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4 / 파괴된 우상 - 로댕과 카미유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t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로댕, 43세 때 19세의 조각가 지망생 카미유 클로델과 조우… 작업의 동반자, 情婦, 일꾼
⊙ 로댕, 카미유가 〈성숙의 시대〉 발표하며 독립적인 조각가로 나서자 그녀 버려
⊙ 카미유, 죽을 때까지 30년간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 1951년에 첫 회고전
⊙ 카미유, 1984년 로댕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로댕에게 많은 예술적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유능한 조각가”로 재평가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1864~1943년)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제자이자 모델, 연인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는 미켈란젤로다. 가장 위대한 작품 역시 그의 작품들일 것이다. 하지만 작품성을 떠나 가장 유명한 작품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하지 않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을 떠올린다.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표현처럼 모든 힘을 모아 생각하는 그의 온몸이 머리가 되고, 혈관에 흐르는 피는 뇌가 된 듯이, 전신(全身) 근육이 긴장된 채 나체로 앉아 있는 이 남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의 고뇌의 실체는 무엇일까.
 
 
  지옥으로 가는 문
 
〈청동시대(靑銅時代)(L'Age d'airain, 1878)〉
1875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고 영향을 받아 벨기에에서 제작했다. 1878년 프랑스 파리에 돌아와 출품하였는데 실제 사람 몸에 찰흙을 붙여 만들었다는 의혹을 받을 정도로 완벽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년)은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의 아버지는 바보 같은 아들을 두었다며 한탄하고 부끄러워했지만 정작 로댕 자신은 맞춤법 실수는 드로잉 할 때 저지르는 실수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라며 언제나 당당했다. 로댕은 국립공예실기학교를 졸업한 후 다양한 스튜디오와 공장에서 조수로 일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 시절 누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사제(司祭)가 되겠다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기도 했으나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을 알아본 수도원장의 설득으로 다시 환속(還俗)했다.
 
  그가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한 〈코가 찌그러진 사나이〉는 거부감이 들 정도로 생생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낙선을 했다. 그러다 1875년에 이탈리아에 가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직접 보고 온 후 3년 만에 만든 누드상 〈청동시대〉로 갑자기 부각됐다. 사실적 표현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평론가들은 로댕이 흙을 빚어서 만든 게 아니라 실제 살아 있는 모델의 몸에 흙을 발라 본을 떴다고 비난했고 결국 정부가 직접 나서 진상조사까지 하고 나서야 논쟁이 불식되었다. 로댕은 상당히 곤욕을 치렀지만 이 사건 덕분에 미술부의 주목을 받게 된다.
 
  로댕의 재능을 알아본 프랑스 미술부 차관 에드몽 투르케(Edmont Tourquet)는 그에게 단테의 《신곡(神曲)》을 주제로 건축 중이던 ‘장식미술박물관’의 입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지옥, 연옥, 천국을 차례로 여행하며 영혼의 구원을 노래한 이 대서사시에서 로댕은 하필이면 저주받은 자들의 영원한 고통을 구체화한 ‘지옥편’을 선택했다. 작품명은 〈지옥의 문〉. 전체 작품 중 일부로 문 꼭대기에 앉아 지옥의 영혼들이 겪는 고통을 숙고하는 듯한 인물상에 〈시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바로 단테를 묘사했기 때문이다.
 
  로댕은 박물관 측의 주문 취소 후에도 〈지옥의 문〉 작업을 20년간이나 계속했다. 그리고 〈시인〉을 문틀에서 떼어내 단독 작품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작품의 이름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꾸자 조각상은 단순히 단테를 상징하는 것을 넘어서 모든 사유(思惟)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확장되었다. 로댕은 인간의 고뇌를 소름 끼치게 현실화한 덕분에 철학과 이성(理性)의 상징처럼 오해(?)를 받아왔다. 하지만 사실 그는 심사숙고(深思熟考)하는 삶보다는 행동하는 삶을 선호했고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게으르고 오만한 성격에 가까웠다.
 
