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인종 청소’ 하지 않는 한 헤즈볼라 없애지 못할 것
⊙ 1000년 이상 된 종교 공동체들… 레바논이라는 국가가 기능하지 못할수록 종파별 응집력 더욱 강해져
⊙ 헤즈볼라, 레바논 내전 이후 이란 혁명 영향으로 탄생… ‘국가 안의 국가’
⊙ 성경 속 두로(티레)와 시돈… 페르시아·로마·이슬람 제국이 거쳐간 ‘제국의 통로’
⊙ 1932년 인구 조사 결과 바탕으로 마론파, 수니파, 시아파가 권력 분점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 1000년 이상 된 종교 공동체들… 레바논이라는 국가가 기능하지 못할수록 종파별 응집력 더욱 강해져
⊙ 헤즈볼라, 레바논 내전 이후 이란 혁명 영향으로 탄생… ‘국가 안의 국가’
⊙ 성경 속 두로(티레)와 시돈… 페르시아·로마·이슬람 제국이 거쳐간 ‘제국의 통로’
⊙ 1932년 인구 조사 결과 바탕으로 마론파, 수니파, 시아파가 권력 분점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 지난 10월 1일 이스라엘군이 레바논을 침공했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을 바라보는 베이루트 시민. 사진=AP/뉴시스
가자 지구를 둘러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나고 있다. 피로 피를 씻는 전쟁이 그칠 줄 모르는 가운데, 분쟁은 계속해서 중동(中東)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 4월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있는 이란 영사관을 공격하자, 이란은 이스라엘 본토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후 7월 31일에는 하마스의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가 테헤란에서 이스라엘에 의하여 암살되며 이스라엘-이란 사이의 긴장이 최고조로 올랐다. 다행히 이란이 보복을 절제하며 최악의 위기는 피한 것으로도 보였다. 그러나 불길은 계속 타올랐다.
무대는 이스라엘 북쪽의 레바논이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의 시아파 조직 ‘헤즈볼라’에 대한 강공을 연달아 가하면서, 신문과 뉴스 어디에서나 헤즈볼라라는 말이 계속 오르내리고 있다. 9월 17일에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조직원이 소지한 무선호출기(삐삐)를 동시에 폭발시키며 이 조직에 타격을 입혔다. 이후에 공습을 강화하며 9월 27일에는 헤즈볼라의 수장인 하산 나스랄라(1960~2024년)를 사살했다. 10월 1일에는 마침내 이스라엘군이 국경을 넘어 지상군을 진입시키며 분쟁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이제 사람들은 헤즈볼라를 오랫동안 후원해온 이란이 이스라엘의 강공에 어떻게 대응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자연스럽게 이스라엘과 대결해온 헤즈볼라의 기원과 정체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헤즈볼라를 향한 관심은 사태의 주요한 배경을 간과하는 것이기도 하다. 헤즈볼라는 국가도 아니고, 정부도 아니다. ‘신(神)의 당(黨)’이라는 조직의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기본적으로 정당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개 정당이 영토와 국민을 통제하며, 정부와 상관없이 이스라엘과 계속해서 군사적 대립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일까.
제국의 통로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사실 헤즈볼라가 탄생하고 뿌리를 내린 땅에 자리한 국가, 레바논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레바논은 1만㎢로 경상남도와 비슷한 면적에, 서울시의 절반인 53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아랍의 소국(小國)이지만, 근현대 중동의 진로를 결정한 진원지나 다름없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레바논이라는 국명은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레바논 산지에서 유래했다. 산지의 자랑인 백향목(柏香木)은 고대(古代)부터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상을 지녀 오늘날 레바논 국기 한가운데에 그려져 있다. 레바논 산지는 최고봉이 3000m에 달하는 험준한 지역이지만, 동시에 고대 문명의 교차로인 레반트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명이 발달했다. 오늘날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스라엘을 포괄하는 지역인 레반트는 그리스, 이집트, 페르시아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요충지(要衝地)였다. 자연스럽게 레반트의 지중해 해안 지역은 지중해 세계 전체와 근동(近東) 문명의 물산이 교류하는 무역항으로 성장하였는데, 성경에도 오늘날 레바논의 주요 도시이기도 한 티레(성경에는 ‘두로’ ‘띠로’라고 되어 있음)와 시돈의 부유함이 언급될 정도였다.
이렇게 레바논의 특수성도 험준한 산지 속 깊은 골짜기, 문명을 연결하는 부유한 해안 항구의 공존을 통해 형성되었다. 레반트는 자체적인 권력을 형성하기보다는 제국의 군대, 관료, 성자(聖者)들이 장악해야만 하는 통로일 때가 많았다. 페르시아 제국, 로마 제국, 아랍 이슬람 제국을 비롯한 숱한 제국이 레반트를 통치하며 다양한 흔적을 남겼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물론이고 각 종교의 수많은 종파와 새로 생겨나는 신흥 종교들이 레반트에 자리를 잡았으며, 이들 집단은 자신들을 후견해주는 외부의 제국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외세에 의존해온 여러 종파
이러한 레반트의 다양성은 레바논 산지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 숱한 종교와 종파(宗派)가 높은 산이 만들어주는 골짜기에 촌락을 형성하며 정착했다. 각 마을은 해안의 티레, 시돈, 트리폴리 등 항구 도시로 나와 물산을 거래하며 인근 골짜기의 다른 마을과 다양한 사회적 유대를 맺고 갈등하곤 했다.
