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騎馬흉노국가 新羅 연구
趙甲濟(月刊朝鮮 편집장)의 심층취재

내 몸속을 흐르는 흉노의 피

조갑제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민족사의 주도세력이 된 신라 金氏 왕족은 흉노였다』

삼국통일로 민족통일국가를 만든 주체세력 신라 金氏王族은 북방草原에서 한반도로 진입한 匈奴族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공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것이 定說로 되면 한국인의 정체성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치고 민족사를 보는 시각을 넓혀줄 것이다.
4~6세기 신라는 중국문화를 거부하고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 서방의 로마문화를 받아들이다가 로마가 무너지자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동서양의 2대 일류문화를 수입해서 자기 것으로 만든 주체성과 개방성이 신라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匈奴族의 당당한 자존심이었다고 한다

● 문무왕의 碑文―『나는 흉노王의 후손이다』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신라에서만 나오는 積石목곽분·角杯·금관·로만 글라스는 흉노의 표시물
● 주체성·포용성·다양성·개방성을 지닌 신라의 통합력이 삼국 통일의 에너지였다
後漢시대의 감숙성 고분에서 나온 청동말 조각.
  삼국통일로 민족통일국가를 만든 주체세력 신라 金氏王族은 북방草原에서 한반도로 진입한 匈奴族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공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것이 定說로 되면 한국인의 정체성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치고 민족사를 보는 시각을 넓혀줄 것이다.
 
  4~6세기 신라는 중국문화를 거부하고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 서방의 로마문화를 받아들이다가 로마가 무너지자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동서양의 2대 일류문화를 수입해서 자기 것으로 만든 주체성과 개방성이 신라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匈奴族의 당당한 자존심이었다고 한다
 
 
  1장 : 우리 몸속에 흐르는 匈奴의 피
 
 
 
 민족사의 주도세력인 신라 金氏 왕족의 뿌리
 
   우리 민족사의 주체세력은 신라통일을 이룩한 金氏들이다. 통일대왕인 문무왕, 그의 아버지 태종무열왕으로 상징되는 신라왕족과 귀족들이다.
 
  朴氏, 昔氏에 이어 金氏 왕조를 연 것은 3세기 초 味雛이사금이고 4세기 奈勿麻立干代에 와서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金氏 왕조에서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무열왕, 문무왕 등이 나와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고 통일을 주도했다.
 
  이 신라 金氏들이야말로 화랑도와 함께 삼국통일의 주도세력이고 따라서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여 한민족이란 공동체를 만든 사람들이다. 이 집단은 민족문화의 原型을 굳히게 한 主役이었다. 이들의 가치관과 취향에 따라 민족문화와 민족성과 민족사의 뼈대가 상당 부분 형성되었다. 신라 金氏 왕족들은 그래서 민족사의 주인공들이라고 불릴 만하다.
 
  요사이 정통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에서는 이 신라 金氏 왕족이 북방 유목 기마민족인 흉노계이며 이 집단이 북방에서 경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집권세력이 되었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신라 金氏 왕족이 지배층으로 등장하던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초까지 왕들은 奈勿 麻立干, 智證 麻立干식으로 불렸다. 麻立干이란 말은 여러 부족들의 대표자란 뜻인데 유목민족의 칸(칭기즈칸의 칸)과 같은 語源이다. 이 金氏 왕족의 무덤이 경주 고분이다. 서기 4~6세기에 축조된 이 고분은 積石木槨墳이라 불린다. 시신을 木槨 안에 넣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 봉토를 입힌 무덤이다. 나중에 木槨이 썩어 무너지면 냇돌이 무덤을 메워 도굴을 방지해 준다.
 
   이 積石木廓墳의 형식은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의 주인공이었던 흉노의 무덤과 같다. 1973~1974년에 발굴된 천마총, 황남대총이 적석목곽분의 전형이다. 장례식과 墓制는 어느 민족이든지 잘 변하지 않으므로 민족의 계통을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이다.
 
  이 적석목곽분은 경주지역에서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난다. 이런 墓制를 가진 종족이 외부에서 침입했거나, 혁명적으로 득세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무덤 속에서 금관, 금허리띠 등 많은 금세공품이 발굴되었다. 그 디자인도 북방 유목문화의 특징을 띠고 있다. 적석목곽분엔 중국식 물건이 거의 없는 반면 몽골 초원 문화를 이어받은 유물들과 로마지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제품이나 공예품들이 많다.
 
  이는 신라 지배층이 몽골고원-중앙아시아-흑해로 이어지는 초원의 길을 통해서 서양문명세계와 무역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게 한다.
 
  4~6세기의 6대에 걸친 麻立干 시대(내물-실성-눌지-자비-소지-지증마립간)에만 나타나는 신라 적석목곽분에는 馬具와 무기가 특히 많다. 부장품을 들여다보면 중무장한 騎士가 떠오른다. 金氏왕족은 기마군단의 지휘자였다는 이야기이다. 4세기에 갑자기 경주에서 지배층으로 등장한 이들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요사이 역사·고고학자들이 과감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崔秉鉉 교수 -「東아시아 기마민족의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숭실대학교 역사학과 崔秉鉉 교수는 「新羅古墳硏究」(一志社)에서 이렇게 썼다.
 
  <신라 적석목곽분을 둘러싼 고고학적, 역사적 상황들을 종합하여 볼 때, 신라 적석목곽분은 결코 내부의 先行墓制가 복합되어 이뤄진 것은 아니었으며, 기마문화를 배경으로 한 북방아시아 목곽분 문화의 직접 渡來에 의해 돌발적으로 출현한 것이었고, 그것은 3세기 말,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북방 기마민족의 일파가, 3~4세기 중국 북부 유목민족 大南進 때(5胡16國시대) 한반도로 밀고 들어와 경주에서 토착정권을 점령하고 金氏 왕족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유목민족의 상징이 金이다. 유목민족은 금제품을 좋아하고 금세공 기술이 뛰어났다. 이들의 본거지였던 알타이 산맥의 그 알타이가 金이란 뜻이다. 흉노계라는 신라 지배층이 성씨를 金이라고 정했다는 것도 퍽 상징적이다. 경주 천마총 안으로 들어가보면 무덤의 주인공이 금관, 금팔찌, 가슴장식, 금귀고리, 금허리띠 등 온통 금장식품들과 칼, 馬具를 뒤집어쓴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이 과연 한국인인가 의아해 할 정도로 異國的이다.
 
  적석목곽분이란 墓制, 북방系 출토 유물들, 풍부한 馬具와 금제품, 金씨, 麻立干이란 호칭 등이 흉노의 표시물들인 셈이다.
 
  경기도 박물관장 李鍾宣 박사는 자신의 著書 「古新羅王陵硏究」(學硏文化社)에서 이렇게 썼다.
 
  <최근 흉노계 분묘를 종합한 연구에 따르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흥미롭게도 반도 서북부의 소위 낙랑故土에 그러한 유형의 고분들이 모두 남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오르도스(지금의 내몽골 지역)와 연결해서 볼 때 매우 주목할 현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르도스 철기문화의 주인공들이 漢의 팽창으로 그 일파가 서쪽으로 밀려가서 헝가리, 즉 훈족(흉노)의 나라를 세운 주체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이동한 다른 일파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도로 진출하였고, 일부는 일본열도에까지 상륙하였다고 봐야 당시 시베리아 민족들의 대이동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신라 積石木槨墳의 주인공들은 반도 서북부를 거쳐 東南進한 시베리아계 주민의 후예로서, 그들은 중국계가 아닌 시베리아-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 繩蓆文(승석문)토기, 금세공기술을 그대로 갖고 남하한 것이다>
 
 
 
 흉노-고조선-신라의 연결고리
 
  경기도 박물관 李鍾宣 관장(56)은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와 함께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계이다』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고고학자이다. 그를 만났다.
 
  그는 「古新羅王陵硏究」란 책에서 경주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내물왕과 왕비라고 추정한 고고학자이기도 하다. 서울시립박물관장 출신인 李관장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이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先史原史學科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1970년대 천마총, 황남대총 등 경주 고분 발굴에 참여했었다.
 
  李관장은 부여-고구려-백제의 지배층과 신라의 지배층은 出自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부여계통은 퉁구스族이고 신라 金氏 왕족은 좀더 유목적이고 서방적인 흉노-알타이계통이라고 했다. 물론 金氏族이 경주에 들어왔을 때는 유목민의 성격은 버린 상태였지만(유목은 넓은 草原이 있어야 한다) 騎馬전법은 갖고 왔을 것이다.
 
  李관장은 고조선의 지배층도 흉노계통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서기 전 2세기 漢武帝한테 망한 고조선 후기의 지배층이 흉노계통임은 평양 지역 고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漢武帝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낙랑군을 세웠지만 漢族 지배층은 소수였을 것이고, 귀족 등 다수 구성원은 역시 흉노계였을 것이라고 했다.
 
  李관장은 한국 고대사의 지배민족을, 만주를 원류로 하는 부여-고구려-백제의 남북형과 알타이-몽골초원을 고향으로 하는 고조선-신라-가야의 서북-동남방형으로 가른 셈이다. 이렇게 한반도로 집결했던 유목기마민족 출신들이 우수한 馬具와 철제 무기를 가지고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 고대 국가를 만들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는 유럽 각국이 아메리카 신대륙을 개척할 때와 비슷한 전개였을 것이다. 영국계, 프랑스계, 스페인계가 아메리카로 들어갔던 것처럼, 고구려계, 가야계, 백제계, 신라계가 일본열도라는 신천지로 들어가서 정착하고 이합집산하면서 정복왕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天皇家도 가야 출신, 백제 출신 등으로 명멸하다가 어느 단계 이후에는 백제 출신이 정착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닌가.
 
  李관장은 신라 김씨족을 알타이계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 했다. 흉노와 겹치기도 하고 흉노라는 이름 안에 포함되기도 하는 개념으로서의 알타이계이다. 몽골고원의 서쪽에 있는 알타이 산맥 부근에 뿌리를 둔 유목민이 東進하는 과정에서, 북방 초원 지대를 통일하여 거대 제국을 만든 흉노계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지만 알타이적인 요소를 잃지 않고 신라지역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알타이계 민족은 중앙아시아와 가깝고 중앙아시아는 그리스-로마문화권과 끊임 없이 교류해 왔기 때문에 알타이계 신라 金氏 왕족 무덤에서 로마적인 영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방에서 살던 흉노족의 일파가 기원 전 3세기경부터 한반도의 서북지방으로 들어와 고조선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평양 근방에서 수백 년 살다가 고조선이 망하거나(서기 전 2세기), 낙랑이 고구려에 점령되는(서기 1세기) 등 정치변동기에 한반도의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경주지역에 정착했다. 그 후 4세기 그들이 신라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내물왕 이후 신라 金氏 왕족이 바로 북방草原이 고향인 흉노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居西干, 3대 유리왕부터는 尼斯今, 내물왕 시대부터는 麻立干으로 적었다. 今(금), 干(간)이란 호칭은 흉노-알타이 계통의 부족장, 제사장, 또는 왕을 가리킨다. 尼斯今은 제사장적인 성격이 강한 부족연맹체 시대 신라의 맹주를 이르는 호칭이고, 麻立干은 왕권이 강화된 고대 신라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내물왕은 삼국유사에선 麻立干, 삼국사기에서는 尼斯今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金氏王族의 실질적인 中始祖라고 볼 수 있는 내물왕이 이사금 시대에서 마립간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왕이었다는 암시이다.
 
 
 
 신라는 왜 중국문화를 거부했나
 
  李관장은 신라김씨 계통의 이동경로를 알타이 산맥-내몽골(오르도스)-평양 부근-경주의 서북-동남방향으로 설정했다.
 
  『평양도 넓은 들이란 뜻이고 경주의 옛 이름도 서라벌인데 넓은 들이라는 뜻입니다. 서라벌이 나중에는 서울로 바뀌지요. 이는 흉노족이 평양에서 경주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李鍾宣 관장은 신라는 馬具와 금공예품은 발달했으나 갑옷 등 무기류는 가야가 더 발전했다고 말했다. 가야 지배층의 종족적 분류에 대해서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을 주장했던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부여族이라는 주장을 했고 국내학자들 가운데서도 동의하는 이들이 있다.
 
  李鍾宣 관장은 가야 유물로 볼 때 그 지배층은 신라 김씨와 비슷한 흉노-알타이 계통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조선-낙랑지역에 거주하던 흉노계가 신라지역보다 먼저 가야지역, 지금의 부산 부근에 들어온 흔적이 부산·김해 등지에서 발견되는 토광목곽분과 무기류, 그리고 銅(동복: 유목민이 쓰는 구리 항아리)이라고 한다.
 
  『무기로 보면 신라는 보병 의존, 가야는 기병 의존형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당시 기마전투는 거의 활로 했을 것입니다. 말을 타고 칼 싸움은 하지 않았다고 봐야지요』
 
  李鍾宣 관장은 『신라가 중국문화와 차별되는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힘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金氏 왕족들의 자존심이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다』고 말했다.
 
  흉노계의 金氏 왕족들은 신라의 지배층이 되자 백제, 고구려의 親중국 정책과는 반대로 갔다. 그들은 4~6세기 중국과는 교류를 하지 않는 대신에 북방 초원 루트를 통해서 중앙아시아, 로마지역과 교류했다. 그 증거물들이 적석목곽분에서 나오는 로만 글라스와 寶劍 등이다.
 
  『아마도 몽골고원의 서쪽인 알타이 출신들인 金氏 왕족들은 중국과는 문화와 습속이 맞지 않아 불편했을 것입니다. 중국인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거예요』
 
  신라 김씨의 이런 주체성과 오기는 흉노-알타이계라는 종족적인 특성에서 유래하는 부분이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기사의 주요 話頭이다.
 
 
 
 동서양의 대격변을 일으킨 흉노-훈족
 
   崔秉鉉·李鍾宣 두 학자들이 말하는 흉노계 기마집단의 신라 유입 경로는 차이가 있으나 신라 김씨 왕족들이 흉노계라고 보는 데서는 일치하고 있다. 崔교수는 흉노 기마군단의 급작스러운 경주 진출을, 李원장은 흉노계 민족의 단계적인 이동을 想定하고 있다.
 
  흉노족은 지금의 몽골고원에서 유목민 최초의 대제국(흉노)을 만들어 중국의 漢族과 대결하던 용맹무쌍한 유목민 기마군단이었다. 이들이 漢무제의 공격을 받자 일부는 서쪽으로 나아가 4세기 게르만족을 치면서 서양사에 등장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그에 따른 로마제국의 붕괴를 일으킨 훈족의 출현이다.
 
  3세기말 중국의 晉이 내부 권력투쟁으로 분열하자 몽골고원과 중국 북방에 남아 있던 흉노 등 다섯 유목민들은 南侵하여 중국을 150년간 대혼란에 빠뜨리고 다섯 胡族이 16개국을 만드는 5胡16國 시대를 연출한다. 이런 유목민족 대이동의 흐름을 타고 일단의 흉노계 부족이 경주에 나타나 토착정권을 장악한다.
 