 
  로댕과 카미유의 만남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 1906)〉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일 펜세로소(Il Pensieroso: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실제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조각되어 있는 메디치가의 무덤에 가서 공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1888년에 〈지옥의 문〉에서 독립적으로 떨어져 나와 실물 크기보다 더 크게 제작되었다.
  어쩌면 〈지옥의 문〉은 다가오는 그의 인생에 대한 암시였을까? 작업이 한창이던 1883년의 어느 날. 마흔세 살의 로댕은 이제 겨우 열아홉 살 먹은 조각가 지망생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1864~1943년)을 만나게 된다. 절친한 친구인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Alfred Boucher)가 로마로 떠나면서 아끼던 제자 카미유를 로댕에게 맡긴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유독 화창했던 그날 아침, 로댕이 부셰의 아틀리에를 방문했을 때 마당에서는 젊은 여제자들이 한창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로댕이 들어서는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고, 잠시 후 카미유가 눈가리개를 풀었을 때, 로댕은 그녀의 짙은 눈빛에 순식간에 포박당하고 말았다. 그는 심해(深海)같이 아득한 그녀의 두 눈이 자기를 꿰뚫어 보듯 관찰하는 모습을 꼼짝없이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근시안(近視眼)인 로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카미유는 빛을 받아 붉은빛이 나는 그의 수염이 마치 난쟁이 할아버지 같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동생 흉상(胸像)은 거의 완벽한 작품인 것 같소. 작품 여기저기에 생명이 숨 쉬고 있어요. 카미유 양, 이젠 제가 부탁드릴 차례군요. 제 아틀리에로 일하러 와 주시겠습니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카미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게 서 있었다. 고요 속에서 그녀의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넌 결국 모든 것을 다 놓치게 될 것”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년)〉
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근대 조각의 아버지라 불린다.
  두 사람의 인상적인 첫 대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카미유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로댕의 작업실로 들어가겠노라 선포를 했다. 언제나 다정했던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으로 딸에게 소리를 질렀다.
 
  “카미유 넌 너만의 재능을 그렇게 희생시킬 생각이냐?”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탁자를 치며 노발대발했다.
 
  “조심해, 넌 결국 모든 것을 다 놓치게 되고 말 거야. 네 인격까지도 말이다. 로댕은 평판이 나빠. 그의 첫 작품이 누구 것인지는 아무도 몰라. 거기에는 분명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어.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무시하면 안 된다.”
 
  카미유는 로댕에 대한 항간의 부정적인 소문에 대해 항변했다. 부녀간의 논쟁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1885년, 로댕은 카미유를 학생에서 정식 조수로 채용했다. 물론 처음에는 카미유도 로댕을 경계하긴 했다. 나이도 많고 무엇보다 정부(情婦) 로즈 뵈레(Rose Beuret)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이 다 알고 있었으니.
 
  “그대를 미치도록 사랑하오. 나는 다른 어떤 여자에게도 감정이 없고 내 영혼은 통째로 그대 것임을 보증하오.… 그대는 내 고통을 믿지 않소. 나는 울부짖는데 그대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지. 그대가 없는 나는 이미 죽었다오.… 아, 신성한 아름다움, 말하고 사랑하는 꽃, 영리한 꽃,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대 몸 앞에 무릎 꿇고 그대의 몸을 감싸 안으리.”
 
  로댕이 카미유에게 보낸 러브레터에는 존경, 찬사, 읍소(泣訴), 회유 등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구애(求愛)의 방법이 다 동원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유치한 말장난 같은 것에 그녀가 마음을 빼앗긴 것은 아니다.
 
  어려서 일찍 두 형제를 잃고 가장 사랑했던 누이까지 병으로 떠나보낸 로댕은 한때 수도원에까지 들어갈 정도로 방황을 했었다. 아버지마저 정신병자가 되어 죽자 상처는 더욱 깊이 파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니의 냉대와 질시 속에 자란 카미유는 그 아픔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어루만져주고 싶은 모성애(母性愛)가 발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상처받은 영혼에서 싹을 틔운 두 사람의 사랑은 타오르기 시작했고 이제 그야말로 지옥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異敎徒의 밭’

 
  카미유는 로댕의 〈지옥의 문〉 팀에 합류했고 로댕은 그녀에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파트인 손과 발 작업을 맡겼다. 그는 카미유가 누구보다도 석고를 잘 다룰 줄 알고 자신도 미처 체득하지 못한 정교한 기술과 힘으로 대리석을 깎을 줄 안다며 칭송해 마지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가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래도 카미유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이교도(異敎徒)의 밭’ 혹은 ‘광란의 뇌부르그’라 불리는 외곽의 저택에서 오로지 두 사람만이 작업하고 사랑을 나누었다. 이때 로댕은 그녀를 ‘나의 우상(偶像)’이라고 즐겨 부르곤 했다. 카미유는 이따금 그의 아내 로즈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로댕이 먼저 말해주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로댕은 점점 더 유명해졌고 그의 아틀리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교계의 여인들, 정치인들, 조각가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카미유는 로댕 주위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혼자 생각할 뿐이었다. ‘아, 저 사람들이 〈지옥의 문〉을 조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를 안다면….’
 