특히 이슬람의 물결 이후에도 레바논 산지에서 잔존한 기독교는 레바논을 인근 중동 국가와 구별 짓는 주요한 요소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하에서 레바논 산지에는 동방정교회가 주요한 신앙이 되었지만, 곧이어 레바논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독교 분파인 마론파 교회가 형성되며 레바논의 중심 종교로 자리 잡았다. 물론 이슬람의 유입 역시 강력하여 레바논 산지 각지에 무슬림 개종자들이나 이주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주류 종파인 수니파 이외에 소수 종파인 시아파도 레바논 산지에서 피란처를 찾으며 세력을 구축했다. 여기에 더해 중세(中世)에는 시아파에서 분기하여 아예 신종교를 창건하는 드루즈 운동이 시작돼 오늘날 레바논 인구의 5%를 점유하는 독특한 드루즈 집단도 생겨났다. 모자이크를 방불케 하는 레바논의 각 집단은 외부에서 자신들의 동맹을 찾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정교회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마론파 기독교는 중세에 대거 유입된 십자군 세력에 협력하며 서유럽에서 후원 네트워크를 찾았다. 시아파는 처음에는 레반트를 통치한 이집트의 시아파 파티마 왕조에 기댔고, 훗날에는 이란을 통일한 시아파 대제국인 사파비 제국과 연대를 구축했다. 수니파에는 정통 칼리프의 계승자를 표방하며 레바논을 300년 이상 통치한 오스만 제국이 있었다. 드루즈도 이 종파 간의 경쟁 구도를 활용하여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構築)했고, 오스만 제국에서 레바논을 통치하는 세습 영주의 자리를 얻어내기도 했다. 각 종파가 외부 후원자를 동원하며 복잡다단한 네트워크를 확장해가는 레바논의 전형적인 모습이 자리를 잡아나갔다.
마론파 기독교와 서구의 만남
오스만 제국은 역내(域內)의 수많은 집단을 종교로 구분하고, 각 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사법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자치를 제공하는 밀레트 시스템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레바논 역시 산과 해안의 다양한 부족, 종파 지도자들의 협상과 합의를 통해 일정 정도의 자치를 누렸다.
하지만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불안정해지고 서구 열강이 침투하면서 레바논은 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1830년대 이집트 세력과 오스만 중앙 정부가 갈등을 빚으며 레반트의 지역 질서가 요동을 쳤고, 레바논에서는 마론파 기독교와 드루즈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다. 양측의 갈등은 1860년에 레바논 산지를 넘어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번져나갔다. 승기를 잡은 드루즈에 의한 마론파 학살이 가시화되자, 각지의 마론파 인구는 피란처를 찾아 새롭게 부상(浮上)하고 있던 항구 도시 베이루트로 몰려들었다.
이미 오스만 제국 깊숙이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유럽 열강, 그중에서도 프랑스는 ‘기독교인 보호’라는 대의(大義)를 위하여 레바논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필요를 느꼈다. 1860년 프랑스군이 레바논에 진주(進駐)하기 시작했다. 1861년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을 일종의 ‘레바논 특별 행정 지역’으로 재분류하고, 다양한 종교 집단의 합의를 지방 행정에 더 적극적으로 반영하기로 하며 통치권을 회복했다.
내전(內戰)과 학살을 계기로 마론파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종교적 유대 관계로 프랑스에 기대기 시작한 마론파는 더 나아가서 발전하는 서구 문명에 접촉하기 시작했다. 무슬림이 다수였던 도시인 베이루트에는 기독교인이 이주를 시작했다. 프랑스 선교사를 시작으로 상인들이 자본을 들고 베이루트를 찾았다. 베이루트는 증기선이 기항하는 동지중해의 중심 무역항이 되면서 시돈, 티레, 트리폴리 같은 인근 도시를 제치기 시작했다. 레바논 산지의 마론파는 비단 생산에 집중하며 서구 시장에 수출을 시작했다. 늘어난 소득을 바탕으로 마론파 집단의 인구가 늘어났으며, 교육 기회와 의지도 대폭 신장되었다.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미국 등 서구 각국이 세운 근대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은 레바논의 상인과 전문직, 지식인 집단을 형성했다. 도시에는 노면 전차가 다니고, 가스등이 설치되며 일상생활의 풍경도 달라졌다.
칼릴 지브란
서구가 들어온 것 이상으로 마론파 집단은 세계로 나가기 시작했다. 비단 수출이 타격을 받고 오스만 제국 내부의 종교 분쟁이 심화되자, 더 나은 삶을 찾고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이민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이들이 주로 향한 곳은 남미(南美)였다. 이 영향으로 오늘날에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레바논계 인구는 수백만에 달하고 본국 인구보다 많을 정도다. 마론파를 주축으로 한 레바논 이민자 집단은 서구에 레바논 문화를 알렸고,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오며 외부 세계의 문물을 들여왔다. 1895년 미국으로 향하여 훗날 세계적 대문호로 명성을 떨치는 《예언자》의 작가 칼릴 지브란(1883~1931년)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마론파는 서구 근대에 더 빠르게 적응해나가며 레바논의 수니파 및 시아파 무슬림을 넘어서는 확실한 주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종교 집단 간의 이 발전 격차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오스만 제국이 해체될 때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레바논을 포함한 레반트 지역은 이제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으로서 프랑스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민족 정체성(正體性)이 확실하지 않고 다양한 종교 집단이 흩어져 있는 레반트의 행정구역을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문제로 떠올랐다. 시리아에서는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 ‘대(大)시리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레바논의 마론파와 정교회 등 기독교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무슬림과 드루즈를 포용하되, 기독교인이 주도하는 새로운 정치적 실체로서의 레바논을 꿈꾸었다. 레바논 기독교 지도자들의 요청과 프랑스의 수용이 맞물려 프랑스령 레바논이 탄생했다.
