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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공산당 선언, 얄타 회담, 러일전쟁, 2・12 총선, 대구지하철 방화…

지평리 전투에서 미군과 프랑스군이 대한민국을 구하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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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3일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은 얄타에서 만나 전후(戰後) 세계 질서에 대해 논의했다.
  2003년 2월 1일 미국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귀환 도중 공중에서 폭발했다. 7명이 사망했다. 미(美)항공우주국(NASA)의 발사 책임자들은 컬럼비아호 발사 장면을 찍은 비디오를 보다가 우주왕복선 방열판에 구멍이 뚫린 것을 발견했지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손을 쓸 수 없을 바에는 승무원들이 즐겁게 비행하다가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1709년 2월 2일 영국 해적선 듀크호는 칠레 해안에서 650km 떨어진 태평양의 무인도 마사 티에라 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섬에 상륙한 해적들은 염소 가죽을 온몸에 두른 맨발의 사내를 발견했다. 알렉산더 셀커크라는 이름의 이 사내는 4년4개월 동안 이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왔다.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는 셀커크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소설을 썼다. 《로빈슨 크루소》였다.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종결됐다.
포로가 된 독일군들은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보내져 죽어갔다.
  1943년 2월 2일 6개월 동안 끌어온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공식적’으로 끝났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元帥)가 이끄는 독일 6군은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독일군을 비롯한 추축국군 약 85만명, 소련군 113만명이 죽거나 다쳤다. 독일군 9만1000명이 포로가 됐다. 피해가 이렇게 커진 것은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이 도시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전투가 공식적으로 종료된 후에도 1만여 명의 독일군은 한 달 가까이 저항을 계속했다. 최후를 앞두고 이들은 본국으로 마지막 무전을 보냈다. “우리는 의무를 다했다.”
 
  1945년 2월 3일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수상,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이 만나 독일 패망 후의 세계 질서에 대해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한반도 분단에 대한 밀약(密約)이 있었다는 의혹이 오랫동안 있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은 뤼순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1904년 2월 8일 일본 연합함대가 뤼순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했다. 다음날에는 인천항에서도 일본 해군이 러시아 군함을 공격했다. 러일전쟁의 시작이었다. 대한제국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월 23일 국외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하고 2월 23일 일본과의 동맹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 600명이 2·8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1946년 2월 8일에는 ‘사실상의 북한 정권’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토지개혁, 주요 상공업의 국유화 등 공산화 작업이 시작됐다.
 
  1950년 2월 9일 조지프 매카시 미국 상원의원은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여성당원 집회에서 “국무부 내에 수백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으며, 그 명단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미국은 ‘빨갱이 사냥’ 열풍에 말려들었다. ‘매카시즘’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무분별한 반공이념 공세’로 폄하되어 왔다. 소련 붕괴 후 냉전시대 소련의 대미(對美)공작 등에 대한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미국 사회 일각에서는 매카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을 발표,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남북협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2008년 2월 12일 숭례문이 방화로 전소됐다. 시민들은 눈물을 훔치며 ‘국보 1호’의 죽음을 애도했다.
  2008년 2월 11일 국보 1호 숭례문이 방화로 전소(全燒)됐다.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노인이 저지른 짓이었다.
 
  1912년 2월 12일 청(淸)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가 퇴위했다. 5000년을 이어온 중국의 전제군주정이 끝났다.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합동연설회가 열린 서울 종로구 서울고 교정에는 시민들이 운집해 5공 정권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켰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김영삼-김대중씨를 배경으로 한 신생 야당인 신한민주당이 ‘관제(官製) 야당’ 민주한국당을 압도하면서 제1야당이 됐다. 1980년 5공 출범 이후 5년간 억눌렸던 민심이 폭발한 것이다. 이후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내걸고 전두환 정권에 대한 공세에 들어갔다.
 