  이 흉노계 신라 지배층이 삼국통일을 주도하여 오늘날 한민족으로 불리는 정치·문화·역사 공동체를 건설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신라가 唐과 결전하여 한반도를 민족의 보금자리로 확보할 수 있었던 정신적 힘-정체성, 자존심 같은 것도 출신성분이 漢族과 근본적으로 다른 데서 연유한 바가 클 것이다.
 
  흉노족이 가진 특성은 모든 유목민족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영민·용맹하며 자유분방하고 親자연적이고 정직하며 당당하다. 개인적이고 오기가 세기 때문에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무섭게 뭉쳤다가도 그런 지도자가 사라지면 집단도 사라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흉노계의 특성을 점검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우리 민족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민족에게 알맞은 경영방식은 무엇인가, 왜 신라 김씨가 삼국통일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등등의 話頭를 세워볼 만하다.
 
  훈·흉노·신라는 유라시아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을 이어주는 기마민족의 띠이자 말의 길이다. 말이 가진 기동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같은 시기(4~6세기)에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과 동쪽 끝에서 같은 흉노(훈)족에 의한 일대 격변으로 구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했는가를 알기 힘들다. 붙박이 농경민족의 눈으로는 눈부시게 기동하는 기마민족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흉노족에 대한 연구는 민족사를 세계사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시각의 일대전환이다. 이는 나와 우리를 보는 시각의 재정립이기도 할 것이다.
 
 
 
 유목민족의 종착지 辰韓
 
  중국의 晉나라 사람 陳壽가 3세기에 쓴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馬韓·辰韓·弁韓의 三韓 사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중국 사람이 이곳을 여행하여 남긴 기록으로서 한국인의 조상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史實이다. 이 기록과 삼국사기, 그리고 고고학적인 발굴을 종합하면 신라의 지배세력은 동북아시아를 서북쪽에서 동남 방향으로, 즉 대각선으로 이동해 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東夷傳에 따르면 辰韓의 왕이 항상 馬韓 사람을 써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한양대 인류학과 金秉模 교수는 『이는 신라의 前身인 辰韓 사람들이 토착민인 지석묘人들과는 경제방식이 다른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들 辰韓의 외래인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東夷傳의 기록을 본다.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이 나라 노인들에 따르면 옛날에 秦나라 사람들이 괴로운 勞役을 피해 韓으로 들어왔는데 마한은 그 동쪽 국경 지역의 땅을 떼어 이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城柵(성책)이 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 다르고 秦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秦은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의 그 秦이다. 秦은 중국의 서부 감숙·섬서성에서 일어난 나라인데 다수 주민들은 유목민들이었다. 戰國시대 7雄 중에서 秦만이 유목국이었고 나머지는 농경국이었다. 서기 전 221년에 秦이 통일한 데는 유목민 특유의 기마전술에 힘입은 바가 컸다.
 
  秦의 시황제는 蒙恬(몽염)의 지휘하에 만리장성을 쌓고, 함양에 궁궐을 짓는 등 백성들을 혹사했다. 이때 부역을 견디지 못하고 한반도로 들어온 秦人들이 지금의 경상북도 지방에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辰韓은 秦韓이라 쓰이기도 했다.
 
  東夷傳은 이어서 이렇게 썼다.
 
  <동방 사람들은 자신들을 阿라고 부르는데 樂浪郡의 사람을 阿殘이라 부른다. 낙랑군 사람들은 자신들의 殘余이므로 「阿殘」이라 부른다>
 
  문맥상 東夷傳의 著者인 陳壽는 「辰韓사람들이 도망쳐 온 중국의 秦나라 사람이면서 동시에 낙랑군 주민 출신이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앞에서 李鍾宣 관장이 단정했듯이 고조선과 낙랑군(평양 부근)의 住民들은 흉노족이었다. 이 흉노족 중에는 秦에서 이동해 온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이 다시 경주로 옮겨가서 살고 있는 상황을 陳壽는 다소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러 갈래의 흉노족 流入
 
   삼국사기에는 또 서라벌의 산과 계곡 속에는 기원 전 2세기 古朝鮮이 망한 뒤 그 유민들이 들어와 여섯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박혁거세 條에는 또 辰韓 토착민들과 섞여 살던 秦人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 적혀 있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땅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은 흉노권 공략의 일환으로서 흉노계인 고조선을 친 것이라고 한다. 위만조선이 망한 것은 서기 전 2세기. 서기 1세기에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이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망하자 낙랑 사람 5000명이 신라로 투항해 와서 6部에 나누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낙랑사람들도 漢族이 아니라 낙랑의 귀족인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晉나라 사람 陳壽가 쓴 三國志의 「魏志」 東夷傳과 삼국사기를 종합하면 2세기 신라땅에는 대강 네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 선사시대부터 농경을 하며 살고 있던 사람들. 이들은 지석묘(고인돌)에 묻혔다. 남방계가 많았을 것이다.
 
  2. 서기 전 3세기 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
 
  3. 서기 전 2세기 고조선이 한무제에 의하여 망하자 이동해 온 遺民들.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4. 서기 1세기 낙랑에서 투항해 온 5000명. 이들도 고조선이 망한 뒤 낙랑에 남아 漢族지배下에서 살던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東夷傳의 기사를 분석하면 중국 서북쪽(秦)에 살던 흉노족이 여러 차례의 흐름을 타고 고조선·낙랑지역인 평양 부근을 징검다리로 삼아 경주 지역으로 들어왔음을 짐작케 한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지만 文武王이 스스로 자신의 碑文에서 『나는 金日(김일제)의 후손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金日가 바로 秦나라 땅에 살던 흉노왕의 아들이었다. 文武王의 발언과 東夷傳의 기록, 그리고 고분 발굴 결과는 같은 맥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120년간의 흉노계 麻立干 시대
 
   한양大 金秉模 교수는 남방계통인 농경민족을 북방흉노계 민족이 올라타는 식으로 신라종족이 구성되기 시작했는데 북방계가 권력을 잡아 지배층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4~6세기 신라왕이 麻立干으로 불리던 시절의 金氏 왕족들은 중국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북방 초원문화, 즉 로마-스키타이-알타이로 연결되는 서방문화를 溫存해가면서 독특한 묘제(積石목곽분)와 금관·금팔찌·금귀고리·금허리띠들을 남겨 고고학자들을 놀라게도 하고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3세기에 쓰인 陳壽의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韓(백제, 신라, 가야의 전신인 마한, 진한, 변한의 통칭) 사람들은 구슬을 좋아하고 비단이나 금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금관을 쓰고 서방과 교류하면서 페르시아와 로마에서 만든 유리잔을 수입하고 騎馬부대를 지휘하였던 이 집단은 3세기 이후에 경주지역에 들어온 새로운 흉노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金秉模 교수 등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초원의 동쪽 끝으로서 초원세계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아왔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에서 일어난 유목기마민족들이 팽창할 때는 거의 반드시 한반도에 진입·침입·정복의 과정을 밟았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하기 이전의 고대에는 이런 북방민족의 진입이 여러 루트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여러 흐름의 민족이동을 보면 하나의 분명한 차별성이 눈에 띈다.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는 아주 명쾌하게 그 문제를 정리한다.
 
  『삼국이 다 북방계의 지배를 받는데, 그 계통은 고구려·백제가 夫餘系, 신라는 흉노계입니다. 부여계는 만주 동쪽에 살았고 인종적으로는 퉁구스계이며 순수 유목민이 아니고 수렵과 농업도 함께 했습니다. 흉노계는 알타이 산맥 부근이 본거지이고 순수 유목민이며 서방과 접촉이 많고 그쪽 문화를 많이 수입했지요』
 
 
 
 金閼智는 알타이 사람
 
   그가 1998년에 쓴 「금관의 비밀」(푸른역사)은 금관을 만든 주인공들을 추적한 책이다. 그는 왜 신라의 金氏 왕족들이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흉노계 출신의 기마민족인가를 논증하고 있다. 金교수는 수많은 발굴 경험, 알타이 지역 답사 경험, 언어학과 신화학을 동원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과감하게 『신라 金氏들은 흉노계이다』고 단정짓고 있다.
 
  1. 금관은 1921년 금관총에서 처음 발굴된 이래, 1973년 천마총, 이듬해 皇南大塚 등 신라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다. 이 적석목곽분은 내물마립간(356~402)에서 지증마립간(500~514)에 이르는 여섯 대의 마립간 시대 왕족 무덤에서만 나온다.
 
  2. 이 금관은 그 형식과 상징성이 모두 스키타이-흉노계의 금관·샤머니즘·토템에서 유래한 것이다. 최근 무역전시관에서 전시된, 내몽골의 흉노 單于(선우: 왕) 무덤에서 나온 금관 꼭대기엔 날개를 벌린 새가 앉아 있다. 스키타이 전사의 투구에도 새가 앉아 있다.
 
  경주 瑞鳳塚(서봉총) 금관의 나뭇가지 장식 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천마총에서는 금제 새날개 모양의 冠 장식물이 발굴되었다.
 
  3. 새는 북방 유목민족이 숭배하는 동물로서 신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신화는 물론이고 지증마립간의 어머니 이름은 鳥生부인이다.
 
  4. 이란계 스키타이 유목민, 몽골-투르크계 흉노 등이 활약하던 곳에서 많이 나오는 술잔인 角杯는 한반도에선 동해시, 포항, 경주, 부산, 창녕 등 신라·가야지방에서만 나온다. 角杯는 뿔로 만든 술잔인데 戰士들이 맹세를 할 때나 출전할 때 승리를 다짐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5. 가야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에는 角杯 모양이 붙어 있다. 기마민족과 각배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 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昔脫解 신화와 관련하여 각배가 등장한다. 金秉模 교수는 신라와 가야에서만 각배가 나오고 고구려·백제에선 나오지 않는 이유는 민족의 고향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6. 4~6세기 적석목곽분에서는 로마지역에서 만든 유리그릇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물론 신라가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이 지역에서 수입한 것이다. 이런 서방 유리 그릇은 백제·고구려·가야 고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도 신라의 金氏 왕족이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서방과 교류할 수 있었던 민족임을 보여 준다. 부여족 계통의 행동 범위는 그렇게 넓지 못했다. 몽골-중앙아시아 초원을 무대로 설쳤던 흉노 출신만이 그런 노하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7.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金氏의 조상 金閼智 탄생 신화 속에 열쇠가 숨어 있다.
 
  <脫解이사금 條(서기 65년): 봄 3월, 왕이 밤에 金城 서쪽 숲(始林)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그곳으로 瓠公(호공)을 보냈다. 숲 사이에는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궤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왕이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보낸 아들이니라』하고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점 자라며 더욱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始林을 鷄林(계림)으로 고쳐 국호로 정했다>
 
  8. 金秉模 교수는 이 신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신화는 전형적인 알타이-흉노 문화권의 신화이다. 북방민족의 토템인 나무와 새가 등장하고 알타이에서 유래한 「알지」란 말이 나온다. 알지는 「알타이」의 한자식 발음이다. 알타이를 알타이 지방에선 알트, 알튼, 아르치로 발음한다. 알타이란 말은 金이란 뜻이다. 金閼智의 뜻은 그래서 金金이 된다.
 
  9. 昔脫解의 이름은 몽골어로는 「탈한」 또는 「탈하이」(복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한양대 金秉模 교수는 탈하이가 「대장장이」라고 해석했다. 쇠를 다루는 석탈해는 각배도 쓴 것으로 보아 흉노계로 보이는데, 김알지를 양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결국은 박혁거세系인 婆娑이사금에게 양보했다. 늦게 경주에 들어온 흉노계 세력이 연합하여 先住 박씨 세력에게 대항하다가 좌절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10. 알타이 산맥, 즉 金山 부근에서 살던 金을 좋아하던 흉노계 金氏 집단이 金城(경주)에 들어와서 왕이 되더니 금관, 금팔찌, 금목걸이, 금허리띠 등 금공예품을 많이 만들고 무덤에까지 가져갔다는 이야기이다. 金이야말로 흉노의 브랜드이다. 10세기에 일어난 12세기 대제국을 건설하고 13세기에 칭기즈칸의 몽골에 망한 金은 여진족의 完顔部(완안부) 부족이 세웠다. 金史에 따르면 이 부족이 크게 된 것은 10세기에 金函普(金나라의 시조라고 한다)라는 신라인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金函普는 경순왕이 고려 王建에게 나라를 바칠 때 반발한 왕족의 한 사람이 만주로 들어온 경우라고 한다(金渭顯·「遼金史 연구」).
 
  고려는 몽골·거란 등 북방 유목제국의 침략을 받았지만 金은 고려를 치지 않았다. 金의 皇室이 고려를 형제국처럼 생각한 때문이다.
 
  17세기 이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세운 淸제국의 皇族들은 性을 愛新覺羅(애신각라)라고 했다. 「新羅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는 의미이기도 한데, 만주어로는 그 뜻이 「金」이다. 이들은 淸이 망한 뒤 金으로 性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처럼 東아시아에서 金氏는 흉노계통 유목기마민족의 족보를 이어가는 상징이다.
 
 
  2장 : 문무왕 碑文의 미스터리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30대왕 金法敏, 즉 文武王의 陵碑 파편 하나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가에서 발견되었다. 그 전 조선 正祖 때인 1796년에도 陵碑 파편 두 개가 발견되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고 비문의 拓本(탁본)은 淸의 금석학자 劉喜海에게 들어가 「海東金石苑」에 실렸다. 이 碑文(비문)은 漢唐流의 명문장을 모방하였고, 중국의 경전이나 古事成語(고사성어)에서 따온 미사여구가 많이 들어 있다.
 
  이 碑의 건립연대에 대하여는 문무왕이 죽은 서기 681년이거나 그 이듬해로 추정한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일부의 파편만 발견된 상태에서 파악이 어려우나,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新羅金氏의 내력, 太宗武烈王과 文武王의 治績, 백제 평정 사실 등이고 문무왕의 유언, 장례, 碑銘 등이 적혀 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문무왕의 屍身(시신)은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한 뒤 동해에 散骨(산골)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四天王寺(사천왕사) 근방에 擬陵(의릉·가짜 무덤)을 만든 것이거나, 문무왕이 창건한 이 절에 陵碑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문 중에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판독불능)枝가 英異함을 담아 낼 수 있었다. 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륜)이 7대를 전하여… 하였다. 15대조 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靈이 仙岳에서 나와(下略)>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목은 「侯 祭天之胤傳七葉」이다. 侯는 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去病(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休屠(휴도)의 아들 金日(김일제)를 가리킨다.
 
