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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金大中 연구(3) (禹鍾昌 기자)

「암살기도」라는 金大中 교통사고 30년 만의 현장 검증

우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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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을 찾아서
 
 
  아침부터 전국에 짙은 안개가 낀 2001년 3월2일 오후 4시경, 기자(禹鍾昌)는 木浦市(목포시) 외곽에 위치한 삼향洞의 「대양 검문소」 앞에 서 있었다. 이 검문소는 木浦에서 務安(무안), 羅州(나주)를 거쳐 光州(광주)로 가는 4차선 옛 국도와 木浦에서 서울로 향하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갈라지는 3거리에 있다. 「대양 검문소」는 木浦와 외지를 연결하는 관문이었다.
 
  사건 발생 그날, 東亞日報는 이렇게 보도했다.
 
  <【木浦】 (1971년 5월)24일 오전 9시 반경 전남 무안郡 삼양面 대양里 앞길에서 木浦를 떠나 光州로 가던 신민당 前 대통령 후보 金大中씨의 승용차 서울자3-8797호 크라운(운전사 양승만·28)이 앞에서 오던 경기 영 7-4755호 트럭(운전사 權重億·36)을 피하려다 높이 2m의 길옆 개울로 처박혀 金씨는 오른손에 찰과상을 입고, 비서실장 李明雨(이명우·45)씨와 비서관 權魯甲(권노갑·45)씨가 각각 중경상을 입었다.
 
  또 뒤따라오던 木浦 다니엘 회사 소속 전남 영 1-2160호 코로나(운전사 崔정로·29)도 이 트럭과 정면 충돌, 운전사 崔씨가 현장에서 숨졌다. 金씨는 인근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후 열차 편으로 서울로 떠났다>
 
  이날字 朝鮮日報 보도도 東亞日報와 비슷했다. 두 신문은 사고 현장을 「전남 무안군 삼양면 대양리 앞길」이라고 막연하게 보도했다(편집자 注: 두 신문은 삼향面을 삼양面으로 誤記했다). 다음날 續報(속보)에 따르면 현장은 「무안경찰서에서 10분 거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단서를 갖고 기자는 목포~광주 간 國道에서 務安郡 일대를 집중적으로 살폈다.
 
 
  金大中 대통령을 치료한 李和東씨 가족
 
 
  무안郡 청계面 남안里에서 이장을 지냈다는 정판성씨로부터 『지산재 부근의 군부대 근처에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지산재 밑의 마을에서 40년을 살고 있다는 한 할머니가 『대양검문소 부근인데 거기 가서 물어보면 알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한 金大中 대통령 일행을 최초 치료해 준 집의 아들」이라는 李道根(이도근ㆍ54)씨가 나타났다. 『金大中씨의 생명을 구해 주었기 때문에 金大中씨가 대통령이 되면 맨먼저 인사받을 집』이라고 주민들이 이야기하던 그 집의 아들이었다. 교통사고 당시 논 한가운데 외따로 서 있던 농가의 주인이 李씨의 부친 李和東(이화동) 노인이라는 것이다.
 
  李道根씨에게 『金大中 대통령의 경호원을 지낸 李동신씨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李씨는 『우리 아버지가 李동신씨 당숙이고, 李동신씨는 나한테 6촌 형이 된다』고 말했다. 李씨는 『사고 당시 나는 집에 없었고, 형이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며 金大中 대통령을 치료한 경위는 자기 형이 잘 안다고 말했다.
 
  李道根씨의 형 李敬根(이경근·57)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金大中씨가 탄 승용차는 트럭에 부딪히는 순간 약 5m 가량을 공중에 붕떠서, 개울을 건너 논에 떨어졌습니다. 검문소 자리가 옛날 개울이었죠. 검문소 옆, 현대주유소가 들어 서 있는 곳이 당시 우리 집이었습니다. 그 일대에서는 한 채밖에 없었죠. 그때 내 나이 스물 일곱이었소. 우리 집에 들어올 때 金大中씨는 재건복을 입고 있었는데 옷이 찢어지고 피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어깨도 부상을 입었고요. 마침 우리 집에는 내 아들 기저귀감으로 끊어놓은 광목이 있었어요. 그 광목으로 피를 막았습니다』
 
  ―그날 날씨는 어떠했습니까.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그날, 교통사고가 참 많이 발생했습니다』
 
  ―도로 상태는 어땠습니까.
 
