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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를 돕다 중국 감옥에서 220일 동안 옥살이를 한 千璂元 전도사의 증언

中國감옥의 人權말살 실태를 고발한다 - 『우리 대사관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송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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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이유도 알려 주지 않고 면회도 안 시켜 줘
●갖고 있던 1500만원어치 金品 안 돌려줘
●『하루 밀가루 빵 두 개로 연명해야 하는 중국의 감옥은 人權의 사각지대』
●중국 감옥에서는 돈이면 살인자도 풀려난다
●駐中 한국대사관은 한국 국민의 대사관이기를 포기한 지 오래다
●면도를 할 수 없어 수염을 손으로 뽑았고, 세수도 할 수 없었다
  중국의 감옥은 이런 곳이다
 
 
  『하루하루를 주먹만 한 밀가루 빵 두 개로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은 人間(인간)으로서는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몸이 아파도 제때에 치료를 받을 수 없고, 약도 마음대로 구할 수 없는 중국은 그야말로 인간 세상의 지옥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탈북자 지원단체인 두리하나선교회(서울 서초구 방배2동 450) 소속 千璂元(천기원ㆍ46) 전도사는 中國의 감옥에 수감됐다가 풀려난 지 한 달이 지난 2002년 9월9일까지도 감옥생활의 惡夢(악몽)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千전도사가 감옥에 갇혀 있었던 기간은 2001년 12월29일부터 2002년 8월5일까지 220일간. 千전도사는 中國의 감옥생활에 대해 『감옥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했었다』며 몸서리를 쳤다.
 
  千전도사가 탈북자들의 中國 密出國(밀출국)을 지원한 혐의로 中國 공안당국에 체포된 것은 2001년 12월29일. 千전도사는 이에 앞서 12월24일 北韓을 탈출해 韓國으로 망명하기를 희망하는 북한 주민 12명을, 蒙古(몽골)을 거쳐 입국시킨다는 계획下에 이들과 함께 중국 吉林省(길림성) 延吉(연길)을 출발했다. 기차와 버스를 이용해 하얼빈→하이라얼을 거쳐 중국과 몽골의 접경지역에 있는 내몽골자치주 퉁치에 도착했다.
 
  이 당시 千전도사 일행은 탈북을 도와 준 세 명을 포함해 모두 16명이었다. 퉁치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 大地(대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고 한다.
 
  千전도사는 탈북자 12명에게 나침반을 주며 사전에 약속이 돼 있던 蒙古 국경수비대를 찾아가도록 설명해 준 뒤 안내원 겸 통역, 북한에 부인을 두고 온 탈북자(한국 국적 소유), 프리랜서 작가 등 다른 일행 세 명과 함께 되돌아오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택시 기사는 공안당국에 야간 통행 허가를 얻어야 한다며 공안기관(경찰서)으로 차를 몰았고, 이곳에서 억류됐다. 길고 긴 이국땅에서의 감옥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千전도사는 다음날 풀려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千璂元 전도사 중국 감옥에 갇히다
 
 
  『12월29일 中國 변방인 퉁치의 공안기관에서 한 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를 끝낸 공안원은 별다른 혐의점이 없으니 돌아가도 좋지만, 지금은 눈이 많이 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내일 떠나라고 하더군요. 저는 눈이 와도 돌아갈 수 있다며 가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공안원은 굳이 갈 수 없다며 우리 일행을 인근의 변방부대로 데려갔습니다. 12월30일 이곳에서 꼼짝없이 잡히는 신세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千전도사 일행은 변방부대로 옮겨져 밤을 지새던 중 12월30일 새벽에 이미 국경을 넘었어야 할 탈북자 12명의 모습을 보게 된다. 탈북자들은 몽골 국경수비대를 찾아가던 중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에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리자 잠시 쉬어가기 위해 유목민들이 소를 키우기 위해 파놓은 굴로 들어갔고, 이들을 수상히 여긴 유목민의 신고로 공안당국에 붙잡혔다. 탈북자들은 공안당국의 추궁을 받고 千전도사 일행의 역할을 자백했고, 이 순간 千전도사 일행에게는 「他人을 조직ㆍ운송하여 탈출시킨 혐의」(중화인민공화국 형법 제 318조)가 씌워지게 된다.
 
