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중부지방을 일컫는 미들랜드(Midland)에 ‘코츠월드(Cotswold)’라는 곳이 있다. 옛 잉글랜드 풍광과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어 영국인들이 몇 달에 걸쳐 주파하는 것을 개인적 자랑으로 여긴다. 코츠월드는 단순히 어느 특정지점이 아니다. 〈그레이트북스 코츠월드〉란 가이드 북은 코츠월드를 8곳으로 나눈다.
첫째 글로스터(Gloucester), 둘째 테트버리(Tetbury), 셋째 스트라우드(Stroud), 넷째 사이렌스터(Cirencester), 다섯째 첼튼햄(Cheltenham), 여섯째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본(Stratford-upon-Avon), 일곱째 버튼 온 더 워터(Bourton-on the-water), 여덟째 콜른(Coln) 계곡이다. 이 첼튼햄에서 승용차로 20분 거리에 고성(古城)이 있다.
거의 다 허물어져 외관(外觀)만 남아 있는 수들리성(Sudeley·城)이다. 이곳에 유명한 헨리8세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헨리8세는 영국인들이 자주 화제에 올리는 왕이다. 명군(明君)이라서가 아니다. 성격이 워낙 괴팍했기에 그와 얽힌 이야기의 실타래가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헨리8세는 자기 아내들을 간통죄로 몰아 참수하기도 했는데 그에게서 끝까지 살아남은 부인이 캐서린 파(Katherine Parr)다. 그녀의 고향이 바로 수들리성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헨리8세는 1535년 아내 앤 불린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토머스 크롬웰과 함께 골치 아팠던 종교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헨리8세 사후 에드워드6세는 조카 토머스 세이무어를 수들리성주로 임명했다. 에드워드6세가 왕위에 있을 때 세이무어는 왕의 누나였던 엘리자베스1세와 염문을 뿌렸다. 엘리자베스1세가 이 스캔들로 위기를 맞자 아이러니하게 세이무어는 헨리8세의 여섯번째 아내였던 과부(寡婦) 캐서린 파와 결혼한다.
수들리성은 엘리자베스1세와 그녀의 새엄마 캐서린 파와 그 사이를 오가며 권력을 노리는 세이무어가 연출한 삼각관계 무대가 됐다. 세이무어는 야망을 못 이루고 처형됐다. ‘국왕 시해’가 혐의였는데 더 구체적으론 ‘에드워드6세와 메리(블러드 메리)를 죽이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 했다’는 것이다.
위기를 맞은 엘리자베스는 추밀원 심문에서 무죄를 입증했지만 정신적 고통마저 벗을 수는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엘리자베스1세는 이 성을 여러 번 찾았다고 한다. 자신과의 사랑을 못 이루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세이무어와의 실패한 로맨스를 그녀는 이 쓸쓸한 성에서 홀로 돌아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기서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루아가 쓴 《영국사》를 인용해 본다. 모루아의 눈에 비친 영국은 ‘신사(紳士)의 나라’가 아닌 ‘간신(奸臣)의 왕국’이었다. 그가 꼽은 영국사 최고의 간신은 토머스 크롬웰(1485~1540)이다. 앞서 말한 ‘1535년 헨리8세와 함께 수들리성을 찾았던’ 바로 그 크롬웰이 토머스 크롬웰이었다.
크롬웰의 삶은 수들리성에 함께 간 헨리8세가 5년 뒤인 1540년 7월 28일 휘두른 세 차례 도끼질로 끝났다. 역사는 토머스 크롬웰의 행적(行蹟)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망친 나르키수스,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서 주군(主君)의 시샘에 불지른 이아고에게 뒤지지 않았다.〉
헨리8세(재위 1509~1547)는 “토머스 크롬웰은 양털이나 빗질할 놈이다”라고 낮게 평가했지만 죽이기 전까지 신임을 듬뿍 줬다. 그가 ‘목동 급(級)’에서 에식스 백작까지 된 것은 헨리8세가 원래 자신의 형수였던 첫 번째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이혼을 결심했을 때였다.
헨리8세는 당시 교황에게 이혼을 청했는데 하필이면 ‘아라곤의 캐서린’이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인척이었다. 교황이 득실을 따지다 헨리8세의 청을 거절하자 이 다혈질 사내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 틈을 타 간신 크롬웰이 헨리8세에게 ‘수도사들의 악덕(惡德) 보고서’를 제출한 것이다.