종파별 권력 분점과 ‘상인공화국’
하지만 위임 통치는 독립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헌법을 비롯한 독립 레바논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1926년, 각 종교 및 종파 집단에 권력을 배분하는 레바논 특유의 정치 질서를 명문화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1932년 인구조사가 이루어지며 종교와 종파 비율이 확정되었다.
이와 함께 프랑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에 처참하게 패배하며 레바논의 독립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3년 친독(親獨)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가 레바논에서 물러났다. 각 종파 지도자들이 합의한 ‘국민협정’이 체결되면서 드디어 독립 레바논이 등장했다. 마론파는 대통령직을, 수니파는 총리를, 시아파는 국회의장을 맡게 되었다.
누구도 권력을 독점할 수 없었기에 레바논은 중동에서 보기 드문 민주주의 국가로 출발할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이 보수적 이슬람을 고수하는 왕정(王政)으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가 국민을 동원하는 아랍사회주의로 변모했지만, 레바논은 19세기부터 쌓은 네트워크를 활용하며 ‘상인(商人)공화국’을 추구했다. 폐쇄적인 시리아와 아랍 국가와 단절된 이스라엘과 달리 레바논의 베이루트는 각지의 아랍 자본과 서구 자본이 만나는 허브였고, 세속적인 기독교 문화 덕택에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십분 활용한 휴양지 관광 산업도 빠르게 발전했다. 레바논은 마론파에만 국한되었던 근대화와 발전을 새로운 관료제를 통해 무슬림과 드루즈 공동체로도 확산시키며 문해율(文解率)도 대폭 향상되었다. 레바논은 그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아랍 문화를 대표하는 중심으로 우뚝 섰다.
갈등의 심화
그러나 독립 후 약 30년간 쌓은 레바논의 번영은 점점 기초가 흔들리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아직도 여전한 마론파의 우위가 문제가 되었다. 경제 발전의 과실(果實)을 대부분 마론파 자본가들과 유력 가문들이 차지하고, 무슬림, 그중에서도 특히 시아파들의 몫은 거의 없었기에 종교에 따른 경제적 격차와 소외감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1932년 이래로 한 번도 재실시된 적이 없는 인구조사도 문제가 되었다. 무슬림 집단은 근대 보건의 혜택을 받으며 인구 성장을 경험했고, 이들은 새로운 인구 통계에 근거한 권력 분배의 재조정을 요구했다. 물론 인구학적 위기를 느낀 마론파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리는 만무했다.
레바논을 둘러싼 주변국의 상황은 국내적인 단층선(斷層線)을 격렬하게 활성화시켰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며 이스라엘과 가장 가까운 레바논 역시 그 영향에 계속 노출되었다. 가장 가시적인 변화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대거 유입이었다.
주로 수니파 무슬림이었던 이들은 이스라엘 인근 레바논과 요르단에 정착했고,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한 대이스라엘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고도로 정치화된 팔레스타인 조직들은 요르단에서는 국내 안정을 해친다는 이유로 소탕되었으나, 권력이 파편화된 레바논에서는 번창할 수 있었다. 특히 수니파 레바논인과 아랍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일부 시아파 레바논인이 팔레스타인 운동을 지지했다.
하지만 마론파는 이스라엘과의 군사적 분쟁에 휘말려 경제 활동이 위협받는 것을 원치 않았고, 기독교인의 공간이 팔레스타인 이주민들에 의해 축소되고 있다고 걱정했다. 게다가 이스라엘이 마론파가 주축이 된 카타이브당을 지원하고, 시리아가 레바논국민운동을 지원하며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레바논 내전과 헤즈볼라의 탄생
1975년이 되었을 때, 레바논의 폭력 사태들은 연쇄적인 보복을 부르며 내전으로 비화(飛火)했다. 최소 30년간 쌓인 불만과 공포가 쏟아져 나오며 참혹한 폭력이 레바논 전역을 뒤덮었다.
레바논의 불안정은 당연히 외세의 개입을 촉발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반(反)이스라엘 세력을 정리하기 위해 1978년과 1982년에 레바논 남부에 군대를 투입했다. 시리아도 평화 유지를 명목으로 레바논 북동부에 군대를 주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 두 국가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레바논 국내 정치 세력과 미소(美蘇) 양대 초강대국, 프랑스, 이집트 등 주요 국가들이 개입하며, 동지중해의 보석 레바논은 불길의 중심이 되었다. 1989년에 기독교-무슬림 권력 배분을 다시 조정하는 타이프 협정이 체결되면서 레바논 내전은 간신히 종식되었다.
레바논 내전은 ‘신의 정당’이라는 이름의 헤즈볼라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레바논 남부에 자리한 시아파 인구는 레바논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소외된 집단이었으며, 무엇보다 레바논 내전으로 격화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 휘말려 생존도 위협받게 되었다. 이들은 시아파 성직자들이 정권을 장악한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에서 강한 영감(靈感)을 받았다. ‘억압받는 자들의 투쟁’을 강조하는 호메이니(1902~1989년)의 혁명 사상이 레바논 시아파 사이에서 확산되면서, 레바논 남부를 점령한 이스라엘과 그를 비호하는 미국을 향한 시아파의 무장투쟁이 개시되었다. 이들의 행동에 고무된 이란의 혁명 정권은 혁명수비대를 파견하여 지원했다.
