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연쇄 살인범 柳永哲의 어린 시절 - 20여 명의 증언

어머니가 出産 後 죽일까 마음 먹었다는 二卵性 쌍둥이는 천대 속에서 생명에 대한 애정을 잃어 갔다

이은영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아버지의 妾 아래 살던 불우한 幼年…
不法 LP를 훔치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다」던 중학생…
性관계를 가진 여성들의 음부를 生體실험하듯 난자
二卵性 쌍둥이로 태어난, 원하지 않던 아이
  희대의 살인범 柳永哲(유영철·34)은 어떻게 인간을 그렇게 쉽게 살해하고, 그 시신을 좁은 화장실에서 토막낼 수 있었을까? 그는 악마였을까? 야수의 심장을 지닌 인간이었을까? 月刊朝鮮은 「살인기계 柳永哲」의 어린 시절, 범행의 저변에 깔린 살인의 심리를 정밀 추적했다. 柳永哲을 직접 신문했던 서울시경 김용화 수사과장, 강대원 기동수사대장, 권일용 경사, 柳永哲의 심리분석을 담당했던 경찰대학 李雄赫(이웅혁)·표창원 교수, 아주大 심리학과 李珉圭(이민규) 교수, 柳永哲의 성장을 지켜본 서울 마포구 공덕2동 주민들 6명, 柳永哲의 초등학교 동창 4명, 경서중학교 동창 2명, 柳永哲을 가르쳤던 교사 2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柳永哲은 1970년 4월18일 서울시 마포구 공덕2동 134번지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서울 마포경찰서 뒤편 일대다. 柳永哲은 二卵性(이란성) 쌍둥이였고, 그 가운데도 性(성)이 다른 쌍둥이였다. 함께 태어난 여동생은 1년 후 출생신고됐다.
 
  柳永哲에게는 형이 둘 있었다.
 
  柳永哲은 부모가 원치 않았던 아이였다. 어머니는 생활고 때문에 태어난 柳永哲을 죽여 버릴 생각까지 했다. 柳永哲의 외할머니(82)는 공덕동에서 2평짜리 독방에 살고 있다. 외할머니의 증언이다.
 
  『영철이를 낳고 나서 딸이 영철이를 죽여 버리려고 했다고 해.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나중에 그 애가 교도소에 들락거릴 때 내가 딸한테 그랬어, 「어미가 자식한테 그런 마음을 먹어서 네가 죄를 받는 거다」라고』
 
  외할머니는 『영철이는 평생 딸에게 짐이었다』고 했다.
 
  공덕2동에서 柳永哲이 자라는 것을 곁에서 지켜봤다는 주민 金모씨(女)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영철이 어머니는 자식이 부담스러워 셋째 아이인 영철이를 낳지 않으려고 했다. 중절수술을 할 수도 없는 힘든 형편이었다. 막상 낳았는데 二卵性 쌍둥이여서, 영철이 어머니가 더 힘들어 했다』
 
  柳永哲의 쌍둥이 여동생은 서울의 한 女商에서 3년 내내 전교 10위권 안에 드는 모범학생이었고, 학교 졸업 후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동네 주민들은 『오빠는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져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각종학교」에 갔는데, 동생은 공부를 너무 잘했다』며 『어떻게 쌍둥이 남매가 이렇게 정반대의 인생을 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柳永哲은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공덕 2동 일대에서 보냈다. 결혼생활(1992∼2002년)을 이곳에서 했다. 柳永哲은 2003년 9월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공덕1동 어머니의 집에서 생활했다.
 
  「살인기계」 柳永哲의 일생은 출생지에서 반경 1km를 벗어나지 않았다. 전과 14범인 柳永哲은 7년간 감옥생활을 해, 감옥은 그의 「제2의 고향」이었다.
 
  柳永哲이 살던 공덕2동 지역은 지금 대부분이 재개발에 들어가 있다.
 
  공덕동 일대는 서울市에서 가장 넓은 재개발구역 중 하나다. 공덕2동은 지난 10여 년간 재개발이 이뤄져, 기존 주택들이 대다수 철거됐다. 최근 공덕2동 340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제4구역 재개발 사업이 인가돼 20층짜리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들어설 예정이다.
 