  문제는 이 金日가 중국 史書에 등장하는 유명한 흉노人이라는 데 있다. 이 碑文의 문맥상 문무왕 스스로가 우리 조상은 匈奴人 金日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金日와 그 후손들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漢書와 列傳에 실감 나게 쓰여 있고 中國 西安에는 金日의 무덤도 있다. 애매모호한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체가 분명한 金日를 문무왕이 『우리 조상이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흉노 제국의 황제인 單于(선우) 아래는 여러 왕들이 있었다. 혼야왕과 休屠王(휴도왕)이 다스리던 곳은 옛 秦나라 땅 지금의 甘肅省 草原이었다. 河西走廊이라고 불리는 이곳을 거쳐야 西域(중앙아시아)으로 갈 수 있었다. 漢武帝는 흉노가 장악하고 있던 이곳을 차지함으로써 실크로드를 열고 서방과 무역을 할 이유가 있었다.
 
  漢書에 따르면 기원 전 121년 漢武帝의 명을 받은 청년장교 곽거병이 초원으로 쳐들어온다. 흉노 군대는 패배를 거듭한다. 곤야왕은 흉노제국의 황제인 單于로부터 문책을 당할까봐 두려워 休屠王을 꾀어 항복하자고 한다. 휴도왕이 거부하자 그를 죽인 혼야왕은 곽거병에게 항복하는데 휴도왕의 부인 閼氏(注-알타이=금을 뜻하는 閼智와 같다)와 아들 金日, 그의 동생 侖은 끌려와서 곽거병의 포로가 되어 漢武帝에게 인계된다.
 
  漢武帝는 그때까지 姓이 없던 金日에게 姓을 내리는데 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한(祭天) 집안 출신이라고 하여 金氏라고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하여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는 좀 다른 견해이다. 그는 金人이란 「알타이 사람」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알타이가 고향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책임진 일종의 샤먼王 집안 출신이므로 알타이의 의미를 따서 金氏 성을 주었다는 것이다.
 
 
 
 漢武帝의 경호실장이 된 金日石單
 
  1998년 중국의 언론은 甘肅省과 山西省에 살고 있는 金氏들이 흉노족의 후손들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문무왕이 金日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스스로 碑文에서 밝혔다면, 경주지방까지 金日의 후손들이 들어왔던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漢武帝는 소년 金日에게 말을 먹이는 일을 맡겼다. 당시 흉노와 싸우던 漢제국의 고민은 흉노와 대항할 수 있는 기병용 말을 기르는 일이었다. 잔칫날 漢武帝는 황실에서 사육하던 말들을 검열했는데 소년 金日의 말이 훌륭하고 소년의 얼굴 또한 준수했으므로 그를 중하게 쓰기 시작했다.
 
  金日는 한무제의 수행 경호원이 되었다. 로마, 오스만 터키, 바티칸의 예를 보면 권력자의 경호부대를 외국인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은 반역을 함께 도모할 패거리가 없으므로 권력자에게만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金日는 한무제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암살기도를 현장에서 좌절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한무제는 자신의 딸을 金日에게 주어 아내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했다.
 
  궁중에선 『황제께서 망령이 들어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漢書를 읽어 보면 金日는 남자답고 아주 청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草原의 흉노를 무력으로 누른 漢族 황제인 한무제는 나들이를 나갔다가 병이 들어 죽을 때 金日를 포로로 데리고 왔던 곽거병(당시는 사망)의 동생 곽光(곽광)과 金日를 불렀다. 漢書 列傳에 적힌 대화이다.
 
  곽광이 눈물을 흘리면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만약에 세상을 버리시게 된다면 후사가 되실 분은 누구십니까』
 
  『그대는 앞서 받은 그림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周公의 일을 하라』
 
  이에 곽광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金日보다 못합니다』
 
  金日도 또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외국인이요 곽광보다 못합니다』
 
  황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 金日를 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遺詔를 내렸다. 그 전에 병이 들자 한무제는 詔書(조서)를 봉하고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죽거든 글을 열어 보고 그대로 따라 시행하라』
 
  봉을 뜯고 열어 보니 한무제는 金日를 侯(투후), 상관걸을 安陽侯, 곽광을 博陸侯에 봉하라고 써두었다. 이는 그 몇년 전 한무제에 대한 반역음모를 분쇄한 공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의 비문에 나오는 侯(는 金日에게 주어진 영지의 지명이고, 侯는 王, 公 다음 가는 귀족 등급이다)라는 작위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金日는 새로 즉위한 임금 昭帝(소제)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侯의 직위를 사양했다. 昭帝의 즉위 1년 뒤 金日는 앓아누웠다. 곽광은 임금께 건의하여 金日는 죽기 전에 드러누워서 侯의 印綬(인수)를 받았다. 황실의 실력자인 곽광과 金日는 사이가 매우 좋았던 것 같다. 金日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들이 7대에 걸쳐 漢의 황실에서 중용되었다.
 
 
 
 金日石單의 후손이 金閼智?
 
   한편 곽광은 한무제를 이은 昭帝 시절엔 황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곽광은 昭帝가 죽자 다음 황제로 昌邑王을 맞아들였으나 음란한 일만 하자 폐위시키기도 했다. 그가 새로 맞아들인 宣帝는 곽광이 황궁에 나타나면 용모를 가다듬는 등 조심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곽광은 專權을 휘두른 지 20년이 되는 宣帝 6년에 죽었다.
 
  당시 宣帝의 황후는 곽광의 딸이었다. 곽광이 죽자 이제 그의 非行이 터져나왔다. 곽광의 아내가 宣帝의 첫 번째 황후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앉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흉노人 金日의 동생 아들 金安上은 여전히 宣帝의 신임을 받으면서 황실의 요직에 앉아 있었다. 金安上은 큰아버지의 친구였던 곽광의 딸을 아내로 데리고 있었다. 상황이 곽광 일족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이혼해 버렸다.
 
  宣帝는 마침내 곽광의 아내·아들 등 일족을 도륙해 버린다. 처형한 시체를 거리에 버렸는데 수천 명이 피살되었다고 한다. 황제를 농단한 權臣이 죽거나 실각하면 그 일족이 권력남용의 代價를 치르는 것은 동양정치사의 한 공식이기도 하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金日의 후손들은 황제의 신임을 받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번성했다.
 
  그들이 匈奴人이므로 漢族 사이에 권력기반이 없어 오로지 황제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바친 때문이었을 것이다. 포로로 붙들려온 흉노人 출신의 이런 성공은 순전히 그 개인이 가진 인간성 덕분일 것이다.
 
  金日 후손의 운명은 王莽(왕망)과의 인연으로 急轉(급전)한다. 王莽은 元帝의 황후 王氏 가문 출신이었다. 왕망은 또 金日의 증손자 當의 이모부였다. 王莽은 어린 황제를 독살하는 등 專橫(전횡)을 하다가 서기 8년에 漢을 멸망시키고 新을 세우면서 황제가 되었다. 王莽이 황제가 되자 외가인 金日 家門은 득세한다.
 
  王莽의 新은 그러나 15년 만에 망하고 後漢이 다시 선다. 王莽 일가는 물론 金日 가문도 滅門之禍(멸문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金日의 후손들이 요서, 요동, 한반도, 일본 규슈, 오키나와로까지 도망갔고 그 일파가 경주로 들어온 金閼智라는 과감한 추정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지방에서 발견되는 王莽 시대의 五銖錢(오수전)을 들어서 王莽 세력이 국외로 도피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三國志 東夷傳에 실린 「辰韓의 秦人」은 바로 秦나라 출신 金日 후손들이 경주지역으로 도망쳐 온 사건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문무왕 비문에 등장하는 「나는 侯 金日의 후손이다」는 의미의 문장은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와 배경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이 글귀를 액면대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이다. 많은 학자들은 慕華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 갖다 댄 것뿐이라고 무시해왔다. 하지만 문무왕은 慕華사상에 젖은 사람이 아니라 對唐 결전을 통해서 전성기의 세계제국 唐을 한반도에서 물리친 自主의 화신이다.
 
  그가 정말 慕華사상에 젖어 조상의 계보를 조작하려면 왜 하필 漢族이 싫어하는, 더구나 漢에 반역했다가 도륙당한 흉노족 金日의 후손이라고 자칭했을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무왕의 당당하고 깔끔한 성격에 비쳐볼 때 『나는 흉노人 金日의 후손이다』고 정직하게 밝힌 것이라고 봄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즉, 문무왕이 新羅金氏는 흉노족 金日의 후손이라는 뿌리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新羅金氏의 出自를 둘러싼 의문은 깨끗이 풀린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요사이 들어 많은 정통 학자들이, 역사학·고고학·민속학·언어학·고미술학의 성과를 근거로 하여 문무왕의 新羅金氏 왕족이 흉노계통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여러 분야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어 在野학자들의 상상력이 앞선 주장과는 달리 무시할 수 없는 학계의 뚜렷한 흐름이 되고 있다.
 
 
  3장 : 日本人의 주장-로마문화왕국 신라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라는 일본 제1의 유리 공예가가 쓴 「로마문화왕국 - 新羅」(新潮社)란 책은 317쪽 분량의 원색 사진이 많은데 책 표지 띠에 써놓은 선전문이 이러하다.
 
  「古代史가 바뀐다! 東아시아에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로마 문화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新羅다! 출토유물과 新발견의 고대 기록사료 등, 實在자료에 의하여 신라의 수수께끼를 해명한다」
 
   이 책에서 주로 인용하고 있는 자료는 1973년과 이듬해 경주에서 발굴한 天馬塚(천마총·발굴 당시는 155호 고분)과 皇南大塚(황남대총·발굴 당시는 98호 雙墳) 출토 유물이었다. 著者 요시미즈氏는, 신라가 중국으로부터 한자·불교 등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6세기 전까지는 북방 草原의 길을 통하여 중앙아시아 및 중동, 그리고 흑해·지중해 연안의 로마 식민지와 물적·인적 교류가 왕성했고, 이런 흐름을 타고 로마의 문화(유리 공예품, 황금칼, 장신구 등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람과 정신적인 것들까지)가 신라에 들어왔다는 대담한 주장을 했다.
 
  고구려·백제는 중국 문물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유독 신라만은 6세기 중반까지 중국의 선진문물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신라는 草原의 길을 통하여 서쪽 세계와 교류하고 있었고 이 길을 통하여 중국에 못지 않은 先進 문물을 수입하였으므로 굳이 중국에 기댈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로마 문화를 수입하고 있던 新羅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문물이 先進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백제·고구려가 거의 매년 北魏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나라와 사신을 보내어 교류한 것과는 선명한 대조이다.
 
  「로마문화왕국-신라」의 저자 요시미즈氏는 이 점을 집중적으로 캐고 들어간다. 한반도의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가 무슨 배짱으로 아시아 문명의 거대한 光源인 중국을 무시하고 수백년을 버티었는가.
 
  요시미즈氏는 한국과 중국 측의 史料를 검토하여 辰韓(신라의 모태. 지금의 경상도 지방 부족국가)이 중국의 西晉에 조공한 서기 286년 이후 91년간 공백, 신라가 前秦에 조공한 382년 후 126년간 공백, 北魏에 사신을 파견한 521년 이후 43년간 국교 공백의 상태였음을 적시하면서 이것은 미스터리라고 규정했다.
 
  <신라는 이웃 백제·고구려가 중국의 정치·경제제도를 도입하고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여도 이에 동조할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自國의 정치제도나 경제시스템, 또는 문화 전반에 걸쳐서 자신을 갖고 수행할 수 있을 만큼 고도의 내용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분의 출토 유물을 분석하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저력은 로마문화에서 나온 것』
 
  그는 우리 고고학자들이 스키타이-흉노 草原 문화의 결정체라고 보는 신라금관이 기본적으로는 그리스-로마계통의 왕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나오는 수많은 금팔찌, 금귀고리, 寶劍, 유리 공예품 등을 분석하여 로마에서 온 것이든지, 로마적인 것이 중앙아시아-초원 루트를 통해서 신라에 들어온, 로마문화 源流의 유물이란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황남대총에서 나온 유리 그릇 가운데는 로마에서 수입한 것도 있지만 로마의 유리 기술자가 신라에 들어와서 신라의 시설을 가지고 만든 것도 있다고 썼다.
 
  그는 4~6세기 신라는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서방 로마세계와 교류했고 이는 신라 지도부가 이 문화 루트를 잘 아는 흉노족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서방으로 통하는 창을 열어놓고 있었던 신라는 6세기 중반부터 중국으로 방향을 튼다.
 
  신라의 이런 입장변화는, 5세기에 게르만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西로마 제국이 멸망하고(476년), 유럽·아시아에 걸쳐 있었던 로마 식민지가 황폐됨으로써 문화 교류의 상대방이 사라진 때라고 이 책은 주장했다. 北중국을 통일했던 鮮卑族(유목기마민족)의 나라 北魏도 신라처럼 로마와 교류했으나 西로마가 망한 18년 뒤 수도를 大同에서 中原의 낙양으로 옮김으로써 로마와 단절한다.
 
  신라는 법흥왕의 개혁 이후 중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불교, 한자, 제도를 정력적으로 수입한다. 법흥왕은 왕족의 장례식도 간소화시켜 호화찬란한 積石목곽분이 일거에 사라지고 중국식 석실묘로 바뀐다. 著者는 이 책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짓고 있다.
 
  <그 후 신라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唐과의 교류를 밀접히 함으로써 약소국이면서도 곧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도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통일하였다. 소국 신라가 지녔던 이러한 반도통일의 에너지는 과거 로마문화의 수용 시대에 쌓아 올렸던, 중국문화와는 다른 에너지의 잠재적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반도 통일의 큰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著者가 신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4년 미추왕릉 지구 발굴 때 출토된 코발트 블루의 작은 玉구슬 속에 남녀의 얼굴이 상감되어 있고, 그 주변을 새들이 날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영남대학교 李殷昌씨로부터 전해 들은 이후였다고 한다.
 
  흥분한 요시미즈氏는 경주박물관으로 달려가 그 玉구슬과 對面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 하나밖에 없는 肖像玉이다』고 단정했다고 한다. 네 인물이 새겨져 있었는데 두 사람은 寶冠을 쓴 왕과 왕비. 눈썹이 옆으로 붙어 있고(連眉) 콧날이 날카롭고 오뚝했으며 피부는 흰 서양 사람이었다. 요시미즈氏는 『옥구슬의 디자인, 제작방법, 상감된 인물 등으로 추정할 때 틀림없이 로마 세계에서 만들어진 구슬이다』고 단정했다. 그렇다면 왜 이 구슬이 아시아 대륙의 끝머리에 붙은 신라에 와 있단 말인가.
 