  『1968년부터 2차선 확장공사가 시작되었고 1971년경에 아스팔트 포장이 이뤄졌습니다. 아스팔트 포장이 되고나서 얼마 안 돼 金大中씨 교통사고가 일어났습니다. S자 커브길인데다 도로가 갓 포장되어서 빗길에 미끄러지는 사고가 많았습니다. 당시 대양里는 사고 다발지역이었습니다』
 
  교통사고 현장인 대양검문소 앞 도로는 왕복 8차선의 大路(대로)로 넓혀져 있었다. 30년의 세월이 도로를 넓혀놓기는 했으나 주변의 山勢(산세)까지는 바꾸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이곳 지형은 참 묘했다. 약 100m 가량의 평지를 사이에 두고,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만나고 있었고, 평지 중간 지점에 대양 검문소가 있었다.
 
  목격자들의 증언과 사고현장 지형을 종합할 때 이 사고는 목포에서 광주 방향으로 고갯마루에서 내려오던 金大中 의원 승용차와, 맞은 편 내리막길 뒤편에서 올라와 평지로 들어서던 트럭이 평지에서 맞부딪친 것이다(그림 참조).
 
  목포에서 광주 쪽으로 가는 고갯마루에서는 위치가 높기 때문에 전방을 살필 수 있으나 내려가는 순간부터 커브길에 접어들어 시야가 막히고 평지에 이르면 맞은 편 내리막길의 뒤편에서 올라오는 차량을 보기 힘든, 교묘한 사각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평지 중간인 대양검문소 앞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점으로 미뤄, 고갯마루에서 커브길을 내려오던 金大中 의원 승용차와 내리막길 뒤편에서 올라오던 화물트럭은 100m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달려온 셈이다.
 
  기자는 당시 수사검사였던 許京萬 전남지사를 그의 집무실에서 만나 사고 상황을 再확인해 보았다.
 
 
  추월, 중앙선 침범 여부
 
 
  이 교통사고의 직접적인 원인 규명과 관련된 쟁점의 하나는 「추월」 여부다. 許京萬 지사는 金大中 의원 승용차가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앞에 가던 택시를 추월한 후 자기 차선을 달리다가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金珍培(김진배ㆍ민주당 국회의원)씨가 쓴 「金大中 受難史-인동초의 새벽」(1987년 10월31일 발행)에는 택시가 金大中 의원의 승용차를 추월하려다 사고가 일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金大中 대통령 취임 1주년이었던 1999년 2월25일에 발행된 「김대중 자서전①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라는 책에도 金대통령이 탄 승용차의 뒤쪽에서 달려오던 택시가 경호차를 추월해 金의원 승용차 바로 뒤에 붙어서 달리다가 사고가 났다고 기록, 許지사 주장과 상황이 다르다. 인용하면 이렇다.
 
  <光州·木浦 간 도로의 중간 지점인 務安郡 지점에 들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택시 한 대가 내(金大中) 차와 뒤의 경호차 사이에 끼어들었다. 택시에는 앞 좌석에 3명, 뒷좌석에 3명이 타고 있었다. 신혼부부인 그들은 날 보더니 반가워서 아는 체를 하려고 끼어든 것이었다>
 
  許지사는 月刊朝鮮에 대한 반론문에서 金大中 의원 승용차는 택시를 추월한 후에 자기 차선으로 진입해 정상적으로 달리고 있던 중 잠시 후에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했으나 金大中 의원 승용차가 택시를 추월한 구체적인 지점을 반론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金대통령 자서전에도 나와 있지만 사고 당시 金大中 의원은 경호차 두 대의 경호를 받으며 광주로 가고 있었다. 金의원 승용차에는 앞좌석에 운전사 양승만씨와 비서실장 李明雨씨가 탔고, 뒷좌석에는 金의원과 비서 權魯甲씨가 앉아 있었다.
 
 
  경호원 증언:『택시의 추월시도를 막다가…』
 
 
  金의원이 탄 승용차 바로 뒤에는 경호원 咸允植(함윤식), 李동신씨 등이 탄 경호용 택시와 金의원 주치의 이경호(李姬鎬 여사의 오빠)씨가 탄 경호용 택시가 뒤따르고 있었다.
 
  咸씨는 「동교동 24시」란 책에서 이 교통사고를 언급한 적이 있다. 다음은 咸允植씨와의 일문일답.
 
  ―사고 당시 金대통령을 경호한 차량은 몇 대나 됩니까.
 
  『그날은 목포공항에서 항공편으로 상경할 계획이어서 승용차와 운전사들은 하루 전날 서울로 출발시켰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결항하는 바람에 목포에서 광주공항으로 가기 위해 크라운 승용차 한 대와 택시 두 대를 빌렸습니다. 金大中씨가 탄 크라운 승용차 운전사 양승만씨는 렌터카 회사 소속이었습니다. 선두 1호차에 金大中씨, 2호차에 나를 비롯한 경호원, 3호차에 주치의 이경호씨가 타고 광주를 향해 일렬로 달렸습니다』
 
  ―왜 경호차가 맨 앞에 나서지 않았습니까.
 