 
 
 6명이 단칸방에 살아
 
   지난 8월2일 공덕2동 지역을 찾았다.
 
  이곳에서 4代째 살고 있다는 李相歡(이상환·63)씨는 『영철이의 초등학교 동창 어머니들이 여기에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공덕2동은 1980년 초반까지만 해도 달동네였다. 무허가 주택이 많았고,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집이 수두룩했다. 수도가 없는 주민들은 마을 입구에 있는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柳永哲이가 살았던 134번지 일대는 비탈진 언덕에 있어서 높은 지대의 달동네보다는 나았다』
 
  柳永哲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1978년 공덕동의 방 한 칸 월세는 2000원 안팎이었다. 당시 9급 공무원의 월급이 2만~3만원이었다고 한다. 柳永哲의 여섯 가족은 단칸방에서 함께 살았다.
 
  공덕2동 주민들의 상당수는 막노동을 했다. 가까운 구로공단에서 工員으로 일하거나, 동대문시장·남대문시장·공덕시장에서 노점상 등으로 일했다.
 
  柳永哲이 태어난 1970년, 柳永哲의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柳永哲은 지난 7월16일 경찰에 구속된 후 『부친이 간질로 사망했고, 둘째 형이 서른두 살 때인 1994년 같은 병으로 죽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는 몰랐는데 스무 살이 넘어서 간질 증세가 자주 나타났다. 최근 여동생이 간질로 이혼을 했다』고 주장했다.
 
  柳永哲은 자신의 주장대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 있는 국립정신병원에서 입원과 통원치료를 받은 것으로 이번 취재결과 확인됐다. 병명은 「정신분열성 간질과 충동장애」였다.
 
  그러나 柳永哲의 신병과 수사서류를 넘겨받은 검찰은 최근 『柳永哲 가족과 柳永哲의 간질 병력은 확인되지 않았다. 사실무근이다』고 발표했다.
 
  공덕2동에서 만난 주민 6명은 柳永哲의 아버지와 柳永哲의 病歷(병력)에 대해 엇갈린 증언을 했다.
 
  『영철이 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거동이 불편했다』
 
  『영철이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였고,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영철이 아버지가 肝질환이 심했다』
 
  「柳永哲의 아버지가 간질 환자였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나 공통된 점은 「柳永哲의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사실이었다.
 
  柳永哲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지병을 앓고 있었다. 건강 때문에 공사장에 하루 걸러 하루 정도 나갔다. 柳永哲이 태어난 1970년 무렵에는 건강이 악화돼 부부사이가 더 벌어졌다.
 
 
 
 한동네에 妾을 둔 柳永哲의 아버지
 
   柳永哲의 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운데도, 부인 외에 다른 여자를 뒀다고 한다. 한 아주머니의 증언이다.
 
  『먹고살기도 힘든 영철이 아버지가 동네에 첩을 뒀다. 영철이는 서너 살 때부터 그 여자 밑에서 자랐다. 영철이가 중학교 1학년 무렵에 영철이 아버지가 죽었고, 아이들이 생모와 합쳤다. 영철이 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로 살림을 꾸렸다. 아이들이 계모 밑에 살던 시절보다 행색이 훨씬 나아 보였다』
 
  柳永哲 아버지는 1984년 사망했다. 柳永哲이 K중학교 1학년, 열네 살 때였다. 柳永哲의 어머니는 경찰 진술에서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柳永哲은 초등학교 시절 같은 동네에 있는 계모의 집과 생모의 집을 들락거렸다. 한 아주머니는 『영철이 어머니가 아들 셋은 첩에게 보내고, 딸은 자기가 데리고 키웠다』고 기억했다.
 
  柳永哲은 1978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이 많았다.
 
  柳永哲의 생활기록부에 나타난 교사들의 평가는 평범하다. 1학년에서 4학년까지는 「숙제를 잘한다」, 「말이 없다」, 「가끔 다툰다」로 적혀 있고, 5학년 때는 「어른스럽다」, 6학년 때에는 「안정감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시락 반찬으로 된장을 싸 가, 『똥 싸왔다』고 놀림받아
 
   柳永哲은 나이가 많은데다가 키가 커서 번호가 늘 65번 이상이었다.
 