  千전도사 일행은 이날 오후 소지품을 모두 빼앗기고 곧바로 퉁치 감옥에 수감되었다.
 
 
  『중국의 감옥에는 변기가 없다』
 
 
  ―퉁치 감옥은 어땠습니까.
 
  『감방이 모두 여덟 개 있었습니다. 1∼7호 감방에는 남자, 8호 감방에는 여자들이 수용되어 있더군요. 저는 7호실에 수감되었습니다. 저희 일행 세 명도 각각 다른 방에 수감되었죠. 우리 일행들은 수감되면서부터 풀려날 때까지 떨어져 있었습니다.
 
  각 감방의 크기는 바닥 면적 기준으로 가로 3m, 세로 2m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감방의 복도 쪽으로는 출입문이 있고, 감방 안은 바닥의 3분의 2 정도 너비에 높이 30cm 정도인 마루판이 깔려 있었습니다. 잠을 잘 때 똑바로 누울 수가 없어 몸을 옆으로 세워 잠을 자야 했죠. 그것도 감방에 먼저 들어온 고참들이 중앙부분에 자리를 넓게 차지하고 자기 때문에 더욱 새우잠을 자야 하지요』
 
  ―퉁치 감옥의 시설은 괜찮았는지요.
 
  『말도 마십시오. 퉁치라는 곳이 원래 오지 중에 오지입니다. 시설이라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감방 안에는 마루판 외에 시설이라고는 없습니다. 화장실도 없는데 무슨 시설이 있겠습니까. 높이가 40cm, 지름이 20cm 정도 되는 양철통이 있는데 이 통에다 대ㆍ소변을 봐야 합니다』
 
  ―감방 안에서 양철통에 대ㆍ소변을 봤다면 다른 수감자들이 그 장면을 다 본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대변을 양철통에 앉아 보면 엉덩이가 아프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대ㆍ소변을 해결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였습니다. 다른 수감자들의 코앞에 앉아 대변을 보는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정말 죽을 노릇이었습니다. 대변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냄새는 또 어떻구요. 양철통에 걸터앉아 대변을 보려면 엉덩이도 무척 아픕니다. 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요령이 생겨 신발을 양철통 위에 놓고 그 위에 앉아 볼일을 봤죠.
 
  제가 수감된 뒤 5일 만에 처음으로 대변을 보는데, 함께 있던 수감자들이 신기한 듯 마주보고 앉아 저를 쳐다보더군요. 순간적으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퉁치의 감옥생활 중 대변을 보는 것이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휴지도 지급해 주지 않아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 지역 출신들은 외부에서 휴지를 들여와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휴지를 나눠 주지는 않았습니다. 자기들도 외부에서 돈을 주고 사온 것이라는 생각에서였겠지요』
 
  千전도사는 휴지가 없어 처음에는 그 지역 출신들이 사용하고 버리려는 걸레 같은 것을 휴지 대용으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사용하기도 하고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휴지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
 
  그러나 감옥에도 인정은 있는 법. 千전도사는 『수감기간이 늘어나면서 다른 수감자들과 조금씩 친해지자 자신들이 사용하던 휴지를 나눠 주었다』면서 『비록 손바닥 크기 정도씩 주었지만 너무나도 고마웠다』고 전했다.
 
 
  『세수물도 안 주었다』
 
 
  ―날씨가 매우 추웠을 텐데, 난방은 들어왔는지요.
 
  『난방은 들어오기는 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어요. 난방은 새벽 4시, 오전 11시, 오후 4시, 밤 11시 등 하루 네 차례 들어옵니다. 워낙 추운 지방이기 때문에 난방이 끊기면 금방 추워집니다. 추워서 잠도 제대로 자기 어려운 지경이었죠.
 