  『대절한 택시였기 때문에 앞장 서지를 못하고 1호차 바로 뒤에 따라 붙은 겁니다』
 
  ―날씨는 어땠습니까.
 
  『가랑비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세찬 비도 아니었지만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시야가 뿌옇게 흐린 상태였어요』
 
  ─사고 직전의 상황을 말해 주십시오.
 
  『저는 경호를 맡은 사람으로서 2호차 택시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서 선두 1호차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택시 한 대가 3호차를 추월한 후 제가 탄 2호차 뒤에서 깜박이를 켜면서 추월을 시도했습니다. 저는 운전사에게 추월시켜 주라고 지시했습니다. 제 차를 추월한 택시는 다시 라이트를 켰다 껐다 하면서 선두 1호차를 추월하기 위해 몇 차례 차선을 넘나들었습니다. 편도 1차선 도로인데 그때마다 1호차가 추월을 막았습니다. 저러다가 사고가 날까 싶어 저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1호차에게 택시를 먼저 통과시켜 주라는 신호를 보냈는데, 1호차(金大中 의원이 탄 크라운 차) 운전사가 계속 추월을 막았던 것입니다. 그때 제가 클랙슨을 울리며 강력하게 택시를 추월시켜 주라고 의사표시를 해야 했는데 그걸 못했어요. 그러다가 사고가 났던 겁니다. 제가 강하게 제지 못해 몇 사람이 죽은 것을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사고 지점에서는 어느 차가 중앙선을 넘었습니까.
 
  『택시가 추월을 시도하고 있는데 고갯길이 나타났습니다. 택시는 속력을 내며 1호차 뒤에 바짝 따라 붙은 뒤 고개를 넘어 내리막 길로 들어서자 추월하기 위해 중앙선을 넘어 왼쪽으로 달렸습니다. 그러자 1호차도 추월을 막으려고 왼쪽 차선으로 들어갔습니다. 두 차 다 중앙선을 넘어버렸죠. 그 순간 트럭의 윗 덮개가 보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앞에서 트럭이 나타났습니다. 피하기가 힘든 아주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중앙선을 침범한 1호차와 택시가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1호차 운전사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자기 차선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왼쪽 뒷부분을 트럭에 부딪치며 논에 떨어졌고, 1호차 뒤에 있던 택시만 트럭과 정면 충돌했던 것입니다. 트럭이 1호차 왼쪽 뒷부분과 충돌했기 때문에 1호차 뒷좌석 왼쪽에 타고 있던 權魯甲씨가 왼쪽 목에 부상을 입었던 것입니다.
 
  사고는 1호차가 택시의 추월을 막으려 하다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사고 후 렌트한 승용차 운전사에게 「택시를 먼저 보내 주라고 그렇게 신호했는데도 듣지 않고 추월경쟁을 벌여 사고를 냈느냐」며 굉장히 혼내 주었습니다. 그 운전사는 호남의 존경받는 정치지도자 金大中씨를 자기 차에 모셨다는 우쭐한 기분에서 양보해 주지 않았던 것으로 봅니다』
 
 
  『맞은 편 트럭 보기 힘든 상황』
 
 
  ―맞은 편에서 오던 트럭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까.
 
  『제가 탄 2호차는 고갯마루를 넘어서 커브길을 내려가는 중이었고, 金大中씨가 탄 차는 평지로 접어드는 상황이었습니다. 1호차보다 높은 위치에 있던 제가 처음 본 것이 트럭의 윗 덮개였습니다. 그러니 평지에서는 맞은 편에서 올라오던 트럭을 보기 힘든 상황이었죠』
 
  ―사고의 직접적 원인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金大中씨 탄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어 택시의 추월을 막은 겁니다. 택시를 추월시켜 주었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고를 당한 택시에는 누가 타고 있었습니까.
 
  『추월시켜 주면서 보니까 앞자리에 운전수 외에 여자 2명, 뒷자리에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사고 직후 택시 앞자리에 타고 있던 승객의 보자기에서 터져나온 고액권이 피범벅이 되어 흩어져 있었습니다. 박살난 택시는 목포 번호판을 달고 있었습니다. 5명이 목포 택시 한 대를 대절한 것인데, 이들도 우리처럼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급하게 광주공항으로 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거액의 돈 보자기를 소지한 것으로 미뤄 상인들인 것 같았습니다. 신혼부부가 택시에 타고 있다가 즉사했다는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모르겠습니다』
 
  許京萬 당시 수사 검사(現 전남 지사)는, 자기 차선을 지키며 잘 가고 있던 金大中 의원 승용차를 맞은 편에서 오던 트럭이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해 들이받아 사고가 일어났다고 반박했다.
 