  柳永哲은 도시락을 자주 싸 가지 못했다. 도시락을 못 싸 오는 아이들이 한 반에 10명쯤 되던 시절이었다.
 
  柳永哲의 초등학교 동창생은 『영철이가 한 번은 도시락 반찬으로 된장을 싸 와서 친구들로부터 「똥을 싸 왔다」고 놀림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며 『집에 도시락 반찬을 변변히 챙겨 줄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공덕동에서 만화가게와 복덕방을 오래 운영한 한 아주머니는 柳永哲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6월에 영철이를 공덕시장에서 봤는데, 「어머니에게 찌게 끓여 줄 생태를 사러 왔다」며 내 건강을 걱정했다. 깔끔하게 하고 다녀서 회사에 다니는 줄 알았다. 그 녀석이 그렇게 끔찍하게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이라니…』
 
  柳永哲의 초등학교 6학년 생활기록부에는 柳永哲의 아버지가 「행방불명」이라고 적혀 있다.
 
  초등학교 시절 柳永哲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柳永哲은 아버지에 대해 거짓말로 둘러댔다. 중학 동창 盧모씨(34)는 『거의 매일 영철이 집에 가서 놀았는데, 영철이가 「우리 아버지는 군인」이라고 얘기했다』고 했다.
 
  5학년 담임이었던 河濬秀(하준수)씨는 『영철이는 아버지에 대해 묻는 것을 싫어했고,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며 『영철이 어머니는 학교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河씨의 이야기다.
 
  『1980년대 초반 K초등학교 학생들은 대부분이 가난했다. 그중에서도 영철이는 유독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영철이는 「애어른」이었다. 氣가 없고 말수가 적었다. 그렇지만 청소를 잘해 친구의 청소 당번을 대신해 줄 정도였다』
 
  柳永哲은 방과 후 청소를 잘했다.
 
  집에 가봐야 몸 아픈 아버지와 두 형이 자신을 돌봐 줄 처지가 아니었고, 식당일을 나가는 어머니 역시 그를 반겨 주지 않았다. 청소를 하고 나서 받는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5학년 담임이었던 河교사의 이야기다.
 
  『영철이는 6학년이 되어서도 내 교실에 찾아와 「선생님, 청소를 해드릴까요」하고 물었다. 환경미화할 때 나를 도와주기도 했다. 前 학년의 담임선생을 찾아오는 일은 별로 없는 일이다. 「참 잘했다」는 내 칭찬에 환하게 웃던 영철이의 얼굴이 지금도 생각난다. 영철이는 내가 아끼던 제자 중에 하나였다』
 
  공덕2동 주민들도 柳永哲을 「애어른」으로 기억했다.
 
  아주大 심리학과 李珉圭 교수는 『계모와 생모, 구실을 못 하는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면서 柳永哲은 자아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고, 정상적인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것 같다』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에게서 重症(중증)의 「애어른」 증후가 종종 나타난다』고 했다.
 
  李교수는 『결손가정에서 자란 아이들 가운데 「애어른 증후군」이 심각한 경우가 많다』며 『이런 아이들은 환상이 많고, 「마징가 제트」 같은 영화를 보면서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는 경향이 크다』고 했다.
 
 
 
 개구리 해부 좋아하고, 연탄집게로 쥐 잡아
 
  柳永哲은 미술과 체육, 자연과목을 좋아했다.
 
  여름이면 K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잠자리를 잡기 위해 수색이나 모래내로 원정을 나갔다.
 
  柳永哲은 잠자리를 잘 잡았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을 관찰하는 데 흥미가 있었다. 냇가에서 개구리를 잡아서 목을 비틀거나, 수술한다며 배를 가르기도 했다.
 
  5학년 담임이던 河濬秀씨는 『영철이가 자연과목을 잘하고, 동물에 관심이 많아서 「너는 의사가 되면 잘 하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고 했다. 柳永哲은 친구들에게 『의사가 되겠다』고 얘기를 하곤 했다.
 
