항의에 따라 중단했다. 당시 출석요구서에는 「응하지 않으면 동행명령장이 발부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사면복권을 받아 임용에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더라도 간첩 전력이 있는 사람이 전직 군장성과 국방장관 등을 조사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편견을 가지고 軍이나 기무사 등 공안기관에 대한 「한풀이 식」 조사를 벌였을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김삼석, 『國保法 어겼지만 간첩은 아니다』
 
  金씨는 문제가 불거진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문민정부가 안기부법 개악을 앞두고서 급히 간첩사건이 필요하자 프락치를 활용해서 이른바 「남매 간첩 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당시에 국내 군사자료를 모아 「청년과 군대」라는 책을 썼고, 이 책의 일본어판 출판을 위해서 일본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당시 국가보안법상 反국가단체였던 「한통련」 관계자, 곧 反국가단체 구성원을 만나면서 국가보안법을 어긴 것이다. 공작금 60만 엔을 받았다는데, 그해 3월10일 결혼했기 때문에 축의금과 한통련 관계자를 통해서 출판된 책에 대한 저작권료를 받았을 뿐이다』
 
  즉 國保法을 어기기는 했지만 간첩은 아니라는 것이다. 金씨가 朴槿惠 대표의 발언이나 金大中 기자의 글에서 문제삼은 부분도 대부분 자신을 「간첩」이라고 명시했다는 것이다.
 
  『간첩이 민주인사가 되고 간첩이 軍 사령관들과 전직 국방장관을 조사하는 나라는 아마 全세계에 없을 것입니다』 (朴대표, 7월19일 한나라당 전당대회)
 
  『盧대통령은 과거나 미래를 선택하라고 했는데 간첩이 민주인사가 되고 군장성을 취조하는 게 미래로 가는 국가냐』(朴대표, 8월2일 상임운영위원회)
 
  『그러나 그가 말한 「나라의 틀 바꾸기」가 간첩을 위문사위원으로 만들어 거꾸로 간첩 잡는 책임자들을 조사하게 하는 상황과 오버랩될 때 우리는 큰 불안을 갖지 않을 수 없다』(조선일보 7월17일자, 金大中 칼럼)
 
  결국 문제의 핵심은 金씨가 「간첩이냐, 아니냐」이다.
 
  金씨를 간첩으로 확정한 대법원의 판결, 그리고 『모든 것이 조작됐다』는 월북한 프락치의 주장. 10년이 넘은 이 해묵은 논쟁의 결론은 다시 법원에 의해 가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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