 
 
 『로마에서 寶劍을 신라로 보냈다』
 
   이렇게 되어 著者 요시미즈氏는 『과거 내가 품고 있었던, 삼국시대의 신라 문화가 종래의 통설과는 달리 백제나 고구려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는 인식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 사실을 확실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요시미즈氏는 신라의 독특한 문화 수용 실상을 밝혀내면 동양사, 고대 한국사, 고대 일본사, 고대 유라시아史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고대 신라로 안내한 문제의 玉구슬이 만들어진 곳을 세 군데로 좁혔다. 지금 루마니아인 다키아, 지금 불가리아인 트라키아 및 모헤시아國 . 이곳은 당시(서기 4~5세기)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 이 3國 중 어느 나라에서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玉구슬은 무역품이 아니라 그곳의 王家에서 신라 王家로 선물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라와 로마 세계는 일종의 國交까지 맺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요시미즈氏는 신라 고분에서 로마문화 계통의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은 물건만 교류한 것이 아니라 물건을 따라서 사람이 오고갔으며 로마의 정신문화도 묻어왔을 것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하고 있다. 그 예로 든 것이 1973년에 경주 鷄林路 공사장에서 발굴된 황금 寶劍이다. 길이 약 30cm의 이 보검은 황금판에다가 여러 개의 보석을 박은 호화찬란한 것이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名品이다. 요시미즈氏는 이 보검의 계보를 추적하여 지금의 불가리아에 있었던 트라키아의 켈트族 왕이 주문 생산하여 신라 王家에 선물한 칼이라고 단정했다.
 
  트라키아 왕이 이런 귀중품을 무역상에 맡겨 북방 초원을 통과시켜 신라에 전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라키아 왕의 사절이 직접 신라에 왔든지 신라 사신이 트라키아까지 가서 받아 왔든지 둘 중 하나란 것이다. 요시미즈氏는 트라키아 왕이 금세공 기술자를 신라로 보내면서 호위병으로서 흉노족을 썼을지도 모른다고 추리했다.
 
 
 
 신라의 六村 회의는 유목민족의 전통
 
  한 일본인을 흥분하게 만든 4~6세기 신라문화의 서방적 요소, 여기에 한민족의 源流가 갖는 국제성과 주체성의 뿌리가 있을지 모른다. 요시미즈氏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의 부족합의제 통치행태는 흉노의 전통과 같다고 썼다. 朴赫居世 등 왕들을 부족장들이 추대하는 방식도 흉노의 君主 추대승인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신라騎兵이 칼·창뿐 아니라 도끼와 곤봉 등 다양한 무기를 가졌던 것도 로마의 기병으로부터 북방기마민족이 채용한 무기 시스템을 신라가 수용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요시미즈氏는 삼국사기를 분석하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중국曆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신라는 로마曆을 사용한 것 같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또 皇南大塚 北墳에서 나온 銀製龜甲東物文盃에 새겨진 바지를 입은 노예를 추적하여 이는 南러시아에 있던 흉노인이 만든 것이라고 추정했다. 요시미즈氏의 관점이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 한국 학계의 정설이 된, 古신라 문화에 스키타이-흉노 문화의 영향이 크다는 주장을 서쪽으로 더욱 연장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스키타이-흉노계통의 북방기마민족 문화에 영향을 준 것은 로마문화이며 흉노 등을 매개로 하여 신라에 들어온 문화의 源流는 로마라고 보았다. 이 로마문화의 전달자라고 그가 지목한 것은 북방초원에 있을 때 이미 로마문화를 수용했던 흉노족이다.
 
  흉노는 원래 놀던 무대가 북방초원 지역이기 때문에 그들이 신라에 들어와 있어도 이 지역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요시미즈氏는 신라통일의 잠재력은, 당시 세계의 2대 문명인 로마와 중국의 문화를 다 같이 받아들여 종합함으로써 생겼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문무왕 비문대로 신라 김씨가 흉노족이라면, 또 신라김씨의 선조 김알지가 후한에서 쫓겨난 흉노인 金日의 후손이라면, 그들은 신라지역에 들어오자마자 反중국, 親서방(로마) 정책을 펴 한 300년간 로마문화를 중점적으로 수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중국인의 作名術에 넘어간 한국인
 
  한국인들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우리의 조상은 몽골인이다. 칭기즈칸도 우리와 같은 몽골인이야』
 
  이 蒙古란 말은 唐 시대에 작명되었으나 칭기즈칸이 등장한 뒤에 널리 쓰였다. 중국의 秦漢 시대, 우리의 古朝鮮, 三國時代에 몽골지역 및 중앙아시아 지역 등 북방초원 지대를 휩쓸던 유목기마민족은 匈奴族이 主流였다. 이때는 몽골이란 말이 없었다. 이 흉노족은, 한참 뒤에 몽골족과 투르크족으로 분류된 북방 종족의 혼성 유목민으로 보인다.
 
  몽골족은 몽골초원의 동부에, 투르크족은 서부인 알타이 산맥 부근이 본거지였다는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투르크족에는 서양 사람들의 피가 많이 섞여 있다. 흉노족은 그 활동 무대가 서쪽 알타이 쪽이었으므로 그 문화 속에는 서양적인 요소가 많고, 흉노계통이 정권을 잡은 新羅의 문화 속에는 백제·고구려에는 없는 서양의 영향이 들어 있다.
 
  칭기즈칸 이후의 몽골 시대에 초원으로부터 한반도로 많은 移民이 있었던 적은 없다. 고대사 시절에 유목기마민족이 한반도로 들어왔다면 당시 몽골초원의 주인공이던 흉노계통과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는 기마민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누가 『우리 조상은 흉노족이었어』라고 말하면 당장 비판이 쏟아진다.
 
  우리가 그 흉악한 흉노족의 후손이라고? 뭐 단군의 아들이 마적단 같은 흉노라고?
 
  이는 漢族의 심리전에 넘어간 탓이다.
 
  漢族은 자신들을 괴롭힌 유목민들의 이름을 지을 때 흉악한 漢字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匈奴란 글자를 보면 화가 날 만도 하다. 조선조 양반들이 한민족의 뿌리를 몽골이나 흉노족과 연결시켜 생각했는지, 아니면 漢族의 일파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後者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조선조 양반들은 漢族의 明을 부모의 나라라고 생각했고 그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인종적으로는 漢族보다 더 우리와 비슷한 오랑캐 여진족의 나라와 싸워서 졌던 것이다.
 
 
  4장 : 司馬遷과 匈奴
 
 
  서기 전 2세기 몽골고원을 통일한 최초의 유목제국은 흉노였다. 묵특單于(선우)라고 불린 영웅이 나타나 약 30만 명의 상시 동원 기마전사 집단을 조직했다. 당시 劉邦(유방)이 세운 漢의 인구는 약 5000만 명이었다. 30만 명의 잘 조직된 흉노 기마전사들은 劉邦의 군대를 백등산에서 포위하였다. 묵특單于는, 劉邦이 묵특單于의 아내에게 로비를 한 뒤에야 포위망을 뚫어 주어 유방(漢高祖)이 달아나도록 했다. 그 뒤 漢은 흉노의 속국처럼 되어 매년 왕족 여인들과 금품을 바쳤다.
 
  그 70년 뒤 漢무제가 흉노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주도권이 바뀐다. 漢무제는 在位 54년을 흉노와 싸운 사람이다. 당시의 史官 사마천이 쓴 史記에는 흉노와 싸운 장군들의 전기가 등장하고 흉노에 대한 관찰기록이 실려 있다. 흉노에 대한 그 뒤의 기록은 司馬遷의 것을 베낀 것이 많다. 사마천 또한 흉노 때문에 화를 입은 인물이다.
 
  대대로 황실의 太史公(史官)으로 봉직했던 집안 출신인 사마천은 흉노를 치러 가서 항복해 버린 李陵을 변호했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 생식기가 잘리는 宮刑을 받았다. 사마천은 史記의 後記인 「太史公自序」에서 이렇게 썼다.
 
  <그(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는 옥에 갇히어 말했다.
 
  『이것은 내 죄일까, 이것은 내 죄일까. 이제 내 몸은 병신이 되었으니 세상에 쓰이진 못하리라』
 
  刑을 받고 물러난 뒤 그는 깊이 생각한 끝에 말했다.
 
  『…공자는 陳·蔡 나라에서 고생함으로써 「春秋」를 지었고, 楚나라 屈原은 쫓겨나 귀양살이를 함으로써 「離騷(이소)」를 지었고, 左丘明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國語」가 있고, 孫子가 다리의 무릎뼈를 잘림으로써 「兵法」을 논했고, 呂不韋가 蜀으로 쫓겨감으로써 세상에 「呂覽(여씨춘추)」이 전해졌고, 韓非는 秦나라에 갇힌 몸이 되어 「說離」, 「孤墳」을 남겼으며, 또 詩 300편은 대개 賢聖이 분발하여 지은 것이다. 결국 사람은 모두 마음이 답답하고 맺힌 바가 있어 그 道를 통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말하며 장차 올 일을 생각한다』>
 
  현실의 벽에 막혔을 때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거기서 힘을 얻어 그 벽을 돌파하고 미래를 열기 위해 쓴 史記의 기록정신. 그가 작심하고 쓴 동양 최초의 역사서인 史記의 匈奴列傳을 읽어보면 지금도 살아 있는 기록임을 실감한다.
 
  야성적인 유목문화와 지성적인 漢문화가 충돌하는 현장감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史記에는 장건, 곽거병, 李廣 등 흉노와 漢의 충돌 전선에서 명멸해 간 영웅들의 이야기가 특히 많다. 그 이야기의 무대는 몽골 초원에서 지금의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형이며, 야만과 문명, 충성과 배신, 야망과 좌절이 오가는 인간 드라마이다. 영화 장면처럼 시각적 상상이 가능하고 영웅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장대한 서사시이다.
 
 
 
 유럽의 현재 지도를 만든 훈족의 침입
 
  漢武帝와 흉노의 대결은 그 뒤에 오는 대초원의 대폭발과 동서양의 대격변을 준비해 간 시기였다. 漢무제의 공격을 받은 흉노는 약화되었다가 東西 흉노로 분열한다. 그 뒤 다시 남북으로 갈린다. 서기 1세기 漢과 손잡은 南흉노와 동쪽의 유목민족 鮮卑에게 협공당한 北흉노는 알타이 산맥을 넘어 지금의 중앙아시아로 물러갔다. 그 뒤 중국의 기록에서는 北흉노에 대한 언급이 사라진다.
 
  서기 2세기 지금의 카자흐스탄 북쪽에 머물던 北흉노는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흑해 北岸을 거쳐 4세기 말 러시아 초원 남쪽의 볼가江을 건너 게르만족인 東고트족을 쳤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민족이동의 뇌관을, 서양에서 훈족으로 불린 北흉노가 터뜨린 셈이다. 독일과 그 주변에 살던 게르만의 여러 부족은 훈족에게 쫓겨 로마 영내로 밀려 들어간다.
 
  야만인으로 불리던 고트족, 반달족, 롬바르드족, 색슨족, 부르고뉴족, 프랑크족, 앵글로족 등이 지금의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스페인, 아프리카 北岸 等地, 당시의 로마문명권으로 쳐들어가 기존정권을 정복한 뒤 게르만족이 지배하는 정권을 세운다. 이 정권이 모태가 되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오늘날의 유럽 국가들이 탄생한다. 로마 제국은 곧 붕괴되고 게르만족이 세운 국가들이 중세를 연다. 東아시아에서 북방기마민족들이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정복자가 되어 고대국가를 만들고 있던 바로 그 시기였다.
 
  4~6세기 기마민족이 漢族을 밀어내고 東아시아의 覇者가 된 것처럼, 게르만족이 유럽에서 로마인들을 교체하고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 이후 1600년이 지났지만 지금의 유럽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그려놓은 국가지도 위에 있고 東아시아도 이 시기에 유목민족 출신들이 만들어놓은 고대국가의 틀 속에 있다.
 
  흉노족의 후신인 훈족의 황제 아틸라가 이끄는 大軍은 451년 지금의 프랑스(당시에는 로마領) 중심부로 쳐들어가 파리 남쪽 살롱에서 로마軍과 결전을 벌였으나 패퇴했다. 이것은 13세기 몽골 기마군단 보다도 더 서쪽으로 간 경우이다. 이 5세기에 흉노족의 일부는 한반도에 들어왔으니 이 기마민족의 활동공간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에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이다.
 
  고미술사를 전공하는 權寧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한 논문에서 훈족이 된 北흉노가 西遷하기 시작한 서기 91년부터 200년간 역사 기록에서 사라지는데, 이 기간에 그 일파가 東進하여 경주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재미있는 추론을 했다.
 
 
 
 세계 4대 제국 중 3國이 기마민족系
 
  유럽의 게르만족과 東아시아의 몽골계 기마민족은 동서양에서 새로운 민족국가의 질서를 만들어낸 뒤 1500년간 2대 군사 세력으로 세계사를 주도했다. 이 두 민족이야말로 세계사의 주먹이었다. 보병전술을 중심으로 한 로마군단의 군사기술은 게르만족의 세상으로 이어져 영국과 독일의 군사문화로 발전했다.
 
  기마전술의 몽골군단은 활을 主무기로 삼고서 수많은 제국을 부수고 세우고 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을 흔들어놓더니 소총이 일반화되는 17세기 무렵부터 군사적 우위를 상실해 간다.
 
  그럼에도 19세기 초 현재, 세계 4대 제국 중 3대 제국의 지배세력이 몽골-투르크 기마민족 계열이었다. 몽골계의 방계로 볼 수 있는 여진족의 淸, 오스만 터키 제국,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몽골계 기마군단이 인도를 정복하여 세운 무갈(이란어로 몽골이란 뜻)제국, 나머지 하나는 大英해양제국이었다.
 
  한국의 군사문화 전통은 몽골 기마군단에 닿아 있다. 다만, 조선조가 漢族 사대주의에 빠져 군대를 멸시하는 바람에 500여 년간 문약한 국가로 전락함으로써 몽골군단의 전통이 끊어졌다가 대한민국 건국 후 국군이 탄생함으로써 화랑대로 상징되는 장교단을 중심으로 하여 과거의 상무정신을 재건하고 있는 중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이 되었던 화랑도는 북방기마 문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보존해 간 東아시아 최초의 장교 양성 기관이었다. 화랑도는 흉노적인, 북방적인, 민족주체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종교의식을 이어간 조직이기도 했다.
 
 
  史記의 匈奴列傳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고 그 뒤 이들이 삼국통일을 주도하여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를 만들었으므로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가진 문화, 전통, 민족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흉노에 대한 가장 생생한 기록은 司馬遷이 서기 전 1세기에 쓴 史記의 匈奴 列傳에 실려 있다. 후세 학자들은 이 글을 인용하여 흉노를 설명해야 했다. 당시의 거의 유일한 匈奴 관찰기이다.
 
  아래 글은 일신서적출판사에서 나온 「史記列傳 2권」(權五賢 譯解)의 匈奴열전 중 일부이다.
 
 
 
 흉노인들의 습속
 
  匈奴의 여러 종족이 북쪽의 미개척지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다. 그들의 가축은 주로 말·소·양이었는데, 특이한 것으로 낙타·나귀·노새·버새(注-수말과 암나귀 사이에 난 잡종으로 노새보다 약함)·야생마 등이 있었다.
 