  許지사의 주장대로, 만일 트럭이 먼저 중앙선을 침범했다면 현장에서 3명을 즉사케 한 트럭운전사는 重刑(중형)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는 트럭운전사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했고, 트럭운전사는 1심에서 禁錮 8월(權씨 주장. 金大中씨는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중간에 풀려났다고 주장)이란 「가벼운」 刑을 선고받았다.
 
  이 정도로 가벼운 刑이 선고되려면 트럭 운전사 뒤에 막강한 「배후」가 있거나 검찰에 대한 「외압」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기자는 許京萬 지사에게 수사 당시 상부나 외부로부터 사건을 축소하라는 압력이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許京萬 지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뭣 때문에 검찰에 압력을 넣겠소. 내가 받아본 적도 없소. 그리고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중앙선을 침범해 3명이나 죽었는데도 禁錮 8월이라면 너무나 가볍지 않습니까.
 
  『사람이 죽었어도 합의되면 집행유예로 나가고…. 그러니까 일반적인 사건은 합의가 되면 집행유예로 나가는 상황이었어요. 형량은 조금 적게 나왔더구만요. 업무상 과실치사는 그 당시 1년을 넘지 않았어요』
 
  ―트럭운전사를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한 후 목포지청장이나 광주지검장으로부터 사건을 잘못 처리했다는 추궁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없었어요. 나는 검사 하면서 내 소신껏 일한 사람이에요』
 
  許지사에게 기자가 파악한 사고지점의 지형과 사고 당시 金大中 의원이 탄 승용차와 경호차, 그리고 택시와 트럭의 위치를 그림으로 그려 보여 주고, 택시의 추월을 막으려고 중앙선을 침범한 승용차가 사고의 직접 원인이 아닌지를 물어보았다.
 
  許지사는 『내가 그 사고를 왜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냐 하면, 동교동 집에서 金후보를 참고인으로 조사하면서 사고 원인 때문에 많이 싸웠기 때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졸다가 사고가 났다는데 어떻게 살인을 입증하나』
 
 
  『金후보는 살인음모라고 주장하고 다니고, 나는 주임검사로서 살인미수로 기소못하니까 논쟁에 대비해야 할 것 아닙니까. 나하고 金후보는 사고 원인과 추월에 대해 한참 싸웠어요. 金후보는 「이 사고는 나를 살인하려고 한 것 아니냐, 살인미수 아니냐」고 말했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과실이 있는 사고도 있다. 졸다가 사고가 났다는데 내가 어떻게 살인을 입증하냐」고 했어요. 큰 소리도 나오고 했어요.
 
  金후보 승용차가 택시의 추월을 막으려고 한 것이 사고 원인과 직결된다면 金후보 운전사를 입건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러나 경찰 조사에서부터 金후보 승용차 운전사를 입건 안했어요. 金후보 승용차가 택시를 추월한 게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추월한 것하고 사고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기자는 許지사에게 金珍培씨가 쓴 「金大中 受難史-인동초의 새벽」에 기록된 교통사고 부분을 읽어 주고 『이 책에는 택시가 金후보 승용차를 추월하려다 사고가 일어났다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許지사는 『그건 정확한 것이 아닐 거요』라고 말했다.
 
  ―최근 발간된 金대통령의 자서전(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에도 「택시가 경호차를 추월해 내 승용차를 뒤따라 왔다」고 되어 있고, 일부 목격자들도 金후보 승용차가 앞에 가던 택시를 추월한 게 아니라, 뒤따라 오던 택시가 金후보 승용차를 추월하자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어 이 택시의 추월을 막으려다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金후보 승용차가 택시보다 앞에 있었다는 점은 지사님이나 목격자들의 진술이 일치한데, 金후보 승용차가 택시를 추월한 후 자기 차선에서 정상적으로 달리고 있었다는 지사님의 주장은 일부 목격자들의 진술과 반대입니다.
 
  『목포에서 예고도 없이 비행기가 안 뜨고 서울 유세는 잡혀 있으니까, 광주비행장에 가려고 (金후보 승용차가) 속력을 냈던 것입니다. 金후보가 탄 차도 과속이었어요. 빨리 달렸다고요. 택시를 추월해서 가는데 앞에서 오던 트럭이 밀었던 것입니다』
 
  ―수사기록을 보고 말씀하는 겁니까, 기억에 의존하는 겁니까.
 