  수감자들에게 군용담요 비슷한 것을 하나씩 지급해 주었는데, 세탁을 하지 않아 역겨운 냄새가 심하게 풍기더군요. 저는 담요를 둘둘 말아 베개로 삼고 마룻바닥에 누워 이불도 없이 그냥 지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수감자들은 그 지역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잠도 잘 자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집에서 이불을 가져오기도 했구요.
 
  저는 비록 육체적으로 괴롭기는 했지만 곧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대로 버틸 수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억류돼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럼 전도사께서 있던 방에는 어떤 사람들이 수감돼 있었습니까?
 
  『몽골족이 네 명, 한족이 세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절도범입니다. 양을 한 마리 또는 두 마리 훔치다 붙잡혔거나 말을 훔친 사람들이었죠. 말을 네 마리 훔치다 붙잡혀 7년 징역형을 받은 수감자와 10년 징역형을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10년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2년째 그곳에 수감돼 있었다고 하더군요. 음식을 훔쳐 먹다 붙잡힌 사람도 있었구요』
 
  ―세수와 면도는 할 수 있었는지요(이 대목에서 千전도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과 저녁에 주먹만 한 만두를 하나씩 줍니다. 이것이 수감자에게 지급하는 음식물의 전부입니다. 이때 조그마한 양동이에다 미지근한 물을 함께 줍니다. 이 물도 食水(식수)로 적합한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석회가루 같은 것이 바닥에 가라앉습니다.
 
  만두와 함께 먹고 남은 물로 고양이식 세수를 하는데, 이것은 고참들만의 특권입니다. 졸병들에게는 차례가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세수를 하지 못하는 것이죠.
 
  면도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턱수염이 자라나 보기가 싫었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염이 어느 정도 자라면 손으로 뽑았습니다』
 
  ―중국의 감옥에서도 고참과 졸병의 서열이 확실한 것 같군요.
 
  『저는 감옥이라는 곳을 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구타행위는 없었습니다.
 
  변기통은 매일 오전에 한 번, 저녁에 한 번씩만 비우도록 규정돼 있습니다. 제가 제일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변기통을 비우는 것은 제 차지였지요. 청소 등 허드렛일도 제가 했구요. 양철통의 뚜껑이 있기는 하지만, 울퉁불퉁해 똑바로 닫을 수가 없어 냄새가 많이 났었죠』
 
 
  『駐中 한국대사관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中國은 만두로 유명한 나라인데, 만두 맛이 좋았겠군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만두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중국식 발음으로 「만투」라고 하는데, 그냥 밀가루로 만든 빵과 비슷한 것입니다.
 
  저는 수감된 뒤 15일이 지나도록 이 빵을 먹지 못했습니다. 제가 빵을 먹지 못하니까 다른 수감자들이 아주 좋아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나눠 먹을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지방 사람들이 하루에 빵 두 조각씩 먹고 어떻게 1~2년을 감옥에서 버티는 지 정말 신기하더군요』
 
  ―감옥생활에서의 하루 일과는 어떠했습니까. 운동시간은 주어졌겠지요.
 
  『일과라고 할 게 뭐 있나요. 오전과 오후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자기 전까지 마루판 위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운동도 못 합니다. 마루판 밑으로 내려가 감방 안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운동의 전부였습니다』
 
  ―千전도사께서는 2001년 12월30일에 수감돼 2002년 1월25일까지 퉁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도대체 혐의가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제가 무슨 혐의로 붙잡혀 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물론 외부와의 연락도 일체 할 수 없었습니다. 혐의가 무엇인지, 언제 나갈 수 있는지, 나갈 수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단 한 마디로 해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친인척과 교회 관계자들도 저의 生死 여부를 몰라 걱정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외국인을 이처럼 막무가내식으로 가둬놓아도 되는 것입니까. 중국의 감옥 안에서는 人權(인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千전도사는 『퉁치 감옥에 수감돼 있던 기간 동안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이 찾아온 적이 없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中國에 韓國의 대사관이 있느냐? 나는 美國, 日本, 北韓의 대사관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한국대사관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며 駐中 한국대사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놨다. 「한국대사관」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千전도사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千전도사는 『어떻게 자기 나라 국민이 다른 나라에서 붙잡혀 수감돼 있는데, 그렇게 나몰라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도대체 駐中 한국대사관은 어느 나라 국민들의 권익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나와 있는 기관인지 모르겠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그러면 퉁치 감옥에서는 중국 공안당국 등으로부터 한 번도 조사를 받지 않았나요.
 