1985년이 되었을 때 시아파 정치 조직은 헤즈볼라와 통합을 이루었다. 앞서 1983년 베이루트의 미국 대사관을 상대로 자살폭탄 테러를 자행하고, 이스라엘을 향해 끝없는 게릴라 전쟁을 벌이며 헤즈볼라는 테러 조직이라는 악명(惡名)과 반제국주의 전사(戰士)라는 명성을 동시에 얻었다. 타이프 협정 이후 레바논이 재건되는 과정에서도 헤즈볼라는 남부 지역의 이스라엘과 계속 군사적 충돌을 벌였으며, 2006년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을 ‘패퇴시켰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후견 네트워크
어쨌든 타이프 협정은 다원성의 가치를 공유하는 레바논을 다시 발전 궤도에 올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레바논의 불안정과 시아파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사우디아라비아가 재건 과정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자 노력하며 수니파 집단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사우디 시민권자이기도 한 사업가 라피크 하리리(1944~2005년)는 총리로 재임하며 재건 정국을 이끌었다. 베이루트가 다시 복원되고, 서구화되고 자유로운 레바논 대중문화가 아랍 세계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 데뷔한 베이루트 출신 여가수 낸시 아즈람은 파격적인 의상과 노래를 선보이며 ‘아랍 팝의 여왕’이자 레바논의 상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경제 재건은 내전으로 드러난 파편화된 정치까지 복구하지는 못했다. 각 종파 집단은 정치인, 기업가, 사회단체, 외부 세력을 아우르는 거대한 후견 네트워크를 발전시켰다. 이 후견 네트워크는 레바논의 국민적 통합을 가로막았고,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을 소외시켰다.
정치인이자 자본가 라피크 하리리와 연계된 수니파 집단은 사우디 자본에 접속했다. 하산 나스랄라가 이끄는 헤즈볼라 및 시아파 집단은 자체적인 군사력을 유지한 채 이란과 연계하며 영향력을 확보했다. 레바논 건국을 주도했던 기독교인들은 서구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자신들만의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레바논 전국에서 몰려든 이주민들로 가득 찬 베이루트는 레바논의 축소판이 되었다. 종파별로 베이루트의 골목을 점유하며 공동체 간의 긴장과 단절이 커졌다. 국가의 통합적인 행정은 불가능했다.
헤즈볼라, IS와 싸우며 명성 떨쳐
결국에는 헤즈볼라와 시리아 문제를 둘러싸고 레바논의 정치적 갈등이 이어졌다. 2005년 라피크 하리리 총리가 암살되면서 시리아 책임론이 불거졌다. 대규모 시위대가 거리로 나와 레바논 주둔 시리아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를 주도한 정당은 3월 14일 동맹을 결성하고, 나아가 헤즈볼라의 무장 해제까지 요구했다. 반면 헤즈볼라와 다른 정당들은 3월 8일 동맹을 만들어 대항했다. 그러나 두 동맹 모두 종파 간 불신을 깨고 레바논 국가 통합을 이루어내는 청사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한편 2011년 아랍 봉기로 중동 전체가 격랑으로 빠져들자 헤즈볼라에는 기회의 순간이 찾아왔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 국민의 저항을 무력(武力)으로 분쇄하려 들면서 시리아는 순식간에 내전으로 치달았다. 아사드 정권의 구원을 선택한 헤즈볼라의 결정은 처음에는 엄청난 비난을 들었지만, 곧 시리아 내전이 반인도적 극단주의 조직인 ISIS(이슬람국가·IS)와의 싸움으로 변하며 상황이 반전(反轉)되었다. 아사드 정권이 ISIS에 무너진다면 광신적(狂信的) 테러 조직이 모든 레바논인을 다음 목표로 삼을 수도 있었다. 초기의 비난은 곧 헤즈볼라의 분투로 명성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예멘의 무장단체 후티를 지원하고 이란의 대전략에 보조를 맞추면서 ‘이란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주요 자금줄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레바논을 이란의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협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경제와 사회 위기도 가시화되고 있었다. 2019년 10월 17일 레바논 국민들이 종파 분열을 극복하고 레바논을 다시 통합하자고 외치는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감동적인 순간에도 불구하고 권력 구조의 본질적인 변화는 없었다.
2020년 베이루트 항구에서 초대형 폭발이 일어나며 레바논 경제의 중심인 베이루트가 반파(半破)되었을 때도, 레바논 정부는 복구에 실패하며 계속해서 무능을 보여주었다. 효과적 정부가 들어서는 대신 국내외의 갈등이 얽히고설키며 레바논의 갈등이 중동 전역, 나아가 세계로 비화하는 기존의 패턴이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으로 반복될 모양새다.