  柳永哲의 계모는 柳永哲의 얘기를 듣고, 『쌀 팔아 먹을 돈도 없는데, 의사는 무슨 의사냐』고 핀잔을 줬다. 柳永哲은 동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달동네에는 쥐가 많았다. 쥐는 초등학교 남자아이들이 두려워했던 것 중 하나다. 초등학교 시절 柳永哲은 쥐도 고양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네 꼬마들은 柳永哲이 연탄집게만으로 쥐 잡는 것을 보고 부러워했다.
 
  1980년대 초반, 마포구 공덕동에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K중학교 체육교사였던 주영형이 1981년 신체장애 학생인 이윤상을 살해해 암매장한 사건이 1982년 뒤늦게 드러났다. 초등생이었던 柳永哲은 친구들에게 『형사 콜롬보가 되겠다』고 했다.
 
  柳永哲은 이 K중학교에 1984년 진학했다.
 
  柳永哲은 말이 없었던 초등학교 시절과 달리 중학생 때 많이 밝아졌다고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죽고, 생모의 집에 들어가면서, 따뜻한 어머니 아래서 생활할 수 있었다.
 
 
 
 일그러진 靈魂
 
   중학교 1학년 생활기록부에는 「의리가 있고 활발함」, 2학년 때는 「책임감이 있고 규칙을 잘 지킴」, 3학년 때는 「근면 성실함」으로 기록돼 있다. 성적은 중학교 3년 내내 중간였다. 「지능지수(IQ)가 140이 넘는다」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생활기록부에 기록된 IQ는 95∼100이었다.
 
  柳永哲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 중학교 2학년 때는 친구들과 「사철나무」라는 모임을 조직했다. 매주 한 번씩 학교 화단에 모여 앉아 가요와 팝송을 불렀다. 중 2 때는 여의도에 있는 한 대형 교회에 다녔다.
 
  柳永哲은 운동을 잘했다. 100m를 12초에 뛰었고, 축구·농구를 좋아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영등포의 고등학교 깡패조직 「일진회」와 싸우기도했다. 자연 공부와 멀어졌다. 柳永哲은 중학 2학년 말부터 학교 선도부 반장을 맡았다. 학교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는 후배와 동기를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게 했다.
 
  柳永哲은 싫어하는 수학·물상 시간에는 만화 그리기에 열중했다. 주로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캐릭터를 그렸다. 柳永哲은 만화 속 주인공 「까치」가 내뱉은 대사인 『난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을 좋아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柳永哲의 일탈이 본격화되기 시작됐다.
 
  한 동창생의 기억이다.
 
  『중학교 2학년 가을 LP판을 구입하기 위해 영철이와 세운상가에 갔다. 영철이가 세운상가에서 LP판을 훔쳐서 나왔다. 친구들이 놀라서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까, 영철이는 「어차피 불법 복제판인데 훔치면 어떠냐? 이건 절도가 아니다』라고 서슴없이 얘기했다』
 
  선도부장이었던 柳永哲은 폭력으로 동급생들 위에 군림하려고 했다. 힘이 세다는 이유로 자신이 선생님들처럼 동급생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柳永哲의 폭력성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다.
 
  다른 동창생의 이야기다.
 
  『한번은 체육선생이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한 학생을 나무라고 있었다. 柳永哲은 선생님을 팔로 밀치고 나서 그 친구를 주먹으로 때려 눕혀 버렸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체육선생님은 柳永哲이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냥 교무실로 가 버렸다』
 
  중학교 동창인 노모씨는 『柳永哲이 무슨 일이든 장황하게 설명했고, 다소 허풍스러웠다』며 『모든 걸 자기 중심으로 얘기했고, 영웅심리가 강했다』고 했다.
 
  柳永哲은 중학 시절 60여 명 가운데 40등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성적이 나쁜 아이들은 통지표를 들고 집에 가기를 겁내는데, 柳永哲은 거리낌없이 집으로 갔다고 한다. 한 동창은 柳永哲이 돈을 벌기 위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어머니에게 『남의 집 애기들을 키운다고 집이 시끄러워서 내 성적이 이 모양 아니냐』고 큰소리를 치는 걸 보았다고 했다.
 
