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侖世
1955년생.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現 한국고전번역원) 졸업 / (주)인산가 회장, 《인산의학저널》 발행인, 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월간조선》 명예기자 / 저서 《인도》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네》 《자연치유에 몸을 맡겨라》 《내 안의 자연이 나를 살린다》 등
1955년생.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現 한국고전번역원) 졸업 / (주)인산가 회장, 《인산의학저널》 발행인, 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월간조선》 명예기자 / 저서 《인도》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네》 《자연치유에 몸을 맡겨라》 《내 안의 자연이 나를 살린다》 등

- 사진=게티이미지
유월비상설 혼신냉사철
聲搖洞壑心 色奪虛空骨
성요동학심 색탈허공골
유월 하늘에 서릿발·눈발이 흩날리니
쇠처럼 찬 기운, 온몸을 휘감는다
폭포수 굉음은 빈 골짜기 마음을 뒤흔들고
세찬 물줄기는 하얀 허공의 뼈를 드러낸다
조선 중기의 고승 청허 휴정(淸虛休靜·1520~1604년) 선사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지리산 남쪽 기슭의 불일폭포를 보고 읊은 시이다. 휴정 선사는 서산(西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묘향산에 주로 주석해 법호 법명보다는 ‘서산’이라는 별호로 더욱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불일폭포는 지리산 10경 중 하나로 상불재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서쪽으로 흐르다 곧이어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형성된 소지류에 자리 잡고 있으며, 폭포에서 떨어져 흐르는 물줄기는 하류 지점의 쌍계사 계곡으로 흘러든 뒤 화개천을 거쳐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불일폭포와 그 일대는 다양한 식생과 기암괴석, 계곡이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으로, 오랜 옛적부터 신선(神仙) 사상의 전형적 공간이자 우리 민족의 이상향인 청학동(靑鶴洞)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불일폭포를 ‘청학동 폭포’라고도 부른다.
고려 때 보조 지눌(普照知訥·1158~1210년) 국사(國師)는 지리산 남녘의 거대한 폭포 입구에 있는 암자에서 수도를 하였는데, 고려 제21대 왕인 희종(熙宗)이 국사의 덕망과 불심(佛心)에 감동하여 그가 입적한 뒤 ‘불일 보조(佛日普照)’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에 따라 세인들은 그가 수도한 암자를 불일암(佛日庵), 인근에 있는 폭포를 ‘불일폭포’라고 일컬었다. 쌍계사에서 불일폭포에 이르는 지역은 통일신라 진감(眞鑑) 선사 유적과 쌍계사 입구 바위에 새긴 최치원(崔致遠)의 글씨 쌍계석문(雙磎石文)을 비롯해 스님들이 왕래하던 옛길과 불일암, 국사암(國師庵), 환학대(喚鶴臺), 완폭대(翫瀑臺) 등 옛 명승 자원이 현존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불일폭포는 좌측의 청학봉(靑鶴峰)과 우측의 백학봉(白鶴峰) 사이의 협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60여 미터에 이르며 주변의 기암괴석이 잘 어우러져 장엄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폭포수가 토해내는 ‘진리의 사자후’
휴정 선사는 평남 안주 출신으로,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安州) 군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15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으며 20세 무렵, 성균관 유생(儒生)으로 지리산을 유람하던 중, 의신골 원통암(圓通庵)에 들렀다가 숭인(崇仁) 장로의 법문을 듣고 출가했다.
이 젊은 유생은 과거 급제를 통해 벼슬길에 오르려던 꿈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아름다운 별천지 지리산 품 안으로 입산하여 ‘심공급제(心空及第)’를 통해 고해(苦海)를 건너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으로 가서 자신을 구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사바(娑婆)세계에서 벗어나 문득 깨달은 바 있어 들어간 마음의 고향 지리산에서 어느 날 ‘새로운 자아(自我)’로 다시 태어나 일체의 속박(束縛)으로부터 해탈(解脫)한 ‘대자유(大自由)의 존재’는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다’라는 관념을 초월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휴정 선사는 어느 해 여름 인근 불일폭포에 들렀다가 폭포수가 토해내는 사자후(獅子吼)를 듣고 허공중에 드리운 하얀 물줄기의 실상(實相)을 보면서 그 감회를 시로 읊었다.
한여름 6월인데도 지리산 깊은 골의 절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폭포수의 하얀 물가루는 서릿발·눈발처럼 허공에 흩날리고 쇠처럼 찬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다.
새로운 안목으로 본 불일폭포의 장엄한 모습은 그저 아름다운 풍광(風光)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소리는 모든 소리를 다 삼키며 토해내는 ‘진리의 사자후’요, 하얗게 드러나는 폭포의 물줄기는 일체의 상(相)을 여읜 ‘무상(無相)의 법신(法身)’이 그 실상을 드러내 보여주는 ‘허공의 뼈’라 하겠다.
관광길에 오른 사람들 대부분은 높은 바위 벼랑에서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폭포를 보면서 지형의 낙차에 의해 하얀 물줄기가 허공으로 내닫는 장관(壯觀)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감동 어린 말과 글을 쏟아낸다. 이 장엄한 광경을 기행문이나 시로 표현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느낀 감회를 전하여 공유하기 위함이다.
이에 반하여 휴정 선사의 이 시는 다른 많은 시인, 묵객이 보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무상세계의 실상을 보고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는, 들리지 않는 법문, 즉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소리 없는 법문(無聲法門)’을 들으며 그 감회를 언어 문자로 그려낸 한 폭의 수채화라 하겠다.
임진왜란 때 승병 일으켜 나라 구해
휴정 선사는 출가 이후 뒷날 부용 영관(芙蓉靈觀·1485~1571년)을 스승으로 모시고 10여 년 동안 수행했으며 영관의 법을 이어받은 후 금강산·묘향산 등지에서 수행을 이어갔다.
선사는 33세 되던 해(1552년, 명종 7년)에 새로 부활한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었고, 3년 만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으나 2년 후에 그 직책을 사양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40대 후반에서 60대 후반에 이르는 동안 묘향산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지도했는데, 그에게 당대의 뛰어난 제자 1000여 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선사는 73세 되던 해(1592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를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보내 승군(僧軍)을 모집했으며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서 승군을 지휘해 평양성을 탈환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 뒤 선사는 선조 37년(1604년) 정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제자인 사명(四溟)과 처영(處英)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니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