  『그건 틀림없어요. 이 문제를 가지고 金후보와 한참 싸웠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요. 金후보도 나한테는 추월 안했다고 했어요. 金후보는 추월이 사고의 원인이 된 것으로 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죽어도 (자기 차가) 추월 안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추월하고, 사고 원인하고는 상관이 없다. 왜 추월 안 했다고 하느냐」고 따진 기억이 나요』
 
  ―金후보 승용차가 택시에게 추월을 주지 않으려고 하다가 사고가 일어났다는 목격자의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트럭운전사는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까 졸음운전했다고 주장했어요』
 
  ―택시 승객이 신혼부부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뭡니까.
 
  『그런 것까지는 내가 조사하지 않았고, 경찰 수사기록에 그렇게 되어 있었어요』
 
  ―사고 현장에 흩어져 있던 피묻은 고액권들은 보았습니까.
 
  『나는 사고가 어느 정도 수습이 된 후 현장에 갔어요. 돈은 보지 못했습니다』
 
  ―사고는 왜 생겼다고 보십니까.
 
  『둘 중의 하나예요. 나도 金후보한테 그랬어요.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거리 운전하다가 졸다가 사고가 났다고 하는데 과실일 수도 있다. 본인이 자백을 안 하는데 살인미수를 입증할 수 없다. 그래서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할 수 밖에 없다」고 했어요. 나는 그때 검사 입장이었어요』
 
  ―트럭운전사가 졸음운전했다는 부분이 수사기록에 나와 있습니까.
 
  『예』
 
 
  트럭운전사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사고의 직접적 원인에 대해 許지사는 트럭이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해 金의원 승용차를 향해 돌진했다고 주장했다. 갑자기 돌진한 원인은 운전사의 졸음운전 때문이라고 했다. 부산에 살고 있는 트럭운전사 權重億씨는 최근 기자와 인터뷰에서 『졸지 않았다』고 하면서 사고 당시와 그 후를 이렇게 말했다.
 
  『(광주에서 목포 방향으로 가는 길에)고갯마루에 오르자마자 반대편에서 세단차가 중앙선을 침범, 내 차선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저로서는) 내리막의 빗길이었습니다. 왼쪽으로 돌면서 트럭이 미끄러져 내려가는데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제가 몰던 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한 세단차(여기에 金大中 의원이 타고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를 살짝 부딪치고 뒤따라오던 택시를 들이받았습니다. 경찰이 와서 확인하였지만 미끄러져 내린 스키드 마크가 쫙 나 있었습니다. 제가 세단차 운전사한테 「당신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항의했지만 그는 중앙선 침범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가 중앙선을 침범 안했으면 왜 제가 제동을 걸었겠습니까.
 
  제가 현장에서 도망갔다고 하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택시에 탄 사람들을 끌어내는 일을 했습니다. 울면서 도와달라고 소리치곤 했습니다.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 살인기도가 아닌가 하는 추궁을 받은 기억도 없습니다. 저는 이 일로 감옥에 갔다왔습니다. 1심에서 금고 8월을 선고받았을 때는 너무나 억울한 생각이 나서 항소했지만 기각되었습니다.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집사람은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까 집을 나갔습니다. 제가 두 딸을 키웠는데 학교엘 보내지 못했습니다. 10년여 전 집을 나간 뒤로는 소식이 없습니다. 저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고로 저는 죄값을 다 받았습니다』
 
  기자는 許京萬 지사에게 『이 단순한 교통사고를 살인미수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許지사는 金大中 의원이 주장했다며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날씨가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닌데 목포공항에서 비행기가 안 뜬 것부터 의심하지요. 공화당 소속 洪承萬씨가 트럭회사 회장이었다, 사고 후 서울에 올라가니까 그 시간에 이미 金후보가 죽었다는 소문이 유세장에 돌더라 등 몇 가지를 댔어요』
 
  ―근거가 있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입증할 수도 없고, 내가 조사한다고 해서 살인미수로 기소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어요』
 
  ―트럭의 소속회사인 범한화물 사장(편집자注:사장은 洪國泰씨로 그 당시 공화당 전국구의원 후보였던 洪承萬씨의 아들)은 조사했습니까.
 
  『조사 안 했어요』
 
  ―왜 안 했습니까.
 
  『사건을 보면 기소할 수 있는 건지, 없는 건지를 대충 알지 않습니까. 이 사건은 고의로 죽이려 했다 하더라도 증명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단서가 있으면 수사검사는 당연히 밝혀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운전사를) 두들겨 팰 겁니까, 어쩔 겁니까. 경찰에서 못 밝히면 검찰에서 밝힌다는 게 힘들어요』
 
 
  『비행기 결항 원인은 조사하지 않았다』
 
 
  ―경찰에서 이미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다는 이야기인데요.
 