이스라엘, 헤즈볼라 제거 못 할 것
이제 확대되는 전쟁으로 헤즈볼라는, 나아가 레바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레바논의 주요 종파들은 짧아도 1000년 이상을 레바논 산지에 뿌리내린 공동체이며, 문명의 교차로로서 위치를 십분 활용해 외부 제국들과 각자 다양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이는 다시 말해 전쟁으로 레바논이라는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해도, 레바논 각 종파의 응집력은 그럴수록 더 단단히 뭉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레바논의 주요 집단은 모두 해외 디아스포라부터 각자의 후원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네트워크에 기대고 있고, 오랜 종교적 권위와 역사는 계속해서 사회적 결속력을 제공한다.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를 제거하려면 그들이 통치 질서를 구축한 남부 레바논의 150만 명에 달하는 시아파 인구 전체를 통제해야 하는데, 이는 인종 청소라도 감행하지 않는 이상 이스라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러나 헤즈볼라의 생존과 레바논의 미래는 동의어가 아니다. ‘국가 안의 국가’인 헤즈볼라의 군사력은 다른 종파 집단에 불신을 안겨주며 레바논의 통합을 계속 방해하고 있다. 게다가 불안정이 지속되며 기독교인 인구가 떠나간다면 레바논을 특징짓는 다종교적인 풍경도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구(舊)유고연방처럼 이리저리 흩어진 개별 집단에 따라 분리할 수도 없다. 종파적 정체성을 넘어서는 레바논인의 정체성은 여전히 확고하며, 수도 베이루트도 수많은 공동체가 공존하는 요람이다.
어쩌면 먼 미래에나 꿈꿔볼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레바논의 각 종파를 후원하는 후견국들까지 참여하는 거국적(擧國的)인 타협일 것이다. 그러나 후견국들의 셈법은 모두 제각각이며, 특히 서구와 이란은 당분간 지정학적 갈등을 지속할 것이 분명하여 이마저도 정말 ‘꿈’일 수밖에 없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이스라엘과의 갈등이다. 이란과의 갈등은 물론이고 팔레스타인 문제, 헤즈볼라와의 셰바 농장 분쟁, 시리아의 골란고원 점령 등 이스라엘을 둘러싼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리고 이 갈등이 해소되기까지 헤즈볼라는 결코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계속해서 군사적 충돌을 감수하며 레바논 시아파를 통솔, 이란의 후원을 끌어들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반대로 지정학적 공포가 해소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헤즈볼라 및 이란과의 충돌을 선택할 것이다. 전형적인 안보 딜레마다.
이러한 이유로 당분간 레바논을 둘러싼 이 비극은 계속될 것 같다. 외부인은 그저 화염이 레바논 땅과 사람들을 모두 삼켜 잿더미로 만들기 전에 일단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대는 이스라엘 북쪽의 레바논이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의 시아파 조직 ‘헤즈볼라’에 대한 강공을 연달아 가하면서, 신문과 뉴스 어디에서나 헤즈볼라라는 말이 계속 오르내리고 있다. 9월 17일에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조직원이 소지한 무선호출기(삐삐)를 동시에 폭발시키며 이 조직에 타격을 입혔다. 이후에 공습을 강화하며 9월 27일에는 헤즈볼라의 수장인 하산 나스랄라(1960~2024년)를 사살했다. 10월 1일에는 마침내 이스라엘군이 국경을 넘어 지상군을 진입시키며 분쟁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이제 사람들은 헤즈볼라를 오랫동안 후원해온 이란이 이스라엘의 강공에 어떻게 대응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자연스럽게 이스라엘과 대결해온 헤즈볼라의 기원과 정체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헤즈볼라를 향한 관심은 사태의 주요한 배경을 간과하는 것이기도 하다. 헤즈볼라는 국가도 아니고, 정부도 아니다. ‘신(神)의 당(黨)’이라는 조직의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기본적으로 정당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개 정당이 영토와 국민을 통제하며, 정부와 상관없이 이스라엘과 계속해서 군사적 대립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일까.
제국의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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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의 지도와 백향목을 상징하는 국기. |
이렇게 레바논의 특수성도 험준한 산지 속 깊은 골짜기, 문명을 연결하는 부유한 해안 항구의 공존을 통해 형성되었다. 레반트는 자체적인 권력을 형성하기보다는 제국의 군대, 관료, 성자(聖者)들이 장악해야만 하는 통로일 때가 많았다. 페르시아 제국, 로마 제국, 아랍 이슬람 제국을 비롯한 숱한 제국이 레반트를 통치하며 다양한 흔적을 남겼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물론이고 각 종교의 수많은 종파와 새로 생겨나는 신흥 종교들이 레반트에 자리를 잡았으며, 이들 집단은 자신들을 후견해주는 외부의 제국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외세에 의존해온 여러 종파
이러한 레반트의 다양성은 레바논 산지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 숱한 종교와 종파(宗派)가 높은 산이 만들어주는 골짜기에 촌락을 형성하며 정착했다. 각 마을은 해안의 티레, 시돈, 트리폴리 등 항구 도시로 나와 물산을 거래하며 인근 골짜기의 다른 마을과 다양한 사회적 유대를 맺고 갈등하곤 했다.