  『2002년 1월5일에 처음으로 조사를 받았고 이후 1월10일과 13일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공안원과 軍 관계자 등으로부터 조사를 받았습니다. 「중국에 왜 왔느냐」, 「왜 탈북자들을 불법으로 빼돌리려 했느냐」는 등의 질문만을 되풀이 했습니다』
 
 
  인권의 사각지대
 
 
  ―1월25일 퉁치 감옥에서 역시 내몽골자치구인 하이라얼 감옥으로 이송됐는데, 이송 사실은 언제 알았습니까.
 
  『하이라얼 감옥으로 이송되는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이날 석방되는 줄 알았지요. 이날 오후 5시쯤 공안원들이 감옥 안으로 들어오더니 갑자기 각 감방에 흩어져 있던 우리 일행 네 명에게 개인 짐을 다 챙겨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이제야 석방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더군요.
 
  軍 관계자도 우리에게 「당신들의 옷과 소지품 등을 돌려줘야 하는데, 담당자가 없기 때문에 나중에 돌려 주겠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정말 석방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개인 소지품 등은 일단 오늘 여기서 나간 뒤 여관에서 자고 내일이나 모레쯤 와서 찾아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우리 일행을 한 명씩 公安用(공안용) 차 네 대에 태우더라구요.
 
  우리가 석방되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로 데려가는지, 전혀 얘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에 머리가 쭈삣 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중국이 개인의 인격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이때 실감했습니다.
 
  네 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갔는데, 그곳에 도착을 해서야 하이라얼 감옥으로 이송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2002년 8월5일 석방될 때까지 이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럼, 탈출하려다 붙잡혔던 탈북자 12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중에 안 것이지만, 2001년 12월30일에 우리 일행 네 명은 퉁치 감옥으로 이송됐고, 탈북자 12명은 그 다음날인 12월31일에 滿洲里(만주리) 수용소로 이송됐습니다. 그 뒤 2002년 7월22일에 다시 두만강 접경지역인 吉林省 圖們(도문)의 수용소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이들에 대한 소식은 조금씩 듣기는 했지만, 정확성에 자신이 없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탈북자 중 임산부는 어떻게 되었는지요.
 
  『뒤늦게 확인한 소식입니다만, 이들 부부는 2002년 1월22일 北送(북송)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임산부가 2월2일에 딸을 낳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임산부가 딸을 낳은 것이 왜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북한에서는 탈북여성이 임신을 하면 보통 강제로 유산을 시킵니다. 절대로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외부에 나가 있으면서 누구의 씨를 받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 한민족의 순수성이 훼손당할 우려가 높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탈북자 대부분 이 부문에 대해 동일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하이라얼 감옥 얘기로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하이라얼의 감옥은 퉁치감옥과 많이 달랐습니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하이라얼 감옥에는 감방이 12개가 있었습니다. 저는 7호실에 수감됐었는데, 다음날인 26일에 감방 밖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순간 저는 이제야 정말 석방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구나 우리 일행 네 명을 감옥 안에 있는 목욕탕으로 데려갔고, 목욕을 다 하고 난 뒤에는 밥도 주었습니다. 2001년 12월29일 이후 처음으로 먹어 본 밥이었습니다. 석방이 확실했습니다.
 