‘종교인들이 부정축재를 했으며 사생활도 문란했다’는 내용이었다. 화풀이감을 찾던 헨리8세는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릴 의지가 없었다. 그 보고서로 1200개가 넘는 수도원이 초토화됐다. 수도원에서 몰수한 어마어마한 토지와 재산 중 상당액이 왕의 금고가 아닌 토머스 크롬웰의 호주머니로 사라졌다. 이 문서가 가짜였다는 사실은 수도원이 쑥대밭이 된 뒤 밝혀졌다.
가짜 문서로 신세를 망친 대표적인 사람이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재위 1542~1567)였다. 여왕의 비극은 이탈리아 음악가 리치오를 총애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왕의 사랑을 잃자 간신들은 일제히 험담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중에 여왕의 아들, 훗날 제임스1세의 아버지에 관련된 것도 있었다. “아이가 여왕의 남편 단리의 소생이 아니라더라 …”라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은 원래 준마(駿馬)보다 빨리 달려 세상에 퍼지는 법이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토머스 크롬웰 못지않은 희대의 간신 보스웰 백작이었다.
그는 여왕의 남편 단리를 암살했다. 여왕을 자기 성(城)에서 강간한 뒤 강제 결혼하고 국정을 농단하자 백성들이 곳곳에서 창과 칼을 뽑아 들었다. 반란군과 맞서던 보스웰은 세(勢)가 불리해지자 혼자 내뺐다. 화가 난 여왕은 남편 보스웰의 등짝을 후려쳤지만 보스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뺐다고 한다.
국민과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여왕이 갈 곳은 친척 언니 엘리자베스 여왕(재위 1558~1603)이 있는 잉글랜드뿐이었다. 이번에는 잉글랜드 간신들이 나설 차례다. 그들은 ‘남편 단리의 죽음에 메리가 개입했다’는 문서를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제출했다. 엘리자베스는 ‘진상(眞相)이 담긴 상자’를 메리에게 전했다.
도무지 해명할 길이 없는 종이 뭉치 덕분에 메리는 유폐되고 말았다. 아름답던 갈색 머리가 백발(白髮)이 될 때까지 19년간이었다. 야담에 따르면 엘리자베스는 문서가 거짓인 걸 알았지만 메리의 미모를 샘내 모른 체했다고 한다. 영국인들 대부분은 이런 가설을 사실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1세는 명군으로 꼽히지만 주변에 간신이 많았다. 처녀였기에 일흔 살로 죽을 때까지 근거 없는 염문(艶聞)에 시달렸다. 늘그막에 총애한 레스터 백작의 의붓아들 로버트 더들리는 미남에 여왕보다 서른네 살이나 어렸지만 간신의 전형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에는 반역까지 꾀하다 처형됐다.
세상에는 엘리자베스1세 같은 왕이 많다. 헨리8세 같은 왕들도 많다. 세이무어, 토머스 크롬웰, 보스웰 같은 간신은 더 많다. 이런 간신들에게 삶의 자양분이 되는 것은 왕(지도자)의 무지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간신들의 장기(長技)를 살펴보자.
간신들은 바퀴벌레처럼 참고 견디는 것에 능하다. 그야말로 은인자중(隱忍自重), 끈덕지기 비할 데가 없다. 이런 간신들이 세상에 등장하는 것은 기회가 왔을 때다. 모처럼 찾아온 찬스를 낚아챌 때 그들은 누구보다 빠르다. 이 두 가지 요소 없이 간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을 나는 역사에서 발견한 적이 없다.
간신의 자질 3번은 헛소문과 위서(僞書)의 활용이다. 마지막으로, 간신은 같은 간신을 더 증오하는데 여기엔 심리적 이유가 있다. 자기도 잘 아는 수준의 음모와 수법에 당할 때 사람들이 더 못 견뎌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간신은 대체 누가 되는 걸까.
‘나는 앞으로 커서 역사에 유명한 간신이 돼야지’라고 목표를 세우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간신을 만드는 것이 암군(暗君)이라는 뜻이다. 무능한 왕들은 자신의 치세(治世)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의 시계는 계속 째깍대며 돌아가도 왕궁 안에 있는 자기 시계만은 멈춰 있다고 착각한다.