  柳永哲은 자신이 토막살해해서 파묻어 놓은 사람들의 「현장 검증」에 끌려 다니면서 TV 카메라를 향해 『여자는 몸을 함부로 놀리지 말고, 부자는 각성하라』고 외쳤다. 동창들은 이 광경을 보고 『참 영철이답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여자에 대한 강한 집착
 
  柳永哲은 중학 시절 여자에 대한 집착, 자신감이 컸다. 『내가 원하는 여자는 언제든지 내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동창들에게 드러냈다.
 
  예쁜 여학생을 길거리에서 만나면 스스럼없이 다가가서 데이트를 신청했다.
 
  柳永哲은 170cm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에 잘생긴 외모였기 때문에 동네에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학교 맞은편 화랑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여자 점원에게 「학알」(종이로 학의 알 모양으로 접은 것) 1000개를 접어 선물했다.
 
  柳永哲은 중학 동창의 어머니가 공덕동에서 운영하는 「방석집」(여종업원을 고용해 손님을 접대하는 술집)에 놀러가, 「누나」들이 남자 손님 접대하는 광경을 훔쳐보곤 했다.
 
  柳永哲은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했다. 만화를 그리고 운동하며 노느라 공부를 게을리 한 결과였다.
 
  1987년 5월, 학력인정을 받지 못하는 「各種學校(각종학교)」 K공고에 입학했다. K공고는 기술을 연마하는 직업학교의 성격이 강했다. 柳永哲은 잘 적응하지 못했다.
 
  柳永哲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8년 6월 소년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중학 시절 도둑질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던 柳永哲의 죄명은 「주거침입 절도죄」였다. 이때부터 교도소를 들락거려 20代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다. 절도·性폭행 등으로 전과 14범이 됐고, 7년 동안 교도소살이를 했다.
 
  柳永哲은 소년원을 출소하고, 스무 살이었던 1990년 전처 黃모씨를 만났다.
 
  공덕동에 살던 黃씨 가족이 빚 때문에 길거리에 나앉자, 柳永哲은 黃씨에게 『내 여동생과 같이 살아라』고 제안했다. 둘은 자연스럽게 동거를 시작했다.
 
  신혼살림은 공덕2동 비탈진 언덕에 있는 반지하 전셋집에서 했다.
 
  柳永哲은 中卒로 軍 복무를 면제받았다. 1992년 아들을 낳았다. 건설현장에서 중장비를 몰던 柳永哲은 당시 대우 에스페로 중고 승용차를 스포츠카로 개조해 타고 다녔다. 중장비 운전면허가 없어서 친구들에게 『면허를 따야 하는데…』라고 얘기를 했다. 친구들에게 『돈을 좀 만진다』고 자랑을 했다.
 
  柳永哲은 감옥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1990년대를 감옥에서 보냈다.
 
  1991년 특수절도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고, 1993년 절도혐의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1995년에는 「음반 비디오 등에 대한 법률 위반」, 1998년에는 「공문서 위조」, 「절도」 등으로 복역했다.
 
  柳永哲과 결혼한 黃씨는 결혼생활 10년 중 7년간 옥바라지를 했다.
 
  黃씨의 한 친구는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이렇게 얘기했다.
 
  『柳永哲은 교도소에서 살았다. 黃씨는 옥바라지가 지겹고, 아이가 자라면서 아버지의 존재를 아는 걸 두려워했다. 전과 자인 아버지 아래에서 아이를 키우는 게 과연 옳은 것인가 고민을 했다. 柳永哲의 어머니는 전과자 아들을 감쌌고, 柳永哲은 「우리 어머니가 고생한 것에 비하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며 아내 黃씨의 고생을 알아 주지 않았다. 黃씨는 범죄자로 전락한 아들을 끝없이 싸고 도는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柳永哲은 2000년 3월 사창가에서 일하는 15세 윤락여성을 강간한 혐의로 긴급 구속됐다. 黃씨는 2002년 여름 전주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던 柳永哲에게 이혼소송 서류를 접수시켰다. 黃씨는 柳永哲의 아들 접견권도 박탈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아들에 대한 끔찍한 애착
 
  교도소에서 이혼당한 柳永哲은 아내 黃씨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다.
 