  『업무상 과실치사에 의한 교통사고로 해서 보내왔어요. 그것을 내가 살인미수로 바꿔서 수사할 자신이 없는데, 괜히 그렇게 조사하다가 밝히지 못하면 양쪽에서…』
 
  ―트럭운전사 權重億씨에게 살인기도 아니냐는 심문을 한 적 있습니까
 
  『물어봤죠. 피해자 측은 (당신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죽이려 했다고 말하는데 어떠냐고 물었더니 피곤해서 깜빡 졸다가 사고가 났다고 했어요』
 
  ―權重億씨는 기자에게 검찰에서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는데요.
 
  『(許지사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사고 당일 목포지역에는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목포공항의 비행기 결항에 대해서는 수사를 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경찰에서 만든 조서가 수사기록에 붙어 있을 거예요』
 
  ―경찰은 결항 원인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세요.
 
  『모르겠어요. 나는 결항 원인을 조사 안했어요.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 사건이었어요』
 
  ―살인미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사 안 한 것 아닙니까.
 
  『살인미수가 아니구나가 아니라, 살인미수였더라도 입증해서 유죄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어요』
 
  ―특정인을 죽이기 위해 정부가 고의적으로 항공기를 결항시켰다는 주장이 상식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나는 국회의원 하면서도 당할 것 다 당했는데요』
 
  ―피해자가 암살기도라고 주장하며 제시한 세 가지 의혹에 대해서 검찰이 수사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결국 암살기도라는 물증이 없었던 것 아닙니까.
 
  『원래 물증이 따로 있을 수가 없는 사건이에요. (범인이) 입 다물어 버리면 미궁에 빠지는 사건이지요』
 
  ―암살기도가 분명하다면 치밀하게 이뤄졌을 것 아닙니까. 예컨대 金후보 승용차의 이동 상황을 누군가가 체크해 대기중인 트럭운전사에게 알려 주어야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트럭운전사는 무전기 같은 것을 소지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물증 아니겠습니까. 혹시 트럭운전사한테서 무전기 같은 것을 발견했습니까.
 
  『…(許지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트럭운전사 옆에 조수가 타고 있었는데 조수는 조사했습니까.
 
  『(許지사는 한참 있다가) 조수는 기억이 없는데…. 조수는 기억을 못하겠어요』
 
  ―살인이라면 극소수의 인원이 극비리에 동원되는데 트럭에는 조수가 타고 있었습니다. 조수가 탑승한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許지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스키드 마크 있었다』
 
 
  ―그렇다면 암살기도라는 심증이 가는 사건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도 DJ한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졸다가 보면 남의 차선에 뛰어드는 과실 사건도 많지 않느냐」고 했어요. 본인이 자백을 안 하면 입증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만일 운전사가 졸음운전했다면 졸음이 오는 상태에서 특정 차를 겨냥해서 들이받는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운전사에게 살인의도가 있었다고 하려면 운전사가 그 길을 잘 알고 있어야 돼요. 그런데 그 길은 트럭운전사가 별로 안 다닌 길이었어요. 그러면 졸기가 힘든데…. 그(트럭운전사) 쪽에 유리하게 보이는 것들도 있었어요』
 
  ―許지사께서 쓰신 반론문에 보면 「이 사건은 고의성이 있다고 인정할 만한 중대한 과실이 있는 의문의 사건이 분명했지만」이라고 되어 있는데, 고의성이 있다고 인정할 만한 중대한 과실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누가 살인을 지시했던 안 했던 간에 눈뜨고 운전하는 사람이 노선을 침범해서 상대를 치는 것은 살인이지요. 객관적인 사건은 살인으로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재판 결과에서 판명났지만 살인이 아니고 업무상 과실치사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입증을 내가 못한 거지요. 내가 입증을 못한 것이니까 나는 殺意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말을 못한다는 거지요. 살인음모가 있었다면 내가 무능해서 못 밝힌 것이고, 살인음모가 없었다면 내가 제대로 기소한 것이지요』
 
  ―트럭운전사는 사고 직전에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말했습니다. 현장에 스키드 마크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스키드 마크는 보았습니까.
 
  『봤습니다. 브레이크를 밟았지요. 밟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안 밟았으면 자기도 차선을 넘어가서 떨어져 버렸으니까요. 충돌하는 순간에 브레이크를 밟은 거예요』
 
  ―스키드 마크가 어디에 나 있었는지 기억납니까.
 
  『지금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어요』
 
  ―스키드 마크가 어느 차선에 나 있었는지는 사고 원인을 규명하는 중요 사안입니다.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은 트럭이 맞은 편에서 오던 승용차가 중앙선을 침범한 것을 보고 브레이크를 밟았다면 스키드 마크는 오른편 차선에서부터 충돌지점 지점까지로 이어졌을 겁니다.
 