만일 인간이 유한(有限)한 존재임을 안다면 역사상 많은 암군은 암군의 반열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안다면 주변의 측근이라는 인물들이 간신임을 분명히 알아챌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다 ‘나는 옳다’ ‘나는 영원할 것이다’라는 혼자만의 우주를 껴안고 있다. 이런 우둔한 지도자들이 있었던 나라가 어디 잉글랜드뿐일까.⊙
첫째 글로스터(Gloucester), 둘째 테트버리(Tetbury), 셋째 스트라우드(Stroud), 넷째 사이렌스터(Cirencester), 다섯째 첼튼햄(Cheltenham), 여섯째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본(Stratford-upon-Avon), 일곱째 버튼 온 더 워터(Bourton-on the-water), 여덟째 콜른(Coln) 계곡이다. 이 첼튼햄에서 승용차로 20분 거리에 고성(古城)이 있다.
거의 다 허물어져 외관(外觀)만 남아 있는 수들리성(Sudeley·城)이다. 이곳에 유명한 헨리8세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헨리8세는 영국인들이 자주 화제에 올리는 왕이다. 명군(明君)이라서가 아니다. 성격이 워낙 괴팍했기에 그와 얽힌 이야기의 실타래가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헨리8세는 자기 아내들을 간통죄로 몰아 참수하기도 했는데 그에게서 끝까지 살아남은 부인이 캐서린 파(Katherine Parr)다. 그녀의 고향이 바로 수들리성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헨리8세는 1535년 아내 앤 불린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토머스 크롬웰과 함께 골치 아팠던 종교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헨리8세 사후 에드워드6세는 조카 토머스 세이무어를 수들리성주로 임명했다. 에드워드6세가 왕위에 있을 때 세이무어는 왕의 누나였던 엘리자베스1세와 염문을 뿌렸다. 엘리자베스1세가 이 스캔들로 위기를 맞자 아이러니하게 세이무어는 헨리8세의 여섯번째 아내였던 과부(寡婦) 캐서린 파와 결혼한다.
수들리성은 엘리자베스1세와 그녀의 새엄마 캐서린 파와 그 사이를 오가며 권력을 노리는 세이무어가 연출한 삼각관계 무대가 됐다. 세이무어는 야망을 못 이루고 처형됐다. ‘국왕 시해’가 혐의였는데 더 구체적으론 ‘에드워드6세와 메리(블러드 메리)를 죽이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 했다’는 것이다.
위기를 맞은 엘리자베스는 추밀원 심문에서 무죄를 입증했지만 정신적 고통마저 벗을 수는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엘리자베스1세는 이 성을 여러 번 찾았다고 한다. 자신과의 사랑을 못 이루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세이무어와의 실패한 로맨스를 그녀는 이 쓸쓸한 성에서 홀로 돌아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기서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루아가 쓴 《영국사》를 인용해 본다. 모루아의 눈에 비친 영국은 ‘신사(紳士)의 나라’가 아닌 ‘간신(奸臣)의 왕국’이었다. 그가 꼽은 영국사 최고의 간신은 토머스 크롬웰(1485~1540)이다. 앞서 말한 ‘1535년 헨리8세와 함께 수들리성을 찾았던’ 바로 그 크롬웰이 토머스 크롬웰이었다.
크롬웰의 삶은 수들리성에 함께 간 헨리8세가 5년 뒤인 1540년 7월 28일 휘두른 세 차례 도끼질로 끝났다. 역사는 토머스 크롬웰의 행적(行蹟)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망친 나르키수스,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서 주군(主君)의 시샘에 불지른 이아고에게 뒤지지 않았다.〉
헨리8세(재위 1509~1547)는 “토머스 크롬웰은 양털이나 빗질할 놈이다”라고 낮게 평가했지만 죽이기 전까지 신임을 듬뿍 줬다. 그가 ‘목동 급(級)’에서 에식스 백작까지 된 것은 헨리8세가 원래 자신의 형수였던 첫 번째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이혼을 결심했을 때였다.
헨리8세는 당시 교황에게 이혼을 청했는데 하필이면 ‘아라곤의 캐서린’이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인척이었다. 교황이 득실을 따지다 헨리8세의 청을 거절하자 이 다혈질 사내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 틈을 타 간신 크롬웰이 헨리8세에게 ‘수도사들의 악덕(惡德) 보고서’를 제출한 것이다.