  전주교도소 관계자의 얘기다.
 
  『柳永哲은 수감 당시 다른 수형자와 싸워서 두 차례 독방에 수감되는 징벌을 받았다. 수형성적이 좋지 않아 刑期를 다 채워야 했다』
 
  柳永哲은 2003년 9월11일 출소했다.
 
  柳永哲의 쌍둥이 여동생은 『오빠가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나서 對人기피 증세가 있었는데, 출소하고 집에 와서 자꾸 허공만 쳐다보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柳永哲의 토막살인 아지트였던 마포구 노고산동 원룸에서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은 柳永哲의 詩가 발견됐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주고 싶은 선물 목록을 신문에서 오려 수첩에 스크랩해 놓기도 했다. 柳永哲의 아들에 대한 애착은 상상 이상이었다.
 
  「출소하고서 왜 아내 黃씨를 죽이지 않았느냐」는 경찰의 신문에 柳永哲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들이 제대로 자라려면 엄마가 꼭 필요하다. 그래서 마누라를 안 죽였다. 그리고 내가 바보냐. 마누라를 죽이면 제일 먼저 나를 찾아올 텐데, 왜 마누라를 죽이나. 나는 그렇게 바보가 아니다>
 
  柳永哲을 직접 신문했던 경찰청 과학수사계 권일용 경사는 『남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면서 제 생명, 제 가족의 생명을 중시하는 게 살인자들의 이중적 성격』이라며 『살인자들은 삶에 대한 애착도 남들보다 강하다』고 했다.
 
 
 
 퍼덕이는 물고기를 깨무는 柳永哲
 
  柳永哲은 결혼생활 동안 캠코더를 이용해 가족과 함께 지낸 일상을 비디오 테이프에 닥치는 대로 담았다. 밥을 먹는 모습, 피서 여행, 운동하는 모습 같은 일상이 모두 비디오에 담겨 있다.
 
  이 비디오 테이프들을 분석한 경찰대학교 李雄赫(이웅혁·범죄심리학) 교수는 柳永哲이 가족과 제주도에 여행가서 찍은 비디오에서 특이점을 발견했다.
 
  『柳永哲이 40cm쯤 되는 물고기를 낚시로 낚더니, 두 손으로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잡고 입에 넣고 이빨로 무는 시늉을 했다. 살아 있는 생물에 대한 징그러움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柳永哲은 출소한 지난해 9월,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고 있는 공덕동 집을 나왔다. 본격적인 살인 행각의 시작이었다.
 
  柳永哲은 컴퓨터를 이용해 경찰 신분증을 위조했다. 이 가짜 신분증으로 「출장 안마사」들을 협박해서 돈을 강탈했다. 柳永哲은 교도소에서 워드프로세서 2급 자격증을 땄다. 신분증 위조는 쉬운 일이었다.
 
  출장 안마사들을 집중적으로 살해한 柳永哲의 노고산동 원룸은 6평쯤 되는 공간이었고, 그가 시신을 토막낸 화장실은 0.5평쯤 되는 공간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토막낸 여성은 확인된 것만 11명이다. 그가 지난 3월부터 토막살해한 여성들은 대부분 「출장 안마사」, 「전화방 도우미」 등 性매매에 나선 여성들이었다.
 
  柳永哲은 경찰조사에서 출장 안마사들을 집중 살해한 것에 대해 이런 궤변을 늘어 놓았다.
 
  『출장 안마사들은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뛰쳐나와 몸을 파는 「썩은 피」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실종이 된다고 해도 내놓고 찾을 사람이 없을 것이 분명하고,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柳永哲은 지난 3월 중순 출장 안마사 권모씨(24)를 자신의 원룸으로 유인했다. 욕실에서 목욕을 하는 권씨를 둔기로 내리쳐 숨지게 하고 시체를 토막낸 뒤 암매장했다. 柳永哲은 살인도구로 칼과 직접 제작한 쇠망치를 사용했다.
 