1951년 2월 13일~16일 벌어진 지평리 전투가 끝난 후 맥아더 원수(오른쪽)는 현장을 방문,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라르(왼쪽) 중령을 격려했다.
  1951년 2월 13일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중공군 39군이 공세를 취해왔다. 미2사단 연대전투단과 프랑스 대대가 이에 맞섰다. 프랑스 대대는 한국전 참전을 위해 중장(中將)에서 강등을 자처한 랄프 몽클라르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사흘간 계속된 전투 끝에 중공군은 패퇴했다. 중공군 참전 이후 거듭되는 패전에 한반도 철수까지 고려하던 유엔군은 반격에 나섰다. 지평리 전투는 대한민국을 구한 전투였다.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87세를 일기로 선종(善終)했다. 많은 국민이 개발독재 시대에 올곧은 말씀으로 힘과 위로를 주었던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참사로 딸을 잃은 한 어머니는 장례식장에서 딸에 대한 사랑을 담은 글을 적은 풍선을 날려보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192명이 사망하고 21명이 실종됐으며, 151명이 부상을 당했다. 범인 김대한은 신병을 비관해 온 지적장애인이었다.
 
  1848년 2월 21일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아직도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다.
 
반나치저항조직 ‘백장미’의 단원 한스 숄, 조피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왼쪽부터). 이들은 1944년 2월 22일 처형됐다.
  1943년 2월 18일, 뮌헨대학에서 반(反)나치 전단을 뿌리던 대학생 한스 숄과 조피 숄이 체포됐다. 이들은 ‘백장미’라는 저항조직의 조직원이었다. 숄 남매와 그들의 동지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는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나흘 후 처형됐다. 한스는 죽기 전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제가 선택한 것이니까요.”
 
  1972년 2월 21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전격 방문했다. 닉슨과 그의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중국에 접근, 소련을 견제하려 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역시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손잡고 소련에 맞서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과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에 합의했다. 세계는 이 사건을 ‘닉슨 쇼크’라고 불렀다. 박정희 대통령은 8개월 후 10월 유신을 단행하면서, 그 이유 중 하나로 ‘닉슨 쇼크’를 꼽았다.
 
후안 페론과 그의 아내 에비타.
1946년 2월 24일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된 페론은 포퓰리즘으로 나라를 망가뜨렸다.
  1946년 2월 24일 후안 도밍고 페론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집권기간 동안 그는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노동자들의 복지를 확대하는 등의 포퓰리즘 정책을 폈다. 페론은 1955년 군부의 압력으로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아르헨티나는 아직도 포퓰리즘이라는 마약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86년 2월 25일, 21년간 계속된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대선(大選) 부정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에는 국방장관과 참모총장까지 가담했다. 세계는 이를 ‘피플 파워(people power)'라고 불렀다. 3년 전 마르코스에게 암살된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이 됐다.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의 청년장교들은 ‘쇼와유신’을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나흘 만에 진압됐다.
  1936년 2월 26일 새벽 눈 덮인 도쿄 시내 곳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위관급 청년장교들이 1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내대신(內大臣), 대장대신, 육군교육총감 등을 사살했다. 이들은 히로히토 천황을 받들고 ‘쇼와(昭和)유신’을 하려 했지만, 측근들의 참살 소식을 듣고 진노한 천황은 강경하게 진압을 명령했다. 쿠데타는 나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주동자 중 한 사람인 이소베 아사이치는 처형되기 전 이렇게 말했다. “국민들이여, 미치도록 나라를 생각하고 바보처럼 국가를 사랑하라.” 이후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았다.
 
  1876년 2월 27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됐다. 타의에 의한 근대화의 시작이었다.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지능이 모자라는 네덜란드인 공산주의자가 현장에서 체포됐다. 한 달 전 집권한 히틀러는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한다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비상조치권 발동을 요청했다. 전체주의화(全體主義化)의 시작이었다.
 
  1947년 2월 27일 밤 타이완(臺灣) 타이베이(臺北)에서 전매국 직원이 담배 노점상을 강압적으로 단속하다가 시민들과 시비가 붙었다. 1945년 일본이 물러간 후 타이완에 진주한 국부군(國府軍)의 강권통치에 불만을 품어온 시민들은 이튿날부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군경의 발포로 상황이 악화되자 본토에서 병력이 증파됐다. 5월 중순 상황이 완전히 진정될 때까지 타이완 전역에서 3만여 명이 학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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