  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카미유는 로댕의 동반자이자 뮤즈이면서 동시에 그의 일을 해주는 일꾼으로 전락했다. 때때로 저녁이 되면 그녀는 다리가 아파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고 머리는 먼지투성이인 데다 신발 속에는 돌가루와 진흙덩이가 가득했다. 그녀는 세 곳의 아틀리에를 바쁘게 뛰어다녔고 이따금 ‘이교도의 밭’에서 로댕을 위해 몇 시간 동안 모델을 서기도 했다. 아버지가 가끔 “지금 무슨 작품을 작업하고 있느냐”고 물을 때면 잊고 있던 회의감(懷疑感)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네가 로댕을 사로잡아서…”
 
〈다나이드(Danaid, 1889)〉
카미유를 모델로 해서 만들었다.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오스 왕의 딸들로 죄를 지은 대가로 지옥에서 평생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형벌을 받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실이 없는 헛된 일만 반복하며 살게 된 것. 로댕은 카미유가 느끼는 깊은 절망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은 다나이드에 빗대 표현했다.
  카미유 혼자 감당하는 고된 나날의 연속 중에 로댕은 그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인 〈다나이드〉를 그녀에게 바쳤다. 벌거벗은 채 엎드려 있는 아름다운 여체(女體)의 형상을 조각한 이 작품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카미유의 몸이라며 신나게 손가락질해댔고 결국 로즈 뵈레, 그녀가 카미유를 찾아오고야 말았다.
 
  “다른 여자들은 그래도 참을 수 있었어. 모델이니 사교계 것들이니 말이지. 그의 관심사는 오직 일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넌 달라. 네가 로댕을 사로잡아서 그와 닮은 조각가가 돼간다고 사람들이 온통 떠들어대고 있어. 나는 배를 곯고 우리 아들은 반 거지가 되어 있는데, 이 집 집세를 내느라고 그는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야. 이 창녀(娼女) 같은 계집, 오늘 널 꼭 죽여버리고 말겠어!”
 
  로즈는 그녀가 조각하고 있던 로댕의 흉상을 집어던지고 정말로 죽일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분노가 치민 카미유는 순식간에 로즈를 잡아서 내팽개쳤다. 하필 그 순간 로댕이 들어왔다. 집 안에 들어선 로댕의 시선은 바닥에 나동그라져 끙끙거리는 늙은 로즈에게로 향했다.
 
  “카미유, 난 정말 당신의 이런 폭력성이 맘에 안 들어. 게다가 로즈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고. 난 로즈를 데리고 돌아가야겠어.”
 
  철문이 ‘쾅’ 닫히고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는 와중 카미유는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구토증을 느꼈다. 마치 지옥 구덩이 깊은 곳으로 굴러 떨어져 차가운 바닥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을 게다.
 
 
  드뷔시와 카미유
 
  로즈가 집어던진 흉상에 배를 맞은 탓인지, 과로 탓인지, 로댕의 배신 탓인지 아니면 이 모든 이유가 다 합쳐진 탓인지 임신 중이었던 카미유는 유산(流産)을 했고 로댕과 떨어져 요양을 하게 된다. 이때 그녀는 시인이자 외교관이었던 동생 폴의 소개로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Claude-Achille Debussy)를 만나면서 삶의 활력을 찾아간다. 카미유와 드뷔시는 산책을 즐겨 했다.
 

  어느 날 저녁 그가 카페에 들러 모여 있는 지인들에게 카미유를 소개했다. “자네 여자친구는 이미 유명인사라고!”라는 놀림이 돌아왔다. 드뷔시는 분명 카미유를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카미유는 결국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년여의 시간이 흘렀어도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로댕이 자리하고 있던 탓이다. 드뷔시는 그녀가 선물한 작품 〈왈츠〉를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고 한다.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던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파국(破局)으로 치달은 것은 결국 로댕의 이기심(利己心) 때문이었다. 카미유가 독립된 예술가로서 개인 작업을 시작한 것이 화근(禍根)이었다. 그는 카미유가 로즈처럼 헌신하며 조용히 자신의 아이를 낳고 길러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태생부터 예술가였던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
 
 
  영원히 안녕!
 