  서울 경찰청 범죄분석과 권일용 경사는 『범행에 사용된 흉기는 칼과 톱으로 보인다』며 『처음에는 톱을 이용해 시체를 15∼18토막을 내다가 나중에는 칼로도 얼마든지 토막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칼을 이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사체발굴작업에 참가한 서울시경 감식반의 한 관계자는 『너무 시신을 난자해 처음에는 고깃덩어리를 파묻은 줄 알았다』며 『사람의 눈 부분을 발견하고서야 사람의 시신인 줄 알 정도였다』고 했다.
 
 
 
 生體실험의 가능성
 
  과학수사계 형사들은 『토막이 난 시체였지만 필요 이상으로 많이 손상돼 있는 것으로 봐서, 혹시 의도적으로 생체실험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한 관계자의 얘기다.
 
  『연쇄살인범들은 대부분 냉각기를 가지고 살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柳永哲은 냉각기가 없이 무차별하게 여성들을 살해했다. 柳永哲이 간질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가진 점, 내장까지 파헤친 것을 볼 때 인간의 신체에 대해 병적으로 강한 호기심을 가진 것은 아닌가 의심된다. 柳永哲의 연쇄 토막살인은 범죄학 교과서에 실려야 할 만큼 희귀한 경우다』
 
  경찰大 李雄赫 교수는 『항간에는 柳永哲이 혹시라도 DNA 검사로 자신의 신원이 밝혀질까 봐 두려워서 性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도는데 사실이 아니다』며 『柳永哲은 유인한 여성들과 모두 性관계를 가졌고, 살해한 뒤 음부를 완전히 도려내고 토막까지 냈다』고 밝혔다.
 
  김용화 서울시경 수사과장은 『시체를 토막내는 것은 연쇄살인범이라면 누구나 생각하는 것이고, 이런 행동은 추적을 피해 살아 보려는 본능에서 나온다』며 『柳永哲 역시 검거되지 않기 위해 시신을 토막냈지만, 10여 명을 휴지기도 없이 죽이고 토막낸 심리는 아직 파악해 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대개 연쇄살인범을 정신병자로 치부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들 가운데 75%는 체계적인 사고를 하는 정상인들이다. 정상인들보다 IQ가 높은 경우가 많다. 연쇄살인범은 자신의 목표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살인이 거듭될수록 범행 수법이 정교해진다.
 
  0.5평짜리 목욕탕에 앉아, 자신이 죽인 여성들의 몸을 토막낼 때 柳永哲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악마였을까, 인간이었을까? 수사관들은 柳永哲에게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사람을 죽이고 토막내는 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
 
  柳永哲은 태연하게 『여자들의 몸에 피가 튈 때 「얼마나 아플까」하는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柳永哲은 자신의 간질병 얘기를 되풀이 하면서 『내 고통이 죽는 여자들 고통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고통이 사람 죽이는 두려움보다 크다』라는 진술을 했다.
 
 
 
 변호사, 『말이 많고 장황하게 설명, 독특한 살인犯』
 
  李珉圭 아주大 심리학과 교수는 『계획적인 살인은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전환시킬 수 없는 「共感(공감)의 무능력」 때문에 일어난다』며 『공감의 무능력은 아이들이 부모의 따뜻한 관심과 共感 없이 자랄 때 발생한다』고 했다.
 
  李雄赫 경찰大 교수의 해석이다.
 
  『대개 아버지는 자식 인생의 로드맵을 제시해 주고, 어머니는 생활습관을 형성해 준다. 柳永哲은 사람에 대한 애착이 형성되지 못했다』
 
  柳永哲이 유전적으로 공격성과 잔혹성을 타고 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려大 안암병원 정신과 이민수 교수는 『性 염색체에 변이가 있는 경우 유전적으로 잔인해질 수 있으며, 뇌 속 신경전달물질인 세르토닌이 급격히 저하된 경우도 과도한 공격성이 표출될 수 있다』고 했다.
 
  柳永哲은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위험인물로 분류돼 독방에 있다. 독방에는 24시간 감시카메라가 부착돼 있고 항상 사슬이 채워져 있다. 柳永哲의 변호를 맡은 車亨根 변호사는 『柳永哲은 말이 많고,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한다』며 『이런 독특한 살인범은 처음이다』고 전했다.●
조회 : 34690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1911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도서출간 배너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