  물과 들을 따라 옮겨 살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농사마저 짓지 않았으나 각자의 세력 범위만은 경계가 분명했다. 글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말로써 약속을 했다. 어린애들도 양을 타고 돌아다니며, 활을 당겨 새나 쥐 같은 것을 쏘고, 조금 자라나면 여우나 토끼 사냥을 해서 양식을 충당했다.
 
  장정이 되면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全員이 무장 기병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평상시에 목축에 종사하는 한편 새나 짐승을 사냥해서 생계를 유지했으나 싸울 때에는 全員이 군사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이것은 거의 타고난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싸움이 유리할 경우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는 물러나는데 도주하는 것을 수치로 알지 않았다. 무엇이든 이익이 될 만하면 그것을 얻으려 하며 예의 같은 것은 돌보지 않았다.
 
  임금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이나 털로는 옷을 해 입거나 침구로 썼다. 건장한 사람을 소중히 위하고, 老弱者는 천대했으므로 고기를 나눠줄 때만 해도 좋은 살코기는 우선적으로 장정들에게 돌아갔고 그 나머지가 노약자의 차지였다. 아비가 죽으면 그 후처를 아들이 아내로 맞고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남은 형이나 아우가 차지했다.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字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秦의 始皇帝는 蒙恬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북쪽으로 匈奴를 치게 했다. 蒙恬은 河水(黃河) 남쪽 땅을 모두 손아귀에 넣고 河水를 이용하여 요새를 만드는 한편, 河水를 따라 44개소에 縣城을 쌓고 流刑兵을 옮겨 이를 지키게 하였으며, 九原에서 雲陽(陜西省)에 이르는 도로를 개통시켰다.
 
 
 
 묵특單于의 출현
 
  당시는 東胡가 강하고, 月氏(월지)도 세력이 왕성했다. 흉노의 單于(선우: 흉노의 君主 칭호)는 頭曼(두만)이라 불렸다. 頭曼은 秦나라를 당해 내지 못해 북쪽으로 옮겨갔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蒙恬이 죽고 제후들은 秦나라를 배반하여 중국은 온통 혼란 상태가 되고 秦나라가 변경을 지키기 위해 보냈던 수비병들은 모두 이탈하고 말았다. 흉노는 마음 놓고 다시 차츰차츰 河水를 건너 남으로 내려와 마침내 옛날 요새선에서 중국과 경계를 맞대었다.
 
  頭曼單于(두만선우)에게는 태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冒頓(묵특)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뒤에 총애하는 閼氏(皇后의 뜻)에게서 다시 작은아들을 얻어서 묵특을 폐하고 작은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래서 單于는 묵특을 月氏에게 볼모로 보낸 다음 갑자기 月氏를 공격했다. 月氏는 單于의 예상대로 묵특을 죽이려고 했으나 묵특은 준마를 훔쳐 타고 본국으로 도망쳐 왔다.
 
  頭曼은 일이 어긋나기는 했으나 그의 용기를 장하게 여겨 묵특을 1만旗의 장군으로 맞았다. 그러나 묵특은 鳴鏑(명적: 소리나는 화살)을 만들어서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그것으로 騎射 연습을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가 명적을 쏘거든 다같이 그곳에 대고 쏘아라. 쏘지 않는 자는 죽인다』
 
  그런 다음 수렵에 나섰을 때 묵특은 자신이 명적을 쏘아 댄 곳에 쏘지 않은 자는 가차 없이 잡아 죽였다. 그 뒤 묵특이 또한 명적을 자기의 愛馬에게 날렸다. 그러자 좌우에서 차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묵특은 역시 당장에 그들을 잡아 죽였다. 얼마 후에 그는 또 명적을 자기의 愛妻에게 날렸다. 좌우에서 겁이 난 나머지 감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자 묵특은 그들 역시 사정없이 죽여 버렸다.
 
  또 얼마 뒤에 묵특은 수렵에 참가해서 명적을 單于가 타는 말에 날렸다. 그러자 부하들은 모두 일제히 거기에 쏘아 댔다. 그제서야 묵특은 비로소 부하 전원이 자기의 명령을 따른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 수렵에 나갔을 때 명적을 아버지 頭曼에게 날렸다. 과연 그의 부하들은 일제히 화살을 날려 頭曼單于를 죽였다. 묵특은 잇달아 그의 계모, 아우 및 자기를 따르지 않은 대신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스스로 單于가 되었다.
 
  묵특이 單于에 올랐을 당시 동쪽에서는 東胡가 묵특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듣자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頭曼이 생전에 탔던 天里馬를 얻고 싶다고 청했다. 이에 묵특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묵특은 이렇게 말했다.
 
  『서로 나라를 이웃하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결국 천리마를 내주었다. 얼마쯤 뒤에는 묵특이 자기들을 무서워하는 줄로 안 東胡가 다시 사자를 보내 單于의 閼氏 중에 한 사람을 얻어 가지고 싶다고 청했다.
 
  묵특이 또 좌우에게 물었다. 좌우는 모두 성을 내며 말했다.
 
  『東胡는 무례합니다. 그러기에 閼氏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쳐서 버릇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묵특은 이렇게 말했다.
 
  『남과 나라를 이웃하면서 어떻게 여자 하나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드디어 사랑하는 閼氏 한 사람을 골라 東胡에게 보내 주었다.
 
 
 
 東胡 정벌
 
 
 
 
  이로써 東胡는 더욱 교만해져서 마침내는 국경을 침범하려 했다. 당시 東胡와 흉노 사이에는 1000여 리에 걸쳐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가 있었다. 東胡는 이 황무지에 눈독을 들이고 사자를 보내 묵특에게 이렇게 전했다.
 
  『흉노와 우리의 경계지점인 황무지는 흉노로서는 어차피 무용지물이니까 우리가 차지했으면 좋겠소』
 
  묵특이 이 문제를 신하들에게 묻자 몇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건 이래저래 버린 땅입니다. 주어도 좋고 안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묵특은 크게 성을 내며 말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줄 수 있단 말이냐?』
 
  그러고는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을 모조리 참수한 다음 곧 말에 오르며 전국에 명령을 내렸다.
 
  『이번 출전에 낙후한 자는 죽이겠다』
 
  그리고 마침내 동쪽으로 東胡를 습격했다. 東胡는 처음에 묵특을 업신여겨 흉노에 대한 방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묵특은 군사를 이끌고 습격해서 순식간에 東胡를 대파해 그 왕을 죽였으며 백성을 사로잡고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서쪽으로 月氏를 쳐서 패주시켰고, 남쪽으로 河南(오르도스)의 樓煩王·白羊王 등의 영지를 병합하는 한편 일찍이 秦나라의 蒙恬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당시 漢軍은 項羽와 서로 싸웠으므로 중원 천하는 전쟁에 지쳤다. 묵특이 손쉽게 흉노를 강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흉노에게는 활에 능숙한 군사만 해도 30만 명에 이르렀다.
 
 
 
 법률·풍습·戰法
 
  그들의 법률은 대개 이러했다. 평상시에 칼을 한 자 이상 뺀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한 사람은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경범죄를 범한 사람은 軋刑(알형)에 처하고, 중죄를 범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옥에 가둬두는 것은 길어도 열흘 이내이며 옥에 갇힌 사람은 전국을 통해 몇 명에 불과했다.
 
  單于는 아침에 營을 나와 막 떠오르는 해에게 절을 하고 저녁에는 또 달을 보고 절을 했다. 앉는 자리의 차례는 왼쪽을 윗자리로 하고 북쪽을 향해 앉았다. 戌日과 己日을 吉日이라 하여 소중하게 알았다.
 
  죽은 사람을 보낼 때는 시체를 널과 바깥 널에 넣고, 그 속에 金銀과 가죽옷들을 넣었는데, 무덤에 봉분을 하거나 나무를 심거나 하는 일은 없고, 상복을 입지도 않았다. 임금이 죽으면 사랑받던 신하나 첩들 중에 따라 죽는 사람이 있는데, 많을 때에는 몇십 명에서 몇백 명에 달했다.
 
  전쟁을 일으킬 때에는 항상 달의 모양을 보고 결정했다. 달이 커져서 둥글어지면 공격을 하고 이지러지면 후퇴했다. 공격이나 싸움을 할 때에 적의 목을 베거나 적을 포로로 한 사람에게는 한 잔 술을 하사하고, 노획품은 노획한 본인에게 주는데 사람을 생포했을 경우는 잡은 사람이 하인이나 하녀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싸우는 마당에서는 누구나가 이득을 얻으려고 교묘히 적을 유인하여 한꺼번에 내리덮치곤 했다. 그래서 적을 보기만 하면 이득을 바라고 새떼처럼 모여들지만 일단 싸움이 불리해져서 패색이 짙어지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또한 싸움에서 자기 편 戰死者(전사자)를 거두어 준 자에게는 戰死者의 재산을 몽땅 주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묵특이 죽자 그의 아들 계육이 뒤를 이어 스스로 老上單于(노상선우)라 칭했다. 그가 즉위하자, 孝文帝는 곧 종실의 딸을 공주라 속여 흉노에게 보내 單于의 閼氏(황후)로 만들었다. 그리고 환관으로 燕나라 사람인 中行說(중행열)을 공주의 傅(부: 스승)로 했다. 說은 흉노에 가는 것을 꺼려 사퇴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투덜거리며 떠났다.
 
  『내가 가면 반드시 漢나라의 화가 될 것이다』
 
 
 
 匈奴와 漢族의 비교
 
   中行說은 흉노 땅에 도착하자마자 單于에게 투항하더니 곧 그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 흉노는 漢나라의 비단·무명이나 음식 등을 애용하는데 中行說은 그 점을 들어 單于에게 진언했다.
 
  『흉노의 인구는 漢나라 한 郡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漢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漢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單于께서 풍습을 바꾸어 漢나라 물자를 좋아하시면 漢나라가 자기 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채 흉노에게 소비시키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漢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漢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거든 그것을 입으시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쓸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단과 무명이 털로 짠 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은 점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온 나라에 보여 주십시오. 또 漢나라의 음식을 얻으시거든 이를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젖과 乾酪(마른 젖)의 편리하고 맛있는 것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온 나라에 보여 주십시오』
 
  漢나라 사신으로서 『흉노의 풍습에서는 노인을 천대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자, 中行說은 그 漢나라 사신에게 모질게 따져 물었다.
 
  『당신들 漢나라 풍속에도 누군가가 주둔군의 수비를 위해 군대로 떠날 때에는, 그 늙은 양친이 자기들의 두껍고 따뜻한 옷을 벗어 주고 살찌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군대에 나가는 사람에게 보내 주지 않는가?』
 
  『그렇다』
 
  『흉노는 다 잘 아다시피 싸움을 일로 안다. 늙고 약한 사람은 싸울 수 없다. 그러기에 자기들이 먹을 살찌고 맛있는 음식을 건장한 사람들에게 먹인다. 즉 이같이 분수에 따라 스스로를 보호하는 만큼, 아비와 자식이 오랫동안에 걸쳐 몸을 보존할 수 있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흉노는 노인을 가볍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흉노는 父子가 같은 천막 속에 살며 아비가 죽으면 자식이 그 계모를 아내로 하고 형제가 죽으면 남은 형이나 동생이 그의 아내를 맞아 자기 아내로 해 버린다. 옷과 관과 묶는 띠 등 아름다운 예복도 없고 조정에서의 의식과 예절도 없다』
 
  『흉노의 풍습에서는 삶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젖을 마시며, 그 털가죽을 옷으로 한다. 가축은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철에 따라 이동을 한다. 그러므로 싸울 때에는 사람들이 말 타고 활 쏘는 법을 익히고 평상시에는 일 없는 것을 즐긴다. 법과 규칙은 가볍고 편리하여 실행하기 쉽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간단하고 쉬워서, 한 나라의 정치는 흡사 한 집안의 일과도 같다.
 
  父子 형제가 죽으면 남은 사람이 그의 아내를 맞아 자기 아내로 하는 것은 뒤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흉노는 어지럽기는 하지만 종족만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 외면상으로 아비나 형의 아내와 장가드는 일은 없지만, 친족 관계의 거리가 멀어지면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 혁명이 일어나 帝王의 姓이 바뀌는 것도 다 그런 예다.
 
  그리고 예의를 말하더라도 충성이나 믿음의 마음도 없이 예의를 강요하기 때문에 위아래가 서로 원한으로 맺어지고, 집만 보더라도 너무 좋은 집을 지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 필요한 힘을 다 써버리고 만다.
 
  대개 밭갈이하고 누에를 길러, 먹고 입는 것을 구하고 성을 쌓아 방비를 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戰時에는 싸움을 익히지 않고 평상시에는 생업에 지치고 만다. 슬프다. 흙집에서 사는 漢나라 사람이여! 자기들이 하는 일을 잘 반성해 보고 필요치 않은 잔소리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흉노의 자존심
 
  中行說의 말은 유목기마민족과 농경민족 관계에서 중대한 의미가 있다. 유목민들이, 접경하고 있는 도시-농경문화의 물질적 풍요를 부러워하면 목축을 포기하고 도시-농경문화를 받아들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목축에 기반을 둔 기마군단이 약화되어 군사적 우위를 상실하고 망해 버린다. 中行說은 이 점을 單于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유목민들이 「우리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가치 있고 멋 있는 것이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만 漢族과 대결할 수 있다. 漢族 출신인 中行說은 흉노의 인간적 장점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과 벗하면서 悠悠自適(유유자적)하다가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약탈하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죽은 아버지와 형제의 아내(生母는 제외)를 취하여 종족보존을 하며, 법과 규칙은 가볍고 편리하여 실행하기 쉽고 임금과 신하 관계도 간단하고 쉽다. 이렇게 사는 것이 중국인처럼 제도를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음모를 꾸미면서 가식적으로 사는 것보다 못한 게 무엇인가-대강 그런 투이다.
 
  흉노-몽골-투르크로 대표되는 북방기마민족이 거의 2000년간 도시-농경민족에 대해 군사적인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야만적 삶의 방식에 대해 자부심과 자신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하찮은 것이라는 가치관이 농경 문화인들과 달랐고 그 다름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사회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기마전술의 기반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랑세기와 흉노적 性풍습
 
   신라 내물왕 이후의 金氏 왕들이 실은 흉노계통의 기마민족 출신이라면 그들의 풍습 중에서 흉노적인 성격들이 드러나야 한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좋은 자료가 花郞世紀(僞作說도 있다)이다. 金大問이 썼다고 전해지는 이 책은 1980년대에 부산에서 그 필사본이 발견된 이후 진짜냐 가짜냐로 학계의 쟁점이 되어 왔다.
 