‘종교인들이 부정축재를 했으며 사생활도 문란했다’는 내용이었다. 화풀이감을 찾던 헨리8세는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릴 의지가 없었다. 그 보고서로 1200개가 넘는 수도원이 초토화됐다. 수도원에서 몰수한 어마어마한 토지와 재산 중 상당액이 왕의 금고가 아닌 토머스 크롬웰의 호주머니로 사라졌다. 이 문서가 가짜였다는 사실은 수도원이 쑥대밭이 된 뒤 밝혀졌다.
가짜 문서로 신세를 망친 대표적인 사람이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재위 1542~1567)였다. 여왕의 비극은 이탈리아 음악가 리치오를 총애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왕의 사랑을 잃자 간신들은 일제히 험담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중에 여왕의 아들, 훗날 제임스1세의 아버지에 관련된 것도 있었다. “아이가 여왕의 남편 단리의 소생이 아니라더라 …”라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은 원래 준마(駿馬)보다 빨리 달려 세상에 퍼지는 법이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토머스 크롬웰 못지않은 희대의 간신 보스웰 백작이었다.
그는 여왕의 남편 단리를 암살했다. 여왕을 자기 성(城)에서 강간한 뒤 강제 결혼하고 국정을 농단하자 백성들이 곳곳에서 창과 칼을 뽑아 들었다. 반란군과 맞서던 보스웰은 세(勢)가 불리해지자 혼자 내뺐다. 화가 난 여왕은 남편 보스웰의 등짝을 후려쳤지만 보스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뺐다고 한다.
국민과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여왕이 갈 곳은 친척 언니 엘리자베스 여왕(재위 1558~1603)이 있는 잉글랜드뿐이었다. 이번에는 잉글랜드 간신들이 나설 차례다. 그들은 ‘남편 단리의 죽음에 메리가 개입했다’는 문서를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제출했다. 엘리자베스는 ‘진상(眞相)이 담긴 상자’를 메리에게 전했다.
도무지 해명할 길이 없는 종이 뭉치 덕분에 메리는 유폐되고 말았다. 아름답던 갈색 머리가 백발(白髮)이 될 때까지 19년간이었다. 야담에 따르면 엘리자베스는 문서가 거짓인 걸 알았지만 메리의 미모를 샘내 모른 체했다고 한다. 영국인들 대부분은 이런 가설을 사실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1세는 명군으로 꼽히지만 주변에 간신이 많았다. 처녀였기에 일흔 살로 죽을 때까지 근거 없는 염문(艶聞)에 시달렸다. 늘그막에 총애한 레스터 백작의 의붓아들 로버트 더들리는 미남에 여왕보다 서른네 살이나 어렸지만 간신의 전형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에는 반역까지 꾀하다 처형됐다.
세상에는 엘리자베스1세 같은 왕이 많다. 헨리8세 같은 왕들도 많다. 세이무어, 토머스 크롬웰, 보스웰 같은 간신은 더 많다. 이런 간신들에게 삶의 자양분이 되는 것은 왕(지도자)의 무지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간신들의 장기(長技)를 살펴보자.
간신들은 바퀴벌레처럼 참고 견디는 것에 능하다. 그야말로 은인자중(隱忍自重), 끈덕지기 비할 데가 없다. 이런 간신들이 세상에 등장하는 것은 기회가 왔을 때다. 모처럼 찾아온 찬스를 낚아챌 때 그들은 누구보다 빠르다. 이 두 가지 요소 없이 간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을 나는 역사에서 발견한 적이 없다.
간신의 자질 3번은 헛소문과 위서(僞書)의 활용이다. 마지막으로, 간신은 같은 간신을 더 증오하는데 여기엔 심리적 이유가 있다. 자기도 잘 아는 수준의 음모와 수법에 당할 때 사람들이 더 못 견뎌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간신은 대체 누가 되는 걸까.
‘나는 앞으로 커서 역사에 유명한 간신이 돼야지’라고 목표를 세우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간신을 만드는 것이 암군(暗君)이라는 뜻이다. 무능한 왕들은 자신의 치세(治世)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의 시계는 계속 째깍대며 돌아가도 왕궁 안에 있는 자기 시계만은 멈춰 있다고 착각한다.
만일 인간이 유한(有限)한 존재임을 안다면 역사상 많은 암군은 암군의 반열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안다면 주변의 측근이라는 인물들이 간신임을 분명히 알아챌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다 ‘나는 옳다’ ‘나는 영원할 것이다’라는 혼자만의 우주를 껴안고 있다. 이런 우둔한 지도자들이 있었던 나라가 어디 잉글랜드뿐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