특히 이슬람의 물결 이후에도 레바논 산지에서 잔존한 기독교는 레바논을 인근 중동 국가와 구별 짓는 주요한 요소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하에서 레바논 산지에는 동방정교회가 주요한 신앙이 되었지만, 곧이어 레바논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독교 분파인 마론파 교회가 형성되며 레바논의 중심 종교로 자리 잡았다. 물론 이슬람의 유입 역시 강력하여 레바논 산지 각지에 무슬림 개종자들이나 이주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주류 종파인 수니파 이외에 소수 종파인 시아파도 레바논 산지에서 피란처를 찾으며 세력을 구축했다. 여기에 더해 중세(中世)에는 시아파에서 분기하여 아예 신종교를 창건하는 드루즈 운동이 시작돼 오늘날 레바논 인구의 5%를 점유하는 독특한 드루즈 집단도 생겨났다. 모자이크를 방불케 하는 레바논의 각 집단은 외부에서 자신들의 동맹을 찾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정교회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마론파 기독교는 중세에 대거 유입된 십자군 세력에 협력하며 서유럽에서 후원 네트워크를 찾았다. 시아파는 처음에는 레반트를 통치한 이집트의 시아파 파티마 왕조에 기댔고, 훗날에는 이란을 통일한 시아파 대제국인 사파비 제국과 연대를 구축했다. 수니파에는 정통 칼리프의 계승자를 표방하며 레바논을 300년 이상 통치한 오스만 제국이 있었다. 드루즈도 이 종파 간의 경쟁 구도를 활용하여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構築)했고, 오스만 제국에서 레바논을 통치하는 세습 영주의 자리를 얻어내기도 했다. 각 종파가 외부 후원자를 동원하며 복잡다단한 네트워크를 확장해가는 레바논의 전형적인 모습이 자리를 잡아나갔다.
마론파 기독교와 서구의 만남
오스만 제국은 역내(域內)의 수많은 집단을 종교로 구분하고, 각 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사법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자치를 제공하는 밀레트 시스템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레바논 역시 산과 해안의 다양한 부족, 종파 지도자들의 협상과 합의를 통해 일정 정도의 자치를 누렸다.
하지만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불안정해지고 서구 열강이 침투하면서 레바논은 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1830년대 이집트 세력과 오스만 중앙 정부가 갈등을 빚으며 레반트의 지역 질서가 요동을 쳤고, 레바논에서는 마론파 기독교와 드루즈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다. 양측의 갈등은 1860년에 레바논 산지를 넘어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번져나갔다. 승기를 잡은 드루즈에 의한 마론파 학살이 가시화되자, 각지의 마론파 인구는 피란처를 찾아 새롭게 부상(浮上)하고 있던 항구 도시 베이루트로 몰려들었다.
이미 오스만 제국 깊숙이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유럽 열강, 그중에서도 프랑스는 ‘기독교인 보호’라는 대의(大義)를 위하여 레바논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필요를 느꼈다. 1860년 프랑스군이 레바논에 진주(進駐)하기 시작했다. 1861년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을 일종의 ‘레바논 특별 행정 지역’으로 재분류하고, 다양한 종교 집단의 합의를 지방 행정에 더 적극적으로 반영하기로 하며 통치권을 회복했다.
내전(內戰)과 학살을 계기로 마론파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종교적 유대 관계로 프랑스에 기대기 시작한 마론파는 더 나아가서 발전하는 서구 문명에 접촉하기 시작했다. 무슬림이 다수였던 도시인 베이루트에는 기독교인이 이주를 시작했다. 프랑스 선교사를 시작으로 상인들이 자본을 들고 베이루트를 찾았다. 베이루트는 증기선이 기항하는 동지중해의 중심 무역항이 되면서 시돈, 티레, 트리폴리 같은 인근 도시를 제치기 시작했다. 레바논 산지의 마론파는 비단 생산에 집중하며 서구 시장에 수출을 시작했다. 늘어난 소득을 바탕으로 마론파 집단의 인구가 늘어났으며, 교육 기회와 의지도 대폭 신장되었다.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미국 등 서구 각국이 세운 근대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은 레바논의 상인과 전문직, 지식인 집단을 형성했다. 도시에는 노면 전차가 다니고, 가스등이 설치되며 일상생활의 풍경도 달라졌다.
칼릴 지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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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 지브란 |
마론파는 서구 근대에 더 빠르게 적응해나가며 레바논의 수니파 및 시아파 무슬림을 넘어서는 확실한 주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종교 집단 간의 이 발전 격차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오스만 제국이 해체될 때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레바논을 포함한 레반트 지역은 이제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으로서 프랑스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민족 정체성(正體性)이 확실하지 않고 다양한 종교 집단이 흩어져 있는 레반트의 행정구역을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문제로 떠올랐다. 시리아에서는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 ‘대(大)시리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레바논의 마론파와 정교회 등 기독교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무슬림과 드루즈를 포용하되, 기독교인이 주도하는 새로운 정치적 실체로서의 레바논을 꿈꾸었다. 레바논 기독교 지도자들의 요청과 프랑스의 수용이 맞물려 프랑스령 레바논이 탄생했다.
종파별 권력 분점과 ‘상인공화국’
하지만 위임 통치는 독립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헌법을 비롯한 독립 레바논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1926년, 각 종교 및 종파 집단에 권력을 배분하는 레바논 특유의 정치 질서를 명문화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1932년 인구조사가 이루어지며 종교와 종파 비율이 확정되었다.
이와 함께 프랑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에 처참하게 패배하며 레바논의 독립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3년 친독(親獨)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가 레바논에서 물러났다. 각 종파 지도자들이 합의한 ‘국민협정’이 체결되면서 드디어 독립 레바논이 등장했다. 마론파는 대통령직을, 수니파는 총리를, 시아파는 국회의장을 맡게 되었다.