  『그것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어요』
 
  ―스키드 마크가 길게 나 있었습니까.
 
  『길지는 않았어요』
 
 
  44mm의 비가 내렸다
 
 
  ―트럭운전사 말은, 졸지도 않았고 金후보 차가 자기 차선을 침범하니까 브레이크를 밟았다는 것입니다.
 
  『그랬으면 경찰이 金후보 승용차 운전사를 입건 안 할 이유가 없는데, 입건조차 안했어요』
 
  ―사고 후에 바로 金大中 의원을 조사했습니까.
 
  『내가 현장에 갔을 때 金후보는 가버리고 없었어요. 며칠 있다가 내가 동교동에 가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어요』
 
  ―만약 살해기도가 있었다면 金大中씨가 대통령이 된 지금 다시 한 번 수사를 해서 진실을 밝혀야 되는 것 아닙니까.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기 때문에 수사기관에서는 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봐요. 살인음모가 있었다고 밝혀내더라도 처벌할 수가 없는 사건을 수사기관에서 조사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봐요.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라면 모르지요. 그러나 트럭운전사가 대통령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경우에는 공소시효와 상관없이 수사가 될 수 있는 거지요』
 
  ―명예훼손 이전에 이것은 트럭운전사의 인권유린 아닙니까.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편향된 견해라고 봅니다. 어쨌거나 트럭운전사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1971년 5월24일 목포 공항에서 항공기가 결항한 경위를 확인해 보기 위해 전국 공항을 관리하는 한국공항공단에 문의한 결과, 워낙 오래 전 일이어서 기록 자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날 목포 지방의 기상상태를 확인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교통사고 전날인 1971년 5월23일 木浦 지방의 날씨는 「구름이 많이 끼고, 降水(강수) 현상은 없었으며」, 5월24일에는 木浦에 44.4㎜의 비가 내렸다. 44.4㎜라면 상당한 양이다.
 
  항공사의 한 관계자는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비행기 이착륙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비가 오면 視程(시정)거리가 짧아지므로 안 뜰 가능성은 높다』고 말했다.
 
  당시 목포공항 항공기 운항 여부를 체크한 사람은 경호원 咸允植씨였다. 咸씨는 『목포공항 관계자로부터 「날씨가 좋지 않아 관제탑에서 계기비행시키기가 힘들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설이 좋은 광주공항에서는 비행기 이착륙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광주로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유세에서 암살설 주장
 
 
  목포 공항은 1969년에 군용 비행기 이착륙을 위한 공항으로 건설돼 1970년부터 서울에서 제주로 가는 민간 항공기의 중간 경유지로 운항되었다. 1971년 교통사고 당시의 목포공항은 문을 연 지 1년밖에 안 되는 지방 공항으로서 활주로 길이가 짧고, 안전 이착륙을 위한 시설이 미비했다.
 
  항공사 관계자들은 『해안에 인접해 있고, 산에 둘러싸인 목포공항은 지금도 돌풍이나 海霧(해무ㆍ바다 안개)와 같은 해양성 악천후에 취약하다』며 『목포공항은 여수, 속초, 포항공항과 더불어 조종사들이 이착륙에 가장 부담을 느끼는 취약공항』이라고 말했다.
 
  1998년의 통계에 따르면 목포공항의 연 평균 결항률은 13%로, 속초공항(21%) 다음으로 결항률이 높았다. 이 기간중 4월부터 6월 사이의 목포공항 결항률은 월 평균 25%를 차지, 年평균보다 높았다. 1971년 5월24일이라면 1년 중 결항률이 가장 높을 때였다.
 
  한국공항공단의 한 관계자는 『비행기 운항에 지장이 없는 날씨임에도 고의적으로 항공기를 못 뜨게 했다는 주장은 항공사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교통사고 후 李和東 노인 집에서 1차 응급조처를 받은 金大中 대통령은 무안읍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학교驛(역)」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이날 金大中 대통령은 서울 13개 지역에서 지원유세키로 계획돼 있었다. 늦게 상경한 金대통령은 팔에 붕대를 감고 朴漢相(박한상), 朴正勳(박정훈) 후보 지역구에서 유세했다.
 