  나는 이 책이 眞書라고 믿는 입장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신라 왕족들과 귀족들의 성풍습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다. 근친 결혼뿐 아니라 아버지가 다른 남매끼리의 결혼, 작은아버지와 결혼한 경우, 왕족 여성들의 화려한 남성 편력, 그리고 兄死娶嫂(형사취수), 즉 형이 죽으면 그 처를 동생이 인수한다는 사례도 있다.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어 삼국통일의 길을 여는 金春秋의 아버지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金龍樹였다. 김용수는 동생보다 먼저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동생인 龍春에게 아내 천명공주와 아들 춘추를 맡겼다. 龍春은 형수와 형의 아들을 자신의 아내와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용수는 그 전에 천화공주를 아내로 맞아 살고 있었는데, 천명공주를 다시 아내로 맞게 되자 천화공주를 동생 용춘에게 주었다. 즉 용수는 동생에게 두 명의 아내를 잇따라 준 것이다. 위의 사례는 史記 등 중국의 史書가 전하고 있는 흉노의 풍습과 비슷하다.
 
  삼국사기 내물왕條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신라에서는 같은 姓끼리 혼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형제의 자식이나 고모, 이모, 사촌 자매까지 아내로 맞았으니, 비록 외국으로서 각기 풍속이 다를지라도 중국의 예속으로써 이를 따진다면 큰 잘못이다>
 
  삼국유사에는 7세기 문무왕 시절 지방관리가 경주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아내를 동침하도록 바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풍습도 북방 유목민들 사이에 전해 오는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진평왕 때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양도(男)와 보량(女)이란 남매 사이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양도는 어른들이 남매 간의 결혼을 권하자 이렇게 말한다.
 
  『저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입니다. 제가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모두 좋아할 것이지만 중국의 예를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가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저는 오랑캐가 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아들 양도를 감싸안으면서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神國에는 신국의 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道로써 하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김영사, 이종욱의 「화랑세기로 본 신라 이야기」에서). 6세기 당시 흉노계 신라 귀족사회에도 중국의 유교적인 가치관이 들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다. 아들 양도는 『나는 오랑캐가 되겠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나는 흉노의 아들이니 야만의 법속을 따르겠다』는 自我의 선언이다.
 
  중국으로부터 밀려오는 유교적·보편적 가치관에 대응한 신라적인 주체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신라 사회가 흉노적인 특수성과 중국적인 보편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위대성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종합하여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승화시킨 점이다. 신라 왕족이 對唐 결전을 선택하여 신라의 독자성을 확보한 정신적 배경에는 『중국은 중국 것이 있고 우리 신라에는 우리의 가치가 있다』는 자주성과 자존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자주성과 자존심의 근원에는 『우리는 漢을 속국으로 삼았던 흉노의 후손이다』는 정체성 의식이 깔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大草原과 地中海
 
  이제 흉노와 신라의 관계는 세계사의 視野 속에서 바라볼 때 이렇게 정리된다.
 
  흉노족이 신라의 지배층으로 등장하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東아시아와 유럽은 대동란의 시대였다. 그 대격변의 충격은 만주-몽골-중앙아시아-흑해 연안-러시아 대평원-헝가리 평원으로 뻗어나가는 유라시아 대초원으로부터 나왔다. 지도를 놓고 보면 이 유라시아 大草原은 길다란 타원형의 벨트처럼 되어 있다. 이 대초원을 지중해에 비교하면 배는 말이 된다. 서구 문명의 本流인 그리스-로마-西유럽 국가들이 지중해라는 일종의 호수를 통해서 문물과 영향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간 것처럼 東아시아, 중앙아시아, 이란과 인도, 러시아, 東유럽 국가들은 이 유라시아 대초원이란 일종의 지중해를 통해서 기마민족의 침략을 받고 그들과 문물을 교류하면서 발전해 왔다.
 
  3~4세기 이 대초원의 세계에서 큰 변동이 생긴다. 몽골고원에는 小氷河期가 찾아와 목초를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유목민들은 농경민족 정복에 나서든지 풀과 물을 따라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때 동서양의 도시 농경 문화권의 2대 축이던 로마와 중국이 분열하고 있었다. 유목기마민족은 대초원 연변의 농경국가들이 약체로 보이면 반드시 침략을 개시한다.
 
  3세기 말 중국의 통일왕조 晉(三國志 시대를 통일했던 漢族 왕조)이 皇室의 분열로 허점을 보였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흉노계 세력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신호로 하여 흉노 등 북방의 다섯 유목기마민족이 일제히 남침하여 晉을 멸망시키고 북중국에 16개 나라를 잇따라 세운다. 소위 5胡16國 시대이다. 이를 이은 남북조 시대까지 포함하면 隋가 중국을 통일하는 서기 581년까지 약 300년간 東아시아에서는 유례없는 격동과 이동이 벌어진다.
 
  이 시기는 혼란 속에서 창조적 파괴가 일어난 시대이기도 했다. 즉, 기마민족의 이동과 고대국가의 건설인 것이다.
 
  한반도에선 이 시기에 북방기마민족이 주체가 되어 馬韓, 辰韓, 弁韓, 沃沮, 濊貊 등 부족국가들을 흡수통합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섰다. 이 3國은 7세기 말에 통일신라로 통합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태가 된다.
 
  북방기마민족의 일파는 한반도의 남부 지방을 도약대로 삼아 일본에 상륙한다. 말과 활로 무장한 기마민족은, 농경민족인 야요이 문화가 만들어낸 수십 개 부족국가를 점령해 가면서 나라(奈良) 지방으로 진격하여 5세기경에는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한다. 이들은 떠나온 한반도의 3국과 和戰 양면의 관계를 설정하여 오늘날 韓日관계의 한 定型을 만들었다.
 
  북방 기마민족의 南進·東進으로 인해 만들어진 隋(그를 이은 唐),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의 고대국가는 지금의 중국, 한국, 북한, 일본의 모태이다. 오늘날 동북아의 모습은 3~6세기에 형성된 틀 위에 서 있다.
 
  특히 北중국의 漢族들은 이 300년간 몽골계 유목민족들과 혼혈되어 양자강 이남의 순 漢族들과는 유전자가 많이 다른 민족으로 바뀌었다. 漢族의 몽골화(또는 漢族의 북방화), 몽골족의 漢化이다.
 
  東아시아 대이동의 시대는 隋가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581~676년 사이에 끝이 난다.
 
 
 
 古代史의 생동과 기동
 
  그 뒤의 동북아 사람들은 굳어진 민족과 국가가 만들어낸 국경 안에 머물면서 생활한다. 그런 定住 생활에 너무 오래 익숙하다 보니 고대의 대이동 시대를 이해하는 데 장애가 생기고 있다. 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인 고대, 국경이 없던 고대를 최근 100년 사이에 만들어진 민족주의의 시각으로 들여다보니 있지도 않았던 민족문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컨대 신라통일이 외세인 唐을 불러들여 동족 국가인 백제, 고구려를 친 민족반역 행위라는 식의 관념과 환상이다. 일본인들은 너무나도 뻔한 북방기마민족의 한반도 통과·일본 상륙과 정복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한국인들은 그 사실을 민족적 우월감의 근거로 삼으려 한다.
 
  북한 정권은 신라통일을 부정하고 고구려 정통론을 앞세운다. 이는 자신들이 민족반역자라는 정체를 감추기 위하여 허구의 민족 정통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중국은 중국으로 한민족 에너지가 팽창하는 것을, 사전에 견제하기 위하여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현대의 굳어진 의식이 고대의 생동하는 역사를 인질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동과 격동과 생동의 東아시아 고대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에 인질로 되어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의 의식을 해방시켜 주는, 그리하여 새로운 차원의 공존공영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자가 흉노-고조선-신라-한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主流 세력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과학적인 답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定義가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집단 정체성이란 결국 민족이 걸어온 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역사관의 기초가 된다. 정체성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역사관이 뒤집어지고 국가적 재앙을 초래한다. 지금 신라통일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북한의 공작에 넘어간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대한민국 부정으로 넘어가고 적화통일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조선조 선비들은 漢族의 정치이데올로기로 변한 朱子學에 세뇌되어 자신들을 漢族 정권의 아들 정도로 생각하고 북방기마민족을 경멸하다가 병자호란을 불렀다. 한국인은 明나라의 漢族보다는 여진족과 더 가깝다. 신라의 유민은 여진족을 지휘하여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姓을 따서 金이라 이름 붙인 적도 있다. 이 金은 고려를 형제국으로 생각하여 치지 않았다.
 
  이 金의 후신인 後金과 조선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後金(뒤에 淸)도 최소한의 체면만 세워 주면 조선과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광해군은 망해 가는 明과 떠오르는 後金 사이에서 줄다리기 실리외교를 하면서 전쟁을 피해 갔다. 이 光海君의 實利외교를, 부모국가인 明에 대한 배신이라고 단정하고 쿠데타를 해서 집권한 인조 세력은 신흥강국 後金을 적으로 삼는 자살적 외교정책을 펴다가 병자호란(1636년)을 불러 임금이 언 땅에 머리를 박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잘못된 정체성과 역사관이 부른 국가적 대재난이었다.
 
  그런 재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민족사 최고의 업적이며, 우리가 한국인으로 생존하고 있는 근거이며, 자유통일을 넘어서 선진국을 만들어갈 때 귀감이 될 만한 지혜와 용기의 보따리이고, 민족사의 황금기를 열고 최초의 일류국가를 만들어낸 계기이기도 한 신라의 삼국통일을, 민족사의 치욕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엉터리들이 득세하고 있다.
 
  민족사 최고의 영광을 최고의 수치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지식인 대접을 받는 국가에서는 제대로 된 애국심도 공중윤리도 교양도 생기지 않는다. 최고를 최악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이기 때문이다. 그런 선동에 넘어가는 국민들은 집단 자살하라고 부추기면 따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5장 : 흉노와 신라통일
 
 
 
 다양한 문화와 민족의 통합이 신라통일의 에너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인 흉노계 金氏 왕족의 줏대·안목·전략·용기인데, 이런 덕목은 『우리는 흉노 오랑캐이다』라고 당당하게 자신의 出自를 드러낼 수 있는 정직함에서 나온 것이다.
 
  신라는 중국의 漢族 문화를 삼국 중에서 맨 나중에 받아들였다.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 백제, 고구려에선 저항이 없었지만 신라에선 이차돈이 순교할 정도로 저항이 있었다.
 
  이는 『우리가 가진 것이 불교보다 뭐가 못하단 말인가.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주체성과 개방 필요성 사이의 충돌이었을 것이다. 이런 갈등은 외래 문물의 여과과정 역할을 함으로써 주체성을 잃지 않고 선진문물을 흡수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신라 金氏들은 흉노적인 것, 북방적인 것을 主로 놓고 중국적인 것을 副로 하는 문화의 종합을 시도했던 것이다. 7세기 신라 金氏 왕족들이 唐과 연합하여 삼국통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중국적인 것이 主가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7세기 신라는 백제, 고구려에 비교하여 깊이 있고 다양한 문화의 축적을 이룬 상태였다. 당시 신라인의 구성은 농경을 가지고 온 남방계, 기마전술을 갖고 들어온 북방계, 피난 온 漢族의 혼합이었을 것이고 문화적으로는 북방계, 서방계, 남방계, 중국계의 혼합이었을 것이다. 다양하고 풍성한 문화적 인종적 종합이 이뤄진 신라였으므로 국력을 동원할 때도 입체적 안목과 다양한 수단의 구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북방계의 용맹성, 남방계의 성실함, 중국계의 知性, 서방의 그 어떤 요소들을 두루 이용할 수 있는 문화적 깊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신라는 북방계가 가져온 기마전술에서뿐 아니라 해군 또한 강했다. 신라의 조선기술은 당시 東아시아의 최고 수준이었다. 倭의 3만 군사와 400척의 대함대를 백촌강에서 전멸시킨 唐의 해군을 신라 해군이 기벌포에서 격멸함으로써 對唐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문무왕 때 船府, 즉 해양수산부를 창설했고, 일본인들은 唐을 오고갈 때 신라의 선박을 이용했으며 장보고는 9세기 한국 근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 해군력은 남방계의 소질이었을지 모른다. 화랑도는 흉노적·북방적인 샤머니즘(仙道 또는 神道)을 바탕으로 하되 불교와 유교적인 요소를 더한 종합적인 교양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엘리트는 사물을 넓게 깊게, 그리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花郞道의 대표인 風月主 출신 金春秋와 金庾信이 보여준 통일 외교와 전략은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의 콤비가 보여준 독일통일 전략의 깊이와 넓이를 오히려 무색케 한다.
 
  金春秋는 비행기도 없던 시절에 서해와 현해탄을 건너 唐과 일본을 오가고, 적진인 고구려로 단신 돌입하여 목숨을 건 담판을 벌이는가 하면, 金庾信은 兵權을 잡고 네 왕을 모시면서도 쿠데타를 꾀하지도, 왕의 경계심을 부르지도 않는다.
 
  신라가 羅唐연합을 이뤄 내고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그것을 지켜 내다가 唐이 신라마저 삼키려 했을 때 세계 최강의 전성기 제국을 상대로 결전을 감행하는 모습은, 세계사 어디를 뒤져보아도 좀처럼 찾아내기 어려운 감동적 장면이다.
 
  신라의 이런 행태 속에서 작동한 가장 중요한 민족적 유전자는 흉노적 용기와 당당함과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삼국 중 신라가 최종 승자가 된 것은 가장 서방적이고, 非중국적이며, 토속적인 세력의 승리를 의미했다. 이런 강력한 정체성은, 중국이란 거대한 光源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한민족이 독자성을 유지해 갈 수 있게 한 정신적 저수지였다.
 
 
 
 말(馬)과 배(船)를 잘 부린 신라인들
 
  삼국통일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수용하고 소화한 개방성과 주체성에서 나왔다.
 
  역사학자 李道學 교수(한국전통문화학교)가 쓴 「한국 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김영사)에서 필자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힘」을 이렇게 분석했다.
 
  1. 고대국가의 국력 척도인 양질의 鐵鑛을 확보했다.
 
  2. 국가를 위해 생명을 가볍게 던지는 무사도 정신.
 
  3. 신라 국왕의 政敎일치적 권위로 해서 국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4. 지배세력의 거듭된 교체와 다양한 세력의 포용으로 활력을 더해갔다.
 
  5. 倭, 백제, 고구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려오면서 내부 단합이 강화되었고 항상 사회의 긴장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李교수의 분석 중에서 특히 공감이 가는 것은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단에 고립되어 있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개방체제를 유지하여 다양한 세력과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의 생동력과 참신한 기풍을 유지하였다는 지적이다.
 
  신라는 朴-昔-金씨로 왕실이 교체되었다. 기록에 의한 것만으로도 중국 秦의 유민, 고조선의 유민, 낙랑군의 유민이 신라지역으로 몰려왔는데 서로 배타적으로 적대시하지 않고 여섯 村을 이루며 더불어 산다.
 