〈성숙의 시대(l’Age Mur, 1899)〉
1893년 살롱에 출품해 극찬을 받았다. 카미유의 남동생이자 작가였던 폴 클로델은 이 작품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내 누이 카미유가 애원하면서, 비참하게 무릎 꿇고 있다. 그 대단하고, 오만할 정도로 한없이 자신감 넘치던 그녀가 말이다. 이 당시 그녀에게는 당신도 알 수 있듯이 영혼이 사라져 있었다.”
  1889년 그녀가 작품 〈성숙의 시대〉를 내놓았을 때 로댕은 분노를 표출했다. 작품 속, 마녀(魔女)와 같은 노파에게 이끌려 가는 늙은 남자의 손끝을 무릎 꿇고 애절하게 붙잡고 있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 영락없는 로즈와 로댕, 카미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로댕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작정이냐며 공개를 말렸지만 카미유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카미유는 이 작품에 대해 인생의 황혼기에 젊음이 내민 손길을 붙잡을 수 없어 하릴없이 늙음과 죽음에 끌려가는 인간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로댕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결국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다. 마치 자신의 말을 거역한 인간에게 신(神)이 형벌을 내리듯이. 어쩌면 로댕은 카미유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조각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결별 후 로댕이 만든 작품 〈영원히 안녕(Adieu!)〉에는 금방이라도 슬픔의 바다에 잠겨버릴 듯한 어떤 여인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카미유는 로댕의 끝없는 이기심을 그제야 알게 됐다. 하지만 그녀의 몸과 마음은 이미 피폐해졌고 그녀의 눈부신 미모도 돌가루처럼 부서져 흩어져 버린 후였다. 그녀는 점점 무너져 내렸다. 카미유는 로댕이 자신의 영감(靈感)까지도 다 훔쳐갔다며 분노에 휩싸인 채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름답고 눈부신 로댕의 우상은 내면마저 파괴되어 점점 미치광이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1906년경 남동생 폴이 가족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떠나자 카미유는 자신의 작품을 다 부숴버리고 아예 창작 활동을 중단했다. 그녀는 홀로 버려진 채 증세가 더욱 심각해졌고 아버지가 사망한 1913년, 어머니와 남동생은 그녀를 정신병원으로 보내고 만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탔던 그녀는 정신병원에 갇혀 차가운 쇠침대에서 30년이나 살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참으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전해지는 또 하나의 충격은 1943년 10월 19일, 그녀의 장례식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결국 무연고자(無緣故者)로 공동 매장되었고, 현재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난 神이다!”
 
노년의 카미유 클로델.
  잔인한 폴, 그는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프랑스 천재시인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를 선망하던 그에게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렇게 너처럼 의자에 못 박힌 듯이 앉아 있는 게 아니야. 랭보가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들어올 수는 없잖아, 안 그래?”라며 옆구리를 콕콕 찔렀던 카미유, 그런 누나를 누구보다 좋아했던 그인데. 그러고 보니 흑백사진 속의 카미유는 랭보와 무척이나 닮아 있다. 마치 영혼을 응시하는 듯 깊고 슬픈 눈빛. 두 사람은 이 세계 너머의 어딘가 다른 곳을 아득하게 바라봤던 것 같다.
 
  카미유가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충성스러운 로즈는 계속해서 로댕 곁을 지켰다. 주변 사람들은 수십 년을 한결같이 노예처럼 생활하는 그녀를 불가사의한 존재로 여겼다. 한편 40년이 넘도록 바람을 피우던 로댕은 1916년 뇌졸중 발작으로 쓰러져 쇠약해진 후에야 로즈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것도 전쟁이 계속되던 1917년 1월, 혹한의 추위 속에서 로즈가 침상에 누운 채로. 그로부터 2주 후에 로즈는 죽음을 맞았고 그녀에게 로댕 부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려볼 기회 같은 건 끝까지 없었다.
 
  같은 해 겨울, 로댕도 일흔일곱 살 생일을 지나 며칠 후 로즈의 뒤를 따라갔다. 뫼동의 저택에서 후원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설도 있으나 치매에 걸린 채 병원에서 발작하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가 “난 신이다!”라고 유언을 뱉어내자 곁에서 돌보던 간호사가 “맞아, 당신은 똥오줌 누고 헛소리하며 죽어가는 신이야”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는 후문이 있다.
 
 
  카미유의 재발견
 
  1911년 로댕은 이미 프랑스의 국보(國寶)에 가까운 존재로 등극(登極)했고 정부에서는 파리에 있는 비롱 저택을 사들여 박물관으로 개조하였다. 로댕의 작품은 그의 사후(死後) 세계적으로 더 유명해졌다.
 
  이에 반해 잊혔던 카미유는 1951년에 첫 회고전이 열리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1984년 로댕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비로소 “로댕에게 많은 예술적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유능한 조각가”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다시 〈생각하는 사람〉을 본다. 이제 그 고뇌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것은 자기애(自己愛)와 타인으로서의 연인에 대한 사랑이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욕망은 연인을 선택하라고 하지만 이성은 “네가 사랑해야 할 것은 철저히 너 자신”이라고 속삭인다. 로댕은 카미유와 로즈 중에 로즈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카미유와 자기 자신 중에 자신을 선택한 것이었다.
 
  로댕은 철저히 이성적인 아니 이기적(利己的)인 인간이었다. 〈생각하는 남자〉처럼 앉아서 카미유의 고통을 관조하는 로댕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치 불멍을 때리듯이, 나무를 에워싼 열기의 춤사위를 보며 내 것이 아닌 오로지 타자(他者)의 고통을 관조하는…. 불똥이 튀지 않게 조심하면서.⊙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