  그러나 석방의 꿈은 곧 깨지고 말았습니다. 목욕하고 밥까지 먹고 나니까 우리를 한 명씩 독방에 다시 가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울컥 눈물이 나더군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우리를 목욕 시켜 주고 밥까지 준 이유가 1월28일로 예정돼 있던 한국대사관 직원과의 첫 면담때문이었다는 것을 領事(영사)를 만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이 감옥의 시설은 퉁치 감옥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하이라얼 일대는 중국에서도 날씨가 가장 추운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추운 지방입니다. 겨울에는 따뜻한 날일 경우 영하 35도, 추운 날에는 영하 40∼50도까지 내려가는 極寒(극한)지역입니다』
 
  ―독방의 크기가 어느 정도입니까.
 
  『감방의 크기는 여러 명이 있는 곳과 비슷합니다. 다만 수감자가 한 명이라는 것 뿐이지요. 독방에 수감되니까 그런 대로 기분은 괜찮더라구요. 우선은 내 마음대로 넓게 잘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음식은 퉁치 감옥과 차이가 있던가요.
 
  『「만투」라는 중국식 밀가루 빵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모양과 색깔이 조금 달랐습니다. 퉁치 감옥에서 준 밀가루 빵은 수십 년 묵은 밀가루로 만든 것 같았는데, 하이라얼 감옥에서 주는 것은 색깔이 약간 더 하얀 빛깔을 띠었던 것 같습니다』
 
  千전도사는 『하이라얼은 몽골과 중국의 국경지역 중 인구면에서 가장 큰 곳이며 인구는 약 20만 명 정도』라고 했다. 『만주리는 12만 명, 퉁치는 6만 명 정도이며 이들 변방에도 각각 감옥이 있다』고 전했다.
 
  ―하이라얼 감옥에서도 구타 등 신체적 고통을 겪는 일은 없었나요.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가족들과 연락을 할 수 없고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책도 보지 못했구요』
 
 
  돈이면 살인자도 풀려난다?
 
 
  ―하이라얼 감옥에서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됩니까.
 
  『새벽 4시30분에 기상을 해 침구를 정리합니다. 침구라야 담요 하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오전 7시에 아침을 먹고, 아침이래야 역시 빵 한 개이지만 말입니다. 7시30분부터 30분간 점호준비를 하고 8시에 아침 점호를 하게 됩니다』
 
  ―점호는 어떤 식으로 하는지요.
 
  『일곱 명의 직원들이 감방 안으로 들어와 창살을 만져보거나 벽이나 마룻바닥에 구멍이 뚫린 곳은 없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이죠. 점호는 하루에 두 차례 실시합니다. 점호가 끝나면 화장실 이용시간 이외에는 꼼짝하지 못하고 오후 6시까지 正姿勢(정자세)로 앉아 있어야 합니다. 오후 9시쯤 자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5월1일부터 8월말까지, 날씨가 더운 시기에는 식사를 하루 세 차례 줍니다. 오전 11시30분에 점심을 먹고 난 뒤 오후 12시부터 2시까지는 자유시간입니다. 이 때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중국인들의 午寢(오침) 습관이 감옥에도 적용되더군요.
 
  자유시간이 끝나면 또 오후 6시까지 正姿勢로 앉아 있어야 합니다』
 
  ―감방 안에서 마냥 앉아 있는 것이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겠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돈이면 사형수도 살려내는 곳입니다. 처음에는 성경책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성경책은 중국에서 禁書(금서)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돈을 조금 주니까 성경책을 보게 해주더군요.
 
  제가 퉁치 감옥에 있을 때 4호 감방에 살인범이 들어왔는데, 20일 만에 2만 위안을 내고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여성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5만 위안 벌금형을 받았는데, 살인범이 2만 위안을 내고 나갔다는 얘기를 변기통을 비우러 갔다가 듣고는 4일 동안 斷食(단식) 투쟁을 했습니다. 이때의 벌금이라는 것은 정식 재판을 통해 선고된 것이 아니라 재판 이전에 감옥 관계자 등의 선에서 정해지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죠.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조선족 여성은 「살인범이 2만 위안 내고 풀려났는데, 나는 왜 5만 위안을 내라고 하느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항의를 했습니다. 감방장을 비롯해 모두 난리가 났습니다. 조선족 여성의 단식투쟁은 감방장으로부터 「5000위안만 내면 풀어 주겠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중단됐습니다.
 