  李道學 교수는 『여러 경로로 들어온 민족의 수혈에 의해 참신한 기풍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신라는 흡수한 이방인이나 피정복민을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다양한 세력을 포용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요컨대 신라는 백제, 고구려, 조선에 비해서도 내부질서가 민주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포용이 가능하다. 신라의 힘은 북진 해양세력과 남진 북방세력의 교차지로서의 용광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에서 우러나온 통합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신라가, 海陸의 문물을 다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 주체성과 개방성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신라의 국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라의 해군력을 알아야 한다. 512년 지증왕 때 이미 이사부는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점령했다. 울산항에 인도에서 보낸 쇠를 실은 배가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의 관등 중 波珍이란 직책은 「바다 칸」, 즉 「海干」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신라의 조선술은 당시 東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倭에 조선술을 가르쳐준 이나베(猪名部)는 신라 사람이다. 639년 선덕여왕 때 唐나라 승려들이 신라 배를 타고 倭로 갔고 649년에는 倭의 승려가 신라 배를 타고 唐나라에서 귀환했다. 658년엔 倭의 승려 두 사람이 신라 배를 이용하여 唐에 유학을 갔다. 그때 倭는 백제와 더 친했는데도 唐을 오고갈 때 튼튼한 신라 배를 이용했다.
 
  583년 진평왕 때는 兵部에 船府署를 두어 선박사무를 관장하게 했고, 678년 문무왕 때는 병부, 즉 국방부와 동급인 船府令 한 명을 두었다. 해양부가 국방부와 동급으로 독립한 나라는 東아시아에서 신라가 유일했다.
 
  신라 해군이 고대일본 시절 오사카 부근 아카시노우라(明石浦)에 상륙하여 왜군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북방 기마민족 출신인 新羅金氏 왕족은 말을 통해서 북방초원 루트를 경유한 로마와의 문화 교류를 유지하였고, 배를 통해서는 倭와 唐을 비롯한 외국과의 무역을 유지했다. 말과 배는 고대 사회에서 양대 기동수단이었다.
 
  말로 상징되는 북방초원, 배로 상징되는 남방의 海原이 신라인의 활동공간이었다. 이 만한 스케일의 민족 무대를 갖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등장까지 기다려야 했다.
 
  신라는 농업생산성과 기마군단, 그리고 철생산력과 해양력까지 두루 갖춘 입체적이고 다양한 국력의 組合을 갖고 있었다. 이는 남방계·북방계 등 다양한 민족의 공존과 융합에 의한 시너지 효과로서 설명될 것이다. 이런 복합성은 신라가 가진 주체성을 매개로 하여, 복잡성으로 전락하지 않고 높은 단합력을 발휘했다. 특히 신라는 전쟁이나 외교 등 국가적 위기 때 국내의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신라는, 참으로 당차고 단수가 높은 나라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라통일의 주체세력은 신라 왕족 金春秋와 100여 년 前에 신라에게 망했던 금관가야 왕족 金庾信의 연합세력이었다. 피정복자를 노예로 부리지 않고 통일 大業의 主役으로 重用한 신라의 포용성은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개방성에서 나온 게 아닐까?
 
 
 
 민족사 최고의 천하 名文
 
  우리 민족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문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671년 신라 문무왕이 唐將 薛仁貴에게 보낸 답신을 추천할 것이다. 이 글은 신라의 名문장가 强首가 썼던 것으로 보인다. 「答薛仁貴書」라고 일컬어지는 이 글이 명문인 것은 민족사의 결정적 순간에 쓰인 글이라는 역사적 무게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삼국통일을 해낸 신라 지도부의 고민을 읽는 정도가 아니라 숨결처럼 느낄 수 있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쓰였다.
 
  이 글이 명문인 또 다른 이유는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국가이익을 도모하여야 하는 문무왕의 고민이 고귀한 지혜와 품격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檄文(격문)이 아니라 외교문서이다. 唐과 정면대결할 수도, 굴종할 수도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작게 굽히면서 가장 많은 것을 얻을까 하는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여 만들어 낸 글이다. 너무 굽히면 唐은 신라 지도부를 얕잡아 볼 것이고, 너무 버티면 전성기의 세계 최대 제국이 체면을 걸고 달려들 것이다. 신라가 死活을 걸어야 할 균형점은 어디인가,
 
  그 줄타기의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이 글은 삼국사기 문무왕條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 글을 이해하려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羅唐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唐이 13만 명의 대군을 보내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킬 때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것은,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고구려를 멸한 다음엔 신라마저 복속시킴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唐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 의도를 신라도 알았다. 서로를 잘 아는 羅唐은 공동의 敵 앞에서 손을 잡은 것이었다. 공동의 敵이 사라졌을 때는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을 신라도, 唐도 알면서 웃는 얼굴로 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唐은 신라와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좌절시킨 다음에도 이 옛 백제 땅을 신라가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唐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唐의 명령하에 백제 땅을 다스리게 했다. 문무왕이 반발하자 唐은 압력을 넣어 문무왕과 부여융이 대등한 자격으로 상호 불가침 약속을 하도록 했다.
 
  唐은 망한 백제사람들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정책으로 나온 것이다. 唐은 또 문무왕을 鷄林대도독에 임명하였다. 신라왕을 唐의 한 지방행정관으로 격하시킨 꼴이었다. 문무왕이야 속으로 피눈물이 났겠지만 고구려 멸망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참아야 했다.
 
  서기 668년 평양성에 신라군이 먼저 돌입함으로써 고구려가 망했다. 唐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안동도호부는 백제 땅을 다스리는 웅진도독부와 신라=계림도독부를 아래에 둔 총독부였다. 이 순간 한반도는 형식상 唐의 식민지로 변한 것이다. 金庾信·문무왕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도부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선택을 해야 했다. 이들은 굴욕적인 평화가 아닌 정의로운 전쟁을 선택했다.
 
  이때 만약 신라 지도부가 비겁한 평화를 선택했다면, 즉 唐의 지배체제를 받아들였다면 신라는 唐을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이용당해 한반도와 만주의 삼국을 唐에 넘겨준 어리석은 민족반역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로 해서 우리는 지금 중국의 일부가 되어 중국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후대의 것이고, 만약 평화를 선택했다면 신라 지도부만은 唐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으면서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문무왕의 위대성은 이런 일시적 유혹과 안락을 거부하고 결코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 아니 절망적인 것처럼 보인 세계제국과의 決戰을 결단했다는 점에 있다. 문무왕이 그런 결단의 의지를 담아 쓴 것이 바로 「答薛仁貴書」인 것이다.
 
 
 
 문무왕의 자존심
 
   서기 668년부터 2년간 신라 문무왕은 對唐 결전을 준비해 간다.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들이 唐을 상대로 부흥운동을 하는 것을 지원했다. 고구려의 劍牟岑(검모잠)이 遺民들을 데리고 투항하자 익산 지방에 살게 했다. 그 뒤 고구려의 왕족인 安勝을 고구려왕으로 봉해 그가 이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唐이 백제왕족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신라를 견제한 그 수법을 거꾸로 쓴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을 이용하여 백제 독립운동을 꺾으려 한 것이다. 문무왕은 또 對日공작을 개시한다.
 
  唐은 한반도를 안동도호부의 지배下에 둔 다음 일본에도 2000명의 병력을 보내 주둔시키면서 지배下에 두려고 했다. 문무왕은 일본의 신라系 도래인들을 움직여 壬申의 亂 때 일본의 天武天皇 세력을 지원, 親신라정권이 들어서게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唐의 對日공작을 좌절시킨다. 天武天皇 이후 약 30년간 日本은 唐과의 교류를 거의 끊고 신라에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문물을 배워 갔다.
 
  701년 天武가 반포한 大寶律令은 일본 고대 국가의 완성을 의미하는 「古代의 명치유신」인데 신라를 모델로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동북아시아를 안정시켜 그 뒤 200여 년간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670년 드디어 문무왕은 행동을 개시했다. 唐의 괴뢰국 행세를 하던 옛 백제지역 웅진도독부로 쳐들어가서 城과 땅을 차지하였다. 비로소 백제 땅이 신라 땅이 된 것이다. 671년 여름 신라군은 백제군을 도우려던 唐軍과 싸워 5300명의 목을 베고 장군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한 달 뒤 唐의 총관 薛仁貴가 서해를 건너와서 신라 승려 임윤법사를 통해 문무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왕은 안전한 터전을 버리고 멀리 天命을 어기고, 天時를 무시하고, 이웃나라를 속여 침략하고, 한 모퉁이 궁벽한 땅에서 집집마다 병력을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어서 과부가 곡식을 운반하고, 어린아이가 屯田하게 되니 지키려도 버틸 것이 없고, 이는 왕이 역량을 모르는 일입니다. 仁貴는 친히 위임을 받은 일이 있으니 글로 기록하여 (황제에게) 아뢰면 일이 반드시 환히 풀릴 터인데 어찌 조급하고 스스로 요란하게 합니까. 교전 중에도 사신은 왕래하니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薛仁貴는 과부와 어린이까지 동원되는 擧國一致의 단합으로 세계 최강의 제국과 정면대결하는 신라의 처절한 모습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이 편지에 대한 긴 答書의 서두에서 문무왕은 약속을 어긴 것은 唐임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전쟁의 명분이 신라 측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신라는 善의 편이고 唐이 도덕적으로 결점이 많다는 것을 확실히 한 때문에 이 답신의 권위가 처음부터 잡힌다.
 
  <唐 태종은 先王(태종무열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를 모두 너희 신라에 주어 길이 안일케 하고자 한다」고>
 
  문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부흥운동을 토벌할 때 신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先王(무열왕)이 늙고 약해서 행군하기 어려웠으나 힘써 국경에까지 나아가 나를 보내어 唐의 대군을 응접하게 하였던 것이오. 唐의 수군이 겨우 강어귀에 들어올 때 육군은 이미 대적을 깨뜨리고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그 뒤 漢兵(唐兵을 의미함) 1만 명과 신라병 7000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賊臣 福信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府城을 포위하니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포위를 뚫고 사면의 敵城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을 구하고 다시 군량을 운반하여 드디어 1만 명의 漢兵으로 하여금 虎口의 위난을 면케 하였고, 머물러 지키는 굶주린 군사로서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는 일이 없게 하였던 것이오.
 
  웅진의 漢兵 1000명이 적을 치다가 패배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웅진으로부터 군사를 보내달라는 청이 밤낮을 계속하였소. 신라에서는 괴질이 유행하여서 兵馬를 징발할 수 없었어도 쓰라린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많은 군사를 일으켜서 周留城을 포위하였으나 적은 아군의 병마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병마만 크게 상하고 이득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이 일시에 배반하여 복신에게로 가고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府城을 포위하였소. 이로 인하여 곧 웅진의 길이 끊기어 소금·된장이 다 떨어졌으니 곧 건아를 모집하여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곤경을 구하였소>
 
 
 
 「당신네의 血肉은 우리 것이오」
 
  671년 문무왕의 答薛仁貴書는 계속된다.
 
  그는, 신라가 백제 지방에 주둔한 唐兵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 대한 군량미 수송의 2중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를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6월에 先王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황제의) 勅旨에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軍糧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이때 웅진에서 사람이 와서 府城의 위급함을 알리니, 劉德敏 총관은 나와 더불어 상의하여 말하기를, 『만역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漢兵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에 군량이 다하였으나 웅진으로 군량을 운송한다면 勅旨를 어길까 두려웠고, 평양으로 운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었으므로 노약자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精兵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路上에서 눈을 만나 人馬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劉총관은 김유신과 함께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을 이어 비가 내리고 풍설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군량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므로 신라의 병마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노상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 되어 웅진 府城에서 곡식 종사를 자주 요청하므로 前後에 보낸 것이 수만 가마였소.
 
  南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인력이 극히 피곤하고 牛馬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소.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이므로 의복이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들에게 勸課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었소. 都護 劉仁願이 멀리 와서 지키자니 四面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게 衣食하였으니, 仁願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들 唐軍의 皮骨은 당나라 것이지만 당신들의 血肉은 신라 것이오」라고 부르짖듯이 말한 문무왕의 이 대목이야말로 신라가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견디면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위해 희생했던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문장이 答薛仁貴書의 한 클라이맥스이다.
 
  신라가 백제지역 주둔 唐軍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게 동시에 군량미를 공급하기 위하여 노약자까지 동원하여야 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르포 기사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고통을 지배층과 백성들이 장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신라 사회의 내부 단결이 잘 유지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唐은 신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기다렸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가 對唐 결전을 통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데는 내부 단합과 이에 근거한 동원체제의 유지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신라의 승리는 정치의 승리인 것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명예심, 다양한 구성원의 통합, 특히 軍官民의 일체감이 장기간의 통일전쟁 중에서도 신라의 체제를 지켜냈다.
 
 
 
 수모를 참고 견딘 이유는
 
  문무왕이 피를 토하듯이 쓴(문장가 强首의 대필인 듯) 答薛仁貴書에는 그동안 신라가 唐과의 연합을 위하여 참았던 굴욕을 털어놓고 쌓인 울분을 품위 있게 드러내는 내용들이 많다. 신라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참아낸 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唐의 힘을 빌린 다음에 보자는 스스로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다운 승리는 굴욕을 참아낸 뒤에 온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이다. 문무왕은 唐이 개입하여, 망한 백제와 흥한 신라가 억지 會盟하도록 한 상황을 실감 있게 설명한다.
 
  서기 663년 倭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3만 명의 해군을 함선에 실어 보낸다. 이 대함대는 백제부흥운동을 돕기 위해 파견된 것인데 역사적인 白村江(지금의 금강)의 해전이 벌어진다. 문무왕의 편지는 이 상황을 묘사해 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총관 孫仁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府城을 구원하러 올 때 신라의 병마 또한 함께 치기로 하여 周留城 아래 당도하였소. 이때 왜국의 해군이 백제를 원조하여 왜선 1000척이 白沙에 정박하고 백제의 精騎兵은 언덕 위에서 배를 지켰소. 신라의 날랜 기병이 漢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陣을 부수니 주류성은 용기를 잃고 드디어 항복하였소. 남방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군사를 돌이켜 北을 치자 任存城 하나만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기에 양군이 협력하여서 하나의 城을 쳤으나 굳게 지키어 항거하니 깨뜨리지 못하였소.
 
  신라가 돌아가려는데 杜大夫가 말하기를, 『勅旨에 평정된 후에는 함께 맹세하라고 하였으니 임존성만이 비록 항복하지는 않았다 해도 함께 회맹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라는 『임존성이 항복하지 않았으니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또 백제는 간사하고 반복이 무상하니 지금 서로 회맹한다 해도 뒤에 후회할 것이다』고 하여 맹세를 정지할 것을 주청하였소.
 