누구도 권력을 독점할 수 없었기에 레바논은 중동에서 보기 드문 민주주의 국가로 출발할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이 보수적 이슬람을 고수하는 왕정(王政)으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가 국민을 동원하는 아랍사회주의로 변모했지만, 레바논은 19세기부터 쌓은 네트워크를 활용하며 ‘상인(商人)공화국’을 추구했다. 폐쇄적인 시리아와 아랍 국가와 단절된 이스라엘과 달리 레바논의 베이루트는 각지의 아랍 자본과 서구 자본이 만나는 허브였고, 세속적인 기독교 문화 덕택에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십분 활용한 휴양지 관광 산업도 빠르게 발전했다. 레바논은 마론파에만 국한되었던 근대화와 발전을 새로운 관료제를 통해 무슬림과 드루즈 공동체로도 확산시키며 문해율(文解率)도 대폭 향상되었다. 레바논은 그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아랍 문화를 대표하는 중심으로 우뚝 섰다.
갈등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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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이 비교적 안정기이던 1958년에도 내부 갈등이 발생해 정정이 불안해지자 미국은 해병대를 투입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
게다가 1932년 이래로 한 번도 재실시된 적이 없는 인구조사도 문제가 되었다. 무슬림 집단은 근대 보건의 혜택을 받으며 인구 성장을 경험했고, 이들은 새로운 인구 통계에 근거한 권력 분배의 재조정을 요구했다. 물론 인구학적 위기를 느낀 마론파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리는 만무했다.
레바논을 둘러싼 주변국의 상황은 국내적인 단층선(斷層線)을 격렬하게 활성화시켰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며 이스라엘과 가장 가까운 레바논 역시 그 영향에 계속 노출되었다. 가장 가시적인 변화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대거 유입이었다.
주로 수니파 무슬림이었던 이들은 이스라엘 인근 레바논과 요르단에 정착했고,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한 대이스라엘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고도로 정치화된 팔레스타인 조직들은 요르단에서는 국내 안정을 해친다는 이유로 소탕되었으나, 권력이 파편화된 레바논에서는 번창할 수 있었다. 특히 수니파 레바논인과 아랍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일부 시아파 레바논인이 팔레스타인 운동을 지지했다.
하지만 마론파는 이스라엘과의 군사적 분쟁에 휘말려 경제 활동이 위협받는 것을 원치 않았고, 기독교인의 공간이 팔레스타인 이주민들에 의해 축소되고 있다고 걱정했다. 게다가 이스라엘이 마론파가 주축이 된 카타이브당을 지원하고, 시리아가 레바논국민운동을 지원하며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레바논 내전과 헤즈볼라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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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5일 베이루트 남부 교외에서 열린 헤즈볼라 사령관 이브라힘 코베이시와 후세인 에제딘의 장례식에 참석한 헤즈볼라. 헤즈볼라는 웬만한 나라의 정규군 못지않은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
레바논의 불안정은 당연히 외세의 개입을 촉발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반(反)이스라엘 세력을 정리하기 위해 1978년과 1982년에 레바논 남부에 군대를 투입했다. 시리아도 평화 유지를 명목으로 레바논 북동부에 군대를 주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 두 국가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레바논 국내 정치 세력과 미소(美蘇) 양대 초강대국, 프랑스, 이집트 등 주요 국가들이 개입하며, 동지중해의 보석 레바논은 불길의 중심이 되었다. 1989년에 기독교-무슬림 권력 배분을 다시 조정하는 타이프 협정이 체결되면서 레바논 내전은 간신히 종식되었다.
레바논 내전은 ‘신의 정당’이라는 이름의 헤즈볼라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레바논 남부에 자리한 시아파 인구는 레바논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소외된 집단이었으며, 무엇보다 레바논 내전으로 격화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 휘말려 생존도 위협받게 되었다. 이들은 시아파 성직자들이 정권을 장악한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에서 강한 영감(靈感)을 받았다. ‘억압받는 자들의 투쟁’을 강조하는 호메이니(1902~1989년)의 혁명 사상이 레바논 시아파 사이에서 확산되면서, 레바논 남부를 점령한 이스라엘과 그를 비호하는 미국을 향한 시아파의 무장투쟁이 개시되었다. 이들의 행동에 고무된 이란의 혁명 정권은 혁명수비대를 파견하여 지원했다.
1985년이 되었을 때 시아파 정치 조직은 헤즈볼라와 통합을 이루었다. 앞서 1983년 베이루트의 미국 대사관을 상대로 자살폭탄 테러를 자행하고, 이스라엘을 향해 끝없는 게릴라 전쟁을 벌이며 헤즈볼라는 테러 조직이라는 악명(惡名)과 반제국주의 전사(戰士)라는 명성을 동시에 얻었다. 타이프 협정 이후 레바논이 재건되는 과정에서도 헤즈볼라는 남부 지역의 이스라엘과 계속 군사적 충돌을 벌였으며, 2006년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을 ‘패퇴시켰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후견 네트워크
어쨌든 타이프 협정은 다원성의 가치를 공유하는 레바논을 다시 발전 궤도에 올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레바논의 불안정과 시아파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사우디아라비아가 재건 과정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자 노력하며 수니파 집단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사우디 시민권자이기도 한 사업가 라피크 하리리(1944~2005년)는 총리로 재임하며 재건 정국을 이끌었다. 베이루트가 다시 복원되고, 서구화되고 자유로운 레바논 대중문화가 아랍 세계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 데뷔한 베이루트 출신 여가수 낸시 아즈람은 파격적인 의상과 노래를 선보이며 ‘아랍 팝의 여왕’이자 레바논의 상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경제 재건은 내전으로 드러난 파편화된 정치까지 복구하지는 못했다. 각 종파 집단은 정치인, 기업가, 사회단체, 외부 세력을 아우르는 거대한 후견 네트워크를 발전시켰다. 이 후견 네트워크는 레바논의 국민적 통합을 가로막았고,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을 소외시켰다.