  막상 이 여성의 남편이 5000위안을 구해 오니까 감옥 관계자가 「5000위안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까 1만 위안을 내라」고 해 그 돈을 내고 풀려났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중국 감옥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수감자가 단식투쟁하는 것을 가장 무서워 한다는 것입니다. 수감자가 죽을 경우 책임추궁을 당하기 때문이지요』
 
 
  단식투쟁에 돌입하다
 
 
  ―전도사께서도 퉁치 감옥에 있을 때 외부로 연락이 돼 돈만 마련됐더라면 풀려날 수 있었겠네요.
 
  『당연히 그렇게 되었겠죠. 단식투쟁에 대한 중국 감옥 관계자들의 약점을 알고 저도 3월1일부터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일행 중 저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죄가 없기 때문에 풀어달라, 만약 풀어 주지 않으면 풀어 줄 때까지 단식을 하겠다고 감옥 관계자에게 통보를 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금식기도를 자주 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단식투쟁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단식투쟁 4일째 되는 날에 공안과 검찰, 감옥 관계자 등이 함께 저를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저에게 「약을 주고 밥도 줄테니 단식을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제가 일행 중 세 명을 풀어주지 않으면 단식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버텼죠.
 
  단식 8일째인 3월8일 공안과 검찰 관계자 여섯 명이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벌금 5만 위안씩 내면 두 명(프리랜서 작가와 한국국적 탈북 귀순자)을 풀어 줄 테니 단식을 중단하라」고 하더군요. 3월9일 10만 위안을 지불하자 3월11일 두 명을 석방시켜 주었습니다.
 
  두리하나선교회 측에서 선임한 中國人 변호사가 非공식적으로 저를 찾아와 잠시 만나고 갔습니다. 이때 제가 변호사를 처음으로 만나 외부의 소식을 조금이나마 듣게 되었지요. 중국에서는 피의자가 정식 起訴(기소)되기 전에는 변호사와의 면담이 금지돼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의 경우 보통 변호사 선임비용으로 5000위안을 지불하는데, 이 변호사에게는 1차로 2만 위안을 주었고 사건이 끝나면 1만 위안을 더 주기로 했습니다. 물론 변호사가 저를 몰래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감옥 관계자에게 뒷돈을 주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몸이 약한 편이라 날씨가 추우면 감기에 잘 걸리고 편도선이 자주 붓기도 합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자주 아팠습니다. 감옥 관계자들에게 아무리 사정을 해도 병원에 데려가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감옥 관계자들에게 700∼1000위안씩 주고 병원이나 약국에 갔다 오곤 했습니다』
 
  ―정식으로 기소가 된 것은 언제입니까.
 
  『6월18일입니다. 변호사와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6월21일이구요. 변호사가 이날 저에게 「돈을 안 쓰면 7년 정도의 징역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뒷돈의 액수는 정확하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제 느낌으로는 10만 위안 정도를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변호사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변호사가 저에게 「이미 약속을 했는데, 돈을 쓰지 않으면 내 입장이 곤란해진다」며 도리어 저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변호사의 제의를 거부했죠』
 
  ―전도사께서 가족을 처음 만난 것은 언제죠.
 
  『6월22일이었습니다. 감방 안의 창문을 통해 감옥 울타리 밖에 서 있는 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때에도 변호사를 통해 2000위안의 뒷돈을 주었습니다. 가족을 가까이서 본 것은 7월8일 법정에서였습니다.
 
  하여튼 중국의 공안이나 검찰, 법원 관계자들은 돈에 관한 한 투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공안원에게 붙잡혔던 당시 美貨 2000달러, 한국 돈 200만원, 중국 돈 3만 위안과 디지털 카메라, 비디오 카메라, 녹음기 등 약 1500만원어치(한국 원화 기준)을 가지고 있었는데, 추방당할 때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감옥에서 아들을 군대에 보낸 千전도사의 눈물
 
 
  ―감옥에 수감돼 있을 때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은 무엇인지요.
 