  麟德 원년(664)에 (唐 고종이) 다시 엄한 칙지를 내려 맹세치 않을 것을 책망하므로 곧 熊領으로 사람을 보내어 단을 쌓아 서로 회맹하고 회맹한 곳(지금 公州市의 就利山)을 양국의 경계선으로 삼았소. 회맹은 비록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감히 칙지를 어길 수 없었소>
 
  唐은 망해 버린 백제를 唐의 직할로 하여 신라와 형제의 맹세를 하게 한 것이다. 신라로서는 敗者와 勝者를 같이 취급하는 唐의 정책에 이를 갈았지만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은 편지에서 신라군이 668년에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할 때도 선봉에 섰던 사실을 설인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唐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도 이겨야 했던 전쟁
 
   <蕃漢의 모든 군사가 蛇水에 총집합하니 南建(연개소문의 아들)은 군사를 내어 한번 싸움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려고 하였소. 신라 병마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대부대를 부수니, 평양 城中은 사기가 꺾이고 기운이 빠졌소. 후에 영공(英國公 李勣)은 다시 신라의 날랜 기병 500명을 취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드디어 평양을 부수고 큰 공을 이루게 된 것이오>
 
  문무왕은 신라의 공이 큼에도 唐이 신라 장병들에게 상을 주지 않고 박대한 것을 조목조목 비판한 뒤 신라가 갖고 있던 비열성을 唐이 빼앗아 고구려(멸망한 뒤 唐이 다스리고 있던)의 관할로 넘겨 준 것이라든지, 백제의 옛땅을 모두 웅진도독의 백제사람들에게 돌려 주라고 압력을 넣은 것, 그리고 이제 와서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치려고 하는 사실들을 들어 이럴 수가 있느냐고 공박한다.
 
  <이제 억울함을 열거하여 배반함이 없었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오. 양국이 평정되지 않을 때까지는 신라가 심부름꾼으로 쓰이더니 이제 敵이 사라지니 요리사의 제물이 되게 되었소. 백제는 상을 받고 신라는 죽음을 당하게 생겼소. 태양이 비록 빛을 주지 않을망정 해바라기의 본심은 오히려 태양을 생각하는 것이오. 청컨대 총관은 자세히 헤아려서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말씀드리시오>
 
  671년 백제땅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완전히 신라 영토로 삼은 문무왕은 겨울엔 唐의 조운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100여 명의 장병들을 사로잡았다. 672년 唐軍은 4만 명의 병력으로 평양성에 와서 주둔하면서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신라는 한강을 방어선으로 하여 唐軍과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였다. 한편 문무왕은 포로가 된 唐의 장수들을 귀환시켜 주면서 사신을 보내어 唐의 고종에게 사죄하였다. 겸하여 은, 구리, 바늘, 우황, 금, 포목을 바치기도 했다. 和戰 양면을 구사한 것이다. 신라는, 唐의 체면이 결정적으로 손상되지 않도록 애쓰면서도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말 영국에서 9년 동안 수상을 지냈던 로드 팔머스턴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영원한 동맹국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國益만이 영원하다. 우리는 이 국가이익을 좇아야 할 의무가 있다』
 
  국가에는 『영원한 동맹국이 아니라 영원한 국익만 있을 뿐이다』는 이 金言을 실천한 나라가 바로 신라였다. 신라는 5세기 고구려와 동맹하여 백제와 倭의 공세를 저지했다. 5세기 후반부터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펴자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와 대항한 것이 신라였다. 6세기에 접어들어 國力에 자신을 가진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였고 7세기 唐과 동맹하여 백제, 고구려를 정복한다.
 
  백제는 남부 중국 정권 및 倭와 친하게 지냈고, 고구려는 중국 통일정권 隋·唐과 싸우기만 했다. 신라는 중국 통일정권인 唐의 힘을 이용했다. 唐은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를 먹으려고 했으나 신라에 이용당한 셈이 되었다. 小國이 大國을 이용하려고 하다간 먹히는 것이 역사의 법칙인데 신라는 이 법칙조차 무너뜨리는 예외적인 외교를 한 것이다.
 
  어떤 나라와 친하든 싸우든 국가이익을 중심에 두고 그런 관계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신라가 唐에 파견한 사신들은 1급 인물들이었다. 그 가운데 나중에 왕이 된 사람이 세 명이나 되었다. 시중, 병부령 등 고위직에 올랐던 이들도 대부분 그들이었다. 김춘추는 두 아들 金法敏과 金仁問을 對唐 사신으로 썼다. 그는 金仁問을 唐의 궁정에 인질로 남겨두었다. 김유신의 동생 欽純과 아들 三光도 對唐 사신으로 투입되었다.
 
  신라는 對唐결전을 할 때 唐의 심장부에 박아둔 이들 인질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金仁問 등은 唐의 궁정에 있으면서도 唐에 이용되지 않고 항상 조국을 위한 정보수집과 공작을 진행했다. 신라가 전성기의 세계제국 唐을 상대로 일면 전쟁 일면 화해를 진행하면서 한반도를 확보해 갈 수 있었던 데는 당대 일류 인물들이 唐의 중심부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신라의 국가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6장 : 한국사의 로마는 신라
 
 
 
 徐廷柱의 신라 정신
 
  불멸의 역사서인 史記의 저자 司馬遷은 이 책의 後記에서 『결국 사람은 모두 마음이 답답하고 맺힌 바가 있어 그 道를 통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말하며 장차 올 일을 생각한다』고 썼다.
 
  기자가 흉노-고조선-신라-한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흐름을 쓰고 있는 것이나 신라통일의 前과 後에 관심이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未堂 徐廷柱 시인도 6·25 사변 때 하도 참혹한 것을 많이 보고 당하고 한 뒤 자살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몰렸다가 신라 정신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그 뒤 신라 정신을 詩作의 한 주제로 삼았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신라 정신은 중세 유럽 사람들이 로마 정신을 再발견하여 현실의 장벽을 뚫고 나가려고 했던 것처럼 한국인들이 큰 난관에 봉착할 때 길어 쓸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감흥과 상상력의 깊은 샘물인 것이다.
 
 
  <내가 어느 절간에 가 불공을 하면
 
  그대는 그 어디 돌탑에 기대어
 
  한 낮잠 잘 주무시고
 
  그대 좋은 낮잠의 賞으로
 
  나는 내 금팔찌나 한 짝
 
  그대 자는 가슴 위에 벗어서 얹어 놓고
 
  그리곤 그대 깨어나거던
 
  시원한 바다나 하나
 
  우리들 사이에 두어야지>
 
  (徐廷柱:「우리 데이트는-善德여왕의 말씀 2」)
 
 
  未堂은 이렇게 말했다(1995년 1월호 月刊朝鮮).
 
  『1951년부터 1953년까지가 내게 있어 신라 정신의 잉태기였지. 6·25 전쟁 중 극심한 절망감 속에서 나는 「國難이 닥쳤을 때 우리 옛 어른들 가운데 그래도 제 정신 차려 살던 이들은 난국을 무슨 슬기와 용기와 실천력으로 헤쳐 왔던가?」하는 것을 절실히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더듬거려 보던 끝에 신라 정신과 구체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야』
 
  未堂이 말하는 신라 정신의 요체는 멀리 보고 한정 없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가려는 영원성이다.
 
  『인생 행로를 제한받고 또 스스로도 제한하며 얼마만큼만 가고 말려는 한정된 단거리주의가 아니라 한정없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가고 또 가려는 저 無遠不至주의. 신라인들에게서 우린 그걸 배워야 해. 그러면 불안과 불신과 반감과 충돌 따위를 훨씬 줄일 수 있겠지』
 
  『신라 鄕歌에는 삶에 대한, 사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이 들어 있어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나지. 자연과 인생에 대한 소박한 감정부터 깊은 체념과 달관, 그리고 安民理世의 높은 이념까지를 노래한 향가도 그 바탕은 國仙 정신이야』
 
  國仙 정신은 무엇인가?
 
  『이 天地에 대한 주인의식이 신라인들에게 작용해 통일로 이끌어간 거지. 하늘과 땅을 맡아 생활하는 주인으로서의 강한 책임 의식, 이 점이 조선시대 유교가 우리 민족에게 弱者의 팔자와 분수에 다소곳할 걸 가르쳐서 亡國의 길로 유도한 것과 전혀 다른 점이지. 각 개인의 값이나 민족의 가치는 에누리당하자면 한정이 없고, 에누리만 해나가다가는 민족의 장래가 정말 암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나와 내 민족의 존엄성은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지. 하늘과 땅과 역사의 주인된 자로서 말이네』
 
  『민중을 억압하고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민중에게 아첨하고 추파를 던진대도 곤란해. 진심으로 민중과 일치하고 화합하려는 정신, 그게 중요하지. 신라에는 여러 훌륭한 어른들이 많지만 본받을 만한 인물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로선 金庾信 장군을 들겠어. 金庾信 장군을 배워라! 고난을 앞장서서 짊어진 모습을…』
 
  그의 「金庾信 將軍 1」이란 詩는 이렇다.
 
 
  <말과 사람이 함께 얼어 쿵쿵 나자빠지는
 
  혹독한 추위 속의 어느 겨울날
 
  고구려 평양으로 가는 험한 산길에서
 
  新羅 최고의 군사령관 金庾信은
 
  한 사람의 輜重兵 步卒이 되어
 
  맨 앞에서 군량미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팔뚝을 걷어 어깨까지 드러내고
 
  땀 흘리며 끌고 가고 있었다.
 
  그래서 팔심이 더 세기로야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서 죽인
 
  金閼川을 신라 최고로 쳤지만
 
  그런 김알천의 그런 힘까지도
 
  金庾信 장군의 힘에다가 비기면
 
  젖비린내 나는 거라고
 
  신라 사람들은 간주했었다>
 
 
  徐廷柱 선생은 신라의 화랑들이 가졌던 未來佛 미륵신앙을 자신의 詩 「신라 사람들의 未來通」에서 이렇게 썼다.
 
 
  <신라 사람들은 백년이나 천년 만년 억만년 뒤의 미래에 살 것들 중에 그중 좋은 것들을 그 미래에서 앞당겨 끄집어내 가지고 눈앞에 보고 즐기고 지내는 묘한 습관을 가졌었습니다. 미륵불이라면 그건 과거나 현재의 부처님이 아니라, 먼 미래에 나타나기로 예언만 되어 있는 부처님이신 건데, 신라 사람들은 이분까지도 그 머나먼 미래에서 앞당겨 끌어내서, 눈앞에 두고 살았습지요>
 
 
 
 대한민국은 新羅의 再生
 
  신라의 힘은 흉노족의 군사·정신문화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기마문화와 샤머니즘으로 대표되는 신라의 토속적인 요소와 중국에서 들어온 漢字-불교-유교문화가 균형을 이루면서 한 덩어리가 되었을 때 신라는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사회의 생동성을 이어갔으나 중국적인 것이 압도하기 시작하면서 정신도 國力도 시들어 갔다. 초기 신라왕은 유목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샤먼(巫王)을 겸했으며, 금관은 정치권력의 상징이자 샤머니즘의 具現이기도 했다. 화랑도와 신라 지배층의 주체성은 샤머니즘이란 토양에 뿌리 박았으므로 이것이 불교·유교에 의해 약화될 때 위기를 만났다.
 
  초원의 활기도 바다의 개방성도 사라지면서 한민족은 정신과 육체가 다 같이 야위어 갔다.
 
  1945년 한반도 분단으로 남한은 사실상 섬이 되었다. 그 뒤 조선조적인 내륙문화와 결별하고 해양문화권으로 흡수된 이후 새로운 운명이 개척되기 시작했다. 한민족이 조선왕조적인 질곡에서 해방되니 잊혀졌던 흉노적인 생명력이 튀어오른 것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런 흉노적인, 유목적인, 기마민족적인 활달함을 한민족의 피 속에서 再발견하였다. 이 나라의 모습은 점점 신라를 닮아 가기 시작했다. 신라인 이후 가장 넓은 활동공간을 확보한 것이 대한민국 사람들이었다.
 
  신라인 이후 처음으로 해양세력화하였다. 신라인 이후 처음으로 自主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통일신라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은 自主국방이 가능한 일류국가로 가는 길을 달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이런 쾌속질주를 가능하게 했던 세력은 羅唐동맹을 이끌어 냈던 金春秋와 비견되는 韓美동맹의 건축가 李承晩이었고, 金庾信 및 화랑도와 닮은 朴正熙 및 국군 장교단이었다.
 
  한국인은 李承晩·朴正熙의 영도下에, 그리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세계를 무대로 하는 넓은 활동공간을 얻었다. 이 공간을 활용할 정치적 자유도 얻었다. 그래서 빠른 기동이 생겼다. 공간과 자유와 기동은 한국인의 몸속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흉노의 피를 끓게 했다. 민족 에너지의 대폭발은, 지도자들이 민족의 원형질과 유전자를 건드려 흥분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의 정직으로 敵의 굽은 곳을 치는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제2의 文武王이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통일대왕인 문무왕의 文은 중국적 지성일 것이고, 武는 흉노적 군사력일 것이다. 오늘에 맞게 해석한다면 文은 지식인·언론인·법조인이고, 武는 군인·기업인·과학자들일 것이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요소를 균형 있게 통합하여 자유통일을 쟁취한 뒤 조국 선진화로 가는 길을 개척하는 것은 정치인의 몫이다.
 
  대한민국은 李承晩·朴正熙로 대표되는 실용적인 정치지도자의 시대를 1993년에 마감하고 그 뒤 11년간 조선조적인 문민정치 시대를 다시 경험하고 있다. 명분과 위선과 내분에 치우쳐 안보와 경제와 과학을 소홀하게 다루다가 외적의 침략을 부른 역사적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근대화 혁명의 시기에 대한민국이 양성한 실용·과학·합리의 정신으로써 문민 정권의 守舊性을 돌파할 것인지, 주저앉을 것인지 조국은 기로에 서 있다.
 
  이런 때 우리가 민족사로부터 지혜와 용기와 상상력을 끌어내려 한다면, 근세의 유럽인들이 로마를 연구했듯이 신라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그 신라 정신의 핵심이 바로 흉노적인 것이고 이는 한국인의 원점이자 自主의 기준점인 것이다.
 
  삼국통일 前後의 신라가 정신·물질·군사·외교 면에서 일류국가였고 민족의 제1 황금기였다면, 1948년 이후의 대한민국은 제2의 황금기이다. 경제규모 10위권, 군사력 6위권, 삶의 質 30위권의 대한민국이다. 이 두 번의 황금기를 주도한 영웅들(金春秋·金庾信·金法敏·李承晩·朴正熙·李秉喆 등)의 시대정신은 자존심·실용주의·열린 自主로 표현된다. 그 바탕을 흐르는 것은 자신의 야만성까지도 정직하고 당당하게 드러내 버리는 흉노적 기질과 이를 통제하는 合理주의의 절묘한 균형과 통합, 즉 文武의 合一인 것이다. 그 文武王은 『나는 흉노왕의 후손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했고, 金庾信은 승리의 비결이 『우리의 정직으로 敵의 굽은 곳을 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당한 正直으로 위선과 거짓을 부술 때 민족사의 제2황금기는 자유통일을 넘어 조국 선진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조회 : 9571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8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