  이 유세에서 金大中 의원은 자신이 탑승키로 했던 항공기가 특별한 이유없이 결항되고 트럭회사 사장이 여당 소속 전국구 의원인 점을 근거로 대며, 朴正熙 정권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교통사고를 위장한 암살을 기도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교통사고 다음날인 1971년 5월25일자 朝鮮日報 보도에 따르면 「方一弘(방일홍) 신민당 임시 대변인은 25일 金大中씨의 승용차 충돌 전복사고에 대해 『사고를 낸 트럭이 사고 지점에서 金씨 차 뒤에 따라오던 택시의 추월기미를 느꼈다면 의당 반대쪽인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어야 하는데도 왼쪽으로 급커브를 틀어 金씨 차 뒷부분을 들이받은 점 등』을 들고, 단순한 운전부주의 교통사고로 보기 어렵게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증거 없는 암살說
 
 
  金大中 대통령 취임 1주년이었던 1999년 2월25일, 「김대중 자서전①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라는 책이 출간했다. 이 책은 일본 NHK 방송 취재진이 글을 구성하고 당시 제2건국운동 공동위원장인 金容雲(김용운)씨가 편역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교통사고를 여전히 「암살기도」로 규정해 놓았다. 이 책은 그 전에 月刊朝鮮에서 두 차례 보도한 트럭운전사 權씨의 증언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 트럭운전사는 그렇게 엄청난 대참사를 일으키고 도망쳐 버렸다. 조수만 남았는데, 변명도 안 되는 이야기만 지껄일 뿐이었다. 트럭 주인은 공화당의 유력자인 변호사였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비례대표제의 전국구 제8위에 올라 당선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나중에 잡힌 운전사는 살인혐의로 기소되었지만, 그 조사에 있어서 기소를 결정한 검사는 모두 좌천되고 바뀐 검사는 이 일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부는 그 뉴스 보도를 막았다. 이 사건은 나를 제거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계획한 음모였다. 이것은 나에게는 한국전쟁 당시의 인민군에게 처형될 뻔한 일에 이어, 두 번째 죽음의 늪에서 탈출한 사건이었다>
 
  현장 상황과 관련자들의 진술 등을 종합할 때 「金大中 의원 교통사고」의 윤곽은 거의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이 기사의 중점이 누가 중앙선을 먼저 침범했는가에 쏠렸지만 이 쟁점이 어느 쪽으로 결론 나도 암살기도說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트럭운전사가 사고 직전에 브레이크를 밟았고, 현장에 스키드 마크가 있었다는 것은 이 교통사고가 암살기도가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물증이 아닐 수 없다.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 암살을 시도하는 「전문 킬러」가 1971년 상황의 한국에 과연 있었을까.
 
  金大中 대통령은 이미 30년 전부터 트럭운전사를, 자신을 죽이려 한 「암살범」이라 단정하고 수많은 인터뷰에서 이를 공개했다. 하지만 金대통령은 암살說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트럭회사가 여당 의원 소유라는 金대통령의 주장은 사실에서 틀렸다. 수사 검사가 교체되고 트럭운전사가 달아났다는 주장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운전사는 살인혐의로 기소되지도 않았다.
 
  朴正熙 정권이 金대통령을 죽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목포공항의 비행기 운항을 금지시키고 트럭을 고개 밑에 대기시켜 놓았다가 들이받으려 했다면 이 암살 工作은 치밀하게 계획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신혼부부가 탄 택시가 등장했으며, 「살인 기도」 트럭에 조수가 타고 있었을까.
 
  金大中 대통령이 교통사고 현장에서 살아나온 직후 암살기도說을 주장한 것은 상황논리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 뒤에도 계속해서 공개적으로 암살기도說을 내세우고, 그의 설명과 다른 反證들이 많이 발견되고 공개되었는데도 수정이 없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노벨상 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 그 나라 국민 한 사람의 인권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인가.
 
 
  『제발 저를 내버려 두세요』
 
 
  취재 결과, 이 교통사고의 수사기록은 보존기간 경과로 찾을 수 없었지만 1심 판결문은 정부기록보존소에 보존돼 있음이 확인되었다. 정부기록보존소 측은 『당사자가 신청할 경우 열람이 가능하나 언론사의 요청에는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수사기록과 판결문을 구하지 못하고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존해 쓰여진 이 기사가 세부적인 사실에서 틀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전사 權씨가 朴정권의 지령에 따라 金大中씨를 죽이려 했다는 증거가 수사·재판기록에 없으리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물론 대통령도 그를 살인음모자로 단정할 권리가 없다. 권력자가 의심만 갖고서 無力한 한 개인을 지목하여 「당신은 암살기도범이다」는 취지로 되풀이해서 公言한다는 것은 그 개인에게 어떤 심리상태를 결과할까?
 
  부산에 살고 있는 트럭운전사 權重億씨에게 본 기자(禹鍾昌)는 명예회복에 나설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이렇게 반문했었다.
 
  『저는 지금 몸이 아픕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겠는데 제발 저를 내버려 두세요. 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하고 대항할 무슨 힘이라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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