정치인이자 자본가 라피크 하리리와 연계된 수니파 집단은 사우디 자본에 접속했다. 하산 나스랄라가 이끄는 헤즈볼라 및 시아파 집단은 자체적인 군사력을 유지한 채 이란과 연계하며 영향력을 확보했다. 레바논 건국을 주도했던 기독교인들은 서구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자신들만의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레바논 전국에서 몰려든 이주민들로 가득 찬 베이루트는 레바논의 축소판이 되었다. 종파별로 베이루트의 골목을 점유하며 공동체 간의 긴장과 단절이 커졌다. 국가의 통합적인 행정은 불가능했다.
헤즈볼라, IS와 싸우며 명성 떨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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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베이루트시의 절반을 날려버린 폭발사고 이후 레바논인들은 베이루트를 방문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사진=AFP/연합뉴스 |
한편 2011년 아랍 봉기로 중동 전체가 격랑으로 빠져들자 헤즈볼라에는 기회의 순간이 찾아왔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 국민의 저항을 무력(武力)으로 분쇄하려 들면서 시리아는 순식간에 내전으로 치달았다. 아사드 정권의 구원을 선택한 헤즈볼라의 결정은 처음에는 엄청난 비난을 들었지만, 곧 시리아 내전이 반인도적 극단주의 조직인 ISIS(이슬람국가·IS)와의 싸움으로 변하며 상황이 반전(反轉)되었다. 아사드 정권이 ISIS에 무너진다면 광신적(狂信的) 테러 조직이 모든 레바논인을 다음 목표로 삼을 수도 있었다. 초기의 비난은 곧 헤즈볼라의 분투로 명성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예멘의 무장단체 후티를 지원하고 이란의 대전략에 보조를 맞추면서 ‘이란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주요 자금줄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레바논을 이란의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협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경제와 사회 위기도 가시화되고 있었다. 2019년 10월 17일 레바논 국민들이 종파 분열을 극복하고 레바논을 다시 통합하자고 외치는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감동적인 순간에도 불구하고 권력 구조의 본질적인 변화는 없었다.
2020년 베이루트 항구에서 초대형 폭발이 일어나며 레바논 경제의 중심인 베이루트가 반파(半破)되었을 때도, 레바논 정부는 복구에 실패하며 계속해서 무능을 보여주었다. 효과적 정부가 들어서는 대신 국내외의 갈등이 얽히고설키며 레바논의 갈등이 중동 전역, 나아가 세계로 비화하는 기존의 패턴이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으로 반복될 모양새다.
이스라엘, 헤즈볼라 제거 못 할 것
이제 확대되는 전쟁으로 헤즈볼라는, 나아가 레바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레바논의 주요 종파들은 짧아도 1000년 이상을 레바논 산지에 뿌리내린 공동체이며, 문명의 교차로로서 위치를 십분 활용해 외부 제국들과 각자 다양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이는 다시 말해 전쟁으로 레바논이라는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해도, 레바논 각 종파의 응집력은 그럴수록 더 단단히 뭉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레바논의 주요 집단은 모두 해외 디아스포라부터 각자의 후원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네트워크에 기대고 있고, 오랜 종교적 권위와 역사는 계속해서 사회적 결속력을 제공한다.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를 제거하려면 그들이 통치 질서를 구축한 남부 레바논의 150만 명에 달하는 시아파 인구 전체를 통제해야 하는데, 이는 인종 청소라도 감행하지 않는 이상 이스라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러나 헤즈볼라의 생존과 레바논의 미래는 동의어가 아니다. ‘국가 안의 국가’인 헤즈볼라의 군사력은 다른 종파 집단에 불신을 안겨주며 레바논의 통합을 계속 방해하고 있다. 게다가 불안정이 지속되며 기독교인 인구가 떠나간다면 레바논을 특징짓는 다종교적인 풍경도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구(舊)유고연방처럼 이리저리 흩어진 개별 집단에 따라 분리할 수도 없다. 종파적 정체성을 넘어서는 레바논인의 정체성은 여전히 확고하며, 수도 베이루트도 수많은 공동체가 공존하는 요람이다.
어쩌면 먼 미래에나 꿈꿔볼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레바논의 각 종파를 후원하는 후견국들까지 참여하는 거국적(擧國的)인 타협일 것이다. 그러나 후견국들의 셈법은 모두 제각각이며, 특히 서구와 이란은 당분간 지정학적 갈등을 지속할 것이 분명하여 이마저도 정말 ‘꿈’일 수밖에 없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이스라엘과의 갈등이다. 이란과의 갈등은 물론이고 팔레스타인 문제, 헤즈볼라와의 셰바 농장 분쟁, 시리아의 골란고원 점령 등 이스라엘을 둘러싼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리고 이 갈등이 해소되기까지 헤즈볼라는 결코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계속해서 군사적 충돌을 감수하며 레바논 시아파를 통솔, 이란의 후원을 끌어들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반대로 지정학적 공포가 해소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헤즈볼라 및 이란과의 충돌을 선택할 것이다. 전형적인 안보 딜레마다.
이러한 이유로 당분간 레바논을 둘러싼 이 비극은 계속될 것 같다. 외부인은 그저 화염이 레바논 땅과 사람들을 모두 삼켜 잿더미로 만들기 전에 일단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