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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WATCH

한국의 누각(樓閣)

한국의 3대 누각, 진주 촉석루와 밀양 영남루에 서서

글·사진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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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사라질 때쯤 진주성 주변의 야경(夜景)이 시작된다.
경상남도 진주 촉석루 바로 앞에 있는 바위가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으로 투신했다는 의암(義巖)이다.
  우리 전통 건축의 백미(白眉)가 누(樓)와 정(亭)과 대(臺)다. 누정(樓亭)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툭 트인 건물을 말하는데 층수에 따라 구분된다. 정은 1층이며 누는 2층이다. 누를 누각(樓閣)이라고 하는 것은 1층의 각이 2층의 누를 지탱하기 때문이다. 누정과 비슷한데 다른 게 대(臺)다.
 
  대는 건물을 이르기 이전에 높은 지대의 평평한 땅을 말한다. 강릉 경포대나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를 보면 그 말뜻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누 가운데 구분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한국의 3대 누각’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남쪽의 경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평양의 부벽루다.
 
밀양의 영남루에는 명사들이 써 놓은 현판이 가득하다.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名勝)이다. 전쟁 때에는 장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 고려 고종28년(1241년) 창건된 이래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1618년)에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했다.
 
  1948년 국보로 지정된 바 있으나 1950년 6·25 동란으로 다시 불탔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 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중건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누대이다. 촉석루란 이름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며 남장대 또는 장원루라 부르기도 했다.
 
진주 촉석루에서 의암으로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다.
  촉석루가 유명해진 것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절대 열세인 병력을 이끌고 거둔 진주성 대첩과, 의기(義妓) 논개가 적장(敵將)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린 일 때문이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진주성 건너편에 서면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 속 촉석루가 그림같이 빛을 밝힌다.
 
  밀양 영남루는 신라 경덕왕 때 ‘영남사’라는 절이 폐사되자 고려 공민왕 때 당시 밀양군수 김주가 신축한 뒤 영남루라 불렀다. 조선 세조 5년(1459년) 밀양부사 강숙경이 규모를 늘렸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다. 인조 때 중건했고 순조 때 다시 불탔으나 현종 10년(1844년) 개창한 것이 지금 남아 있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만대루(晩對樓)는 누각의 백미로 꼽힌다.
  전국에는 3대 누각에 버금갈 만한 누들이 많이 남아 있다. 전북 남원의 광한루는 인조 16년(1638년) 재건한 조선을 대표하는 누각이다. 원래 조선 초에 지어진 이 건물은 1419년 남원으로 유배 온 명재상 황희가 세워 광통루라 불리던 것을 1434년 정인지가 중건하며 광한루라 이름을 바꿨다.
 
  정인지는 광한루를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했는데, 광한청허부는 달나라의 옥황상제가 사는 궁전을 뜻한다.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으로 칭하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만듦새가 빼어나다. 이 밖에도 전국의 서원·사찰에 유명한 누각들이 많다.⊙
 
밀양 영남루는 최근 복원공사를 마쳤다.

전라북도 남원의 광한루는 조선초 명재상 황희가 지은 것이다.

광한루 앞의 오작교다. 이몽룡과 성춘향이 나눈 로맨스의 무대다.

촉석루는 임진왜란 때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성 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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