  『저는 아내와 이혼을 한 이후 아들과 딸을 키우고 있습니다. 아들(23)이 지난 5월18일 軍에 입대를 했습니다. 이 소식을 그 전날인 17일 변호사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종이와 볼펜을 빌려서 감옥장에게 長文(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엄마도 없이 자란 아들이다. 전화 한 통화만 하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는데, 거절당했습니다. 그 애도 중국 정부와 공안기관 등에 편지를 보내 軍에 입대하기 전에 저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이것이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아팠어요』
 
  ―하이라얼 감옥에서는 대변을 마음대로 볼 수 있었나요.
 
  『아닙니다. 변기를 감방 안에 들여다 놓을 때도 있었고 변기통을 주지 않고 감옥 內 화장실을 사용토록 하기도 했습니다. 변기통을 주지 않을 때 가장 큰 문제는 화장실 사용시간이 오전 7시30분과 오후 2시30분으로 정해져 있다는 점입니다. 화장실 가는 시간을 맞추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새벽에 화장실을 가고 싶은 것을 참느라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고문도 그런 고문은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화가 나 감옥 관계자에게 항의를 했더니 「중국 법은 다 이래」라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중국은 이 한마디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 밖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도대체 제가 언제 이곳을 나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구요. 변호사도 한국말을 할 줄 몰랐습니다. 조선족 변호사나 우리나라 변호사를 선임하려고 했지만, 외국인 변호사는 안 된다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이라얼 감옥에 수감돼 있는 동안 駐中 한국대사관은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단연코, 우리 대사관은 저를 도와 준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하이라얼 감옥으로 이송된 뒤 4일이 지나서 대사관의 領事가 찾아왔습니다. 10분 정도 면담을 하고 갔고, 7월8일 재판 당일에 領事가 법정에 나온 것이 전부입니다』
 
  ―駐中 한국대사관의 領事를 만났을 때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습니까.
 
  『제가 낯선 他國에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領事에게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겠어요. 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가족들이 모른다. 나의 현재 상황만이라도 가족들에게 알려 달라고 간절한 심정으로 부탁을 했습니다.
 
  억류상태가 언제 풀릴 것인지와 중국 당국의 이같은 행위가 분명 외국인에 대한 중대한 인권침해라는 점, 그리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나라 정부도 곤란해질 우려가 있다는 점 등을 들어 하루빨리 풀려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는데 領事는 「(우리나라 정부의 입장이) 상당히 곤란하게 될 것 같다. 정확히는 모르겠다」는 말만 하고 갔습니다』
 
  ―領事가 전도사께 물은 것은 어떤 내용들이었는지요.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는 등의 통상적인 말만 몇 마디 했을 뿐입니다』
 
  千전도사는 한국대사관의 領事가 있는 자리에서 함께 배석한 中國 관리에게 『가족들에게 나의 상황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더니, 그 관리는 『알려 줄 때가 되면 알려준다』는 무성의한 말만 내뱉고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5만 위안의 벌금과 강제추방
 
 
  ―재판이 열린 날 법정에 온 대사관 직원은 어떤 입장을 보이던가요.
 
  『대사관 직원은 재판을 방청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선족 통역을 통해 진술하는 내용이 재판장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대사관 직원에게 전했더니, 저의 이같은 입장을 재판장에게 전달을 해주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통역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재판을 통해 벌금 5만 위안과 추방명령을 받았는데, 재판 이후부터 국내로 돌아오기까지는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재판이 끝난 뒤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어 대사관 측에 중국 당국에 압수당한 여권을 빨리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와 함께 중국 당국에 빼앗긴 저의 돈과 물건들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는 부탁도 했구요.
 
  그런데 대사관 측은 「알았다」는 말만 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권은 제가 강제추방을 당한 8월21일 韓國行 비행기에 탑승하기 직전 중국 공안원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저의 소지품과 돈은 전혀 돌려받지 못했구요.
 
  그 뒤 제가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소지품과 돈은 못 돌려받는다 하더라도 연락처가 입력돼 있는 전자수첩만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다시 부탁을 했습니다. 대사관 측은 얼마 뒤 저에게 전화를 걸어 「도저히 안 준다고 그럽니다」라고만 했을 뿐입니다』
 
  千전도사는 재판 진행 도중 자신의 변호사로부터 『「선처를 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서류가 있으면 재판을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대사관에 이같은 부탁을 했는데도 감감 무소식이었다』며 한국대사관의 태도를 원망했다.
 
  ―金大中 정부의 탈북자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탈북자 문제를 인권문제로 승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탈북자들에게 난민지위를 부여하라고 中國 정부에 당당히 요구해야 합니다. 정부에서 계속 꽁무니만 빼고 있으니, 무엇이 되겠습니까.
 
  金大中 정부의 불투명하고 低자세적인 탈북자들에 대한 태도와 정책 때문에 탈북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점을 정부 관계자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千璂元 전도사는 경북 경산에서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격적으로 北韓 탈북자들을 돕기 시작한 것은 1999년 10월부터였다. 나이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형제들마저 누나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사망하는 不運(불운)을 겪었다. 대구 경북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이후 대학진학의 꿈을 접고 학원을 다니면서 칵테일 기술을 배워 호텔에 취직했다.
 
  결혼에는 실패했으나 1남1녀의 아버지로서 평범하게 생활하던 중 목회자의 길을 택했고, 나이 사십에 신학교에 진학했다. 가정사정으로 인해 신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자 휴학을 하고 교회에서 일반 목회활동을 하던 중 1999년 中國 延吉(연길)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이곳에서 탈북자들의 비참한 생활실태를 알게 됐고, 이 때부터 탈북자들을 돕기 시작했다는 것. 지금까지 千전도사가 직·간접적으로 한국으로 데려온 탈북자 수는 약 150명이라고 한다.●
 
 
 
  <천기원 전도사 중국 억류사건 일지>
 
 
  2001년 12월24일:탈북자 12명과 함께 중국 연길 출발
 
  2001년 12월28일:중국 내몽골자치구 하이라얼 도착
 
  2001년 12월29일:택시 운전기사의 신고로 퉁치 공안기관에서 조사 받음
 
  2001년 12월30일:퉁치감옥으로 이송, 탈북자 12명 공안기관에 적발
 
  2002년 01월25일:하이라얼 감옥으로 이송
 
  2002년 01월28일:駐中 한국대사관 영사와 첫 면담
 
  2002년 03월1일:단식투쟁 돌입(일행 세 명 석방 요구)
 
  2002년 01월04일:중국의 공안ㆍ검찰ㆍ감옥 관계자 합동으로 千전도사 조사
 
  2002년 01월08일:중국 검찰과 공안기관, 일행 중 두 명 석방의사 전달
 
  2002년 01월11일:일행 중 두 명 석방(프리랜서 작가와 한국 국적 탈북 귀순자)
 
  2002년 04월26일:중국인 변호사 非공식 첫 면담
 
  2002년 06월18일:정식 기소
 
  2002년 01월21일:변호사 첫 공식 면담
 
  2002년 01월22일:감방 창문을 통해 딸과 만남
 
  2002년 07월8일:재판(벌금 5만 위안과 강제추방 선고)
 
  2002년 08월5일:석방
 
  2002년 01월21일:중국에서 강제 추방
 
  2002년 01월22일:인천국제공항 통해 귀국
 
 
  <바로잡음>
  2002년 9월호 「手記/한 운동권 변호사의 고백」 제하 기사의 필자 徐錫九 변호사의 경력 소개 중 「공군대위」 전역은 「공군중위」로 바로잡고, 대구지방변호사회 부회장직은 현직이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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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연    (2018-02-08)     수정   삭제 찬성 : 4   반대 : 1
천기원 목사님이 전도사시절에 중국공안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을때의 이야기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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